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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5 05:37 , 조선일보
아들 왕좌 앉히려 남편 밀어내고 反元 펼친 공민왕 폐위 명령…
30여년간 무소불위 권력 행사, 고려에선 奇氏
일족 횡포 자행
"貢女 중단 기여했단 기록 없어… 고려에 긍정적 영향은 없었다"
TV 드라마 '기황후'가 인기 상한가를 치고 있다. 지난 25일 방영분은 시청률 28.6%를 기록해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드라마
'기황후'는 고려 여인으로 당시 세계 제국 원나라의 황후에 오른 실존 인물을 타이틀로 내세우고 있지만, 극적 재미를 위해 역사적 사실보다는
소설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사료(史料)에 나타난 실제 기황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공녀에서 제국을 호령하는 황후로
기(奇)황후 관련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중국 측 사료인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등에 내용이 나온다. 태어나고 죽은 때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1333년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에게 차(茶)를 올리는 궁녀가 됐다는 기록에서 이때를 10대 중반으로 가정한다면 적어도 131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황후는 1335년 황제 순제(順帝)의 후궁이 되었다. 황후 타나시리는 기황후를 질투해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기황후는 훗날 황제가 되는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은 이듬해인 1340년 제2황후가 되고 1365년 제1황후에 오르며 30년 이상 원나라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공녀에서 제국을 호령하는 황후로
기(奇)황후 관련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와 중국 측 사료인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등에 내용이 나온다. 태어나고 죽은 때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1333년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황제에게 차(茶)를 올리는 궁녀가 됐다는 기록에서 이때를 10대 중반으로 가정한다면 적어도 131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기황후는 1335년 황제 순제(順帝)의 후궁이 되었다. 황후 타나시리는 기황후를 질투해 채찍으로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기황후는 훗날 황제가 되는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은 이듬해인 1340년 제2황후가 되고 1365년 제1황후에 오르며 30년 이상 원나라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 드라마 ‘기황후’에서 기황후 역할의 하지원(사진 왼쪽)과 행주 기씨 종중이 소장한 기황후 초상화. /MBC 제공
◇황제 폐위 추진… '기씨 고려' 만들기 시도
기황후의 권력은 원의 속국이던 당시 고려에서도 막강했다. 순제는 기황후의 아버지를 비롯해 조상 3대를 모두 왕으로 추존했다. 오빠 기철(奇轍)은 공민왕에게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았다. 당시 기씨 가문은 고려 왕실과 동격이었다. 기씨 일족은 기황후의 권력을 배경으로 백성을 죽이고 남의 아내를 빼앗는 등 횡포를 자행했다. 기황후는 한때 "모든 나의 친척은 세력을 믿고 남의 밭과 노비를 빼앗지 말라. 만약 어김이 있으면 반드시 죄를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 처벌을 지시하지는 않았다.
기황후는 반원(反元) 정책을 편 공민왕의 폐위를 명령하기도 했다. 공민왕이 기철 일파를 주살한 후인 1362년 기황후는 황제의 명령을 통해 충선왕의 서자인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국왕에 임명하고 자신의 조카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왕위 계승권자인 원자(元子)로 삼았다. 당시 고려를 지배한 원은 충렬·충선·충숙·충혜왕 등 몇 차례 고려 왕을 폐위시키고 새 왕을 세웠지만, 왕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국왕 후계자로 임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1363년 최영과 이성계가 덕흥군이 이끌고 온 1만명 군대를 물리치지 못했다면 고려는 '기씨 고려'가 됐을지도 모른다.
◇"고려 독립성 부정한 친원 세력 중심"
기황후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는 "공녀 출신으로 세계 제국의 황후에 오른 기황후 개인을 높이 평가하는 인식도 있지만 이는 당시 시대 상황을 백지로 만드는 것으로 역사적 평가는 아니다"면서 "기황후는 고려 출신이면서도 고려의 독립성을 부정한 친원 세력의 배후이자 중심인물"이라고 말했다.
순제 때 원으로 보내는 공녀가 중단된 사실을 들어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긍정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강한 교수는 "기황후가 공녀 중단에 기여했다는 기록은 없다"면서 "당시 관점에서나 지금 관점에서나 기황후가 고려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은 없다"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