歷史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 -안병직, 김우창, 노재봉, 신복룡, 이인호

이강기 2015. 10. 1. 22:39
[특집]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의


[오경섭 | 본지 편집장]
토론 주제
1. 산업화와 민주화
2. 체제의 선택
3. 종속과 국제 협력
4. 수단으로서의 권위주의
5. 건국과 이승만
6. 한국의 전망

사회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토론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노재봉 전 국무총리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이인호 카이스트 석좌교수

일시 2008년 4월 17일 오후 2~6시
장소 뉴라이트재단 회의실



1. 산업화와 민주화

안병직 바쁘신 가운데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종래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어딘가 결함이 많다, 대외의존적이라든지, 분단국가라든지 하는 지적이 많았는데 이런 점만을 강조하다 보면 조금 잘못된 현실인식을 가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대한민국이 형성 초기에 여러 가지 결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간 대한민국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진 성과는 대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틀 속에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하게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져 왔는데, 산업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각각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연속선상에 있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대한민국의 성취는 대단한 역사적 성과라 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점에 대한 여러 선생님의 견해를 우선 들어보았으면 합니다.
안병직(본지 발행인 겸 편집인)

김우창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것 자체가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 선생님을 오랜만에 다시 뵙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만, 주제로 보아 저는 여기에 참석하는 것이 적당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말씀드린다면 일반론이지, 사실적 연구에 입각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것은 좌에서든 우에서든 편 가르기를 하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는 것은 따져볼 것도 없이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다음의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치나 의미는 나중에 역사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되겠지만 이 시점에서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은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합니다. 역사의 이데올로기화는 우리가 늘 보는 일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 좋은 나라냐 나쁜 나라냐는 논쟁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이인호 저도 김 선생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으로서 탄생했는데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이렇게 발전했는지, 그때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해야지, 정통성이 있는가 없는가 같은 이야기는 할 게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너무 분단 극복 문제에만 매몰되다 보니 정통성 문제가 이야기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이데올로기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우리가 사는 것도 그냥 사는 거지, 사는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것을 평가한 다음에 사는 것은 아니지요.
이인호(카이스트 석좌교수)

노재봉 이 문제를 규범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김 교수 얘기대로 이를 사실로서 보자는 입장을 취해야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역사는 근대국가의 형성과 연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걸 세계적 시각에서 보자면 한국을 포함해서 소위 후발자 전부가 식민지 지배를 받고 난 뒤에 근대국가를 본격적으로 만들고 산업화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이, 가치 판단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예외적인 성공 사례라는 것은 학계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얘기대로 규범으로 보지 말고 현실적 시각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리고 규범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자면 서양 국가들과는 달리 산업화가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 못하고 왜 강제력을 동반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데, 서양 국가에서조차도 강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산업화는 단 한 건의 사례도 없습니다. 현대적 기준으로 한국의 국가 형성 과정을 바라보면 바람직하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적 기준만으로 보면 모든 국가는 국가 형성 과정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안병직 세 분 선생님께서는 규범으로서의 대한민국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의 생활터전으로서 대한민국을 본다는 관점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생활터전으로서 있는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보고 논의를 전개하자고 얘기하신 것 같습니다.
노재봉(전 국무총리)

신복룡 저는 이 자리가 송구스럽고 과분합니다. 선배님들 계신 자리에 공부 삼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안병직 이사장님과 여기 계신 분들이 좀 보수주의적이고 우파적인 시각을 갖는 분들이신데, 저는 한 번도 제가 우파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불러 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이 자리가 조금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저와 같은 진보적 생각을 가진 사람을 불러 주신 것은 다른 목소리도 들어보고자 하는 주최 측의 아량이라고 생각하고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선생님들께서 시대를 규범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하심에도 불구하고 안병직 이사장님께서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는 성취가 있지 않았느냐 하신 것은 강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해방정국을 이데올로기만으로 보는 것에는 저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해방정국을 공부한 결론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밥이나 혈육보다 진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데올로기가 성숙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해방정국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이 이념적인 문제이든, 분단사학이든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이 있는데, 바로 남북 분단의 문제입니다. 저는 이 분단의 문제를 외면하고서는 해방정국사를 풀어 갈 수 없다고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 분단과 망국 중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바꿔 말한다면 해방과 통일 중 어느 쪽이 더 감격스러웠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절대적으로 따진다면 망국이 더 비극이었을 것이고 해방이 더 감격스러웠을 것이지만, 후대의 역사에 미친 영향으로 본다면 분단이 더 비극적이었고 통일이 오는 그날이 더 감격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면 역사적으로 봤을 때 망국이 해방을 맞이한 예는 흔히 있어도, 분단이 통일을 맞이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감격이나 비극의 절대치 문제가 아니라 후대의 역사적 가능성을 볼 때 분단이나 통일의 문제가 우리에게 더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안병직 이사장님께서 지적하신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나 성취는, 사실은 알고 보면 절반의 축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제 평소 생각입니다.

노재봉 원리적으로 말하자면 신 선생님이 제기하신 문제는 미래의 과제예요. 미래의 과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대한민국을 문제 삼는 데에 분단 문제를 빼놓으면 이게 반쪽의 이야기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넓은 의미에서 민족의 분단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문화적인 척도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문화적인 의미에서 민족이 분단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이 정치 체제의 분단으로 동시에 전개되면서, 현실적으로는 법적으로도 두 개의 국가로서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걸 전제로 해야 대한민국에 대해서 논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독자적인 논의 대상이 되지 않는 식으로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논리적 얘기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다른 얘기입니다. 현실적으로 분명히 두 개의 국가이고, 단순히 통일 문제라고 하는 것도 민족이라고 하는 문화적인 부분만을 놓고 본다면 해결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병직 신 선생 말씀은 그간 대한민국의 성취는 그것이 아무리 대단해도 절반의 성취에 불과한 것이지, 아직도 한쪽이 통일민족국가에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에 대한민국만 가지고는 완성된 국가로 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만, 그것을 조금 형식적으로 이해하자면 통일의 과제가 남아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연방제 문제라든가, 국가연합 문제라든가 하는 것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연방제든 국가연합제든 통일국가가 성취되어야 하나의 완전한 민족국가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견해라고 봅니다. 통일 문제를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상이한 두 체제를 가지고 하나의 통일국가로 나아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와, 과연 이 시점에서 남한과 북한이 현실적으로 하나의 국가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큼 동등한 역사적 위치에 있는 국가인가를 봐야 합니다. 남한이 통일국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역사적 성취가 대단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추고 있다, 국토의 절반밖에 차지하고 있지 못하지만 정치경제적으로 보면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는 국가인데 지금 북한이 제대로 된 나라 꼴을 하고 있느냐, 그런 점에 대한 선생님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인호 북한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대한민국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는데 저도 그 점에서는 공감합니다. 그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할 이유도 없고요. 다만, 민족의 분단이라는 현실을 바라보는 데에 그 중심을 어디다 놓고 보느냐에 따라 문제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입장에서 상황을 본다면 우리가 나라를 세우는 데에 불행히도 그 나라 속에 북한이 포함되지 못하고 민족 절반이 다른 영역으로 남게 된 것은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지만, 남북 양쪽의 정부를 대등하게 보고 무게중심을 양쪽으로 나누어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요. 학문적으로야 당연히 객관적으로 양쪽의 상황을 서술할 수 있고, 해야 되지요. 하지만 북한이 실패한 국가인지 어떤지는 나중에 이야기한다고 해도, 우선 필요한 것은 우리가 대한민국을 건설하면서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고 실패한 것이 무엇이냐를 따져 보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때 우리는 민족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국가로서 헌법 체제를 갖추고 국제 사회의 인정도 받는 큰일을 해냈지만, 우리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 헌법의 권한이 미치는 영역 속에 북한을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제 시각입니다. 그런 면에서 시각이 다를 수가 있겠죠. 그때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 속에 우리 국토와 우리 민족 전체를 포함시키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을 세웠기 때문에 그런 민주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북한까지를 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지, 그때 만약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출범시키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 대안을 생각해 본다면 미군정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가 결국 공산주의 체제 속으로 포함되어 잘되어 봤자 지금 동유럽이나 북한의 꼴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한민국 수립이 절반의 성공이었고 큰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공감하지만, 우리가 나라로서 기초 골격을 잡는 데 있어서는 대단한 성공을 했고 당시 열려 있던 선택 가운데서는 가장 덜 나쁜 선택을 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은 국민감정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역사가 증명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이라는 역사의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고 그 국가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크게 자축해야 할 일이었나를 분명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

김우창 대한민국이 분단된 두 쪽 중 더 중요한 나라라고 본다는 말씀이시지만, 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또는 북한의 집권자 입장에서 보면 다르겠지요. 분단을 넘어서 통일국가로 간다는 것은 미래의 과제입니다. 어느 쪽이 국가의 기틀을 잡는 데 중요한 일을 했느냐보다는 어떻게 두 개가 하나가 되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이라는 현재의 사실에서 출발하여 통일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을 생각할 것이고, 북한에서는 국가 체제로서의 북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이 있겠지만 지금 성립되어 있는 국가의 현재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통일국가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이 두 개를 어떻게 하나가 되게 하는가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겁니다.

이인호 그렇죠. 그쪽은 그쪽의 문제가 있으니, 지금 우리가 그쪽 입장까지 포용해서 이야기해야 하는 데에 정치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이죠.

김우창 앞으로는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대한민국과 북한을 대립시켜 놓고 ‘어느 쪽이 더 우위다.’라고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양쪽을 다 사실적으로 바라보고 시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병직 제가 문제로 제기하고 싶은 것은, 이념적으로 볼 때 남쪽도 북쪽도 다 같이 그 나름의 국가 체제를 가지고 형성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다만 기아 문제나 현재의 사회경제적 형편으로 볼 때 북한이 과연 정상적인 나라 꼴을 하고 있는가, 앞으로 남북이 통일된다고 할 때 양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거기에 참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김우창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판단 안 하겠죠.(웃음)

이인호 북한 정권 쪽이야 분명히 그러겠죠. 제가 이야기한 것을 북한은 정반대로 이야기하겠죠. 북한도 자기들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 때 이쪽을 흡수하지 못한 게 유감이라고 이야기하겠죠. 그런데 현실과 희망은 전혀 별도의 이야기입니다.

안병직 그래서 만약 우리가 백 보를 양보하여 북한의 입장에 선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북한으로부터 무엇을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지는 조금 깊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한 점에서 저는 남북을 대등한 위치에 놓고 통일을 논의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복룡 한 말씀 드리자면, 이사장님이 저한테 남북이 저렇게 달라졌는데 북한이 우리의 형제인가 물어보는 것 같았어요. 평양에서 보면 정말 저 사람들이 동포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변한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저희 세대의 통일 의지는 90%를 상회했는데, 지금 중·고등학생들에게 통일 부담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통일을 원하는가 물으면 통일 의지가 30% 이하로 떨어집니다. 그것이 저로서는 안타까운 거죠. 그것이 이대로 가는 게 아닌가, 통일에 대한 체념 등 이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현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제게 있기 때문에, 그런 안타까움이 있기 때문에 분단 문제를 모두冒頭에서 제기한 겁니다.

노재봉 통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잘 들었습니다만, 그 문제는 현실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두 개의 국가를 놓고 대한민국에 대해서 이렇게 서로 이야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당위로서 통일 문제를 다루는 것과 현실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정치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포함해서 보는 논리적인 단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우창 젊은 사람 속에서 통일 의지가 약화됐다는 것은 양면적 의미를 가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전에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줄었다는 것은 앞으로 통일에 대한 의지가 약화된 현상이 또 바뀔 수도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은 바뀌지요. 또 하나는 통일을 너무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통일 의지가 약화된 것이 오히려 냉정하고 사실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조금 이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인호 국제 정치를 우리 의지대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분단이라는 불의의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된 거지만, 그래도 결국은 두 개의 국가가 섰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통일 논의가 될 수 있겠죠. 북한은 북한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보려 할 것이 당연하고, 우리로서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 나가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노재봉 두 국가가 출발할 당시 모두 근대국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분단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인해 된 게 아니라 상당 부분이 국제 정세에 밀렸고, 상당 부분 우리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어 국제 정세 추세를 제어하거나 원하는 쪽으로 돌릴 힘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당한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결국 두 개의 다른 정부 혹은 국가를 전제하고 나중에 통일을 이야기할 적에도 지금까지의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고 하는 역사적인 사실에 의미를 두고, 물론 북한을 항상 의식해야 하지만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통일 문제, 통일의 당위성과 필요성 문제를 다시 이야기하는 식으로 가야 이야기가 풀리지 않을까 합니다.

신복룡 공통적인 초점이 필요합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공통으로 존재하는 지향점이 있었는데, 그 출발점은 양쪽 모두 근대적인 국가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적인 국가를 만드는 데 그쪽은 그쪽 방식으로, 이쪽은 이쪽 방식으로 간 겁니다.

안병직 남북이 출발점에서 그 나름의 이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누누이 이야기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입니다. 한 가지는 60년간의 발전의 귀결이 어떻게 되었느냐입니다. 남쪽은 출발점에서는 부실했던 점이 많았음에도 나름 근대국가로서 자기 모양을 갖추어 왔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부터도 모범국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과연 과거 60년간에 근대국가로 발전해 왔다고 평가받을 만한 역사적 성과가 있느냐, 북한이 나라로서 지금과 같은 꼴을 하고 있어서야 남북의 대등한 비교가 가능한가입니다.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국가가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조건인 국민군의 형성이라든가 재정의 자립이라는 면에서 보면 북한은 여기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막강한 인민군이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만, 정치 경제 체제의 붕괴로 그 유지가 어려워 보입니다.

김우창 근대국가 형성의 요소로서 군대 문제가 꼭 중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북한의 경우에도 선군주의가 있고 핵도 발전한 측면이 있으며, 또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데에도 핵을 가지고 있고…, 강한 군사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나라의 경제는 문제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이것은 생활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고려사항이지요. 그렇지만 이것도 지금 시점의 이야기이고 역사의 긴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서양 사람들이 시작한 근대화는 인간에게 진보의 희망을 주는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관점도 많이 생겼지요. 1960~70년대를 보면 경제에 있어서 북한이 남한보다 앞서 있었기에, 그때그때의 역사 추이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부정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약간은 의문을, 조금 더 높게 생각하는 관점을 남겨 놓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요즘 제가 예일대 정치학 교수 제임스 스콧이 쓴 책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소련에서 행한 혁명의 실험과 미국이 시험한 과학기술, 자본주의의 문명을 같은 선에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둘 다 단순화된 거대 개혁에 의해서 복합적 인간의 삶을 통제하려고 하는, 국가 권력과 지적 엘리트들의 과대한 시도였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소련은 망했지만 미국이 단순화된 시장 체제로 인간상을 개조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식의 회의懷疑의 공간도 있는 게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경제 발전과 산업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통일을 포함하여 넓은 미래를 위한 공간을 남겨 놓는 일이 아닌가 해 말씀드렸습니다.

안병직 소위 남한의 성공이라는 것과 북한의 실패는 아직은 역사적으로 상대적으로 봐야지, 절대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그런 말씀이시네요.

신복룡 만약 우위론적으로 남북한을 이야기한다면 내가 남한에 살고 대한민국에 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상 체제의 대결은 끝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자본주의가 성공하고 체제의 우위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니얼 벨(Daniel Bell)식의 어떤 이데올로기적 오만으로 충일充溢되어 있다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북한이 마치 그 선전 선동에서 자기들이 우위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진심을 속인 ‘언더도그 크라잉(under-dog crying)’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가서 보면 저들도 체제의 경쟁에서 진 것을 자인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승패로 따지자면, 우월로 따지자면, 이미 끝난 문제를 자꾸 다루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분명히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역사에서 그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는지, 최상의 체제이었는지와 같은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이 없다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가 갖는 모순, 그 모순 속에서의 아픔과 그늘, 이런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이 “우리가 이겼어!”라고만 말함으로써 체제의 가늠을 끝맺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인호 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이야기는 우선 좀 접어 놓고, 대한민국은 어떻게 수립이 되었고 어떤 이상을 가지고 어떻게 출발했는데 어떤 문제를 계속 안고 있었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해야 부정적인 측면도 긍정적인 면과 함께 지적될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과 대비해서만 계속 인식하다 보면 대한민국이 더 낫다는 결론밖에 나올 수 없지요.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치 경제 발전 면에서 이룩한 성공은 크게 자축할 만한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 많은 어려운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지금도 안고 있는 체제라는 것을 인정하며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느끼거든요.
또 한 가지 등한시하면 안 될 것이 주권과 독립의 문제라고 봅니다. 분단 체제라는 말을 하지만 실제 일제시대 때 우리는 주권국가가 아니었죠. 해방 후 우리는 주권을 다시 찾아야 했는데 불행히도 해방과 동시에 하나로 통일된 주권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점령지역으로 분단이 되었죠. 그렇게 분단된 상황에서라도 만약에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주권국가로 건국을 하지 못한 채로 미군정하에 더 오래 남았더라면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통일이 더 쉽게 이루어졌을까요? 미군정하에서 더 오래 살았던 것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로 출범한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았느냐는 말이죠. 이승만 박사가 미국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버거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역할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것도 그분의 독립정신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다가 미국도 결국은 소련과 공산주의 북한의 위협을 의식하면서 이 박사와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박사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체제를 출범시키는 데 동조를 했던 것이죠. 우리가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주권국가로 독립한 후와 군정 치하에 남아 있던 상황과 크게 차이가 있었죠. 국제 관계에서 실제로 자유나 독립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어요. 냉전 종식 이후 이른바 일국 체제를 이끌어 왔다는 초강대국 미국까지도 사실은 어느 정도까지는 우방국가 또는 적대국가들의 영향을 의식해야지, 완전히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어요. 하물며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어떤 강대국의 영향권 안에서 주창할 수 있는 자주와 독립이었지, 절대적인 자유라고 하는 것은 없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스탈린 사망 이전 소련이 북한에 대해 행사한 영향력과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그쪽이 심했습니다.

안병직 남북의 자주성에 관한 문제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당면문제는 선진국의 건설이 아니겠습니까? 통일을 한다고 할 때도 선진국으로 통일해야 할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남북 문제를 다루는 경우 논의에서 빠져 있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통일 문제를 다룰 때 흔히 사상 문제나 체제 문제가 중심으로 이야기되곤 하는데, 여기서는 항상 남북한의 사회적 성숙도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습니다. 어느 사회의 발전 단계가 산업사회 이전인지, 이후인지 하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데,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사상적 내용도 그러한 산업의 발전 단계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산업사회 이전의 단계에서는 자본주의는 권위주의와 결합할 수도 있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전제주의나 전체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데 대하여 산업사회 이후에는 사상적으로는 자유주의다, 사회주의다, 공산주의다 하더라도 정치 경제 제도는 대체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근대 세계사에서도 여러 가지 굴곡은 있었습니다만 이러한 것이 보편적인 흐름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현재의 남북이 산업사회 이전의 단계에 있는지 어떤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앞으로 통일 문제를 다룬다고 할 때 반드시 이러한 문제도 염두에 두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김우창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든지 간에 세계적인 추세가 산업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생활 향상이 안 되고 국제적인 위치 확보도 안 되는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한 사회가 세계 역사의 흐름 밖에 서서 주체성만을 주장할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도 의견을 같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이야기에 나온 대로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는 모순이나 문제가 많기 때문에, 산업화를 기초로 이야기하되, 그것을 보다 나은 산업화, 보다 인간적인 산업화의 관점에서 따져 보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신문에 얼마 전에 쓴 일이 있지만, 부탄 같은 나라는 산업화·근대화를 통제하면서 수용하는 농업경제의 사회인데, 행복지수라고 하는 것이 세계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부탄과 같은 진로를 갈 수는 없지요. 그러나 조금 상대적으로 생각하면 선진화의 산업화에 따르는 여러 모순을 피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노재봉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상태에서 동시에 근대적인 국가사회를 지향해 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한의 여론을 기준으로 보면 북한은 개별적인 국가사회가 아닙니다. 북한은 소비에트 체제를 구축하면서 개별적인 국가의 형성이라고 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북한 체제가 잘되었나, 잘못되었나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근대적인 국가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체제를 선택했느냐가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성공을 했다고 하면서 모든 것이 잘되었다, 그래서 역사는 끝이 났다는 것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는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미래의 변화에 필요한 발전적 요소가 어떤 것이 있느냐를 찾아보자고 하는 데 토론의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는 과정을 분석할 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있어 본 일도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자유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공산주의도 결국은 국가사회주의였습니다. 남한은 자본주의라고 하지만 자유주의에 기초한 순수한 자본주의가 한국에 존재한 적은 없습니다. 국가자본주의였죠. 현실적으로 보면 산업화라고 하는 것이 체제 선택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을 때, 또 체제 선택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했을 때, 북한은 실패한 것이고 남한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국가자본주의 방식으로 여러 가지 코스트를 지불하면서 세계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규제 철폐니, 민영화니, 작은 정부니 매일매일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을 빠르게 해결하고, 올바른 선택을 해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가 보자는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는 국가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다른 쪽은 국가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산업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냉전이 끝나기 전에 성공적인 산업화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산업화를 이루고 세계에서 12~13위에 올라간 현실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신복룡(건국대 석좌교수)


2. 체제의 선택

안병직 지금까지 과거 60년간 남북의 역사적 성취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지금부터 그러한 성취의 차이가 어디에서 발생했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할까요? 남북의 역사적 성취의 차이를 고찰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체제의 선택이 아닌가 합니다. 조금 전에 남북의 체제 선택은 이념적인 것이라거나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제약이 강한 것이었다는 노 선생의 말씀도 계셨습니다만, 순수한 이상적인 체제는 아니었지만 기본 골격은 뚜렷한 차이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데 대하여 북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획경제를 선택한 것이지요. 북한은 단순히 공산주의를 그 체제로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민족주의를 이념적 바탕으로 했다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하여간 시장경제나 정상적인 국제 협력을 부정한 것이 정치 경제 발전을 제약하고 결국 체제 붕괴를 가져온 원인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이인호 당연하죠. 사실 사회주의는 원리라기보다는 이상으로 내세워졌던 것인 데 비해 자본주의는 이상이 아니라 경제가 작동하는 원리일 뿐인데, 그 두 가지를 동등하게 비교하는 데서 많은 오해와 무리가 빚어진 것이지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 경쟁에서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적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판정패를 선고받았지만,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가 매력이나 가치를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냐고 하면 이론적으로는 사회주의가 더 우세하지, 자본주의가 이상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구세대 지식인 사이에서 아직도 큰 혼선이 빚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도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다 보면 복지국가 체제를 거쳐서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하게 되는 사례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또한 혁명적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하려는 의지적인 노력이 생긴 면이 있고, 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자본주의는 항상 공격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죠. 다만, 시장경제의 원리를 대체할 만한 다른 무엇이 있느냐가 문제죠. 계급 독재나 국가 독점 같은 원리가 작동하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역작용을 드러내는 것을 우리도 경험했고 다른 나라들도 경험했으니까, 이제는 극단적인 공산주의 계급투쟁의 논리를 추구하다가 전체주의 체제로 가는 것보다는 그나마 개인주의와 사유재산제도를 허용해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피해가 나며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보다 빠른 길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 아니겠어요? 이론과 이념을 앞세우는 것보다는 대한민국이 어떤 이상을 가지고 출발을 했는데 어떠한 제약이 있어서 어떤 어려움을 겪었으며 어떤 방법으로 극복해 왔고 극복해 갈 것인가 등의 이야기 말이지요.
또 한 가지 신복룡 선생님이 말씀하신 해방과 통일, 어떤 게 더 감격스러웠겠느냐 하는 문젠데요, 저는 분단 자체가 불행이기도 했지만 분단되어서도 만약에 독일같이 싸우지 않고 살았으면 우리 같은 극악의 상황은 안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조금 전에 김우창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통일이라는 데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다 보니 6·25 전쟁 같은 일이 일어났고, 그것이 오히려 분단을 더욱 비극적인 것으로 고착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맨 처음에 국토가 분단된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은 국제 정치의 희생물이었고 우리가 책임 질 수 없는 상황에 말려든 것이지만, 그다음 분단 이후의 상황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통일과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빙자한 전쟁에까지 가게 된 데 대해서는 민족 스스로가, 특히 김일성이 책임 질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김우창 조금 보태서 말씀드리자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비에서 사회주의는 이상을 함축하고 있는데 자본주의는 하나의 수단이고 목표가 될 수 없다고 정의하신 것 같습니다. 아주 좋은 지적이십니다. 목표는 남아 있고 수단에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정치의 과정으로서 도덕적인 목표를 추구한다는 게 도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역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의 말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는 사람치고 진짜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목표를 내거는 것이 도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고, 도덕을 뺀 것이 반드시 부도덕한 결과를 낳지 않는 복잡한 과정, 이것이 역사 과정이 아닌가 합니다.

노재봉 체제 선택과 관련해 그 현재를 놓고 보면, 남한은 순수한 시장경제로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고 시장을 만들기 위해서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해 왔습니다. 저쪽은 시장을 없애는 데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을 해온 것이고요. 그래서 법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실제는 국가가 강력하게 개입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을 본다면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요소와 시장경제적인 요소를 선택했고, 북한은 그 반대였습니다.
이인호 교수께서 자본주의는 인간에 대한 도덕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는 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고, 확보했고, 지금도 확보하고 있는 통치 체제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나름 목표가 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해 이론적·이데올로기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한때 유럽 등에서 이야기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는 어떤 것이냐, 이념을 떠나서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인간의 탈을 쓴 야수들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제기한 것은 극좌파들이었습니다. 그 주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장경제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인 것이 가치로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자본주의가 가치로서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자본주의 자체만으로도 분명한, 하나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이인호 저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시장경제라고 하는 것은 비켜갈 수 없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방지하는 노력은 계속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노재봉 시장경제적인 요소라고 하는 것은 고대에도 있었습니다.

이인호 저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자본주의가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안병직 체제의 선택 문제에 관해서 신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체제 선택이 오늘날의 남북한의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요?

신복룡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체제 선택을 이야기할 적에 정말 우리의 의지가 거기에 얼마나 작용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속지주의적屬地主義的이었거든요. 우리는 이 나라에 태어나서 자본주의자가 되고, 저들은 저 나라에 태어나서 공산주의자가 되었지요. 그 당시에 북한이 자기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피치자가 아닌 지배자의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택할 수 있었으며, 남한의 지배계급이 사회주의를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습니까? 그런 게 없는 상태에서 그 선택의 우열을 논한다는 것이 참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노재봉 그건 피치자의 주장이고 피치자의 입장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내고 생산해 내는 통치자의 결단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과 다르죠. 여기에 태어나서 우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신 선생님, 그러면 이거는 어떻게 보십니까? 남한에서는 박헌영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계열이 소비에트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는데도 실패했고, 북한에서도 서북 중심의 기독교적인 자유주의자들이 자기 나름의 국가 형성을 도모했음에도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는 게 무슨 얘깁니까? 모든 국가는 결정에 따르는 겁니다. 그것은 상수로 따르는 것이고…. 가령,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할 때 일본의 「맥아더 헌법」처럼 맥아더가 만들어서 그냥 밀어붙인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난 투쟁이 있었습니다.

신복룡 그 무지한 투쟁에서 결국 남한의 좌파와 북한의 우파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운명성이 있지 않았느냐 이거죠.

안병직 남쪽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해서 국가가 만들어지고, 북쪽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국가가 만들어졌는데, 남북의 국가 건설에 있어서는 자기 사상에 기초한 그들의 필사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남북에서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진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국내적 차원에서만 보면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인들의 능동적 역할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러한 노력들은 당시 주어진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우창 문제를 이렇게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남한에서도 일정한 의지가 작용했고 북한에서도 일정한 의지가 작용을 했는데, 그것을 의지 쪽에서 볼 것이 아니라 결과 쪽에서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의지가 중요하지만 결과는 반드시 사람들의 의지나 의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의지의 선택은 주어진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과로 이어지지요.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의지를 떠나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안병직 그러니까 정치 체제 선택에 있어서는 행위자들의 의지적 측면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러한 의지적 측면의 실현은 국내외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성공 여부는 국내외적 조건에 의하여 크게 좌우됩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김일성이 성공하고 자유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조만식이 실패한 데 비해, 남한에서는 자유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이승만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박헌영이 실패했는데, 이러한 성공 여부는 크게 보면 행위자들의 능력에 의해서라기보다 국내외적 조건에 의하여 규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체제 선택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조건의 문제와 행위자의 능동성의 문제가 공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노재봉 이승만 박사는 줄곧 국가사회에 있어서 여러 가지 요소를 강조했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이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적인 요소에다 시장경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시장경제적 요소를 결합시켰는데, 이러한 것이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외부적 요소에 의해서 되었다고 하면 농지 개혁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농지 개혁이 미국이 한 겁니까, 아니면 미국의 승인을 받아서 한 겁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농지 개혁을 할 때 극심한 저항을 각오하면서 밀어붙인 겁니다. 이는 통치자의 독자적이고 권력적인 결단입니다. 만약 그때 통치자가 권력적 결단을 안 했으면 대한민국이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김우창 북한이 토지 개혁을 하니까 남한에서도 안 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죠.

노재봉 이승만 박사는 전근대적인 체제를 놓고 국가 개발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걸 단순히 수동적으로 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승만의 권력 기반은 마이너리티(Minority)입니다. 지주들이 메이저리티(Majority)예요. 국민을 기반으로 지주의 저항을 꺾고 해낸 겁니다. 그걸 단순히 북한의 토지 개혁에 대한 반사작용 때문에 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입니다.
식민지 시대가 2차대전의 종결과 동시에 막을 내리면서 빅 파워(Big-Power)들이 무자비한 제국주의적 형태로 지배하는 것도 종료되었습니다. 물론 일본이나 독일 같은 패전국들에는 100% 개입해 통치했지만, 그 여타의 경우에는 100% 강제적 개입이 없었어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건국 시기에 그런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까?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항상 미국의 말만 들었던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아요. 얼마나 싸운 사람인데요. 건국 시기에 나라에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습니까? 이에 대해 국가를 운영하는 최고권력자의 결정이라고 하는 정책의 자율성을 뺀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은 포퓰리즘밖에 안 되죠. 그러니까 결정을 하는 데 있어 바깥의 요소와 내면의 요소는 당연히 고려 요소로 들어가죠.

이인호 이승만 박사의 역할을 잘 조명하지 않으면 건국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승만 박사 같은 분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고집하면서도 그 안에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면 계층구조의 타파나 농지 개혁 같은 것은 어려웠겠지요. 그분은 사회민주주의가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지능적인 요소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아마 서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내적인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내부적 동요에 의해서도 그렇고, 국제정치적 추세로도 그렇고, 대한민국이 살아남지 못했겠죠. 이 박사는 젊은 시절부터 개혁운동에 관여하며 감옥생활도 했고 동서고금의 학문에 능통한 학자적 배경을 갖고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분으로서 일반 백성의 처지나 고충을 생각하며 고민하던 분이었지, 일부에서 이야기하듯 권력을 위해 권력을 추구한 인물이 결코 아니었거든요. 그분이 개인적으로 누린 영화가 무엇이 있습니까? 이 땅에서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려 노력했지만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려는 과정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독재자라는 불명예를 안고 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김우창 역사는 결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면서, 그것이 여러 가지 조건에 맞아들어가야 의도된 결과가 나오겠지요. 이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어떤 정당한 신념과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현실 조건에 대한 이해겠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실천은 좋은 신념보다 권력 의지에 의하여 추동되는 것 같습니다.

노재봉 박정희 케이스도 그런 것을 보여 주죠. 미국이 전부 포진해서 근대화를 국가자본주의식으로 나갔지만, 미국이 전부 주도하고 손에 쥐고 한 겁니까? 아니죠. 정권이 위기를 감수하고 위기를 넘기면서까지 밀고 나간 것 아닙니까?

안병직 역사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이 정도로 토론하겠습니다. 좀 전에 이인호 선생께서 좋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본주의라는 것은 어떠한 이상적 선택이 아니고 자연적인 발전 과정이며,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상을 실현하려고 인간이 의지를 가지고 구상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해석임과 동시에 바로 거기에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요소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도 사회주의와 같은 설계주의의 오류는 피했지만 마냥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시장경제가 인간 사회에 대하여 폭력을 행사하자 그것을 못하도록 끊임없이 개혁되어 왔습니다.

노재봉 나는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발생했다는 데 찬성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그렇게 나왔다고 하는 것이지, 19세기 유럽의 역사를 볼 때 그것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나요?

김우창 자본주의 발전에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이상이 들어 있고, 개인이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으며, 그렇게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서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도 잘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 사회를 구성한다는 이념들이 들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자유를 옹호하고 그것이 사회 전체 이익에 보탬이 된다는, 그러나 개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사이에 사회적인 이상·윤리·도덕이 상실되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어떤 사회철학자들은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체제는 도덕을 필요로 하는데, 도덕을 사회 체제 속에 법제화할 것을 거부하는 체제라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노재봉 자본주의가 발달하는 데 소위 야경국가인지 뭔지 하는 것은 이론입니다. 국가가 얼마나 계획을 했습니까? 자본주의는 이상으로 내세운 종교적인 관념이 아니고, 부르주아적 계급이 내세운 거예요. 예를 들어 보통선거권은 개인의 자유가 필요하다고 해서 전부 다 줬습니까? 20세기 초까지 보통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치열한 국가 권력의 개입과 전쟁의 소산으로서 개인의 자유주의가 정착되었고, 재산권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게 정착이 된 것이지, 그냥 막연히 된 게 아니라는 거죠.

이인호 경제 발전뿐 아니라 정치 발전도 우리의 경우는 압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습니까? 우선 국민국가를 세우고 소위 봉건 잔재를 청산하며 개개인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권 같은 기본권리를 확립하는 과정이 서양에서는 몇백 년에 걸친 투쟁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불과 몇십 년으로 압축해서 한꺼번에 했거든요. 거기에서 혼선이 생기는 것이거든요. 북한은 소련이 체제가 탄생할 때부터 일당독재와 세계 공산화라는 목표를 공식적인 이상으로 내세우고 추구했던 체제였고, 우리는 자유 평등을 이상으로 하는 자유방임이 원칙이었던 체제였잖아요. 추구하는 궁극적 이상은 똑같더라도 방식은 전혀 달랐던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노력, 그리고 아까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국제정치적 상황, 곧 소련은 소련대로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한반도에 친소적인 세력을 심으려고 했고, 미국은 미국대로 친미 정권을 세우려고 했던 상황과 맞물리며 상호작용을 했던 거죠. 그 어느 것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되는 거죠. 우리 스스로의 노력도 있었고, 벌써 이야기했지만 38선이 고착되기 전에 북한으로 넘어간 이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상당히 있었으며, 반면에 남쪽으로 넘어온 지식인·종교인 들도 상당수 있었죠. 통일에 대한 의지가 역작용을 일으킨, 가장 좋은 예가 6·25 전쟁이었지요. 그것은 피할 수 있었던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김일성이, 주저하고 있던 스탈린을 강력하게 설득해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증거가 명백하게 나와 있거든요. 그래서 국제 정세 못지않게 인물의 작용, 의지의 작용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죠.

신복룡 제가 이 선생님 생각에 의문을 품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에 살기 때문에 남한의 체제를 방어해야 하고, 북한 사람은 북한에 살기 때문에 북한의 체제를 방어해야 하는 것이 저는 서글픈 거죠. 선생님이 보시기에 남한의 민주주의가 미국의 지원하에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북한은 고도의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자유가 유린당했다는 이야기는, 선생님이 북한에 계셨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 있었을까요?

이인호 제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개인적인 체험이 있고, 또 하나는 공산권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신복룡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북한에 있었던 소비에트 체제가 약소민족 동화 정책에 대한 더 많은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 노련했고 더 깔끔하지 않았겠어요?

이인호 그렇지 않습니다. 소련의 전체주의 체제는 통제를 심하게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소련 안에서도 정보가 통제되고 왜곡되어 있었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더욱 그렇죠. 소련에 살든, 밖에 살든 다들 속았죠. 스탈린이 죽고 비非스탈린화 운동이 나오고 나서부터야 그 안에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하는 뼈아픈 과정이 있었지요. 일제시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나 일본의 마르크스주의들이 소련 체제의 실상을 모르고 이론과 선전에만 매료되었기 때문에 그 후 상반되는 증거가 나왔어도 선입견을 바꾸는 데 큰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러시아 사람들 자신의 증언이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겠지요.

김우창 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소련에서 직접 북한에 많이 개입한 건 국가보다는 인터내셔널리즘이 중요하니까 명분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명분과 명분 뒤 현실의 간격이 정치의 중요한 동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안병직 지금 체제의 성격 문제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적 측면이 강하고, 사회주의는 인위적 측면이 강하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역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하였고, 사회주의는 인간이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에는 인위적인 측면이 없고 사회주의에는 자연적인 측면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의 기초인 시장제도에는 인위적이거나 사회적인 요소가 아주 강하고 사회주의의 사회적 소유라는 제도도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나 다 같은 인위적인 측면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사회적 측면은 경험을 제도화한 것이 많은 데 대하여 사회주의의 사회적 측면은 경험이라기보다 인간의 이상에 맞추어 설계된 것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이인호 자본주의를 시장경제로 표현하면 어떠세요?

노재봉 인류학적으로 들어가면 시장은 고대부터 있었어요. 현대적인 입장에서 한마디로 시장경제라고 하는 거고, 자본주의는 근대에 와서 있었던 거예요.

이인호 근대에 자본주의를 이상이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개인의 자유를 위해 투쟁은 했지만 자본주의를 이상이라고 내세운 사람은 없었어요.

노재봉 왜 없었어요? 그럼 하이에크 같은 사람들은 뭡니까? 그는 이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제학적인 입장에서는 자본주의가 곧 시장경제입니다.

이인호 자유경제를 내세우긴 했지만 자본주의라고 하지는 않았죠.

노재봉 국가 권력이라고 하는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 자본주의적 혹은 시장적 요소를 이끌고 가는 게 효과적이냐, 아니면 사유재산을 국가에서 통제하는 식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냐에 따라 체제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남북이 국가로서 행동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안병직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그러한 사회를 이루려는 국가 권력의 영위를 전제로 해서 성립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양 체제에 있어서는 국가 권력의 영위 형태가 각각 다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본주의의 경우는 자연발생적인 흐름을 인간에게 소망이 되도록 보완하는 방향으로 국가가 개입하다 보니까 개입이 개선이나 개혁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사회주의의 경우는 여건이 미성숙한 상황에서 이상적인 제도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그것이 개혁이나 혁명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결과, 자연히 자본주의는 무정부 상태인 것처럼 보이고, 사회주의는 설계주의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인호 자유경제라고 하면 저는 괜찮아요.

김우창 노 선생님께서는 많은 것이 계획에 의해서 이뤄진다고 말씀하시고 자본주의도 자연발생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역시 안 선생님 말씀대로 자본주의에는 제도가 현실을 뒤따라가는 면이 있다고 하겠지요.


3. 종속과 국제 협력

안병직 지난 60년간 남북의 역사적 성취의 차이를 이야기할 때 자연히 체제 선택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데, 남쪽은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 나름의 성과가 있었고, 북쪽은 계획경제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 최근에야 세계사적으로 명백해졌습니다. 그런데 종래에는 남쪽이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대외 의존적이 되었다고 비판되어 왔는데, 이 대외 의존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기는 하였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역사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는 점은 간과되어 왔습니다. 한국의 근대경제는 자생적인 과정이 아니라 캐치-업 과정이기 때문에 근대 초기에는 대외 의존이 불가피하였으나, 발전하는 과정에서 대외 의존성을 점차로 극복하지요. 그리고 대외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선진국으로부터 선진적인 기술이나 제도 같은 성장잠재력을 흡수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어서 고도 성장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 경제가 근대화 초기에 대외 의존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만 볼 일이 아닙니다. 북쪽은 계획경제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단시일에 경제의 자립성을 회복하고 경제가 착실히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북쪽은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사회주의권으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고는 국민경제의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획경제로 한꺼번에 국민경제의 균형을 회복하려다 보니 국내적으로 비정상적인 내핍생활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지나친 민족주의로 밖으로부터의 성장잠재력을 흡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률도 낮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화 초기의 국민경제의 대외 의존성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신복룡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외 의존적이라는 말은 좋게 말하면 국제 협력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주성의 상실인데요. 남북한의 문제에서 북한은 자주적이고 남한은 대외 의존적이었다는 식의 좌파적 논리의 기반이 어디에 기원이 있었는가와 같은 문제는 제가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피상적으로 북한이 더 자주적이었다는 좌파 논리의 기초적 이론은, 첫째로 저쪽이 먼저 토지제도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었고 인민위원회가 자치적인 것으로 보였으며 친일파를 청산했고 소련의 동화정책이 더 세련미 있게 보였다는 것에 기초가 있는 것 같고, 남한에서는 자발적 역량에 의한 독립이 아니라는 제약이 스스로에게 있었어요. 두 번째로 남한의 경우를 볼 때 분명히 해방은 시켜 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 줄 수 없었던 게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신탁통치도 구상했던 거고요. 이 부분에 대해 친미적인 입장에서 감사의 의사를 강조하는 동안 미국의 허물이 묻히는 것 같아요. 미국은 분명히 한국을 해방시켜 주되, 독립시켜 줄 의지는 없었습니다. 소련은 피상적인 독립을 시켜서 위성국가를 만들 의지는 있었겠죠. 신탁통치가 1945년 12월 25일자로 발표되었을 때 남한조선공산당의 성명은 신탁통치 반대입니다. 분명히 반대였다가 1월 3일부터 바뀌었거든요. 이것은 자발적 선택, 의지적 선택이 아니었죠. 독립이나 해방의 문제에 대해서 조선공산당 입장은 신탁통치에 대하여 반대였다가 1월 3일자부터 찬성하였습니다. 분명히 소련의 지령을 받았죠. 독립이냐, 해방이냐의 문제에서 소련의 정치적인 제스처가 미국에 비해서 더 세련되게 보였을 뿐입니다.

이인호 그러면 왜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안 됐고, 찬탁이라는 것이 세련되게 보였을까요?

신복룡 통제에 의했든, 자발적 의지에 의했든 북한 체제는 비교적 일사불란해 보였고 남한은 분파적으로 보였던 것이 북한 사회가 더 우월해 보였던 근거가 아닐까 합니다.

노재봉 그거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농지 개혁이 북한에서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는 관점은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의 토지 개혁은 소련이 일사불란하게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북한에 쥐어줘 해나간 것이고, 정치 엘리트들의 분열이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남한은 다들 분열이 되었고,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최고 권력을 가질 것인가도 불분명한 상태로 계속 혼미한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에 농지 개혁이 늦어진 겁니다. 시간상으로는 북한에서 먼저 계획적으로 토지 개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남한이 늦어진 이유와 배경은 전혀 다른 것이죠.
그리고 안 선생님이 발전 문제를 놓고 체제 선택 문제에 있어서 대외 의존 문제를 얘기했는데, 부연하고 싶은 것은 북한의 경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내셔널 챕터(national chapter)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신탁통치를 처음에 반대하다가 확 뒤집은 것도 그것 때문에 그래요. 북한은 이론적으로 국가를 반대합니다. 북한 사전을 보면 70년대 중반에 국가와 민족 개념은 반동 이데올로기라고 설명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국가는 반동 이데올로기입니다. 그 뒤부터는 남한에 선전을 하기 위해서 민족국가나 민족이란 것이 반동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설명을 슬그머니 없애버려요. 남한에 선전하려고 민족 개념을 다시 들고 나온 겁니다. 원래 공산주의자들은 국가를 초월하자고 하는 이데올로기로 나아갔고, 남한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이념으로 나아갔죠. 거기서 선택 기반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다음에 북한이 내셔널 챕터로서 국가라고 한다면, 아우타르키(autarkie) 정책으로 나아갔습니다. 원조 아니면 아우타르키 정책이었죠. 소련이 대외 관계라고 하는 것을 일절 차단해 버렸고, 소련이 만들어 놓은 사회주의 블록에 속해서 나아간 겁니다.
남한은 의존적(dependent)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100% 찬성을 안 합니다. 찬성 안 하는 이유가 뭐냐면 종속경제는 남미에나 해당됩니다. 시장경제적인 면에서 종속경제가 성립되려면 국제 분업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즉, 종속적 국제 분업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본의 수입이나 활용 면에서 자본과 산업을 어떻게 연계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종속경제가 성립되려면 국가에 자본이나 투자가 들어와서 국가 규제와는 관계없이 외국 자본이 산업 구조에 손을 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종속적 성격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한 걸 보면 많이 다릅니다. 자본은 들어오지만 산업 구조에 마음대로 손을 댈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이게 남미와도 다른 겁니다. 단, 대외 관계를 가지고 이쪽이 자본이 없으니까 자본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일본에 대한 배상금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그 뒤에도 다른 형태의 자본이 들어옵니다만, 그런 것도 소위 학계에서 남미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종속경제는 아닙니다. 한국에서 종속 체제는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김우창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이 남미같이 중요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었을 겁니다. 소련이 훨씬 능숙했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되었든 간에, 명분상으로 레닌을 비롯해 소련은 피압박 민족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미국은 그런 문제에 대해 별 이해가 없었던 것과 관계되는 사실이겠지요.

노재봉 남한을 산업화하는 데 있어서 미국은 적극적인 관심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이 원조를 줘야 했는데, 남한은 경제 바탕이 아무것도 없고 예산도 짤 수 없는 껍데기 국가였잖습니까? 미국이 원조를 줘야 남한에서 예산을 확정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회계의 시작이 1월 1일이 아니고 6월 1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소비재를 주는 데에 있어 남한은 먹을 것이 없기도 하지만 소비재 말고 들어와서 산업화할 수 있는 식으로 원조해 달라고 했는데, 미국은 관심이 없었죠. 그래서 도저히 안 되니까, 박 대통령이 본격적인 산업화, 강제력을 동원한 거죠.

이인호 그 원인을 따지는 데, 사실 저는 분명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게 두 가지가 있어요. 러시아가 본래 소수 민족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면서 주변 국가와의 관계 때문에 레닌이 혁명운동 때부터 그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이론을 정립하고 있었죠. 혁명 직후부터 코민테른을 만들어서 강한 호소력을 가진 메시지를 많이 내보내지 않았겠어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은 일회성으로 끝나고, 이쪽은 조직을 통해서 접근했거든요. 그 전통이 있는 데다 실질적인 도움이 못 되면서도 말로는 민족 해방과 계급 해방을 동시에 할 수 있다는, 아주 매력적인 것을 내세운 겁니다. 또 하나는 자기 나라 안에서 선전과 선동의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 있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발달시킨 체제거든요. 그러니까 경험 없는 미국 사람들은 남한을 그냥 자기들이 패배시킨 일본의 전 식민지로 보고 그곳에서 어떻게 질서를 유지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통치권을 넘겨 줄 것인가 하는 견지에서 군사적 용어로 포고문을 작성했던 것이고, 소련 측은 해방군이라고 스스로를 내세울 만큼 선전·선동의 기술과 체험이 축적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실제 내용을 보면 하나하나가 전부 공산당 지령으로 내려온 거죠. 우선 제일 중요한 조처가 한국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자 박헌영보다 국내에 뿌리가 없는 김일성을 권력의 중심으로 세운 일이지요. 그만큼 조종이 쉬운 사람을 뽑은 것이지요. 그런데 50년 중반까지는 북한이 소위 위성국가로 소련하고 굉장히 가깝게 지내지만, 소련에서 해빙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중·소 간 분쟁이 일었고,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멀어져 중국 편에 섰다가 드디어 주체사상을 내놓지 않았습니까?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다시피 했던 대한민국에서는 오랫동안 공산권 관계 간행물에 대한 몽매적 통제가 이루어졌고, 그 속에서 북한이 계획적으로 내보내는 제한된 정보에만 의존하다 보니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더 자주적이고, 또 친일파 청산을 철저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남한이 지니지 못한 도덕성·정통성을 지닌 체제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지요. 사실 북쪽에서 친일파 청산 문제는 간단했어요. 계급 해방과 민족 해방은 동시에 추구해야 할 목표인데, 일제시대에 무언가 가졌던 사람은 어느 정도는 친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니까 친일파 청산과 계급의 적 제거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쪽은 원칙적으로 개인의 재산권과 인권을 최대한 존중하는 선에서 친일 청산을 해야 하고 반체제 세력의 도전도 막아내야 하니까 친일파 청산을 북한처럼 일사불란하게 할 수는 없었죠.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화의 전초 작업으로 한 것뿐이지, 자영농 계층을 육성한 게 아닌데, 겉으로만 보면 토지의 무상 분배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진보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요.

안병직 제가 경제학을 하는 입장에서 종속 문제를 말씀드리면 종속이론가들이 말하는 종속, 소위 종속 체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현재 경제학 연구의 일반적 결론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종속이나 의존이라는 사실은 있습니다. 그리고 종속과 의존은 종속을 강요하려는 제국주의 측의 의도나 저개발국 경제의 불균형 결과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제국주의 시대이고 저개발국이 공업화 이전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선-후진국 간의 관계가 일반적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UN 등의 국제기구가 발전하고 전통적으로 식민지를 가지지 않는 미국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기 때문에 자유무역 시대가 전개되고 저개발국 중에서도 공업화에 성공하는 나라들이 경제적 종속으로부터 해방되게 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자유무역 체제는 일반적으로 저개발국의 공업화를 저지한다기보다 촉진적이라는 점입니다. 1960년대에 NICs가 출현한 이후 오늘날 인도의 공업화에 이르기까지 저개발국의 공업화는 촉진되어 온 형편입니다. 자유무역 체제하에서 저개발국의 공업화가 촉진되는 이유는, 자유무역이 진행되면 국내적으로 선진국으로부터 성장잠재력을 흡수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성장하고, 선진국으로부터 선진적인 제도나 기술 등의 성장잠재력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우창 안 선생님도 예전에 상당히 종속적인 경제 관계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습니까?

안병직 종래에는 한국이 선진국에 의하여 억압당하고 착취당한다고만 생각했는데, 한국 경제가 고도 성장을 지속하는 데 비해 북한 경제가 정체하는 것을 보고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후에 한국 경제 고도 성장의 비밀을 캐다 보니 위와 같은 저개발국의 발전논리를 알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일제식민지 시대에도 고도 성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선생님들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복룡 남미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가 분명히 다른 것은 남미의 종속이론은 경제이론이라기보다는 가톨릭 이론 아닙니까? 가톨릭적 배경이 없었더라면 남미의 종속이론이 가능했을까요? 한국에서는 정치 발전에서 가톨릭의 발전이 미흡했던 시절에는 종속이론도 나오지 않다가 갑자기 남미 종속이론과 남미 신부들의 이론이 이쪽에 들어오면서 한국 사회에도 종속이론이 퍼진 것을 고려한다면, 종속이론의 기본 바탕은 가톨릭의 해방신학이 아닐까요?

안병직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요? 제가 일본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남미 유학생들의 종속 피해의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남미 유학생들은 입만 열면 미국을 비난하기에 바빴습니다. 자기 책임의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래서 저는 남미의 신부들이 이런 대중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종속이론을 심화시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국에서 역사학자들이 국민 속의 반일 감정을 상품화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남미에는 종속이론이 보급될 수 있는 좋은 소지가 있습니다. 남미는 19세기 말에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면서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대개가 자연자원의 개발이고 공업화는 본격적으로 전개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국제 여건이 남미에 불리해지자 한편으로 탈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남미의 저개발화가 진행됩니다. 이 저개발화가 미국 제국주의의 탓인지, 남미가 공업화를 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없어서인지는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경제사 연구에 의하면 남미에서 본격적인 공업화가 한 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인호 종속이론의 타당성을 가장 멋있게 부정한 나라가 핀란드입니다. 핀란드와 소련 간의 경우에는 선진과 후진 문제라기보다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 문제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핀란드가 거의 종속적인 상태로 살았지요. ‘핀란디제이션’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지만 핀란드 사람들은 러시아 제국시대에도 러시아의 식민지였다는 말을 쓰지 않아요.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핀란드는 오랜 시일 스웨덴과 러시아에 종속되어 살다가 러시아 혁명 직후에야 독립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핀란드인들은 러시아 제국으로 편입된 것을 스웨덴과 평화적으로 결별한 후 러시아 힘을 보호막으로 이용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기를 기회로 삼았고, 그렇게 하다가 러시아가 혁명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재빨리 독립을 선포했죠. 그러고도 항상 소련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았고, 2차대전 중에는 한때 히틀러와 협력을 했기 때문에 전후 소련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고 카렐리아의 반을 빼앗겼잖아요. 그래도 사람들은 핀란드로 다 넘어오고 땅만 소련에 빼앗겼지요. ‘핀란디제이션’이라고 하는 게 정말 종속이었나 하는 게 국제학계에서도 종종 논의가 되지만, 분명한 것은 케코넨 대통령이 25년을 집권하면서 강권으로 좌우의 과격세력을 견제한 결과, 겉으로 종속된 듯 보였던 핀란드는 종주국인 소련보다 훨씬 더 잘사는 나라로 발돋움했다는 점이지요. 외세의 힘을 내치는 대신에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한 것이지요.

안병직 겉으로는 종속으로 보였지만, 국제적 관계를 능동적으로 활용한 경우군요.

이인호 핀란드와 대조적으로 폴란드는 기질적으로 그 일을 해낼 수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한때 러시아보다 강대국이었고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에 편입된 폴란드 왕국 체제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완전 독립을 위해 두 차례나 무장봉기를 했다가 결국 자주권마저 잃었지요.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의 경우는 분단 초기에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약체였지요. 공업 기반이 없었잖아요. 하지만 국제 관계를 잘 이용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어요. 종속적인 관계를 슬기롭게 잘 이용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김우창 폴란드의 경우도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다음에 경제 발전을 했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폴란드가 러시아보다 더 선진적인 게 많았는데, 러시아 영토의 일부가 됨에 따라 시장이 넓어져서 경제가 좋아졌다고 보는 복잡한 이야기지요. 물론 18세기, 19세기입니다.

이인호 우리는 자주독립이라는 문제에 워낙 집착을 하다 보니까 독립국가가 된 후에도 국제 관계적 맥락에서 독립이라고 하는 문제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아직도 의식 속에 남아 있지 않나 봅니다.

안병직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한국이 대외관계라는 측면에서 종속이라는 불가피한 역사적 제약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선진국으로부터 발전의 동력을 흡수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인호 우선 체제의 성격을 떠나서라도, 북한은 북한대로 계속 남한을 자기들 체제 속으로 통합하려고 하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하조직을 통해 남쪽으로 침투하는 것이 우리가 북한을 침투할 수 있었던 것보다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죠. 그런 문제에 솔직하게 직면해야만 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가가 설명될 수 있지요.

신복룡 선생님, 그런 얘기를 하면 대한민국의 좌파가 발끈할 겁니다.

이인호 그러겠지요. 친북 좌파를 견제하지 않고도 우리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겠느냐는 질문을 이제는 현실 정치가 아니라 역사 연구의 입장에서 던져 볼 만하다고 봅니다.

안병직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었습니다만, 특히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주체사상이 아닌가 합니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인터내셔널리즘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데, 북한은 오히려 외부의 영향을 극도로 경계하면서 내부적 역량만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다 보니 사태가 점점 악화된 게 아닌가 합니다.

김우창 북한의 주체사상, 아우타르키(autarkie)에 동감을 하는 사람들이 남한에 있겠지요. 경제 발전,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 인간 행복, 환경 문제 들을 놓고 우리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사람도 있을 거고.


4. 수단으로서의 권위주의

안병직 그다음에 대한민국의 결함 중 하나로 권위주의를 흔히 드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형식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 틀은 유지되었습니다만, 실제로는 자유주의를 지킨다거나 경제 발전을 한다는 명목으로 권위주의가 행사되었던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이 권위주의를 자유민주주의 수호나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노재봉 정치권력을 가지고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권위주의를 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후발국의 경우에 민주주의 방식으로 산업화를 달성한 예는 역사적으로 한 건도 없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첫 대열에 섰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하는 국가도 민주주의 방식으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정부의 권위주의 권력에 의해 이루어 낸 것입니다. 산업화라고 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농업사회를 경제적 산업사회로 토털 체인지를 도모하는 건데, 이것은 사실상 혁명이죠. 그래서 강력하고 권력적인 구심력이 필요해지죠. 그런 강력한 구심력을 갖지 않고 나온 게, 요즘 제3라인에 속하는지 모르겠지만, 인도 같은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강력한 권력적인 구심력을 가지고 나아가게 됩니다. 엄청난 강제력이 동원됩니다. 그 강제력은 자본가를 양성시키거나 그 기능에 맡겨서 하는 방식, 즉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인 거죠.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온 것인데, 그렇게 하면서 성공을 했습니다. 한국의 경우를 보자면 국가가 프로젝트를 부여하고 그 지원을 국가가 해주는 식으로 나간 건데, 이게 경제력이 점점 커지고 투입되는 노동력이 현격히 달라지며 국가의 질이 달라지면서 권위주의적인 방식이 통용되기 어려운 한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게 87년입니다.

김우창 그렇다고 권위주의 권력으로 인하여 막대한 대가를 치른 것에 눈을 감을 수도 없지요. 좋은 결과를 냈다고 모든 것을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노재봉 그러니까 가치의 문제는 빼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경우는 혁명적인 프레임이기 때문에 엄청난 코스트가 수반됩니다. 제 얘기는 코스트가 수반되지 않는 경제 발전의 예가 없다는 거죠.

김우창 그래서 코스트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노재봉 그게 저항이죠.

김우창 이런 과정이라는 게 비극적인 여러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사회의 전체적인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겁니다.

노재봉 그렇죠. 그런 형태로 경제 발전에 성공하고 나면 그 코스트라고 하는 것이 저항이라고 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거죠.

이인호 저도 코스트가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것을 얼마나 잘 균형을 잡아서 하느냐에 따라서 코스트가 줄어들 수 있다고 보거든요. 오히려 과잉 억압을 하면 나중에 더 큰 코스트로 나오니까요. 그 한 예가 반공의 문제인데, 70년대에 이런 식으로 반공 정책을 펴면 역작용이 난다고 저는 기회 있을 때마다 경고했어요. 우리의 상황이 19세기 러시아 혁명 전 몇십 년 상황과 굉장히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 같더라고요. 반공을 예로 들면 공산주의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가 뭔가를 납득할 수 있도록 공산주의의 실상을 알려주는 교육 대신, 공산주의에 관해서는 아예 공부할 수도 없게 몽매적으로 반공 교육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반공 쪽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게 독재적이었던 거죠. 그러니 반공의 필요성에 대해, 결국 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겠어요. 반공 교육이 역작용을 일으키는 게 적어도 제 눈에는 보였어요.

노재봉 그래서 이 박사가 미처 경제 개발에 힘을 쏟을 수 없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이 전쟁을 하게 된 상황에서 안보 문제에 전력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안보 문제에 전력을 다하는 과정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다음에 박정희 씨가 들어와서 한 것은, 사실상 내가 보기에는, 안보를 위한 기반 형성이 경제 개발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게 했다는 겁니다. 고속도로만 하더라도 유사시에 비행장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죠. 유사시를 대비해 군사적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 당시까지는 그런 도로가 없었죠.

김우창 그러면 레이건이 ‘스타워즈 계획’을 세워 위성을 띄워 국가 방위 체제를 갖추고 한 일이 모두 정당해지는데, 현실적으로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마키아벨리즘이 정당화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요?

노재봉 사실을 얘기한 것을 규범적으로 전환시켜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잘되었다 못되었다가 아니라 그게 사실이라는 거죠.

김우창 사실을 냉정하게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그것이 규범이 되어 마키아벨리적인 세계 속에 살게 되지요.

노재봉 그런 것을 제가 모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한국뿐 아니라 모든 후진국의 개발에 대해서 자꾸만 규범적인 것을 덮어씌우려고 하는 아메리칸 진보파들을 우려하는 점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현대적 기준을 적용해서 보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 그 사실 관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권위주의 얘기를 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송두리째 한국을 지배한 시기가 일제의 지배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영향이 없었을 리가 없죠. 권위주의 체제가 형성되어 그 영향이 우리 생활 곳곳에 배어 있듯이, 일제 식민지배의 영향이 지배구조와 산업화를 이루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그게 어떤 요소로 내려오고 있느냐는 겁니다.

신복룡 그 산업화 과정에서 권위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정황을 설명하는 책이 하나 나왔습니다. 호주 멜버른대의 김형아(Kim Hyung-A)라는 사람이 박정희 평전을 썼는데, 한국에서 출판된 건 제목이 『양날의 칼』입니다. 산업화로 가는 과정에서 제일 필요했던 게 아마 동원과 정치적 선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타협에 의해서 조화를 이루면서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어떤 면에서는 산업화 과정에서 동원과 선전이 권위주의로 간 것은 필연일 수도 있는 거죠. 선생님 말씀 중에 산업화 과정에 권위주의로 가면서 수많은 코스트와 비극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런 것에 대한 액센트(accent)는 산업화 과정을 유보했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김우창 규범적 차원에서 얘기하면 박정희가 여러 가지 권위주의적인 수단을 통해서 산업화하고 그것이 국가적으로 기여를 했지만, 그런 박정희 정책에 반대한 사람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겁니다. 저는 그런 모순적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긍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안 했어야 된다, 했어야 된다는 식의 판단 없이 박정희가 이룩한 것이 많기 때문에 거기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희생된 사람들은 모두 잘못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저는 비극적인 요소도 평가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노재봉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애그리컬쳐럴 소사이어티(agricultural society)’를 ‘인더스트리얼 소사이어티(industrial society)’로 바꾸는 혁명인데, 그런 혁명적 과정은 오랫동안 제도화해서는 성공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것이 만든 저항적인 요소 때문에 대단히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권위주의가 다른 시스템으로 가는 데 있어서는, 다시 말하면 권위주의에서 탈권위주의로 가는 데 있어서는, 점진주의를 통해서 서서히 가는 게 있고 빅뱅을 통해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복룡 선생님, 전 한 가지 의문이 있는데요. 권위주의 기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어떤 순간에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거기서 의문은 왜 한국의 권위주의는 다른 후발국의 권위주의보다 길었을까, 왜 더 길었어야 했느냐는 겁니다.

안병직 한국의 권위주의는 두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이승만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박정희·전두환 시기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승만 시기의 권위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기 위한 권위주의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건국을 하면서 선진국의 관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실시한다고 헌법에는 명시해 놓았습니다만, 사실상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 즉 민주주의를 실시할 수 있는 국민의식이나 경제적 성숙은 없었던 데 비해 이것을 내부적 혁명이나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의하여 파괴하려는 세력은 막강하게 존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국민이 자율적으로 민주주의를 실천할 능력은 없었는데, 안팎으로 이것을 파괴하려는 혁명세력이나 강력한 북한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은 일시적으로 민주주의를 정지하는 일이 있더라도 반공주의와 같은 강력한 권위주의를 내세워 형식적인 민주주의나마 지킬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이승만 시대의 권위주의가 아닌가 합니다.
반면에 박정희·전두환 시기의 권위주의는 기본적으로 산업화를 위한 권위주의입니다. 산업화를 위한 권위주의란, 경제계획 등의 권력이란 수단을 가지고 방향을 잃고 헤매는 국민경제를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고 감으로써 자율적인 시장경제를 창출하는 과정입니다. 산업화 이전 단계에서는 국민경제가 근대적 및 전근대적인 다양한 범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느 하나의 범주에서도 앞장서서 국민경제를 근대화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국민경제를 근대화하려면 국가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국민경제를 자율적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경제범주를, 국민적 기업을 창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박정희·전두환 시기의 경제개발계획인데, 이를 통하여 기업이 크게 성숙하게 되고, 그 결과로 자율적인 시장경제가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 말기가 되면 중산층이 크게 성장하고 경제의 운행을 점차로 시장에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결과는 87년의 6·29 민주화선언으로 귀결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여러 가지 코스트를 치르기도 했지만 권위주의를 수단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권위주의를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권위주의 시기가 너무 길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동의하기 어렵군요. 48년부터 87년까지로 보면 40년인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한국의 권위주의 시기가 특별히 길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일본의 경우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77년간을 권위주의 시기로 볼 수 있는데, 한국의 경우보다 훨씬 깁니다.

김우창 다시 말씀드리지만, 코스트가 얼마인가가 문제지요. 거기에는 권위주의의 길이도 포함됩니다. 많은 권력의 체제가 양날의 칼이라는 말은 맞는 이야기입니다. 박정희에 대해서 여러 입장이 있겠지만, 그 칼의 효용을 많은 사람이 인정할 겁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에까지 필요한 과정이었느냐는 의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코스트 문제에서, 과거사에 있어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미래의 계획에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겁니다. 희생 없이 일을 하도록 최선을 다해야지요.
이승만의 경우로 돌아가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보하기 위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 현대사를 보면 조선조가 망한 다음에 일어난 독립운동에서 왕조를 되살려야 한다는 운동은 거의 없고 전부 민주적인 정부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한 겁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의 의지도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복룡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정부 헌법을 만들 당시 복벽운동은 대단히 강렬하게 머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임시정부 헌법 제8조가 “대한민국 정부는 구황실을 우대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복벽 무리를 잠재우기 위해서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을 달아 준 것이거든요. 복벽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죠. 대단히 강렬했는데,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서 헌법 조항에 넣기까지 한 것이니까요.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노재봉 한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다시 조선시대로 되돌아가지 않고 민주공화국이라는 식으로 새롭게 체제가 바뀐 것도 혁명입니다. 복벽이 있었죠. 있었지만, 해방이 되어서 당연히 그전 상태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입니다.

안병직 상해임시정부도 민주헌정을 받아들이기는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통치할 국가가 없었으니, 선진 각국의 제도만 따온 셈이지요. 그리고 상해임정에는 국가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도 많았습니다. 독립운동의 결사체이다 보니까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지요. 하여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김우창 민주적인 구조가 사회민주적인 또는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포함되면서 거기에서 이승만이 다른 힘을 조금 더한 것이지, 이승만이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5. 건국과 이승만

안병직 자연스럽게 논의의 주제가 대한민국 건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로 넘어갔는데, 지금부터 건국 과정에서의 이승만의 역할에 관해서 논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인호 권위주의를 이야기할 때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해방 전까지 우리가 경험한 것이 뭐냐는 겁니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정말 소수의 선각자이고, 그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굉장히 높았어요. 그렇지만 국민 전반의 경험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권위주의가 아닌 체제 아래서 살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잖아요. 그 당시의 문맹률이 80%였고. 그런데 그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뿌리내린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작업 아닙니까? 실제로 한민당이나 그 밖의 이 박사 주변에서 같이 정치를 하던 우익들은 사실 이승만보다 훨씬 더 권위적이고 복고적인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정치하던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그러니, 모든 것을 도식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지요.

김우창 이승만 박사가 많은 것에서 선각자였던 것은 사실이죠. 그것도 양날의 칼인지 모릅니다. 거기에서 권위주의적 요소도 나온 것일 수 있으니까. 이승만 정부에서 각료였던 분이 각료회의를 할 때 둥그렇게 앉지 않고 자기는 앞에 앉고 장관들은 학생들처럼 그 앞에 앉혔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붙인 도시인데, 서울도 우남시로 고치는 것이 어떠냐 하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인호 그런데 그게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말입니까?

신복룡 이승만 박사가 회의장에서 의도했든 실언이든 ‘과인寡人’이라는 표현을 쓴 건 기록에 보이는 사실입니다.

이인호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생입니다. 그분이 70세 때 해방이 된 겁니다. 그러니 그분은 몇 세대 앞선 세대에 속한 분입니다. 오늘의 잣대로 잴 수는 없지요. 나라를 생각하고 세계 정세를 이해하는 면에서 국회의원이라는 사람 가운데 이승만 박사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국민 지지도도 국회의원보다 월등히 높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권위주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도 역사적인 맥락을 보면서 발언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쩌면 반대될 수도 있는 맥락에서 말하고 싶은 게 역사에서도 현실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실 선택의 폭이 굉장히 좁다는 점입니다.
아까 말한 안보의 필요성, 그리고 그 수단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다는 주장도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근본 취지나 결과로 볼 때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 등은 정당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저는 권위주의의 구실로서 늘 이야기됐던 것, 곧 경제가 발전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경제제일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기를 들고 싶습니다. 경제력이 없으면 모든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경제만 발달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지리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지요. 경제로 해결되는 부분도 있지만, 도덕적인 면에서나 문화적인 면에서 올바른 방향을 잡는 노력은 가난한 시절부터 시작되어야지, 돈이 많아지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빗나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념 문제를 생각해 보면 무원칙하게 반공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양쪽에서 다 큰 피해가 났고 아직도 나고 있다고 봐요. 사실, 사상 문제라는 것은 매우 미묘한 것이고, 특히 공산 진영의 은폐 전략은 너무도 고도로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사상범들의 경우에는 부인도 형제도 부모도 모르는 식의 가림이 있을 수 있거든요.
소련의 예를 들면, 레닌그라드 당서기장이었던 키로프의 경우처럼 스탈린의 지령으로 비밀리에 암살을 해놓고는 그의 암살범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피의 숙청을 시작한 사례도 있지 않습니까? 그처럼 뒤집어씌우는 작전과 위장 은폐 기술이 매우 발달되어 있거든요. 그럴수록 그에 대처하는 방식도 고도로 세련되었어야 하는데, 우리는 정말 무지몽매하게 반공을 했으니 억울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어 반체제 세력에 가세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렇게 되니까 진정한 비판의식을 갖고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도덕적으로 불가능해졌고요.
그러니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평가는 곤란합니다. 나라가 전체적으로 잘살게 되었다 하더라도 개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억울한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을 길이 없는 것이고, 억울한 희생자들은 좌우 양쪽에서 다 나왔지요. 그래서 사회적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갔고요. 따라서 경제적으로 성과가 좋았으니 다른 것은 덮어 줄 수 있다는 발상도, 정치적으로 과오를 많이 범했으니 경제 발전의 성과조차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도 다 같이 위험한 것이지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리를 보다 정교하게 따지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도 다시 경제만 잘되면 된다며, 다른 쪽은 따지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가 고개를 드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노재봉 그것도 수긍이 가는데, 문제는 우리가 어느 세계에 속했느냐가 고려되어야 하죠. 그리고 권위주의는 틀림없는데,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는 아니었다는 거죠.

안병직 권위주의가 코스트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 때문에 매양 권위주의를 두둔만 할 수 없다는 지적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권위주의는 코스트를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권위주의라 부르지 않는가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권위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경제 발전을 하기 위해 불가피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코스트를 수반하기는 했지만 정당성도 인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시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정치 경제 체제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는 미국과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미군정의 통치하에 있었고 또 건국 후에도 지속적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승만 박사가 스스로를 ‘과인’이라 칭하고 서울시의 이름을 ‘우남시’로 바꾸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개인적인 정치철학도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인호 미국이 귀찮은 존재였던 민족주의자 이승만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근본적인 면에서 정치적으로 가치관이 일치되니까 가능했던 것이지요.
노재봉 가치관이나 소양, 국제적인 환경 등 여러 가지가 합쳐진 것이죠. 그러니까 처음에 헌법을 만들어서 권력 구조를 바꾸었는데, 사회경제적 조항은 그대로 둬요. 권력 구조로 말하자면 「바이마르 헌법」을 굉장히 참고했거든요. 그중 「바이마르 헌법」 48조 긴급 조항이라는 것이 포함됩니다. 이게 묘합니다. 그다음에 사회경제 조항을 그대로 두었어요. 박 대통령 때 경제 개발을 시작해서 나눠 먹을 것도 없는데 보릿고개도 아직 있는 판에 무슨 나눠 먹는 사회경제 조항이냐 이런 말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없앴어요. 그러니 개인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무시할 수 없고, 환경적인 요인, 객관적인 사회라고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죠.

김우창 그리고 개인과 함께 여러 사람이 작용하는 것 아닐까요?

노재봉 그게 정치학적으로는 간단히 이야기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국가든 집단적으로 토론을 해서 합의하는 이런 캐릭터는 없어요. 한 사람의 리더가 압도적으로 정하죠. 어느 나라든지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밑에서 뒷받침하는 사람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게 리더가 어떤 성격을 갖고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 아는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안병직 대한민국의 안보와 한·미 동맹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한·미 동맹이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켜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박사가 아니었으면 한·미 동맹이 체결될 수 있었을까요?

노재봉 그렇죠. 그러니까 뒤에 박 대통령이 경제 개발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할 수 있었지, 안 그랬으면 어려웠을 겁니다.


6. 한국의 전망

안병직 지금까지는 우리나라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앞으로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한마디씩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좌담회를 마무리했으면 합니다.

이인호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개인의 경우 환갑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며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할 준비를 시작하는 시점이 될 수 있지만, 한 나라의 경우는 성숙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라로 단단히 섰고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야말로 국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일에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는 말이 될 수 있겠지요. 그래서 크게 경축해야 할 일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북한과의 관계를 볼 때 평화적 관계 수립과 통일에 대한 전망이 전보다 나아졌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남북한 사이의 상호 불신, 체제의 성격, 경제적 상황과 지위, 사회문화적 관행과 언어상의 차이와 같이 전에부터 있던 문제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이제는 북한이 핵 보유 세력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이러한 어려운 현실을 사실로서 직시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에 더해 중국, 인도, 러시아 등 덩치가 큰 나라들이 경제적으로 약진함에 따라 우리의 상대적 지위는 계속 하락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으로 또는 경제의 규모로 그들과 계속 경쟁해 나가기는 점점 어려워질 것이고, 결국 인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가동시키는 길밖에는 대응할 길이 없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추격해 오는 경쟁세력들보다 앞서서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니 설상가상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문제를 직시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며, 뭉쳐서 지혜를 짜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선진화’라는 막연한 추상적 구호만 가지고는 국민적 역량을 결집시키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 국민은 위기의식을 느낄 때는 분연히 일어나지만 조금만 안도의 숨을 쉬기 시작하면 다시 심각한 분열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지금 사실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경제 위기, 환경 위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증후들이 뚜렷하고 많은 나라가 위기관리 체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우리끼리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정신적으로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노력이 선진화나 실용주의라는 구호를 뒷받침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려면 계속해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발전의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일, 곧 복지의 하한선을 계속 높여 가는 노력이 눈에 보여야 성장을 강조하는 정책에 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자본주의의 계속적 발전이나 세계화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역사적 추세이니 역류해 올라갈 수는 없는 일이고, 그 물결을 어떤 식으로 타는 것이 우리 국민과 민족이 그리고 인류 전체가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고 생태계를 더 이상 파괴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길인가 하는 데 대한 깊은 고민과 삶의 방식에 대한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좀 더 가깝게는 건국과 제헌 60주년을 앞두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제헌 당시 우리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가를 헌법을 읽어 봄으로써 다시 일깨우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복룡 저는 민주화 세력이 왜 실패했는가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아주 난해한 거대 담론을 쉬운 말로 풀이하는 것도 어렵지만, 아주 보편적이고 쉬운 문제를 거대한 학술용어로 풀이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렸느냐면, 민주화 세력들, 특히 노무현 이후의 실패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통속적이고 여염에서 있을 수 있는 그런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공자孔子의 말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 고민 혼자 다 하면서 공부 안 한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思而不學則殆.” 저는 이 얘기가 지금의 노무현 정권의 말로를 압축적으로 설명해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은 민주화에 몰두하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경륜을 축적할 수 있는 학습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지적 무지가 지금의 말로를 보여 주는 겁니다.
통일 문제에 대해서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훌륭한 일을 해서 상을 타는 것이지, 상을 타기 위해서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이 시대의 민족지도자들이 혼자 고민하고 결단을 해야 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겠지만, 진정 통일을 걱정하고 민족적 고뇌 속에서 살다 간 지도자가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대단히 부정적이고 회의적입니다. 정말 이 시대에 통일 담론을 할 수 있는 역사적 소명이 있는 인물이 있었을까요? 저는 해방정국에서 남북 협상의 주역들도 진실로 우국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북한으로 넘어갔을 적에는 제주 4·3 사태가 일어나고 5·10 선거는 다가왔으며, 본인들이 당선될 가망은 없었습니다. 현장으로부터의 도피였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남북 협상의 결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단독정부를 수립할 적에 김구 선생의 기록을 보면, “저는 형님 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거든요. 김구 선생도 애초에는 이 박사의 생각대로 단독정부 수립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구가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하는데, 그것은 그가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서 검찰청에 끌려가 문초 받은 개인감정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군정청 기록에 의하면, 김구 선생을 “아주 짓이겼다.”라고 합니다. 제가 젊었을 때 행태주의 정치학에 한번 심취한 적이 있었던 탓인지, 이런 게 다 행태주의적으로 보여요. 인간은 대승적 요구보다는 소승적 요구가 더 많았어요.
그리고 또 혈육, 밥, 돈…, 이런 것들이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한 순간이 많습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드리면 저는 홍명희 선생과 아래윗집에 살았습니다. 홍명희 선생이 북한에 넘어간 것은 조국을 통일하고 뭐, 그런 거 아닙니다. 자식 보고 싶어서 넘어갔습니다. 홍기문이 먼저 넘어갔고 먼저 마르키스트가 되었거든요. 그런데 그 당시 공산주의자였던, 좌파였던 인물들의 처자식은 한결같이 다 이북에 가 있습니다. 여운형, 박헌영, 김두봉, 홍명희 등 처자식이 모두 이북에 갔습니다.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나는 죽더라도 너는 살라는 뜻인지, 나도 곧 넘어가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인질이었는지 등 이런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망연자실할 때가 있습니다.

노재봉 실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국민 모두가 엄청나게 노력했고 희생했죠. 경제적으로도 엄청나게 성장합니다. 경제 발전이 지속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87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노동력의 질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요. 노동 시장에 고급 인력이 진입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단순히 육체노동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하던 시대가 지나간 겁니다. 이게 중산층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죠. 중산층이 들어가서 기술과 경영을 담당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관료 조직이 관여하면 할수록 부작용이 커져요. 구조적으로 민주화의 필요성이 높아지기 시작한 겁니다. 더 이상 관료 조직이 개입해서는 그 이전처럼 발전하기가 어려운 사회 구조로 변화한 겁니다. 이미 사회는 군대가 개입하고 군인 출신들이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상황으로 간 겁니다.
87년에 사회적으로도 민주화 요구가 들끓었고 데모가 굉장하지 않았어요? 그 당시의 상황은 우리 사회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코스트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런 민주화 과정을 커다란 코스트 없이 비교적 잘 뚫고 나왔습니다. 물론 그 후에 IMF다, 뭐다 해서 민주화 과정에서 상당한 코스트를 지불했습니다. 그 이유는 민주화 시대에 맞는 우리 사회의 독자적 발전 모델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과거에 우리는 일본 모델로 경제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본 모델을 모방해서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독자적인 모델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민주화 이후에 독자적 발전 모델이 없기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겁니다. 아마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선진화 모델이 도출되어야 할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통일 문제를 추진할 수 있는 힘도 생기고 사회 자체의 면역성도 생기는 거죠. 통일 문제는 그 바탕 위에서 추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김우창 지금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노스웨스턴대의 게리 윌스는 오바마를 높이 평가하는 글을 낸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흑인들의 교회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대체로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흑인들의 교회는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형제자매가 하나로 손을 잡고 함께 구원되는 것을 원하는 전통이 있다.”라고. 그리고 오바마의 정치적 이상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나 사회적 지위를 위한 무한경쟁이 허용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사회적·지정학적 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고르게 행복할 수 있는 인간적 사회의 실현이 우리의 정치 이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통념적으로 말하면 사회민주주의의 정치 이상이 여기에 가깝겠지요. 그러나 그것도 물질적 번영의 한없는 추구를 전제로 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허용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 그리고 지구적인 환경의 제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실현이 균형을 잃은 물질과 권력의 추구에서 발견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상의 실현이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커지는 데에도 그렇지만, 특히 사회적 형평의 질서를 확보하는 데에 강대한 국가 권력이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 우리가 보아 온 역사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금방, 억압과 부패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도 익히 보아 온 현실입니다. 이것을 피하는 인간성 실현을 위한 사회 진화는 커다란 참을성과 너그러움, 지혜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물론 북한이 이러한 과정에 동참하지 않는 한 평화적 진화의 과정은 더욱 착잡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정세도 문제입니다. 세계가 모두 우리와 반대로 간다면 우리만이 고립된 방향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쪽으로 움직여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류는 자멸의 길로 간다는 의식이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간의 우리의 역사 과정은 우리의 정치에 대한 이해를 지나치게 마키아벨리적인 것으로 되게 하였습니다. 권력 중심의 사고가 정치의식, 나아가 생활의식의 핵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치의 세계가 권력투쟁의 세계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이 야망을 넘어가는 높은 이상적 차원을 가진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간을 확대하는 정치가 가능해지고 그것을 위하여 헌신하는 정치지도자가 나오게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안병직 저는 근년에 와서 한국의 현대사적 과제를 선진화와 통일로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현재 북쪽이 그들의 말과는 달리 통일을 할 의사도, 준비도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바로 통일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이고, 그동안 남쪽은 지금까지 말씀 나눈 대로 상당한 역사적 성취가 있었기 때문에 선진화를 우선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현 정부도 선진화를 국정의 기본 방향으로 잡고 일을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만, 보시는 바와 같이 선진화라는 것이 간단히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나름 생각해 보니, 선진화가 국정의 최우선 과제라는 데 대한 국민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바와 같이 참여정부만 하더라도 국정과제로서 선진화보다는 통일을 더 우선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무리하게 햇볕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고 촛불 시위 등 반미·반일 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이명박 정부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들의 정치적 지향이 갑자기 바뀔 수는 없지요.
선진화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선진화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획득하는 작업부터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한나라당이라도 단결해야 합니다. 한나라당의 단결이라면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정치적 파트너십을 이루어야 하는데, 현재 그것이 제대로 되고 있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국민 통합의 조건으로 보수세력만이라도 결집해야 하는데, 지난번의 조각이나 국회의원 공천 과정을 보면 이러한 점에 대한 고려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의 국민 통합 조건은 진보세력으로부터 선진화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하는데, 이 문제는 지극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국정과제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던 햇볕 정책을 포기하고 선진화 정책에 동의하라는 것이니까요. 이를 위해서는 통일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정치 방향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러한 일이 쉽게 달성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부에서 이러한 일들이 선진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군요. 실은 오늘의 좌담회에서 제가 대한민국의 성취를 기반으로 하는 성취를 계속 강조했던 것은 이러한 생각이 그 배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좌담이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자평하기가 어렵습니다만, 여러 선생님의 발언은 매우 유익했다고 생각합니다. 장시간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