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중국을 통해 북한의 핵 개발 위협을 중지하려고 하는가? 그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당시 이뤄진 미국 지도부와 중국 지도부 간의 대화록 속에서 찾을 수 있다.
1971년 1월 7일 헨리 키신저 안전보장보좌관의 베이징 비밀 방문에서부터 시작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대장정 기록은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닉슨 독트린 파문은 한국의 경우 10월유신으로 이어졌으며, 북한 역시 헌법 개정을 통해 김일성 평생 독재체제로
치닫는다.
사실 닉슨 독트린으로 명명된 미국의 세계 전략이 중국 지도부를 통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한반도는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다. 이유는
냉전 당시 한반도는 동서 이데올로기가 정면 충돌하는 최전선인 동시에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은 적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닉슨
대통령 방문 당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를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 북한의 핵 개발 문제를 맞아 3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이후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미ㆍ중 지도부의
솔직한 의향을 되새길 수 있는 한반도 관련 양국 정상의 대화 내용을 발췌해 살펴본다.(참고:본 기록은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 당시 미·중
수뇌부의 대화록에 기초한 것으로, 미국 안전보장 공문서관(National Security Archive) 미국국립공문서관(National
Archive)에 수록된 것이다. 이 대화록은 기밀해제 조치에 따라 세상에 알려졌다. 닉슨 대통령은 1972년 2월 21일부터 28일까지
베이징을 방문, 모두 8차례의 대화록을 남겼다.)
1. 1972년 2월 21일 닉슨-마오쩌둥 대화록
▲닉슨:중국은 미국의 영토를 위협하지 않고 있으며, 미국 역시 중국의
영토에 대해 욕심이 없다.
▲마오쩌둥:우리는 일본과 한국을 위협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2. 1972년 2월 22일 닉슨-저우언라이 제 1차 회의
▲저우언라이:닉슨 대통령, 우리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원조는 북한에 대한
원조와는 전혀 다르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다. 한국전쟁 중에 우리가 북한을 원조한 것은 당시 트루만 대통령이 우리로 하여금 (북한을 도울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트루만은 제 7함대를 타이완에 보내 우리가 타이완을 통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직접 압록강 상류까지 쳐들어왔다. 당시 우리는 성명을 발표, 중국이 막 해방된 상황이지만 만일 미군이 압록강까지 온다면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트루만의 군이 압록강에 가까이 왔을 때 우리는 (경고했던) 발언을 지켜야만 했다. 우리는 당시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은 군을 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닉슨 대통령) 당신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결국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된 뒤 (미국은)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각오를 가졌다. (물론) 한반도가 당했던 당시의 인적·물적 피해는 베트남에 비하면 상당히 적다고
볼 수밖에 없다.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인적·물적 피해는 모두에게 좋지 않다. 그런 곳(베트남)에서 서로 대결하면서 막대한 정력을 낭비하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철수하는 게 좋다.
▲닉슨:(현재 1972년은)제 2차 세계대전 이후 1세대가 지난 시기이다.
그동안 미국은 두 개의 전쟁을 경험했다. 한국과 베트남이다. 몇 차례 강조했지만 20세기 들어 미국의 모든 세대는 전쟁을 경험했다. 1세대는 제
1차 세계대전, 2세대는 제 2차 세계대전, 50년대는 한국전쟁, 60년대는 베트남전쟁. 한 세기에 무려 4개의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저우언라이 웃음)
3. 1972년 2월 23일 닉슨-저우언라이 제 2차 회의
▲저우언라이:한반도에 관한 당신(닉슨)의 생각은 잘 알겠다. 제 1은
대통령의 공식정책으로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할 용의가 있다는 점과, 제 2는 극동의 평화에 유해하다는 측면에서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 미국측의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남북이 함께 대화를 하도록 하면서 (한반도에서) 평화를 지킬 수
있을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하는데….
▲닉슨:중요한 사실은 미국과 중국 양쪽이 동맹국(남한·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1953년 부통령 자격으로 세계를 돌아다닐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에게
전하는 장문의 메시지를 나에게 위임했다. 이승만은 북진 공격을 항상 생각한 사람이다. 나는 당시 “북진 통일은 안된다. 북진을 할 경우 미국은
결코 도와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악역을 맡았다. 내가 그러한 뜻을 전하자 이승만은 눈물을 흘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바로
이승만의 북진 통일 의지를 중단시킨 사람이다. 지금의 얘기는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이자 부통령 자격이었던 내가 처음으로 하는 비화이다.
▲저우언라이:그랬던가? 당신에게 듣는 이승만의 성격은 내가 들은 여러가지
사실과 일치한다.
▲닉슨:어디가 어떻게 일치하는가?
▲키신저:(저우언라이 당신은 이승만에 대해) 여러가지 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저우언라이:그로부터 수년 뒤 이승만은 쫓겨났다.
▲닉슨:북이나 남이나 예외없이 모두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나는 그러한 충동적이고 전투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가 서로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서로(남한·북한) 모두에 영향력을 행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에서 우리가 서로 싸움을 벌인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다. 한 번은 일어났지만 두 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된다.(저우언라이)
수상과 내가 힘을 합치면 일(전쟁)을 막을 수 있다.
▲저우언라이:서로가 남북협상을 촉진하도록 하자.
▲닉슨:적십자회의와 정치협상을 통해서 하자.
▲저우언라이:(국경문제에 대한 얘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 쪽에는 높은 산을 경계로 천지라는 호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만주족들은 천지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북한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호수를 두 개로 나눠서 국경선으로 삼고 있다.
4. 1972년 2월 24일 닉슨-저우언라이 제 3차 회의
▲저우언라이:(베트남 문제를 집중 거론한 뒤) 다음은 한반도
문제이다.
▲키신저:한반도 문제인가?
▲저우언라이:우리는 미국이 벌이는 한국에서의 점차적인 미군 삭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닉슨:벌써 3분의 1은 삭감하고 있다.
▲저우언라이:그러나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갈 경우 긴장이 높아질
것이다.
▲닉슨:일본이 한국에 개입할 경우, 미국과 중국 간의 이익에 어긋날
것이다.(이하 3행 삭제)
(유민호 일본 산업경제연구소 안보관련 연구원 silkroad100@hotmail.com)
주간조선 2003년
4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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