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역사전쟁'을 다시 조명한다

이강기 2015. 10. 4. 13:48

[특집] '역사전쟁'을 다시 조명한다


시대정신, 2013년 가을호

[편집부]

 

 

사회

김세중 본지 발행인

 

토론자

이인호 서울대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남시욱 세종대 교양학부 석좌교수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

 

일시: 2013년 7월 29일(월)

장소: (사)시대정신 회의실

 

토론주제

1. 최근 역사논쟁 전개 양상에 대하여

2. 좌파 역사인식의 배경

3. 건국헌법을 둘러싼 쟁점

4. 대한민국사 서술의 기본전제와 시기별 강조점

5. 역사교육의 개선책

 

최근 역사논쟁 전개 양상에 대하여

 

김세중: 요즘 역사인식 및 역사교육과 관련된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애초에는 이 쟁점에 대해 상이한 입장을 가진 분들을 모실까 생각했습니다만, 오히려 소모적 논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어서, 이렇게 큰 틀에서 입장을 같이하는 분들의 중지를 모으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워낙 경륜 높으신 선생님들이시니 좋은 말씀이 기대됩니다.

최근 역사논쟁은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의 유포와 그에 대한 우파의 반격, 그리고 연이은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의 형태로 진행되다가 대통령께서도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이런 상황 전개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규형: 사실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가 황급히 나오게 된 배경은 지난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당히 거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현재 국사학계의 다수가 갖고 있는 생각과 일치하는 면이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바람처럼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로 교과서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검인정 교과서가 8월 말에 공개되고 채택과정이 있을 텐데, 교학사 교과서의 경우 본인들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집필을 하고, 그것이 검인정에 통과된 것을 알고는 아예 그 교과서가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래서 교과서 내용이 알려지기도 전에 온갖 허위로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지금 와서 이야기지만 교학사에서는 사실상 검인정 통과를 자진 반납하는 결정을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나서서 그러한 사태는 막았습니다. 그런데 교학사 교과서가 검인정에 통과된 8종 교과서 중 하나의 선택사항이 되자 모 교수가 경향신문 칼럼에서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률을 0.01%로 묶어 버리자”는 제의를 했습니다. 적어도 한국사 교과서에 있어서 본인들의 독점권을 지키겠다는 생각이 큰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08년 대안교과서가 출간되었을 당시도 그 책에 대한 온갖 허위와 음해가 판을 쳤는데, 불행히도 그 음해가 통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표현에 의하면 “죽여 놨다”고 할 정도로 대안교과서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교학사 교과서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그러한 음해가 100% 통하지 않는 상황으로 변하고 그 음해에 대해 고발이 들어갔는데, 음해를 했던 사람들이 이에 사과하며 일단락됐습니다. 대안교과서와 교학사 교과서는 비록 성격이 다르지만 그 의도와 방식은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회에 대안교과서에 대한 음해에도 고발이라든가 하는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대안교과서에 대한 음해성 비방이 널려 있거든요.

 

남시욱: 〈백년전쟁〉이라는 동영상이 지난해 대선 전에 박근혜 후보를 낙선시킬 목적으로 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좋은 지적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 동영상에서 먼저 이승만 박사를 장시간 다룬 것은 단순히 박근혜 후보 낙선만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에 이은 보수정권의 연장을 저지하고, 나아가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자는 적극적인 캠페인이라는 점입니다. 동영상 이름에 ‘전쟁’이라는 용어를 썼듯이 이 동영상을 제작한 측은 실제로 역사전쟁 내지 이념전쟁을 벌일 태세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박근혜 보수정권 5년 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어떤 방식이든 투쟁을 하려 할 것입니다.

교과서 문제는 김대중, 노무현 좌파정권 10년 동안 좌파적인 역사관에 바탕을 둔 교과서들이 판을 친 것이 문제의 근원입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새로운 검정교과서 편수방향을 마련하여 이런 상황을 시정하려 했지만 결국은 그 성과가 미미했던 거죠. 그래서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교학사에서 반좌파적인 교과서가 나온다고 하니까 반발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인 유영익 교수를 국사편찬위원장으로 내정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좌파 진영 역사학자들이 반발하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보수정권 연장으로 그들이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들고 일어선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몇 년 전 KBS에서 이승만 박사 다큐멘터리를 방영한다고 하니까 이들 일부가 들고일어난 것도 그렇습니다만, 보수 성향의 종편 등장에 대해 “과거 회귀를 노리는 수구세력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느냐. 이것을 막아야 되겠다”는 식으로 일종의 반격작전을 벌이는 것 같아요.

내가 우려하는 것은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국정교과서가 아닌 검정교과서로 한 것은 다양한 시각에서 집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에 대한 왜곡 없이 통설을 기준으로 삼으면서 균형있게 서술해야 하는데, 현재의 검정교과서들이 좌경 일변도라면 문제지요. 하기야 현재 국사학계의 80% 이상이 좌파 학자들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 않습니다.

 

이주영: 최근의 역사논쟁은 단순한 학술논쟁이 아니라 국민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권력을 잡으려는 역사전쟁입니다. 과거의 이념전쟁 또는 사상전이 지금의 역사전쟁입니다. 국민을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것은 선거에서 이긴다는 뜻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역사관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입시켜야 합니다. 요약하면 역사전쟁은 좌파대연합 세력과 우파대연합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한민국 쟁탈전이라는 것입니다.

그 전쟁에서는 국민교육의 주요 수단인 교과서가 중요한데, 역사교과서 차원에서 그 문제를 본다면 우파대연합 세력은 이미 1969년부터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4인의 중진역사학자들이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이란 보고서를 냈고, 그것을 박정희정부가 채택했습니다. 거기에 우파 성향 학자는 한우근과 이기백, 좌파 성향 학자는 이우성과 김용섭이 참여했습니다. 그 보고서의 핵심은 앞으로 한국사 교육이 강조해야 할 세 가지 기본요소가 민족의 주체성, 민중의 역할, 민족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거기에는 북한을 포함한 민족과 민중이 있었을 뿐, 대한민국이라는 우리의 국가와 그것에 대한 애국심은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 세 가지 기본요소들에 대한 역사학계의 좌우합작이 이루어진 셈인데, 이에 토대를 둔 역사관이 오늘날의 좌파적 사관인 동시에 북한의 공식적인 사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관에 관한한 남한의 좌파와 우파, 그리고 북한이 모두 통일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현실이 이러하니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과 정체성이 위기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영훈: 저도 동감입니다. 최근에 전개되고 있는 역사 논쟁은 단순한 학술적 논쟁의 수준을 넘어서 사실상 국가의 정통성을 어떻게 결정하고 장악하느냐 하는 일종의 사상내전과 같은 양상입니다. 이를 방치했다가는 심각한 준(準)내전적인 큰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년전쟁〉 동영상을 보면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인격 파탄자, 민족배반자, 일신의 권력을 추구한 모리배로 매도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뱀과 같이 아주 교활한 인물이라며 공산당 선전부에서 작성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식의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역사교사들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선전되고 있다지요.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젊은 의원이 백선엽 장군을 민족의 반역자라 비난하고, 나아가 민주당과 같은 공당의 대변인이 박정희 대통령을 귀태(鬼胎)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전부 맥락을 같이합니다.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갈등의 배후에 역사인식의 근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국민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일대 캠페인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정치권은 안이한 것 같습니다.

 

이인호: 저도 단순한 역사논쟁이 아니라 이주영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쟁탈전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런 차원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전쟁’이라는 표현은 좌파 진영에서 먼저 사용한 것이거든요. 1947년 12월 전까지는 결코 대치했던 세력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승만과 김구 등을 〈백년전쟁〉 동영상에서 백 년 전부터 민족주의와 친일세력으로 나뉘어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전쟁이라는 말을 쓴 것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음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미 2011년에 〈역사정의실천연대〉라는 기구를 발족시키시면서 ‘역사전쟁’이라는 용어를 썼어요. 그리고 2008년부터 ‘역사전쟁 일지’라는 것을 작성해서 공공연하게 인터넷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물론 그 뿌리는 더 깊습니다. 이주영 선생님께서 69년을 말씀하셨지만, 해방 이후 좌우대립에 이미 그 뿌리가 있었고, 거기에는 마르크스주의사관의 문제, 그리고 남북한의 체제대결 문제, 또 하나는 순수한 민주화 투쟁인 반독재민주화 투쟁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사실은 상당히 다른 요소도 끼어 있는 등 이 세 가지 요소가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주장으로 나타나는 양상도 복잡합니다. 따라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응하지 않으면 많은 오해가 빚어질 수 있는 심각한 상황입니다.

 

좌파 역사인식의 문제점과 배경

 

김세중: 선생님들께서는 최근의 역사논쟁이 좌파의 교과서 시장 독점이라는 목표를 넘어서 전반적 문화투쟁, 그리고 대한민국 쟁탈전을 목표로 하는 역사전쟁 또는 사상적인 내전의 양상을 띤 심각한 현상이라는 데 인식을 함께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이미 잠깐 언급됐습니다만, 좌파 역사인식의 배경에 대해 논해 보겠습니다.

 

이영훈: 아까 말씀 나왔지만 당초 1969년에 이기백, 이우성, 한우근, 김용섭 등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네 분이 역사교육의 개선방안으로 합의한 민족의 주체성, 민중의 역할, 내재적 발전론 등의 내용은 그 당시에는 이것이 어떠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장래 어떠한 정치적 갈등을 유발할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12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내용의 국민교육헌장이 선포되었듯이 박정희 대통령도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1972년도 유신시기에 국정교과서 제도가 시행되면서 본격적으로 민족주의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까지도 민족주의의 역할은 ‘조국근대화’의 동기로서 나름대로 실용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지는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소위 반제국주의, 민중․민족주의 사관이 학계를 신속하게 장악해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80년대 후반이 되면 강만길 교수가 주도하는 소위 ‘분단체제의 역사학’이 성립하게 됩니다. 그 주요 내용은 “역사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기본단위는 민족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지상과제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이다. 대한민국은 반민족세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의 분단을 무릅쓰면서 세운 국가다. 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 국민국가가 성립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체계화한 것이 한길사에서 6권으로 출간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은 처음에는 자유민주적 기풍을 가진 학자들도 참여했는데, 마지막 6권에 이르면 남로당 계열을 잇는 사람들의 논문도 끼어들어 북한의 주체사상과 그 지도적인 역할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책을 읽고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집권한 것이 바로 노무현정부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인호: 배경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박정희정부가 추구한 반공교육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반공교육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공부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반대한 이유는 그만큼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체제였기 때문인데, 6․25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는 안보를 잘한 덕분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느낄 수가 없었죠. 그러나 군사정부가 언론, 지적 자유 등을 탄압하는 것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위협은 없는데 독재정부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괜히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 심리적인 반감이 생긴 것이죠.

또한 리영희 교수나 박현채 교수와 같은 분들이 완전히 반체제적인 시각에서, 공산주의 진영의 기준으로 볼 때도 아주 낙후한 1930-4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에 입각해서 쓴 저서라든지, 중국의 문화혁명과 스탈린주의 자체까지도 미화하는 듯한 책들을 냈는데 그것들이 굉장히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어요. 그런 점에서 반공교육을 잘못한 정부의 책임도 굉장히 크다고 봅니다. 그리고 세계사를 알 수 없게끔 모두 한국 중심으로 ‘한국적 민주주의’, ‘국풍’ 등을 운운하면서 시야를 좁혔거든요.

 

남시욱: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를 부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는 우파든 좌파든 안 되지요. 그리고 타민족과의 공존 공생을 부정하는 폐쇄적 민족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도 문제지요.

 

강규형: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제 또래들에게 강만길 교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은 큰 영향을 미친 책 중의 하나입니다. 아까 이영훈 교수님이 이야기하신 분단체제론 또는 분단사관이라는 것은 여기서 나왔는데, 이 사관에 따라 한국현대사를 보면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체제는 극복돼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그 이후의 한국현대사 연구가 그러한 방향으로 흘렀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쉬운 점 중에 하나가 1980년에 차하순, 최정호 교수님 등이 한국현대사가 지금 전혀 연구되지 않고 교육이 안 되니 이것을 제대로 해보자는 취지로 『계간 현대사』라는 학술지를 간행했습니다. 제가 그 창간호를 아직도 갖고 있는데 6․25전쟁에 관해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논의를 모아놨습니다만, 불행히도 현대사를 연구한다고 해서 전두환정부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지정되어 폐간됐습니다.

즉 국사학계에서 현대사는 역사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연구나 교육을 안 하고, 현대사 연구에 대한 움직임은 정부에 의해 차단되는데, 그 틈새를 메운 것이 재야와 운동권이었습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리영희의 저작들은 정통 역사학자들이 아닌 재야학자들과 운동권에 의해서 주장됐고, 이 주장들이 분단체제론과 맞물리게 됩니다. 여기에 감화를 받은 저희 세대가 교수가 되면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이 현재의 상황이라고 봅니다.

 

김세중: 좌파 역사관이 통일지상주의적 민족주의사관 그리고 시대착오적인 마르크스사관에 물들게 된 배경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들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소의 권희영 교수가 좌파의 인식 틀이 구체적으로 박헌영의 해방정국 인식 틀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하더군요. 대개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시카고대학 커밍스(B. Cumings) 교수의 의견이 좌파 현대사 인식의 중요 원천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주장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이인호: 그것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박헌영이라고 하는 개인의 문제보다도 운동권 교재의 상당 부분이 냉전시대 소련과 북한에서 나온 출판물들을 축약한 것이고, 거기에는 당연히 반미, 반대한민국의 시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한 교재들이 논문주제 선정 등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지요. 스탈린 사망 이후 스탈린 비판운동이 일면서 구(舊)소련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스탈린의 지시에 따른 역사 왜곡과 날조가 지나치다 해서 상당히 많은 책들을 1959년에 폐기 처분한 적이 있어요. 예를 들어 1938년에 나온 스탈린의 『소련공산당 약사』라는 짤막한 책, 그때까지 쓰이던 세계사 책들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소련에서조차 너무 왜곡됐다고 폐기 처분된 책들이 80년대에 우리나라 운동권들의 교재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현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런 책뿐만 아니라 북한에서 나온 『조선통사(1958년)』, 『현대조선역사(1983년)』도 굉장히 많이 읽혔습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시각에서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북한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운동권 교육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거예요.

 

이영훈: 해방 직후 박헌영이 발표한 ‘8월 테제’라는 글이 있습니다. 박헌영이 무엇을 보고 썼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만,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일본 공산주의 강좌파의 현실인식, 코민테른의 국제주의적 민족노선, 그리고 모택동의 신민주주의론의 영향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잠시 소개하면 “조선은 아직 전근대적인 식민지반봉건사회고 봉건적인 지주와 반민족적 매판 자본가들이 제국주의와 결합하여 민중을 억압하고 수탈하고 있다. 공산주의들의 당면한 과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또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다”라는 겁니다. 이 같은 주장은 박헌영의 고유한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당시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공유했던 공통의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늘날 한국의 좌파들이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인적 계보를 갖는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지적 계보에 있어서는 상당한 연속성, 계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좌파들이 정립하고 있는 해방 당시의 역사인식과 박헌영의 ‘8월 테제’와는 그 거리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좌파세력은 1960년대 이후 대학가에서 자생한 마르크시스트, 사회주의자, 모택동주의자들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지식세력이 1980년대가 되어 『해방전후사의 인식』으로 대표되는 분단체제론의 역사학으로 결집하고 현재 역사학계의 주류를 점하였는데, 실은 역사학계만도 아닙니다. 여타 문학, 정치학, 사회학 등도 그러한 좌파적 역사인식에 포섭되고 말았지요.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좌파 성향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정치, 사회, 윤리 등 사회과 교과서 전체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 관한 장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분단체제론의 역사인식 그대로입니다. 어느 사회과 교과서 하나도 1948년에 있었던 대한민국의 건국 사건과 그 역사적 의의에 관해 평가하고 있지 않지요.

결국 문제의 소재는 좌파들의 역사인식라고만 할 수 없고,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수용하는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전반의 모순과 병폐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현대 한국의 지성 수준의 빈곤함, 협애함, 편파성이 결국 이러한 난국을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인호: 결국 민주화 투쟁을 한다고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데모만 했던 기간이 적어도 15년은 되지 않습니까. 엄청난 지적 결손과 공백이 발생한 것이고, 그 때문에 대학에서 명료한 판단력을 가진 지식인층이 육성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감정적으로 솔깃하게 들리면 그게 선전․선동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영속화시키는 그런 풍토가 조성되기 시작한 지가 한참 됐고 그 여파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게 80년대, 특히 광주민주화항쟁 이후에 운동권들의 논조에 굉장한 변화가 옵니다. 예를 들면 1980년 전까지는 반미, 반이승만 같은 구호는 나오지 않았어요. 저류로 좀 깔려 있긴 했었지만 밖으로는 표출되지 않았고, 오히려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는 미국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었는데 80년 이후에 달라지거든요. 그러면서 전략이 조금씩 변합니다. 처음부터 박헌영 사관이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민중, 통일을 내세우면서 차츰 대한민국의 기본을 허물려고 하는 쪽으로 흘러가죠.

그래서 저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공산권이 종주국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고 이념체계가 스스로 파산을 선고한 그 시기에 우리나라는 거꾸로 북한이나 공산권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색깔논쟁이니 냉전논리니 하며 금기시하며 내용적으로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한편으로 기득권 세력은 이제 북한과의 경쟁은 끝났고 우리가 원하면 흡수통일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문화권력 이론이라는 것을 열심히 공부해왔던 좌파세력, 특히 종북 좌파는 전략적으로 역사교육 분야로 파고들었습니다.

 

남시욱: 아까 좌파이론의 빈곤 이야기가 나왔는데, 현재 좌파 역사학자들의 역사관, 역사인식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우선 그들은 1989-1991년의 소련 동구권 붕괴에 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거든요. 현실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이상 좌파 역사가들이 금과옥조로 삼던 마르크스주의적 유물사관에 대해서도 당연히 철저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볼 때, 스탈린이 만든 김일성정권, 그리고 소련 붕괴 후 봉건왕조로 바뀐 오늘의 북한정권에 대한 관점도 당연히 달라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정권으로 보던 과거의 교조적 좌경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역사관은 해방 직후 공산주의자들의 역사관과도 맥이 닿지요. 박헌영의 ‘8월 테제’는 1945년 당시의 국제정세에 관해 "진보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승리가 세계혁명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하고, 이와 같은 세계혁명 발전과정에서 조선의 평화적 혁명의 성공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이 문건은 사실 1928년 코민테른이 발표한 ‘12월 테제’에 영향을 받은 문서지요. 정식 명칭이 ‘조선문제에 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결의’입니다. 조선공산당의 조직 지침과 조선혁명의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였던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가 1936년 소련을 다녀와서 『소련기행(Retour de l’URSS)』을 썼는데, 그게 유럽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 실상을 본 지드가 소련의 공산주의가 저렇게 형편없게 전락할 줄 몰랐다며 사상전향을 선언해하니까 그 당시 유럽의 일부 지식인들은 “지드가 파시스트에 매수됐다”며 비판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일제가 괴뢰국 만주국을 만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려던 시기였지요. 앙드레 지드의 책이 일본말로 번역이 됐었는데,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지 상당히 흥미를 끄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고 신일철 고려대 교수와 이 문제를 많이 토론했습니다.

결론은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에요.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지하에서 교조적 공산주의 사상이 풍미하던 때라서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신 교수가 이 문제에 관해 당시 보성전문 법학 교수였던 유진오 선생이 쓴 글이 있다고 알려주어 유진오 선생께서 1937년 2월 조선일보에 3회에 걸쳐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글의 제목은 "지드의 소련기행기- 그 물의에 관한 감상수제(感想數題)"였습니다. 한 마디로 유진오 선생은 지드도 비판하지 않고 소련의 스탈린체제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약간 놀랐습니다. 유진오 선생은 지드에 관해 "배덕이나 변절을 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 그는 처음에 코뮤니스트로 불렸으나 코뮤니스트가 아니었고, 오늘 와서 파시스트로 불리고 있으나 의연히 코뮤니스트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라는 묘한 표현으로 옹호했습니다. 그리고 소련에 대해서는 "소련의 질서는 완성된 것이 아니고, 완성되면서 있는 질서"라고 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을 수 있고,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다는 식의 인상을 주었습니다.

 

김세중: 좌파의 역사인식이 박헌영 자연인을 떠나 냉전 시기 소련과 북한의 출판물, 그 밖에 당시 아시아 공산주의 일반의 입장이 반영된다는 지적에 이어 좌파 역사인식의 빈곤성에 대한 말씀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이른바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논리들이 한국 현실에 비추어 너무나도 설명력이 없기에 일종의 주술적 언어로 치부해 왔습니다만, 그러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런 주술적 언어가 사회 일부에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면도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고민해봤습니다만, 문제는 좌파가 내놓은 가치들, 예를 들어 민중, 통일, 민족, 민주, 자주 이런 가치들은 일단 국민국가 체제와 인권 개념을 배경으로 작동하는 시대적 상황에서는 적어도 명분상 보편성을 띤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이런 가치들은 이른바 보수정권 아래서 억압되고 통제됐던 면이 있었거든요.

그러나 현실을 깊게 천착하면 현재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만, 이런 가치들은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특정 상황과 발전단계에 따라 완급조절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들이거든요.

 

이인호: 좌파가 가장 중요하게 발전시킨 것이 바로 선전․선동 전략이지요. 보편적으로 좋게 들리는 말은 그들이 모두 선점하고 있어요.

 

남시욱: 80년대 말에서 90년대에 재미있는 현상은 일부 좌파 인사들이 박헌영을 진짜 미국의 간첩이라고 주장하면서 공격한 사실입니다. 김일성의 북로당 노선을 따르는 거죠. 말하자면 종북주의적 역사해석이지요. 그러니까 박헌영에 동정적인 좌파 이론가 일부에서 왜 박헌영을 비판하느냐면서 재미있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게 북로당과 남로당의 싸움이고 김일성과 박헌영의 싸움인데, 어떻게 그것이 이상하게 연장돼서 몇 십 년 후 재연된 거예요. 그런 현상이 지금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강규형: 우리 사회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굉장히 감성적입니다. 그래서 감성에 호소하면 먹히는 게 많았습니다. 80년대 운동권이 이론담론 투쟁을 할 때를 보면 사실 PD계열 더 정교한 이론이었지만 NL 계열에 참패했습니다. 승리한 NL 계열 중에서도 조금 더 이론적으로 괜찮은 비(非)주사파가 주사파에게 참패하고, 가장 감성적인 NL 주사파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방금 남시욱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박헌영 비판이 바로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강철서신 1호입니다. 어떻게 보면 북로당 계열이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자생적으로 발생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벌어지고 있는 재미있는 현상은 북한 주도의 통일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왔기 때문에 한국 좌파 또는 반(反)대한민국 진지 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로당파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게 감지되고 있습니다. 박성현 씨가 “박헌영의 잔재들, 박헌영의 영혼이 살아나고 있다”고 표현한 글들을 본 적이 있는데, 남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 박헌영 비판이 NL 주사파의 핵심 테제였고, 그게 먹혔다는 게 갑자기 생각납니다.

 

이인호: 좌파의 갈래 싸움이라든가 논리의 허구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실 우파도 마찬가지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적 기반이 취약하다보니 논쟁다운 논쟁이 아닌 그야말로 감정에 호소한 패거리 정치의 연장으로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반(反)대한민국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 특히 반(反)이승만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역사교과서 집필에 대거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권 교체가 되고 통일지상주의가 사회에 팽배하게 되면서 역사청산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엄격하게 말해서 역사청산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지 누가 재단해서 역사를 청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과거에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사람들을 추려내서 보상을 해주고 명예도 회복해서 국민적인 통합을 한다든지 하는 수준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이미 일어난 일을 청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 각종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상위원회가 있었는데 그건 사실 정치권력의 힘으로 역사를 뒤엎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각종 위원회에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 역사학계에서도 저분들이 누구인가 싶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제주 4․3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을 규명하는데, ‘여하간 국가가 잘못했다’는 식으로 결정이 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벌써 대한민국의 역사가 뒤집힌 겁니다. 국민과 학계가 제대로 방어를 못했죠.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고, 대다수의 국민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 해석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교과서 논쟁이라는 것은 정치권력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뒤집어놓은 역사가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사실이 사실대로 알려지는 것을 미연에 차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입장이고,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는 역사 인식을 회복하겠다는 입장인 것이죠. 세상에 어떤 나라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신의 역사를 해석하려 합니까? 결국은 1948년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수립된 것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근본적인 해석에서 갈리는 것이죠.

 

이영훈: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로 수립되었느냐를 두고 최근에 논쟁이 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부 좌파 역사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건국헌법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기 위한 사회복지국가체제를 지향하였는데, 이후 이승만의 반공체제와 박정희의 대기업 중심의 경제개발이 그것을 부정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건국헌법의 취지를 되살리자고 주장하지요. 그 역시 이승만, 박정희 중심의 대한민국사를 비판하는 취지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조금 전에 김세중 교수께서 한국인들에게 민족, 민중, 자주 이런 것들이 보편적 가치로서 큰 호소력을 지닌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달리 표현하면 근대문명의 핵심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사권(私權)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란 범주, 그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 등은 여전히 오늘날 한국인에게 낯설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런 가치와 이념은 19세기까지의 우리 역사에서, 다시 말해 성리학으로 통합된 조선왕조 시대에,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19세기 후반 서구 근대문명의 도전을 맞아 조선왕조는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그 같은 제약 조건은 크게 보면 1948년 건국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싫어서 대한민국의 건국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어떠한 국가체제를 추구할 것인가를 둘러싸고서는 생각이 각기 달랐지요. 엄밀히 말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건국 당시에는 이승만 박사조차 중요 산업은 국가가 장악하고 그 밖의 산업은 기업가들에게 맡기고 재산권에 대해서도 공공적인 통제를 가하는 일종의 혼합경제적인 체제를 구상했습니다. 혼합경제체제는 당시의 세계적 사조이기도 했지요.

건국헌법에 들어가 있는 근로자의 이익균점권(利益均霑權)도 그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로자가 기업의 이익을 균점한다는 조항은 헌법 초안에는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헌법을 통과시키는 본회의 석상에서 어떤 의원이 “공산주의와 대응하는 마당에 있어서 근로자들에게 기업의 이익을 균점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합니다”라고 긴급 발의를 하니까 모두가 “옳소” 해서 급하게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혼합경제의 사회복지국가의 모색이라기보다 기업의 본질이나 시장경제체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당시의 지적 사조를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건국헌법의 혼합경제 조항은 현실적으로 전혀 구속력이 없었고, 이후의 헌법 개정의 과정에서 모두 삭제되고 말았습니다.

 

이인호: 이 선생님은 그런 면에서 제헌헌법에 조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시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제헌헌법은 혼합경제체제라기보다는 사회민주주의 체제랄까 복지국가체제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었습니다. 열려있는 체제지요.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경제가 자연스럽게 작동하는 원리일 뿐이지 이상으로 내걸거나 헌법에서 다룰 리 없는 것이죠.

제가 이해하기에 이승만 박사 자신은 오늘날 말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이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1923년에 쓴 글을 보면 그런 점이 나와요.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짤막한 논문이 있는데, 그 당시 웬만한 애국자들 대부분이 소련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면 소위 민족해방, 계급해방을 한꺼번에 이룰 수 있다고 해서 혹할 때인데, 이승만 박사는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노동자, 농민이 잘 살 수 있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 그게 바로 내 꿈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골고루 나눠주고 기업가들을 홀대하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이론은 절대로 안 된다”라고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1946년에 대동신문에 실린 국가구상을 보면 평등을 가장 먼저 강조했고, 조소앙 선생이 사회민주당을 창당할 때도 혁명적 공산주의에 대해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대안임을 인정하며 축사를 했던 분이에요. 하지만 좌파가 원했듯이 해방 후 곧바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지요. 절대적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선 독립을 해야 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인식이 겨우 싹트기 시작하는 가운데 경제 건설에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하는 단계에서 사회민주주의란 자유민주주의를 거치면서 지향해야 할 이상이었지 즉각 시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해는 우방들의 원조와 도움을 받아서 태어났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이상으로 한다는 사실은 제헌헌법의 조항들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파국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인민민주주의만이 유일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란 인민민주주의와 구분되며 자유와 평등을 함께 존중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뜻하는 말이었지요. 후에 박정희정부 시대에는 자유민주주의와 구분되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도 나옵니다.

인민민주주의와 구분되는 자유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임을 강조하며 그러한 이념적 토대 위에 독립을 해야 한다고 고집한 사람이 이승만 박사입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만든 제헌의회의 의장이자 건국 대통령입니다. 그 헌법이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반공정책을 추구한 이승만과 제헌헌법이 상관없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역사정의실천연대〉의 주장은 황당한 이야기지요.

또 하나 분명히 지적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소련의 스탈린 체제라고 하는 것은 최악의 전체주의 독재체제였으며, 그 영향권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독립의 포기였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그것이 사실임을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거쳐 온 역사적 체험과 증언으로 증명이 되었지만 해방 당시 그것을 알아차릴 능력이 있었던 사람은 이승만 외에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런 중요한 사실이 ‘역사전쟁’에 휘말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양쪽에서 모두 모르거나 잊어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당시 우리에게 독립은 지고지순의 과제였는데, 공산권으로 들어가는 것과 독립은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북한의 현실을 보거나 동유럽의 헝가리나 폴란드, 체코 등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여러 차례 유혈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소련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다음에야 진정한 해방과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역사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건국헌법을 둘러싼 쟁점

 

김세중: 이인호 선생님께서 좌파의 일종의 역사뒤집기에 우파의 대응이 너무도 안일했다는 통렬한 지적을 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현대사 해석과 관련해서 중요한 쟁점이 제기된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건국헌법 일부에 내재된 혼합경제 조항 등에 주목하여 좌파는 대한민국이 출범 당시부터 우리가 이해하는 시장경제체제나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당시에 대한 이해가 짧은 데서 오는 오해라는 설명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좌파가 견고하게 그들의 입장에 집착하는 데 있는 것 같군요.

 

이영훈: 다 잘 알다시피 최근 좌파 역사학계는 대한민국의 기초이념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그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냥 민주주의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느냐, 그것은 있는 자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적 발상이라는 겁니다. 역시 여기에도 근대문명의 핵심 원리에 대한 오해나 이해 부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사적 권리의 주체로서 개인입니다. 그것을 국가구성의 기초로 설정하는 국가체제가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이나 전후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민주주의에도 여러 유형이 있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이 혼합경제체제로 출발했다고 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반대편에 인민민주주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개인의 자유보다도 인민, 민중, 계급의 평등과 해방을 추구합니다.

이 점에서 양자 간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나옵니다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를 근본적인 가치로 받드는 나라로 출발하였습니다. 경제체제의 구체적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건국 이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모색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남시욱: 현재 헌법도 그렇습니다만, 특히 제헌헌법의 경제조항들에 혼합경제적 요소가 있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민주주의체제’라고 해야지 ‘자유민주주의체제’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김구 주석이 이끈 중경임시정부도 1940년대 초 좌우합작 정권을 구성하면서 혼합경제적 요소를 경제정책으로 채택했지요. 상당수 정치학자들과 헌법학자들은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사회민주주의체제까지를 포용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유럽의 경우 자유민주주의체제 내에서 사회당이나 노동당이 집권을 하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레이건이나 대처식 ‘신자유주의’를 배척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일으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기능을 극대화하려는 시장경제이념이지 정치적 이념은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주의권 붕괴 전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같은 사이비 민주주의와 구별하기 위해 쓰는 용어이지요.

광복 후에도 이승만 박사를 포함한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와 일반 사회주의를 구별하고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는 용인했어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변종으로 독재와 폭력을 수반한다고 보아 배척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삼균주의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인 조소앙 선생은 상당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건립 후인 1948년 10월에 YMCA 강당에서 대한민국 수립 후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 창당대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비서관을 보내 “공산당과 싸우는 나라에서는 반드시 사회당이 나와야 하는데 내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조소앙 선생께서 사회당을 하신다고 해서 정말 기쁘다”고 축사를 했어요. 비서관이 축사를 읽는데 조소앙 선생 측에서 대통령 각하의 말씀이니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들으라고 했지요. (웃음)

다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2차 대전에서 소련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리하여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의 하나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여전히 일부 좌파 지식인들이 소련체제를 자본주의체제의 대안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폭력혁명주의자들인 북한정권이 6․25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의 이념 판도에도 큰 변화가 왔지요.

 

이인호: 그것은 조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씀이라고 보는데, 대한민국 수립과정에서 좌익과의 투쟁은 치열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소련을 이상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조금 있었다는 말씀이신데, 그건 사실이지만 실제 대한민국을 수립하는 데 있어 좌익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죠.

 

남시욱: 물론 이 박사는 소련 공산주의체제도 싫어했지만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그들의 남하정책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주영: 이승만 박사는 반공주의자였지만 서민의 편에 서는 평등주의자였습니다. 그 자신이 가난하게 자라기도 했지만 하와이 등지에서도 항상 서민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산 피란시절인 1951년 자유당이 창당될 때 당 이름을 노농당, 즉 노동자농민당으로 하라고 지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에 건국헌법이 제정될 때 그의 평등주의 사상과 당시 좌경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도입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최근 일부의 좌파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대로 대한민국이 1948년에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출발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습니다. 현재의 헌법에서 자유경제체제에 대한 통제를 명시한 헌법 제119조 2항이 자유경제체제를 명시한 제1항보다 길게 묘사되어 더 중요시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해서, 1948년의 건국헌법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막연한 의미의 민주주의라는 말보다는 보다 명시적인 의미의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냥 민주주의를 사용하면 그것이 사회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 인민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민주제의 핵심은 자유선거이므로 자유선거가 없는 공산국가들의 민주주의와 우리의 민주주의를 명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선거로 시작된 나라이므로 경제에서도 같은 논리의 시장경제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든 경제든 많은 지지자와 표를 얻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자유시장의 개념이 우리 대한민국 체제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남시욱: 우리는 자유주의라고 하면 좋은 면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좌파들은 자유방임체제라고 비판하지요. 사실 대한민국 헌법의 모체는 바이마르 헌법이에요. 바이마르 헌법은 유진오 선생이 초안을 작성했는데, 바이마르 헌법 자체에 그런 요소가 있어요. 독일제국이 망하기 직전에 공산당의 폭력혁명 시도가 있었던 것을 교훈으로 삼았기 때문이죠.

 

김세중: 일반 헌법해설서 가운데 건국헌법이 논리적 관점에서 볼 때 정치체제는 자유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 경제에는 통제적 측면을 가미하고 있다는 면에서 정합성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있더군요. 방금 유진오 선생 이야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은, 유진오 선생 본인이 직접 자유경제가 기본이고 통제경제가 예외로 들어가 있다고 정리하신 적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인호: 저는 제헌헌법이 순전히 자유주의적이었느냐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들어있었다는 게 오히려 장점이라고 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어떤 발전 단계를 거쳐서 수립되고 성장했으며, 어떠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수호되었는가 하는 점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당시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진영 간 냉전이 시작된 시기이고, 그 속에서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한 부분으로서 탄생하고 방어된 체제입니다. 나라가 나라로서의 구실을 어떻게 해냈는가, 헌법의 기본정신이 지켜졌는가가 더 중요하지 헌법의 구체적 조항과 정통성은 상관이 별로 없다고 봅니다.

 

김세중: 그와 관련해서 지적할 것은 한국의 건국헌법은 논리적 정합성의 추구와 함께 국가창설이라는 과제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건국에 대한 합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논리적 정합성이 부분적으로 타협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헌법학자들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영훈: 한국의 건국헌법은 우리 역사 속에서 도출된 게 아니고 외부에서 좋은 헌법을 갖고 들어와서 책상 위에서 조합한 계수헌법(繼受憲法)입니다. 더구나 헌법학자가 없었기 때문에 공법학자인 유진오 선생이 여러 나라의 헌법을 공부를 해가면서 만든 헌법인데 독특하게 경제장(經濟章)이 들어가요. 어느 나라도 헌법에 경제장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좋은 뜻에서 헌법에 경제장을 둬서 지금까지 그 전통이 이어오는데, 더구나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마다 경제장이 오히려 강화됩니다.

그래서 현재의 헌법도 엄밀히 말해 자유시장경제체제가 아니에요. 현재 헌법을 보면 국가는 농업과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요. 결국 국가는 0.1%에 불과한 대기업을 제외한 모든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거예요. 저는 헌법을 그 조항을 읽으면서 아직도 대한민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국가라 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의 경제정책을 봐도 그렇습니다. 규제에 규제가 더해져 온통 규제의 왕국입니다.

 

강규형: 1, 2년 전부터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용어가 국사교과서에 들어가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게 국사학계의 입장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정도로 거부하는가 보니, 남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자유를 시장지상주의, 신자유주의로 축소해서 해석하고 심한 경우는 우파 독재와 동일시하더라고요. 〈역사정의실천연대〉의 선언문을 보더라도 “지금까지 사용해온 민주주의라는 용어 대신, 독재를 정당화하고 반공주의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어온 자유민주주의를 쓰도록 하였다”라고 비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개념을 왜곡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도 동의하셨다시피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의회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이분들이 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립 개념으로 보는지 솔직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회민주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서 나왔죠. 하지만 의회민주주의 내에서 선거를 통해 노동자가 집권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민주주의입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1920년대 노동당이 집권하고, 그 이후 독일의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사회당이 집권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틀 속에 포용됐다고 봐야 합니다. 사민당 브란트(Willy Brandt) 정권의 서독이 결코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아니라고 볼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이 둘을 굉장히 대립적인 것으로 보면서 제헌헌법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헌법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유민주주의를 신자유주의라든가 독재로 치환하는 굉장한 무지한 이야기들이 되고 있는 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인호: 그들의 의도는 대한민국 체제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거고, 그 정통성 시비의 핵심은 반공은 안 되는 것이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헌법에 따르면 반공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하는데, 우리가 주장해야 할 핵심은 그 당시 반공을 하지 않았다면 자유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공산주의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는 것이었는데, 그 점은 쏙 빼놓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소련의 영향만 아니었다면 남북이 공동 선거를 통해 정권을 수립하고 독립한 이후, 그 안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하든 사회민주주의를 하든지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필요했거든요. 소련의 위성국이 된다는 것은 독립이 아니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그 점은 빼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세중: 사회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수용되는 것이나 한국에서 이것을 어렵게 한 것은 오히려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위협이었다는 것으로 선생님들의 말씀이 정리될 것 같습니다. 조금 동떨어진 말씀입니다만, 일전에 대안교과서에 대해 누군가 비판하는 평을 보니 “이 사람들의 글을 보니 사회민주주의는 근대사회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거 같더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책 필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함의를 지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소지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영훈: 저는 역사학계의 주류가 소위 말해 마르크스주의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좌파들은 아주 순진한 사고를 하는 거죠. 해방 당시 좌우합작을 해서 이념을 떠나 사회민주주의적이고 혼합경제적인 어쩌면 더 좋은 통일국가, 민주주의 국민국가를 수립할 길이 있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한 일종의 환상을 상정하기 때문에 역사학계는 김규식, 여운형, 김구 등 좌우합작 세력을 추앙하고 이승만 박사를 비판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세력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는 기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좌우합작의 더 좋은 선택이 있었다는 겁니다.

방금 이인호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게 환상이에요. 예를 들어 1946년 5월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서 통일적 임시정부의 수립을 논의하기도 전에 북한에서는 3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했지 않습니까. 저는 분단을 향해서 먼저 달린 것은 오히려 북한의 공산주의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로 가기 위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강행되었고, 그에 따라 북한의 자유민주주의자들이 남쪽으로 추방되고 있었는데, 그러한 세력과 자유민주주의자가 합작을 해서 사회민주주의체제의 국가를 세울 길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지요.

 

이인호: 김구 선생 일행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갔지만, 그것도 스탈린의 재가를 받은 후에야 가능해진 일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북한에 남북지도자 회의의 확대회의와 축소회의에서 결정할 사안까지 지시를 내렸지요. 스탈린이 이미 북한의 헌법 조항을 검토하고 있는 단계였는데 김구 선생 등은 마치 남북 지도자들이 합치면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지요. 당시의 좌익은 그런 환상을 가질 수 있었어요. 소련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으니까요. 공산주의의 실상과 정체를 미리 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이승만 박사나 북한에서 소련군의 전횡을 경험한 사람 이외에는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역사적으로 모든 것이 드러났는데도 아직까지 환상 또는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남시욱: 좌파 역사관에 한정해서 말씀 드리면,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은 중간파를 좋게 보고 남북협상을 좋게 보는 틀이 박혀 있었어요. 신탁통치에 대해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졌지만 이승만 박사는 신탁통치와 중간노선이 모두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북한을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을 상대로 하는 좌우합작노선은 공산화의 길이라고 믿고 배격했지요. 이승만의 정읍발언이 분단의 시초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한반도정세를 잘못 보는 것이며, 이런 주장을 편 브루스 커밍스의 이론이 틀렸다는 사실이 소련의 기밀문서로 모두 밝혀졌는데도 그의 잘못된 이론을 바꾸지 않는 거예요.

 

강규형: 교원 연수에서 제가 그러한 내용으로 교사들에게 강의를 했더니 소련문서가 조작된 게 아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믿기가 싫은 거죠.

 

대한민국사 서술의 기본전제와 시기별 강조점

 

김세중: 이제까지 좌파 역사관의 배경과 특징, 그 밖에 건국헌법을 명분으로 대한민국 건국이념을 왜곡하는 좌파 논리의 한계 등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대한민국 역사를 이해할 경우 전제돼야 할 명제 그리고 구체적으로 각 시대별로 강조돼야 할 점이 있는지 논해볼까 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해서 대한민국 건국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그 후 전개를 일종의 발전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사관이라는 의미에서 ‘대한민국사관’이라는 개념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다른 차원에서는 결국 건국 이후 대한민국 역사가 근대사회로 향해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근대화사관’이라는 말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먼저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전제로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이인호: 좌우에서 모두 인정하는 게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을 만드는 게 우리의 이상입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1945-48년 시점에서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데 있어 대한민국에게 필요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전까지 우리의 역사는 아시다시피 마르크스주의사관으로 보더라도 봉건주의 시대를 거쳐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거쳐야 되는데,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의 초입에 진입할까 말까 하는 상태였단 말이에요. 당연히 거기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 개인의 자유와 권리 등을 소중히 여기고 개인의 집합체로서 국민을 주인으로 삼는 그런 식의 민주주의란 말이에요.

결국 크게 말하면 자유민주주의이지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아니었다는 것이 대한민국을 만든 세력의 이상이고 주장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것에 공감하는 외부세계의 힘이 우리를 도왔고, 그래서 6․25 때 살아남았습니다.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싸워야 했던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이 헌법에 못 박혀 있지만 헌법조항 대로 자유가 만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러한 국가의 건설에 반대하고 건설 후에도 파괴하려고 하는 세력이 작동했기 때문에 그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정부가 강권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이야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주영: ‘대한민국사관’이라고 하면 좀 막연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대공황 이후 유럽에서 흘러들어온 공산주의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의 영향을 받아 미국의 자유주의체제를 부정하는 풍조가 휩쓸게 되자, 미국적 체제를 지키려는 보수적인 역사가들은 자기들의 역사관을 보수주의 사학(Conservative History), 또는 국민주의 사학(National History)이라고 불렀습니다. 또는 합의사학(Consensus history)이라고도 불렀는데, 마르크스주의가 계급적 갈등을 강조하고 있는 데 대해 미국에는 계급 간의 갈등보다는 합의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한 미국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에게는 국민주의 사학이나 자유주의 사학(Liberal History)이 필요합니다. 이는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의 위협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의 적들에 맞서 국가를 옹호할 수 있는 역사학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역사학계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 사상, 그리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주의 사상, 그리고 자유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는 민주제 사상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남시욱: ‘대한민국사관’이라는 용어 사용은 상당히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 과목은 국정이 아니라 검정이거든요. 다양한 사관을 가진 사람들이 쓰는 것을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검정을 채택하는 겁니다. 사관이 무엇이냐고 하면 굉장히 복잡한 얘기가 되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민중사관, 유물사관, 주체사관 등등이 아닙니까. 이주영 교수님 말씀대로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사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특히 민족사관의 경우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요즘과 같은 국제질서 속에서 민족사관을 내세우면 역사의 서술을 편협하게 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김세중: 자유민주주의 건설을 위한 싸움의 정당성이 좀 더 부각돼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특히 이주영 교수님은 대한민국사를 관통하는 사관으로서 자유주의사관 같은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남선생님께서는 특정 사관이 지칭하는 용어의 사용에는 유보적 입장을 보이신 것 같습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든 것은 ‘대한민국사관’이라는 용어의 문제보다는 대한민국 현대사 이해를 위한 어떤 출발점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주영: 남선생님 말씀에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교과서는 사관의 토론장이 아니라 국민교육의 수단이라는 것, 따라서 국가가 어떤 기본적인 지침을 제시하고 그 틀에 따르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영훈: 용어를 어떻게 하던 간에 대한민국의 건국사를 우리의 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요. 그런 점에서 역사학계가 전혀 합의를 못하고 있고 문제의식조차 매우 희박하다고 생각합니다.

 

깅규형: 적어도 자유민주주의적인 근대국민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됐는지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념적인 것은 충분히 논의된 것 같고, 팩트로도 48년 5․10선거의 의미를 높게 평가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평가가 별로 없습니다. 5․10선거는 당시 세계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도 선진적인 자유선거가 시행되었고 무소속이 대거 당선됐었죠.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터진 4월 3일의 공산폭동 문제는 그 뒤 일어난 제주도에서의 비극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것도 교과서에서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것은 48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베스트팔렌체제하에서 유엔 승인이라고 하는 부분은 국제법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고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큰 차이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것들부터 확실히 해두고 이야기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내용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현대사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이인호: 누가 어떤 역할을 했는가,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초 작업들이 무엇이었느냐를 보면 대외적으로 독립이 있고 대내적으로 국가건설이 있지요. 오늘 조간신문에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한 것이 잘못 아니었나”하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1948년에 소련의 반대만 없었다면 유엔의 결정대로 남북한이 공동 선거를 통해 통일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 한마디도 없죠. 이승만 박사가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에 간다니까 “뭐 하러 김일성을 만나러 갑니까. 스탈린을 만나면 만나지”라고 그랬다잖아요. 그게 맞는 말이죠. 스탈린에게 우리 선거를 허용해달라고 왜 못했습니까.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48년 건국의 의미를 독립의 의미로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그 이후 나라가 서고 부강해진 덕분에 나라 없는 가난한 백성의 설움을 모르고 산 사람들은 그 의미와 고마움을 모릅니다.

 

이영훈: 지금 국사학계의 일부는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진 이래 나라의 역사가 단절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국내는 일제에 의해 강점되었지만, 해외에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역사는 면면하게 이어졌다는 것이죠. 따라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의 건국일로 잡으면 민족사의 단절을 초래하게 된다고 하는 별별 희한한 논리들이 성행을 합니다. 더 나아가서 단군건국설이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극복해야 될 것은 다름 아니라 한국의 과도한 민족주의입니다. 민족주의로 구축된 거대한 문화의 체계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독립적으로 조명을 받기 힘든 실정입니다.

역사학자만이 아니라 정치학자, 사회학자들도 마찬가지에요. 2008년도 정치외교사학회에서 ‘건국60주년기념학술대회’를 하는데 제가 논문을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회 며칠 전에 통지가 오기를 ‘건국60주년’이 아니라 ‘정부수립60주년’으로 학술대회명을 바꾸었다고 하더군요. 어떤 정치학자가 항의를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신문이나 자료를 보면 ‘건국’이나 ‘정부수립’이나 다 같은 말이에요. 별다른 뜻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정치학자들이 모인 그 단체조차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건국’과 ‘정부수립’이 무슨 대단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법석을 떨었던 것입니다.

 

이주영: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인정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일입니다. 지금 역사학계와 시민단체의 일각에서는 대한민국이 1919년에 상해에서 세워졌다는 이른바 1919년 건국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느 한국사교과서에는 상해임시정부를 설명하기 위한 작은 고딕체 제목이 ‘제국에서 민국으로’라고 되어 있더군요. 1919년에 상해에서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넘어갔다는 말이겠지요. 이제는 역사학자들의 글에서도 대한민국이 1919년에 건국되었다는 말이 버젓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고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 조선의 탄생에는 건국이란 용어를 붙이면서도 유독 1948년의 대한민국 탄생에 대해서만은 정부수립이란 명칭만이 사용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국사편찬위원회의 어느 공청회 자리에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구성 제목들을 보니,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고려의 건국과 발전” 등등으로 표기하면서도 유독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건국이란 말 대신 정부수립으로 표기되어 항의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수정된 제목들을 보니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정부수립이나 건국이라는 표현 없이 “대한민국의 발전”으로만 되어 있더군요. 코미디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웃음)

1919년에 상해에서 세워진 것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1919년에 건국이 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왜 필요했으며, 또한 영토·국민·주권이 없는 경우를 어떻게 국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1919년 건국설은 대한제국 근대국가론과 함께 빨리 극복되어야 할 역사학계의 과제입니다. 결론은 1948년의 대한민국 탄생에는 건국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야 합니다. 당시 정부의 공식행사에 정부수립이란 단어가 나와 있지만, 그것은 건국과 같은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건국과 정부수립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남시욱: 교과서 집필에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도 못 쓰게 합니까? 2008년에 나온 지침인데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선언한다. 또한 유엔의 결의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유엔에 의해 한국정부로 승인되었음을 강조한다”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안 지키는 것이죠.

 

김세중: 이영훈 교수님께서 무엇보다 대한민국 건국을 우리 역사 속에 자리 잡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셨는데요. 대한민국 역사서술에서 건국이 지니는 중차대한 의미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건들이 뚜렷하게 부각돼야 한다는 점에 대체적으로 합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각론이라고 할까요. 각 시대별로 현대사에서 소홀이 취급돼 왔던 쟁점이 있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저는 이승만 시대와 관련해서는 반공체제 구축을 위한 치열한 노력 같은 것이 좀 더 떳떳하게 강조돼야 한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승만 시대는 반공과 관련해서 흔히 ’냉전 수구반동‘의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우파도 이승만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데 조금 유보적인 경우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영훈: 좌파들은 자꾸 ‘냉전논리’, ‘수구반동’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그럼 냉전을 한 것이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지난 20세기의 동서냉전은 결과적으로 인류역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역사 발전의 근본 동인은 개인의 자유라는 진리는 확인하는 과정이었지요.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공산주의체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인류에게 선사하였지요. 아직도 한국의 좌파들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적절히 타협하고 공존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인호: 냉전보다도 반공이 진보적인 의미를 갖지요. 공산주의를 막아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지 못하고 거꾸로 반공이 잘못됐다는 시각이죠. 반공을 잘한 거라고 해야 하는데 보수에서도 그게 아니라며 위축되는 것은 웃기잖아요. 공산주의가 본산에서부터 무너지고 나서도 그러한 자세를 갖는다는 것은 곤란하죠.

 

이주영: 지금 우리 국민, 특히 젊은 층에게 공산주의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평범한 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한국사 교과서 검정과정에 참여했다가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합격된 교과서 시제본 삽화 가운데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 1951)〉이 실려 있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이 임산부를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그림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심사위원들에게 삭제 수정하도록 출판사들에 지시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 그림을 그린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원일 뿐만 아니라, 그림을 그린 동기도 국제공산당의 요청에 따른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저는 제 주장을 관철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때 검정과정에 참여한 젊은 교수들이나 교사들의 태도는 제가 볼 때 공산주의를 전혀 금기사항으로 보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긴 이웃 일본이나 프랑스에도 공산당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로 정죄하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는 전체주의 국가로 정죄하는 것이 더 큰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인호: 말만 해서는 안 되고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까 제가 박정희정부 때 공산주의에 대한 교육을 너무 안 시켰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지만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래요. 왜 공산주의가 나쁜 것인지에 대해 배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 측에서 내보낸 선전물들은 지하의 운동권 교육을 통해 조직적으로 주입되었는데 말이죠.

 

남시욱: 공산당의 경우 헌법질서 준수를 서약한 유로공산당이 아닌 혁명주의적 공산당, 예컨대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우리나라 헌법상 반국가단체에요.

 

강규형: 우리나라 헌법상 전체주의는 일당독재체제이기 때문에 허용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좌파 쪽으로 공산 전체주의나 우파 쪽으로 파시즘 같은 게 허용돼서는 안 되죠. 그런데 현행 교과서를 보면 우파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좌파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 등의 내용이 없습니다.

 

이인호: 교과서에 이승만은 독재자이고 분단의 원흉이라고 매도된다고 하니까 소련에서 온 젊은이가 웃으면서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절반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는 말이지요. 스탈린은 남한까지 장악하려 했고, 이승만 박사가 스탈린과 싸워서 남한만이라도 지켜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고 있죠.

 

김세중: 선생님들께서도 비슷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만, 공산주의체제의 근원적 반인류성에 비추어 당시 반공은 최고의 국가행동규범 또는 국가윤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에 실패하면 다른 어떤 인간적 가치의 추구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반공체제가 과잉 작동하는 면도 있었고, 부당한 인권 침해를 동반했던 면도 있지요. 그렇다고 예를 들어 당시의 반공법 같은 것이 적지 않은 경우 문제점만 강조되고 일방적으로 매도되는 것은 너무도 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하버드대 윤리학의 대가인 팀 스켈튼(T. Scarton)이 DMZ를 방문한 후의 소감을 소개할까 합니다. “DMZ적 상황은 내 도덕적 이론에 도전을 던져준다. 도덕이란 조화를 목표로 한다. DMZ적 상황은 이것과 다르다. 합리적 타협이 어려운 상대방이나 적에 대해 우리는 어떤 도덕적 의무를 져야 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솔직히 이런 상황 아래서 이상적 윤리학은 소용이 없어진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윤리학만이 필요하다” 이것은 상황이 상당히 안정된 2008년에 그가 한 말입니다.

 

이인호: 반공법이 나온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쪽에서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이 좀 있긴 합니다. 최근 현길언 씨라는 제주 출신 문인이 조선일보(2013. 4. 10.)와 인터뷰했잖습니까? 그분이 『본질과 현상』이라는 계간지를 내는데 올 봄호를 보내줘서 읽어보니 제주 4․3사건에 관해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사건 당시 아홉 살이었답니다. 거기 보면 남로당이 주민들을 선동하고 그 배후였다는 것이 상세하게 증거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를 노무현정부 때 진상규명한다고 하면서 무고한 주민들이 당연하게 항의한 것을 정부가 잔학하게 진압했다고 결론 내렸거든요. 거기에 김달삼이 제주폭동을 일으키고서 그 중간에 해주 남로당 대회에서 자신의 공적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보고서 전문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지요. 그런 것 하나하나가 공산당 개입에 대한 무시 못 할 증거인데 노무현정부 때 대통령이 나서서 잘못했다고 사과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현재 교과서 논의에서 반대한민국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정권이 바뀌니까 역사를 거꾸로 바꾸려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들이야말로 우리같이 그 시대를 직접 산데다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관여할 틈도 주지 않고 대다수의 국민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권을 업고 권력으로 역사를 뒤엎었거든요.

 

강규형: 반공에 대해서 연세대 김명섭 교수가 좋은 논문을 썼어요. 요즘 반공에 대한 반대인 반(反)반공이 선(善)인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거라는 예리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반공이 과도한 측면이 있었을지는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반반공이 선이 될 수는 없는데 마치 그게 선인 것처럼 치부되고 있지요.

 

남시욱: 공산주의가 배척받는 이유는 반민주주의와 폭력성 때문이죠. 선거를 하지도 않고 반민주적입니다.

 

이주영: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젊은 층에게 공산주의는 별로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을 전체주의자들로 바꾸어 부르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개인과 국민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는 전체주의이기 때문에 공산주의를 반대한다고 말입니다.

 

이인호: 그뿐 아니라 공산주의는 본래부터 세계주의거든요. 국가 간의 장벽보다는 계급적인 연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중공이 큰 세력으로 부상하기 이전에는 소련공산당이 지령을 내리면 세계 공산당원들이 모두 따라 움직였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명령의 계보가 다른 겁니다. 그런데 그런 공산당을 제거하지 않고 어떻게 국가가 섭니까. 그런 기초적인 내용의 반공교육을 안 시켰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레닌이 그렇게 해서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겁니다. 다시 말해 반공을 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 탄생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김세중: 반공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는 말씀들인 것 같습니다. 이승만의 1공화국 시대 이후의 쟁점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권위주의 시대에 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이 시대는 ‘민주 대 반민주’라는 명분을 앞세운 구도에 비추어보면 엄청난 문제가 양산된 시대지요. 또 당시 추구됐던 ‘선건설 후통일’ 노선은 ‘반통일 세력’이라는 논란을 낳기도 했지요.

 

이인호: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봐요.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국민이 주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에 대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결국은 개개인이 모여서 된 국민 모두가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지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우상은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링컨이 말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세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참여도 좋지만 결과가 좋아야 하고, 그 전체를 위한 효과가 좋아야 하며 누가 주인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지만 형식논리에 너무 집착해서는 곤란합니다.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민족 구성원이 좀 더 사람답게 잘 살기 위한 통일을 해서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게 좋지 통일을 위해 국민이 모두 희생돼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6․25도 사실 통일을 명분으로 김일성이 저질렀지만 일어나서는 안 될 일 아니었습니까. 오히려 통일을 지연시켰죠.

그리고 역사라는 것은 항상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것입니다. 절대빈곤으로 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민주주의 구호를 외친다고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투표권을 주면 뭐합니까. 밥 한 그릇, 고무신 한 켤레에 표결권을 팔아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 투표권은 큰 의미가 없거든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목표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죠. 몇 가지 구호를 절대적인 것처럼 내세우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이죠.

 

이주영: 저는 이승만․박정희 이후의 시기를 ‘민주화 시기’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민주제의 핵심이 자유선거를 통해 집권자를 뽑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대통령 직선제는 1952년 시행되기 시작해 1972년 유신 직전까지 계속되었으므로 그 기간에 민주제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민주제는 기복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기를 ‘민주화 시기’로 규정한다면 나머지 시기들은 ‘독재화 시기’로 규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요즈음 민주화 세력을 산업화 세력과 대비시켜 대한민국 역사를 설명하는 풍조가 강한데, 그러한 단순대비 방식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산업화 세력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는 쉽지만, 민주화 세력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고 옥살이도 했는데, 민주제의 핵심인 자유선거와 그것을 제대로 시행할 환경을 만들기 위해 그런 엄청난 희생을 각오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민주화 운동을 했던 세력 가운데는 혁명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들도 포함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와 같은 고통스러운 민주화 운동이 없었던 대만이 민주화를 달성한 것을 보면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 운동은 급진주의 운동과 적지 않게 겹쳐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인호: 그와 관련해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시발점이 1948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4․19가 민주주의의 시발점이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대한민국의 헌법에서 민주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해놓았기 때문에 4․19 같은 지식인 의거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죠. 4․19는 부패와 부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가운데 그에 대한 항의를 직접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민주적인 시민의식이 성숙해서 표출됐다는 점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기점이지만 민주주의의 법적인 기틀은 이미 1948년에 만들어진 거죠.

 

김세중: 이주영 교수님께서 민주화 시기의 규정과 관련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승만, 박정희 어느 시기도 전체주의와는 완연이 구분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에의 권력집중도라든지 삼권분립 원칙의 빈곤성 등에 비추어 대체적으로 권위주의적 면모가 강했던 시대이고, 따라서 87년 이후를 민주화 시기라고 부르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48년에 제도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도입된 것은 틀림없지만 상당 기간 실천에서 미흡했던 것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영훈: 1948년 건국 당시부터 한국인들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훌륭하게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환상이라고 봅니다. 민주제 정치의 본질은 아까 이주영 교수님 말씀하셨듯이 정권교체를 전제로 한 자유·보통선거이지요. 그러한 자유·보통선거는 건국 초부터 어김없이 실시되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권위주의정치였습니다. 유력한 정치지도자의 카리스마가 국민을 동원하는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국민을 정치에 동원하는 유일한 힘과 권위는 집권자의 카리스마였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카리스마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적 교양의 중산층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자유·보통선거가 실시되더라도 정권교체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습니다. 그러한 권위주의정치가 건국 이후 근 40년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지요. 그 시기는 한국인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의 카리스마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적 교양의 중산층이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1987년 이후가 되어서야 진정한 의미의 민주제 정치가 가동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 40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를 제약했던 또 하나의 조건은 정치의 분열이었습니다. 예컨대 건국 초기부터 정치지도자들은 신생국의 정부형태를 둘러싸고 대통령중심제냐 의원내각제냐의 대립을 벌였습니다. 대통령중심제로 하더라도 대통령 간선제냐 직선제냐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이런 대립에 타협접이 없었습니다. 정부형태를 둘러싼 대립은 크게 보아 1963년 제5차 개헌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1960년의 4·19민주혁명은 타협을 모르는 무한 정쟁으로 빚어진 비극이기도 하였습니다. 4·19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부통령직선제였습니다. 1950년대 한국 정치는 헌법상 아무런 권한이 없는 부통령을 국민이 직선하는 이상한 제도를 보유하였지요. 돌이켜 보면 참 납득하기 일입니다. 그럼에도 엄연히 그런 모순의 제도를 운영하였지요. 56년, 60년 선거를 둘러싼 여야 간의 최대 쟁점은 결국 부통령 직선이었습니다. 부통령제는 헌법을 초안한 유진오 씨가 만든 것인데, 정계의 원로를 대우하고 정권을 안정시키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56년 대선 때 신익희 야당 대통령 후보가 갑자기 사망했어요. 그런데 장면 부통령 후보는 끝까지 선거를 치렀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에게 대통령 후보도 없는데 왜 부통령 선거를 끝까지 치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은 이미 나이 80이 넘어서 곧 죽을 사람이니까 부통령 자리라도 우리가 차지해서 장기독재를 막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최근에 나온 ‘귀태’ 발언과 거의 같은 수준의 정쟁이지요. 그렇게 아무 실권도 없는 부통령 자리가 정권 승계에 핵심 자리로 과잉 부각되면서 끝을 모르는 무한 경쟁을 벌였던 것이 당시 한국 정치의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야당이 개헌을 주장하는 내각책임제는 한국 정치를 귀족과두적인 붕당정치로 몰고 갈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했지요. 4·19 이후 민주당정부 하에서 벌어진 붕당정치를 보면 그의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후 박정희가 쿠데타를 해서 집권을 한 다음 1963년에 개헌을 합니다. 대통령 중심제와 직선제를 복원하고 부통령제를 폐지하였지요. 그런데 당시 야당은 그에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기고 그들의 오랜 정강정책인 내각책임제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데도 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죠. 다시 말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대통령중심제로 정부형태를 확정하는 것은 건국 후 15년만인 1963년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정부형태를 포함하여 민주정치의 제도 하나하나를 모색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건국 후 40년의 역사였습니다. 그 기간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민적 중산층도 존재하지 않고 해서 실타래처럼 얽인 ‘나라만들기’의 과제는 권위주의정치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건국 초부터 민주제 정치가 완전하게 작동하지 않은 것은 다 그만한 역사적 사정과 제약조건에 의해서이지요. 오히려 우리가 새삼 주목할 점은 그 과정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어김없이 치렀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유·보통선거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정치는 제도적으로 부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 등입니다. 그런 시각에서 건국 이후 한국의 민주제 정치의 역사를 적극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세중: 지금 말씀에 덧붙여 특히 강조돼야 할 것은 비교사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건국과 함께 즉각적으로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공동체의 형성이 가능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지요. 사실 비교사적으로 보면 불과 60여 년 사이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경우는 정말 찾기 힘들지요. 선진국들도 오늘 같은 체제를 만드는 데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습니까. 사실 우리는 건국과 전쟁의 파천황(破天荒)의 혼란을 뒤로하고 보기 드물게 선진기술과 자본의 도입으로 후발국의 이점을 잘 살리는 반면 주로 정치적 혼란과 쇠퇴로 대표되는 후발국의 불리한 점을 극복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정말 적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여기까지 온 거죠. 정말 비교사적 이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영훈: 일본의 기무라 칸(木村幹)이라는 정치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2차 대전 이후 약 120개 후진국이 독립을 했는데, 그 가운데서 정권교체의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전제한 보통·자유선거를 실시한 나라는 7개국에 불과해요. 그것도 좀 하다가 그만 둔 경우가 많고 해서 지속적으로 선거제도를 유지한 나라로서 한국은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합니다.

 

남시욱: 사실 비교사적으로 보면 1950-60년대 초에 걸쳐 전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군사쿠데타의 물결이 일었습니다. 5․16군사쿠데타도 예외는 아니었죠. 그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독립된 개도국 국민들의 기대 수준은 높아가는 반면 민간정치인들의 정치력이 이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개도국의 어느 나라든 가장 잘 조직된 조직이 군부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게도 파도처럼 제3세계를 휩쓴 군부쿠데타 중 거의 유일하게 경제성장을 한 나라는 우리나라예요. 그런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5․16의 정치적 의미와 경제발전을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있게 서술하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합니다.

 

김세중: 특별히 박정희라는 인물의 리더십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정희는 국가폭력기구를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남용했지요. 그러나 동시에 나름대로의 사명감으로 폭력에 의해 뒷받침된 강력한 국가권력을 창조적 용도로 사용한 데에서 보기 드문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균형적 시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영훈: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함에도 그 시대의 한국정치가 타협과 조정을 모르는 근본주의적 대립을 안고 있었다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할 때 야당과 비판세력의 저항은 얼마나 격렬하였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대한 저항이 그렇게 컸던 것이지요. 박정희는 결국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비판세력을 진압했습니다. 박정희는 처음부터 독재자였던 것이 아니라 이렇게 근본주의적 대립을 돌파해 가면서 독재자로 변신해 갔던 거지요.

개발정책의 노선을 둘러싸고서도 마찬가지 대립이 일었습니다. 박정희의 대외개방적 수출주도형 개발정책에 맞서 야당은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하는 대중경제론을 들고 나왔지요. 이렇게 개발정책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방향의 대립이 가속되면 평화로운 정권교체는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는 의당 1971년의 대선 이후 물러날 채비를 했어야 합니다만, 정권이 대중경제론을 주장하는 야당으로 넘어가서는 지난 8년간 이룩한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1972년 박정희가 감행한 10월 유신도 박정희의 내면에서는 거의 불가피했던 공적인 선택이었고, 거기에는 박정희의 개발정책에 사사건건 대립해 온 야당 정치지도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그 시대의 정치를 민주냐 독재냐의 이분법으로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한 시대를 같이 살면서 현명함과 어리석음으로, 공리와 사욕으로 뒤얽혀 상호작용하였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독재자이고 김영삼과 김대중은 민주화투사라는 이분법만큼 허소한 형식주의적 역사인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인호: 어느 나라든지 역사는 단계를 거쳐서 발전하는데, 그 단계가 압축될 수는 있지만 완전히 건너뛸 수는 없다고 봅니다. 건너뛰게 되면 도로 주저앉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한민국 건국이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성격을 합친 진정한 혁명이라고 보는 시각입니다. 혁명이라고 하면 대개 대중이 봉기해서 이룩하는 것을 상상하는데 그것은 겉모습이고, 혁명의 진짜 의미는 주체세력이 교체되고 국가이념이 달라진다는 거거든요. 우리나라는 그 일이 바로 1948년에 일어났습니다. 건국은 1945-48 사이에 일어난 과정이라고 보는데, 그 사이에 일본이 지배하던 나라가 미 군정체제 아래 놓였다가 마침내 우리 국민 스스로 지배하는 나라가 됐습니다. 물론 반쪽만의 독립이긴 했지만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나 그 이전까지의 정치체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민주공화국의 법적 기틀이 마련되었단 말이에요.

그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밑으로부터 봉기해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던 일제를 연합군이 전쟁을 통해 소멸시키고, 또 정신적으로 해외와 국내의 독립운동을 통해 길러온 혁명의지가 결집되어 결실을 본 결과 대한민국이 탄생되었거든요. 그래서 미국의 독립혁명처럼 외세의 지배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고, 제헌헌법을 통해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e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1789)’과 맞먹는 법적 토대를 만든 것이지요. 그때 만들어진 헌법적 토대가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 살아있는 겁니다. 프랑스의 경우도 혁명의 성과가 국가적인 틀로 제도화되어 실제 민주공화국으로 굳건히 자리 잡을 때까지는 약 80년이 걸렸단 말이에요.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열악한 상태에서도 프랑스에 비해 굉장히 빠른 시일 내에 제도적 민주화를 달성했어요.

사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에서는 민주공화국 구상이 그전부터 있었지만 일반 서민들은 75% 이상이 문맹이고,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이라 자주니 선거니 하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거든요. 해방 당시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보다도 우선 굶어죽지 않고 얼어죽지 않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고 혼란을 극복해서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단 말이에요. 프랑스의 경우도 1815년에 왕정복고가 있었고 1830년, 1848년 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태어나지만 곧 루이 나폴레옹의 황제정 치하가 됐잖아요. 어떻게 보면 루이 나폴레옹이 해낸 경제발전 도약단계를 박정희 정부에서 거쳤다고 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상당히 압축해서 해낸 거죠.

그러니까 국민의 능력이나 정치의식, 경험과 경제력 등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 거기에 걸맞은 정치체제가 만들어지는 거지 이념만 앞세운다고 되는 건 아니거든요. 전제정 체제에서 곧바로 공산주의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로 가겠다고 하다가 결국 극심한 전체주의 체제가 된 게 스탈린 치하 러시아 사례였잖아요.

 

이주영: 18세기 이후 세계는 수없이 일어나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었지만, 근현대사에서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형은 몇 가지 안 됩니다. 기껏해야 자유주의혁명, 산업혁명, 민족주의혁명, 사회주의혁명 정도지요. 우리의 경우를 보면 혁명의 결말이 대체로 난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주의혁명은 북한에서 시도되었으나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판가름이 났고, 민족주의혁명은 국제관계 때문에 통일국가 건설이 어려우니 당장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래도 남한 땅에서는 자유주의혁명과 산업혁명은 이룩했습니다. 대한민국은 혁명의 시대에 잘 적응했고, 그 결과 제대로 된 역사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교육의 개선책

 

김세중: 한국 현대사를 보는 데 있어 현실적, 비교론적 관점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박정희시대 우리가 경험한 굴곡의 의미도 여러 각도에서 조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대사 인식의 문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부터는 역시교육의 개선 방안에 대해 의견을 주셨으면 합니다. 먼저 역사문제에서 제기된 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옹호세력의 대응이랄까요, 이런 점에 대한 평가를 해주실 수 있는지요.

 

이인호: 현재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인식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대응이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 한쪽에서 우리가 이룩해온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공공연하게 전쟁을 선포하며 달려들고 있다는 것을 아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조금 전 말씀드렸듯이 역사논쟁은 몇 갈래가 서로 얽혀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까 이주영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69년에 발표된 ‘중고등학교 국사교육 개선을 위한 기본방향’이라는 보고서에는 민중사관, 민족사관 등이 강조됐는데, 당시 거기에 참가한 분들 중 몇 분은 반대한민국적인 시각에서 그것을 작성하신 분들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반대한민국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악용될 수 있는 소지는 있었지요. 순수 학문적인 견지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따랐던 사람 모두를 종북이나 친북으로까지 볼 수는 없지만 학문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과 상관없이 체제투쟁 차원에서 역사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공산주의 진영의 아주 오래된 전통이고 기술이거든요. 그러한 점들이 결합되면서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국사교육에 의도적으로 개입해 들어갑니다.

제가 있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언제부터 역사교육이 이렇게 됐는가를 자세하게 조사했는데 5, 6, 7차 교육과정의 역사집필 지침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종의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아까 남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본래 교과서는 사회구성원들, 기성세대 모두가 상식으로 알고 있고 전혀 논란이 될 수 없는 사실을 중심으로 학계의 원로들이 집필을 해서 후속세대에게 역사를 전승한다는 것이 상식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저도 50대였는데, 윗세대 분들이 역사를 쓰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10여 년 아래의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의도적으로 반대한민국적인 시각을 가지고 교과서 편집작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니까 편향된 역사교육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남시욱: 대응과 관련해서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육 강화를 위해 대학수능시험에 국사를 필수로 포함시키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이야기하기 이전에 주무부서에서 먼저 연구를 해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이주영: 보충하면 제 기억으로 노무현정부 때는 한국사가 고등학교에서 선택과목이었지만, 이명박정부 때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국사 필수문제는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장관과 김형오 국회의장이 강력히 주장하고 중앙일보가 뒷받침을 했지요. 그런데 또다시 박근혜정부가 필수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필수든 선택이든 필요에 따라 결정할 일이지만, 현재의 역사 교과서에는 이념적 편향 등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선 교과서부터 제대로 고쳐놓고 필수과목으로 하든 수능 필수로 하든 해야 합니다.

 

남시욱: 현재 서울대는 수능시험에서 국사를 필수로 하고 있지 않습니까?

 

강규형: 서울대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수능에서 국사가 필수인데,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서울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이 국사를 선택하면서 다른 학생들이 국사를 채택하는 비율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서울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학은 국사가 교양 선택과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가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것을 추진한다고 발표했지요.

 

김세중: 현재 역사교육 개선책으로 가장 많이 논의되는 것은 수능 필수화인 것 같습니다. 대통령께서 언급함에 따라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남선생님이 언급하셨듯이 갑자기 탑다운(top down) 형식으로 제기되는 데서 오는 행정적 합리성의 결여 문제 그리고 이주영 선생님이 언급하셨듯이 가르칠 내용에 대한 준비 없이 교육 강도만 높이려는 데서 오는 부작용 등 만만치 않은 쟁점이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강규형: 국사의 수능 필수화는 즉흥적입니다. 이명박정부가 실수했던 것도 갑자기 국사교육을 필수화한다고 이야기한 후 모든 걸 한꺼번에 추진하다 보니 난리가 났었거든요. 나온 지 얼마 안 되는데 교과서를 또 개정한다는 것도 무리였고, 정부가 개입한다고 해서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8월에 새 교과서가 나오는 상황에서 수능 필수화를 위해 또 교과서를 개정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저변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에서 계속 개정을 해봤자 단기간에 근본적으로 좋아질 것 같은 느낌도 안 듭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80년대 사고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능 필수화를 성급히 하게 되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추진하는 분들 이야기로는 수능 필수화를 위해서는 적어도 3-4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부터 준비해나가면 된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로드맵이 있는지도 우려스럽습니다. 7월 26일자 문화일보 박민 사회부장의 "국사 필수의 선행조선"이란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난관이 너무 많은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세중: 그렇다고 정부에서 현 체제로 그냥 가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이영훈: 개인적으로 수능 필수화에 반대하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수능이라는 게 대학입시제도이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소위 사회탐구 15개 과목을 선택해서 대학 입시를 보는데, 지금까지 이야기가 됐지만,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왜곡은 뿌리가 깊어서 입시제도의 문제로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먼저 당국자들이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이해를 하고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10년간, 역사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윤리 등 사회탐구 과목에서 총체적으로 국민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종합적으로 점검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 단지 역사교육에 대한 시간이나 성의가 부족해서 발생한 문제인 것처럼 접근해서는 곤란하지요.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오랫동안 연구를 해서 종합적인 대책을 세운 다음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대통령이 불쑥 한마디 하니 두 달도 안 되서 교육부나 교육단체가 입시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습니다.

교육정책과 관련해서는 교육부와 산하에 각종 위원회와 단체가 있고, 최종적으로는 사범대학의 교수들을 위시하여 역사교육정책을 독점적으로 주도해 온 사람들이 거대한 기득권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육정책을 바꾼다는 것은 이 기득권의 생태계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예요. 조금 전에 이인호 선생님이 지적한대로 제5, 6, 7차 교과과정 이래 지난 20, 30년간 이 집단이 그러한 교육을 해 왔어요. 책임이 큰 거죠. 그 사람들이 교육부, 산하 교과서 관련 위원회, 나아가 청와대 교육수석실 등의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어요. 그런데 임기 5년의 대통령이 몇 마디 했다고 바뀔 수 있겠어요. 대통령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너무 현실을 모른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는 교육정책이나 교과과정을 바꾼다는 것은 어렵다, 솔직히 말해 비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사를 수능시험으로 필수로 바꾼다든가 대학의 교양 필수로 바꾼다고 하는 것 겉치레만의 개혁일 뿐입니다. 뿌리는 따로 깊이 박혀 있는 거죠.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국민을 상대로 열심히 현 역사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해 가면, 언제가 진정한 개혁의 기회는 찾아오리라고 믿습니다.

 

남시욱: 심각성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한 비판도 필요하지만 관계 부서가 제대로 하지 않은 부분을 점검해야 되지 않는가 합니다.

 

김세중: 여하튼 수능 필수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견들이시군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검인증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어떻기에 문제의 소지가 많은 교과서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주영: 한국사교과서를 문교부가 주관해 국정으로 만들었을 때는 교수들 가운데 필자를 선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비판을 많이 받자 교수들이 집필자로 나서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검인정 제도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즉 출판사들이 임의로 필자들을 선정해서 교과서를 만든 다음 심사를 받아 교과서로 인정받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현재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한 교과서를 보통 7명 정도의 필자들이 맡아서 쓰는데, 교수 필자 수는 줄어들고 교사 필자 수는 늘어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교과서는 필자 전원이 교사인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서 복잡한 이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제 개인 의견으로는 집필자들을 전원 교수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교과서 제작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가운데는 출판사들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교사들을 필자로 많이 내세워야 판매하기 좋을 것이라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게다가 출판사 직원들이 선택하는 삽화와 통계, 설명문 등의 영향을 받아 이념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평소에 교과서의 이념적 편향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미국과 같은 지방별 교과서 편찬을 예로 듭니다. 미국에서 주별로 교과서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도 도별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도의 교육위원회가 해당 도민을 자유주의 이념으로 교육시키고 싶으면 그런 방향에서 교과서를 만들게 하고, 다른 이념으로 도민을 교육시키고 싶으면 그 이념에 맞는 교과서를 만들어 배포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각 도의 교과서는 자유주의 교과서, 사회주의 교과서, 파시즘 교과서 등등으로 달라질 겁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도의 교과서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도를 떠나 다른 도로 옮기면 되는 겁니다. 예전에 이회창 총재가 정치적으로 우리나라를 작은 연방제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은 그래서 나온 게 아닌가 합니다. (웃음)

 

이영훈: 당면한 실질적인 문제는 앞으로 출간될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널리 보급되어야 하는 겁니다. 좌파들이 기대하는 대로 채택률이 0.01%가 돼서는 곤란하지요. 채택률을 높일 수 있는 대중운동을 어떻게 펼칠지 고민해야겠습니다.

 

강규형: 그중에도 대한민국적 사관을 가진 교사들이 있을 거고, 학교 운영위원회도 있기 때문에 채택률이 10%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0.01% 이야기는 일본에서 후쇼사 교과서의 채택률을 0.01%로 만들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모 교수가 주장해서 나온 겁니다. 후쇼사 교과서와 교학사 교과서를 같은 부류로 보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요.

 

김세중: 굳이 표현하면 한국 좌파 교과서야말로 자기비하적 사관을 반영한 책들이기에 퇴출대상 1호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우 민감한 주제이기는 합니다만 역사교육 개선을 위해 국가가 어떤 식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이영훈: 아까 이주영 선생님께서 미국의 예를 말씀하셨지만, 선진국에서 국민에 대한 자유민주주의 교육은 국가의 주도 하에 매우 체계적으로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좌파 역사학자들이 미국의 역사교육을 수정하려는 운동을 벌이다가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의회의 견제에 걸려 좌절한 일이 있습니다. 인디언, 흑인 등의 인권도 좋지만 자유이념에 입각하여 정립된 미국의 역사를 훼손해서는 결국 미국의 정치적 통합자체가 해체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은 위정자들에게는 그러한 의식이 없어요. 현실적으로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1년의 공교육 10년 동안에 무엇이 교육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습니다. 제가 해마다 3월 신학기에 서점에 가서 초, 중, 고등 교과서를 모두 사 모은 적이 있는데요, 어딜 봐도 미국과 같은 자유민주적 국민교육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강규형: 국사교과서로 한정을 한다면 이제는 국정 교과서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국사교과서 편찬은 교육과정평가원에서 국사편찬위원회로 다시 이관이 됐습니다. 현실적으로 위원회에서 상당히 세심하게 집필기준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옛날에는 그것을 편수지침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로 나온 사료나 자료, 비밀해제 된 자료라든가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업데이트해서 집필기준에 포함시켜야 하는데, 현재의 기준이 아직도 80년대 기준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현행 거의 모든 교과서가 분단의 책임을 이승만과 미국, 남쪽에 지우고 있습니다. 집필기준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을 근거로 모든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새로 나온 소련의 자료를 보면 단정과 분단은 스탈린과 소련, 북쪽이 먼저 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그런 집필기준을 세워주지 못하니까 교수들이나 교사들이 멋대로 자신들이 아는 것만 써서 분단의 책임이 미국, 이승만, 남쪽에 있다고 하는 것이죠.

또 지학사 교과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과서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공적이고 남한의 농지개혁은 대단히 불완전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 역시 북한의 토지개혁이 그렇게 성공적이었다면 북한의 농업이 왜 저 모양인지 설명돼야 하거든요.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실상 대실패한 정책인 반면, 한국의 농지개혁은 성공작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영훈: 그 기준을 만들 위원회를 정부가 강한 의지를 갖고 그야말로 학제적으로 구성을 해야 돼요. 이것은 이른바 국사학자들이 독점할 영역이 아닙니다. 현대사는 다양한 학문의 학제적 교섭으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사, 정치사, 외교사 등 다양한 학자들이 참여해야 하고 집필기준안을 마련하는 학제적 위원회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게 정부가 할 일인데,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겠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만큼 정부의 강한 개혁 의지가 필요한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이인호: 1990년대 초 서중석 교수가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안 마련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역사교과안에 관한 파동이 서너 번에 걸쳐 있었더라고요. 그때 갑작스런 변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냥 나왔습니다. 그리고 출제나 심의문제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수능이나 한국사검정시험 출제를 젊은 전문가들한테만 맡길 게 아니라 국민의 여론을 대표할 수 있는 국민 회원, 또는 그 시대를 산 학술원 회원 등 그 시대를 직접 살아온 은 세대들이 참여해서 평가하는 장치를 만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필기준안에 논란이 되는 내용이 들어가면 안 되겠죠.

 

김세중: 말씀들을 종합하면 현실적으로 최소한 국가는 교과서 집필에 학제적 접근이 가능 하도록 하고, 동시에 원로학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한편, 특히 편수지침의 균형을 찾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 같군요.

 

이주영: 대한민국은 자유경쟁 체제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국가이므로 필수과목을 없애고 모든 과목을 선택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중고등학교이건 대학이건 간에 학생들이 필요한 것을 찾아 수강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사도 당연히 선택과목이 되어야 합니다.

 

강규형: 교사들 재교육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이주영: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김세중: 오늘 역사인식 그리고 역사교육, 구체적으로는 좌파 역사인식의 실체, 대한민국사가 서술돼야 할 방향, 그리고 역사교육의 개선 방안 등을 놓고 장시간 심도 깊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 기대됩니다. 장시간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세 분 원로선생님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