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현종 교수는 이태진 교수와 본인이 주고받은 글을 읽고 본인의 입장을
“근대화 지상주의”라고 명명했다. 이름을 붙이는 쪽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의아해 한번 더 읽어 봤지만 본인에게 붙인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방향감각이 없는 글이 쓰여진 것은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근대화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근대경제성장’(modern
economic growth)이며, 이것은 한 사회가 전근대사회와 달리 장기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개시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적인 인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1인당 소득이 증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증거를 통해서 검증할 수 있으며 주관이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 매우 단순한 내용인 것 같지만, 근대경제성장을 통해서 농업사회에서 산업화된 사회로 변화했으며 도시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의 생각이
세속화되며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는 등 인류역사에서 전례없이 거대한 변화가 진행됐다. 우리가 현재 익숙하게 알고 있는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축적과 더불어 시장경제의 발전과 산업화를 가능하게 하는 다양한 차원의 제도(institution)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본인이 이태진 교수와 논쟁을 했던 것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이 근대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축적과 제도를 갖추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구체제의 극복이 조선왕조의 부정은
아니다
본인은 이 교수와 일반의 상식에서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는 우리나라만 예외적으로 ‘구체제’의 극복이라는 보편적인 문제가 부재했던 것처럼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불행히도 이민족에 의해 패망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곤란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민족에게 패망했다고
하여 왕조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식민지화라는 역사과정을 두가지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는데, 하나는 이민족에 의한 지배라는 차원과 다른 하나는 구체제의 종식이라는 차원이다. 이 두가지 차원이 중첩돼 있기 때문에
식민지시대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그렇듯 복합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구체제의 극복이라는 것이 조선왕조의 전 문명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근대에 대한 무비판적인 긍정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본인은 조선왕조가 도달한 문명이 현재 우리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의 寶庫라고 생각하고 있다. 본인은 이 교수와 왕 교수가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왕조를 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근대경제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됐다고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 말문을 막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추계가 잘못됐다는 것을 반증하면 된다. 근대경제성장을
통해서 비로소 야만에서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사에서 근대가 문명의 얼굴만 보여주었던가. 식민지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후기부터 일제시대에 걸친 인구, 생활수준, 소득, 산업구조의 변화 등에
관한 객관적인 사실을 확보해야만 주관적인 해석이 난무하는 현상을 타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식민지 시대가 그곳에만 들어가면 어떠한 사회과학의
분석방법도 작동을 멈추는 특이공간인 것처럼 남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과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도 주관적인 의지만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내재적 발전론’은 식민지화 이전에 제대로 된 왜곡되지 않은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제국주의에 의한 왜곡과 좌절이
없었다면, 그리고 지금이라도 그러한 왜곡을 바로 잡는다면 제대로 된 근대화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주지하듯이 우리나라가 식민지화 이전에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십년을 노력해왔다. 그리고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가 추구할 지상의
가치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고투했겠는가. 왜곡되지 않은 그 근대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
식민지 경제제도와의 연속성
성찰해야
‘내재적 발전론’이 바라마지않는 굴절 없이 탄탄대로를 거쳐 근대경제성장을
시작했던 나라가 지구상 몇이나 있었는지 궁금하다. 가보지 않은 길과 비교하는 일보다는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근대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에
대해서 그 실상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그 시대가 지금의 한국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제국주의는 전능하지 않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족한 자원으로 이민족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일제시대에 근대경제성장이 시작됐다고 하여 그것이 모두 제국주의자만의 作爲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식민지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식민지가 되면서 구체제가 붕괴되어 경기규칙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새로운 제도적 환경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사회는 식민지시대에 개시된 근대경제성장의 연장선
위에 있으며, 식민지시대의 과거는 제도의 연속성을 통해서 현재와 굳게 연결돼 있다(동시에 식민지시대는 우리의 전통사회와도 이어져 있다). 이
점을 숙고한다면― 현시점에서 정말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주장하듯이 식민지시대에 개시된 근대경제성장 과정을 우리 역사에서
소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長期歷史에 통합해야만 한다. 이때 과거는 외국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식민지
시대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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