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년 4월) |
강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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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친(親) 일본,
반(反) 조선’ 자세
태평양 방면 미 육군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가 일본 점령의 첫 발을 디딘
것은 45년 8월 30일이었다. 9월 2일 요코하마 해상의 미주리함 함상에서 일본은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그리고 미 제24군단을 실은 21척의
배로 이루어진 미 7함대가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건 9월 4일이었다. 입항하기 전 일본군이 인천
앞바다에 설치해 둔 기뢰 제거 작업에 들어가는 동안 미군 군정요원들은 군정에 대비하기 위한 ‘벼락 공부’를 하고 있었다.
9월 7일
인천항에선 미군 상륙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군중으로 인해 작은 혼란이 발생했다. 미군의 인천 상륙을 환영하기 위해 부둣가에 나와 있던 군중이
일본 경찰의 저지 명령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발포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발포로 인해 2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나중에 미군은 오히려 일본측을 두둔하였다.
미군의 ‘친(親) 일본, 반(反) 조선’ 자세는 이미 9월 6일
준장 찰스 해리스가 이끄는 37명의 미군 선발대가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해 조선호텔에 투숙했을 때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미군 선발대는 일본
관리와 장교들을 만나 “곤드레 만드레가 된 채 흥청거린” 연회를 가졌다.
그러나 미군 선발대는 그렇게 흥청거리며 놀면서도 한국인들의
접견 요청은 모두 거부하였다. 미군 선발대를 영접하기 위해 김포비행장에 나갔던 조선총독부의 고참 국장이었던 재무국장 미즈타는 ‘무조건 항복’
‘잔인한 미군’ ‘능욕’ 같은 것을 상상했지만,
미군으로부터 ‘악수’ ‘착석 권유’와 같은 정중한 대우를 받으면서 미군이
자신들을 점령하러 온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를 하러 왔다는 점을 간파했다. 미군이 조선인에 대해 경멸의 빛을 보일 때엔 같은 지배자로서
동질감마저 느꼈던 것이다.
살벌한 맥아더 포고령
반 면 조선인 선발대는 거부당했다. 45년 9월 8일 새벽, 한국 점령군인 제24군단 사령관 육군 중장 존 하지(John R. Hodge)는 늘 하던 버릇대로 맥아더처럼 색안경을 끼고 파이프를 입에 물고 선장인 바베이 제독과 함께 갑판에 앉아 있었다.
바베이의 망원경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단 작은 배 한 척이 들어왔다. 그
배엔 조선의 인민공화국이 파견한, 영어를 할 줄 아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 여운형의 비서 조한용, 그리고 미국 브라운대학 출신인 백상규 등
3명이 타고 있었다.
세 사람이 기함에 올랐을 때 하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백상규가 유창한 영어로 자신이 브라운대학을
장학생으로 졸업했다는 걸 포함하여 자기 일행이 온 목적을 설명했다. 명문 브라운대의 장학생? 미군에겐 그게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다.
미군 장교 가운데 브라운대학 출신이 있어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학교의
건물 모양에서부터 교수 이름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질문이 오고 갔다. 장교는 “적어도 한때 브라운대 학생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보증을
섰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하지가 그들의 면담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조선을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는 미군의 기본 자세는 45년 9월 7일에
발표된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그리고 3호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포고령 1호는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의 지위로 한반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고 했으며, 포고령 2호는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없이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고
했다.
그렇게 살벌한 포고령을 때려 놓은 미군은 9월 8일 오전 8시 30분
일본군이 보내준 안내선의 도착으로 인천항에 입항하기 시작했고 입항은 오후 1시에 완료되었다. 미군은 상륙 즉시 경인지구에 대해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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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준’ 및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조선인민보』의
창간호(45년 9월 8일) 1면에는 영어로 <연합군 환영>이라는 톱기사가 커다란 사진과 함께 실렸고, 왼편에는 역시 <연합군을
환영함>이라는 시가 실렸지만, 미군은 그런 환영을 외면하였다.
점령군 사령관 존 하지
9 월 9일 미군은 서울로 진주해 38선 이남지역에 대한 군정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 날 오후 4시 30분 조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가 내려지고 대신 그 자리엔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일본 육군대장 출신으로
총리대신을 역임했던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기는 할복자살을 시도했지만 미수로 끝나 여러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항복 조인식장에 나와 항복 조인 문서에
서명하였다.
점 령군 사령관 하지는 어떤 인물이었던가? 하지는 1893년
미국 일리노이주의 시골 도시 콜콘다에서 태어나 1917년 일리노이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5월 고등사관양성소에 입학해 군인이 된
인물이었다. 하지는 일본과 싸운 태평양전쟁에선 유능하고 공격적인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이름을 날려 ‘군인 중의 군인’이라느니 ‘태평양의
패튼’이라느니 하는 평판을 얻었다.
그런 평판이 시사하듯이, 하지는 ‘무뚝뚝하고 직선적
접근방식’을 선호했으며, 극도로 보수적이었고 정치적 감각도 없었다. 게다가 제24군단은 일본 점령을 위해 훈련받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상부로부터 아무런 정책 지침도 받지 못했다.
아 니 정책 지침을 전혀 받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 마닐라의 미군 태평양 사령부에 근무했고 뒤에는 국무부 차관까지 지낸 알렉시즈 존슨은 하지와의 대화를 회고하면서
“한국에 대해 하지가 받은 지시는 대(對) 일본정책의 일환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그레고리 핸더슨은 “하지는 단지 수송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약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의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선택된 사상 초유의 사람일 것”이라고 평했지만, 문제는 그 이상으로 심각했던
것이다.
하 지는 그야말로 청교도적인 자세로 열심히 일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그는 한동안 반도호텔에
묵다가 궁전 같은 총독관저(지금의 청와대)를 차지하고 살았지만 서너 명의 참모들을 함께 데려와 살았다. 허세를 부리지 않고 소박하다는 점에선
칭찬할 만한 일이었지만, 매사에 너무 엄격해 신경질적인 수준이었다. 예컨대, 군정요원들이 이용하는 조선호텔의 식당은 새벽 6시 반부터 열었고
그만큼 일찍 끝냈으며 룸서비스는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청교도적인 생활 습관을 갖고 있는 하지의 취향 때문이었다. 하지가 주최하는 파티는
‘장례식 파티’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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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건 지극히 사소한 문제였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분쇄하는 일”이었는데,3) “하지는 공산주의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혐오하는 미국인
특유의 본능을 지녔”다는 점이었다.
‘준비 부족론’
논쟁
하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국 정부의 훈령에 충실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하지의 개인적 특성이나 정세 인식이 미군정의 남한 정책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엔 문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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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하지 개인의 능력보다는 그가 수행해야 했던 일 자체가 ‘거의 수행 불가능한 임무’였다는 시각도 있다.5)
훗날 하지도 “미군정 최고 책임자로서 나의 직책은 내가 지금까지 맡았던 직책들 가운데 최악의 임무였다. 만약 내가 정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민간인 신분이었다면 연봉 100만 달러를 준다 해도 결코 그 직책을 다시 맡지 않을 것이다”고 회고했다.
그 런데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여기에 이데올로기적인 해석이 스며든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즉, 미국은 해방자이자 민주주의의 전파자로서 순수한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준비가 부족했다는 식의 ‘미국결백론(American innocence theory)’이나 ‘단순실수론(fumbling
theory)’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지의 자질이나 미국의 준비 부족을 문제삼는 이른바 ‘준비부족론’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들에 대한 미국의 책임 정도를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범죄가 아니라 단순한 ‘과실에 의한’ 범죄의 수준으로 축소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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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러나 과연 무엇이 준비되지 않았는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38선 획정의 문제인지,
그걸 전제로 하거나 그것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군정 실시의 문제인지, 그걸 구분해서 말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준비
부족론’ 논쟁은 그런 차원과 더불어 ‘거시’와 ‘미시’라고 하는 시각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이루어진 한계를 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 지에 대한 명령 체계는 워싱턴ㆍ동경ㆍ서울 사이를
오고가야 하는 등 혼란스러웠는데, 이를 더욱 악화시킨 것이 국무성과 국방성이 한국 문제를 보는 시각이 서로 달랐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는 국방성
소속이었으며 국무성은 하지에게 고문관을 배속시키는 것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국무성의 관심은 유럽에 쏠려 있었고 남한은 정책 결정
보류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는 형식적으론 맥아더 사령부 휘하에 있었지만, 맥아더의 관심은 일본에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하지는 자유로운
재량권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하지는 맥아더를 통하지 않고 미국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보고서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가 재량권을 누린 건 맥아더의 하지에 대한 존중심
때문은 아니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군주(君主) 행세를 하면서 그 재미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미군의 한국인 모욕
미 군정은 기본적으로 군사조직 우위의 통치구조였으며, 국무성 출신
문관들의 위상과 역할은 매우 취약하였고 하지 및 맥아더의 직접적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이는 미군정의 한국 통치가 극우ㆍ군사적 사고의 지배를
받게 되리라는 걸 시사하는 것이었다.
미 군정의 그런 사고방식은 항복식이 끝나자 하지가 총독부의 모든 기능이 기대로 존속될 것이라고
선포하는 것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조선인들이 여전히 일본 당국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는 “주민의 경솔하고
무분별한 행동은 의미없이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되어 재건이 지연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는 조선인들의 인내를 요청하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의 당신들의 행동을 통하여, 세계의 민주국가들과 그들의 대표자인 나에게
당신들의 민족으로서의 도량과 능력, 독립국의 일원으로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할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가 잘 지적했듯이, “한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이러한
온정주의를 구역질이 나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하지의 발언은 한인들에게 실로 모욕적인 것이었다.
이 에 『서울타임스』 45년 9월
10일자는 사설에서 조선인들이 일본 총독 아베의 통치를 계속 받느니 차라리 미개한 어느 보르네오섬 추장의 통치를 받는 편이 낫겠다면서 미군의
도착을 환영해야 할 자들은 일본인들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관영 소식통마저 하지의 그런 태도가 “한인과 대항하여 일본과 미국이 동맹을 맺는 효과를
가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45년 9월 11일자 사설은 “우리는 일본의 식민 쓰레기에는 ‘무르고’ 우리가
해방시키기로 한 백성들에게는 억압적으로 대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바로 그게 미국인들의 태도이자 진심이었다. 미국의 국가 이익에
일본은 한국보다는 훨씬 중요한 나라였으며, 이는 이후의 정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커밍스는 미 국무성이 “하지의 일본 관리 유임 정책에 강력히
반발했다”고 말하지만, 그런 반발은 큰 무게가 실려 있는 건 아니었다.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
물 론 변화가 전혀 없진 않았다. 45년 9월 12일자로 아베가
해임되었고, 그 날 미 육군 소장 아키발드 아놀드가 군정장관, 헌병사령관 육군 준장 로렌섬이 경찰 책임자, 육군 소장 키량프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일본 관료에 의존했다.
미군정은 이미 남한에 건설된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상해의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은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인민위원회와 치안대 등의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키기
시작했으며, 일제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해 남한 통치에 돌입했다.
상층부만 좀 바뀌었을 뿐 ‘일제관료 및 총독기구의 활용’은
점령군사령부의 기본 방침이었다. 이는 이미 1944년 초 미국무성에서 결정된 것이었으며, 그것은 45년 9월 2일 체결된 일본과 미국 사이의
항복조약 제5항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이 조항은 9월 7일의 맥아더 포고 제1호 제2조와 9월 9일 체결된 ‘조선총독의 항복서’에서도
재확인되었다.
점령군의 행정요원은 대부분 행정을 해본 경험이 없는 하급
장교였다. 군정청의 국장급으로 보직된 장교의 계급이 대위ㆍ소령 정도였으며, 실무책임자인 과장급은 중위였다. 게다가 이들은 정규 사관학교나 대학
졸업자가 드물었고 전시에 급조된 장교들이었다. 군사조직과 별개로 행정업무를 전담하는 미군정청은 46년 1월 4일에서야
설치되었다.
점 령군은 모든 행정에 있어서
일본인들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일본인들은 45년 10월까지 약 350권의 비망록을 영어로 작성하여 미군정청에 제출하였으며, 한인 관리들을
임명할 때에도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하지가 신문 기자들에게 “사실 일본인들이 가장 신뢰할 만한 나의 정보원이다”고 실토했듯이, 미군은 일본군에
이은 새로운 지배자의 자세로 한국인들을 대했던 것이다. 이는 미군의 옷을 갈아입은 일제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미군에게 준 한국에 관한 정보의 주요 내용은
① 한국인의 민도는 극히 낮고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불결하고 도둑이 많다), ② 2대 정치세력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인데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의 지령을 받고 있다, ③ 한국을 통치하려면 총독부 관료체제의 도움이 필요하다 등이었다.
미군정하 한국을 취재했던 미국인 기자 마크 게인은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었다. 우리는 점령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항복조건에 복종하는가 않는가를 감시하기 위해서 왔다. 상륙 제1일부터 우리는 한국인의
적(敵)으로 행동했다”고 썼다.
미군의 인종차별주의
미 군이 한국인을 적(敵)으로 간주한 이면엔 강한 인종차별주의와 더불어
조선에 대한 멸시도 도사리고 있었다. 개화기 때부터 조선에 진출했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미국에 전한 조선 관련 정보는 대부분 조선에 대한 멸시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조선인은 게으른 천성을 갖고 있는 ‘구제불능’의 민족이었다.
조선에 진주하기에 앞서 한 미군 교관은
미군들에게 “한국은 미국에 비하여 900년이 뒤떨어진 야만국”이라고 일러 주었다. 하지는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고양이와 같은 민족”이라고 했고,
미군 병사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인을 구크(gook)라는 경멸적인 단어로 지칭하였다.
서울 주재 소련 총영사관의 부영사 샤브신의
아내인 샤브쉬나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미 국인 여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는 오락거리 중의 하나가 인력거꾼들의 경주였다. 저항감 없이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인력거꾼들은 절박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었다. …… 그 절박한 운명의 도장이 그들의 극도로 지친 얼굴에 찍혀 있었다.
……
5∼6명의 인력거꾼들이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다. 출발, 인력거 안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승객들의 고함이 들려온다. 한 번은 미국 장교들과 대화하는 도중에 우리가 그런 종류의 오락에 분노를 표명하자 그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바로 그런 식으로 돈을 받잖아요. 과연 일 없이 가만히 서서 굶주리는 것이 더 나을까요?’”
경멸하는 수준을 넘어서 한국인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고 있는
미군들도 많았다. 예컨대, 나중엔 한국인들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다곤 하지만 하지는 45년 10월 3일 자신의 막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놈들을 다루는 것은 쉬운 문제다. 한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강탈당하고 매 맞았다고 떠들어대지만 증거가 거의 없다. …… 이들보다 더한 ‘멍텅구리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한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강간하고, 강탈하고, 살인을 했다. 그들은 사람을 때리는 것을 좋아한다.”
미군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에게 “대체로 지능적 정치 행동을 할 능력이
없다”는 사고가 널리 퍼져 있었다. 미군과 미군 관리들은 조선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 거만했으며, 가급적 조선인들을 멀리 하려고 애를
썼다.
DDT의 무차별 살포
그 런 인종차별주의는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은 점령군의 공식적인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레고리 핸더슨은 미 점령군이 맡은 최초의 업무는 일본군의 신속한 무장해제였으며, 그 이후 주한미군이 중점을 둔 것은
7만2천 명 병사들의 건강을 주의하고 귀찮은 일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 국인과 친분을 가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한 명령 때문에
심지어 책임 있는 자리의 미국인들이 상황을 확인하든가, 미국의 정치 목적을 돕든가, 또한 미군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범위의 접촉이나
우정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다.
그 결과 ‘우정’은 미군 정보부대(CIC)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결부되었으며, 한국인들과의 인간관계는 친절한 가정부의 범위로 최소화되었다. 병사들의 전속지로 한국은 ‘막다른 곳’이었으며,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가장 질이 떨어지는 군인들을 보충병으로 한국에 보냈다. 그것도 몇 번이나 독촉을 해야만 마지못해 보내주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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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은 “근무 성적이 불량하면 한국에 보낸다”는 것이었다. 미군 내에서 한국
주둔은 전혀 인기 없는 임무였다. 하지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군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 주둔 미군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사(다이어-리라), 두 번째는
임질(고오너-리아), 그리고 마지막은 한국(코-리아)이다.”
미군의 한국에 대한 멸시와 두려움은 DDT의 무차별 살포로 나타났다.
고은이 쓴
거기 드나드는 조선 사람에게도
군정청 밖에
거리의 조선 사람에게도
DDT를 마구 뿌려댔습니다
그 독한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조선 사람은 얼빠져 히죽히죽 웃기도 했습니다
아니 끓어오르는 수치로 치떨리기도
했습니다
아 마도 DDT를 제외하곤, 일본에 주둔한 미군들과는 달리 한국 주둔
미군들에겐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미군들은 한국을 ‘보급선의 끝’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약탈 행위가 많이 발생했다. 전체 미군의 약
3분의 1이 문맹이었다거나 미군 중 2천 명은 원래부터 직업적인 불량배였다는 사실도 약탈의 한 이유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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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문제는 미국 점령정책의 기본 자세와도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을 “핵심적 가치가 없는 주변부 열등국가”로서 평가하면서 “소련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취급하였던 것이다.8)
미 국의 한국에 대한 이런 자세는 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기본 노선이 되었다. 한국인들이
단결하여 그런 노선에 도전하고자 했다면 한국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분열과 권력투쟁에 매진하는 등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기에만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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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원자폭탄의 운반수단으로 검토됐던 B-29의 공중폭격 모습)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총사령관에 임명되자마자 원자폭탄 사용을 요구했고, 그후에도 30여 발의 원자탄을 투하하면 10日 안에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다고 공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은 또 맥아더 사령관을 해임한 뒤에도 원자폭탄 사용을 여러 차례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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