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진제국(秦帝國)을 이끈 사람들

이강기 2015. 10. 4. 10:42
진제국(秦帝國)을 이끈 사람들

 

 

1.

역사적 평판이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있다.

진시황제와 한비.

먼저 진시황제.

지식인들은 진시황제를 대체로 좋지 않게 평가한다. 지식인들은 사상의 자유란 관점에서 진시황제가 승상인 이사(李斯)의 진언을 받아들여 의서(醫書), 점복, 농업 관계 등의 실용서 이외의 책을 불사르고 460여명의 방사(方士)와 유생을 생매장한 사실 때문에 특히 비판적인 평가를 하곤 한다. 사실 나도 재판을 받을 기회가 있었을 때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예를 들어 사상적 박해의 부당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성하여 백성들을 사역시킨 것을 두고 반민중적인 군주로서 생각들을 한다.

통속적으로는 진시황제가 코메디의 소재로서 좋은 대상이기도 했다. 희극작가에게는 말 그대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가 죽음에 대해서만은 도리가 없는지라 장수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다 도사들에게 농락을 당하는 것이 통쾌한 소재가 되는 모양이다.


한비자(韓非子).

사람이기도 하고 저작의 이름이기도 하다. 제자백가 사상가의 북두(北斗)들은 모두 성(姓)에다 선생님이란 존칭인 자(子)를 더하여 호칭 겸 저작명으로 쓰여지고 있다. 한비만 유독 성과 이름을 모두 쓰고 거기에 존칭인 자를 붙였다. 그것은 후인들에 의해 당(唐)의 대 문장가이자 대유(大儒)인 한유(韓愈, 자는 退之)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비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퍽 서운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왜 이름이 부정(否定)을 뜻하는 비(非)라는 자를 썼는지 그 유래를 알 수가 없다. 본디 한자는 뜻글자라 의미가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였는데 그것은 공자의 머리가 심한 짱구여서 언덕이란 뜻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한자적 지식이 부족하여 고대 한자에서도 비(非)자가 현재와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여간 결과적으로 이름이 주는 상징적 의미가 없지 않다.

중국 철학자인 노사광(勞思光)은 이렇게 까지 평했으니까.

"중국문화정신이 공맹(孔孟)의 손에서 정형이 되었고 순자(筍子)의 손에서 왜곡이 되었다면 법가의 손에서 사형을 받은 것이다. 비록 정신은 부활될 날이 있겠지만 승강하고 사생하는 사이에 이미 수백 년이 총총히 가버린 것이다. 진이 다스린 해가 비록 짧았지만 진 정권이 대표하는 대부정(大否定)은 중국문화사에 영향을 준 것이 수백 년에 달하였다."


내가 알기로 한비에 대한 대접은 소홀하다. 비교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일 지라도 한비자를 직접 읽어 본 사람을 본 적이 별로 없다. 특히 진보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아예 상종을 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실은 나도 관심을 가지고 한비를 읽은 것은 몇 년 되지 않으니까 남을 탓할 처지도 못된다.

공자는 인본주의적 정신 때문에 봉건의 전형인 주나라를 모범으로 삼는 보수적 태도를 제하면 그런대로 호평을 하는 것 같고, 노장은 문명에 대한 비판적 태도 때문에 두루 두루 관심을 넓혀가고 있고 심지어 서양의 탈근대적 경향을 갖는 지성인들까지 호감을 갖는다. 묵자는 상제(上帝)를 인정하는 비유물론적 약점이 있지만 이타주의와 전투적인 평화주의 때문에 일부에서는 새롭게 그 가치를 인정하는 추세가 있다.

그러나 한비는 이사와 더불어 삼류 유세객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다. 이사는 성공한 음모가로 한비는 불운한 정치가로.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법가를 역사적인 공과의 대상이지 사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설혹 하나의 사상이라고 볼 지라도 그 격이 한참 낮은 것으로 본다. 앞에서 인용한 노사광의 평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시황제와 한비. 혹은 진제국과 법가를 역사적 맥락과 사상적 맥락에서 상식을 넘어서는 평가를 해보는 것이 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2.

역사를 당대의 실정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인가, 현재의 역사로 보아야 할 것인지 매양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나는 역사학자 E.H.Carr가 주장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관점에 크게 공명을 한 바 있다. 그래서 카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든 나는 역사를 '현재적 시점'과 유물사관이라는 목적론적이고 계급투쟁의 시각으로 보는 습관이 오랫동안 배어있었다.

그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이를테면 로마사에서 시저(Gaius Julius Caesar)와 스파르타쿠스(Spartacus)를 평할 때 시저의 역사적 지위는 형편없는 것이 되고 스파르타쿠스는 고대사의 지배적인 인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세종대왕은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못되고 만적은 그 족적이 전설에 나오는 백말을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소정방의 발자국만큼이나 뇌리에 깊이 파이는 것이다. 근대사를 평가할 때에도 동학운동에 비해서 개화파는 깊이 논의할 바가 못되었다.

그 후 북한 역사관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서는 통일신라라고 부르기가 꺼려지거나 조선의 외교정책 전반을 사대주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정책도 유물사관의 영향을 받을 때에는 반동적으로 해석하다가 외교는 대외자주적인 노선이었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고 그것을 지금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는 본래의 취지에서 멀어질 것임으로 쓰지 않겠다.

시각도 옳지 않았지만 시점도 옳지 않았다. 교조적일 뿐만 아니라 일면적이었다. 역사는 결국 사람의 역사이므로 당대에 사람들이 처했던 상황과 시대적 과제, 사회의 역량을 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신화를 보게된다.


3.

역사의 무대는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는 말 그대로 열국(列國)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였다. 주(周)의 영향력 약화로 춘추 초에는 열국 수가 무려 170여 국이었다가 춘추 말에는 10여 국이 되었다. 진(晉)이 한(韓), 위(魏), 조(趙)로 분리된 시기를 기점으로 하는 전국시대에는 이 3국에 제(齊), 연(燕), 진(秦), 초(楚)가 각축을 벌리는 국면으로 압축이 되었다.

전국시대란 사회정치적으로는 주의 봉건제가 붕괴한 것을 의미한다. 주의 봉건은 두 개의 원리를 가지는데 하나는 종법질서(宗法秩序)이고 다른 하나는 봉토를 나누어주는 분봉제도이다. 종법질서는 혈연의식을 매개로 성립되었으며 각 제후의 분봉은 주의 군사거점의 성격으로 출발하였다.

진(晉)의 경우를 예로 들면 진은 주나라 무왕의 아들 당숙우(唐叔虞)를 제후로 봉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므로 당연히 당숙우는 주와 같은 희성(姬姓)의 1족이다. 진은 여러 성씨를 채읍(采邑)이라는 분봉을 하여 대부로 삼았다. 그 중에 범(范), 중행(中行), 지(智), 한(韓), 위(魏), 조(趙)의 6경(六卿)의 세력이 강대했고 그 중에 한, 위, 조 3씨의 권력이 더욱 커져서 나머지 가(家)가 병합되면서 3진(三晉)으로 정립을 하였다. 진의 공실은 3가(家)가 강해지면서 멸망하고 주 왕실에서 출발한 혈연관계는 끊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전국시대는 혈연이 약화되고 제후국의 군사적 실력주의가 성장한 시대이다. 새롭게 부상한 제후국은 채읍에 의한 간접적인 지배가 아니라 속읍으로 내부 지배방식을 바꾸게 된다. 그것은 주의 약화 과정을 보면서 강력하고도 직접적인 지배만이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속읍 형식으로 지배방식이 바뀌면서 혈연이 아닌 새로운 제도적인 장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제후를 행정적으로 보조할 수 있는 관료제도였다. 관료는 능력과 지식으로 군주를 보좌해야 하였고 동시에 군주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화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집안 배경이 없다 하더라도 능력있는 사(士)계급에게는 기회의 시대였다. 군사적 능력이 있는 무사나 정치적 식견을 가진 지식인은 출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자신의 제후국은 물론 여러 나라를 돌며 자신의 능력을 팔러 다녔다. 그래서 전국시대는 또한 유세(遊說)의 시대이기도 했다. 현대의 유세가 자신에게 표를 줄 사람에게 호소하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줄 군주를 대상으로 하는 점이 달랐지만 그 양상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다른 한편으로는 주 왕실과 춘추 시대의 5패라는 패권국이 존재하지 않게 되면서 중화민족의 통일적인 군사지휘체계를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중화민족이 이민족의 침입에 통일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때가 영정(?政, 영은 시황제의 성이고 정이 이름)과 한비가 활약한 시대였다.


4.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를 쓰면서 이런 문제의식을 적고 있다.


".....

적잖은 사료가 보여주고 있듯이,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인이나 게르만인 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로마인이라고, 로마인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만이 그토록 번영할 수 있었을 까요. 커다란 문명권을 형성하고 오랬동안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을 까요.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로마인이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 광대한 영역을 그토록 오랫동안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 덕분이라고. 과연 그럴까요."


현대의 개념으로 로마는 후진국이었다는 얘기고 듣기 좋게 하자면 개발도상국이었다는 얘기다. 진 역시 마찬 가지었다. 사실 전국시대에 도약한 개발도상국은 진만이 아니라 초도 같았다.

춘추시대에는 중화민족이 황하를 중심으로 하고 있어서 진나라 땅은 서쪽으로 치우쳐서 목축을 하는 오랑캐의 땅인 융(戎)에 불과했다. 초나라도 남방에 있어서 형만(荊蠻)으로 오랑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양자강 유역의 국가는 전국시대 이전에는 초 외에도 오와 월도 있었지만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다. 그것은 주에 의해서 분봉된 제후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춘추시대에는 주 왕실 때문에 분봉된 제후국은 왕이라고 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 월, 초는 처음부터 왕이라고 했다.

동정호 이남과 이북에 있던 수장들이 왕으로 칭하다가 비판을 받자 '왜 비판의 대상이 된단 말이냐, 나는 만이(蠻夷, 오랑캐라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들은 중원, 즉 황하 중류를 중심으로 한 중화문화권에서 떨어져 있는 곳, 문화권이 다른 곳에서 사는 족속이라고 항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분봉된 제후국들은 남의 제상(祭床)에 밤 놔라, 대추 놔라 할 형편이 못되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나라는 처음에 견융(犬戎)을 막기 위해 주 왕실이 설치한 읍 단위에 불과한 진읍으로 출발했다. 그러다가 견융과의 투쟁에 공이 있고 서주가 견융의 공격으로 도읍을 낙읍으로 천도할 때 진의 양공이 평왕을 호위한 공으로 겨우 제후로 승격할 수 있었다. 진은 초기에 신생독립국으로서 국력도 다른 제후국에 비하여 현격한 차이가 있었고 문화적 수준도 선진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매우 낮았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삼족죄(三族罪)다.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까지도 법률로 연좌하는 법률이다. 이것은 조선에까지 건너와서 악명을 떨쳤다. 그리고 상제(上帝)에게 산짐승으로 제사를 지내고, 순사(殉死)하는 습속 등은 견융의 영향이라고 한다.

그래서 분봉을 받은 선진 제후국은 진이 같은 제후국으로 승격을 하였지만 제후국 사이에 질서를 잡는 의식인 회맹(會盟)의식에 참가를 거절했다. 진나라가 후진국 시절에 오랑캐 땅에 살면서 문명이 낙후하다하여 시쳇말로 왕따를 당한 것이다. 이 즈음에 진이 내세울 것은 군사적 능력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 식으로 얘기를 풀자면 대충 이런 것이다.

군사적 능력에서는 신흥 강국으로 오랑캐 취급을 받았던 초에 비해 월등했다고 할 수 없고, 경제력에서는 소금과 철 생산과 대상업으로 이름난 제나라보다 이점이 없고, 문화와 교통에서는 중원의 노른자위를 차지한 진(晉)의 후예 한, 위, 조에 비할 바 없고, 특히 기마전법을 받아들인 기동전의 강호 조나라에 비해서는 여러 모로 열세였고...... 이렇게 보잘 것 없던 진나라가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고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을까.


5.

나라의 전통이 오래고 자부심의 근거가 있으면 이점도 많겠지만 상대적인 약점이 생기는 것도 상례이다. 강점을 들라면 저력과 역사적 경험이 풍부해서 문제를 노숙하고 원만하게 풀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반면에 약점은 자산이 있으니 남을 깔보는 마음이 생기고 변화에 둔감해 져서 진취성과 개방성이 약화된다.

미국은 발생론적으로야 유럽의 한 가지로 출발한 것이지만 새로운 정신을 가지고 새 출발했다는 강점이 극대화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근대사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이 전근대적인 전통과 갈등하고 충돌을 겪어가면서 뿌리를 내려온 역사였다. 그러다보니 변화의 속도도 더디고 애초에 생각한 변화의 방향이 정치적 흥정과 협상으로 굴절을 일으킨 경우가 적지않다. 명예혁명으로 영국 왕실이 삼아 남은 경우가 그런 예일 것이다.

미국 대륙은 유럽인들 입장에서 신대륙이고 처녀지였다. 미국인도 새로운 인류가 평지 돌출을 한 것은 아니기에 개척 당시에는 유럽의 유산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념적인 억압을 피해서, 정치적 박해가 싫어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떠난 사람들이라 새로운 정신으로 개국 시대를 열었다. 그들도 이른바 맨 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된 개척정신은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 간에도 이질성에 따른 갈등과 충돌이 없었던 것이 아니지만 초기 미국은 사회적 해결책을 한가지 더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살 맞대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용기만 있다면 언제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날 수가 있었다.

개척시대에 메사추세츠에서는 청교도가 자신을 '성도'라 자칭하고, 다른 종교를 갖거나 비종교인들을 엄격히 구분하여 비민주적인 사회를 형성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청교도인만 투표권을 가지고 4년에 한번 법률을 결정하는 총회에 참석할 권한을 주었다. 경제적으로도 청교도 교회의 정식 교인만이 회사의 주주가 될 수 있었다. 비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성도 중에서도 자유를 찾아 신천지에 왔다는 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은 이같은 차별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런 갈등의 경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회에서는 파국으로 치닫기 일쑤지만 이들은 달랐다. 청교도가 비(非)신도를 억압하는 것에 반발하는 사람들은 영국에서 혁명사상가로 추방당한 로저 윌리암스 목사와 함께 메사추세츠를 떠나 로드아일랜드를 건설해 버렸다. 메사추세추에 불만을 가진 또 다른 사람들은 민주주의자인 토마스 후커를 따라 코네티컷을 건설했다.

미국은 자유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지배적인 생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상잔으로 이어지지 않고 고생만 감내할 수 있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출구가 있었으니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다.

초기 진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족(華族) 입장에서는 목축을 주로 하는 오랑캐 융과 대적을 해야하는 불리한 조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신천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개척자였다. 그들은 신참자 특유의 개척정신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었다. 진나라 사람들은 선진국들의 인재와 문물을 수입하는데 거부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오랑캐인 융의 인재와 습속에서도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과 진나라의 국정을 책임졌던 사람들은 거의 외국인이었다. 진의 재상을 지낸 유여라는 사람은 그들의 투쟁 대상이었던 서융 사람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전국 말기에 진나라가 한나라의 모사에 걸려 외국인에 대한 배척 분위기가 일었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정국거에 얽힌 사연이다. 한나라는 영정(진시황제의 성과 이름)이 왕으로 있던 때에 진나라가 동방으로 계속 진출해 오자 국력을 소모시키려는 계략을 세웠다.

한나라는 정국(鄭國)이라는 수리기술자를 진나라에 파견했다. 정국은 진왕을 설득하여 웨이수이(渭水)의 지류인 징허(涇河)에서 뤄수이(洛水)까지 약 120km에 달하는 대관개용 수로를 건설하고 웨이수이강 북쪽 기슭의 황무지를 개발하는 공사를 착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운하게 도중에 발각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수리기술자 정국은 자신의 사업이 비록 한나라의 계략으로 시작된 일이기는 하지만 관개사업이 진나라에 이익이 된다고 주장하여 사형을 모면하게 되었고 결국 공사를 완성하게 까지 되었다. 뒷날 이것을 정국거(鄭國渠)라 부르게 되었다.

진나라는 이 공사의 완성으로 대규모의 밭을 관개하게 되었고, 황무지가 옥토로 바뀌었다. 진나라가 여기에서 얻은 수확은 천하통일의 경제적 원천이 되었으니 화를 오히려 복으로 바꿔버린 격이었다.

하여간 이 사건으로 진은 외국인에 대해 경계가 높아졌다. 그래서 진의 왕실과 대신들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진왕의 일급참모였고 나중에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세운 이사(李斯)도 추방자 명단에 들었다. 이것을 전해 들은 이사는 글로 선수를 친다.


"들리는 바로는 관리들이 외국인을 추방할 것을 논의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은 잘못입니다. 옛적에 목공(穆公)은 인재를 구할 때 서쪽으로는 유여(由余)를 융에서 채용하고, 동쪽으로는 백리해를 원(苑)에서 구하고 건숙(蹇叔)을 송(宋)에서 맞이하고,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진에서 오게 했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진국(秦國)에서 나지 않았지만 목공은 이들을 중용하여 20여 국을 병합하고 드디어 서융에서 패자가 되었습니다. 효공(孝公)은 상앙(商央)의 변법(變法)을 채용하여 풍속을 개량하니 백성은 번영하고 국가가 번영해져 백성들이 공역(公役)에 사역되기를 즐겨하고, 제후가 심복하고 초, 위의 군사를 격파하여 영토를 확장한 것이 천여 리나 되어 지금에까지 나라는 잘 다스려지고 병사는 강합니다. 혜왕은 장의의 계략을 채용하여 삼천의 땅(韓地, 伊水, 洛水가 황하로 흘러드는 지대)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파(巴), 촉(蜀)을 병합하고, 북쪽으로 상군(上郡, 위나라 땅)을 거두고 남쪽으로 한중을 공략하고 구이(九夷, 초에 속하는 東夷諸族)을 포섭하여 언, 영을 제어하고, 동쪽으로 성고(成?)의 험준한 땅을 발판으로 비옥한 토지를 탈취하여 나중에는 6국의 합종맹약을 흐트려뜨려 이들이 서면(西面)하여 진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공적은 오늘에 미치고 있습니다. 소왕은 범수를 얻어 양후를 폐하고 화양군을 추방하여 진나라 공실(公室)을 강화시켜 공과 대신들의 사적(私的) 세력의 확대를 막았으며, 제후의 영토를 잠식하여 진으로 하여금 제업(帝業)을 성취하게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네 분의 군주는 모두 타국인의 활동으로 공로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의하여 관찰한다면 타국인이 진을 배반한 것이 무엇입니까? 앞서 네 군주가 타국인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사인(士人)을 멀리하여 등용하지 않았다면 국가에는 부리(富利)의 실속은 없고 진이 강대하다는 명성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

그런데 지금 진에서는 인민을 버려서 적국을 이롭게 하고 빈객(賓客)을 물리쳐서 제후국에서 공업을 세우게 하고 천하의 인재를 물러가게 하여 감히 서쪽(진나라)을 향하지 못하게 하며 발을 묶어 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이것은 이른 바, '도둑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개 물자는 진에서 산출되지 않더라도 보배로운 것이 많으며, 인재는 진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충성스러운 인물이 많습니다. 지금 타국인을 추방하여 적국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덜어 원수에게 보태주면 국내는 스스로 공허하게 되고 국외로는 제후(諸侯)에게 원한을 사게 되니, 이래 가지고서는 국가를 위태롭지 않게 하려고 해도 어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이사는 당시 왕이었던 시황제 영정에게 진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은 외국 출신의 재상들의 공헌임을 역사적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배외주의(排外主義)가 부당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배타주의가 미칠 정치적 결과에 대해서도 자못 위협적으로 경고하고 있다. 외국인을 추방하면 단순히 진나라의 전력에 삭감이 되는 것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외국의 인재들도 역시 진나라를 기피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람들은 다른 제후국에 기용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적국에 보급품을 대주는 것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느냐. 따라서 외국인 추방은 이적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자못 위협조로 이사는 항변을 한 것이다.

당시 진왕 정은 20대의 기력이 넘치는 군주였다. 그러나 정국거(鄭國渠) 문제와 이로 인해 격해진 배외주의적 경향을 약관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침착하게 처리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진왕 정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정국이 누구인가? 적국의 간첩으로 붙들린 사람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속아넘어간 분기로 보복부터 생각한다. 그러나 진왕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국익을 먼저 생각하여 정국에게 공사를 완수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배타주의라는 것이 참 요물이다. 이성을 가지고 판단해 보면 그것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정치적 효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결속하는데 이것만한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의 원초적 감정을 강력하게 자극한다.

나치즘이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다. 나치는 게르만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정치적으로 대중을 동원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민족주의를 고양시키자면 자민족에 대한 자부심만으로는 그 폭발성이 부족하다. 나치는 이것을 깨닫고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인에 대한 정서적 반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비유대인이 보기에 유대인의 선민(選民)의식은 별난 것이다. 거기다가 억척스러운 특성까지 두드러지니 이교도의 입장에서는 볼썽 사나웠을 것이다. 유태인을 뜻하는 Jew가 경멸적인 대상에 대한 욕으로도 쓰일 정도니까.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학살은 유태인의 불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인류의 수치이며 인간의 적대감과 공격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적 실례이다.

우리 사회의 지역 감정이란 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간단치가 않다. 정치적 효능이 입증되었기 때문에 금방 잦아들 것 같지도 않다. 대통령 선거는 큰 단위의 지역감정을 활용하지만 국회의원 선거는 작은 단위의 지역 감정을 활용한다. 여러 군(郡)이 지역구로 묶여 있으면 국회의원 선거가 군 대항전으로 변질되는 것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하여간 그러한 선거 전술을 쓰는 사람들이 불리하게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하지 않는다면 한심스러운 사태일지라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정국거 문제는 당시 진나라에 엄청난 정치적 풍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으나 진왕 정은 국익과 천하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배타주의를 잠재웠다. 마침내 진왕은 공실과 자국 출신 대신의 공론을 내치고 외국인 추방령을 폐지했다. 이사는 정위(廷尉)로 승진했다.

진왕 정이 이렇게 처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개인의 비범한 능력만은 아니고 이사가 지적한 대로 진나라의 역사적 전통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진나라가 정국거 사건을 겪을 즈음에는 상당한 위기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신흥 부족으로 출발한 진이 당시에는 이미 상당한 국력을 가진 제후국가로 성장해 있었으니까.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는 것은 국력의 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없이 살 적에야 자기를 내세울 것이 별로 없고, 내세워 봐야 허세 이상일 수가 없다.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자각하는 시점에 자고자대(自高自大)해져서 교만할 개연성은 높아진다. 그리고 완전히 장성해서 지도적 위치에 서게 되면 배타주의적 감정을 높여봐야 자신에게 득이 돌아올 것이 별로 없다. 사람이 이성적이고 현명한 것은 반드시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 이렇게 되면 사방에 적이 많아져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인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필요한 말이겠다.

진나라도 흔히 보듯이 자국의 '고유성'을 만들어 보려고 달려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쓴다'라는 마음이 있었다.

'쓴다'는 정신.

무엇이고 그것이 유익한 것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그들을 키웠던 것이다. 몽고가 원(元)을 건설하였을 때나 만주족이 청(淸)을 세웠을 때, '몽고식', '만주식'을 내세웠더라면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청조가 수립되었을 때 반청복명(反淸復明)이라는 흐름이 있었지만 그것은 머지 않아 잦아들었다. 그것을 두고 중화민족의 근기(根氣) 부족을 타박해야 할까?

진나라의 적극적으로 '쓴다'는 정신은 '외국인도 괜찮다'는 태도를 갖게 했다. 이러한 태도가 불러온 사회적인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혈통주의에 입각한 봉건제도가 무너져 내리는 시대 상황에서 더구나 국적도 개의치 않는다고 하니 여러 가지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인재들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로 인해 사해(四海)에서 진나라로 각종 전문가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진나라는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만들게 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일을 하도록 했다. 자리를 만들어 주고 기회를 주고 보수도 두둑이 주었다.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능력있는 인재들이 달라붙으니 성과가 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진나라는 인적 자원을 쓸 수 있는 범위에서 경쟁국들에 대해 확실한 비교 우위를 가질 수 있었다. 이런 풍토가 진이 강국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6.

진시황제는 어떻게 강대한 제후국을 유산으로 받게 되었는가?

로마는 연속으로 다섯 명의 위대한 군주가 통치하는 5현제 시대가 있었다면 진은 정이 나라를 물려받기 전에 6세(六世, 효공, 혜문왕, 무왕, 소왕, 효문왕, 장양왕)에 걸친 국력의 상승기가 있었다. 특히 효공 치세에 본격적으로 진은 강국의 기틀을 갖게 된다. 이때 국정을 담당한 사람이 상앙(商椽)이다. 상앙은 진의 지도사상이라 할 수 있는 법치를 도입한 사람이다. 이것을 상앙의 변법(變法)이라 한다. 혜왕 때에는 진이 동방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하자 6개국이 진에 대항하여 연합전선을 펴게된다. 이 통일전선을 조직한 사람이 소진(蘇秦)이란 사람인데 이것을 합종책(合縱策)이라 한다. 이러한 진의 위기를 타개한 사람이 장의(張儀)로 그는 연횡책(連衡策)으로 각개격파(各個擊破)와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는 친선을 하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을 한다는 외교방침)을 결합하여 6국 연합을 깨트려 버렸다. 연횡은 그후 진의 일관된 외교정책이 되었다. 소왕 때에는 범수(范?)도 일을 해낸다. 제후국에는 봉건의 영향으로 공신(功臣)이나 공족을 군(君)이나 후(侯)로 봉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세력이 확대되면 제후국의 국력이 분산되거나 심지어 독립할 가능성도 있다. 춘추 초기 제후국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그런 이유이다. 범수는 양후와 화양군이라는 막강한 권신 세력을 숙청하여 사적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막았다.

대업을 이룩하는 데에는 한 세대의 힘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수많은 제후국 중에서 수 백년 간의 투쟁 속에서 살아남을 만한 역량을 가지고 있는 가진 6개국. 이것을 병합하여 하나로 하는 대역사(大役事)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중국 사람들은 이것을 천하통일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사업이 어찌 영웅만으로, 한 세대의 지도역량 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제후국이 실력을 키워가는 길은 당초에 독공(獨功)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고립국으로 분리될 수 있다면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다른 제후국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결국 끊임없이 경쟁과 전쟁을 치르면서 역량을 축적해 나가야 했다.

진 말고 조나라와 초나라도 중국을 통일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소진에 의해 6개국이 맹약(盟約)이 맺어져 15년간 진나라의 동진을 저지할 때에 조나라가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을 보면 강국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조나라가 통일을 했더라면 진시황제보다 한 세대 앞서는 무령왕(武靈王) 치세였다고 보는 것 같다. 무령왕 시절에 조는 다른 제후국이 가지고 있지 못한 군사전술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몽고군 같이 기마술을 통한 기동전을 펴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의 제후국의 군대는 말이 수레를 끌게 하고 군사들은 그것을 타고서 싸웠다. 그런데 기마전을 하려면 거기에 맞게 의복도 개량해야 한다. 당시 한족은 길고 낙낙한 옷을 입고 요대를 하고 있어서 말을 타는데 아주 불편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 유생들이 단발령에 불복하여 들고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나라의 권력을 가진 보수주의자들도 말 타는데 편리한 바지 같은 것을 오랑캐 복장이라 하여 싫어했다. 무령왕은 설득을 해냈고 흉노를 끌어들여 북쪽에서 진의 배후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무령왕은 후궁과 사랑에 빠지고 후사(後嗣) 문제로 태자와 얽혀 곡절 끝에 굶어 죽고 말았다. 무령왕 사후 조나라에 염피와 인상여라는 인재가 배출된다. 인상여는 사마천이 특히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니 무령왕의 죽음이 더욱 애석하게 생각되는 모양이다. 나는 이러한 가설(假說)의 적실성 여부를 가늠할 정도가 못된다. 하지만 역사에 '만약'이 허무하듯 필연도 없는 것이니 딴은 그럴 법하다.

그러나 나는 진은 다른 제후국과 달리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진에 인재가 더 많았다던가, 함곡관이라는 천혜의 방어 관문이 있었다던가, 목축을 하던 부족의 특성인 용맹성이 있다던가, 외국인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던가 하는 요소 중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진이 효공이후 제후국 시절은 물론 진제국이 수립되고 나서도 일관되게 이어지는 맥락이 있음을 본다.

그것은 법가적인 정신이다. 이것이 진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 다른 제후국은 제후나 국정 담당자들의 능력에 의해 국운이 급격하게 부침을 했지만 진은 그 기복이 크지 않았다. 국정에 일관성이 있었다. 효공에서 진시황제의 죽음에 이르는 200여 년에 걸쳐 진나라는 강약은 있었다 하더라도 중국에 봉건을 끝장내고 새로운 중국을 열어갈 정신이 있었다. 노사광처럼 그것을 중국 문화정신의 '사형(死刑)'과 '대부정(大否定)'이라고 평할지라도. 그리고 내가 보기에 노사광은 잘못 쓴 것이 있다. 진 정권은 짧았지만 중국문화사에 영향을 준 것이 수백 년에 달하였다고 썼지만 실은 문화적, 역사적 유산은 현재까지도 의연하다.

발단은 효공이란 군주의 분발심이었다.

효공도 주에 의해 인정을 받은 제후였다. 그러나 동방의 제후들은 융적이라고 멸시를 당하고 회맹(會盟) 의식에 참가가 거절되었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효공은 동방 제후들에게 힘을 보여주기 위해 널리 포고령까지 내려 인재를 구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진나라와 법가의 뼈대를 설계한 공손앙(公孫椽, 뒤에 상앙)이 찾아온다. 공손앙은 위(衛)의 공자였고 공숙좌란 재상을 섬겨 벼슬을 하였다. 공숙좌가 병이 들어 죽게되자 위나라의 혜왕에게 자신의 후임으로 공손앙을 천거하였다. 그리고 만약 기용을 할 것이 아니라면 기재(奇才)로 뒷날 후환이 있을 수 있으니 죽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만큼 인물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위왕은 공숙좌가 병이 깊어 실언을 하는 줄 알았다. 왕은 공손앙이 너무나 젊었기 때문에 나라 일을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죽이지도 않았다.

공손앙은 진에서 인재를 널리 구한다는 포고령을 듣고 효공을 만났다. 상앙은 효공에게 제왕의 길, 왕도의 길, 패도의 길 중에서 선택을 물었다 한다. 그러나 짐짓 물어본 것이다. 공손앙은 일찍이 형명(刑名)의 학을 좋아한 사람으로 패도 노선을 가지고 있을 것이지만 진왕의 심중을 떠본 것이었다. 이것을 사마천은 사기(史記)에 마음에도 없는 허위의 설을 늘어놓았다 하여 천성이 각박한 사람으로 평하였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각박하다고 할 수도 있고 대담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음모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고 신중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마천이나 그의 선친인 사마담이 노장(老莊) 철학에 기울어져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법가에 대한 평가가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앙은 보수적이고 원만한 경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혁신적이고 공격적인 사람이었다. 이것이 효공의 초발심(初發心)과 잘 맞아 떨어졌다. 효공은 다른 제후국에 수모를 당한 뒤에 진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라를 변모시키기 위해 개혁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대로 단안을 망설였다. 상앙은 이에 대해 효공의 결심을 촉구하며 이렇게 말했다.

"확신없는 행위에는 공명이 따르지 않고 확신이 없는 사업에는 성공이 없습니다. 또 남보다 뛰어난 행위를 하면 원래가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탁견을 가진 자는 반드시 백성들에게서 오만하다는 소리를 듣게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기성 사실에도 어둡고 지혜로운 자는 미연의 사실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란 시작할 때에 의논할 수는 없으나 성과를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고한 덕을 논하는 자는 속설과 타협하지 않으며 큰 성과를 이루는 자는 범인과 상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적어도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다면 구습을 모범으로 삼지 않으며 적어도 백성에게 이익이 된다면 구태여 구례(舊禮)를 좇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수파인 감룡(甘龍)이 이렇게 반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고치지 않고 교화하며 지혜로운 자는 법을 고치지 않고 다스립니다. 백성의 풍속, 습관에 따라 교화하면 노고없이 성과를 거두고 종래의 법제로 다스리면 관리가 그것을 취급하기에 익숙하고 백성들도 안심합니다."

다시 보수파인 두열의 첨작(添酌).


"백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되며 십배의 효과가 없으면 그릇(器: 禮라는 뜻)을 바꿔서는 안됩니다. 고법을 본받으면 잘못이 없고 고례(古禮)를 따르면 간사함이 없습니다."


다시 이에 대한 공손앙의 재반론.


"감룡의 의견은 속된 견해에 불과합니다. 일반인은 옛 풍속을 좋아하고 학자는 배운 바에 빠져 버립니다. 이 양자는 관리로서 법을 지키게 하기에는 알맞으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큰 문제를 논할 대상은 못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지당하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불초한 자는 예에 구속됩니다."


효공의 마음이 패도에 있었으므로 공손앙에 손을 들어주고 좌서장이란 직책에 임명했다. 마침내 공손앙은 변법(變法)이라는 국정 운영 지침을 설계할 수 있었다. 상앙은 두 번에 걸쳐 변법을 실행하는 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가족제도를 개혁한다. 집안에 두 명의 성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한 가구에 두 명의 성인이 있을 경우에는 그 세금을 두 배로 한다. 하나의 땅은 혼자서 개간하고, 두 사람이 경작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다. 가구 다섯을 5호나 10호로 묶어 십오제(什伍制)를 시행한다. 십오는 인보(隣保)라 하고 서로가 연대 책임을 진다. 이 위에 향과 현을 둔다.

신분제도와 진급제도를 개혁한다. 위계(hierachy)를 신분(身分)에서 능력에 따른 실적으로 바꾼다. 위계질서는 신분, 벼슬, 봉급의 등급을 두고 분명한 차등을 둔다. 이 등급에 따라 가옥과 토지의 면적, 신첩의 수, 노비의 수, 의복의 형식도 차등을 둔다. 군인은 군공(軍功)에 따라 계급을 달리한다. 병사는 적군 병사를 3명을 베면 3등급을 올린다. 공실(公室)의 일족이라도 군공이 없으면 심사를 거쳐 공족(公族)에 적을 둘 수 없다. 유공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보장하지만 무공자(無功者)는 설사 재산이 많아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없다.

중농정책을 실시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은 개간 실적에 따라 등급을 올린다. 개간한 땅은 천백제에 의해 농지를 정리한다. 농경과 길삼에 종사하여 곡식과 비단을 많이 바치는 자는 군 면제 혜택을 준다.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부당이익을 추구하거나 파산하면 관청의 노비로 삼는다.

형법(刑法)을 엄격히 적용하며 연좌제를 실시한다. 범인 은닉, 불고지죄는 참수보다 형을 무겁게 요참(腰斬, 허리를 자르는 형벌)에 처한다. 개인적인 보복을 금한다. 부정에 대한 신고자와 고발자는 포상한다.

진나라의 스탠다드(standard)를 제정한다. 사물을 재는 척도인 길이, 무게, 부피의 단위를 하나로 한다.


상앙은 이러한 내용의 국정 방침을 확정을 해놓고 포고는 하지 않았다. 법이 아무리 무섭더라도 지켜지지 않거나 지키게 할 수단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반면에 아무리 법이 가볍더라도 '반드시'란 전제가 있다면 그 법은 권위와 효능이 있다. 우리 사회의 법 조항은 법을 만들 때 일벌백계라는 계몽적인 법 감정에 치우쳐 상대적으로 가혹하게 제정하는 반면에 '반드시'란 전제가 없는 것 같다.

상앙은 포고에 앞서 신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기발한 이벤트를 생각해 냈다. 상앙은 진의 수도에 있는 남문에 기둥을 세우고 이것을 옮겨서 북문에 세우는 사람에게는 10금을 주겠다고 공표를 했다. 백성들은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퍼포먼스를 의구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감히 누구도 그것을 하지 못했다. 상앙은 상금의 규모를 5배로 높였다. 상금에 용기가 생긴 백성 하나가 그것을 실행했다. 그 사람에게 즉시 공개적으로 50금을 시상했다. 그리고 나서야 변법을 공표했다.

이런 시기에 태자(太子)가 위법을 저질렀다. 상앙은 태자를 처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는 효공의 뒤를 이을 사람이므로 그 당사자를 어쩔 수 없었다. 상앙은 태자의 보좌관과 스승을 연좌하여 보좌관은 사형에 처하고 스승은 경을 쳤다. 경이란 얼굴에 먹물로 문신을 새기는 벌로 지체가 높은 사람들에게는 수치심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형벌이다. 권력투쟁에 의해 왕실에서 골육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태자가 법률을 위반했으므로 형벌에 처해야 한다는 생각은 당시의 상식을 뒤엎어 버리는 일이었다.

예기(禮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


예는 서인, 즉 소인인 평민에게까지 적용되지 않고 형벌은 대부에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시 귀족들은 예라는 불문율에 의해 질서를 유지했다. 그럴 듯하게 보면 인치(人治)라 할 수 있지만 혈연적인 인습에 의한 위계를 잡아가는 것이다. 인습을 형식화한 것이 의례(儀禮)로서 예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공자는 예를 사상으로 승화시킨 사람이다. 공자는 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공능을 인정하고 예가 의례와 불문율 차원을 넘어 사회의 보편적인 질서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공자 사상의 요체가 '사람을 사랑한다(愛人)'는 인(仁)이라면 이것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론이 예였다. 이것이 정치에서는 도덕정치로 구현된다. 공자는 예를 귀족들의 전유물에서 백성들에까지 끌어내렸던 것이다. 이것이 유가(儒家)가 예 사상에 끼진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의의다. 그러나 혈연에 의한 신분 사회를 그대로 두고서는 예 사상은 만인에게 공통적인 윤리로 될 수 없다. 결국 유가들은 정명론(正名論)을 끌어들여 신분에 따른 차등적 윤리를 주장하게 되었다.

상앙은 예가 아니라 법을 보편화시킨 사람이다. 법의 대상은 군주 한사람을 제외한 귀족에까지 확장시켰다. 지금 기준으로는 한 사람이 치외법권(治外法權)으로 남아있으니 미진한 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감정으로는 오직 한 사람만 남아있었다. 말 그대로 운명을 바꾼다(革命)는 혁명이었다. 귀족에 대해서도 가차없다는 것을 상앙은 태자의 법률위반사건에서 보여주었고 그 후 공자 건(虔)이란 사람을 의형(?刑, 코를 베는 형)에 처함으로써 진나라 사회에 거푸 확신시켰다. 진의 왕실과 귀족들 처지에서는 원수가 따로 없었을 것이다. 뒷날을 걱정하여 상앙에게 충고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조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백성들 중에서도 변법에 대해 부당함과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법에 포고된지 1년이 지나자 수도에는 변법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백성이 1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백성들은 무엇보다 가족제도를 강제로 재편하는데 대한 반감이 심했을 것이다. 나중에 상앙이 자신의 치적을 내세울 때도 이것에 대해 제일 먼저 지적했다.


"원래 진은 융적 즉, 북쪽 야만인들의 풍속과 같아서 부자간의 구별도 없이 한 여자를 공유하면서 살고 있었으나, 지금 내가 그런 풍습을 고쳐 남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훌륭한 궁문을 세웠으니 문화가 진보한 노(魯)나라나 위(衛)에 비하여 못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진나라 백성은 한족과는 달리 모계에 의한 씨족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배층을 이룬 귀족들도 이러한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법령에 불만을 품고 백성 1천여 명이 수도에 올라 왔다면 그것은 정치적 반항이 목적일 수 없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생긴 절박한 문제를 지배층의 인정에 호소하여 해결해 보려는 백성들이었다고 추측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 상앙은 이런 상황에서 태자를 처벌했다. 이것으로 백성들은 분명한 대답을 들었다.

그 다음부터 진의 백성들은 신법을 준수하기 시작했다. 상앙은 귀족과 백성들의 반감과 불만을 기발한 이벤트와 대중들이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신성한 대상에 대한 응징으로 잠재워 버렸다. 상앙의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복종하게 되어 도시와 향촌 모두 효과가 나타났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 떨어진 물건마저도 백성들이 감히 집어들지 못했다. 농업정책도 성과를 거두어 백성들의 생활에 윤기가 돌았다. 국가를 위한 전쟁에는 백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가 있기 때문에 용감하게 참여하고, 공법이 무서웠기 때문에 감히 사적인 보복을 비롯한 사투(私鬪)를 벌릴 수 없었다. 변법에 대해서 불편을 말하는 사람은 자취를 감추었다.

상앙은 만족하지 않고 옹(雍)에서 함양(咸陽, 지금의 셴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현에는 현령(縣令)이나 현승(縣丞)을 파견하여 지방에도 중앙의 권력과 같은 면모를 갖추었다. 전통적인 토호세력은 힘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성취가 있어서 상앙의 본향인 위를 공격했다. 위는 진의 동진 정책을 저지하는 길목이었다. 진은 싸울 때마다 승리하여 위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태자까지 사로잡게 되었다. 위는 도저히 불감당이었으므로 아예 황하 서쪽의 땅을 할양하고 수도를 대량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위나라 혜왕은 천도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한다.


"과인이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한이로다"


상앙을 죽여버렸어야 한다는 것인지 등용을 했어야 했다는 말인지.

상앙에 의해 진은 봉건의 유습을 해체해 나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던 것이다. 효공은 회맹의 의식에 거부당한 설움을 자신의 치세에 풀게 된다. 주의 천자는 제물로 썼던 고기를 효공에게 하사하였고 제후들은 그 영예를 축하했다. 상앙은 진에서 20여 년간 봉직했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상앙은 수레에 몸이 찢기는 거열형을 받았고 그의 일족은 멸문을 당했다. 상앙이 죽게 된 것은 변법의 본보기로 당했던 태자가 효공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었고, 역시 피해자였던 공자 건이 무고(誣告)를 했기 때문이다. 보복이 그토록 잔인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의 태자를 비롯한 공족들의 감정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사마천은 상앙이 죽게되는 일화를 사기에 기록하여 놓았다.

상앙이 사태의 급박성을 알고 탈출하다가 함곡관 근처의 객사에 투숙을 하려고 했다. 객사의 주인은 거절을 하며 말하기를,


"상군(상앙)의 법에 여권이 없는 분을 숙박시키면 여객과 함께 연좌의 벌을 받게 됩니다."

상앙은 여관의 주인에게 냉정하게 거절을 당한 것이다. 이에 상군이 탄식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법을 만든 폐해가 이제 내게까지 미치는 구나."


이런 상황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하지만 상앙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을 지는 의구심이 간다. 상앙은 여관 주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사업이 얼마나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렸는가를 오히려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법을 만든 후회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무상함에 대한 탄식의 말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상앙은 효공을 설득할 때 말했듯이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나 선각자는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라고 믿었으니까. 물론 사마천이 기록한 상앙의 말도 항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 같다. 모 재벌의 총수가 '아내 빼고는 모두 바꿔야 한다'고 말해서 말밥에 오른 적이 있는데 상앙은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가족까지 바꿔야 한다 하였으니 그 원망이 얼마였겠는가. 이러한 시대 분위기가 이런 말을 기록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앙은 노사광의 말대로 '부정의 정신'이었고 그것은 봉건을 뒤집어엎는 시대의 부정이었다.

7.

상앙은 보복을 당했지만 20년간 공을 들여 정리한 마스터플랜은 오롯이 살아 남았다. 변방국으로 백안시 당하던 진이 효공과 상앙의 노력으로 전국 칠웅(七雄)으로 대접받고 국력이 날로 강해져 중심국이 되었다. 나머지 6국은 동진하는 진의 세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종과 연횡이 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합종은 진에 대항하는 전략이고 연횡은 진이 6국을 상대로 하는 전략이다.


마침내 진시황제 정이 세상에 나왔다.

진왕 정은 13살 때 집권했다. 진왕 정은 나이가 어려 여씨춘추(呂氏春秋)로 유명한 승상(丞相) 여불위(呂不偉)와 어머니인 태후의 영향력 속에서 집정을 해나간다. 정이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태후의 연인이었던 노애를 숙청하고 태후의 궁을 천도하기 전의 수도였던 영으로 옮기고 나서 일이다. 여불위도 노애사건으로 파면되었다.

사기에는 진왕 정이 여불위의 피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그 진위는 알 수가 없다. 진에서 시황제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출생에 관한 잡음이 없었고 소년 왕에 대하여 권신들이 강력한 단결을 과시했기 때문에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는 학자도 있다. 시황제에 의해 멸망당한 사람들의 원한이 너무나 컸고 진 뒤에 나온 한나라도 진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워져서 시황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아 그렇게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주장 같아 보인다.

여불위와 태후가 보통 관계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시황제의 어머니인 태후는 자유분방한 무희(舞姬) 출신으로 시황제의 아버지인 자초의 정실이 되기 전에 여불위의 애첩으로 동거한 사연이 있기 때문에 이런 소리가 있게 된 것이다.


여불위.

여불위는 상인이었다. 상인으로 강국 진나라의 재상이 되어 진왕 정이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 아버지 다음 가는 분)라 불렀던 인물. 여불위는 출세하기 전에 여러 제후국을 돌며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한 국제무역상이었다. 시황제의 아버지가 되는 자초(子楚)는 안국군의 아들로 강국이었던 조나라의 볼모로 있었다. 자초의 아버지인 안국군은 소왕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태자가 일찍 죽어 태자가 된 사람이다. 자초는 안국군의 차남이었다. 안국군에게는 아들이 20명이나 되고 자초의 어머니는 정실 부인이 아니었고 총애마저 잃어버린 형편이었다. 볼모란 적대국의 왕실에 귀중한 존재여야 대접을 받는데 자초는 서얼인데다 그 어머니마저 존재가 미미하니 조나라에서 품위는 고사하고 일상생활마저 곤란한 지경이어서 실의에 차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더구나 진나라가 조나라를 계속 공격하니 신변마저 불안한 지경이었다. 이러한 때 여불위가 조나라에 거래차 왔다가 자초의 가련한 정경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진귀한 물건이다. 사서 둘 만 하다."


여불위는 무역 상인으로 국제정세에 밝았던 것이다.


"제가 당신의 문호(門戶, 집)를 크게 해드리겠습니다.


자초도 녹녹치 않은 사람이었던지 이렇게 웃으면서 받았다.


"우선 당신의 문호를 크게 한 뒤에 내 문호를 크게 해주십시오."


"당신은 모르고 계십니다. 제 문호는 당신의 문호가 커져야만 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장사의 규모가 커지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져서 권력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한계가 여실하다. 여불위는 상인다운 모험심으로 자초에게 투자할 것을 결심하였다. 자초는 여불위의 제안이 무엇인지를 직감하고 자신이 집권에 성공하면 진나라를 공유할 것을 다짐했다.

여불위는 자산을 반분하여 자초는 조나라 조정의 유력자들과 빈객(賓客)들과 교제비로 주고 자신은 자초를 안국군의 후사(後嗣)로 만들기 위한 로비스트가 되었다. 자초는 20여 명의 자식 중에 가능성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정실의 자식도 아니고 볼모로 가있어서 함양에 있는 많은 형제들처럼 안국군의 눈에 들 기회가 아예 없었다. 여불위는 안국군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골랐다. 안국군은 그 때 화양부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화향부인이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의 언니를 통해서 접근했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에게 나이 들어 미색이 시들면 총애를 잃게 될 위험성과 안국군 사후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자식이 왕통을 잇게 되면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여불위는 화양부인이 아들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장래에 대한 불안 심리를 최대한 자극한 것이다. 마음이 흔들린 화양부인은 여불위에게 자초를 양자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안국군을 설득했다. 안국군은 자초를 적사로 삼고 여불위를 자초의 태부로 인정했다. 자초가 안국군의 적사가 되어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아지니 조나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여불위는 조나라의 무희인 하희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동거하고 있었다. 자초가 여불위 집에서 술을 마시다 그녀을 보고 마음에 들어 여불위에게 그녀를 얻고 싶다고 청했다. 여불위는 화가 났으나 이내 냉정을 찾았다. 전 가산을 털어 자초에게 투자한 것은 세상을 경영해 보기 위한 것이었으니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감정을 누르고 사랑하는 여자까지 바쳤다. 이 여자가 진왕 정을 나은 것이다. 안국군이 왕위를 이었으나 일찍 죽고 자초가 왕위를 차지했다. 왕이 될 가능성이 없었던 자초를 밀어 장양왕으로 만들었으니 여불위는 공신중의 공신이 되었다. 여불위는 그 공로로 승상이 되고 낙양(洛陽)에 10만호를 소유한 문신후가 되었다. 여불위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털어 자사에 투자하는 모험을 하였고 마침내 진나라를 사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위험이 많은 장사가 이문도 많다는 말 그대로 되었다. 여불위는 상품을 가지고 승부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 투자하는 것으로 승부를 걸었고 멸시받는 계층인 상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일국의 최고 지위까지 올랐다.

여불위는 모험가에 그치지 않고 재상이 되어서도 진에 의미있는 업적을 남겼다. 당시 제후국에는 군주 못지 않은 실력자들이 즐비했다. 이러한 실력자들 중에는 왕실에 버금가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았다. 왕실의 인척이나 공신으로 출발한 경우가 많아서 왕실과 협력적인 세력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후국에서 분리될 가능성도 있었다. 왕실에서는 이들 세력을 위기에는 동원해야 했고, 그들이 독립할 위험성이 있으니 한편으로는 그들을 견제하거나 거세해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렇게 독자성을 가지고 있던 실력자들은 일상적으로는 자신의 영향권에 들어있는 대규모의 토지와 주민을 안정적으로 통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자신의 제후국이 위험에 처하게 되면 국제정치의 중심 인물로 활약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이들 지방의 실력자들도 참모 집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과거(科擧)라는 선발제도가 개발되지 않은 시절에 좋은 가문을 타고나지 못한 능력 있는 엘리트들이 출세를 하자면 제후국의 군주를 만나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그러자면 군주가 관심을 가질 만큼의 이름 값이 있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다면 군주의 신임을 받는 관리나 세력가를 요로(要路)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각종 영역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엘리트들은 먼저 지방정치세력의 추천을 받거나 자신의 경력을 쌓기 위해 군(君)이나 후(侯) 밑에서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후국의 조정에 자리와 기회는 제한되어 있으니 지방실력자 밑에는 출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때까지 대기하는 인재 집단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력이 풍부하고 안목과 야망이 있는 지방실력자의 집은 전국시대에 현대의 대학, 재단, 연구소에 비견할 수 있는 인재 풀이었고 씽크 탱크(Think Tank)였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일차적 무대도 이 곳이었다..

과거처럼 시험 과목이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니 군주와 지방실력자의 필요와 관심이 있는 영역은 무엇이거나 출세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군사학, 정치학, 리더십이론에 해당하는 제왕학, 경제학, 역사학, 철학적 소양, 전문적인 기술, 예술... 가릴 것 없이 한다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작게는 지방실력자, 넓게는 군주의 관심을 끌어당기기 위해 각축을 벌였던 것이다. 공무에서 소외된 이들의 소일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여 경쟁과 논쟁을 하는 것이 소일거리의 중심이었고, 이러한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부단히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본업이었다. 이 사람들을 통칭해서 빈객(賓客)이라 하였는데 말이 좋아 '귀한 손님'이지 잉여를 축내는데 불과한 식객(食客)정도로 대접받는 사람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당시 제에는 맹상군, 조에는 평원군, 초에는 춘신군, 위에는 신릉군 밑에 인재가 많기로 소문이 났다. 이들 모두 사기 열전(列傳)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으니 이들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중에 맹상군은 진의 소왕이 등용을 할까 하여 자기 아우인 경양군까지 볼모를 잡히고 초청하였다. 소왕은 맹상군을 만나보고 재상으로 쓰려고 하였으나 주변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래서 소왕이 맹상군을 죽이려 하였는데 맹상군의 식객 중에 도둑 기술을 가진 사람과 닭 울음소리 모사(模寫)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위기를 탈출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소왕은 시황제의 증조가 되지만 소왕의 뒤를 이은 효문왕, 장양왕이 단명하며 재위기간이 4년에 불과하다. 그러니 여불위와 맹상군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여불위는 진이 강대국이기는 하지만 학문적 수준이 뒤떨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식객이 3천에 달했다고 하는데 다소 과장을 보탰다 하더라도 엄청난 인재들을 모은 것은 틀림없다. 여불위는 맹상군 등과 달리 인재들을 모아서 참모 집단으로만 써먹은 것이 아니라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그것은 백과사전이었다. 그 규모는 26권 20만자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책은 죽간이었을 것이니 그 노고가 얼마나 컸겠는가. 이 책은 최고의 역사서로 내려오던 춘추(春秋)와 비견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라 했다.

여불위는 이 백과사전에 대해 천지, 만물, 고금에 관한 모든 것이 망라되었다고 자신했다. 얼마나 자부심이 대단했던지 여씨춘추를 수도 함양에 전시하고 교양있는 지식인들을 초대해서 이렇게 호언을 하였다 한다.


"한 글자라도 덧붙이거나 깍을 수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


백과사전을 편찬할 정도로 다양한 학문 경향이 모였지만 여불위 재단의 주류는 순자(荀子) 학파였다. 순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성의 본질을 악한 것으로 보고 사람을 교화하자는 학설을 세운 사람이다. 순자는 공자가 '의례로서 예'를 비판하고 사람간의 질서를 세우는 방법론으로서 예를 강조한다면 순자는 '제도로서 예(禮)'를 사고하는 경향이 강한 학풍이다. 이러한 사고 경향은 유가 사상을 정치에 대해 현실주의로 잡아끄는 역할을 한다. 순자 학파는 여불위의 후원으로 저서를 편찬하여 학설을 크게 부흥을 시킨다. 나중에 진나라를 이념적으로 끌고 가게 되는 한비자와 이사가 모두 순자의 제자였다. 특히 이사는 여불위의 문하에서 식객으로 있다가 진에 등용된 인물이었다. 여불위가 순자 학파를 밀어준 것은 계산이 빠른 상인 출신 여불위가 그 학설에 담겨있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가능성을 평가하여 크게 후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불위의 인생은 간략히 이렇다. 처음에는 장사를 했고, 나중에는 정치를 했고, 그리고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비교적 다양한 영역에 걸쳐 인생을 경륜한 사람이다.

여불위의 위대한 업적은 당시로서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백과사전을 편찬한데 있다. 여씨춘추에 편찬목적을 이렇게 밝혀놓았다.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인륜 실천의 규범을 깨닫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로써 군사경제 강국이었던 진은 문화적으로도 다른 제후국에 비하여 뒤지지 않게 되었다. 백과 사전은 당대 지식인들의 집단적인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은 망명 정치가나 유세객 만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집단을 보유한 결과가 되었다. 여씨춘추에는 유가, 도가, 법가의 원형이 되는 형명가는 물론 군사적인 지식의 집대성인 병가, 농업을 중시하는 농가, 자연의 운행원리를 사상화한 음양가 등이 실려있으니 당연히 그것을 썼던 전문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여불위 열전에 자서(自序)한 내용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제후 밑의 선비들이 빛에 빨려들 듯이 앞을 다투어 진을 섬기게 했다. 그래서 여불위열전을 서술했다."


여씨춘추는 진나라가 편찬한 책이었으므로 이사와 진시황제의 분서에도 살아남아 오늘날에까지 전한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이고 진나라 때의 사상사 연구에 거의 유일한 자료가 되고 있다.

여불위는 각양각색의 지식인을 결집하고 순자 학파의 저술 활동을 후원하였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도가와 음양가에 심취하였다하니 웃음이 나온다. 여불위가 교양 있는 학자 출신이 아니었던 것을 감안하면 도가라 할지라도 그 말류인 도술이었을 것 같고, 음양가라 하더라도 형이상학적인 원리가 아니라 그 출발이었던 점복이었을 것이다. 천하의 모험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무병장수를 바라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조바심치는 사람이었음을 생각할 때 인간의 양면성을 생각하게 한다.

여불위도 곱게 죽지는 못했다. 그러나 격렬한 기질을 가진 상앙과는 달랐다. 상앙은 진을 부국강병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귀족 세력을 핍박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여불위는 진의 정치권에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인 특유의 형세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기는 했다. 자신의 연인이었던 젊은 과부 태후와 입지전적인 재상 여불위. 재상과 태후의 염문. 세상을 요란하게 했던 지퍼게이트의 클린턴과 르윈스키 스캔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폭발력을 갖는 사건이었다. 태후는 자유분방했지만 여불위는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여 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 나름으로 노력한 흔적이 있다. 매정하게 자를 수 없으니 새 애인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대처한 것이다. 그러나 노애라는 황후의 새 애인은 공(功)도 없는 친구가 분별없이 세력을 키웠고 결국 스캔들로 불거졌다. 이 사건으로 여불위는 실각했다. 시황제는 노애를 죽이면서 여불위도 같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진 정권에 세운 공로와 중신들의 만류로 죽이지 않고 공직인 상국에서 파면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 후 봉지였던 낙양을 떠나 지금의 사천(泗川省)인 촉으로 옮겨 살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에 여불위는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왕 정이 여불위를 촉으로 가게 한 것은 단순히 추문에 대한 응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방에 막강한 세력이 있다는 것은 정권에 상당한 부담이 된다. 더구나 진은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현령, 현승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체제였다. 여불위는 이미 진에 예외적인 세력가였던 셈이다. 그리고 여불위는 진왕 정의 입장에서 볼 때 섭정을 했던 사람이다. 진왕 정은 정권의 잠재적인 위협세력을 거세한다는 측면과 이제 완전히 정치적 장년이 되었음을 내외에 천명하는 사건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여간 여불위는 추해지기 전에 현명하게 인생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것으로 진왕 정의 시대가 열렸다. 그것은 법가의 시대를 여는 것이기도 했다.




8.

중국.

인구 약 12억, 세계 육지의 15분의 1로 러시아, 캐나다에 이은 3번째 대국, 국경 연장 약 2만Km, 해안선의 길이 1만 1천km.

인구의 90%를 넘는 한족과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 55개의 민족에는 천만이 넘는 좡족을 포함하여 백만이 넘는 15개의 소수 민족이 뒤엉켜있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인 조선족도 포함되어 있다. 티베트를 제외하고는 여러 민족이 원만하게 사는 나라.

중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전인대(全人代)를 진행할 때, 지방마다 방언이 심하여 자국 국회의원의 발언에 헤드폰을 쓰고 통역을 듣고 있는 진풍경을 보여주는 우리 관점에서는 희한한 나라.

중화(中華)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민족을 구분할 때 흔히 혈통, 언어, 문화를 그 구성 요소로 분류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문화적 표현인 화(華)라는 표현을 좋아하여 내부의 화(和)를 도모하고 남과 다른 자부심을 표현한다.

친한 벗이 중국을 블랙홀 문화라고 말했는데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느껴졌다.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지배를 장기간 거친 역사를 가졌으면서도 끝내 중화로 동화(同化)되어 형성된 나라라는 의미를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라 하여 멜팅포트(melting pot)라 하지만 중국은 그 방면의 노하우를 2천년 이상 가지고 있다.

진시황제와 중국, 또는 중화.

시황제에 의해 중국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중국의 판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선 전국 7웅이 굳어지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서쪽에는 진, 남쪽에는 초, 동쪽에는 제, 중간에는 한(韓), 위(魏), 조(趙)의 전신이었던 진(晉)과 같은 나라가 서서 유럽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중국은 하나'라는 생각이 당시 중국 사람에게 있지 않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남쪽의 초나라는 자신을 스스로 남쪽 오랑캐인 만이(蠻夷)라고 했을 정도였고, 진은 모든 면에서 북쪽 오랑캐인 서융(西戎)으로 취급당하여 왕따를 당했다. 동쪽은 동쪽대로 다른 문화권에 속하고 있었다. 주가 은을 누르고 패권을 다툴 때에도 동쪽에 있는 은에 대해 같은 나라 사람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주가 은을 정복하였을 때 피에 절구가 떠다닐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종족 전쟁의 잔인한 요소가 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공자가 죽을 때 자신은 은나라 사람(殷人)이라고 말했다. 노나라 사람이 굳이 수 백년이나 거슬러 올라가 은 나라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한족과 다른 혈통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거로 공자도 우리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사람들이 있는데 참으로 한심스런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은은 북방 계통의 유목민이 정착하면서 세워진 나라이고 한족과의 접촉으로 중화화(中華化) 되어 가는 상태에 있었다. 더구나 공자는 은을 멸망시킨 주나라 문화를 전범(典範)으로 삼아 자신의 사상을 세운 사람이니, 자발적으로 민족을 배신하고 한족의 문화를 숭상한 인물인 민족반역자로 보아야 논리의 일관성이 있게 된다. 민족을 결정적인 것으로 놓고 역사를 바라보는 폐해가 아닐 수 없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도 현재의 민족주의적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발해의 지배층이 우리 민족이라 하여 민족주의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는 것도 이성적인 태도가 못된다.

민족은 역사가 오랜 것이지만 민족주의는 근대적인 현상이다. 민족은 인류가 역사를 살아오면서 생긴 한 국면이다. 과거를 이런 기준으로 볼 수도 없고 미래는 더욱 이런 기준으로 내다보지 말아야 한다. 민족주의가 돌아갈 곳은 혈통주의 밖에 없다.

당시 중국(中國)이란 말 그대로 변방과 상대적 개념인 나라의 중앙부나 수도라는 개념에 불과했다. 시황제 이후에야 중국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외국인들이 중국을 부를 때 차이나(China)라 하는데 이것 역시 진(秦)을 음차(音借)한 것이다. 진 제국이 유지된 것이 고작 15년에 불과 하지만 중국을 통일한 진의 국세가 주변국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고 중국을 진으로 부르는 습관을 낳게 했을 것이다. 이것이 서방에 전해져서 차이나로 굳어진 것이다.

시황제는 중국 민족의 실질적 조직자였다. 당시 진(秦)제국의 인구는 현재 한국의 인구와 비슷한 4천만 정도로 추산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대규모의 인구가 한 덩어리의 사회를 이루어서 살자면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회적 역량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군사적 정복에 의해 광범위한 영토를 확장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를 운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군사력으로 노예화시키면 될 것 같지만 그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노예를 데리고 있다는 것은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관리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쉽게 점령할 수는 있지만 쉽게 통치할 수는 없다. 약탈을 하는 종족들이 점령민들에게 잔인했던 것은 단순히 그 종족이 천성적으로 포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피점령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략 게임으로 유명한 씸시티라는 도시건설 게임을 해본 사람들은 인구를 불린다는 것이 얼마나 종합적인 사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절실하게 느껴보았을 것이다.

시황제가 건설한 새로운 유형의 국가는 15년 밖에 유지하지 못했지만 그 뒤를 이은 한 제국은 400년간 유지했다. 역사서에서 진과 한을 묶어서 진한제국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황실의 교체가 있기는 했지만 한 제국이 진 제국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연속성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전한(前漢)은 진제국의 급진적인 봉건해체의 충격을 조정하는 시기라는 느낌이다. 한(漢)제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청조에 이르기까지 진이 구축한 인프라(infrastructure)는 훌륭하게 작동했다.

그리고 중국의 근대화가 늦어진 것은 진이 깔아 놓은 인프라가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내적인 한계에 봉착하여 파국(catastrophe)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이제는 서구 중심적 사고가 많이 불식되어 서양학자 중에서도 중국의 문명 수준이 서양에 비해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오히려 앞섰다고 하는 주장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단순히 동양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정치적 수사를 학술저작에서도 만날 수가 있다. 그 중의 대표작을 들라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책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10권이 넘는 방대한 저작이다. 이 책의 저자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조셉 니담으로 대단히 박식하여 생화학을 비롯한 과학분야와 유럽 문명, 아랍의 문명에도 조예를 가진 사람이다. E. H. Carr는 이 저작을 '지난 10년간 캠브리지가 낳은 최대의 역사적 저작이다'라고 평했을 정도이니까 학문적 객관성은 인정되고 있는 것 같다. 이 사람의 문제의식은 중국이 위대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왜 근대과학을 낳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슬람 문명도 같은 입장에 서게 된다. 15세기 이전 유럽 문명은 로마가 '우리의 바다'라고 부른 지중해에서도 통상권마저 배제되어 있었고 폐쇄적인 농업사회의 모자이크 같은 사회였다. 당시 고대 오리엔트, 지중해 문명의 계승자는 이슬람 문명이었다. '고전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 운동도 십자군 전쟁으로 이슬람 문명에 충격을 받은 유럽이 이슬람 문화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그리스, 라틴의 고전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한 번 앞섰다고 해서 계속 앞서는 것도 아니고, 한 때 좋았던 것이 결코 계속 좋을 수도 없다. 시황제는 중국을 만들었고 중화의 인프라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것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상징하는 아편전쟁까지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9.

명콤비인 시황제와 이사는 무엇을 남겼는가?

한 마디로 중국을 남겼다고 말했고 중화의 인프라를 건설했다고 앞에서 지적했다. 영토만을 점령했다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시황제는 지워지지 않는 문신과도 같은 구조물을 중국에 세웠다.

중국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보고 온다. 일반인들에게 진시황제의 상징은 만리장성과 불로초인 것 같다. 그런데 북경의 관광 명소인 팔달령을 보고 온 사람은 진시황제의 작품을 감상하고 온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건축물을 보고 온 것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명의 축성법과 진의 축성법은 같은 것이라고 하니까. 재질은 벽돌과 흙을 굳혀 만든 판축(版築)이라는 점이 서로 다르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제의 독자적인 작품이 아니라 연, 위, 조, 제 등의 장성을 연결하거나 보수하고, 북쪽에 더 구축하기도 한 것이다. 중국인의 언어 습관인 많다는 의미의 만리(萬里)가 아니라 2중 3중으로 중복된 구간을 합하면 실제로도 5천km에 달한다. 그 길이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성의 구조이다.

장성은 높이 8m, 밑바닥은 6.5m, 위쪽은 5.6m가 기준이다. 성곽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가도로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이다. 그리고 120m마다 병사들이 주둔하는 장소가 있고 10km마다 봉화대가 있다. 아무리 망한 제후국의 성을 이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북쪽으로 더 올라가 쌓은 것도 있고 성에 안 차는 것은 보수하였을 것이니 엄청난 공사였을 것이다.

만리장성을 보고 그것을 감상하면서 당시 그 공사에 동원되었을 민중들의 노고를 생각하고 감상에 젖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측면만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제후국들이 싸우는 동안에 흉노라는 유목민도 동호(東胡)와 월씨(月氏)를 제압하여 강력하게 되어있었다.

진은 전국을 통일한 다음 북방의 유목민에 대한 방비를 서둘렀다. 만리장성은 영토의 경계와 군사적인 목적으로 세웠다. 이것은 진과 그 뒤를 이는 제국에도 효과적인 방어막이었다고 평가된다. 로마제국이 방어선을 어디로 할 것인가를 상당히 고심하였는데 진시황은 방어선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엄청난 두께의 벽을 쌓았던 것이다. 이 벽의 두께만큼이나 중국은 주변 종족과의 문명적 차이를 벌렸다. 그후 주변 민족이 이 성을 뛰어 넘을 수는 있었지만 결코 말을 타고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장성은 군사적 목적 이외에도 중국 민중이 유목 생활로 유착하는 경향이나 혼합 경제를 형성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적어도 유목민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데 있었다. 중앙집권화된 농업 제국에 편입된 영토에 사는 인민과, 거기에 편입되지 않은 영토에 사는 인민 사이에는 명료한 문화적 구분선이 그어졌다. 유목민으로 출발한 진이 유목민과 영원한 결별의 상징물을 조성한 것이다.

로마 제국 하면 길이 떠오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그러나 로마인만 길을 잘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시황제도 고속도로를 건설했다. 그 이름이 치도(馳道)이다. 치도는 67m의 폭으로 되어 있고, 6m마다 큰 가로수를 심었다.

전국 시대에는 제후국마다 군사적 방어를 위하여 전차의 수레바퀴를 달리했다. 전투용 수레의 바퀴는 지날 때마다 전철(前轍)을 만들었다. 이것이 반복되어 레일과 같이 되었는데 수레 바퀴의 폭을 달리하면 운행에 지장을 줄 수 있어서 군사적 방어에 효용이 있었다. 이러던 것을 동궤(同軌)라 하여 통일하였다. 그리고 치도에는 일정한 거리에 역이 두었고 거기서 말을 길렀다. 가로수가 정연히 심어진 67m 도로를 전차가 미끄러지듯 달려 통일 천하를 순행했을 시황제를 상상해 보면 기분마저 상쾌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런 기분은 박정희 대통령이 고속도로를 준공하고서 처음으로 맛보았을 것 같다.

진은 상앙에 의해 도량형이라는 스탠다드가 정비되었는데 시황제는 전국으로 도량형을 확대했다. 그냥 제정만 하면 별 무소득이기 쉬운데 표준이 되는 용기를 전국에 내려보내 철저히 실행하도록 했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엄격하게 처벌했다. 그 용기는 함양에서 멀리 떨어진 중국의 동북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세금의 공정을 기할 수 있고, 유통의 합리화에 기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스탠다드의 중요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이 고화질 텔레비젼 분야에서 아날로그 방식의 기술을 축적했지만 표준이 디지털 방식으로 결정됨에 따라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무선 전화 기술에서도 시간분할 방식을 택하였으나 표준이 코드분할 방식으로 정해짐에 따라 마찬가지의 결과를 초래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컴퓨터 운영체제가 가장 훌륭한 운영체제라고 말 할 수 없지만 표준을 장악함으로써 개인용 컴퓨터를 장악하게 되었다. 한 번 장악된 표준은 여간해서 밀려나지 않는 특성이 있다. 한번 몸에 익은 것을 바꾸려면 대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자판이나 영어 자판이나 손과 어깨에 많은 무리를 주는 배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자판이 발표되었지만 그 보급은 미미한 실정이다. 현대 전자기술의 총아인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icroelectonics) 기술에서도 표준을 장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먼저 그 기술을 도입하고 투자를 많이 하는 나라나 기업이 유리할 것임은 자명하다. 우리 기업도 일부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산업화에는 뒤졌지만 정보화에는 앞서가자고 하고, 소프트웨어를 중시하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는데 시대의 추세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러한 시황제의 업적이 인프라에 가까운 것이라면 상부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업적이 있었다. 문화적 의미인 중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문자의 통일이다.

당시 제후국은 나라마다 문자가 달라 의사소통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이들 문자를 6국문자라 한다. 시황제는 이사에게 명령하여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이사는 주나라 선왕 때부터 내려오는 대전체(大篆體)를 바탕으로 여러 지방에서 써오던 각종 서체를 정비하여 소전체(小篆體)를 만들었다. 그 후 중국의 문자는 소전체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6국문자는 이로써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는데 그 후 이사가 분서(焚書) 정책을 실시하여 지방 문자는 결정타를 맞게 되었다. 유럽의 언어는 인도유럽계와 비인도유럽계로 크게 대별되고 이중에 인도유럽계가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인도유럽계는 다시 갈라져 게르만, 로망, 슬라브의 3대 어계로 나뉘고, 다시 그 밑으로는 켈트어파, 로망어파, 게르만어파, 발트어파, 슬라브어파의 5개파로 분류되고 각 파 밑에 다시 다양한 방언으로 갈라진다. 인도유럽계 중에서 로망어파의 일종인 라틴어가 로마 제국에 의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다시 그 갈래인 프랑스어가 근대 유럽 문명 형성에 최대의 소임을 다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게르만어파의 동부 방언에 속하는 영어가 세계 공영어로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제연합(UN) 예산의 상당 부분이 통역과 번역에 들어간다고 하니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 그리고 고통을 치르게 하는지 알 수가 있다. 서로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때야 접촉의 기회가 많지 않으니 일부 계층에 국한되는 문제에 불과하겠지만 그 접촉이 전면화 되는 시대인 현대와 미래에는 결코 일부 계층에 국한되는 문제라 할 수 없겠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제기되는 영어공용화의 문제는 철저한 엘리트주의자가 아니라면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진시황과 이사는 수많은 방언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언어적 통일성을 보장하게 한 공헌자들이다. 오늘날의 유럽처럼 문자가 복잡하게 흩어져 버리는 것을 의식적으로 막았던 것이다. 이렇게 통일된 한자는 중국과 접촉이 빈번했던 간쑤(甘肅省)와 오르도스, 티베트 지역에서 공통어로 사용되던 서하(西夏)문자, 거란(契丹)문자, 여진(女眞)문자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의사가 소통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중화의 형성에 동력으로 작용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자는 현재에도 중국의 인접국인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사용하고 있는 문자이다. 이쯤에서 시황제와 이사가 저질렀던 분서 정책의 결과에 대해서도 과장이 많았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이사가 제기하여 시황제가 결정했던 분서 정책으로 문화가 위축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유가의 과장 섞인 주장이 굳어진 것이다. 시황제와 이사 같은 법가에게 인문정신(人文精神)이 부족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노사광이 법가를 평하여 '부정의 정신'이라고 했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한 지적이다. 그러나 노사광은 중국 정신이 죽어버리고 암흑기로 들어간 것처럼 부정적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러면 법가와 시황제가 무엇을 부정하고자 하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분서의 발단은 시황제와 당시 각료들이 벌인 회식자리에서 불거졌다. 그들은 통일제국을 봉건제로 할 것인가, 군현제로 할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이사는 봉건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고서는 새로운 유형의 제국을 만들 수 없음을 절감했다. 이사는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수주의의 원인이 봉건적 과거를 터무니없이 미화하는데 있다고 보고 분서를 했던 것이지 우민정책의 의도나 역사를 곡해하려는 의도가 있던 것이 아니다. 이사는 주를 모범으로 삼았던 유가의 저작만 불태운 것이 아니라 그 선대를 추앙했던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였다. 이사는 분서를 하였지만 조정의 공문서, 의학, 농업, 점복 등의 실용적인 서적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광기를 가지고 모조리 섬멸했던 것도 아니었다. 공실의 서가에는 남겨두었다. 분서 사건은 봉건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지나쳐서 벌인 소동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그 문화적 효과가 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죽간이나 목간이라는 작업은 대단히 번거롭고 비용이 많이 들어 양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책의 효용도 오늘날과 같지 않았다. 당시 지식인은 기본적으로 책을 통째로 외고 있었다.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 선생도 조정의 탄압으로 동학의 경전인 경국대전과 용담유사가 실전되었지만 완전히 암송하여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더구나 최시형 선생은 동학에 입교하기 전에는 농사를 지었던 사람으로 배움이 전혀 없던 사람이다. 결국 봉건사상에 대한 정치적 단죄 목적의 상징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시황제가 지식인들을 묻어 죽인 이른바 갱유(坑儒)사건에 대해서도 과장이 심하다. 유가가 한(漢) 대에 들어와 지배적 이념이 되고 관학의 위치를 점하면서 만든 신화다. 역사적 진실은 도가의 말류였던 도사들을 탄압했던 사건이므로 갱유가 아니라 차라리 갱도(坑道)라 하는 것이 진실에 부합하다. 당시 민간에는 전국(戰國)으로 지친 사람들에 의해 도가의 신비적 요소가 대단히 성행하여 시황제도 거기에 물이 들어있었다. 시황제는 도사들이 신비한 약품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하여 그들의 말을 믿고 많은 자금을 대주었다. 후생과 노생이라는 도사도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시황제는 돈만 떼이고 말았다. 화가 난 시황제가 도사들을 체포하려 하였다. 후생과 노생이라는 도사는 사기 행각이 들통이 나서 줄행랑을 치게 되었는데 주제넘게 시황제에 대해 마구 욕을 퍼부었다. 시황제는 이 사기꾼들에 대한 응징으로 도사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그들을 비호하는 자가 있으면 진의 국법이었던 연좌제를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것으로 희생된 도사들이 460명이라고 한다. 이것을 나중에 유가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도사를 빼고 슬쩍 유생(儒生)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사기사건을 유가의 순교사건으로 둔갑시켰다.


부정의 정신이 성과를 거두자면 대안이 있어야 한다. 봉건에 대한 이사와 시황제의 답이 관료제와 군현제였다. 현재 선진제국에서도 그렇고 우리 사회에서도 관료제도가 비효율과 보수의 상징처럼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은 국가에서 운영하던 공적 영역의 일부가 관료의 손에서 벗어나 민간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다. 미국에는 교도소가 민간에 위탁관리 되고 있는 곳도 있는데 상당한 파격으로 느껴진다. 미국 외의 국가에서도 그간 공공서비스 영역으로 남아있던 영역이 민간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동서를 불문하고 관료제가 한 때 사회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지만 그 지위와 역할이 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관료제도는 근대 국가의 산물이다. 관료제도는 근대 국가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절대주의의 강력한 도구로 도입되었다. 영주, 교회, 도시, 지주 등 다원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권력을 군주가 힘으로 억누르고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정착시킨 것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관료제적 지배가 형식적 합리성을 가지고 주장했다. 그 이유를 간략히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첫째, 직무의 범위인 권한과 책임의 범위가 한정된다.(권한의 원칙)

둘째, 직무의 지휘 계통이 계층을 통하여 확립되어 있다.(계층의 원리)

셋째, 일정한 봉급이 지불되고 세습이 인정되지 않는다.

넷째, 직무를 위하여 전문 지식과 기술, 경험이 요구되고 이것을 위하여 임명과 승진 등의 제도가 정비된다.

다섯째, 사무는 문서로 처리된다.

관료제도는 이집트와 로마에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로마제국이 붕괴하면서 관료제도가 로마교회에 한정되고 사회 전반적으로는 봉건에 의해 지배되었다. 인치 사회인 봉건시대에 귀족이 백성을 통치하는 것은 법이 아니라 예(禮)인 것은 동서가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예(禮)가 귀족인 군자를 지배하는 불문율이었다면 유럽에는 기사도(騎士道)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계층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지 백성에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예기는 예가 평민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적고 있다. 기사도도 기사간의 신사협정이다. 그러나 귀족이 예를 지키면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지만, 고의를 가지고 무례를 저지른 사람에게 도덕적 질책이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근대의 관료제도는 로마제국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법치 사상과 결합되어 정연한 체계를 갖게 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한 관료제의 의의를 가지고 진 제국의 관료제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설명한다고 해도 거의 들어맞을 것이다. 진에는 이미 형명(刑名)이라는 사상이 정립되어 있었는데 형이 법치에 해당한다면 명(名)은 관료제와 연결되는 이념이다. 정명론(正名論)이라 하여 유가에서는 일찍부터 신분적 지위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논어에 나오는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자자(子子)로서 이것은 왕은 왕 노릇을 잘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잘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잘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을 잘해야 한다는 경구이다. 이러한 정명론을 형식논리학으로 끌어올린 것이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으로 이들은 명가라는 독립적인 학파를 형성했다. 그리스의 소피스트와 비슷한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러한 '명' 사상을 법가 사상가들은 행정에 끌어들여 관직을 세분하고 거기에 맞는 임무를 자세하게 규정하려 하였다. 분봉(分封)에 의해 결정된 봉건적 지위는 세습되는 것이고 수여된 토지 외에 봉급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지배층의 처분에 따라 세금을 바쳐야 한다. 관료제는 세습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라는 봉건적 지배층은 자신의 분봉된 영토에서는 군주와 다를 바가 없이 자신의 판단에 의해 처분을 하고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기록할 필요가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료는 봉건 귀족과는 달리 조정의 명령에 의해 정해진 지위와 역할에 따라 업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보고의 의무를 지게된다. 전근도 가야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관리는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시황제는 매일 60kg에 달하는 보고문서를 처리했다고 한다. 봉건 귀족은 영토를 늘려야 하지만 관리는 승진을 목표로 한다. 승진을 하려면 자신의 업무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진은 법가적 통치이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관리의 능력을 법 집행 능력으로 평가했다. 70년대에 발굴된 진 제국의 지방 행정기관장인 군수의 죽간문서는 양리(良吏)를 법률에 밝고 명법을 힘써 행하고 독려하는 사람으로, 법률에 어두운 자를 악리(惡吏)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과 조정의 방침이 지방 말단조직에까지 철저히 시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진은 중앙에 수상(首相)에 해당하는 승상,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태위(太衛),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어사대부(御使大夫)의 3공과 9경의 관료를 두었다. 봉건 귀족이 없어진 지방에는 36개 군을 두어 중앙관제와 비슷한 지위와 역할을 갖는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군현제는 상앙이 전국7웅으로 발돋움할 때 만든 것인데 이것을 정연하게 정비하여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한 것이다.

진의 관료제에는 법가적 정신이 드러난다. 내각의 수반이나 기관장, 군사책임자를 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어사대부라는 관직을 만든 것이다. 3공의 하나로 감사원장에 해당하는 어사대부를 둔 것과 지방 기관장을 감시하도록 감(監)을 파견한 것은 진의 독창적인 사고 방식이다. 법가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특히 관리에 대해서는 군주가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료제를 만들면서부터 이들을 감시하고 검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충신은 없다! 법가는 군주가 관리에 대해 아예 이렇게 전제하고 관리를 상시적으로 견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렇게 시황제는 중국의 봉건제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여기에 이사의 공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시황제를 이사가 만든 문서에 도장만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황제는 손수 60kg에 달하는 보고 문서를 읽은 사람이고 죽을 때까지 지방순시를 다닌 사람이다. 여론에 굴복하지 않고 정국거를 완공했고, 외국인 추방령도 물리친 인물이다. 그리고 자신이 중국의 전설적인 군주들인 삼황오제(三皇五帝)보다 낫다는 자부심 속에서 산 사람이다. 왕이란 이름이 싫어서 삼황과 오제에서 한자씩 취하여 황제가 된 사람이다. 자신이 삼황오제의 모든 것을 겸비했다고 믿었으니 자신은 그만한 일을 성취를 해야만 했다. 그러니 엄청난 정열가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명이 짧은 것이 안타까워 불로초까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욕심이 총기를 가리게 했다.

사람이 보통 이성적이면 냉철하여 모험과 도전을 싫어하고, 정열적이면 감정과 충동이 앞서 사태를 냉정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그르치기가 쉽다. 그러나 시황제는 모순적인 이 두 가지 성격이 모두 발달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황제는 권력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권력을 잘 이용했다.

사람이 대업을 성취하고 나면 자고자대해서 교만한 생각, 쉬고 싶다는 피로감, 그리고 무언가 이루어 냈다는 충족감 속에서 나태한 생각, 어찌어찌 애면글면해서 차지하고 보니 허탈하다는 느낌이 몰려든다. 그래서 공업을 이룬 지도자들이 뒤에 가서 주색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고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거나 미몽에 사로잡혀 자신의 명성과 위업에 적지 않은 흠집을 남겨놓는다. 당 현종은 황제가 독살되는 어려운 시기에 분연히 일어나 황실을 정리하고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로 세워 황태자가 되었다. 양위를 받아서는 인재를 등용하여 내정을 개혁하였다. 물길을 개량하고 둔전을 개혁하여 경제도 충실히 하였다. 밖으로는 동돌궐(東突厥)과 토번(吐藩)을 제압하여 국방경비를 철저히 하였다. 황제 자신이 학문에도 밝아 직접 효경에 주를 달 정도였다. 개원의 치(開元之治)라 불리는 중국민에게 드물게 있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치세 후기에 정치를 이임보(李林甫)에게 넘겨버리고 아들의 귀비(貴妃)를 빼앗아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켰다. 말년에는 유폐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작가들에게는 좋은 사냥감이 되겠지만 황제 자신과 중국 인민들에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황제의 유일한 적은 짧은 수명에 있다는 듯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일을 추진했다. 시황제는 일찍이 강국 조와 승부를 벌일 때도 직접 출정하였다. 전국 통일을 하고 나서는 5번에 걸쳐 순행(巡行)을 하였다. 그는 새롭게 부상하는 양자강 일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남월(南越)을 개척했고 편안한 궁궐에 앉아 보고서만 읽는 것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직접 순시를 돌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순행 중에 병이 걸렸다. 무슨 병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황제 주변에는 훌륭한 의사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지병은 아니었을 것 같고 기후가 맞지 않아 생긴 풍토병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때도 이사는 수행을 하고 있었다. 황제의 순행에 따라나선 주요 수행자는 이사 말고도 시황제가 귀여워하여 데리고 간 막내아들 호해(胡亥)와 황제의 결재와 원활한 여행을 돕는 수행비서실장인 환관 조고(趙高)가 있었다. 황제는 큰아들 부소(扶蘇)에게 장례를 부탁하는 편지를 남기고 죽었다. 큰아들 부소는 직선적인 성품으로 솔직하게 문제제기를 잘하여 번거롭게 생각한 시황제가 전선에 보내 진제국의 명장인 몽념(蒙恬)과 함께 국방을 맡아보게 하였다.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을 이용하여 환관 조고는 모략을 꾸몄다. 유서를 조작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조고는 먼저 자신이 보육했던 호해를 유혹하여 시황제의 유지를 호해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호해와 짬짜미를 맺고 나서 조고는 음모의 성패를 쥐고 있는 내각의 수상 이사마저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사는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인 승상(丞相)으로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사는 위기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고의 유혹에 넘어가 모략의 조연이 되어버렸다. 조고의 유혹은 부소가 황제가 되면 명장으로 흉노 정복과 만리장성의 축성으로 공을 세운 몽념이 승상이 되어 이사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겁을 준 것이 주효했다.


"아아, 난세를 만나 내 몸 하나 죽지조차 못한다면 이제 내 목숨을 어디다 맡겨야 한단 말인가."


이사는 음모에 가담하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한다. 탄식을 할 때가 아니라 분발심을 내서 주도권을 단단히 해야 할 때에 말이다. 이사는 순자 밑에서 동문수학한 한비를 모함할 때에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서였다. 몽념에 대해서도 이사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만나면 위축되어 시기, 질투, 불안 심리가 마구 뒤엉켜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남에 대한 콤플렉스라는 것이 때로는 분발의 동력으로 때로는 나락의 원인으로도 되는 것을 볼 때 자기 확신과 자부심이라는 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음미해 보게 한다. 이사는 참모로서는 재능을 발휘했지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사는 당장은 음모의 공범에 참여한 것으로 하여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황실을 손금보듯 하고 있는 환관출신 조고의 상대가 못되었다. 나중에는 결국 허리가 잘려져서 죽었다. 이사는 조고의 음모에 말려 고문을 1천 번이나 당하면서 옥에 갇혀있을 때 2세 황제인 호해에게 글을 올렸다.


"저는 승상이 되어 백성을 다스린 지가 30년이나 됩니다. 그것은 진의 영토가 아직도 좁을 때부터입니다. 선왕의 시대에는 진의 영토는 사방이 천리이며 병력은 수십만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없는 재주를 다하여 삼가 법령을 받들고, 남몰래 모신을 파견하여 금옥을 가지고 제후를 설복하게 하였으며, 또 군비를 가만히 갖추고 정교(政敎)를 정비하였으며, 투사에게 벼슬을 주고 공신을 존중하여 그들의 작위와 질록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한 결과 한을 위협하고 위를 약화시키고 연과 제를 격파하고 제초를 평정하여 끝내 6국을 겸병(兼倂)하여 그 왕들을 사로잡고 진왕을 세워서 천자로 삼는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제1의 죄이며, 영토가 광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시 북으로 호맥(胡貊)을 쫓아버리고 남으로 백월을 평정하여 진의 강대함을 과시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제2의 죄이며, 대신을 존중하여 그의 작위를 높여 군신 사이의 관계를 친밀하게 굳게 했습니다. 이것이 제3의 죄이며,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세워서 주상의 현명함을 밝혔으니 이것이 제4의 죄이며, 눈금을 고쳐 도량형을 균일하게 하고 문물제도를 천하에 보급시켜 진의 명성을 드높였으니 이것이 제5의 죄이며, 치도를 건설하고 관광시설을 일으켜 주상의 득의(得意)의 모습을 보였으니 이것이 제6의 죄이며, 형벌을 늦추고 부세를 가볍게 하며 주상께서 민심을 거두어들여 천하 만민이 주상을 받들어 죽어도 그 은덕을 잊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제7의 죄이며, 이사 저는 신하로서 이러하오니 그 죄상이 사죄(死罪)에 해당한지 이미 오래지만 폐하께서는 다행히도 저의 능력을 다하게 하시어 현재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상의 정상을 참작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들으면 정상 참작을 바라는 탄원서 같기도 하지만 어쩌면 호해를 야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죄라고 표현했지만 자신의 업적을 줄줄이 나열했다. 그러나 자신이 호해를 황제로 세우는데 결정적 공헌을 세웠다는 말은 없다

이 글은 호해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조고는 어리석었던 호해의 모든 귀를 오래 전에 막아버리고 있었다. 이사가 호해의 실정을 막아보려 했지만 한번 터진 둑은 다시 막을 수가 없었다. 발버둥 쳤지만 자신의 불행을 키우는 것으로 작용했다. 법가의 사상은 법, 술(術), 세(勢)를 주요 구성성분으로 한다. 이사는 법가이면서도 세에 해당하는 시기를 놓쳐버렸다. 이사는 허리가 잘려 죽었다. 이사의 불행은 단지 개인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진(秦)제국이 망했다. 그래서 이사는 시황제와 함께 갖은 오명을 뒤집어 써야했다. 시황제의 불행은 후계체제를 만들지 못하고 급사한데 있다. 잘 만들어진 시스템이 갑자기 조종자를 잃고 서 버렸다. 로마의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만나고 로마제국이 5현제로 번성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허망한 파국이었다.

한(漢)제국은 진이 깔아놓은 인프라를 무상으로 사용했지만 진의 학정에 대항한 사람들이 주도하여 세운 나라라 그들을 결코 호의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유가는 거기에 이데올로기를 부여했고 심지어 역사에 가필을 하여 그들의 실정을 부풀렸다. 민심도 6국이 망했는데 좋을 리가 없었다. 반란군은 최초에 거병의 명분으로 '봉건제로 복귀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漢)부대는 초나라를 위한 복수군이라고까지 외쳤다.


시황제는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고 있건 간에 중국민들과 인류를 위해 거대한 안배를 해두었다. 2200년 뒤에 시황제는 갑자기 나타나 거대한 박물관을 공개했다. 시황제의 유택(幽宅)인 여산릉 근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병마용총이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는데 시황제는 허를 찔렀다. 이것은 진시황릉 병마용총이라고도 하고 그냥 간단히 진용(秦俑)이라고도 한다. 1호갱, 2호갱, 3호갱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1호갱은 보병 부대, 2호갱은 전차부대, 3호갱은 참모본부.

1호갱의 규모는 입이 벌어진다. 동서 길이 230m, 남북 62m, 총 면적 14,260제곱미터에 달한다. 박물관이 아니라 축구장 규모의 지하군단을 실현하고 있다. 8천명의 병사, 몇 백필의 구워 만든 말, 나무전차는 1백여 대, 그리고 대량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진용은 모두 실물 크기로 제작되었다. 흙으로 구워 만들었는데도 같은 생김새가 아니라 하나 하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생기가 감돈다.

시황제가 위력 시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역사를 향하여.




10.

진(秦)제국의 지도이념은 법가였다. 진(秦)제국 수립 이전의 사상계는 유가, 묵가, 도가가 각축을 하고 있었다.

먼저 도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교나 도술 차원으로 흐름이 바뀌어 있었다. 도가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사상에서 파생한 양생과 무병장수의 관념이 크게 성행하였다. 여불위나 시황제도 그러한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러한 흐름은 한대(漢代)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도가 사상 자체가 무위(無爲)의 학설로서 인문정신을 의식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취한다. 도가 사상은 자연의 도를 중시하지 인간의 인위적인 행위인 정치에 대해 중시하지 않는다. 굳이 도가의 정치적 태도를 들라하면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지적할 수 있으나 애당초 일국(一國)의 정치원리로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도가의 입장에서는 제후국도 너무나 큰 것이다.

법가가 지도이념으로 부상하던 시대에 주류인 사상은 유가와 묵가였다. 그러나 묵가도 빠르게 이념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평화주의는 매력이 없었다.

법가는 주로 유가에 대한 반정립(反定立)속에서 성장하였다. 법가 사상의 대표적 인물인 이사와 한비 모두 유가 사상의 한 갈래인 순자에게 배웠다. 그러나 이들은 유가의 학설을 배격하고 신흥 사상을 일으켜 중국 최초의 제국인 진의 지도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법가는 제자백가 사상 중에 가장 나중에 나왔지만 가장 먼저 실현된 사상이 되었다. 유가는 한대(漢代)에 와서 국가의 공인된 지도이념이 된다. 그러나 한은 국가의 기틀을 잡아놓고 유가를 지도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반면에 법가는 진을 제국으로 만든 건국 사상이었다. 한비는 법가를 완성했고 시황제는 법가를 받아들였으며 이사는 그것을 집행했다.


법가를 완성한 한비.

그는 한나라 귀족의 후예로 말더듬이였으나 글을 잘 썼다. 한비자로 알려진 한비의 저작은 위작의 흔적이나 가탁이 적어서 거의 원형에 가까울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진(秦)제국이 망하면서 단죄되어 오명이 붙은 저작이니 그 만큼 위탁이 될 가능성이 적었을 것이다. 한비 이전에 법가로 알려진 관자(管子), 상앙의 저서로 알려진 상자(商子)는 후인의 위탁으로 판명되었다. 신불해(申不害)의 저작도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법가의 유일하면서 대표적인 저작이다.

한비자의 저작을 읽은 진왕 정은 크게 감동을 받고 이렇게 탄식했다.


"아아, 나는 이 책을 지은 인물을 만나 사귈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그도 그럴 것이 법가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부강하게 하는가?'와 '어떻게 힘있는 통치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었으니 제왕이 되고자 했던 시황제는 크게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모든 제후라면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었겠지만 상앙에 의해 개척된 진의 풍토와 맞아 들어가면서 법가 사상이 쉽게 받아들여졌을 것으로 보인다.

법가는 학문적인 태도가 제자백가의 다른 사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법가를 제외한 제자(諸子)들은 자기 학설을 옹호하기 위해 모두 고대의 권위있는 인물에 의탁하는 습성이 있었다. 유가의 대표인물이라 할 수 있는 공자는 주 문왕과 주공에, 묵자는 문왕과 주공보다 1천년을 앞선 우(禹) 임금에, 맹자는 더 거슬러 올라가 요순(堯舜)에, 도가는 요순보다 더 올라가 신농(神農)과 복희(伏羲)에 의탁하였다.

한비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우화를 만들어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송나라에 밭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밭 가운데 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어느 날 토끼가 달려가다가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 후 이 사람은 괭이를 놓고 그루터기만 지키고 앉아 다시 토끼를 얻기를 바랬으나 토끼는 다시 잡을 수 없었고 그 자신은 송나라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만일 당신이 선왕의 정책으로 오늘날의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토끼를 잡으려고 그루터기를 지키는 자와 똑같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변화에 따라서 일하고, 일에 맞게 대비하여야 한다."

세상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는데 거기에 맞게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바보라고 한비는 조롱하고 있다. 그리고 한비는 성군을 본받으라고 항상 권하는 제자(諸子)들을 향하여 일갈을 보탠다.


"대체로 요순(堯舜), 걸주(桀紂, 포악한 군주의 대명사)는 천 년에 한 번 나오는 인물이다...... 내가 세를 말하는 까닭은 보통사람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이란 위로는 요순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역시 걸주가 되지 않는다. 법을 안고 세를 업으면 다스려지고, 법을 등지고 세를 버리면 어지러워진다. 이제 세를 없애고 법을 등지고서 요순을 기다린다면, 요순에 이르러서야 다스려진다. 이것은 천 년 동안 혼란되다가 한 번 안정되는 것이다. 법을 안고 세를 업고서 걸주를 기다린다면 천 년 동안 안정되다가 한 번 혼란해진다."


한비는 자신의 학설이 천재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 보통사람인 중재(中才)를 상대로 한다고 말했다. 한비는 평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보통사람을 대상으로 통치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한 사람이다.

그리고 한비는 난세의 원인에 대해서 이런 설명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인민이 적고 재산은 넉넉하였으므로 백성들은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백성들은 다섯 아들을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아들이 또 다섯 아들을 갖는다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벌써 스물 다섯 명의 아들이 생긴다. 이리하여 백성은 많아지고, 재화는 적어진다. 힘을 다해 수고스럽게 일을 하여도 공양하기 어려워서 인민들이 다툰다."


한비는 오늘날의 인구론과 같은 방식으로 난세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법가 사상가들은 다른 학설의 사상가와는 학문의 방향이 달랐다.

제자 사상가들이 안으로는 성인이 되고 밖으로는 왕도를 실현한다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을 목적으로 할 때 법가는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했다. 난세의 원인을 이해하는 방식도 예의 문란,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인위(人爲)의 증가, 이타주의의 부족에서 찾지 않고 환경적인 원인을 들었다. 문제의 해결 방식도 교화나 수양이 아니라 세력을 길러서 사람들이 법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사고했다. 법가는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에서는 진보에 속한다 할 수 있고, 보편과 특수라는 범주에서는 보편주의에 속하고, 주체와 조건이란 각도에서는 환경을 우위에 놓고 보는 쪽에 속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 근대적인 패러다임과 많이 닮아있다.

법가 사상이 이렇게 된 것은 갑자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봉건이 붕괴한다는 시대적 고민과 다른 제가들의 사상을 질료로 하여 발전시킨 결과이다. 법가는 온갖 제자의 사상을 끌어들여 자신의 입론으로 삼았다. 유가에서는 순자의 성악설을 가져오고, 도가에서는 무위설(無爲說)을 퍼왔고, 묵가에서는 상동(尙同)을 끌어오고, 유가의 정명론과 명가(名家)로부터는 명실(名實)의 관념을 끌어들였다. 여기에다 역사를 반성적으로 고찰한 것을 더하여 법가의 사상을 빚었던 것이다.


모든 성악론은 사람을 착잡하게 만든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좋지 않게 봐야 하는 것이니 우선 감정적으로 불쾌해진다. 그럼에도 성악론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은 체험을 통하여 절감하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불만의 체험은 만족의 체험보다 비극적이면서 절박한 문제일 경우가 많다. 사람의 본성을 악한 것이라고 보는 학설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성악론의 대표라 할 만한 순자는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지만 그것을 개조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여전히 유가이다. 순자는 권학편(勸學篇)에서 '나무는 먹줄을 받으면 곧게 되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 진다'고 하여 교화와 개조를 중시하였다. 맹자 역시 교화를 중요시하며 도덕적 자각의 주체가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점에서 순자와 갈라진다. 순자는 외적 작용을 강조한다면 맹자는 자각과 수양을 강조한다. 법가는 순자가 주장한 사람에 대한 교화와 개조의 가능성마저도 부정해 버렸다.

법가는 사람이 이해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유가도 사람이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가는 의(義) 개념을 이(利)라는 개념과 대칭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이익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見利思義)'고 하였다. 그런데 한비는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도덕적 자각이나 교화를 가지고는 불가능하고 사람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익이 통하지 않으면 힘으로 하라고 했다. 질서를 위해서 위계를 잘 세우라고도 했다. 한비의 원문은 이렇다.


"성인이 치도(治道)로 삼을 수 있는 것에는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익이고, 둘째는 권위이며, 셋째는 명(名)이다. (聖人之所以爲治道者三, 一曰利, 二曰威, 三曰名)"


한비의 인간관은 근대의 인간관, 특히 유물론과 가깝다. 한비는 사람을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한비자에는 인격적인 천(天) 개념이나 그 어떤 신앙(信仰)적인 개념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이해(利害)를 가지고 있다는 긍정은 사람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바탕이 된다. 사상도 사람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상에서 이러한 인식이 결여되면 공리공론에서 탈출할 길이 없다.

한비는 신비주의에 대해서 강력한 반(反)정립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비는 당시 사상계를 풍미하고 있던 관념적 인식론에 대한 대담한 전사였다. 한비에 대해서 논박을 하려면 과연 인간이 물질적인 이해관계만을 가진 존재냐를 가지고 다퉈야 한다. 초월적인 관념을 가지고 한비와 대항하는 것은 무소득이다.


많은 이상주의자들이 실패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 사람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결여가 많이 작용한다. 현실에서 출발하여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이상주의적인 열정으로 이해하여 수많은 착오를 일으킨다. 사회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의 실패의 원인에도 이것이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 노동자나 민중을 이상화하는 것이다.

유럽의 좌파 사상계에서 '대중의 배신'이나 '노동자의 반란'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심스런 일이다. 노동자와 대중이 배신이나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자신이 판단착오를 했다고 해야 정직한 것이다. 근대가 정착하면서 계급적 유산이 의미를 상실했다고 인정하는 것이 정확한 견해이다. 좌파라는 심리를 갖는 사람들이 흔히 노동자나 민중에 대해 '대자(對自)', '즉자(卽者)'를 나누어 설명하는데 이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사람이 그렇게 나누어진다면 계급론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른바 '대자적 계급'이란 일정한 이념을 가진 사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한비는 결정론자가 아니었다. 한비는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사람이었다.


"나라에는 언제나 강한 것도 없고 언제나 약한 것도 없다. 법을 받드는 자가 강하면 나라가 강하고, 법을 받드는 자가 약하면, 나라가 약해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때에 사곡(私曲)을 제거하고 공법(公法)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자가 백성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한비는 부국강병과 공법을 세우는 것이 전국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 지적했다. 법치주의가 정착한 근대인이 들으면 당연한 상식이어서 별 감흥이 없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예치(禮治)나 덕치(德治)라는 관념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는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그것이 되고 안 되고는 전적으로 귀족이나 군주의 처분에 달려있다. 그런데 한비는 성인(聖人)을 비정상적 초인으로 보았다. 한비는 덕치가 아무 때고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고 반박하면서 공적인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예치에 근본이 되는 덕치 사상의 부정으로 나아가 공법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은 강제력인 위세(威勢) 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역사를 경제 중심으로 보면 원인과 결과가 뒤집어진 해석을 하기가 쉽다. 근대 이전의 권력집단은 경제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폭력적인 수단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제권도 가지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설명이다. 근대이전에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예외 없이 지배계급이거나 지배를 다투는 세력이지만 그 역으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지배계급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지배욕구 때문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요구이기도 하다. 경작보다 약탈이 손쉽게 경제력을 얻는 수단이라면 폭력은 저지될 때까지 계속된다. 정착민은 정착민대로 생명과 재화, 사회적 집단인 가족이나 혈족의 안전을 일차적 요구로 하게 된다.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 과정을 목가적 전원으로 생각한다면 역사적 백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폭력이 어떤 양상을 가지는 것인지 유럽 중세의 풍경을 한번 보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라는 사회학자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문명화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한 학자이다. 이 책의 공격욕의 변화라는 장에서 몇 대목을 약간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강탈, 격투, 사람과 동물 사냥 등 이 모든 것은 당시의 사회구조와 맞물려 숨김없이 드러났다. 따라서 권력자와 강자들에게 이러한 일은 삶의 즐거움에 속했다..... 전쟁이란 강자로서 적들을 덮쳐, 그들의 포도나무 줄기를 자르고 그 뿌리를 뽑아내며,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그들의 성을 점령하며, 그들의 샘을 막고, 그들의 식솔들을 붙잡아 죽이는 것이다...... 포로들을 때려 불구로 만드는 것에 특별한 쾌감을 느꼈다......

- 맹세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조소하고, 네 공포를 조금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내가 사로잡은 모든 기사들에게 모욕을 주고 그의 코나 귀를 베어버릴 것이다. 그가 영민이나 상인이라면 팔과 다리를 잃을 것이다 -

.... 그는 약탈하고, 교회를 파괴하며 순례자들을 습격하고, 과부나 고아들을 학대하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특히 무고한 사람들을 불구로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다. 사람들은 그가 사를라트 로마교황단 수도사들의 수도원 한 곳에서만도 150명이나 되는 남녀들의 손을 자르고 눈을 빼내는 것을 보았다. 그의 부인도 잔인해서, 남편의 살육행위를 옆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불쌍한 여자들을 괴롭히는 일은 그녀에게 기쁨이었다. 그녀는 그 여자들의 젖가슴을 도려내게 하거나 손톱을 뽑아내어, 그녀들의 노동능력을 없애버리곤 했다.....

이와 같은 감정적 폭발은 이후의 사회발전 단계에서도 예외 현상이나 '병적'인 변종으로 가끔 등장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러한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어떠한 사회적 권력도 없었다.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위협과 위험은 전투에서 더 강한 적에게 잡히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면서, 커다란 즐거움을 느꼈고, 이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기쁨이었다.... 중세의 세속 지배층은 대부분 갱 두목과 같은 삶을 영위했다."


이것이 선사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9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유럽의 기록이다. 현대의 이른바 '반인류적 범죄'가 당시에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고 도덕적 가책을 받는 것도 아니며 이것을 규제할 수 있는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면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처벌은 인류의 과거를 처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면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에는 절대주의 시기가 있었다. 근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민주주의의 영향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이 절대주의에 대해 역할을 평가하는 사람이 적은 것 같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절대주의와 투쟁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 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확실히 절대군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독재권을 행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독재권이 누구에게 행사되느냐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세 유럽의 인민들은 다원적인 권력의 통제를 받았고 영주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 절대군주는 권력을 집중함으로써 지방의 다원적인 권력체를 제한할 수 있었다. 인민들 입장에서는 절대 군주가 모실 사람을 대폭 줄어들게 하였다. 절대주의 시대 계몽군주는 봉건의 해체와 민주주의의 인프라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사람들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秦)제국이 전국을 통일하고 한 사업 중에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만 흔히 간과하고 넘어가는 사건이 있다. 이사는 전국을 통일하고 나서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무기를 녹여버렸다. 이사는 앞으로 한 치의 토지도 분봉되지 않을 것이며, 한비가 말한 공법에 의한 문제 해결 이외에 사곡(私曲)은 이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봉건적 폭력은 배타적인 폭력의 독점으로 극복된 것이 역사적 상례였다.

중세 유럽 사람들의 폭력에 진저리를 치면서 동양의 평화애호적인 측면을 강조하려는 사람이 있다.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秦)제국 이후 중국에서는 지방세력과 다원적인 권력이 제한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한대에 와서 인문정신이 강한 유가가 지배이념으로 섰으므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폭력은 통제되었다. 진(秦)제국 이후 중국인들은 지방세력이 갈라져 싸우는 것을 난세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한비는 능력주의자였다. 이 능력주의는 당시 사상계 동향과는 전혀 다른 법가 고유의 문제의식이다. 한비는 무능력한 봉신들을 보고 참지 못했다. 그래서 한의 조정에도 여러 번 글로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비 역시 신분제라는 한계를 완전히 뛰어 넘을 수는 없었지만 신분이 능력으로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능력에 따라 인재를 적소에 배치하고 상벌을 엄격히 하여 권한만큼 책임지는 사회를 만들자. 이것이 한비가 주장한 능력주의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 진에 관료제도를 가져오게 했다.

지금 항간에 유행하는 시류와 문제의식이 같다. 한비 시대는 봉신들이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었지만 현 상황은 연공서열에 의한 위계가 사람들의 능력 발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상벌에 있어서도 실책에 따른 벌은 큰 반면에 공적에 대한 대가는 그만 못하니 무사안일한 풍토가 조성되기 십상이다. 한비의 시대는 혈연적 지배를 능력에 따른 신분제로 바꾸는 것이었지만 현재는 연공서열에 의한 위계제도를 능력에 따른 민주적 질서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가가 문제로 되고 있다. 사회를 관리하는 시스템의 운영원리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의식발전 수준에 맞고 장기적인 사회적 결과를 내다보며 해나가야 한다. 당장에는 반감과 저항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인 이익을 고려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한비는 도가의 무위 사상을 가져와 정치적 음모로 써먹은 사람이다. 한비가 도가에서 차용한 허정(虛靜)사상은 군주가 지혜를 잃지 않도록 경계를 단단히 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윗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며 윗사람에게 장기(長技)가 있으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기 쉽다고 했다. 한비는 지도자의 임무는 직접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랫사람의 능력을 파악하여 일을 지시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치우쳐서 편벽되게 처리할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아랫사람들이 군주의 마음을 읽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군주의 성향이 아랫사람에게 노출되면 거기에 맞게 신하가 비위를 맞추게 되어 있으니 냉정하게 아랫사람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군주의 감정적인 일처리를 막기 위해 도가의 반문명(反文明), 문명비판주의적인 견해에서 파생된 도가의 인생태도를 실용적인 제왕학(帝王學)으로 바꿔놓았다.

한비자를 읽다보면 근대 정치학을 세웠다는 마키아벨리와 유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자질은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지혜라고 주장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키아벨리도 한비와 같이 외교관으로 활약했지만 불운하게 퇴임한 뒤로 다시는 정계에 복귀를 하지 못하고 고독하게 글을 쓰면서 인생을 마쳤다. 메디치가에 기용되기를 열망했지만.

한비는 참 고독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선천적인 말 더듬이인데다 글을 잘 썼으니 자연 대인관계에 지장을 받았을 것이다. 시황제가 한비를 등용하지 않은 데는 이사의 모함이 결정적이었다고 사료에는 적혀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시황제가 정치인재나 군사 인재를 쓴 것을 보면 그런 것에 크게 구애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대를 넘어서는 사고와 신체적 조건이 결합되어 한비는 고독한 인격을 형성하였고 이것을 시황제가 정치적 인재로서는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그의 인생은 불운했지만 그의 사상이 역사의 괴물 시황제와 탁월한 실무능력을 가진 이사에 의해 고스란히 실현되었으니 그다지 억울한 인생은 아니었다.


법가는 중국의 진(秦)제국을 수립한 시대정신이었다. 그것은 중국의 봉건을 끝장 내버린 대부정의 정신이었으며 새로운 제국의 건국 사상이었다. 그것은 서유럽의 봉건을 끝낸 근대정신과도 얼마간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민주주의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법가에만 없는 것이 아니고 제자 백가의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인민을 사랑한다(仁者愛人)는 유가의 인본주의나, 남도 나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兼愛)는 묵가의 이타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신분을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운영원리를 만드는데 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동양 사상의 약점이다. 반면에 서양의 근대 사상가들은 역사 속에 묻혀있던 작은 고대도시인 아테네의 경험을 단서로 삼아 민주주의 사상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오늘날의 근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법가를 통하여 동양에서 혈연적 봉건이 어떤 정신에 의해 극복되어 나가는지는 충분히 시사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서양의 봉건의 해체 과정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은 민주주의가 일반화되어 가는 시대이다. 나라마다 폭이 크지만 법치가 내면화되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태는 줄어들고 있다. 신분제의 굴레도 깨어졌다. 여기에는 시대를 개척하려는 무수한 사상가들과 대중들의 형용하기도 어려운 노력의 결과이다.

우리의 근대화도 곡절 많은 과정을 겪었다. 근대화를 둘러싼 노선 투쟁으로 동족간에 이념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외국의 군대까지 동원되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 쪽은 성공하고 있지만, 한 쪽은 중도에 파탄을 맞고 있다. 북쪽은 근대화되어야 하며, 남쪽은 정착되어 가는 근대를 다지는 것과 함께 근대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법가에 대한 탐구는 근대의 형성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적 도전이 밀려오고 있다. 근대적 패러다임으로만 세상을 보려해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낙오되어 어느덧 사회발전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법가는 진(秦)제국의 건국 사상이 되었다가 한 제국 이후에는 인프라가 되었다. 한 제국이 유가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는 배경도 나에게는 상당한 감흥을 준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으로 삼고 싶다.


"육가(황제의 시종)는 끊일 사이 없이 황제(한 고조)에게 시서(시경과 서경)를 인용하여 들려주었기 때문에 급기야 황제를 분격시켰다. '나는 말 위에서 제국을 정복했다. 이 따위 시서 같은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이에 육가는 대답했다. '말 위에서 세상을 얻었지만,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조 혁(시대정신 편집위원)
* 이 글은 시대정신 [1999 05-06월호] 제4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