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국보1호 목조미륵반가상, 한국 고대불상 쏙 빼닮아
정미경 기자
입력 2015-09-08 03:00:00 수정 2015-09-08 04:10:10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5>목조미륵반가상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상. 불상에 쓴 나무가 일본 녹나무가 아니라 한국에서 많이 나는 적송인 것으로 밝혀져 한국에서 만든 것이라는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출처 고류지 안내 책자
교토 서북쪽 변두리 우즈마사(太秦)에
있는 고류지(廣隆寺·광륭사) 역에 내리면 일본 영화산업의 요람인 도에이(東映)가 만든 테마파크가 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사무라이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도에이가 1980년 미국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모델로 해 만든 곳이다.
절 옆으로는 경찰서, 소방서, 구청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토대 사학과 교수가 “고류지는 온통 세상의 먼지에 뒤섞여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절을 찾은 때는 5월. 마침 필리핀에서 북상한 태풍으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일본인들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기도 한 고류지를 ‘불상(佛像)의 절’이라고 부른다.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불상만 50점에 달해 고류지 답사는 ‘불상 답사’라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는 ‘목조미륵반가상’이다.
○ 인간 실존의 진실을 표현한 불상
절 옆으로는 경찰서, 소방서, 구청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하야시야 다쓰사부로(林屋辰三郞) 교토대 사학과 교수가 “고류지는 온통 세상의 먼지에 뒤섞여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사찰 안으로 들어섰다.
절을 찾은 때는 5월. 마침 필리핀에서 북상한 태풍으로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일본인들은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기도 한 고류지를 ‘불상(佛像)의 절’이라고 부른다.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불상만 50점에 달해 고류지 답사는 ‘불상 답사’라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는 ‘목조미륵반가상’이다.
○ 인간 실존의 진실을 표현한 불상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앉아 있는 모습이나 옷이 흘러내린 모양 및 손의 위치가 일본 것과 흡사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웹사이트
경내 고건축들 사이로 밝은 갈색의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눈에 띈다. 불상들을 모아 놓은 신영보전(新靈寶殿)이다. 절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이곳은 500엔을 따로 받고 있었다.
전시장 안은 극장 안처럼 어두웠다. 불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도(照度)를 최대한 낮췄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문화재를 이렇게까지 소중히 다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조미륵반가상’은 전시장 가운데 있었다. 어둑한 실내에 반가상에만 따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있어 주인공이라는 게 한눈에도 확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실내가 어두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데 반가상 앞에 서니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오로지 이 불상 하나만을 보겠다며 절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굳이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시공이 멈춰 버린 절대 공간에서 미륵보살과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1945년 이 절에 와서 불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적기도 했다.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불상은 등신대로 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는 반가부좌 자세였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려놓고는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오른쪽 뺨 아래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는 가볍게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깊은 사유에 들어간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불상은 우리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너무도 비슷하다. 우리 반가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데 비해 고류지 반가상은 지그시 감고 있다는 것, 모두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입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만이 차이일 뿐이다. 두 반가상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 반가상의 재질(材質)
전시장 안은 극장 안처럼 어두웠다. 불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도(照度)를 최대한 낮췄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문화재를 이렇게까지 소중히 다루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조미륵반가상’은 전시장 가운데 있었다. 어둑한 실내에 반가상에만 따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고 있어 주인공이라는 게 한눈에도 확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실내가 어두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데 반가상 앞에 서니 신비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한국 사람들 중에는 오로지 이 불상 하나만을 보겠다며 절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굳이 불교 신자가 아니라도 시공이 멈춰 버린 절대 공간에서 미륵보살과 오롯이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1945년 이 절에 와서 불상을 바라보며 이렇게 적기도 했다. ‘이 불상만큼 인간 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본 적이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불상은 등신대로 의자에 편안히 앉아 있는 반가부좌 자세였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인 채 오른발을 왼쪽 허벅지에 올려놓고는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오른쪽 뺨 아래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는 가볍게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깊은 사유에 들어간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불상은 우리 국보 83호 금동미륵반가상과 너무도 비슷하다. 우리 반가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데 비해 고류지 반가상은 지그시 감고 있다는 것, 모두 미소를 짓고 있지만 입 모양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만이 차이일 뿐이다. 두 반가상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 반가상의 재질(材質)
목조미륵반가상을 모시고 있는
교토 고류지는 50점에 이르는 국보 및 중요문화재 불상을 보유하고 있어 일본에서 ‘불상의 절’로 불린다. 신라에서 건너간 도래인 진하승이 절을
지었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우즈마사=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한일 미술사가들은 고류지 반가상의
국적을 놓고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1960년 교토 대학생이 불상의 아름다움에 홀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전문가들이 부러진 손가락을 붙이려고 재질을 분석한 결과 아카마쓰(적송·赤松)라는 것이 판명됐다. 당시 일본 목조 불상들의 재질은 녹나무였는데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판명되자 불상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라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불상 허리띠 부분에 녹나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일본에서 제작됐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일본에서 수리한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어떻든 고류지 반가상은 현재 일본의 ‘국보 1호’다. 일본에서는 국보 번호가 편의상 매겨진 것이어서 별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일본 국보 1호의 국적이 한국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될 정도라면 고대 한일 교류의 흔적이 얼마나 깊었기에 그런 것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반가상의 국적에는 이처럼 논란이 있지만 고류지를 지은 사람이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신라에서 건너온 진하승이다.
○ 창건주는 신라인
진하승은 24회에서 자세히 소개했던 쇼토쿠(聖德·574∼621) 태자의 최측근이었음이 여러 일본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는 고류지가 있는 우즈마사 지역에서 갑부로 큰 존경을 받았는데 숭불파와 배불파 간에 벌어진 불교 전쟁 때 숭불파인 태자 편에 서서 큰 공적을 쌓아 이후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장경(藏卿·오늘날 재무장관)’ 직에까지 오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어느 날 군신들을 불러 놓고 “존귀한 불상을 갖고 있는데 누가 이 상을 모시고 공경할 것인가”라고 묻자 다들 머뭇거리는 사이 진하승이 나아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고류지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즈음 일본 각지에서는 태자의 지시로 7개의 대형 사찰이 동시에 지어지는데 이 중 유일하게 교토에 세워진 것이 바로 고류지라고 한다.
반갑게도 신영보전 전시 불상들 끝에는 진하승 부부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 속의 진하승은 한국에서 여러 자료를 접하며 머릿속에 그려 봤던 것과 비슷했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날카로웠다. 부인은 후덕한 인상이었다.
고류지에서는 진하승의 또 다른 흔적이 있었으니 바로 우즈마사 신전이었다. 신전 안내문에는 ‘후인들은 진하승의 덕을 찬양하고 그를 신으로 모시면서 우즈마사 신명(太秦神明)이라고 칭했다’고 적혀 있었다.
○ 진하승의 무덤
고류지 근처에 진하승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내친김에 찾아 나섰다.
고류지 역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걸어가니 주택가에 거대한 돌무덤이 나타났다. 바로 진하승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돌이 쌓여 있는 형태였는데 가장 큰 돌은 가로세로 4m에 높이가 2m나 됐다. 무덤 전체 길이가 17.8m나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뱀 무덤이란 뜻의 ‘헤비즈카(蛇塚)’라 부르고 있었다. 무덤 발견 당시 안에 뱀이 가득 서식하고 있었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안으로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감싸고 있었고 주택들이 원형을 이루며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내문에는 이 무덤은 7세기 축조된 열쇠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으로 원래 길이가 70m를 넘었다고 적혀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네 번째로 큰 고분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고대 수장급 인물의 무덤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진하승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을 둘러싼 집들을 둘러보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사적 헤비즈카 고분 보존회’라는 팻말이 걸려 있어 문을 두드려 보았다. 중년의 일본 남자가 나오더니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고분에 대해 알고 싶어 온 한국 기자라고 명함을 건네자 그제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와다 유키시게(和田幸重)라는 이름과 함께 ‘와다 염색’이라는 글귀도 있었다. 염색집을 운영하면서 무덤 보존도 하고 있다고 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흔쾌히 철조망 문을 열고 필자를 안내했다. 실제 본 무덤 속은 농구 코트 절반 크기일 정도로 컸다. 와다 씨는 “무덤에 쓰인 돌들은 인근 아라시야마 산에서 실어 온 것”이라며 “이 큰 돌들을 당시에 어떻게 옮겨 왔는지 나도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무덤 발견 당시 안은 도굴꾼들이 한바탕 털고 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당시 이 일대가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고류지 창건주가 진하승이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무덤은 진하승의 무덤이란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1960년 교토 대학생이 불상의 아름다움에 홀려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부러뜨리는 사고를 내는 바람에 전문가들이 부러진 손가락을 붙이려고 재질을 분석한 결과 아카마쓰(적송·赤松)라는 것이 판명됐다. 당시 일본 목조 불상들의 재질은 녹나무였는데 한국에서만 나는 적송으로 판명되자 불상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라는 유력한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불상 허리띠 부분에 녹나무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어 일본에서 제작됐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일본에서 수리한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어떻든 고류지 반가상은 현재 일본의 ‘국보 1호’다. 일본에서는 국보 번호가 편의상 매겨진 것이어서 별 의미는 없다고 하지만 일본 국보 1호의 국적이 한국이냐 아니냐가 논란이 될 정도라면 고대 한일 교류의 흔적이 얼마나 깊었기에 그런 것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반가상의 국적에는 이처럼 논란이 있지만 고류지를 지은 사람이 한반도 도래인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편이다. 그는 다름 아닌 신라에서 건너온 진하승이다.
○ 창건주는 신라인
진하승은 24회에서 자세히 소개했던 쇼토쿠(聖德·574∼621) 태자의 최측근이었음이 여러 일본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는 고류지가 있는 우즈마사 지역에서 갑부로 큰 존경을 받았는데 숭불파와 배불파 간에 벌어진 불교 전쟁 때 숭불파인 태자 편에 서서 큰 공적을 쌓아 이후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장경(藏卿·오늘날 재무장관)’ 직에까지 오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가 어느 날 군신들을 불러 놓고 “존귀한 불상을 갖고 있는데 누가 이 상을 모시고 공경할 것인가”라고 묻자 다들 머뭇거리는 사이 진하승이 나아가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면서 고류지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즈음 일본 각지에서는 태자의 지시로 7개의 대형 사찰이 동시에 지어지는데 이 중 유일하게 교토에 세워진 것이 바로 고류지라고 한다.
반갑게도 신영보전 전시 불상들 끝에는 진하승 부부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 속의 진하승은 한국에서 여러 자료를 접하며 머릿속에 그려 봤던 것과 비슷했다. 위엄이 있으면서도 날카로웠다. 부인은 후덕한 인상이었다.
고류지에서는 진하승의 또 다른 흔적이 있었으니 바로 우즈마사 신전이었다. 신전 안내문에는 ‘후인들은 진하승의 덕을 찬양하고 그를 신으로 모시면서 우즈마사 신명(太秦神明)이라고 칭했다’고 적혀 있었다.
○ 진하승의 무덤
고류지 근처에 진하승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내친김에 찾아 나섰다.
고류지 역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걸어가니 주택가에 거대한 돌무덤이 나타났다. 바로 진하승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50여 개의 크고 작은 돌이 쌓여 있는 형태였는데 가장 큰 돌은 가로세로 4m에 높이가 2m나 됐다. 무덤 전체 길이가 17.8m나 되었다.
일본인들은 이곳을 뱀 무덤이란 뜻의 ‘헤비즈카(蛇塚)’라 부르고 있었다. 무덤 발견 당시 안에 뱀이 가득 서식하고 있었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안으로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감싸고 있었고 주택들이 원형을 이루며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안내문에는 이 무덤은 7세기 축조된 열쇠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으로 원래 길이가 70m를 넘었다고 적혀 있다. 현재 일본에서는 네 번째로 큰 고분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내문에는 고대 수장급 인물의 무덤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진하승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무덤을 둘러싼 집들을 둘러보다 어느 집 대문 앞에 ‘사적 헤비즈카 고분 보존회’라는 팻말이 걸려 있어 문을 두드려 보았다. 중년의 일본 남자가 나오더니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고분에 대해 알고 싶어 온 한국 기자라고 명함을 건네자 그제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와다 유키시게(和田幸重)라는 이름과 함께 ‘와다 염색’이라는 글귀도 있었다. 염색집을 운영하면서 무덤 보존도 하고 있다고 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하자 그는 흔쾌히 철조망 문을 열고 필자를 안내했다. 실제 본 무덤 속은 농구 코트 절반 크기일 정도로 컸다. 와다 씨는 “무덤에 쓰인 돌들은 인근 아라시야마 산에서 실어 온 것”이라며 “이 큰 돌들을 당시에 어떻게 옮겨 왔는지 나도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무덤 발견 당시 안은 도굴꾼들이 한바탕 털고 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당시 이 일대가 신라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고류지 창건주가 진하승이었던 것으로 미뤄 볼 때 무덤은 진하승의 무덤이란 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했다.
와다 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진하승의 정기가 동네를 지켜 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무덤을 신성시하며 소중히 여기고 있다. 고대 교토를 이룩한 신라인들과 현대 교토인들은 16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영혼의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진하승의 정기가 동네를 지켜 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무덤을 신성시하며 소중히 여기고 있다. 고대 교토를 이룩한 신라인들과 현대 교토인들은 1600여 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영혼의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이다.”
'日本, 韓.日 關係'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제 징용의 기억…이들은 왜 일본으로 가야했을까 (0) | 2015.10.10 |
---|---|
日 최초 왕실사찰, 백제서 건너온 건축명장 유중광의 작품 (0) | 2015.10.10 |
15m 거대 불상… 韓日 융합한 日 독자문화의 출발 상징 (0) | 2015.10.10 |
세계最古 목조건물에 새긴 불국토… 한일 화공들의 합작품 (0) | 2015.10.10 |
日本の右傾化と軍国主義 - 人民網日本語版 (0) | 201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