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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日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 옹 인터뷰

이강기 2015. 10. 9. 11:05

1945년 ‘日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 옹 인터뷰

 

장원재 특파원

 

동아일보 

 

입력 2015-08-20 03:00:00 수정 2015-08-20 08:11:42

 

 

 

[일본 양심, 日帝 만행을 고발하다]
“살아있는 포로 피 빼낸뒤 바닷물 주입… 군의관 눈빛, 인간이 아닌 흡혈귀였다”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의 유일한 산증인인 도노 도시오 옹이 사건 당시 숨진 미군 포로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려 70년 전의 일인 데도 그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후쿠오카=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해부 실습실 바닥 흥건한 피를 내 손으로 닦아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살충제와 섞어 모기약으로 쓰겠다면서 피를 챙기던 일본 군의(軍醫)의 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흡혈귀의 것이었다.”

도노 도시오(東野利夫·89) 옹은 70년 전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1945년 벌어진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용어 설명)의 유일한 산증인이다. 그는 젊었을 적 겪었던 끔찍한 일 때문에 평생 불면증과 자책감에 시달려 오면서도 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희생자들을 추모해 전쟁의 상흔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사건 추적에 매달려 왔다.

종전 70년을 맞은 올해 일본 사회의 또 다른 양심인 도노 옹을 지난달 17일 그가 경영하는 후쿠오카(福岡)의 ‘도노 산부인과’에서 만났다. 그는 이국의 기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70년 전 지옥 같았던 경험과 그로 인해 바뀐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털어놨다.


○ 우연히 목격한 생체실험

1945년 4월, 전쟁 말기의 캠퍼스는 어수선했다. 젊은 의사들 대부분이 전선(戰線)으로 끌려 나가고 남은 이들은 환자 진료에 매달리느라 학생을 가르칠 교수가 없었다. 도노 옹도 수강 대신 지도교수였던 히라코 고이치(平光吾一) 교수의 잡무를 도우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마침 히라코 교수가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자동차 소리가 나서 밖을 보니 미군 포로 2명이 화물차 짐칸에서 내리고 있었다. 도노 옹은 “일본 군인들에게 끌려 해부실습실 뒷문으로 들어오던 포로들의 다리가 후들거렸던 것이 지금도 선명하다”며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것 같아 실습실에 들어갔다. 일본 군인 두 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제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벌어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수술대에 눕혀진 포로들에게 마취가 진행됐고 옷이 벗겨졌다. 팔에 꽂은 주사기를 통해 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노 옹은 “나중에야 그게 바닷물이었으며 혈액 대용으로 주입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 광경은 더 끔찍했다. 포로 몸에서 장기가 하나씩 적출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일본 군인 한 명이 갑자기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라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합당한 일이라는 변명이었다.

도노 옹은 “곧이어 포로들 몸에서 혈액을 모두 빼내자 그대로 사망했다”며 “나는 너무 놀라 몸을 덜덜 떨며 서 있었다. 감정조차 마비된 듯 미군에 대한 동정심도, 증오심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섭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했다.

해부를 마친 뒤 일본 군의는 간(肝)과 피를 챙겼다. 간은 연구에 쓴다고 했고 피는 살충제와 섞어 당시 공포의 대상이었던 ‘난징(南京) 모기’를 잡겠다고 했다. 도노 옹은 “의사 한 명이 사체에서 안구를 적출해야 한다며 나더러 미군 머리를 잡아 달라고 해 잡아 주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사체는 대학병원 화장장에서 태워졌다. 5일 후 도노 옹은 또 다른 미군 포로의 생체해부를 보게 된다. 규슈대 의대에서는 총 4차례에 걸쳐 8명의 미군 포로가 생체해부 대상이 돼 세상을 떠났다.


○ 가미카제 공격으로 불시착

미군 포로들은 1945년 5월 5일 B-29 폭격기로 규슈 비행장을 폭격하러 출동했다가 일본군의 가미카제(神風) 공격으로 불시착한 사람들이었다. 비행기에서 탈출한 미군 11명 중 2명은 주민들에게 맞아 죽는 등 현지에서 목숨을 잃었다. 나머지 9명은 서부군사령부로 연행됐다. 이 중 기장만 도쿄(東京)로 보내졌고 8명은 대체혈액 개발 등의 실험을 진행 중이던 이시야마 후쿠지로(石山福二郞) 교수가 있는 규슈대로 보내진 것이었다.

도노 옹은 “당시 이시야마 교수는 하루빨리 바닷물을 이용해 대체 혈액을 만들라는 군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며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군의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다. 전쟁은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끝나고 관련자들은 모두 재판정에 세워졌지만 도노 옹은 시키는 대로 뒤처리만 한 것이어서 증언대에만 섰을 뿐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의 말이다.

“아픈 사람을 치료해야 할 병원에서 오히려 사람을 죽이다니…아무리 전쟁 상황이라고는 해도 사람을 끔찍하게 죽이는 일에 동참했다는 것 때문에 너무 괴로웠다.”

그는 주기적인 악몽과 심한 불면증 때문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는 생활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노력해 산부인과 개업의가 되어 규슈지역에서 기반을 잡기에 이른다.

참혹했던 옛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던 그에게 어느 날 자신의 은사였던 히라코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승은 당시 현장에 없었는데도 실습실 이용을 용인했다는 이유로 25년형을 선고받아 9년 6개월 동안 복역한 뒤 출소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던 중이었다. 도노 옹은 스승의 작업을 잇기로 결심한다.

“목격자로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B-29기가 떨어진 현장 답사에서부터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았다. 주민들을 설득해 포로들의 위령비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미국에 살고 있던 유일한 생존자 왓킨스 기장을 어렵사리 만난 뒤 마음의 짐을 조금 덜 수 있었다. 왓킨스 기장은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인 내게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우리가 (전쟁에) 이긴 쪽이라고 해서 영웅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전쟁은 가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고통스러운 경험이며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도노 옹은 수십 년에 걸쳐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1985년 ‘오명(汚名)―규슈대 생체해부 사건의 진상’이라는 책을 내기에 이른다. 그는 “‘손자들의 생활을 망쳐버리겠다’는 익명의 편지도 받았지만 진실을 남기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이겨 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 병원에 추모 기념물 전시


그를 만난 날 그의 병원에서는 전후 70년을 맞아 생체해부 사건과 관련해 작은 기념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중에는 나무로 된 판에 투명 플라스틱으로 십자가 모양을 만들고 ‘추모’라는 제목 밑에 세상을 떠난 미군 포로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이 있었는데 이름 마지막에 해부 사건을 주도했던 이시야마 교수의 이름이 있었다. 기자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도노 옹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해자였지만 동시에 전쟁이라는 괴물에 먹힌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옥에서 자살하면서 ‘군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책임은 내게 있다’는 유서를 남겼다. 젊고 참으로 능력 있는 의사였는데….”

도노 옹은 “지금도 때로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정도로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오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할 일을 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조금 가벼워진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정정하고 에너지가 강해 보였다. 장시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기자의 머릿속에 그의 마지막 말이 오래 남았다. “이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내 목숨이 허락하는 한 생명의 소중함과 전쟁의 비참함을 자식과 손주 세대들에게 알리고 싶다.”

 


▼ 일본軍 명령으로 미군 포로 8명 산 채로 해부 ▼

규슈대 생체해부 사건은

기억 생생한 생체해부 지난달 도노 도시오 옹이 전후 70년을 맞아 자신의 병원에 전시한 미군 포로 생체해부 당시를 그린 그림. 사건 현장을 좀 더 상세히 보여주기 위해 도노 옹이 지인에게 당시 정황을 설명해 그린 것이다. 도노 도시오 옹 제공
일본이 패전을 목전에 둔 1945년 5∼6월 규슈대 의사들은 미군 포로 8명을 마취한 뒤 장기와 피를 빼내 숨지게 했다. 인간은 피를 어느 정도 잃어야 죽나, 바닷물을 혈액 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나, 폐를 어느 정도까지 제거하면 죽는가 등을 실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대학과 군 관계자 30여 명이 기소돼 5명에게 사형, 18명에게 9∼25년형이 선고됐다. 집도의는 감옥에서 자살했다. 일본 3대 의과대 중 한 곳으로 꼽히는 규슈대는 4월 의학역사관을 개관하면서 생체해부 사건과 관련한 과거사를솔직히 공개했다. 그 배경에는 사건의 실체를 집요하게 파헤쳐 온 도노 옹의 공이 컸다.

후쿠오카=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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