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日 최초 왕실사찰, 백제서 건너온 건축명장 유중광의 작품

이강기 2015. 10. 10. 08:33

日 최초 왕실사찰, 백제서 건너온 건축명장 유중광의 작품

 

이유종 기자

 

입력 2015-09-03 03:00:00 수정 2015-09-03 04:11:05

 

동아일보
 
 

 

[수교 50년, 교류 2000년/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4>쇼토쿠 태자와 사천왕사

일본 역사에서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는 쇼토쿠 태자(왼쪽 사진)는 한반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고대 일본의 사상적 통일을 이룬 인물이다. 그가 세운 오사카 사천왕사는 왕실이 세운 첫 관영 사찰로 곳곳에 한반도 도래인들의 숨결이 담겨 있다. 사천왕사·아사히신문 제공
 
 
7세기 일본을 통치했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는 고대뿐 아니라 일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 역사에서 태자만큼 여러 문헌에서 다뤄지고 오늘날까지 각광받는 고대 인물은 별로 없다. 태자는 고대 일본의 정치 체제를 확립한 것은 물론이고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통일까지 이룬 인물이다. 1930년 100엔 지폐를 시작으로 모두 일곱 차례나 지폐 도안 인물로 쓰일 정도였으니 일본 내 그의 위상이 어땠으리라 짐작이 간다.


○ 어머니가 도래인 

쇼토쿠 태자는 고대 한일 교류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의 피 속에 한반도 도래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574년 일본 31대 왕인 요메이(用明) 왕이지만 어머니가 백제계 후손으로 당시 야마토 정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소가노 우마코의 조카였다. 

숭불파를 이끌며 불교전쟁에서 승리한 소가노 우마코는 587년 왕(태자의 삼촌인 스슌 왕)을 옹립할 정도로 힘이 막강했다. 스슌 왕이 소가 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하자 아예 그를 암살해 버리고 스이코(재위 593∼628년) 여왕을 옹립한다. 스이코 여왕은 조카인 쇼토쿠 태자에게 정치를 맡기는데 이로써 사실상 태자의 섭정이 시작된다.

그의 통치 철학이나 사상은 오늘날 일본 정치체제와 문화를 이해하는 뿌리이기도 한데 관위 12계(冠位十二階)와 17조 헌법(十七條憲法)을 제정해 고대 국가로 가는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고구려 혜자 스님의 제자이기도 했던 태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을 대거 받아들여 오늘날까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남아 있는 대형 사찰을 지었다.

재위 기간은 30년으로 짧지 않았지만 스이코 여왕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는(622년) 바람에 끝내 왕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후에 태자를 개조(開祖)로 하는 불교 종파인 성덕종(聖德宗)이 만들어질 정도로 추앙받는다. 

시미즈 아키히로(淸水昭博) 데즈카야마(帝塚山大)대 교수는 “신도의 전통이 강한 일본은 불교를 사상체계로서가 아니라 석가모니라는 ‘가미(神)’에 대한 신앙으로 받아들였다”며 “생전에 불교에 심취하며 종교적 삶을 살았던 쇼토쿠 태자에 대한 신앙은 세속의 왕자를 버리고 열반한 석가모니를 일본화한 인물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한다”고 설명했다.


○ 백제식 가람배치
 

쇼토쿠 태자는 불교전쟁을 치르면서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꼭 아름다운 사찰을 지어 부처님 은혜를 갚겠다고 서원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절이 바로 오사카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시텐노지)이다. 왕실이 만든 일본의 첫 관영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 성에서 남쪽으로 6km 정도 떨어진 사찰을 찾아간 날은 5월 초였다. 평지에 세운 사찰 경내는 확 트여 시원스러웠다. 멀리 금당(본당) 옆에 5층탑이 보였는데 규모도 컸지만 건축미도 뛰어났다. 한국 학계는 이 5층탑이 백제의 세 번째 왕도였던 부여 땅 군수리 절터와 건축 양식이 똑같다고 보고 있다. 

이 절은 593년에 건립됐는데 곳곳에 고대 한반도와의 진한 교류 흔적이 남아 있다. 우선 남대문-중문-오층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늘어서 있는 가람배치는 일본에서 ‘시텐노지 양식’이라는 고유명사가 된 가장 오래된 양식이다. 하지만 이 가람배치는 사찰 건립 26년 전인 567년에 창건된 부여 능산리 절터나 군수리 절터, 정림사 터와 동일한 양식이다. 

게다가 사천왕사는 군수리 절터 탑과 금당 간의 거리를 비롯해 각 건물 비례까지 일치하고 있다. 기와도 똑같다. 이곳에서 만난 야마오카 부묘(山岡武明) 스님은 “모두 백제 건축물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곳 건물들은 한눈에 봐도 한옥을 닮았다. 일본은 건축물을 지을 때 일반적으로 각이 진 서까래를 사용하는데 이곳 서까래는 한옥처럼 둥글었다. 못을 쓰지 않고 나무 결을 짜서 맞춘 방식도 한옥과 비슷했다. 금당 안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상도 가부좌한 모습이나 옷 주름이 흘러내리는 모습, 온화한 미소가 우리나라 국보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똑같았다. 


○ 백제 장인 유중광 

그렇다면 이 사찰은 누가 지었을까. 다름 아닌 백제의 건축 명장 유중광(柳重光)이다. 그는 또 다른 2명의 백제 장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와 이 절을 지었다. 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일본 왕실은 그에게 ‘곤고(金剛)’라는 성까지 주어 정착하도록 한다.

곤고 시게미쓰(金剛重光)로 이름까지 바꿔 아예 일본에 정착하게 된 그는 이후 일본 고대 사찰의 건축 및 수리를 전담하는 회사까지 만들게 된다. 이게 바로 한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기록된 ‘곤고구미(金剛組)’다. 

구미(組)는 일본어로 ‘모임’이라는 뜻으로 유중광이 후배들과 함께 만든 ‘건축 장인 집단’을 의미한다. 578년 세워진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건설업체였다. 23회에서 소개한 호류(法隆)사의 개축에도 참여했고 1583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오사카 성도 세웠다. 

현대에 들어와 ‘곤고구미’가 유명해진 계기는 1995년 고베대지진 때였다. 당시 건물 16만 채가 파괴됐지만 곤고구미 회사가 지은 건물들은 별 손상 없이 견뎌내 큰 관심을 모았다. ‘곤고구미가 흔들리면 일본 열도가 흔들린다’는 말이 이때 나왔다.

곤고구미는 유중광 가문의 40대손까지 이어지며 무려 1400여 년에 걸친 역사로 세계 경영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위기도 많았다. 1930년대에는 중일전쟁으로 모든 공사가 중단되면서 부도 위기에 몰리자 37대 사장이 할복하는 곡절도 있었다. 그러다 태풍 피해를 입은 사천왕사 오중탑 복원 공사를 수주하면서 회생했지만 1980년대 버블경제 때 사들인 부동산 값이 폭락하면서 빚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06년 파산하고 말았다. 이후 다카마쓰건설이 경영권을 인수하고 임직원 대부분을 승계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곤고구미 정신 

기자는 일본으로 취재를 떠나기 전 주일본한국문화원과 오사카 시 관광국 등을 통해 곤고구미 회사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타진했지만 “해외 매체와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말만 들었다. 

야마오카 스님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자 그가 앉은 자리에서 선뜻 “내가 주선해 보겠다”고 하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이리저리 전화를 하던 그는 “유중광의 41대 후손이 곤고구미 영업사원인데 지금 외근 중이라 당장 만날 수는 없다고 한다. 그 대신 마침 이곳에 직원 한 사람이 와 있다고 하니 이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30분 정도 기다리자 50대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건네준 명함에는 ‘곤고구미 영업개발부장 아베 도모미(阿部知己)’라고 적혀 있었다. 그에게 회사의 역사에 대해 묻자 “임직원 모두 우리 회사가 백제 장인이 세운 회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회사 경영진은 이런 사실을 수시로 직원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우리는 창립 이후 백제 기술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곤고구미는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결을 이용해 조립하는 방식을 고집한다. 한 해 매출은 500억 원가량이며 130여 명이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야마오카 스님은 “이곳 사천왕사 보수공사를 수주하려는 건설업체들이 상당히 많지만 우리는 항상 곤고구미에 맡기고 있다”며 “첨단 문명시대에도 이런 회사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높은 품질력과 예술성에 대한 직원들의 집착 때문이다. 곤고구미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가 있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이뤄진 만남이었지만 고대 백제 장인들의 후손이 아직도 대를 이어 그 정신을 이어 나가고 있다고 말하는 일본인과 대화를 나눈 것 자체만으로도 옛 조상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오사카=이유종 기자 pen@dong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