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고구려 유민의 왕국] 잊혀진 왕국 제(齊)

이강기 2015. 10. 4. 10:41

주간조선 2003년 2월6일


 

[고구려 유민의 왕국] 잊혀진 왕국 제(齊)


당 황제에 대항해 건설 4대에 걸쳐 55년간 산동반도 통치

 

고구려의 유민들이 당나라 조정에 대항, 지금의 산동반도에 독립국가 ‘제(齊)’를 세우고 55년 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총 5회 이상 대군을 일으켜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받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지배선(池培善) 교수는 최근 ‘고구려인 이정기의 아들 이납의 발자취’라는 논문을 통해 “제나라는 ▲독자적인 법령과 조세제도를 구비하고 ▲문무백관을 임명한 뒤 ▲자체적 지방행정 단위와 통치조직을 갖췄다는 점에서 당 황실에 의해 왕으로 책봉된 여타 번진(藩鎭) 세력들과 구별되는 엄연한 독립국가”라면서 “제를 세운 이씨 일가는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간 산동반도를 다스리며 당의 행정수도 낙양을 공략했었다”고 말했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의 4대에 걸친 활약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본지가 단독 입수한 이 논문은 연세대학교에서 발간하는 논문집 ‘동방학지(東方學志)’ 3월호에 게재될 예정이다.

제나라의 탄생 배경을 연구해 온 지배선 교수는 “중국 역사책 신·구당서(新舊唐書)를 바탕으로 제나라의 시조 이납(李納)에 관한 기록을 파악했다”며 “이씨 4대에 관한 기록은 책부원구(冊府元龜)·자치통감(資治通鑑)·태평어람(太平御覽) 등 다른 사료에도 나와 있다”고 말했다.

‘신·구당서’는 618년 당을 세운 고조(高祖)에서부터 907년 나라를 잃은 애제(哀帝)에 이르기까지, 21제(帝) 290년 간의 일을 기록한 중국의 정사(正史)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당서(唐書). 송나라 인종 때 다시 편찬됐기 때문에,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해 먼저 것을 구당서(舊唐書), 나중 것을 신당서(新唐書)라 부른다.

 

학자들 “정사(正史)로 인정할 수 있다”

 

당나라 역사를 연구하는 고려대학교의 김택민 교수는 “당서(唐書)는 당나라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라며 “신당서와 구당서 모두에 나와 있는 기록이라면 정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인 경희대 신용철 교수는 “중국에서는 고구려 유민의 업적을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기록이 당서에 나와 있다면 정사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나라의 기초를 닦은 ‘이정기’란 이름이 이번에 처음 알려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정기 사후, 제나라를 수립한 이납과 그 ‘왕통’에 관한 연구 논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숭실대 김문경 교수는 “이정기에 관한 논문은 10여년 전에 내가 쓴 것과 지배선 교수가 쓴 것, 도합 2편이 있다”며 “하지만 이정기의 아들과 손자에 관한 본격적 연구는 이뤄지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제나라의 면적은 약 18만㎢. 통일신라보다 약간 크고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지금의 산동(山東)반도 전역을 아우르고 있었다. 산동반도는 조선조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와 가장 교류가 많은 곳으로 한국에 사는 화교 대부분이 그 지역 출신이다.

제나라가 등장했던 시기(765~819)는 당 전역에서 번진들이 활약하던 때였다. ‘한국의 칭기즈칸’ 고선지(?~755;주간조선 1월 16일자, 1737호 보도)와 해상왕 장보고(?~846) 등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시기도 바로 이 때다.

지배선 교수는 “제나라의 의미는 영토의 크기보다 국가의 자질”이라며 “이씨 일가가 지배했던 산동지역은 당시 가장 귀중한 재화였던 소금과 구리의 산지이자 농·수산물이 풍부했던 옥토”라며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 경제의 중심지를 장악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 교수는 “▲제나라의 무대였던 하북과 산동지방에 고구려 유민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던 사실과 ▲제나라를 일으킨 이씨 일가를 ‘고구려인’이라고 명기한 점 ▲제나라 체제하에서 (오랑캐의 영향을 받아) 산동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고 기록된 점 ▲제나라가 망할 때 당이 고구려계 군인 1200명을 집단학살했다는 점 등으로 미뤄, 제나라의 지배층은 고구려의 후손이란 자부심을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복한 나라의 군인을 집단 사살한 것은 당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서강대 사학과의 김한규 교수는 “이정기 일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당나라가 처해 있던 특수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안녹산의 난(755년) 이후 번진과 비중국계 민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며 “이정기 4대의 활약도 이러한 큰 틀 속에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려대의 김택민 교수는 “당시엔 스스로 왕이라 칭했던 번진들이 많았다”면서 “절도사의 세력이 강해지다보니 군대를 양성하고 관리를 임명하게 된 것이지, 어떤 역사의식을 갖고 나라를 세웠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지배선 교수는 “제나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국가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그렇게 본다면 한동안 독자 연호없이 당의 연호를 사용한 신라는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지 교수는 “당 조정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을 책봉했던 것과 달리, 제나라 시조 이납은 스스로를 왕으로 칭한 뒤 독자적인 국호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신라보다 독립성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터 닦은 이정기
뛰어난 무공으로 절도사 자리 장악해 15개주 통치

‘고구려인’ 이정기(李正己)는 732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이회옥(李懷玉). 영주는 당 지방행정구역의 하나였던 ‘평로(平盧)’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조양(朝陽)시다.

이정기는 무술에 능했다. 그의 무공에 대해 중국 역사책 ‘구당서(舊唐書)’는 이렇게 전한다.

“(투르크계 위구르족인) 회흘 병사가 제멋대로 행동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이정기가 가장 센 회흘 병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사람들은 모두 ‘회흘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정기가 회흘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회흘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정기는 군인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때는 758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리더십을 발휘하던 그에게 한 가지 사건이 터졌다. ‘평로’의 절도사로 있던 왕현지가 사망한 것이었다.

절도사가 죽자 관료들은 후계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여론은 왕현지의 아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정기의 야심은 그렇지 않았다. ‘유력 후보’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었다. 26세의 이정기는 칼을 뽑았다.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이정기는 같은 고구려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후희일을 내세웠다. 조정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병사들의 ‘영웅’ 이정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로는 수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이 살고 있던 ‘한민족의 땅’이었다.

안사의 난(755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황제 숙종은 타협을 택했다. 762년 후희일을 평로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군인에 의해 절도사가 옹립된 당나라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평로를 얻은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위덕(威德) 절도사 이보신과 하북에서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찬스가 왔다. 산동반도의 청주(靑州)에서 무장 사조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정은 평로 절도사에게 진압을 명했다. 선봉은 이정기였다.

이정기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주(幽州)와 범양(范陽)에서 사조의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패한 반군은 청주로 몰렸다. 청주는 현재의 익도(益都)로, 반군의 본거지였다. 이정기는 사조의를 끝까지 추격, 청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이정기와 후희일은 평로(平盧)·치청(淄靑)·기주(沂州)·제주(齊州)·밀주(密州)·해주(海州) 일대를 관할하게 된다.

 

무술 뛰어나… 일격에 오랑캐 제압

 

병사들은 무술이 뛰어나고 성격이 침착한 이정기를 따랐다. 그런 이정기를 시기한 것은 뜻밖에도 절도사 후희일이었다. 후희일은 고종사촌 이정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기 자리를 뺏길까봐 불안해하던 후희일은 이정기에게 주었던 병마사직을 박탈한 뒤 엉뚱하게도 불탑 건립에 몰두했다. 그러자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로부터 불평이 터져나왔다. 반감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후희일은 불교뿐 아니라 미신에도 빠져 있었다. 가는 곳 마다 점쟁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날도 그는 무당과 함께 성 밖으로 나갔었다. 군사들은 그 틈을 노렸다. 후희일이 성을 비우자 성문을 닫아 걸고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

성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열어드릴 수 없소.”

차가운 목소리가 반응했다. 후희일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희일은 분노했다. 그를 수행했던 부대는 많지 않았지만 노한 후희일은 앞뒤를 가리지 못했다. “성을 공격하라.” 후희일이 명령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후희일은 병사들의 반격에 쫓겨 도망가고 말았다.

이 반란을 이정기가 사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조정은 이정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검교공부상서·겸어사대부·청주자사를 제수하면서 ‘이정기’란 새 이름을 내렸다. 이 때가 765년, 이정기의 나이 33세의 일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란 직위다. 당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이 관직은 당~신라~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왕래를 총괄하는 것으로 낙양 동쪽에서 일어나는 사안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무역은 ‘동양의 로마’ 당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시 신라는 연1회 이상 당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신라 사신이 당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정기를 거쳐야 했다. 바다 교통의 요지 등주(登州)와, 육상 교통의 중심지 영주(營州)가 모두 그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766~779년까지 13년 간, 발해는 무려 143회에 걸쳐 당으로 공식사절을 파견했다. 이정기는 당~발해뿐 아니라 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무역을 관장했다. 여기에 수반되는 음성적 상거래도 물론 그의 몫이었다.

이정기의 ‘시장’에서 조정은 방관자였다. 이곳에서는 발해의 말(馬)을 포함, 당이 발해로부터 수입을 금하고 있던 금·은·동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정기가 장악하고 있던 산동은 예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옥토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염전이 있었다. 소금은 당시 가장 값비싼 재화의 하나였다. 766~779년 사이에 당이 거둔 국고수입의 절반은 소금을 통해 얻은 염리(鹽利)였다. 이정기는 소금 판매와 회수(淮水)의 조운(漕運), 국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훗날 황제와의 싸움을 가능하게 해준 밑천이 된다.

당은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와 이민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번진은 위박(魏博) 절도사인 전승사(田承嗣). 그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딸과 결혼시킨 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황제 대종(代宗)은 전승사를 제거해야 했다. 이 때 그가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이정기였다.

 

●‘당~발해~신라~왜’ 국제무역 통해 자금 확보

 

이정기는 위덕(威德) 절도사 이보신과 힘을 합쳤다. 한 달 이상 이어진 전투에서 이정기는 전승사를 격파, 그의 영역이었던 덕주(德州)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776년 정월, 이정기는 전승사의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전투는 8개월 간 계속됐다. 그 결과 이정기는 2개의 주를 추가로 합병하고 적장 전승사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니 예의를 갖춰 대하라.” 이정기는 병사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직접 포로 전승사를 찾아가 깍듯하게 예우했다. 뿐만 아니었다. 수차에 걸쳐 황제에게 상소를 보내 전승사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자신의 손으로 전승사를 석방시켜 주었다. 애써 생포한 전승사를 이정기는 왜 풀어준 것일까?

그가 의식했던 것은 다른 절도사들의 눈이었다. 당의 운명은 몇몇 절도사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승사를 공격하긴 했지만, 이정기에겐 조정보다 절도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전승사는 이 일로 인해 이정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전승사 사망 후, 그 자리를 이은 전열이 이정기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전승사를 잡았다 풀어줌으로써 이정기는 조정과 절도사들, 양쪽 모두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전승사를 제압해 준 이정기에게

‘검교사공·동중서문하평장사’란 관직을 내렸다. 검교사공은 삼공(三公)의 지위 중 하나. 동중서문하평장사란 이정기를 재상으로 봉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조정이 이정기의 협조없이 지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행정가로서의 이정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구당서 124권 ‘이정기전’은 그의 통치 스타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정기는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 엄할 뿐 아니라 가혹했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여러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는 치·청·제·해·등·래·기·밀·덕·체 등 10여개 주를 관장하면서 이보신·영호창·설숭·양숭의·전승사 등의 절도사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위의 기술은 이정기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적 리더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절도사들과 친분을 구축해 왔으며 그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당서 ‘양숭의전’은 “이정기·이보신·설숭·양숭의·전승사 등 5명의 절도사들이 당의 고관직을 독점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15개 주 다스리던 ‘최강 절도사’

 

5년 뒤인 781년 정월, 이정기와 고락을 함께 했던 성덕 절도사 이보신이 숨을 거뒀다.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은 절도사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 덕종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유악을 지지하던 이정기·양숭의·전열 등 당대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4인방’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당 조정을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결심한 것이다.

당시 이정기가 다스리던 영역은 도합 15개 주. 이는 오늘날 한반도 크기에 버금가는 넓이였다.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법령을 적용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의 권력은 너무도 취약해 있었고 황제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달랐다. 발해의 법체계를 응용해 법률을 정비하고 독립된 조세제도를 만들어 엄정하고 일관되게 적용했다. 독립된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 때의 이정기와 이보신을 ‘이제(二帝)’라 표현하고 있다(二帝, 指寶臣·正己也). 이 기록은 ‘최강의 절도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들을 당시 사회가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쿠데타를 결심한 이정기는 청주에서 운주로 거처를 옮겼다. 운주는 산동과 낙양을 잇는 길목. 이정기의 첫 번째 공략 목표는 제국의 ‘동쪽 수도(東都)’ 낙양이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청주의 관리를 아들 이납(李納)에게 맡기고 낙양 공략에 몰두했다. 이정기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자신이 전사할 경우에 대비, 이납에게 ‘치청절도유후(淄靑節度留後)’라는 직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영토를 세습한다는 의미로 황제가 아니면 행할 수 없었던 파격적 조치였다.

조정은 긴장했다. 가장 강력한 절도사의 병력이 낙양의 코앞, 운주에 진을 친 것이었다. 이정기는 주야로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을 준비했다. 조정도 방위에 착수했다. 낙양과 운주 중간에 위치한 변주(州;오늘날의 개봉)에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이 성을 축조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정기는, 경계지역인 제음(濟陰)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황제 직할대의 병력은 5만. 이정기가 동원한 10만 병력은 당시로선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수의 군사였다.

황제는 십일세(十一稅)란 세금을 새로 거둬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천하에 동원령을 내려 9만2000명의 병력을 제음 부근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때는 781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황제군과 전투… 낙양 보급로 끊어

 

이정기의 계획은 치밀했다. 초반 전투에 밀릴 경우를 대비, 제음에서 140km가량 떨어진 서주(徐州)에 2차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주는 양자강(揚子江)과 회하(淮河; 황하)의 물길을 타고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회(江淮; 양자강과 회하)의 물품 보급로가 끊기면 정부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조정은 ‘물길’을 지키기 위해 강변의 요지인 용교(埇橋)와 와구(渦口)에 군사를 배치하고 1000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급한 황제 덕종은 방추병(防秋兵)을 동원해 보급로를 지키도록 했다. 방추병은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던 일종의 비상근 부대였다. 이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북쪽의 국경 수비라인이 뚫린다는 의미였다. 이정기를 막는 것이 그만큼 위급했던 것이다.

당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이정기 연합군은 한동안 강회를 얻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그리고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가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것이었다.

승자는 이정기였다. 물길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를 장악, 낙양으로 가는 수송로를 끊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천하통일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운명의 신도 용장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정기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었다.

낙양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써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이정기는 781년 8월, 통한의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은 즉각 회유에 나섰다. 황제는 죽은 이정기를 태위(太尉)로 추증하고, 관련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맹군을 달랬다. 리더를 잃은 동맹군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중원의 피비린내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억지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세운 이납
대(代) 이어 쿠데타 시도… 당 황제 덕종, 봉천(奉天)으로 도망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고구려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인물이다. 그는 부친 이정기가 죽자 “아버지의 사망을 병사들에게 알리지 말라”며 전쟁을 독려했었다. 동맹이 흔들리면서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항상 부친의 유업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그런 이납이 허울뿐인 당 황제를 인정할 리 없었다. 통한의 날을 보내고 있던 이납에게 오랜 친구가 찾아왔다. 이정기와 함께 ‘이제(二帝)’로 불렸던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중국인이 아닌 이민족 출신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제후의 자리에 오른 ‘용사’의 아들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선대부터 이어진 전우 사이였다.

이납과 이유악은 선친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이어받길 원했다. 당은 죽은 이정기를 태위(太尉)로 추증하면서 쿠데타 세력을 달랬지만, 그 아들 이납을 후계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유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조정은 반역의 경력이 있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소.” 두 사람은 울분을 토했다. “무능한 황제에게 운명을 맡길 수는 없소.” 이납과 이유악의 생각은 일치했다. 두 사람은 또 한번의 쿠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 두 명의 동지가 합세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세습을 요구했던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였다. 대를 이어 다시 만난 ‘4인방’은 또 다시 동맹군을 결성, 다시 한번 당 조정을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낙양 물자 보급로 끊어 국고(國庫) 고갈

 

작전의 기본 틀은 이정기와 같았다. 낙양으로 향하는 수로를 차단, 물자의 보급을 끊어 조정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병력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이납과 전열은 군사를 이끌고 강회(江淮)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물길의 요지 와구(渦口)로 진격했다. 양숭의는 이유악과 함께 섬서(陝西)에서 낙양으로 흘러드는 한수(漢水)의 요충지, 양(襄)과 등(鄧)으로 쳐들어갔다. 와구는 이정기가 낙양 공략을 시도했을 때 정부군이 군사를 배치했던 물길의 길목이었다.

엉성한 정부군은 전열을 정비한 쿠데타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와구와 양·등은 순식간에 점령됐다. 조정은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남쪽에서 생산된 물자는 당의 수도로 공급되지 못했고, 장안과 낙양의 국고는 바닥을 드러내게 된 것이었다. 장안은 물자의 자체조달이 불가능한 도시였다. 수도의 백성들은 물품 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조정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황제는 망연자실해 했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동맹군의 세력을 꺾을 방도가 없었다. “대책이 없겠는가?” 황제는 백관을 소집해 방책을 구했다. 제국의 수도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묘책이 하나 있사옵니다.” 대신들의 눈이 일제히 쏠렸다. 그는 자신의 꾀를 차근차근히 설명해 갔다. 이간질이었다.

서주(徐州) 자사 이유(李洧)는 욕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납의 아저씨인 그는 이정기의 영향력으로 서주의 통치를 맡게 된 사람. 하지만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황제의 사신이 은밀하게 접근했다.

“폐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황제의 유혹은 달콤했다. 이유는 조정에 ‘서해기관찰사’와 ‘해주이기자사’란 벼슬을 요구했다. 덕종이 그의 요구를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자, 이유는 서주를 들어 당에 투항했다.

서주는 이납 영토의 남쪽 방어선이었다. 남방 마지노선이 뚫린 것이었다. 이납은 당황했다. 당은 양자강과 회하의 수로를 회복, 군수품 보급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불운은 계속됐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을 지키던 전열이 정부군에게 쫓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납은 대장 위준에게 병사 1만을 주어 전열을 구하도록 했다. 하지만 위준은 하동(河東) 인근에서 절도사 마수에게 크게 패하고 말았다. 복양이 함락된 것이었다.

전세는 역전됐다. 이납은 남쪽과 북쪽의 방어선을 모두 잃었다. 그러자 배반이 이어졌다. 덕주를 지키던 이사진과 체주를 지키던 이장경도 조정에 항복을 한 것이었다. 당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이납의 기세를 꺾기 위해, 투항한 이사진에게 어사중승이란 벼슬을 내리고 덕주 자사로 임명했다. 또 이장경에게는 간교비서감이란 벼슬과 함께 체주 자사의 지위를 부여했다. 동맹군은 크게 흔들렸다.

이납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고구려의 피를 나눈 장군들이 배반을 했다는 사실에 그는 판단력을 잃고 말았다. 이납은 즉시 군사를 모았다.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 서주 공략에 나섰다. 황제도 방비에 착수했다. 서주 인근의 전 군에 동원령을 내린 것이었다. 때는 781년 11월. 양측은 서주의 행정요지 팽성(오늘날의 동산지역)에서 맞붙었다. 팽성의 산세는 몹시 험했다. 충분한 병력과 물자를 갖춘 뒤 공략해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납은 성급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결과는 이납의 패배였다. 팽성전투에 참가했던 이납의 군사 1만명은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상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납의 군대가 패하자 회남 절도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해주 자사 왕보가 당에 투항했고, 밀주(密州) 자사 마만용도 그 다음달인 12월 항복을 선언했다.

이납의 세력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하지만 이납은 역시 맹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패인을 면밀히 분석했다. 새로운 전략을 수립, 전열을 가다듬은 이납은 이듬해인 782년 1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조정에 빼앗겼던 해주와 밀주의 2개 주를 되찾는 데 성공한다. 해주와 밀주를 빼앗긴 당나라 장군 진소유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는 이납의 군사가 자신을 쫓는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을 결심한다. 그는 참모 온열을 이납에게 보냈다.

“호주·수주·서주·노주 등의 여러 주에서는 이미 싸움이 끝났습니다. 황제군은 무장을 해제한 채 폐하의 칙령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소유는 충성을 다짐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당시의 기록은 이때 진소유가 ‘폐하’라는 표현을 썼다고 전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이정기와 이보신을 ‘이제(二帝)’라 칭했던 중국 역사책 구당서의 기록과 연계시켜 볼 수 있다. 당시 사회가 이정기 부자를 임금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복양 공략하다 정부군에 포위돼

 

오랜만에 승기를 되찾은 이납은 군대를 북으로 돌려, 북방전선의 요지 ‘복양’ 탈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스물네 살의 이납은 아직 미숙했다. 또 다시 마음만 앞서는 성급함을 보였다. 침착하지 못한 이납은 직접 군사를 재촉하며 서두르다 절도사 유흡의 부대에 포위를 당하고 말았다.

병사들은 하나둘씩 배고픔으로 죽어갔다. 이납은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죽어가는 동지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는 판관 방설을 황제에게 보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항복 의사를 전한 것은 782년 2월. 이정기 부자의 원대한 꿈이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런데 엉뚱한 인물의 개입으로 상황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당시의 전쟁에는 환관이 참여하고 있었다. 환관의 역할은 황제를 대신해 작전권을 행사하고 장수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이납과의 싸움에서도 중사(中使)란 직함의 환관 송봉조가 개입하고 있었다. 이납의 투항 요청을 받은 송봉조는 승리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전쟁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납에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사옵니다. 이납의 군사를 모조리 격파하고 이납을 주살하도록 윤허해 주시옵소서.”

송봉조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이납의 세력을 과소평가 하고 있었다. 황제 덕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이납의 투항 사절 방설을 옥에 가둬버렸다.

송봉조는 꿈에 부풀었다. 장수들을 불러모아 이납을 죽일 계책을 짜내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정부군도 이납의 목을 당장 따올 수는 없었다. 수뇌부가 우왕좌왕하며 묘책을 궁리하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 틈을 타 이납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 버렸다.

 

국가 건설해 당 황제와 정면승부

 

이제 이납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결사항전을 결심한 그는 후방 운주로 진지를 옮기고 군사력을 보강했다. 운주는 이납의 아버지 이정기가 낙양을 공격하기 위해 주둔했던 전략적 요지였다.

이납은 세력 보강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 결과가 전열과 이희열·주도·왕무준 등과 연합해 결성한 제2차 동맹군이었다. ‘대 제국’ 당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군사력과 함께 거기에 걸맞은 형식을 갖춰야 했다. 제2차 동맹군은 독립국가를 수립하기로 뜻을 모았다.

때는 782년 11월이었다. 이납은 운주가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제(齊)’로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동맹군은 ‘새 나라가 생겼으며, 이납이 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하늘에 알리는 제천의식을 거행했다. 이납은 스스로를 칭할 때 ‘과인’이라 말했다(唐書 卷212, 悅及納稱寡人條). 제나라는 각 지방행정 단위를 주(州)로 나누고, 각 주의 행정책임자로 자사(刺史)를 뒀다. 문무관료인 백관(百官)을 임명해 나라의 틀을 잡았고, 운주를 수도로 정했다. 수도의 이름은 ‘동쪽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의 ‘동평부(東平府)’로 바꿨다. 제나라의 수도였던 운주는 오늘날의 ‘동평’. 지금의 지명은 당시 제의 수도였던 동평부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정비가 끝나자 이납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새 나라’의 군대는 강했다. 파죽지세로 치달은 이납의 군사는 운하의 흐름을 통제하고 있던 변주(州)를 장악했고, 이어 서주의 서쪽에 위치한 송주(宋州)를 함락시켜 당나라 조정을 압박했다. 다급해진 황제 덕종은 서쪽 토번(티베트)을 지키던 군사력을 동쪽으로 돌리고, 남방의 수비를 담당하던 영남(嶺南)의 부대를 끌어올렸다. 시급한 것은 서쪽과 남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동쪽 제나라의 침공을 막는 일이었다.

제나라의 위세가 천하를 흔들자 이번에는 당 조정에서 이탈자들이 나왔다. ‘우승(右丞) 대신’으로 있던 고관이 이납에게 군량미를 팔아넘긴 것이었다. 조정이 흔들리자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맹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제 덕종은 살아남기 위해, 783년 10월 봉천(奉天)으로 도망을 가 버린다.

이번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은 황제측이었다. 그해 12월 덕종 황제는 봉천에서 사자를 보내 동맹군측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이 때 황제측에서 내건 조건은 ▲반란을 없었던 일로 치고 ▲관련자 모두를 사면하며 ▲이납·전열·왕무준·이희열 4인을 국가의 공신인 ‘훈구(勳舊)’로 대우하겠다는 것이었다(太平御覽 卷113). ‘성신문무(聖神文武)’라 불리는 대타협 조치였다.

 

●중국 역사책도 ‘왕’으로 기록

 

이납은 황제의 제안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 이정기의 지위를 잇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킨 그였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당이 먼저 이납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납은 동지들과 상의한 끝에 당 조정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당서(唐書)는 이에 대해 ‘이납이 (황제로부터) 사면을 받았다(李納見赦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시각인 듯하다. 앞뒤 사정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두 세력 간에 타협이 이뤄진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784년 황제는 이납에게 검교공부상서·운주 자사·평로절도사·치청관찰사·검교우복사·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의 관직과 함께 ‘왕권’을 의미하는 ‘철권(鐵拳)’을 전하고 ‘농서군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철권이란 살인에 대한 면책권을 뜻하는 말로, 직할 영토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한 일체의 사법권을 이납에게 위임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당과 제의 관계가 군사적 목적으로 얽힌 협력관계였다는 사실을 뜻한다. 다시 말해 두 나라는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일종의 ‘독립국 연합’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제나라의 주력부대는 한민족의 피를 지닌 고구려 유민들이었다. 중국 역사책 당서도 이를 인정 “(제가 산동을 점령했던 55년 간) 언어와 풍속에 심한 변화가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통치를 하다 보니, 백성들의 풍습이 포악해지고 인심이 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이 기록은 중국인의 입장에서 쓴 주관적 기술이다. 하지만 이 기록은 우리에게 ▲제나라에서 고구려의 언어가 쓰였으며 ▲고구려계가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고 ▲한민족의 풍습이 유행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제나라 임금’ 이납은 34세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떴다. 때는 792년. 사망원인은 그의 아버지 이정기와 같은 악성 종양이었다. 당 조정은 3일 간 정사를 폐지시켰다. 표면적인 이유는 ‘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인 까닭은 이납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왕으로서 이납의 권위는 확고했던 것 같다.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도 이납의 죽음을 ‘졸(卒)’이라 하지 않고 임금의 죽음을 일컫는 ‘훙(薨)’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도 마찬가지로 이납의 죽음을 ‘훙’이라 적으며 그의 죽음에 예를 표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

[고구려 유민의 왕국] 낙양 장악… 부하 배신으로 몰락

이납(李納)은 사고(師古)·사도(師道)·사현(師賢)·사지(師智)의 네 아들을 뒀다. 792년 이납이 세상을 뜨자 왕의 지위는 아들 이사고에게 세습됐다. 당 황제는 이정기·이납 부자의 두려움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당은 이납 때와 달리 이사고의 왕위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이사고는 제나라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이용해 막대한 부(富)를 쌓았다. 그 역시 이정기와 이납처럼 황제 못지않은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것 같다. 이에 관해 역사책 신당서(新唐書)는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덕종 황제가 승하했을 때의 일이다. 이사고는 조문 사절을 보내지도 않고 국상을 치르는 것도 거부했다. 그는 어수선한 틈을 타 당을 공격, 양주(掠州)를 점령하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강성 절도사 이원소가 이사고를 (문상에) 초대하자, 이사고는 수하의 장군들을 불러모아 ‘원소가 흉계를 꾸며 나를 유인하려 한다’고 성토한 뒤, 군사를 일으켜 치려 했다. 그러자 새 황제 순종(順宗)이 이사고를 말렸다.”

조정은 이사고를 달래기 위해 ‘검교사도’란 관직을 내리고 ‘시중(侍中)’에 봉했다. 그런 이사고 역시 부친과 마찬가지로 악성종양으로 고생하다 806년에 세상을 떴다. 그가 언제 태어나서 몇살에 죽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조정은 그가 죽은 뒤 ‘태부(太傅)’의 지위를 추증했다. 태부는 삼공(三公)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이었다. 하지만 제나라 임금 이사고가 태부라는 당의 벼슬을 우습게 여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사고가 세상을 뜨자, 왕위는 이복동생 이사도(李師道)에게 이어진다. 이사도는 이사고의 죽음을 조정에 알리지도 않은 채, 독자적으로 취임식을 갖고 제나라의 3대 왕으로 등극한다.

 

물자 보관소 ‘하음’ 불태워

 

이사도는 적극적인 성품을 지녔던 듯하다. 선대의 유업을 이루고자 결심한 그는 일종의 게릴라 부대를 조직, 815년 낙양을 공습했다.

이사도는 낙양의 물자 보관소인 ‘하음’을 공략했다. 당시 하음에 있던 창고의 수는 무려 150만개. 저장돼 있던 군량미만 400만가마에 달했던 것으로 전한다.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는 하음의 곡식창고를 모조리 부순 뒤 불태워버리고, 회하(淮河; 황하)와 낙양을 잇는 다리인 건능교를 파괴시켰다.

게릴라전에 능했던 이사도는 낙양 시내 곳곳에 사저(私邸)를 짓고는 아예 군 부대를 상주시키고, 병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었다. 제나라 정벌을 주장했던 재상 무원형(武元衡)에게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해버린 것이었다. 황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는 말 그대로 눈엣가시였다.

조정은 낙양 유수 여원응에게 제나라의 게릴라 부대를 제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여원응은 군사를 이끌고 낙양의 제나라 기지를 포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황제의 부대는 고구려인의 피를 가진 제나라 병사들의 용맹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나라 병사들은 반나절이 지나도록 공격을 하지 못하다,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사도의 게릴라전은 이후 4년 간 수시로 펼쳐졌다. 황제 헌종은 행정수도 낙양에 발을 딛지 못했다. 기록은 “황제가 (다급한 나머지) 신라에 원군 파병을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강한 것은 부러지는 법일까? 황제보다 강했던 ‘제왕’ 이사도의 목숨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원인은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유오였다. 도지병마사란 제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직책. 유오가 반란을 꾸민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사도는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수도 운주로 불러들였다.

유오는 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보여드릴 것이 있다”며 접근, 이사도와 그의 아들을 살해한 뒤 목을 잘라 당 조정에 보냈다. 황제는 뛸 듯이 기뻐했다. 당서(唐書)의 기록은 “조정이 3일 밤낮으로 잔치를 벌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범진 주간조선 기자 bomb@chosun.com)

[고구려 유민의 왕국] ‘제나라 연구가’ 지배선 교수

“중국 역사 흔들었던 한국인 찾겠다”

 

“중국사에 등장했던 우리의 흔적을 짚어보려는 시도였습니다.” 제나라의 숨은 역사를 찾고 있는 연세대학교 사학과의 지배선(池培善) 교수는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제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전 일이긴 합니다만, 대학원 면접 때 교수님께 ‘중국에 영향을 미친 우리 민족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뜻이 좋다’고 하시면서 열심히 해 보라고 격려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지 교수는 전형적인 선비였다. 점잖고 느릿한 말투와 진지한 눈빛이 ‘엉덩이가 무거운’ 진득한 사람임을 짐작하게 해줬다.

“처음엔 5호16국을 중심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고대 문명사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다가 고선지를 만나게 됐어요. 고선지를 따라가다보니 당나라와 연관된 고구려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더라구요. 왕사례… 왕중의… 흑치상지… 천헌성…. 고구려는 망했지만 유민들은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발견한 고구려인들을 정리해 가다가 우연히 이정기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 교수는 “그러고보니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라면서 “솔직히 게으르기도 했고,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한동안 연구에 집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날 제 처가 그러더라구요. 당신, 그렇게 재미있는 주제를 발견해 놓고선 왜 공부를 안하느냐구요. 뜨끔했습니다. 그 때 마침 인디애나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미국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막상 가서 보니까 도서관 시설이 엄청나게 좋더라구요.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을 고서들을 망설임 없이 빌려주더라구요. 아! 이런 게 미국의 힘이구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공부를 안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지 교수는 그때부터 고대사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고선지와 이정기, 이납 등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자료를 수집하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미국에 있던 1년 간 한 번도 골프를 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이상하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그냥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허허.”

고구려 유민은 중국인이라고?

“사실 역사 기록이란 것이 무척 방대합니다. 자기가 연구하는 주제와 일치되면 찾아 읽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 읽기가 어렵습니다. 당서(唐書)만 해도 200권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중국 학자들 중에도 당서를 다 읽은 사람이 드뭅니다. 제나라의 역사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당서와 같은 고서들을 읽는 데 어려움을 느낄 법했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의 학자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 때 제나라에 관한 연구가 이뤄졌었다면 오늘날 학자들이 이렇게 미궁 속을 헤매지 않아도 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중국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겠지요. 건드리지 않아도 될 것을 구태여 건드릴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국호가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50명이 넘었던 절도사 중의 하나였을 뿐인데, 이제와서 그걸 들춰내는 이유가 뭐냐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제게 ‘고구려 유민이 중국인이지 왜 고구려인이냐’고 따지기도 하더군요.” 씁쓸히 웃은 지 교수는 “그래도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라면서 “앞으로 이납의 ‘왕통’을 이은 이사고·이사도 형제에 관한 연구에 매진하고 싶다”고 계획을 밝혔다.

 

주간조선 2003년 2월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