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가 프랑스의 체질을 바꿀까?
도전받는 프랑스의 관용주의
프랑스의 정치가와 국민들은 국제사회에서 책임있는 주권국가로 인정받으려면 자기에게 이롭고 편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세원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금 년 봄 프랑스의 최대 뉴스는 나토(NATO)군의 유고공습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크 상테르 유럽연합(EU)집행위원장을 비롯한 집행위원 전원의 일괄사퇴와 롤랑 뒤마 프랑스 헌법위원회 위원장(76)의 사퇴가 더욱 관심거리다. 스캔들과 정치인의 사임이란 화두가 새삼 프랑스 정가와 지식인층에 “북유럽의 청교도적 엄격주의와 지중해적 관용 중 무엇이 바람직한가”라는 해묵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예전부터 결정적인 큰 잘못이 아닌 한 공인의 사생활과 재량권 행사를 문제 삼지 않는 관용의 전통이 있어왔다. 개인의 상황과 사정에 따라 법을 융통성있게 적용해야 한다는 관용주의(Tolerance)는 ‘형편 나름’(Ca depend)이라고 하는,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관용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EU집행위원의 일괄 사퇴와 뒤마 위원장의 일시적 사퇴에 대해 프랑스인들이 충격을 받은 이유는 언론에 공개된 비리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정도의 ‘대수롭지않은’ 일 때문에 고위공직자들이 사퇴해야 했다는 점이다.
EU집행위는 지난 3월16일 긴급회의를 열고 전원 사임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집행위가 지도력을 상실해 부정부패를 막지 못했다는 유럽의회 특별감사보고서가 공표된 데 이어 유럽의회 내 최대 정당인 사회당은 물론 보수당과 녹색당도 집행위원 전원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직후였다.
EU집행위의 비리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유럽의회가 임명한 5인 특별조사위는 감사보고서를 통해 개별 집행위원의 구체적 비리사실은 포착하지 못했으나 집행위 전체가 조직장악력을 상실, 예산집행 감독과 부정비리 단속을 제대로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괄 사표 제출자 명단에는 이번 사태가 EU예산분담금을 둘러싼 독일언론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끝까지 버티겠다던 프랑스의 에디트 크레송 교육담당 집행위원도 포함돼 있었다.
유럽사법재판소 회계감사위원회가 실시한 집행위의 기금 유용실태조사에서 비위의 핵심인물로 지목받았던 크레송은 미테랑 대통령 재임시 농업장관, 관광 및 대외무역장관, 유럽담당장관을 지냈던 뒤 91년 총리까지 지냈던 프랑스의 중견 정치인. 크레송의 경우 자신의 주치의이자 동향 친구인 치과의사를 AIDS학술조사담당 연구위원으로 취직시키는 등 친지 3명을 요직에 앉힌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됐다. 이 밖에 청소년직업훈련 프로그램 예산을 유용했으며 목적이 불분명한 여행경비를 집행위 예산으로 처리한 사실과 부하직원의 거듭되는 부정행위에 대해 제대로 조치하지 않은 직무태만도 지적됐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족벌주의는 프랑스에서는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굳어져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꼬집는다. 프랑스에서는 에콜 폴리테크닉과 국립행정학교(ENA) 파리고등사범학교 등 소수 명문대 출신이 정관계 요직과 주요 대기업을 장악하고 있다. 한국이 무색할 정도로 학연, 지연 등 연고주의가 만연해 있다 보니 공직자가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해 친지를 돕거나 힘써주는 것이 인간적인 면모로 비치기도 한다.
이런 문화적 배경의 차이 때문에 크레송 자신은 사임하는 순간까지 사임해야 하는 이유를 실감하지 못했다. 일반인들조차도 크레송이 유럽을 지배하고 있는 위선적이고 엄격한 개신교 문화의 희생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무튼 EU집행위의 일괄사퇴는 프랑스인들에게 다른 나라에서는 지도자의 비리에 대해 어떤 판단기준을 적용하는지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3월23일 일시 사퇴를 발표한 뒤마 헌법위원장은 프랑스 최고 사법기구의 수장직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나지만 완전히 사임하는 것은 아니며 사법절차가 종결되는 대로 복귀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일시 사임 이유가 헌법위원회에 더 이상 누를 끼치지 않고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확고한 방패가 돼왔던 자크 시라크 대통령마저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친데다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가해오는 사임압력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뒤마 위원장은 지난해 4월 말 이른바 ‘엘프사건’에 연루돼 사회재산 은닉 및 공모혐의로 기소된 데 이어 지난해 10월 엘프의 로비스트이자 자신의 연인이었던 크리스틴 드비에 종쿠르(51)가 ‘공화국의 창녀’란 자서전을 출간, 그들 관계를 폭로했을 때만 해도 건재했다. 그러나 최근 검찰수사과정에 뒤마가 엘프 아키텐그룹으로부터 30만 프랑에 상당하는, 기원전 2, 3세기 헬레니즘시대 조각 12점을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을 종쿠르가 추가 폭로하면서 언론의 사퇴압력이 거세지자 일시적 사임이란 고육책으로 여론 진화에 나섰다.
엘프사건은 프랑스 최대의 석유화학그룹인 엘프 아키텐사가 91년 프랑스제 프리깃함의 대만 판매를 추진하는 과정에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거액의 커미션을 주고 종쿠르를 로비스트로 고용한 사건을 가리킨다. 종쿠르는 자서전에서 엘프사가 당시 미테랑 대통령이 반대한 프리깃함 6대의 대만 판매를 성사시키기 위해 6600만 프랑의 수고비와 평생연금을 주는 조건으로 뒤마가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자신을 고용했다고 털어놓았다.
프리깃함의 대만판매를 둘러싸고 프랑스 정부내에서 국방부는 찬성하고 외무부는 반대하는 등 서로 입장이 맞섰는데 엘프사가 종쿠르를 통해 뒤마 외무장관에게 로비를 벌여 결국 외무부가 기존 반대입장을 철회함으로써 판매가 성사됐었다.
엘프사건의 초점은 거액의 커미션을 종쿠르 혼자서 챙겼는지 아니면 판매를 성사시킨 대가로 일부가 뒤마에게도 전달되고 나아가 사회당의 정치자금으로 흘러 들어갔는지에 모아지고 있다.
종쿠르의 스위스 은행계좌로부터 800만 프랑이 뒤마의 은행계좌에 입금된 것이 드러나면서 뒤마 위원장은 사법당국에 기소됐으나 한사코 뇌물사건 연루를 부인하고 있다. 에바 졸리, 로랑스 비시네프스키 등 여성 수사판사 2명은 뒤마 위원장에게 사회재산 은닉과 공모 혐의를 적용하고 있다.
뒤마는 부친이 독일 나치스의 프랑스 점령에 대항하다 처형당한 레지스탕스 집안 출신으로 33세에 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입문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측근으로 두 차례나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현재 미테랑 기념재단 대표를 맡고 있다. 현역 변호사 시절 화가인 피카소와 가수인 플라시도 도밍고 등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종쿠르는 자서전에서 처음에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뒤마 장관에게 접근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이 로비스트라는 사실을 숨긴 채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며 뒤마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두 사람은 무기거래가 마무리된 뒤에도 전세계를 함께 여행하며 연인관계를 유지해왔다.
뒤마에 대한 일반 여론은 언론보다 더 동정적이다. 자신의 정부(情婦)가 엘프 아키텐사에 고용된 로비스트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으면서도 정부의 청탁을 들어준 노정객의 순애보쯤으로 높이 사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로맨스 그레이의 대표격인 핸섬한 노정객이 정부를 두었다고 해서 뭐가 문제인가, 그 정부가 엘프 아키텐 그룹을 위해 일한 대가로 거금을 받은 게 뭐 어떻다는 거냐, 또 그 돈의 일부를 노정객이 받아 썼다고 해서 어떻다는 거냐, 지도자도 사람인 이상 인간적인 측면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나폴레옹 이래 확립돼온 프랑스의 전통적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뒤마스캔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언론이 앞서가고 있는 편이다. 지난해 말 파리마치 등 각종 잡지들은 외무장관 시절 뒤마가 종쿠르와 해변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포옹하고 있는 사진을 앞다투어 싣고, 권위지로 정평이 난 ‘르몽드’도 뒤마스캔들 기사를 1면 톱으로 올리고 공직사퇴를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의 성추문에 대한 미국언론과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의 끈질긴 추적을 고리타분한 기독교식 마녀사냥 내지는 성(性)매카시즘으로 비웃던 프랑스언론이 공인의 사생활은 문제 삼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스스로 깨뜨린 셈이 됐다.
‘리베라시옹’ ‘르몽드’ 등 프랑스 유력지들은 정치인의 스캔들에 대한 각국 여론의 반응을 비교하는 기사를 싣고 프랑스가 아니고 영국이나 독일이었다면 스캔들이 폭로된 직후 일찌감치 사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경우 정치인의 스캔들은 명확한 해결책 없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청교도적 전통이 강한 영국에서는 여론 진화를 위해 즉결처분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당원들의 각종 스캔들로 고전한 보수당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취임 초부터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지난해 각료들의 동성애스캔들과 불법대출스캔들 등 이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곤욕을 치렀다.
블레어는 신속한 고단위 처방으로 노동당정권의 인기와 명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택했다. 심지어 노동당정부의 핵심인물로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피터 만델슨 상공장관도 채무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디언’지를 통해 공개된 지 3일 만에 전격 해임해버렸다. 작년 12월23일의 일이었다. 만델슨에게 거액을 불법대출해준 제프리 로빈슨 재무부 부장관도 이날 동시에 해임됐다.
만델슨 장관은 노동당이 집권하기 전인 96년 노동당 동료의원이었던 로빈슨으로부터 37만3000파운드(7억5600만원)를 은행의 주택구입융자 금리보다 싼 이자로 빌려 런던 고급주택가의 저택을 구입했는데 장관 취임 후 이를 밝히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됐다.
만델슨이 로빈슨 소유기업들의 불법 탈세행위에 대한 조사를 총지휘하면서도 두 사람간의 채무관계를 숨겨온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영국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모든 관료들은 취임 직후 자신의 재산은 물론 채무관계까지 공개해야 한다.
영국 정계에서 손꼽히는 부호인 로빈슨은 케임브리지대와 예일대를 졸업한 뒤 71년 33세에 최고급 자동차 제조회사인 재규어의 사장으로 발탁됐다. 5년 후 재규어 공장이 있는 코벤트시 북서지역구에서 하원에 당선, 정계활동을 시작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로빈슨은 1200만파운드에 이르는 재산의 상당부분을 면세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해외로 빼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론 데이비스 웨일스 담당장관이 런던의 악명 높은 동성애자 소굴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따라갔다가 강도를 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격 사임했다. 이어 11월 초에는 닉 브라운 농무장관이 동성애자임을 밝혔다. 동성애 상대자가 황색언론에 매수돼 두 사람의 관계를 폭로하자 처음에는 이를 부인하다가 끝내 동성애자임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크리스 스미스 문화장관은 이미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털어놓았고 만델슨 상공장관도 한 칼럼니스트에 의해 동성애자임이 폭로돼 물의를 빚어왔다.
데이비스 장관이 자신의 스캔들에 대한 명백한 해명 없이 자발적으로 사임한 것과는 달리 브라운 장관은 블레어 총리의 전폭적 지지 속에 장관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데이비스 장관의 사임 이후 정치인의 성생활은 사적인 것이므로 더이상의 성적 취향 폭로는 없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덕을 본 셈이다.
지난해 꼬리를 이었던 각료들의 사임파동이 가라앉기도 전에 올 초에는 로빈 쿡 외무장관의 무질서한 사생활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쿡 장관은 지난해 조강지처를 버리고 여비서와 재혼해 화제를 뿌렸던 인물. 쿡 장관의 전처는 ‘선데이 타임스’ 연재물을 통해 쿡 장관이 여비서와 재혼하기 전 5명의 여자와 관계를 가졌으며 폭음벽이 있어 브랜디병을 들고 호텔 복도에서 쓰러진 적도 있다고 폭로했다.
블레어 총리는 BBC방송 인터뷰에서 각료들의 개인적인 풍문보다는 직무수행 능력으로 판단해 달라며 쿡 장관은 국가와 정부를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만델슨 장관이나 로빈슨 장관의 경우는 명백하게 법을 어겼기 때문에 사임이 불가피하지만 브라운 장관이나 쿡 장관은 사생활이 문제가 된 것이므로 사생활 문제를 공직수행 능력과 분리시켜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된다면 유임이 타당하는 논리다.
정부의 도덕성을 보호하기 위해 스캔들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정치인들을 매장시켜버리는 엄격성은 앵글로 색슨보다도 결벽증이 심한 게르만이 더 심하다.
프랑스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문제가 될 것도 없는 사소한 윤리규정 위반행위가 언론에 노출되는 바람에 평생을 쌓아온 경력을 송두리째 날린 독일 각료들이 수두룩하다.
헬무트 콜 정권 때 기민당 출신 귄터 크라우제 교통부장관은 부처예산을 사적인 이사비용에 썼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자유당의 위르겐 묄러만 재무장관도 가족소유 회사에서 생산하는 슈퍼마켓용 손수레제품을 알선하기 위해 어느 대형 슈퍼마켓 체인에 장관명의의 추천서를 보냈다는 이유로 사임해야 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사회당연립정권을 창출하는 데 일등공신인 보도 홈바흐 총리실 장관은 요즘 몇주일 전부터 개인주택을 짓는 데 독일 베바그룹이 자금을 일부 지원해줬다는 사실이 언론에 의해 폭로돼 여론재판의 도마에 올랐다.
재판부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혐의만을 가지고 단죄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정치인이 스캔들 때문에 수사를 받는다고 해서 사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프랑스의 통념은 EU집행위원들의 집단 사퇴를 계기로 전기를 맞았다. 프랑스의 정치가와 일반 국민들도 국제 사회에서 책임있는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으려면 자기에게 이롭고 편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관용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
전세계는 고사하고 최소한 유럽에서라도 주도권을 가지려면 EU, NATO 등 국제기구 내에서 지도자에게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는 북유럽의 엄격주의와 법대로 처리하는 법치주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체질을 개선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이반 보 수사판사는 최근 자크 시라크 프랑스대통령이 93년 파리시장 재직 시절 뇌물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편지를 입수했으나 국가수반에게는 면책특권이 있기 때문에 재임중에는 이를 수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앞으로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정치지도자의 비리사실이 폭로되더라도 인간인 이상 그럴 수도 있다며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끝나기는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다. (신동아 1999년 5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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