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재일작가 유미리 "그러나 죽을때까지 쓴다"
소외되고 고립된 계층에 빛 한 조각
던져주는 작품 쓰고파
도쿄 시부야(삽곡) 번화가의 프랑스풍 카페에서 그녀를 만난 것은 토요일 오후였다. 주말이면 늘상
그렇듯이, 작가 유미리(류미리·31) 씨의 연락을 받고 찾아간 시부야는 독특하고 윤택한 소비문화로 무장한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노란 머리에
얼굴을 검게 화장한 '시부야족'의 행렬이 이곳 '해방구'에 끝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터뷰의 취지는 그녀의 근황을 소개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엄청난 독자층을 보유한 그녀지만 요 1년간 한국 매스컴에 거의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넉달 전 명예훼손
소송에서 1심 패소 판결을 받은 것을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궁금했다.
약속 시간을 15분 지나 그녀는 혼자 모습을 나타냈다. 원색의 거리 시부야에서 단정하게 빗어넘긴
그녀의 검은 생머리는 도리어 튀어 보였다. 아이스 밀크티를 주문한 뒤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영양부족의 느낌을 주는, 건조하고
창백한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순간 준비했던 순서를 잊고 바보같은 질문부터 튀어나왔다.
-오늘 점심 때는 무얼 먹었나요. "집에서…. 사실은 식사택배(택배·식이요법이 필요한 환자
등을 위해 전문업체가 밥과 간단한 반찬을 집에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받고 있어요. 매일 배달돼오는 음식을 전자렌지에 데워 먹지요. 요리를 할
필요도 없고, 한끼 때우려 귀찮게 외출할 필요도 없어 좋아요."
-별로 맛이 없을텐데. "저는 식욕이란 것을 별로 느껴본 일이 없어요. 맛으로 음식을 먹지
않아요. 생존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영양만 섭취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발전돼 알약 하나로 한끼를 떼우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먹는 즐거움을 마다하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생머리나 화장기없는
얼굴, 치장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그녀의 모습은 시부야 기준의 상식을 잣대로 해서는 접근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먹는 게 즐거움인 인생을 삶의 그 어디쯤에선가 내다버린 셈이겠죠. 작품 속에서, 종이 위에서 주인공과 똑같이 살고 죽는 그런 인생을 선택한
것이죠."
-화장도 안하나요. "전혀 안해요. 거울 앞에서 눈썹 그리고 입술 칠하느라 시간을 쓴다는 게
아깝잖아요. 다행히 머리도 손질할 필요가 없는 머리를 가졌고. 집에 화장품은 하나도 없어요. 입술 마를 때 바르는 맨소래담 뿐이죠. 화장품뿐
아니라 식기도 없고, 변변한 가구나 생활용품도 없지만…. 집에 와본 사람은 책만 수북이 쌓여있는 게 사무실 같다고 해요. 나는 '생활'이란 것을
어딘가에서 잃어버렸구나 하는 생각도 들지요."
화제를 시부야의 10대 문화로 돌렸다.
-이른바 '고걀(고교생+걸의 일본식 합성어) 문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젊은 세대는
자기들이 어른 세대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어른과의 차이를 특권화하려 들죠. 그 결과 개개인의 고유한 것을 버리고 '고걀'이라는 공통의
기호에 매몰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결국 '고걀'이나 시부야 패션처럼 모든 젊은이가 똑같은 기호, 똑같은 옷차림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죠."
-물질주의라는 10대의 공통기호도 있죠. "그 극단적인 예가 여중고생의 '원조교제'인데….
하지만 그들을 소비사회에 밀어넣어 물질주의로 치닫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어른입니다. 10대를 소비자로 타깃을 설정하고 선동하니까 그들이 매춘과
원조교제로 빠져드는 거죠."
-기성세대가 10대를 오도하고 있다고 봅니까. "일본의 문제는 버블경제 때 모두들 돈과 땅만이
가치있는 것이라며 광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마음이 황폐해진 것이죠. 지금의 '고걀' 세대는 그런 부모를 보면서 자라났어요. 돈과
고급 브랜드가 가장 가치있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몸을 팔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그녀의 말마따나 시부야 문화와는 동떨어진 여인이 이곳으로 약속장소를 정한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카페는 단골인 모양이죠. "아뇨. 며칠 전 시부야 근처로 이사했는데, 지나다가 이 카페를
보아 두었어요. 들른 것은 오늘이 처음이구요."
-독신 여성은 대개 애완동물을 기르던데. "안 키웁니다. 집안에 숨쉬는 것이라고는 저 혼자
뿐인 완전 독신생활입니다. 5년 전쯤 고양이를 기르다가 죽었는데, 그 후엔 살아있는 동물이 싫어졌어요. 또 작품을 쓸 때는 집을 비우고
잠적하니까 돌봐줄 사람도 없고."
-잠적이라뇨? "워드프로세서와 옷가지를 싸들고 깊은 산이나 외딴 섬으로 갑니다. 예전엔
아오모리나 니가타 같은 동북지방의 산속으로 들어가곤 했어요. 겨울 내내 눈속에 갇혀지내야 하는 곳이죠. 가장 최근 작품인 '골드러시'는
하쓰시마라는 섬에서 썼어요. 아타미에서 배로 꽤 들어가는 조그만 섬이었어요."
-왜 도망갑니까. "현실에서 떨어져 픽션의 세계로 빠져 들려면 역시 도시를 벗어날 수밖에
없어요. 차단되고 고립된 상태에 스스로를 밀어넣지 않으면 글이 안나와요."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혼자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출판사 담당 편집자도 걱정이
됐던지 한달에 한번씩 '감시'하러 왔어요. <골드러시>에서 주인공 소년은 정신적으로 점차 폐허가 돼가는데, 나의 정신상태도 주인공과
비슷해져 갔죠. 잠을 못자고, 아무도 없는데 혼자말로 떠들기도 하고. 그렇게 1년 동안 섬에 틀어박혀 <골드러시>를 썼어요. 거의
발광 직전까지 갔어요. 다 쓰고나니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해 너덜너덜해진 느낌까지 들었어요."
-글이 나가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주인공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장면에서 꽉
막혀버렸지요.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질 않았어요. 마침 선착장에 배가 들어왔길래 무조건 올라타고 섬을 탈출했죠. 아타미로 나와 전자오락도 하고
배회하며 그날 밤을 보냈어요. 그랬더니 섬으로 되돌아가기가 죽기보다 싫어지더군요. 결국 억지로 돌아가긴 했지만 한 동안 글이 나오지 않았어요.
글이 막혀도 도망가면 안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죠. 고통스러울수록 더더욱 워드프로세서 앞에 버티고 앉아 정면으로 맞서려고 합니다."
-<골드러시> 때는 작품구상을 먼저 한 뒤 섬에 갔나요. "아뇨. 완전 백지 상태였어요. 저는 원래
글쓰기 전에 미리 골격을 짜두는 스타일이 못돼요. 우선 주인공 소년을 소설 속 무대인 '고가네초'라는 거리에서 걷게 해보는 겁니다. 내가 소년이
돼, 소년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를 같이 체험하는 거죠. 무엇이 벌어질지,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저도 몰라요. <골드러시>의
앞부분에서는 소년이 누구를 살해할지도 정하지 못했죠."
-소설을 쓰는 작업 자체가 소설 같군요. "한 사람의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살아보지 않으면 어떤 인생이 될지 알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작품도 인생처럼 쓰고 싶어요. 내 인생 자체를 담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끔은 기분전환도 필요할텐데. "저는 작품을 쓸 때는 오락과 완전히 담을 칩니다. 먹고 잘
때를 빼고는 계속 워드프로세서 화면을 향해 씨름을 벌이죠."
-그러면 작품을 쓰지 않을 때는 뭘 하십니까. "사실 취미가 뭐냐고 질문받을 때가 제일
곤혹스러운데…. 내 동년배 사람들이 하는 놀이는 전혀 하는 게 없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엔 해수욕장에 가본 일이 없어요. 풀장이나 디스코텍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기고 싶다는 욕망은 있겠죠. "하쓰시마에서 <골드러시>를 쓸 때인데….
해수욕장에 가족끼리 연인끼리 놀러오는 것을 창문에서 바라보면서 나의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그저 종이위 픽션의
세계에서 살다 죽는 게 내 인생인가 하고 말이죠."
어느 잡지 인터뷰에선가 그녀가 술 얘기를 한 것을 기억해냈다. -술은 좀 마시죠? 누구랑
마시나요. "술친구는 거의 출판사의 편집자들입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았으니 다른 친구가 없어요. 출판사 사람들은 나에게 가족같은
존재들입니다. 섬에서 작품 쓸 때 머리가 자르고 싶어 가위를 보내달라고 팩스를 보낸 일도 있어요. 그랬더니 여성 편집자가 배를 타고 가위를
갖고와 목욕탕에 나를 앉혀놓고 머리를 잘라주더군요. 언니 같은, 그런 관계지요."
-주량은. "많이 마시진 못하지만, 도중에 자리를 뜨진 못합니다. 여러 명이 같이 마시면
마지막 남은 사람까지 보낸 뒤 귀가하는 스타일이에요. 내일 중요한 일이 있어 먼저 실례합니다, 이런 말을 성격적으로 못합니다. 이성문제로
고민하는 한 출판사 사람과 아침 7시까지 술집에서 지샌 일도 있어요."
-무른 성격이군요. "그래요. 냉정하게 자르거나 거절하질 못해요. 그래서 사람과의 교제가
서툰지도 몰라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죠. 사람을 만나면 어디까지 다가서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느냐, 이게 너무 힘들어요. 작품 쓸 때
도피하는 것도 도쿄에 있으면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기도 하죠."
-언제부터 워드프로세서를 썼나요. "22세 때부터입니다. 그 전엔 만년필을 썼는데, 글씨가
악필이어서 연극 배우들이 읽질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프린터가 달린 워드프로세서로 바꿨죠."
-기계를 쓰면 상상력이 빈약해진다는 작가도 있던데. "저는 좀 독특한 방법을 쓰죠. 우선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쓴 뒤 10매 단위로 프린트해 종이 위에서 붉은 펜으로 교정을 보아가며 정서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워드프로세서에 입력하죠.
손으로 쓰는 과정이 없으면 역시 작품이 빈약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을 쓸 때 누구를 의식합니까. "저의 주된 독자는 현실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계층입니다.
등교거부 중학생이나 부모가 이혼해 우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소년, 사람을 찔러 소년원에 수감된 여학생 등이 편지를 많이 보내오죠. 이런
독자들이 내 소설을 읽고 구원이랄까, 빛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면 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의 명예훼손 소송에서 실존 인물을 모델로 썼다고 해서 1심
패소했는데. "좋은 일만으로는 사람이 성장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패소는 저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어요. 소설이란
무엇인가, 현실과 픽션의 관계는 어때야 하는가 등등 말이죠. 이런 원초적 문제를 생각해가면서 항소했지요."
-준비중인 다음 작품은. "오키나와(주일 미군 부대가 밀집해 있는 일본 동남쪽 섬 편집자 주)
출신의 소년 테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려고 합니다. 미·일 안보문제까지 터치한 정치소설을 쓰고 싶어요. 내년 7월쯤 완성예정입니다."
-정치소설은 처음 아닌가요. 그동안엔 본인 경험이나 사회적 사건을 주로 소재로
써왔는데. "지금은 사회의 온갖 제도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가족제도도 그렇고, 학교제도도 그렇고. 무너져가는 제도들이 날카로운
파편이 돼서 개개인들에 꽂혀들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개인을 그리는 것도 정치나 사회제도와 무관할 수 없어요. 작가가 사에 지나치게
몰입되는데서 벗어나 공의 문제도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변신인가요. "저는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흥미있는 것은 하나 뿐입니다.
현실이랄까, 사회와 틈이 벌어진 곳, 고립되고 소외된 사람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 자신이 무너진 가정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몇 살까지 작품을 쓰겠느냐고 묻자 즉각 "죽을 때까지"란 대답이 돌아왔다. 글 쓰는 것이 생활이고
존재증명인, 소설 속에서 인생을 보내는 31세의 건조한 삶이 그곳에 있었다.
(도쿄=기자 : j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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