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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 - 조정래論

이강기 2015. 10. 2. 11:03

[기획] 우리 시대의 진보적 지식인 -  조정래論

 

시대정신 2007년 여름호


광기 서린 증오의 역사소설가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을 중심으로-

[이영훈 | 서울대학교 교수]

李榮薰 서울대학교 한국경제사 박사, 現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경제사학회 연구이사, 『時代精神』 편집위원, 저서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공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저)』 등이 있음.

1. 序論: 역사학과 역사소설

조정래 씨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이하 존칭 생략) 나는 소설을 열심히 읽는 편이 아니지만, 당대의 소설가 하면 이문열, 황석영 그리고 조정래 정도로 알고 있다. 조정래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소설가다. 그의 대하소설 『아리랑』 12권은 무려 350만 권이나 팔렸다고 한다. 한 사람의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성공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는 20세기 말 한국의 시대정신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소설가의 창작정신으로 흡인하여 역사소설로 구체화하였다. 그 작업에 있어서 그는 부지런했고 또 용감했다. 그의 성공에 그러한 찬사를 아낄 이유가 없다.

조정래의 창작정신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좌파 민족주의가 아닐까 싶다. 그에게 역사소설가로서의 명성을 안겨다 준 『태백산맥』(1986~1989)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저항한 좌파 정치세력에 도덕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그 때문에 그는 한국의 공안당국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은 적도 있다. 뒤이어 나온 식민지기를 무대로 한 『아리랑』(1990~1994)의 기본정신은 민족주의다. 여기서 좌파 이념의 냄새는 그리 강하게 풍기지 않는다. 소설가의 이념적 지향은 차라리 무정부주의적인 듯하다.

어쨌든 이 두 역사소설을 통해 조정래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이 좌파 민족주의를 지향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였다. 주지하듯이 1997년 김대중 정부의 성립을 계기로 좌파 민족주의가 한국 정치에서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조정래는 그러한 변화가 있기 10년 전부터 좌파 민족주의를 그의 창작정신으로 소화하여 소설의 형태로 보급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시장은 그의 선구적 노력에 대해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성공으로 보답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조정래의 좌파 민족주의에 대해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그의 역사소설이 문학적으로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는 나의 직업능력 밖이다. 나는 이 글에서 조정래의 『아리랑』을 대상으로 하여 그것의 역사학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평가하고자 한다. 역사소설과 역사학 텍스트와는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나는 직업이 역사가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도 좋을, 약간의 자격을 보유하고 있는 편이다.

역사소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이 두렵지만, 역사소설과 역사학과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둔다. 역사소설은 역사적으로 발생한 실제의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소재로 채택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 남아 전하는 사료가 매우 적어서 소설이 거의 소설가의 상상력에 의존하여 장대한 허구로 작성되는 경우이다. 황석영의 『장길산』이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실은 여수ㆍ순천의 반란사건을 다룬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고 하겠다. 『태백산맥』에서 역사학 측이 시비를 걸 연대기 수준의 사실 왜곡은 보이지 않는다.

둘째는 소설의 소재가 된 사건과 인물이 가까운 과거에 속하여 관련 사료가 풍부하게 전하는 경우이다. 이런 부류의 소설로서 내가 읽은 것 하나를 소개하면 서기원의 『광화문』을 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 개항기에 흥선대원군을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 조선왕조가 처한 위기적 상황을 묘사한 소설이다. 여기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실제로 활동한 인물들로 소설의 줄기가 엮어지기 때문에 독자들은 연대기 형식의 역사서라는 느낌으로 소설을 읽는다. 소설가는 우선 남아 전하는 사료를 섭렵하여 실제로 벌어진 연대기 사실을 충실히 배열할 필요가 있다. 사료가 아무리 많다고 하나 역사적 사건의 전모를 복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아 전하는 사료는 본질적으로 우연에 불과하다. 역사학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이 같은 제약이 역사소설의 출발점이 아닐까 싶다. 커튼 뒤에서 실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소설가는 자신의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사실과 사실 사이의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간다.

국내에도 넓은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다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를 그런 작업을 훌륭히 수행한, 대표적인 역사소설가로 꼽을 수 있다. 시바는 대표작 『료마가 간다』를 집필하면서 “트럭 한 대분의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의 역사소설은 우선 사실의 치밀한 고증에서 독자들의 찬탄을 자아낸다. 시바는 소설 주인공의 인품을 통해 또는 주인공의 입을 빌린 역사적 사건의 해석을 통해 자신의 창작정신이 인간의 자유·평등과 합리·실용주의에 있음을 드러낸다. 소설 속 역사적 사건은 이 같은 소설가의 창작정신을 여과하면서 소설가 당대의 인간들이 지향할 시대정신으로 되살아난다. 러일전쟁을 소재로 한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을 두고 일본인들이 ‘소설 형식으로 된 메이지 일본의 제일가는 역사서’로 찬사를 보내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조정래의 『아리랑』은 둘째 유형의 역사소설에 속한다. 소설의 배경은 1904~1945년 식민지기다. 소설은 1904년 러일전쟁부터 시작하여 을사조약, 의병운동, 한일합방, 토지조사사업, 3·1 운동, 독립군의 청산리대첩, 관동대지진, 농민·노동운동, 산미증식계획, 광주학생사건, 적색노조운동, 동북항일연군, 전시기의 징용, 해방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 그 시대의 연대기를 주요 소재로 하고 있다. 소설의 무대도 연대기에 따라 조선, 하와이, 만주, 중국, 일본 등으로 종횡무진으로 바뀐다. 소설가는 각 지역에 미리 심어 둔 자신의 대리인을 통해 주요 역사적 사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기탄없이 드러내 보인다. 이런 이유로 『아리랑』은, 일반 독자에게는 소설의 형식을 빌리긴 했으나 식민지기에 관한 통사적 역사서로 읽힐 수밖에 없다. 소설가 역시 그 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소설을 끝낸 다음 소설가는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구체적이며 총체적으로 알리기 위해 소설을 썼다”고 술회하고 있다.(『아리랑』 제12권, 323쪽·이하 12:323으로 약함)

이제 역사학을 직업으로 하는 내가 조정래의 『아리랑』을 비평의 표적으로 삼을 근거는 충분히 제시되었다. 조정래는 『아리랑』의 집필에서 시바 료타로가 그랬던 것처럼 ‘트럭 한 대분의 자료’를 보았는가. 그의 소설에서 취급되는 연대기 수준의 사실들은 정확한가. 그렇게 그는 역사학과 역사소설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있는가. 그만큼 그는 역사소설가로서 직업윤리에 충실한 작가인가. 이렇게 묻고 따질 수 있는 것은 그가 취급한 연대기 수준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서는 관보, 신문, 잡지 등 읽어야 할 사료가 트럭 수십 대분이나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일개 경찰의 즉결 총살

「“에에 또, 지금부터 중대 사실을 공포하는 바이니 다들 똑똑히 들어라. 저기 묶여 있는 차갑수는 어제 지주총대에게 폭행을 가해 치명상을 입혔다. 그 만행은 바로 총독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대 사업인 토지조사사업을 악의적으로 방해하고 교란하는 용서할 수 없는 범죄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죄인 차갑수는 경찰령에 의하여 총살형에 처한다!”
니뽄도를 빼들고 선 주재소장의 칼칼한 외침이었다.<중략>
“사겨억 준비!”
주재소장이 니뽄도를 치켜들며 외쳤다. 네 명의 순사가 일제히 총을 겨누었다.
“발사아.”
총소리가 진동했다. 차 서방의 몸이 불쑥 솟기는가 싶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4:81~82)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장악한 다음 곧바로 실시한 土地調査事業(1910~1918·이하 ‘사업’으로 약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의 한 장면이다. 구체적으로는 전북 김제군 죽산면 외리가 그 무대다. 차갑수라는 농민이 토지를 신고하였더니 地主總代가 신고서에 도장을 찍어 주지 않았다. 목숨 줄과 같은 토지를 빼앗기게 된 차갑수가 참다못해 지주총대의 가슴을 밀쳤다. 뒤로 넘어진 지주총대는 척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김제경찰서 죽산주재소의 소장이 차갑수를 외리 마을의 당산나무에 결박한 다음 즉결로 총살에 처하였다. 바로 위의 장면이다. 이처럼 일선 주재소의 일개 경찰이 즉결로 사람을 총살하는 장면은 소설에서 군내의 다른 동네를 무대로 한 번 더 반복되고 있다.(4:279~280) 전북 익산에서도 같은 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다. 어느 농민이 지주총대를 괭이로 찍어 죽였는데, 그날로 총살을 당하였다.(4:65) 그리고 ‘사업’ 전 기간에 걸쳐 이러한 즉결례가 전국적으로 4000여 건이나 되었다고 소설가는 이야기하고 있다.(5:343)

조정래에 의하면 총독부가 ‘사업’을 시행한 목적은 토지의 수탈에 있었다.(4:51) 그 틈에 덩달아 토지의 수탈에 광분하는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친일파들의 악독한 음모와 노골적인 악행을 소설가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생생하게 엮어 내고 있다. 뒤늦게 토지를 빼앗기게 되었음을 안 농민들이 몸으로 저항하자 위와 같이 일선 경찰이 즉결로 총살하는 탄압을 자행하였다. 위 총살 장면은 『아리랑』을 읽은 수십만 독자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 터이다. 평론가들도 이 장면을 두고 “토지조사사업을 다룬 이 부분은 역사적 의미의 부각뿐만 아니라 소설적 형상화에서도 가장 빼어난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분이다”라고 극찬해 마지않는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즉결 총살형은 ‘사업’ 당시에 있지 않았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사업’에 관한 논문이나 연구서에서 그런 사건이 소개된 적은 없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가 그러한 사건을 보도한 적도 없었다. 실제로 있었다면 언론이 보도를 놓칠 리 없는, 큰 사건이다. 그럼에도 소설가는 당연히 있었던 연대기 수준의 사건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위에서 보는 대로 ‘경찰령’을 언급하면서 즉결 총살의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다른 대목에서 소설가는 그것의 정식 명칭이 ‘조선경찰령’이며, 「사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방해를 하거나 반대를 하는 세력이 있을 시는 가차없이 제거하고 일소하기 위해」(3:173) 「사람을 재판 없이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경찰에 부여하였다」(3:180) 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경찰령’ 따위의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권력이 사람을 죽일 때는 소정의 절차에 따른 재판을 거쳐야 함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업’이 한참 진행 중인 1913년 한 해에 53명의 사람이 살인과 강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모두 覆審 재판에서였다. 일선 경찰이 재판을 거치지 않고 사람을 유치장에 구류하거나 벌금을 과할 수 있는 즉결 처분은 그 경우가 법으로 엄격히 규제되는데, 그 점도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이다. 식민지기로 말하자면 1910년 12월에 발포된 ‘犯罪卽決例’가 그 모법이며, 그에 근거하여 1912년 3월 ‘警察犯處罰規則’이 공포되었다. 거기에는 경찰이 즉결에 처할 수 있는 경범죄 87종이 나열되어 있다. 예컨대 제1항은 ‘이유 없이 남의 거주나 건축물이나 선박에 잠복한 자’이다.

조정래는 당시 이같이 경찰의 권한을 세밀히 규정한 법령과 규칙이 있는 줄 알고 있었다. 식민지 초기에 발포된 여러 법령을 언급하는 소설의 한 대목에서 ‘경찰범처벌규칙’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3:68) 이 사실은 그가 ‘조선경찰령’이란 법령이 실제로 있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히 그러한 법령을 만들어 내 일개 경찰이 사람을 즉결 총살하는 장면을 소설에서 두 번이나 연출하였다. 그리고 ‘사업’ 전 기간에 걸쳐 그러한 즉결례가 4000여 건이나 되었다고 종합까지 하고 있다.

그가 있지도 않은 법령을 인용하면서 연대기 수준의 사실을 조작해 내는 솜씨는 소설의 첫머리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그는 러일전쟁 중인 1904년 7월에 한 일본인의 입을 빌려 “이달부터 조선 땅의 치안은 모두 우리 일본군이 맡게 되었다. 그게 바로 너의 임금님이 결정한 사항이다”라고 하면서 ‘군사경찰훈령’을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1:30, 32) 그렇지만 그런 훈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앞서 나는 역사소설은 연대기 수준의 사실을 충실히 배열한 다음, 그 빈 공간을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메워 가는 것이라 하였다. 역사학과 역사소설의 경계가 거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정래는 연대기 수준의 사실을 자신이 직접 창작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역사학과 역사소설의 경계가 그에게는 없다. 본의 아니게 경계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경계를 터 버림으로써 역사학과 역사소설을 하나로 통합해 버렸다. 역사소설을 그렇게도 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소설가 조정래의 위대한 업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문학을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게 역사소설을 써도 되는지를….

3. 지시마의 대량학살

『아리랑』에 나오는 일본인들은 모두가 악인이다. 악마의 화신이다. 그들은 수도 없이 조선 사람을 때리고 빼앗고 겁탈하고 죽인다. 반면 조선 사람들은 끝도 없이 얻어맞고 빼앗기고 겁탈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아리랑』에는 전술한 ‘사업’ 당시의 즉결례를 별도로 한다면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의 대량학살이 세 차례에 걸쳐 연출되고 있다. 의병운동(1906~1909), 3·1 운동(1919), 지시마(千島) 비행장 공사(1944년)가 그 무대이다. 이 가운데 의병운동과 3·1 운동의 피해에 대해서는 그간 역사학자들이 거론해 온 숫자가 있고, 소설가도 그로부터 크게 벗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는다. 다만, 소설가가 의병운동 당시 일본군이 ‘빗질작전’을 펼쳐 의병과 관련된 마을에 대해 「집집마다 사람들을 몰아내어 남자들은 사살하고」(2:134) 또 ‘삼광작전’이라 하여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빼앗는」(5:342) 초토화작전을 펼쳐 수만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고 하는 기술만큼은 역사적 사실과 많이 동떨어진 심한 과장임을 지적해 둔다.

여기서는 1944년 지시마 열도에서 있었다는 학살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지시마 열도는 쿠릴 열도를 말하며, 지금은 러시아령이지만 1945년까지 일본령이었다. 그곳의 에토로후 섬(擇捉島) 히토카쓰푸 만(單冠灣)에서 1941년 12월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가 출발하였다. 그만큼 군사적 요충이었다. 1943년이 되면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어 미군이 북쪽에서부터 지시마 열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급하게 지시마 열도를 군사기지화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발되어 그 공사판으로 끌려갔다. 『아리랑』 제12권의 45장 「당신은 아는가」는 그 비극적인 공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 의하면 공사는 비행장 활주로를 닦고 주변 산기슭에 비행기 격납고를 만드는 일이었다. 소설가는 공사가 벌어진 섬과 비행장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처럼 사건의 공간배경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은 점은 소설 속의 많은 다른 사건에서도 자주 확인되고 있다. 나는 그래서는 역사소설로서 결격이라고 생각한다. 지시마 열도는 북으로 캄차카 반도와 남으로 홋카이도(北海道)를 연결하는 약 3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거기서 1943년 여름부터 벌어진 대규모 군사 토목공사로서는 슈무슈 섬(占守島)에서의 가타오카(片岡) 항공기지 방공터널공사와 에토로후 섬(擇捉島)의 덴네루(天寧) 항공기지공사가 대표적이었다. 전자는 스가하라구미(菅原組)라는 토목회사가, 후자는 세자키구미(■崎組)라는 토목회사가 일본 해군의 청부를 맡아 공사를 진행하였다. 노무자의 징발도 이 두 회사가 담당하였는데, 그 점은 소설의 설명과 다르다. 어쨌든 이 두 공사 가운데 어느 하나가 소설의 소재가 된 듯하다.

소설을 소개한다. 「드디어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1944년 초여름경이다. 일본군은 거짓 공습경보를 울려 1천 명에 달하는 조선인 노무자들을 방공호에 가두었다. 그리고선 30분간 수류탄을 던져 넣고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그들을 몰살시켰다. 방공호 입구는 콘크리트로 봉해졌다. 방공호 입구에서 무엇인가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시뻘건 피였다. 기관총은 30분 이상 난사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피는 도랑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중략>……그곳에 징용으로 끌려온 1천여 명은 결국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 것이었다. 지시마 열도 여러 섬에서는 그런 식으로 이미 4천여 명이 죽어갔던 것이다.」(12:158)

이 장면은 『아리랑』 전권에 걸쳐 가장 참혹한 장면이다. 독자들은 더없이 잔혹한 일본군의 만행에 진저리를 칠 것이다. 그런데 이 처참한 학살은 과연 사실인가. 나는 조정래가 쿠릴 열도나 인근 사할린(樺太)까지 답사를 강행하여 이 같은 사건을 직접 청취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관련 기록을 검토해 보았다. 결론은 그런 일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러 기록은 그 공사판에서 조선인 노무자가 많이 희생되었음을 공통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슈무슈 섬의 가타오카(片岡) 비행장에는 1943년 8월 이후 500~600명의 군속이 하나의 대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조선인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공사를 담당한 스가하라구미의 숙사에는 몇십 명이 넘어져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매일 사망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1944년 9월 에토로후 섬의 토목공사에는 조선인 650명과 일본인 350명이 고용되어 있었는데 1945년 5월까지 백수십 명이 사망하였으며, 2백수십 명이 미치거나 병들어 송환되었다고 한다. 노무자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전염병이었다. 열악한 작업조건과 불결한 위생상태가 그 원인이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조정래도 소설에서 꽤나 사실적으로 그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다만, 전염병을 호열자로 쓴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발진티푸스였다. 그 북방 지역은 호열자가 발생할 환경이 아니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런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 없다. 우선 일본군의 학살 동기에 대해 소설가는 아무런 설명도 붙이지 않고 있다. 공중에 노출되어 있는 비행장 활주로와 격납고 시설이 무슨 중대한 군사기밀인가. 그것이 학살의 사유였다면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전술한 대로 슈무슈 섬과 에토로후 섬에서는 1944년 말까지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렇다면 그 해 초여름에 많은 비용을 들여 조선에서부터 끌어 온 노무자들을 학살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은가. 기록을 좀 더 검토하면 일본군이 미군에 밀려 지시마 열도에서 홋카이도로 철수하는 것은 1945년 봄이다. 그때 상당수의 노무자도 함께 철수하여 홋카이도의 다른 공사판에 투입되었다. 사할린의 미쓰이(三井) 탄광으로 철수한 근 2000명의 조선인 노무자도 있었다. 그들은 영양실조로 다리도 제대로 못 들 정도였다. 그렇게 끝까지 끌고 다니면서 부려먹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데, 무슨 이유로 4000명씩이나 그 아까운 노동력을 학살한단 말인가.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소설가 자신이 학살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광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소설가가 소설 속에서 지어낸 사건을 가지고 너무 심하게 따지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예상할 수 있다. 그에 대해 답한다. 1943~1944년 지시마 열도에서 비행장 활주로 공사가 있었고 거기에 수천 명의 조선인 노무자들이 끌려간 것은 어김없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 연대기 수준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집단학살은 그 자체로 연대기 수준의 사건으로 읽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소설가도 숨기지 않고 있듯이 소설의 의도 또한 그러한 것이었다. 그래서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조정래의 창작세계에 있어서 역사학과 역사소설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는 혼동 속에서 통합되어 있다. 다시 한 번 문학을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역사소설가의 직업윤리가 그래도 좋은지를….

4. 김제평야와 동진수리조합

『아리랑』의 주 무대는 전북 김제와 군산이다. 소설은 김제·만경평야를 걸어 군산으로 가는 세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후 소설의 무대는 조선, 미국, 만주, 중국, 일본으로 변화무쌍하게 이동하고 조선 내에서도 서울, 원산, 목포 등으로 분주하게 옮겨다니지만, 언제나 다시 김제와 군산으로 돌아온다. 그 김제와 군산 그리고 그 사이에 낀 김제·만경평야에 대해, 그 지역의 지리환경과 사회문화, 정치경제에 대해 소설가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 지역의 역사를 내면화하는 현장 체류와 실지 조사의 경험은 어느 정도 농밀한 것이었나. 역사학이 직업인 나는 어느 역사학의 텍스트를 접할 때 이런 것부터 따지는 버릇이 있다.

『아리랑』에서 김제ㆍ만경평야는 「한반도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이루어 내고 있는」(1:11) 넓은 평야로서 「살찐 벼들의 부피감으로 하여 보드랍고 폭신하고 두툼하고 묵직한 질감의 초록색」이며, 「그러한 색감에 그것이 모두 식량이라는 생각까지 곁들이게 되면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한」(1:143) 들판이다. 그리하여 그곳은 「반도의 척박한 땅에 다행히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거기서 나는 곡식으로 이 땅의 목숨 칠 할이 먹고사는」(1:12) 곡창지대였다. 그 조선의 곡창이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 지주의 손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소설가가 김제·만경평야의 풍요로운 초록색을 몇 차례나 묘사한 것도 실은 그곳의 토지들이 야금야금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있었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소설가는 간혹 연대기상의 중요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킨다. 그곳의 토지를 일본인에게 가장 대규모로 팔아넘긴 사람이 있으니, 매국노 이완용이다. 연대기상의 이완용은 1898년 3월부터 그해 말까지 전라북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다. 소설가는 그때 이완용이 김제군 진봉면에 3000석락 내지 5000 석락의 대규모 토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물론 소설 속의 가상의 이야기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토지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때 이완용이 그 거대한 토지를 모두 일본인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소설대로라면 이완용은 1905년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김제·만경평야에 있는 토지부터 먼저 팔아먹은 셈이다.

나는 김제·만경평야에 관한 소설가의 이 같은 공간 묘사를 대하면서 이 사람은, 물은 평지를 흐르지 못한다는 아주 간단한 원리를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논농사는 원래 溪間農業이라 하여 산간지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조선의 농업은 크게 말해 계간농업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다. 평탄한 평야지대가 비옥한 논농사지대로 바뀌기 위해서는 풍부한 수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위에 물을 보내고 빼는 공학에 기초한 수리시설이 정교하게 설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막힌 데는 뚫고 고인 데는 퍼올릴 필요도 있다. 19세기의 김제·만경평야는 이러한 수리시설이 없었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공공 기능이 취약해짐에 따라 그나마 있었던 시설조차 허물어져 갔다. 그에 따라 조금만 비가 오지 않아도 큰 한발이요, 조금만 비가 내려도 큰 홍수인 재난의 연속이었다. 곳곳에 버려진 땅이 즐비하게 널린 가운데 갈대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었다. 밤이면 도처에 출몰하는 늑대의 울음으로 더욱 황량한 들판이었다. 소설가의 ‘묵직한 질감의 초록색’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이야기다. 관련하여 『東津農組 70年史』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지역은 지반이 낮아…(중략)…서해의 滿潮面보다 90㎝ 미만이며…(중략)…이에 호우를 당하게 되면 4~5일간씩 물속에 잠겨 넓은 평야는 茫茫大海를 이루는 실정이었다. 지대가 넓고(벽골제가 온전했던: 필자 추가) 옛날에 옥토였기에 평야이지, 비가 적거나 늦으면 논이 논 구실을 못하고 밭만 같지 못하여 무용지물이 되며, 많으면 인명과 재산마저 위험을 느끼는 물바다로 변하니 인공적인 조치 없이는 하늘만 원망하게 되었다.」

원래 그러했던 지역이 오늘날과 같은 풍요로운 농업지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기에 걸친 수리사업 때문이었다. 황폐한 땅을 헐값으로 사들인 일본인 농장주들이 그 수리사업의 주역이었다. 1906년 대한제국의 水利組合條例가 발포되자 맨 먼저 생긴 수리조합이 군산에 본부를 둔 沃溝西部水利組合이다. 곧이어 臨益수리조합, 臨陂中部수리조합, 臨益南部수리조합, 全益수리조합이 1909년까지 차례로 생겨났다. 1910년까지 전국적으로 모두 7개의 수리조합이 생겼는데 그중에 군산·김제 일대에서만 위와 같이 5개의 조합이 생긴 것이다. 김제평야 일대는 한국 근대 수리사업의 발상지다.
이곳에서 초창기 수리사업은 기존의 수리시설인 堤堰과 洑를 확장하거나 해수의 침입을 막기 위한 防潮堤의 축조를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완용이 땅을 사들였다는 서해안의 진봉면에 방조제가 축조되는 것은 1924년의 일이다. 그 이전에 동진강 하구의 저습지 일대를 이완용이 직위를 이용하여 3000~5000 석락(대략 3000~5000 정보)이나 마련했다니, 아무리 소설이지만 참으로 황당한 발상이다. 그건 그렇고 기존의 수리시설과 방조제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 넓은 평야를 적실 물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 대한발이 들었다. 그해에 진봉면과 죽산면의 4000여 정보는 수확이 전혀 없는 참상을 입었다.

발본적인 대책은 1925년에 설립 인가된 東津水利組合이 세웠다. 멀리 전북 진안과 순창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여수만으로 빠지는 섬진강의 풍부한 물을 이용하는 발상이 그 출발이었다. 1910년대에 발달한 항공지도법이 이 같은 발상의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공사는 섬진강을 댐으로 막은 다음 김제 방향의 산 속으로 터널을 뚫어 동진강으로 물을 역류시키는 이른바 河川流域變更式이었다. 연후에 동진강 곳곳에 취수구를 설치하여 김제, 정읍, 태인, 부안 등 호남평야의 구석구석까지 농업용수를 풍부하게 공급한다는 사업계획이었다. 1928년 12월 드디어 높이 33m의 雲岩堤가 완성되었다. 이 댐은 1940년에 착수되어 1961년에 완공된 섬진강 다목적댐으로 수몰되기까지 남한 지역에 존재한 가장 큰 댐이요, 저수지였다.

공사계획이 발표되자 일대 소란이 발생하였다. 댐으로 수몰당할 지구의 주민들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음은 물론이다. 1919년 측량기술자들이 최초로 수몰 예정지구에 들어갔다가 주민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였다. 기타 크고 작은 충돌과 민원을 포함하여 1920년대에 전개된 동진수리조합 반대운동은 그 규모나 강도에서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수리조합이 설립된 이후에도 기존 수리 체계의 변동에 따른 복잡한 이해관계로 크고 작은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예컨대 『동아일보』 1931년 8월 8일자를 보면 익산·김제의 군민 수백 명이 수리조합의 만경강 제방을 파괴하는 소동을 벌이자 무장경관이 출동하기까지 하였는데, 동 제방으로 그들 논의 배수가 불가능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그 같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1910년대까지 곳곳에 갈대가 무성했던 황량한 들판이 조선 제일의 곡창지대로 바뀐 것이다.

이 같은 지역의 破天荒과도 같은 역사를 소설가는 아는가 모르는가. 『아리랑』 전권에 걸쳐 동진수리조합에 관한 언급은 한마디도 보이지 않는다. 이 수리조합을 상징하는 조선 제일의 운암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소설가가 식민지기의 수리조합과 그에 대한 반대운동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소설 속 가상의 사건이다. 「1929년경 김제 동척농장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공산주의 계열의 청년회가 개입하여 소작쟁의를 수리조합 반대운동으로 이끌어가고 있다.」(9:52, 61, 65~66) 그런데 소설가는 그 수리조합이 어느 수리조합인지 이름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 그 지역이라면 당연히 동진 그 이름이 거론될 수리조합이었다. 그렇게 소설가는 사건의 공간 설정에 진지하지 않다. 그저 수리조합 반대운동을 상투적으로 들먹이고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소설 속 이야기이다. 「1920년대 초반 일본 농업회사 후지흥업(不二興業)이 간척공사를 벌였다. 3년간에 걸친 공사의 결과로 2천5백 정보의 새로운 농지가 조성되었다. 그 농지의 용수원는 간척지 한복판의 넓이 97만 평의 저수지였다.」(7:14, 232) 여기서도 후지흥업의 간척지가 김제군의 어느 면인지, 그 거대한 저수지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소설가는 지적하고 있지 않다. 실제 후지흥업의 농장은 김제군 성덕면 일대에 분포하였다. 소설가가 지목한 그 저수지는 아마도 성덕면의 菱堤일 것이다. 나는 소설가가 실제 능제를 방문했다고 짐작한다. 97만 평이란 저수면적도 그때 얻은 수치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저수지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없다. 현지 향토사가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들렀으나 그저 건성으로 대충 훑어보았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평탄한 들 한복판에 그렇게 넓은 저수지가 있다는 것이 이상도 하지 않았던가. 능제는 동진강을 수원으로 하는 揚水貯水池이며 1930년에 완공되었다. 양수저수지이기 때문에 평야 한복판에 그렇게 큰 저수지가 축조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동진수리조합을 배제하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간척사업이며 그 용수원이었다. 그럼에도 소설가는 그에 관해 침묵하고 있다. 아니, 진지하지 않았기에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운암제와 동진강으로 상징되는 김제평야의 수리사업은 식민지기 농촌 개발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소설가는 그 역사의 현장을 소설의 주 무대로 설정하였다. 그럼에도 소설가는 그 지역의 주민이라면 누구에게도 익숙한, 지금도 마을마다의 고유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 지역의 그러한 역사에 무관심하였다. 소설가가 관심을 둔 것은 처음부터 일본인 지주와 친일파의 수탈, 그것뿐이었다. 황무지에서 무슨 수탈을 하는가. 실제 이 지역에 관한 경제사 연구를 보면 애초의 황량한 미간지가 비옥한 농업지대로 개발되자 인구가 몰려들고 있었다. 湖南線 건너편, 옛 全羅左道의 산간농업지대, 곧 수리조합이 설치되지 않은 지대의 인구가 식민지기에 걸쳐 서해안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소설에서처럼 빼앗기고 쫓겨나 만주로 내몰린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만약 소설가가 그 넓은 평야에 포진한 보통의 마을에 들어가 평야와 마을의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청취하는 시간을 가졌더라면, 그는 개발과 수탈을 둘러싸고 한 시대의 인간들이 몸으로 부딪쳤던 기쁨과 슬픔의 역사를 그야말로 성찰적인 역사소설로 복구할 수 있었을 터이다. 애석하게도 그는 그러한 준비작업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끝내 그 지역 眞의 역사와는 무관한 이방인으로 그 바깥을 맴돌았을 뿐이다.

5. 분노와 증오의 광기

『아리랑』이 엮어 내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그에 상응하는 연대기상 사건과의 관련에서 어떻게 어긋나고 얼마나 비틀려 있는지를 일일이 따지기에는 허락된 지면이 너무나 협소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4책 초두에 있는 「작가의 말」과 제12책 말미에 있는 집필후기 「글감옥에서 가출옥」을 중심으로 『아리랑』을 이끌고 간 소설가의 정신세계에 대해 간단히 살핀다.

「작가의 말」에서 소설가는 일제하 36년 동안 일제의 총칼에 학살당한 우리 동포들의 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라고 질문을 던진 후 “나는 그 어림숫자를 30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잡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가 『아리랑』을 쓰게 된 것도 그 어림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라고 하고 있다. 300만~400만 명이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규모와 같다. 그런데 유대인은 단, 3년에 학살당했다. 그에 비해 조선인은 36년간 조금씩 나누어 학살당했다. 죽음의 고통이 어느 쪽에서 컸던가. 소설가는 단연코 조선인 쪽이라 한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논리에서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어찌하여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은 알면서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어림숫자도 모르는 몽매한 군상이 되고 말았는가라고 소설가는 개탄을 거듭하고 있다.

「글감옥에서 가출옥」에서는 원고지 2만 장에 달하는 『아리랑』을 4년 8개월에 걸쳐 쓰게 된 동기가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소설가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일제하 36년 동안 우리 동포들이 일본 사람들에게 수없이 죽었는데 학교에서는 왜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는지 의문을 품고 그에 대해 분노해 왔다고 한다. 그러한 의문은 대학교 때까지 이어졌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스스로 깨우쳐 보니 일제하의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사회와 국가의 모든 분야를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의해 일제의 엄청난 학살 범죄가 의도적으로 망각되었다. 한마디로 해방 후 한국은 “무책임과 거짓말과 속임수가 횡행하고, 정부마저 ‘총체적 부정’이라고 정의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사회”였다.

이 같은 사실을 스스로 깨우쳐 알면서 소설가는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드디어 “반역의 역사에 대한 분노가 이성화되었고 증오는 논리화되어 갔다.” 그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에 입각하여 식민지시대의 역사를 구체적이며 총체적으로 바로 알리기 위해 쓴 것이 『아리랑』이었다. 원고지 2만 장의 400만 글자는 36년간 학살당한 민족의 수를 상징한다.

이 같은 소설가의 직접적인 해설을 접하고서 나는 한동안 멍하였다. 일제에 의한 피학살자가 300만~400만 명이라.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소설을 썼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 일은 없었다. 1910년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는 대략 1600만 명, 330만 가호 정도이다. 그러니까 조정래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집집마다 1명의 희생자가 난 셈이다. 그것을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시대의 호적이 거의 남아 있으니까 그것을 보면 된다. 그러면 알리라.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일개 소설가가 이런 엄청난 허구의 사실을 그렇게도 당당히 역사적 사실로 소리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는 그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알아 왔다고 한다. 아, 세상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면 그렇게까지 큰소리를 칠 수 있을까. 동양의 儒家에서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을 生而知之라고 한다. 공자님과 같은 성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조정래 씨, 그대는 生知입니까.

그의 고백대로 그는 분노와 증오로 『아리랑』을 이어갔다. 그 지극한 분노와 증오에는 그에 상당하는 사실의 근거가 없다. 그래서 일종의 광기이다. 학살의 광기와 거꾸로 통하는 광기이다. 그 광기로 소설의 주요 인물들이, 일제에 저항했던 착하고 아름다운 조선 사람들이 소설의 마지막까지 하나둘씩 모두 죽고 말았다. 소설가는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끝내 승리한 조선인의 역사를 쓰겠다고 했지만, 막상 소설에서는 그 반대이다. 드디어 해방이 되었다. 그런데 만주에서는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앞잡이였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설은 이 대목에서 갑자기 끝을 보고 있다. 분노와 증오의 광기로 좌충우돌 소설을 이끌어 오다가 더 이상 끌고 갈 기력이 다한 것이다.

일제하 식민지기는 수탈과 학살로 가득 찬, 분노와 증오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었다. 수난과 모멸의 시대였지만, 새로운 학습과 성취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식민지기의 민족사적 내지 세계사적 의의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나는 앞으로 누군가 새로운 역사소설가가 나와서 식민지기의 수탈과 개발을 상징하는 김제와 군산의 역사를 성찰의 역사소설로 다시 써 주길 고대해 마지않는다. <끝>

-각주
1. 김봉석, 「위대한 일본인, 걸어나왔다」. www.cine21.com. 2003.1.27 참조.

2. 시바의 역사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였다. 金景鎬,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관(司馬史觀)의 형성 배경과 의미 고찰-작품 『료마가 간다(■馬がゆく)』를 통하여-」, 『日語日文學硏究』41, 2002.

3. 李光來, 「일본현대사를 해독한다-坂の上の雲』と『坂の下の沼』-」, 『한일관계사연구』22, 2005, 199쪽.

4. 황광수, 「역사적 상상력과 변증법적 소설 미학」, 『趙廷來 大河小說 아리랑 硏究』, 해냄, 1996, 50쪽

5. 朝鮮總督府 編纂,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3년도판, 580쪽.

6. 朝鮮總督府 編纂, 『朝鮮法令輯覽』 下卷 제15집, 350쪽.

7. 朝鮮總督府 編纂, 같은 책 上卷 제9집, 58쪽.

8. (日本衆議院)質問答弁經過情報(http://www.shugiin.go.jp/itdb_shitsumon.nsf/html/shitsumon/154056.htm)

9. 北海道■制連行■態調査報告書編纂委員■札幌■院大■北海道委託調査報告書編集室 編,『北海道と朝鮮人■者■朝鮮人■制連行■態調査報告書』, 札幌■院大■生活協同組合, 1999, 391~392쪽.

10. 北海道?制連行?態調査報告書編纂委員??札幌?院大?北海道委託調査報告書編集室 編, 앞의 책, 395쪽.

11. 東津農地改良組合, 『東津農組七十年史』, 1995, 409~410쪽.

12. 東津農地改良組合, 같은 책, 410쪽.

13. 동진수리조합을 중심으로 한 수리조합 반대운동에 관해서는 다음의 두 논문이 대표적이다.
西條晃, 「1920年代朝鮮における水利組合反對運動」, 『朝鮮史硏究會論文集』8, 1971.
李愛淑, 「日帝下 水利組合의 設立과 運營」, 『韓國史硏究』50ㆍ51, 1985.

14. 東津農地改良組合, 앞의 책, 763쪽.

15.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가 대표적인 연구성과이다.
松本武祝, 『植民地期朝鮮の水利組合事業』, 未來社, 1991, 124~165쪽.
柳濟憲, 「湖南平野에 있어서 地域構造의 植民地的 變容過程」, 『地理學』42, 大韓地理學會,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