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한국의
반미운동 시대정신, 2012년 여름호 |
Ⅰ. 한국 반미운동의 일상성과 급진성
미국은 2012년 4월 24일 광우병 젖소가 발견된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이에 한국의 광우병감시국민행동을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5월 2일과 4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단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통합진보당은 물론 민주통합당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양당은 불과 3주 전에 치러진 4․11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정책연합을 통해 무려 140석의 의석을 획득하고서도 국가적 현안을 원내에서 다루려고 하기보다는 장외시위에 동참한 것이다. 양당 공히 총선 후 당권을 둘러싸고 내분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의 눈을 당 바깥으로 돌리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2012년 들어서만도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과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저지투쟁에 이어 다시 점화된 광우병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정책 현안에 대한 반대운동이 그칠 줄을 모른다. 서울 수송동 주한미대사관 앞과 용산 미군부대 앞에서는 연중 반미시위가 벌어진다. 대개는 미국이나 주한미군 관련 사건이나 정책과 관련하여 시위가 벌어지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특별한 쟁점이 없어도 1인 시위, 소규모 기자회견이나 성명 발표의 형태로 반미시위를 벌인다. ‘주한미군 철수’는 여전히 반미시위의 단골메뉴가 된다. 1990년대 전반 이후 나타나는 한국 반미운동의 일상화 현상이다. 한국의 반미운동은 이제 미국의 어떤 정책에 대한 단순한 반응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미국 또는 미국의 가치체계 전반을 거부하는 정치적, 이념적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성격이 농후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카첸스타인과 코헤인의 세계 반미주의 유형 분류에 의하면 한국의 반미운동은 급진적(radical) 반미주의에 해당한다. 급진적 반미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이슬람근본주의, 김일성․김정일의 주체사상 같은 급진이념의 관점에서 미국을 ‘만악의 근원’으로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한국의 반미시위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급진적 반미주의자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 반미운동의 주도세력은 정치적, 이념적 차원에서 반미감정을 동원하고 반미시위를 기획․조직하는 급진적 반미주의자들인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반미운동은 일상성과 급진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한국 반미운동의 원인, 19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의 전개과정, 반미의 논리와 한계, 반미운동의 성격, 주요사례, 그리고 대응방안을 차례로 살펴본다.
Ⅱ. 반미운동의 원인
한국 반미운동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한국 반미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논자에 따라서는 1905년 미국과 일본 간의 카츠라-태프트 밀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방직후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서 한국 반미운동의 기원을 찾기도 하며, 그러한 논리는 한반도 분단에 대한 미국의 원죄론으로 이어진다. 또한, 미국은 1980년 5공 신군부의 광주학살을 묵인하였는데 이것이 반미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즉,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반미운동을 자극하였다. 이처럼 한미관계의 역사적 유산은 한국 반미운동의 원인으로 자주 거론된다. 이와 함께 반미의 원인으로 많이 지적되는 것은 미국의 대외정책이다. 주한미군 재배치에 따른 평택미군기지확장, 이라크전쟁 같은 ‘부당한’ 전쟁에 대한 파병압력,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성’, 대북한 강경정책, 쇠고기를 비롯한 시장개방 압력과 한미 FTA 체결,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같은 미국의 정책이 반미운동을 촉발한다는 것이다. 한미관계의 역사적 유산이나 한미관계의 정책 현안이 반미운동의 배경 또는 계기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반미운동의 일상성과 급진성을 설명할 수 없다.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한다. 첫째, 한국의 국내정치, 둘째, 좌파 문화 헤게모니, 셋째, 한국 반미세력의 이념성이다. 먼저 반미는 국내정치에 의해 격렬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정부나 정당, 반미운동권세력은 정치적 동기에 의해 미국 관련 사안을 쟁점화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대중의 반미감정을 은근히 조장하거나 부추기거나 이용함으로써 미국을 견제하거나 정권을 잡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소위 친북반미세력이 성장하고 그들의 활동공간이 대폭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정부 자체가 반미운동을 이용하여 미국을 견제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 출범 직후 미국으로 날아가 부시에게 대북햇볕정책을 수용할 것을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그 때부터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을 견제하는 데에 반미운동을 활용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부터가 반미 성향을 감추지 않음으로써 반미세력을 직간접적으로 고무하였다. 현 통합진보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약칭 민노당)은 2004년까지 국회의석이 없었기 때문에 장외투쟁에 몰두했고, 2004년 총선에서는 국회의석을 10석이나 확보하여 일약 제3당으로 등극했지만 여전히 거리정치에 주력했는데 특히 반미적 쟁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북논쟁으로 분당사태를 겪고 2008년 총선에서 국회의석이 절반으로 줄어든 다음에는 더욱 더 반미운동에 집중하였고, 그 첫 작품이 광우병시위였다. 민노당은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약칭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와 함께 광우병시위를 주도하면서 거리정치세력이자 운동권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민노당의 핵심기반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약칭 민노총)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민노당과 함께 반미시위에 재정을 공급하고 군중을 동원하는 대주주이다. 특히 전교조는 조합원 전원이 4년제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이며, 계기수업 같은 것을 통해 학생들을 반미시위에 동원한다. 전교조는 김대중 정부 취임 후 1999년 7월 합법화된 뒤 2000년 9월 민노총에 가입하고, 특히 노무현 정부 시절 급성장하여 2003년 9만3860명의 조합원을 확보하는 거대조직으로 발전하였다. 2008년 광우병시위에서 보듯이 정당정치와 의회정치를 무력화시키면서까지 급진적 대중운동이 확산․확대되는 것은 민노당과 민주당 일부세력의 못 말리는 자기파멸적 장외투쟁 지향성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통일연대와 통일연대를 발전적으로 포섭한 진보연대 역시 핵심반미세력이다. 통일연대와 진보연대는 미국관련 쟁점이 떠오를 때마다, 쟁점이 없으면 쟁점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줄기차게 반미정치투쟁을 선도함으로써 정부나 정당, 국회를 반미 쪽으로 견인한다. 두 번째로 좌파문화헤게모니는 한국 반미운동의 또 다른 핵심요인이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좌파 운동권은 출판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연극, 음악, 미술, 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분야에 크고 작은 ‘참호’와 ‘진지’들을 건설함으로써 문화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시대에 들어와서는 인터넷 언론과 커뮤니티를 선점하고 마침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에는 공중파 공영방송까지 장악함으로써 문화헤게모니를 완성하였다. 2008년 광우병시위의 경우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력은 좌파에서 우파로 교체되었지만 문화헤게모니와 사회 전반의 담론 주도권은 여전히 좌파가 장악한 상황에서 벌어졌다. 세 번째로 한국 반미세력의 이념성은 한국 반미운동의 일상성과 급진성을 낳는 또 다른 원인이다. 한국의 좌파운동권은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공산권의 붕괴로 말미암아 투쟁의 대상은 물론 이념적 지향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운동권의 상당수가 ‘신사회운동’이라고 하여 경제정의, 참여민주주의, 환경보호 같은 기치를 내걸고 시민운동으로 전향하였지만 그들 내면의 마르크스-레닌주의나 김일성주의(또는 좌파 민족주의) 성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공산권이 붕괴되고 북한이 실패국가의 전형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사회주의나 친북을 표방할 수 없게 된 이들이 최종적으로 찾은 ‘안전한 항구(safe haven)’는 반미주의였다. 사실 반미주의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냉전종식 이후 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한국 반미운동권에게 있어서 ‘반미’는 ‘반자본주의’나 ‘친북’을 가려주는 훌륭한 외투가 된다. 한국 반미세력은 이러한 이념성을 내면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쟁점이 없으면 죽은 맥아더의 동상과 힘겨루기를 해서라도 쟁점을 만들고 만다.
Ⅲ. 반미운동의 전개과정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운동권 학생들은 미국을 군사독재정권의 배후세력으로 규정하고 반미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투쟁방식은 반미의 무풍지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가위 충격적인 것이었다. 1980년 12월 9일 광주 미문화원 방화,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 1982년 4월 강원대생 성조기 소각 시위, 1983년 9월 대구 미문화원 사제폭탄 투척,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이 이어졌다.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대통령 방한 반대시위, 1985년에는 전두환 대통령 방미 반대시위도 있었다. 1986년 5월 3일 인천 신민당 개헌집회에 맞추어 전개한 5·3시위에서는 미제축출이라는 구호를 파쇼타도와 함께 처음으로 외쳤다. 1985년 3월에는 재야연대기구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출범하였다.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도 처음에는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군중이 점차 독재지원 미국반대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1985년 여름 무렵부터는 슈퍼 301조를 앞세운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에 반대하는 생존권적 반미운동도 일어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일환으로서 반미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대학가에는 매우 격렬한 정치적, 이념적 반미운동이 대두되었다. 1986년부터 북한 김일성․김정일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체사상파(약칭 주사파)가 대학가에 등장했다. 〈반미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가 그것이다. 이때부터 미국은 단순한 독재정권 지지자가 아니라 분단과 예속을 비롯한 한반도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제공자, 즉 ‘악마’가 된다. 주사파는 반미조국통일투쟁을 제1의 투쟁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반전, 반핵을 기치로 주한미군과 미국 핵무기의 철수, 한미 양국 군대의 팀스피리트(Team Spirit) 훈련 중지를 요구했다. 학생 교련과 전방입소훈련을 양키용병훈련으로 규정하였다. 1986년 김세진․이재호의 전방입소훈련 반대 분신자살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일어났다. 주사파는 1987년 8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1993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약칭 한총련)으로 조직을 확대, 발전시키면서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주사파의 반미투쟁은 북한과 연계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민주화 이후에는 대중의 호응 여부와는 관계없이 반미운동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 나왔다. 커밍스는 한국의 반미가 민족주의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민주화의 산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1988년부터 주사파 학생들은 일반 학생과 국민들을 대상으로 북한바로알기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89년 1월에는 범재야연대기구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출범하였다.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이 전개되었다. 방북통일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문익환(1989년 4월 2일), 황석영(1989년 4월 23일), 임수경(1989년 7월 7일)이 차례로 북한을 밀입국하여 다녀왔다. 1990년대에도 정치적, 이념적 반미운동은 계속됐다. 그 중심은 남과 북, 해외 3자연대기구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과 한총련이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1995년 2월 정식 결성됐으나 사실상은 1990년 제1차 8‧15 범민족대회 때부터 활동하였다. 범민련과 한총련은 둘 다 이적단체 판결을 받아 활동이 위축되었다. 당시 한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주요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하면서 이념적 획일성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제국주의로 매도하는 북한식 반미투쟁은 시대착오적이었다. 1996년 한총련의 통일운동과정에서 벌어진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학생운동 내 주사파와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계열의 헤게모니는 약화되었다. 그들의 폭력성과 이적성으로 인하여 일반 국민은 물론 학생들도 거부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90년대에 들어서는 반미운동이 외형상 구체적인 쟁점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미군의 범죄와 환경오염, 기지촌 여성, 한미SOFA의 불평등성, 각종 미군훈련에 따른 피해 문제들을 쟁점화했다. 용산미군기지 이전과 미군기지 반환 운동도 전개되었다. 1999년에는 노근리 사건, 2000년에는 포름알데히드 한강 방류사건, 기름 오염, 매향리 오폭사건이 터져 반미운동을 촉발하였다. 외형상 지역주민의 생존권적 반미운동인 것처럼 전개되었던 이러한 반미운동 역시 정치적 반미운동세력의 배후 작용에 의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후에는 집권세력과의 공감 하에 반미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특히 2000년 남북한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인들의 대북 경계심이 이완되면서 반미감정은 자라났다. 6․15공동선언 자체가 그동안 반미평화통일운동단체들이 주장해오던 것을 그대로 담았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의 제약을 받기는 하지만 범민련과 한총련 같은 이적단체의 구성원도 개인자격으로는 북한방문과 남북교류행사 참여가 허용되었다. 이로써 친북반미운동은 완전히 합법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사파도 기사회생하였다. 주사파는 1990년대 중반부터 민혁당 내분, 민혁당 수사로 인한 활동 축소, 학생운동의 전반적 쇠퇴로 침체되기 시작하여 1999년 9월 민혁당 고수파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사실상 궤멸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회생 기회를 준 것은 햇볕정책이었다.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은 이들에게 숨통을 터주었고, 활동공간을 다시금 열어 주었다. 햇볕정책은 노무현 정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NL계열의 친북운동권은 2004년 이후 국회의석 10석의 민노당을 장악하기까지에 이른다. 대대적인 민족공조 무드를 타고 남한의 반미친북단체와 북한 관변조직이 남북을 오가며 통일대축전 같은 집회를 개최했는데 사실상 ‘미제규탄집회’였다. 그 주도단체가 6․15남북공동선언 실현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통일연대(약칭 통일연대)였다. 통일연대는 2001년 3월 6․15남북공동선언을 지지하는 단체와 개인을 망라하여 결성되었는데 경실련통일협회는 물론 한국노총까지 여기에 포섭되었고, 지방조직으로 내려가면 YMCA와 환경단체들도 참여하였다. 통일연대는 종북주의자들이 친북세력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전술의 일환으로 결성한 통일전선조직이었다. 반미친북세력은 단순히 살아난 정도가 아니라 하루아침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2001년 1월 부시 미 행정부가 출범하여 대북강경 입장을 취함에 따라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활기를 띠었던 민간사회운동단체간의 남북대화와 교류는 일시 중단되고 말았다. 이에 민간통일운동 진영은 미국을 ‘민족화해를 방해하는 외세’로 규정하고 〈불평등한 SOFA개정 국민행동〉, 〈국가미사일방어(NMD)․전역미사일방어(TMD) 저지 및 평화실현 공동대책위원회〉, 〈미군 학살만행 진상규명 전민족 특별조사위원회〉, 〈반미여성회〉 같은 반미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여 미군사격장 폐쇄, 기지반환, 주한미군 철수, SOFA개정 운동을 전개하였다. 2002년 1월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이어 한 달 뒤에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가 미국의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기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시금 반미감정이 들끓었다. 그 해 11월에는 미군 법원이 효순․미선 사망사건의 관련자인 미군병사들에게 무죄평결을 내리면서 반미촛불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서 반미감정이 세대와 계층을 넘어 확산되면서 반미운동은 비로소 대중성을 획득한다. 이때부터 반미는 한국 좌파진영의 활동과 투쟁에 있어서 핵심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반미 대열에서 이탈하면 시민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상실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전국연합과 통일연대처럼 종전에도 반미운동에 열심이던 단체는 물론이고 민노총과 전교조를 비롯한 이익집단, 민노당을 비롯한 일부 정치집단, 참여연대와 경실련과 환경운동연합 같은 시민단체, 심지어는 우파성향의 한국노총까지 반미운동에 결합한다. 이들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한미관계의 현안이 돌출될 때마다 반미연대투쟁 회의체를 결성하는데 매번 거의 같은 단체들이 참여하고 동일한 명망가들이 전면에 나선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반복되는 한국 반미운동의 공식이다. 예를 들면 〈미군장갑차 고 신효순․심미선 양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약칭 여중생범대위)〉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약칭 평택범대위)〉는 그 구성 단체와 주도인사들의 면면에서 대동소이하다. 반미운동권은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을 계기로 반미․반전평화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이라크 파병문제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이라크에 대한 비전투병 파병에 이은 전투병 파병을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자, 반미세력들은 2003년 9월 23일 전국적으로 351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이라크 전투병파병 반대 비상 국민행동(약칭 파병반대국민해동)〉을 결성하여 파병반대운동을 거세게 전개하였다. 심지어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상당수 국회의원들까지 파병을 반대하였다. 2003년 8월에는 한총련 학생들이 경기도 포천군 미군 사격훈련장에 들어가 장갑차 위에서 기습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2004년 4월 15일 총선에서는 반미적 정강정책을 전면에 내건 민노당이 국회의석 10석을 얻어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하였을 뿐 아니라, 반미적 성향이 강한 386세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으로 대거 당선되면서, 원내에서부터 반미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그 후에도 반미운동권은 노무현 정부 하에서 2005년 평택미군기지확장 반대, 2006년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 2007년 한미 FTA반대투쟁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취임 후에는 광우병시위로 대대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 뒤 정부의 반미운동에 대한 강력한 억제와 좀 더 성숙해진 한미관계 현안관리로 인하여 반미운동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정권 말기가 가까워오면서 한미 FTA비준을 전후한 반대운동, 제주해군기지반대운동, 제2차 광우병시위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Ⅳ. 반미운동의 논리와 한계
한국 반미운동권의 주장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두 가지 든다면 첫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론이고, 둘째, 민족공조론이다. 먼저 반미운동권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한국은 이미 세계화의 수혜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중국마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여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초고속성장 가도를 달리고, 그 덕분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 경제도 동반성장하는 상황이다. 물론 투기성 국제금융자본을 규제하고 시장의 탐욕을 견제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은 요구된다. 세계화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사회안전망을 확충하고, 피해 집단인 농민과 비숙련노동자들을 위한 보상․보호대책을 수립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유무역과 개방을 골자로 한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대세이다. 반미운동권은 한미 FTA를 결사반대하지만 사실 농민을 제외하고는 직접적 이해당사자가 아닐 뿐더러 타당한 반대논리도 제시하지 못한다. 한미 FTA는 수출증대와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고용 없는 성장 추세 속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려면 현재 한미 간에 타결된 내용보다 의료, 교육, 법률 같은 서비스산업 개방 폭을 더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인간광우병은 암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세균성 전염병과는 다르기 때문에 광우병에 걸린 소의 고기가 바로 인간광우병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며, 동물사료 배제 같은 조치로 광우병 소의 발생을 거의 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즉각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한 2008년 당시 정부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다음으로 한미공조에 반대하여 반미운동권이 부르짖는 민족공조론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반미운동권은 6․15남북한공동선언을 금과옥조로 여기지만 그 제1항의 ‘우리 민족끼리’, ‘자주’ 운운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남북대화가 잘 되면 한반도문제의 당사자로서 남북한의 자율성과 재량권이 어느 정도는 커질 수 있다. 그러나 남북한관계는 민족내부의 특수한 관계인 동시에 국제관계인 이중성을 본질로 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공조만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다. 당장의 휴전협정부터가 미국과 북한과 중국 3자 간에 체결되었고 유엔군사령부가 한반도에 현존하는 상황에서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더욱이나 북한은 중국과 베트남 같은 개혁개방노선으로의 전환을 거부한 채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보유하고 있는데다가 그것을 테러세력에게 이전할 위험성마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주민에 대한 인권유린을 계속하기 때문에 국제사회가 경제제재를 비롯한 각종 제재를 가하고 있다. 그런 제재를 무시한 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처럼 또 다시 남북경협이나 대북지원을 독단적으로 하게 된다면 한미동맹이 파탄 날 뿐 아니라 한국마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말 것이다. 반미운동권은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을 비난하지만, 그것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주민들의 인권을 유린하기 때문이므로 미국을 탓하기보다는 북한을 먼저 비판해야 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한 내 미군 핵무기 철수를 주장하며 반핵 구호를 외치던 반미운동권이 1993년 북한의 비밀핵개발 탄로 이후 침묵을 지키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1980년대 후반 남한 운동권이 반핵운동을 전개하자, 미국은 남한에 배치했던 모든 전술핵을 철수시켰다. 그 때부터 한국은 주일미군의 핵우산 아래에서 외부의 핵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이어, 1991년 한국의 노태우 정부는 북한과 '남북한 비핵화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남북한이 공히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이전하지도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음이 1993년 프랑스 인공위성의 항공사진 촬영으로 밝혀졌고, 그 후 20년 간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지금 NL계열의 반미운동권은 북한 핵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지 않는가. 미국 핵은 안 되고 북한 핵은 괜찮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반미운동권의 평택미군기지 확장반대 주장도 억지다. 미군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합작품인 한국전쟁 이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주둔하고 있다. 냉전종식 이후에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은 대북억지와 동북아 균형 차원에서 필요하다. 미군기지의 평택 이전은 한국 국민의 용산기지 이전 요구에 따른 것인데 평택으로도 가지 말라고 하면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한국의 이라크 파병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전후복구 지원을 위한 것이었고, 한미동맹관계를 고려할 때 불가피하였다. 당시 여론도 이라크 전쟁 자체는 부당할지 몰라도 자원 확보와 전후복구 프로젝트 참여를 생각하면 파병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2002년 효순․미선사망사건 당시 주한미군과 미 국방부의 대응이 일부 경직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한미SOFA 자체는 미독(美獨) 또는 미일(美日)SOFA에 전혀 손색이 없거나 오히려 환경조항을 비롯한 일부 조항에서는 더 전향적이다. 한미관계의 정책 현안은 반미운동의 계기가 되며, 그것을 잘못 다루면 반미감정이 정치적, 이념적 반미주의로 심화될 수 있다. 그러나 정책 현안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반미운동권의 주장은 과장․왜곡되었거나 허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Ⅴ. 반미운동의 정치적, 이념적 성격
한국의 반미운동은 급진적 운동으로서 크게 다섯 가지 정치적․이념적 성격을 갖는다. 첫째, 집권전략으로서의 반미운동이다. 둘째, 반(反)대한민국으로의 지향성이다. 셋째, 좌파 민족 패러다임과 통일지상주의이다. 넷째, 주사파식 자주 이데올로기이다. 다섯째, 반자본주의이다. 우선 반미는 좌파의 정치연합 혹은 집권전략으로서 활용된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행단계를 지나 공고화되면서 민주 대 반민주구도는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반독재’라는 슬로건으로는 이제 더는 광범위한 정치연합을 형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반미’의 유용성은 두드러진다. ‘반미’만큼 광범위한 정치연합 혹은 집권연합을 형성할 공통분모는 없다. ‘반미’연합에는 범좌파뿐만 아니라 중도파, 우파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다. 좌우 이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라는 최대공약수가 있기 때문이다. 2002년 효순․미선 추모 반미촛불시위와 2008년 광우병시위는 그 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전자의 정치연합은 집권전략으로서도 효용성을 증명하여 노무현 정부를 탄생시켰다. 둘째, 반대한민국으로의 지향성이다. 한국의 반미운동은 한미관계의 정책 현안을 계기로 삼아 미국을 반대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 종착점은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적 변혁을 추구하거나 혹은 북한과의 연방제통일을 이루는 것으로 나아간다. 남한 보수우파지배체제의 근간인 한미동맹을 타격함으로써 체제 자체를 전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전복’의 또 한 가지 유력한 수단은 역사의 반미적 해석이다. 대한민국은 친미, 친일, 기회주의 분단세력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서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였다는 것이다. 셋째, 좌파 민족 패러다임과 통일지상주의이다. 원래 민족주의는 우파와 친한 개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분단과 권위주의 지배의 장기화 속에서 이념보다 민족이 더 소중하다는 관념이 확산되면서, 좌파 민족주의가 득세하였다. 지구상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돌연변이 이념이 아닐 수 없다. 반미운동권, 특히 NL계열에게 있어서 분단은 한반도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다. 사회과학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분단체제’라는 말까지 지어내가면서 모든 시대적, 국가적 과제에 우선하여 분단의 해소, 즉 통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통일은 곧 흡수통일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자 어느 날 갑자기 그들은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통일보다는 장기적 평화공존이 중요하며, 그것야말로 사실상의 통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통일을 떠드는 것은 남한의 보수우파와 미국을 반통일냉전세력으로 몰기 위한 것이지, 진짜 통일을 빨리 하자는 소리는 아니다. 넷째, 주사파식 자주이데올로기이다. 한국 반미운동권의 주류는 계급보다 민족을 우선하는 NL계열이고 그 중에는 아직도 김일성․김정일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노선을 추종하는 무리가 있다. 이들이 말하는 ‘자주’는 단순히 미국의 간섭과 압력에서 벗어나거나, 안보와 경제면에서의 대미의존도를 줄이거나, 한미관계를 좀 더 대등한 관계로 바꾸는 차원이 아니다.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해소함으로써 연북통일의 기반을 결정적으로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노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과거 민노당 때와 똑같이 그 강령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 한미동맹체제를 해체”하자고 주장한다. 오늘날과 같은 네트워크적 복합외교의 시대에 동맹 대 자주의 이분법은 통하지 않는다. 동맹을 포함한 복합적 네트워크의 형성을 통한 자주만이 가능하다. 오늘날 북한이 처한 현실이 웅변하듯이, 주사파식 자주이데올로기의 종말은 ‘자주’가 아니라 ‘고립’이요, ‘멸망’이다. 다섯째, 반자본주의이다. 사실 한국의 운동권은 반미보다 반자본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먼저 받아들였다. 오랜 기간 군사독재와 싸우다 보니 군사정권의 물적 기반인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항하는 논리로서 사회주의 이념이 유용했던 것이다. 주체사상도 반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 반미운동권의 논리에는 반자본주의가 그 근저에 공통이념으로 깔려 있다. 민노당의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과거 민노당 때보다는 다소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강령에서 국가기간산업의 국공유화를 비롯한 반자본주의적 정책을 내걸고 있다.
Ⅵ. 반미운동의 주요 사례 분석
2000년 이후 한국 반미운동의 주요사례를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인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자. 첫째, 국내정치적 동기가 어떻게 작용하였나. 둘째, 좌파문화헤게모니의 영향은 어떠하였나. 셋째, 이념성향은 어떤 영향을 미쳤나. 넷째, 대규모 군중동원에 성공하거나 여론의 지지를 받았나. 다섯째, 한국이나 미국 정부의 정책변경을 초래하였나.
1. 2002년 효순․미선 사망사건 촛불시위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를 겨냥한 의도적 정치쟁점화의 성격이 뚜렷하다. 특히 민노당은 선거사상 처음으로 1인2표제로 실시된 6월 지방선거에서 정당지지도 8%로 자민련을 제치고 3위로 부상했지만 아직 국회의석이 없기 때문에 원외에서 이 사건을 쟁점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노무현 후보의 “반미면 어때?”라는 발언에서 보듯이 민주당으로서도 반미감정의 확산은 ‘실’이 아니라 ‘득’이었다. 초점은 반미였지, 반정부가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시위 억제에 전혀 적극적이지 않았고, 대선 이후에야 노무현 당선자가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하였다. 뉴미디어로서 인터넷의 위력이 급진적 대중운동 차원에서 최초로 드러났으며, 공중파 공영방송과 인터넷을 비롯한 문화영역 전반에서의 좌파 헤게모니가 입증되었다. 2000년 남북한정상회담과 2002년 ‘붉은 악마’의 월드컵 응원열기 속에서 레드컴플렉스가 급격히 약화된 상황에서, 급진세력에 의해 반미촛불시위가 기획되고 주도되었으나 이념성은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SOFA 개정, 부시 사과라고 하는 최소 강령을 전략적으로 채택한 결과 전례 없는 대규모 시위였다. SOFA ‘개정’은 없었지만 상당한 ‘개선’이 이루어졌고, 주한미군과 미국 국방부가 스스로의 경직성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2. 2003~2004년 이라크 파병 반대투쟁 2003년 초부터 투쟁이 시작되었으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을 전후로 최고조에 달하였고 2008년 말 한국군이 이라크에서 완전 철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총선을 겨냥한 정치쟁점화의 성격이 내재되어 있었다. 민노당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3.9%(1997년 1.2%)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004년 원내진출이라는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파병반대투쟁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반미’와 ‘반정부’ 투쟁의 성격을 공히 지녔고, ‘반정부’ 성향이 두드러지자 친노운동권이 이탈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을 견제하는 데에 파병반대운동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 공중파 공영방송과 인터넷을 비롯한 문화영역 전반에서 반부시, 반전정서가 압도하였으나 대중을 시위현장에 불러내지는 못하였다. 파병반대투쟁은 노무현대통령 탄핵반대투쟁과 결합하였고, 파병반대성향의 386세대 국회의원이 17대 국회에 대거 진출하였다. 파병규모는 축소되고 파병시기가 지연되면서 한미 정부 간 갈등이 깊어졌다. 파병반대논리 중에는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기 때문에 파병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게 포함되었다. 즉, 파병반대투쟁 안에서 반전평화론과 민족공조론이 결합되었다.
3. 2005년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선거 국면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2004년 부시 미 대통령 재선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반미․반전투쟁의 모멘텀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주민들을 선동하여 인위적으로 쟁점화하였다. 민노당은 원내 제3당이면서도 장외투쟁인 평택투쟁을 〈평택범대위〉와 함께 주도했다. 정권의 지지세력이 정권의 정책을 반대하는 양상이 이라크파병반대투쟁에 이어 계속되었으나 초점은 반정부가 아니라 반미였다.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은 격렬하였으나 정부가 시위억제에 비상한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이전은 국회의 평택지원특별법의 뒷받침을 받아 이뤄지는데다가, 평택투쟁의 과격성이 부각되면서 대중의 호응은 얻지 못하였다. 좌파문화헤게모니를 배경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든 못 얻든 반미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하는 이념적 급진성을 잘 보여준다. 평택으로의 기지 이전은 2008년에서 2012년으로, 다시 2016년으로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예산부족이지만 반대투쟁의 영향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4. 2006년 맥아더 동상 철거운동 선거 국면과는 무관한 투쟁이다. 초점은 반미이며, 반정부 성격은 없다. 한미동맹 중심의 보수우파지배체제를 허물기 위한 이른바 성역 타파의 선도투쟁이다. 주도단체는 통일연대였다. 민노당의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한미동맹 해체 강령과도 부합하는 투쟁이었다. 미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노무현 정부로서도 굳이 말릴 이유가 없는 투쟁이었다. 쟁점이 없으면 역사의 무덤이라도 파헤쳐서 쟁점을 만들고야마는 급진적 반미운동의 전형이다. 대중의 호응은커녕 중도좌파 학자들에게서도 비판받았다. 범보수진영을 긴장시키고 단결시키는 역효과도 초래하였다.
5. 2007년 이후 한미 FTA 반대투쟁 한미 간 협상과 타결, 재협상, 비준 이후까지 6년 이상 지속된 투쟁이다. 같은 기간에 5개의 큰 선거가 포함되었다. 2007년 대선, 2008년 국회의원 총선거, 2010년 4대 동시 지방선거, 2012년 국회의원 총선과 대선이다. 따라서 선거를 겨냥한 정치쟁점화의 성격이 분명하다. 노무현 정부 하에서는 한미 FTA에 찬성했던 일부 정치집단이 반대로 돌아섬에 따라 이명박 정부 하에서의 한미 FTA반대연합전선은 그 범위가 더 넓어졌다. 〈전국농민회총연맹(약칭 전농)〉의 경우 경제투쟁(생존권투쟁)이지만 다른 정당과 사회단체의 경우 정치투쟁이요, 이념투쟁이다. 민노총 소속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한미 FTA가 경제적으로 이익이 됨에도 불구하고 반대투쟁을 벌였다. 민노당은 2007년과 2008년 양대선거 참패 후 정국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더욱 더 맹렬하게 투쟁하였다. 노무현 정부는 시위 억제에 소극적이었으나 이명박 정부는 시위에 강력하게 대응하였다. 노무현 정부 때는 좌파문화헤게모니가 확고하였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공중파 공영방송 내부 인적 쇄신과 종합편성 방송 등장으로 좌파문화헤게모니가 약해졌지만 좌파의 담론 주도권은 여전히 건재하다. 노무현 정부가 타결한 FTA인데다가 기업의 찬성 분위기로 인하여 한미 FTA 반대여론의 확산에는 한계가 있었고, 시위 현장에서의 대중 호응도 없었다. 한미 FTA 반대투쟁 결과 농민의 이해관계는 협상에 거의 전폭적으로 반영되었고, 다른 반대세력도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 간 협상에서 의료와 교육을 비롯한 서비스산업 개방을 저지하거나 늦추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6. 2008년 광우병 시위 선거국면과는 직접 연관되지 않았으나 2007년과 2008년 양대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종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반미정서’와 ‘반정부정서’가 절묘하게 결합하였고, ‘반정부정서’가 더 두드러졌다. 양대선거에서 참패한 민노당 세력으로서는 정국주도권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사활을 걸었다. 이명박 정부는 사안의 민감성을 도외시한 초기의 오만한 대응으로 시위를 오히려 확산시켰다. 정부와 여당 간에는 물론이고 행정부 내부에도 이견이 있었고, 대응방향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두 차례 대국민사과와 한미 간 추가협상 타결 이후에야 중심을 잡고 불법과격시위를 진압하였다. 인터넷은 물론 양대 공중파 공영방송이 ‘PD수첩’, 저녁메인뉴스, ‘생방송 아침’ ‘아침마당’ 같은 프로그램 전반에 걸쳐 광우병괴담을 급속히 확산시킴으로써 초대규모의 군중을 시위에 동원할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한미관계 정책현안 관리의 중요성을 새삼 학습한 시간이었다.
7. 2012년 강정마을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 2012년 양대선거를 겨냥한 정치쟁점화의 성격이 짙다. 한미 FTA와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부 때 강정마을로 부지가 최종 결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노세력을 포함한 반미세력이 선거국면을 맞아 일부 주민을 선동하였다.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정책연합을 하면서 제주해군기지를 저지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투쟁의 연합전선이 대폭 확대되었고, 그에 따라 제주해군기지 반대여론도 상당한 정도로 확산되었다. 평택미군기지와 마찬가지로 제주해군기지도 한미동맹의 군사전략 요충지로서 중국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안이다. 한국외교중심축을 미국에서 중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반미운동권의 입장에서도 제주기지는 영 탐탁치가 않다. 따라서 ‘반미’투쟁의 성격을 내포하지만, 그보다는 선거국면에 맞춘 반MB정부투쟁의 성격이 더 짙다. 강정마을 주민의 생존권투쟁이요, 환경보호운동인 것처럼 포장하였지만 실상은 정치투쟁이다. 좌파문화헤게모니는 약해졌으나 이명박 정부의 각종 실정으로 인한 MB심판론의 득세 속에서 반미좌파의 담론 주도는 계속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강경대응으로 시위는 확산되지 못하였고,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으로 대중의 참여도 없다. 투쟁의 직접적 성과는 없으나 4.11총선에서 야당이 수도권에서 승리한 것에 일정정도 영향을 주었을지 모른다.
Ⅶ. 반미운동에 대한 대응
2008년 광우병시위에서 보듯이 한미관계의 정책 현안에 대한 정부의 신중한(prudent) 대응이 절실하다. 사안의 민감성과 함께 시기의 민감성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부 대응의 일관성도 매우 중요하다. 제주해군기지의 경우 정부의 흔들림 없는 정책집행의지를 보인 것은 좋지만, 반미세력의 움직임을 미리 예상하는 가운데 소통과 설득을 강화함으로써 정부의 갈등관리능력을 향상시켰어야 했다. 미국 관련 사안의 정치쟁점화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반미운동은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고 한미관계의 비대칭성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반미운동의 급진화, 과격화, 일상화, 장기화는 심각한 문제이다. 반미운동권은 만성적 적대문화에 젖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는 사실을 왜곡․날조까지 한다. 1960년 4․19 직후 정국에서 보듯이 혁신정당이 목표한 국회의석을 얻지 못해 원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경우 학생을 비롯한 운동권과 결합하여 장외투쟁에 주력하고 시위만능주의 사회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다. 2004년 이후 민노당의 행태가 그러하였고, 앞으로 통합진보당(민주통합당의 일부 386세대 국회의원 포함)의 행태가 또한 그러할 것이다. 반미운동의 확산을 막으려면 보수정당이 중심이 되어 한미관계 정책현안을 원내로 수렴하여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정치력을 발휘하여야 한다. 원내 제2당과 제3당 의석을 합하면 140석이나 되는데도 불구하고 양당이 계속 장외투쟁에 주력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범국민적 차원에서 강력한 비판이 이뤄져야 한다. 참여민주주의 또는 광장정치의 긍정성이나 불가피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정치는 기본적으로 의회에서 정당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념적으로 급진적인 반미운동의 확산을 막으려면 공교육과 사교육, 각종 시민학교 차원에서 한국현대사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만 ‘물고기’와 ‘물’이 분리됨으로써 급진 반미운동이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고립되게 된다. 북한과 남한 반미운동권의 연계 고리를 철저하게 차단할 필요가 있다. 민노총과 전교조를 비롯한 반미운동권의 핵심진지에 국민의 혈세가 지원되지 않도록 철저히 봉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작업들은 이명박 정부 들어 상당히 이뤄졌다고 평가된다. 좌파문화헤게모니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공영방송 개혁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는 광우병시위에서 기세가 꺾이면서 일부 공영방송의 민영화를 추진하지 못하였다. 문화투쟁과 사상투쟁을 위한 반미좌파의 각종 참호와 진지를 와해시키기 위해서는 우파 시민단체와 우파 인터넷 언론을 비롯한 우파 시민운동 전반의 역량이 속히 배가되어야만 한다. 노무현 정부 출범과 더불어 뉴라이트를 비롯한 우파 시민운동이 본격화하였으나 아직은 절대 역부족이다. 반미운동권의 좌파 민족주의와 주사파식 자주이데올로기, 그리고 반자본주의 이념의 대안으로서 범우파진영은 자유주의 이념을 확고하게 붙들고 나가면서 한국사회 전반에 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자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이다. 통일의 궁극적 목적이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북한 인권 문제는 통일의 과정에서부터 다루어져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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