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 한마디에 채광권 알렌에 넘어가 - 운산 금광채굴권이 미국에 넘어간 전말
• 출처: [조인스 뉴스]
이코노미스트 1895년 미국인 실업가 모스(J. R. Morse)는 평안북도 운산군 일대 금광 채굴권을 획득한다. 이후 운산금광은 매년 수백만원어치의 금을 토해내며,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군림한다. 그 대가로 대한제국 정부가 얻은 대가는 매년 2만5000원. 대한제국 최대의 이권은 어떻게 미국인 손에 넘어갔을까?
1903년 70여 명의 서양인 기술자가 운산금광에서 근무했다. 그들은 조선인 광부보다 20배 많은 봉급을 받았다.
청일전쟁 전후 조선 정부는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처럼 단시일 내에 근대화를 이루려면 막대한 재정 지출이 필요했는데, 외화 수입이라곤 해관에서 들어오는 관세 수입이 고작이었다. 크고 작은 개발 계획은 자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하염없이 지연되었고, 정부에서 고용한 외국인의 임금을 체불해 외교 분쟁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었지만 그것이 자본도,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1884년 조선에 입국한 이후 고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알렌은 평안도, 함경도 일대의 광산을 담보로 미국에서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 재정난을 타개할 것을 고종에게 조언했다.
조선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이용해 개발하면, 양국 모두에 이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887년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서기관에 임명된 알렌은 미국의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차관 도입과 광산 개발 문제를 논의했지만, 조선에 대한 미국인의 무관심과 오해로 실패했다.
1890년 조선 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전직한 이후에도 알렌은 조선의 광산 개발 문제에 매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청국의 방해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청일전쟁 종전 이후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자, 알렌은 다시 광산 채굴권을 얻기 위한 교섭에 나섰다.
10년 동안의 조선 생활은 그에게 ‘조선인은 어머니 젖을 먹을 때부터 음모에 익숙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알렌은 조선인보다 더 큰 음모를 꾸몄다.
친일파가 득세한 내각에서는 미국이 광산 채굴권을 얻을 길이 요원하다고 생각하고, 고종의 신임을 이용해 자신과 함께 워싱턴에서 근무했던 친미파 인사를 차례로 입각시켰다. 알렌의 강력한 천거로 전 전권공사 박정양이 총리대신, 전 서기관 이완용이 학부대신, 전 서기관 이하영이 도지부대신, 전 통역관 이채연이 농상공부협판에 등용되었다.
단돈 3만 달러로 동양 최대 금광 차지한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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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과 OCMC 대변인 파세트가 대한제국 황제에게 써준 인증서. OCMC 지분 25%를 넘겨받는 대신 20만원을 지불하고 매해 2만5000원을 상납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미국의 외교관 신분이었던 알렌은 자신의 명의로 주재국의 이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알렌은 ‘아메리칸 트레이딩사(社)’ 사장 모스를 교섭 상대로 내세웠다.
뉴욕과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던 모스는 대(對)조선 무역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알렌이 조선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모스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인연으로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알렌은 금광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스를 ‘대리’해 운산금광 채굴권 협상을 벌였다. 내각 요직에 포진한 친미파 인사들의 도움으로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광산 허가권을 가진 주무부서장 농상공부협판 김가진의 방해로 제동이 걸렸다. 김가진은 친일파로 분류되던 인물이었지만, 정작 일본 외교관들은 변덕이 심한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알렌이 김가진을 미국공사로 보내고 농상공부대신 자리에 친미파 인사를 심으려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왕비가 지원에 나섰다.
“지난 10년간 조선을 위해 봉사한 알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운산금광을 하사하라.”
왕비의 한마디로 난마처럼 얽혀 있던 모든 문제는 한꺼번에 해결되었다. 1895년 7월 15일, 운산 일대 금광을 개발하기 위해 자본금 10만 달러를 들여 ‘조선개광회사’(Korean Mining & Development Co.)를 설립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조선개광회사는 25년간 운산군 일대 28억 평의 광구에 대한 독점적 채굴권을 부여 받았고, 설비와 자재에 대한 무관세 통관은 물론 법인세, 소득세까지 일체의 세금을 면제받았다. 관련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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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운산금광 전경. 모스로부터 채굴권을 인수한 헌트는 500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대규모 채굴 시설을 갖춘다.그 대가로 고종은 회사 지분의 25%를 넘겨받았다. 실(J. M. Sill) 공사의 말처럼 “미국은 차지할 수 있는 가장 광범위한 이권을 차지”했고, 알렌의 말처럼 “조선이 얻은 이익은 미국 정부와 미국인이 조선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 정도였다.
모스는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훗날 동양 최대의 금광으로 성장할 광산의 채굴권을 손에 넣었지만, 광산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도로도 제대로 깔리지 않았고, 변변한 설비조차 없는 운산금광을 개발하자면 10만 달러의 자본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모스가 금광 개발에 의욕을 보이지 않자, 알렌은 시애틀의 사업가 헌트(L. S. Hunt)를 끌어들였다. 3개월 동안 운산금광을 면밀히 조사한 헌트는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확인하고 모스를 상대로 채굴권 인수 협상에 나섰다. 모스는 단돈 3만 달러에 운산금광에 관련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1897년 헌트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자본금 500만 달러를 들여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 OCMC)를 설립했다. 조선개광회사보다 자본금이 50배나 늘어난 OCMC는 첨단 광업 장비를 대대적으로 투입해 운산금광 개발에 나섰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된 첫해부터 운산금광은 엄청난 양의 금을 쏟아냈다.
OCMC가 극비에 부쳤기 때문에 정확한 생산량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50만~300만 달러 상당의 금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1899년 헌트는 대한제국 황실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황제가 소유한 주식 25%를 10만 달러(20만원)에 인수하고, 생산량에 상관없이 매년 1만2000달러(2만5000원)를 상납하며 계약 기간을 25년으로 연장한다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요구였지만 황실은 무슨 이유인지 요구를 받아들였고, 두 차례 더 계약 기간을 연장해줘 계약 기간은 1954년까지 늘어났다.
외국인에게만 대박을 안겨준 운산금광
OCMC는 1903년부터 이익 배당을 시작했다. 12.5%의 배당률로 지급된 첫해 배당금만 53만3000달러. 만약 대한제국 황실이 지분을 양도하지 않았다면, 이익 배당이 실시된 첫해에 13만3000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황실은 1년 배당금보다 적은 돈에 지분을 모조리 넘긴 셈이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이라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OCMC와 운산금광은 건재했다. 일본 관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금광 채굴권을 환수할 구실을 찾았지만, 아무런 계약상의 결함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알렌을 비롯한 미국인들은 치밀했던 것이다.
OCMC는 매년 300만 달러어치 이상의 금을 생산했는데, 단 1달러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배당이 처음 시작된 1903년부터 마지막 지급된 1938년까지 36년간 매년 10% 이상의 고율 배당을 실시했고, 배당금 총액은 초기 투자금의 3배에 육박하는 1437만9395달러에 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금의 해외 반출을 금지했다. 생산된 금을 일본 정부가 지정한 가격에 넘길 수밖에 없게 되자 OCMC는 수익이 급감했다.
미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마저 악화되자 OCMC의 경영진은 몰수되는 상황까지 내몰리기 전 회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1939년 OCMC는 대유동금광을 경영하던 일본광업주식회사에 800만 달러를 받고 운산금광에 대한 권리 일체를 양도했다. 매각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증권시장에 상장된 OCMC의 주가는 12.5실링에서 35실링으로 폭등했다.
36년간 주주들에게 3배 가까운 배당을 안겨준 OCMC는 청산되는 순간까지 주주들에게 3배 이상의 시세차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 취임사에서 “조선인 중에는 미국인이 운산금광을 개발하는 것과 같이 외국인에게 광산 채굴권을 허용한다면 한국인의 재보(財寶)가 외국인의 손에 침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인이 이 땅에 와서 사업을 일으키면 조선인은 그로 말미암아 일자리를 찾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운산금광과 같이 금을 생산해 일본으로 수출하면 그 대가로 화폐가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니 조선에도 이익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운산금광은 수천 명의 조선인을 고용했고, 조선인의 일반적인 임금 수준보다 결코 낮지 않은 50전 내외의 일당을 지급했다. 일본인의 절반, 서양인의 5%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전문 기술자와 단순 노동자의 임금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OCMC가 운산은 물론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인 주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만큼 조선인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이익 대부분을 서양인 주주들에게 서둘러 배당했고, 세금은 단돈 1달러도 내지 않았으니 조선 사회에 기여한 것이 많았을 리도 없다.
이를 미국의 이권 침탈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을 매도하기 이전에 조선 정부의 무능을 반성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조선 정부는 스스로 금광을 개발할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실제로 1880년대 조선 정부는 스스로 금광을 개발하려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자본과 기술을 도입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산업을 일으켜 자본을 축적하고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 했는데, 조선 정부는 그것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은 열강의 침탈 이전에 무능 때문에 자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봉 시달림 불구 제물포에 멋진 별장 소유”
알렌이 받은 선물
운산금광 채굴권 확보 이후 지은 제물포 알렌의 별장. 6·25전쟁 중 화재로 유실되었다.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알렌이 받은 연봉은 1500달러에 불과했다. 1400만 달러짜리 이권을 고국 사업가에게 넘겨준 인물의 봉급치고는 지나치게 박했다. 하지만 외교관 신분이었던 알렌은 조선개광회사나 OCMC의 주식을 단 한 주도 소유할 수 없었다.
조선은 서양인들에게 다른 나라보다 생활비가 몇 배나 많이 드는 나라였다. 생필품 대부분을 소규모로 수입해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를 위해 일할 때나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할 때나 알렌은 늘 박봉에 시달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물포에 멋진 별장을 소유했고, 토리도(Toledo)에 있는 회사 두 곳에 투자했다.
그런 자금이 어디서 났을까? 알렌은 친구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모스와 헌트는 그들의 이익이 확보되고 금광이 원활하게 운영되자 나에게 두 번에 걸쳐 현금과 선물을 주었다.”
알렌은 목사 신분이었고, 조선과 미국 두 나라의 공동 이익을 위해 금광 개발을 주선했지만,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을 만큼 성인군자는 아니었다.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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