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교수가 번역했다면 안 믿는 게 출판계 불문율
[기고-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공공 지원시스템이 가동돼야
오마이뉴스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번역' 논란으로 출판계의 잘못된 번역관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더구나 이같은 관행은 일부 출판업자의 비도덕성 차원을 넘어 우리 출판업계의 구조적 문제와 깊게 연관돼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의 기고문을 통해 현행 번역출판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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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1월 출간된 <마시멜로 이야기> 표지. 번역자는 정지영 아나운서로 되어 있지만, 현재 대리번역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번역이 '대리번역'이냐 '이중번역'이냐 하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번역을 둘러싼 관행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실제로 출판계는 대리번역에 관해 심각한 도덕적 불감증을 앓고 있다.
공식적 통계에 따르면 작년에 번역서는 8938종이 출간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1만5000종 이상이 출간됐다고 보아야 한다.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번역해줄 전문번역가의 수에 비해 출간된 책의 양이 너무 많은 것이다.
또 실력이 인정된 번역가에게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적지 않은 출판사들이 전문번역회사나 초보번역자에게 일을 맡기고 책이 출간될 때에는 그 분야의 전문가나 기업 경영자 또는 학자의 이름을 대신 올리기도 한다.
자기계발서 같은 경우에도 이런 일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경우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책은 학문적 깊이나 정치한 번역 수준이 요구되지 않을 수도 있고 원고를 '수리'하거나 가감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술서의 경우는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야의 정통한 학자가 번역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번역 작업을 하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번역료가 영어는 2백자 원고지 1매당 3500~4000원, 일본어는 2500~3500원,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3500~4000원 정도여서 노력에 비해 경제적 보상이 적은데다 번역 작업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해주지도 않는 풍토다.
그래서 교수들은 대부분 대학원생들을 활용해 조악한 수준의 번역원고를 넘겨준다. 출판계 내부에서는 유명한 교수가 번역했다면 믿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되어 있다. 정말로 성실하게 번역해주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그야말로 소수이기 때문이다.
번역가를 믿지 못하니 편집자가 번역가가 할 일을 대신하기도 한다. 실제로 한 편집자 출신의 비평가가 지적했듯이 수많은 편집자들이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고 있으며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섀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자가 번역자 노릇하는 경우 허다
그러나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편집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교정ㆍ교열을 외부에 아웃소싱하는 일이 많은데 그런 경우 문장을 제대로 손보기는 어렵고 겨우 오자나 잡는 수준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독자는 해독도 하기 힘든 책을 붙잡고 씨름하다가 중간에 책을 놓고 마는 것이다.
이런 틈을 비집고 최근에는 번역전문회사가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그런 회사들은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시켜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의 역할을 자임하는데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출판사가 급하게 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나누어 번역한 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획일성만 손본 원고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이런 원고는 한마디로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들이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들이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기도 한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독일어, 불어 등 '제2외국어' 분야에는 '인적 자원'이 넘치고 있어 번역 수준이 차츰 올라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잡지 못한 사람들이 번역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번역을 평생직업으로 여기면서 자기만족감을 느낄 수 있으려면 번역을 제2의 창작행위로 여기고 정신적, 물질적 대우를 해주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학자가 번역을 했다면 이를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해주어야 하고, 프리랜서 번역자가 했다면 전문가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전문번역자가 늘어나려면 번역료를 획기적으로 올리는 것이 최고의 당근이 될 것이다. 일본의 법인 또는 단체가 일본책의 한국어 번역료를 통상 1만원에서 1만5000원 선에서 지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번역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 최근 온라인서점에서는 무한할인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질은 담보되지만 시장성의 한계로 할인폭이 적을 수밖에 없는 책들은 갈수록 팔리지 않는다. 이런 사태가 몇 년 동안 지속된다면 수준 있는 학술번역서의 출간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예로 든 번역료보다 못한 경우가 훨씬 많다. 지금의 번역료는 10여 년 전의 수준에 불과한 것이어서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오히려 갈수록 번역료가 낮아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번역에 '목숨'을 거는 번역자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학술서를 펴내는 출판사의 입장에서는 현행의 번역료만으로도 출혈이 심각하다. 가령 2만원 정가의 책이 1000부가 팔렸다면 매출액은 1400만원 안팎이다. 이 금액을 모두 번역료로 지급한다 해도 시원치 않을 터인데 이 비용으로는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마저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번역료를 아무리 깎는다 하더라도 출간하자마자 적자가 발생하는 셈이다. 당연히 대다수 출판인들은 이런 출판을 꺼린다. 그래서 자기계발서 같은 책들만 죽어라고 펴내고 있으며 결국 <마시멜로 이야기>의 사태까지 불러온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일부 출판사는 책이 많이 팔렸을 경우 번역자와 '성공과실'을 함께 나눠 가지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번역자에게 최소한의 번역비를 보장하면서 팔리는 만큼 인세를 주는 번역인세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 번역자는 번역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라 텍스트의 질은 당연히 올라간다. 그러나 1000부도 넘기기 어려운 학술서는 이렇든 저렇든 실력 있는 번역자를 잡기가 쉽지 않다.
번역출판 부실, 출판사에만 책임 떠넘기기도 어려운 형편
결론적으로 이 땅의 번역출판 부실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문제이다. 내수시장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출판사에게만 책임을 떠넘기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후원시스템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늘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번역활동 지원 단체를 확충하고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등 처방책을 내놓았지만 실제로 이뤄지고 있지는 않다.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이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더구나 최근 온라인서점에서는 무한할인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질은 담보되지만 시장성의 한계로 할인폭이 적을 수밖에 없는 책들은 갈수록 팔리지 않는다. 이런 사태가 몇 년 동안 지속된다면 수준 있는 학술번역서의 출간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 한기호
따라서 국가나 기업에서는 서둘러 번역을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의 확충이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공공도서관도 서둘러 확충해야겠지만 열악한 학교도서관의 정상화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처럼 학교도서관이 도서관 단체가 추천한 책을 적어도 수천 부, 때에 따라서는 수만 부를 구입한다면 구태여 출판사가 무리수를 쓰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이 가동된다면 번역서뿐만이 아니라 집필서의 질도 함께 올라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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