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적십자사 지원인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는 첫 기별을 듣고 나서 나는 며칠동안 흥분 속에 잠겨 있었는데, 떠날 날짜가 임박해 올수록 솔직하게 말해서 뭔지 생소한 느낌, 마음속 저
깊이 기묘한 떨림, 전율 같은 것이 커져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떨림의 정체인즉, 지난 50년간 在北(재북) 친족을 어쩔 수 없이
통째로 잊어버린 채 이 남쪽 日常(일상)에 깊이 휘감겨져 살아왔던 이 「나」와 그 在北 친족들 간의 깊은 「골」, 간극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어쩌다 18세 어린 소년으로 전쟁 와중에 단신 월남하여 이 남한 땅에서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진짜진짜 혼자서만 힘들게 어렵게 살아온 지난 50년이라는 세월이, 비로소 딴딴한 하나의 덩어리로 농축되어 와락 달려든다고 할까. 혹은, 지난
50년간 내 내부 깊숙이 까맣게 묻어두고만 살아왔던 북쪽 고향의 1878년 생이었던 조부님을 비롯, 부모님, 출가한 두 누님, 그리고 남동생,
막내 누이동생들이, 별안간 두 눈을 한껏 벌려 뜨고 바로 눈앞으로 다가든다고 할까, 이 떨림의 정체인즉 바로 그런 것이었을 터이다.
한데, 나는 訪北 지원인원으로 뽑혔다는 그 기별을 받기 직전과 그 직후에 연달아서 기이하다면 기이하게도 느낄 수 있는 두 가지 일을
연달아 겪는다. 그 하나는,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과의 짧은 인터뷰였는데, 이번에 이산가족끼리 상봉하게 될 訪北 신청을
했느냐고 묻기에, 물론 신청했다고 대답하자, 『만에 하나, 그 어려운 추첨이 맞아서 방북하게 된다면 李선생께서는 우선 첫째로 무엇부터 하고
싶은가?』라고 거푸 물어와서, 나는 평소 생각 그대로 서슴 없이 대답했었다. 『조부님, 부모님의 묘소부터 참배하고 싶다.그리고 그이들
忌日(기일)을 정확히 아는 것』이라고. 실제로 나는 벌써 30년 전부터 네 분 제사를 모셔오고 있는 터이었다. 사망 날짜
모르는 조상 제사는 음력 9월9일, 重九(중구)날에 모신다기에 그날에는 어김 없이 조부모와 부모님 지방을 가지런히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하긴 조모님 경우는 이미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 떠나, 고향에 있을 때부터 제사를 모셔왔던 것이어서 그 제삿날까지 음력 2월 초하루로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렇게 조모 한 분만 따로 제사를 모시기도 번거롭고 해서 네 분 조상을 그렇게 한데 모셔오고 있는 터이었다.
그리고 묘지로 말하더라도 조모님 묘지는 내가 안다. 지금 50년 만에 가더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가는 골(細洞里) 지나, 웃
가는 골도 지나, 덕발재 넘어서 왼쪽 산자락을 더듬어 올라가면 조모님 봉분이 있다. 비록 50년이 지났지만,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고,
찾아낼 자신도 있는 것이다. 電鐵 안에서의 만남 한데, 공교롭다면 너무너무
공교로웠다. 이거야말로 내가 운명적으로 소설가로 태어났음을 하늘이 啓示(계시)라도 하는 것인 듯한 묘한 일이 또 내 앞에 일어났다. 내가 이번
그 어려운 길에 지원인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는 기별을 받기 바로 이틀쯤 전인가, 3호선 電鐵 안에서 우연히 장병락씨를 만났던 것이다. 아침
시각의 만원 전철 안에서 나는 용케 앉아 문고본 하나를 읽고 있었는데, 누군가 앞에서 나를 건드리며 인사를 하였다. 아무개가 아니냐 해서
그렇다고 하니까, 대뜸 하는 말이, 자기는 고향 원산에서 고등학교 2년 후배가 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냐고, 나는
더러 이런 경우에 닥치면 늘 그러듯이 대강대강 응대하였다. 원산에서는 원체 1·4 후퇴 무렵에 월남한 사람이 많아, 이런 경우마다 일일이
챙겨내기는 어렵다. 나는 그렇게 대강 그런 수준으로 고등학교 2년 후배가 된다는 이 사람도 금방 따낼 생각이었는데, 그이
입에서 나온 다음 말에는 나도 기겁을 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37년간 감옥살이하고 작년에 풀려났음다. 미전향
장기숩니다. 하지만 리 선배님 글은 많이 읽었고, 민주화를 당겨오기 위해 감옥 드나들멘서리 그동안 고생하신 것도 자알 알고 있음다. 한번 꼭
만나뵙고 싶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모습은 사진에서만 뵈었지만, 혹여나 싶어서… 망설이다가서리』라질 않는가.
만원 전차 속이었지만, 다른 손님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당당하게 큰 목소리로 지껄이는 것부터가 역시 「미전향 장기수」다웠다. 나는 곧장
수첩부터 꺼내, 그이의 연락처를 적어달라고 하였다. 국번이 우리 지역 전화번호였다. 갈현동의 「만남의 집」에선가에서 기거하고 있다고 하였다.
비로소 나도 『당신들을 돕는 일을 하는 권오헌씨나 유시춘씨를 잘 안다』고 하자, 『그럼요, 그럼요, 리 선배님이 그이들을 모를 리가 없다는 건
제 쪽에서 먼저 이미 알고 있지요』 하였다. 이튿날 당장 전화를 걸어 연신내의 3호선 6번 출구 초입에서 만나기로 약속,
그이는, 『딴 약속도 있지만 별 것들 아니니까 죄다 따내고, 열두시 반 정각에 6번 구멍에서 기다리겠노라』고 하였다. 그렇게 만나서 술 몇잔
곁들여 서너 시간 점심을 같이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과연 37년간, 미전향 장기수로 견뎌낸 사람답게 애오라지 한 방향으로만 올곧고
당당하고, 그러고도 사람이 그지없이 맑고 밝았다. 그러면서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생각이 경직되어 있지는 않고, 세상 이해하는 폭도 그런 대로
넓었다. 그런가? 진짜로 그런가?! 매사에, 매우 낙천적인 성격으로 보였다.
본래 고향은 고원이라 하였고, 아버지가 원산에 나와 품팔이 일꾼으로 일하여, 자기 집은 골수 노동계급이라고 아주아주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고
1때 일찌감치 해군으로 입대하여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다만 민주화 과정에 두 번씩이나 옥살이를 한 내가 2년 선배라는
것을 알고 꼭 한번 만나뵈려고 하였다고 하였다. 자기는 北으로 돌아갈 때, 돈은 절대로 안 갖고 가겠다고도 하였다. 그쪽은
돈 갖고 사는, 돈만이 최고로 대접받는 그런 세상은 아니라는 거였는데, 「그런가? 진짜로 그런가?! 요즈막에는 그렇지도 않아 뵈든데!」
싶었지만, 나는 그저 멍히 그러는 그이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이런 그이 앞에서 무슨 소리를 지껄인다는 것이 애당초에 무의미해
보였다. 1963년, 장가 가서 1년 만에 처자와 헤어졌는데, 아내는 그 뒤,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되어 있고 유복자로 난
아들은 지금 마흔 살이 가까워졌다고 하였다.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맑게 밝게 웃었다. 원산市의 와우리에서 살았는데,
가능하다면 돌아가서도 그곳에서 살 작정이라고도 하였다. 『그럼 덕성 국민학교를 다녔겠군』 하니까, 맞다며, 와락 반색까지 하였다. 나는 혹여나
싶어, 원산의 내 누이동생 주소를 적어주며, 돌아가거든 꼭 한번 만나보라고 부탁하였다. 그이도 꼭 그러겠노라고 몇 번씩 다짐을 하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나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와 만찬가지로 조부님과 부모님의 묘소 찾을 이야기며, 제대로
忌日을 알아야 할 터인데, 하고 한마디 하자, 이번에는 그이 쪽에서 어이없어 하듯이 잠시 멍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내가 월남한 직후의
1951년부터 1953년 휴전 되기까지의 원산市 사정을 이야기하는데, 비행기 폭격보다 함포 사격이 엄청 더 무서웠노라고 털어놓았다.
비행기 폭격은 비행기 소리가 난 다음에 방공호 같은 데 숨어들 수가 있지만, 함포는 전혀 기척이라곤 없이 터지기 때문에 피할 길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송도원 해수욕장 백사장 가까이까지 바싹 들어와서 무차별로 함포를 쏘아대, 많은 민간인들도 수없이 살상당하였노라고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양식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노상 나다녔노라고 하였다. 『사람이라는 게, 정말로 무섭습디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 그리고 그 다음 한마디…. 『선배님도 아실 거예요. 중청개 공동묘지 있지 않았습니까. 그
공동묘지요. 함포로 몽땅 작살이 났어요. 아주아주 황무지가 되어버렸지요…』 그러니까 그이는 조부며 부모님 묘지 운운하고
정확한 忌日 운운하는 내가, 너무너무 그쪽 물정을 모르는, 이 남쪽에서 지난 50년을 살아온 팔자 늘어진 소리로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그렇게
그이는 매우매우 어이가 없었지만, 당장 마주 앉은 나잇살 깨나 먹은 선배가 무안을 느끼지 않게끔, 대강 그 정도로만 이야기해 두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지난 50년간 이 땅에서 글을 써온 사람이라, 그만한 눈치가 없겠는가, 벌써 조금 무안을 느꼈다. 현 북한이 지난 50년간
내내 처해왔던 냉혹한 처지를 이때까지 이 정도로 몰랐었구나, 하고. 아닌 게 아니라 50년 만에 모처럼 고향 땅으로
들어가면서 첫 마디에 조상들 묘지다, 기일이다, 제사다, 하면 북쪽 당국자나 지난 50년간 간고하게 어렵게 살아온 북한 사람들은 그러는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팔자 늘어진 소리부터 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러나 엄연히 이런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평양에 들어가 「보통강 려관」에서 누이동생을 만나 우선 처음으로 물어본 것은 역시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님의 忌日이었다. 물론
나는 그 순간에도 머리 한 구석에는 그 고등학교 2년 후배 미전향 장기수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요만한 일 하나를
갖고도 이 정도로 단순치만은 않고, 지난 50년 동안 남한 사회 속에서 살면서 절어든 버릇은 끈질기고도 깊었던 것이었다.
박헌영이 미제 간첩? 여기에서도 흘낏 보이듯이, 지금 우리 남북 관계는 「6·15 선언」과 함께 새
패러다임으로 들어서서, 그야말로 37년간 복역하고 나온 미전향 장기수와 내가 너댓 시간씩 마주앉아 서로 허심탄회하게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도 되었지만, 남북 공히 아직은 「체제 마비증」이랄까, 기왕에 지난 50년간 버릇들여 살아온 세부세부는 서로 섞여들기가 힘든 부분도
많다는 것을 미리 유념들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반지빠르게 상호 토론 같은 것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들기보다는, 우선은 남북 공히 상대의
이야기나 행태를 깊이 싸안으며 이해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할 것이다. 비근한 예를 한 가지만 든다면 그렇게 서너 시간
마주앉아 별별 이야기까지 나누는 동안, 그이는 어느 대목에선가, 『남로당의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었다』는 소리를 하여서, 『설마 그렇기야
했겠느냐, 나도 살아생전 박헌영의 독선적인 행태나 인간성에는 민족 지도자로서 문제가 많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미제
간첩」이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본다』고 하자, 그이는 대번에 발끈해지면서, 『그건 리 선배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한다』면서, 『일제 때에 이미 그 자는 일제 당국에 투항했었고, 전후에는 다시 「미제」에 붙어 그때까지 어렵게 쌓아올렸던 우리 조직과 인적
자원들을 사그리 팔아먹은 간악한 놈이라는 것이 이미 만천하에 밝혀졌는데 리 선배는 어떻게 아직 그것도 모르느냐』고 타박을 주었다.
나는 잠시 멍하게 그이를 마주 쳐다 보았을 뿐, 그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로 괜스레 티걱태걱거리며
피차에 열을 올릴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거야말로 전혀 非(비)생산적인 행태일 것이었다. 내가 이 글의 첫머리에
이 삽화부터 얹는 진의도 바로 이 점에 있다. 「남북의 화해, 협력, 그리고 통일」을 지향하는 지난번 「6·15 선언」의 진짜배기 알맹이,
핵심도, 떠도는 말, 언어 차원이 아니라, 하나하나 진정으로 어금니로 꽁꽁 씹듯이 자상하게 따뜻하게 챙겨가야 할 것으로 믿는다.
남북 젊은이들의 언쟁 평양에서 돌아오기 전날,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주최의 옥류관 만찬
자리에서였다. 넓다란 홀에서 큰 원탁 테이블들에 여럿이 둘러앉아 인삼주며 들쭉술 곁들여 이야기들을 나누는데, 마침 내 옆에는 1998년에
9박10일간 訪北했을 때 우리 일행 다섯의 안내를 맡았던 사람 가운데, 나와 가장 다정하게 친분을 나누었던 분이 모처럼 나를 찾아와 앉아 있어,
2년 만에 다시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이는 이번에 지원인원으로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이렇게 나를
만나보려고 이 자리에도 동참했던 것이었다. 곁따라서 밝히거니와, 몇달 전의 남북 頂上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회담 때는 역시 1998년 그때,
우리 안내를 맡았던 사람이 북측 예비회담 대표로 나와, 나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도 했던 것이었다. 훤하게 미남자로 생겼던 김영성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 사람과 일행이었던 우리 안내원 중의 한 사람인 이 동무를 2년 만에 다시 만나, 나도 한껏 감정이 고양되어 거푸 들쭉술
몇 잔을 마셔, 얼근하게 취해 있었다. 바로 그때, 같은 원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던 젊은 사람 둘이 무슨 일로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 내 눈길에 잡혔다. 물론 어떤 일을 두고 벌이는 토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논쟁 비스름했다. 더구나 그 두
사람은 한쪽은 나랑 같이 남쪽에서 올라온 우리 적십자 지원인원의 한 사람이었고, 상대 젊은이 쪽은 북한 안내원 중의 한 사람 같았다.
그러자 나는 우리측 지원인원 젊은이 쪽을 쳐다보면서 대번에 일갈부터 하였다. 『도대체 지금 뭣들 하는 거요? 두
분께서는 지금 어떤 문제를 갖고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토론을 하는 겁니까? 이 자리서. 집어치우쇼. 집어치워요』 하고는 원체
술기운이 올라 있던 참이라, 우리측 그 젊은이 쪽을 향해 타박 주듯이 말하였다. 『우선에, 이 북쪽으로 들어왔으면, 이 쪽
분위기에 맞춰서 눈치껏 대응하는 것이 제대로 경우 있는 태도고 예의가 아닐까요. 반지빠르게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토론하려 들면 또 그만한 규모로
실랑이를 벌이고 싸울 일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 짓일랑 집어치우쇼, 집어치워요. 난 평소에도 그래요. 상호 토론이라는 것이 물론 제대로
생산적으로 되는 경우도 드물게 없진 않지만, 대체로 보면 저 잘난 척하는 자리가 되기가 십상이더군요. 토론에서 이긴 쪽은
이겨서 우쭐하고, 진 쪽은 그 토론 결과를 순순히 승인하고 받아들이기보다는, 좌중 여럿 앞에서 한 방 먹어서 망신했다는 쪽으로 두고두고 기분
나쁘게 여기면서, 어금니를 악물고 갚을 기회부터 노리더군요. 그러니 이봐요, 사과하고 그만둬요』 그러자 마침 맞은편에
앉아서 시종 말 한마디 없으시던 80대 중반의 우리측 이산가족 한 분이 한 팔을 들어 나를 가리키면서까지 단호하게 나서는 것이 아닌가.
『맞아요. 저 이선생 말씀이 백번 천번 맞아요』하고. 나는 내심 여간 놀랍지 않았다. 원체 늙어 전혀
허수아비처럼 앉아 계시던 저 노인의 어느 구석에 저만한 총명이 자리해 있었으며, 저다지나 늙은 몸에서 저런 기운이 솟아나는 것일까 하고.
그리하여 우리 쪽 그 젊은이가 일어서서 여럿 앞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공손히 사과한 것은 물론이었다.
접대원 김경선 동무 바로 그때 내 옆에 앉았던 그 2년 전에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동무가, 하늘색 제복 차림으로
맞은편에 서 있던 이 옥류관 식당의 접대원 하나에게 김경선 동무는 그만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만두긴요, 지금 저 앞에 주석단 쪽에서
접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내 옆의 그이는, 『그래? 그럼 어서 잠깐 이쪽으로 와서리 인사하라고 그래. 그럼, 그 동무
무슨 소린지 알 거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이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1998년에
들어왔을 때도 점심 때에 이 옥류관에 들러 냉면에 쟁반 한 그릇씩을 먹었는데 그때 우선 냉면부터 들어오자, 우리 뒤에 알게 모르게 다소곳이 서
있던 접대원 여성 동무 하나가 나서며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는, 겨자나 식초 치는 방식이며 먹는 방법을 매우 요령 있게 설명해 주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갔던 우리 일행은 또 몇 마디 수군수군 설왕설래했던 것이었다. 『서울 쪽의
미인형이군. 얼굴이며 몸매며 가늘가늘한 것이. 그렇지?』 『그렇군요. 이쪽 북쪽에서는 살이 통통하게 찐 쪽을 미인이라
한다던데요』 『글쎄 난 잘 모르긴 하지만 대강 그렇다나보더군』 『강계미인 쪽은 어떤 쪽일까요?』
『글쎄』 『저는 어제 오늘, 이쪽 여성 접대원 동무들을 보며 강하게 느낀 점인데요. 하나같이 살색들이
고와요. 화장 같은 거 안 했는데도 말이지요. 진짜 저 동무는 서울의 내로라 하는 동네에 내놓아도 너끈히…』 『그렇군,
그렇군』 남쪽에서 막 들어온 우리들은 또 이렇게 남쪽에서의 버릇대로, 북쪽 사람들 듣기에는 조금 민망하게 점잖지 못하게
들릴 소리들을 수군수군거리고들 있었는데, 우리를 안내하는 동무들은 번연히 들으면서도 시종 침묵으로 대응,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럭저럭 각자
냉면 한 그릇과 쟁반 한 그릇씩 포식으로 점심을 마치자, 이런 경우의 의례적인 일로 옥류관측에서는 「방명록」 하나를 내놓으며 한마디씩 적어달라고
하여, 나는 서슴없이 그걸 받아들어 첫 주자로 이렇게 썼다. 「옥류관의 냉면도 물론 그지없이 맛이 있었고, 특히 접대원
김경선 동무의 영롱한 목소리와 우아한 눈길이 매우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1998년 8월28일. 서울에서 온 리호철」이라고.
사사로운 만남이 늘어나야 이리하여 그쪽 안내원 동무들도 한바탕 웃으며 역시 글 쓰는 「문호 아바이」라
다르다고 어쩌고 너스레를 떨고 나서 작별 인사를 하고 긴 복도를 나와, 밖에 세워두었던 차에 올라탔는데, 금방 나온 식당 출구 쪽 느낌이 조금
묘해서 무심히 그쪽을 쳐다본즉, 놀랍게도 방금 전의 그 김경선 접대원 동무가 우리 일행 뒤로 그 긴 복도를 쫓아 나와, 문 곁에 바싹 부끄러운
듯이 붙어 서 있다가 나를 향해 깊이 머리 숙여 큰 절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 동무는 그렇게 내가 그쪽을 한번 돌아보기를
조바심 섞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나는, 단지 보통 수준의 평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격려를 해 주고 즐겁게 해주자는 가벼운
마음에서 그 「방명록」에다 그렇게 몇 자 썼던 것인데, 거듭거듭 잘했다고 생각되며 나도 뭔지 뿌듯해졌다. 서울 돌아와서도 그랬다. 별일도 아닌
그런 일 쪽이 차라리 나름대로 깊은 추억으로 그리고 일말의 따뜻한 보람으로 남는 것이어서, 이 삽화 한 토막은 그때 서울 돌아와서 訪北기행문도
곁들여 펴냈던 「한 살림 통일론」이라는 책자에도 자세히 썼었다. 바로 그 김경선 동무를 내 옆에 앉아 있던 당시의 안내원
동무가 나를 위해 그렇게 챙기려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자 곧장 앞쪽에서 접대 일을 보던 그 김경선 동무가 득달같이 내
자리로 찾아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내 이름 석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렇게도 대견할 수가…. 나는 술이 조금
얼근했었는데, 2년 전보다 약간 살이 더 오른 듯한 그 김경선 동무에게 절대로 더 뚱뚱해지면 안 된다고 일갈부터 하였고, 그 동무도 그 동무대로
냉면 300 그램을 더 들라며 한 그릇 가져다주던 것이었다. 나는 이미 포식으로 배가 불러 있었으나 그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릇을 깨끗히 비웠다. 이날 밤의 연회 맨 끝머리에는 전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합창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선창을 바로 김경선 동무가 하질
않는가. 이 점도 이번에 두 번째 訪北 길이던 나에게는 일말의 따뜻하고 흐뭇한 보람으로 다가들었다. 바로 이 점, 이번 두
번째 방북 길에서도 새삼 강하게 확인되었거니와, 결국 앞으로의 남북 관계란, 남북 간에 사사롭게들 많이 만나고 그렇게 개개적으로 만나는 만큼
정분을 쌓아가며, 부분부분으로 형편 형편만큼 남북 간에 한솥밥을 먹는 빈도가 늘고 그런 사람들이 차츰차츰 늘어나면 그것이 바로 남북이 「한
살림」으로 들어서는 통일의 시발점이 되지 않겠는지…. 나는 작년에 펴냈던 「한 살림 통일론」에서도 이 점에 가장 역점을
두고 강하게 주장했었다. 이 책을 펴낸 데 대해서 나는 남 몰래 일말의 긍지마저 느끼고 있다면 지나친 자화자찬이 될까. 금년, 2000년에
들어서 남북 양 頂上 간에 「6·15 선언」이 나오고 100여 명씩 남북 간에 이산가족들이 상봉한 이 획기적인 일이 벌어지기 전인 작년에, 나는
재작년에 북한을 다녀왔던 감회까지 곁들여서, 이미 이런 마당을 어느 정도 예견까지 했었다는 긍지마저 갖게 되는 것이다.
추첨으로 訪北者 선정은 잘한 일 바로 이렇게 지난 2년여간의 남북 간의 활기찬 변화는 주로 민간
차원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누적 위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지난번 「베를린 선언」과 곧 잇대어 평양방문이 이뤄져, 역사적인 「6·15 선언」이
나오게 되었고, 그 선언의 첫 실천국면으로서 남북 각 100명씩의 지난번 「8·15 이산가족 상봉」이 극적인 양태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맨 저변의 밑자락에는 말할 것도 없이 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뒤 수미일관하게 추진해 왔던 對北 햇볕정책이 자리해 있었던 것이었다.
지난 8월14일 오후에 151명 전원이 일단 서울 워커힐 호텔 한자리에 모이는 것으로부터 3박4일간의 이번 訪北 여정은
시작되었다. 소정의 절차를 마치고 저녁 먹는 자리에서였다. 장충식 단장 이하 적십자측 지원인원을 포함한 전원이 큰 홀에서 처음으로 합류했는데,
당연히 나도 일곱, 여덟 명씩 둘러앉은 대형 원탁 하나에 껴 앉아 있었다. 그때 빙 둘러보면서 우선 첫인상으로 강하게
꼬나박혀 온 것은 『80대 늙은이들이 너무 많구나』였다. 이미 신문 지상으로 보았지만 이번에 北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속에는 김일성대학 교수다,
계관 시인이다, 화가다, 음악가다, 언어학자다, 어엿한 유명인이 즐비했는데 이쪽은 100명 가운데 그런 유명인은 단 한 사람도 끼어 있지
않았다. 그 점이 꽤나 어색하게 섭섭하게 느껴지고, 우리 남쪽이 처음부터 뭔지 한 풀 꺾이고 꿀리고 드는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꼭 어느 쪽이 낫다, 못하다 하는 체제경쟁 차원에서 보다는, 이건 지나치게 남북 간에 균형이 안 맞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동행하게
된 적십자 직원 한 분은 이렇게 처음부터 의아하게 여기는 나에게 비시시 웃으면서 한마디 하였다. 그런 유명인사 쪽으로 억지로라도 찾으려 든다면
퇴역 육군 중령 한 사람은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뭐요? 퇴역 중령은 한 사람 끼어 있다구? 하고 나는 하 어이가 없어 멍하게 상대를 마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상대는 이 점은 대통령께서 특별히 역점을 두어 지시한 사항이라고 덧붙였다. 컴퓨터를 통한 770대 1의 제비뽑기에 결코
예외 경우를 두질랑 말라는 것…. 한데, 이번 3박4일간의 訪北 길에서 시종 내가 가장 절감해 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약 7만7000명의 신청자를 단 한 건의 예외도 없이 전원 컴퓨터 추첨으로 뽑았다는 이 점. 『이러기를 잘했다, 썩 잘했다!』고 나는
평양으로 들어가서도 수없이 혼자서 되뇌곤 했던 것이다. 워커힐 첫 회식 자리에서 빙 둘러보면서 나에게 첫인상으로 와 닿았던
그 섭섭했던 느낌은 역시 내 쪽의 기우였음이 절감되었다. 심지어 휠체어를 탄 할머니에, 언청이 할아버지에, 중풍을 맞아선가, 입 한쪽이 비뚤어진
노인, 그밖에도 어슷비슷하게 명실공히 이 땅의 대표적인 서민들이어서, 그 점이 비록 첫 한순간에는 조금 기이하게 섭섭하게도 여겨졌지만, 이분들과
3박4일간의 訪北 여정을 같이 하면서, 이 점이 가장 훈훈하고 그 이상 마음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의 내 생각이 얼마나 상투적이고
짧았었느냐 하는 걸 수없이 곱씹어야 했다. 상대방 입장이 돼본다는 것 나는
작금의 남북 관계를 두고 소위 체제 경쟁이라나 하는 용어나 발상에 가장 저항을 느끼는 사람의 하나거니와, 하지만 이번 남북 이산가족의 첫 교환
방문에서 남북 제각기 뽑힌 면면들을 두고 본다면, 이번 우리측의 면면은 북한 당국으로서도 「반면교사」로서의 뜻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그러나 더 더 차분하게 나 스스로 현 북쪽 입장이 되어 접근해 보면, 우리 쪽과는 달리 북쪽에서 저렇게 유명인사 위주로
인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그런 대로 이해도 된다. 이런 것이야말로 일종의 남북간의 현 정치 문화의 수준일 터인데,
수준이 높다, 낮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지난 50년 동안 북한 사회가 늘 당면해 있던 어려운 국면, 애오라지 간고한 투쟁으로만 全인민을 묶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북한 당국으로서는, 이번 첫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를 뽑는 데 있어서도 어쩔 수 없이 저런 식으로밖에 뽑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 말이다. 생각해 보라. 지난 몇년간 기아 인원이 몇십만이다, 우리뿐 아니라 全세계 곳곳에서 「對北
식량지원」이다 하면서, 우리 텔레비전 화면에 비쩍 마른 북한 어린이들 사진이 하루걸러로 비쳐 나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번 이 일에서도 북한
당국으로서는 우선은 제대로 멀끔하게 생긴 사람들로 골라 내보내, 북한 사회 내에서의 평상적인 삶의 풍경부터 우선 우리에게 보이고 싶었을 것은
당연하지 않았을 것인가. 이렇듯 이런 일 하나를 갖고서도 앞으로의 우리 남북 관계에서는 모름지기 이쪽의 기준만 앞세울 것이
아니라, 우선은 상대방 입장이 스스로 되어보면서 피차에 품이 넓게 상대방을 싸안는 태도가 중요해 보인다.
누이동생과 대화 그러고 보면 3박4일간의 이번 訪北 뒤에 신문 지상에 이미 써냈던 짤막짤막한 글에도 몇 가지씩
添言(첨언)할 것이 있어 보인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번 訪北 길에 내가 가장 놀랐고 흐뭇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게 오래 살아 계셨다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67세, 아버지도 71세까지 사셨다는 것이 도통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누이동생에게 그 점을 몇
번씩 되묻고 되묻고 하였다. 누이동생도 단호하게 틀림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꼭 50년 만에 마주앉은 누이동생은,
첫눈에도 잘 커서 저 나이까지 이르렀구나 싶었다.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웠다. 쉰여덟 살 된 누이동생을 두고 이런 생각부터 하는 나 자신이 조금
어이없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쪽은 열 살이 더 많은 큰오빠가 아닌가. 그동안의 친족들 소식은 이미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튼 조부님과 부모님의 정확한 忌日부터 아는 것이 나로서는 급했다. 한데, 누이동생은 만나자마자 대뜸 그런
것부터 물어오는 것이 조금 못마땅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하긴 누이동생의 그런 심정도, 얼마 전에 서울서 만났던 그 미전향 장기수의 반응과 비슷해서
어느 정도 납득은 되었다. 누이동생을 만나자마자, 『누군 죽었냐, 살았냐, 누군? 누군? 언제? 어떻게?』 하고 내 쪽에서
연달아 묻기부터 하는 것이 북한 체제 속의 지난 50년간을 살아온 누이동생으로서는 조금 어이없게 느껴질 만도 하였을 것이다.
누님의 아들 그러니까 내 조카뻘 되는 아이들 몇몇은 미군 폭격으로 죽었노라고 하였다. 조부님은 종조부님과 같이 계셔서 자기와는
일찌감치 헤어져 살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는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 섭섭했다. 나는 위로 누님 둘 다음에 장남으로
태어났던 것이어서 특히 조부님의 사랑을 흠뻑 받았었는데, 누이동생이 할아버지를 의식하는 양태는 나 같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한 가정 속의 가족들
성원이라는 것도 끄트머리에 이르면 이렇게 사회적인 것이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나는 이때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한바탕 할아버지 이야기도 늘어놓았던
것이었다. 『영덕이 너는 잘 모를 테지만 난 할아버지의 사랑을 원체 흠뻑 받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할아버지 생각도 무척 많이
했다. 1878년생이라는 생년까지는 알지만 생일날짜는 여름 더운 때라는 것만 알 뿐, 모른다. 아버지 생일은 을사년, 1905년 음력으로
4월27일. 엄마는 생년만 알지 그밖에는 모른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동생 호열이 생일과 네 생일은 정확히 안다. 호열이는 1936년 음력으로
3월 초엿새. 너는 1942년 음력으로 동짓달 초 아흐레. 맞지? 맞지? 사실로 집 떠나서 지난 50년 동안 집 생각, 너희들 생각, 한시도
잊지 못했다. 바로 이게 증거다. 너희들 생년 생시를 지금까지도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 누이동생의
나지막한 목소리 나는 들쭉술에 조금 취기도 올라 이런 식으로 수다까지 떨었는데, 누이동생은 시종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부모님·부모님의 정확한 기일은 작은 오빠가 알지, 자기는 모른다고 자못 미안한 듯이 한마디 하고, 『작은 오빠는 중풍을
가볍게 맞아 요양중이지만 조카들 부축을 받아 변소 같은 데도 드나들 수 있는데다, 작은오빠는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막내딸 하나만 빼고는 모두가
시집·장가 다 들어 제각기 가정을 이루어 제사를 모실 때는 뻑적지근하게 모여들고, 한식 성묘 때도 아들들마다 음식을 차려와 거창할 것은 없지만
차분하게 지내고 있으니 큰오빠일랑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는, 끝머리에 『다 이렇게 장군님 덕분에 잘들 살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나지막하게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누이동생의 조심스럽고도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나는 우선 누이동생의 만만치 않은 품격
같은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끝 머리의 그 소리를, 50년 만에 만나는, 남쪽에서 몇십 년 동안 소설을 써온 이 큰 오빠가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것을 나름대로 미리부터 간파하고, 저들의 장군님에게 추호나마 累(누)가 안 되도록 해야겠다는 깊고도 자상한 마음씀이가
흘깃 간취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러는 누이동생이, 이 남쪽 세상에서 남쪽 기준으로만 줄곧 젖어서 살아온 나로서는, 뭔지
모르게 안쓰럽고 싸하게 가슴이 아려왔다. 그렇구나, 북에 들어오면 거의 누구나가 하나같이 입에 올리는 저 소리에도, 제각기 다른, 그 한 사람,
한 사람마다의 품격과 수준이 어려 있구나 하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 점으로 말한다면 1차 남북 이산가족 교환 방문이 일단
끝난 어제 오늘, 우리 남한 사회 곳곳에서 우스갯소리로 회자되고 있는, 이번에 같이 訪北했던 고물장수할아버지에게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던 그
딸의 행태 같은 것이 이 남쪽 사회에 그대로 먹혀들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너무 시대착오임을 어찌 북한 당국은 여직 모르고 있을까 하고 조금
의아해지기도 하지만, 더 더 깊이 자상하게 그쪽 입장이 되어서 헤아려 보자면 이해되는 면도 없지는 않다. 항용 그런 일은
하루나 이틀 사이로 금방 바꾸자고 해서 바꿔질 성질이 애초에 아닐 것이다. 지난 50년간 애오라지 간고한 투쟁 속에서 全 인민을 한 바윗덩어리로
묶어세우는 것만을 국가 목표의 첫째 항목으로 삼아오면서 생겨진 그 체제 나름의 행태일 터인즉, 그것도 남북 간의 새 패러다임이 제대로 안정적으로
터를 잡아 가면서 나름대로 시세를 좇아 차츰차츰 바꿔지면서 성숙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런 일도 너무 우리쪽
기준으로만 근시안적으로 조급해 할 것은 없을 것이다. 누님 둘은 1953년과 59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노라고 하였다.
두 분 모두 마흔 살도 못 되어 요절한 모양이었다. 한데 누이동생 말이, 자기는 정확한 날짜까지는
모르지만 아버지는 1975년에 71세로 운명하였고, 어머니도 1967년 67세로 돌아가셨다고 하질 않는가. 전혀 뜻밖이고 놀라웠다. 나는 좀체로
그대로 믿어지지가 않아, 앞에서도 밝힌 대로 대여섯 번이나 거푸거푸 물어보곤 하였고, 그때마다 누이동생도 틀림없다고 아주아주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 일 갖고 내가 왜 오빠에게 거짓말을 할 것이냐고 약간 짜증을 내기까지 하였다. 戰後 혼란과
아버지의 운명 그러고 보면 6·25 전쟁 한창 때 누이동생 자신은 큰이모 댁에서 기거하였다는 것으로도 대강 그때
정황이 나대로도 어느 정도 짐작은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월남해 온 뒤, 다시 말해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에 진주했다가 후퇴한 뒤, 북한에서는
그 후유증으로 한바탕 또 몸살을 앓았을 터인데, 그때 아버지가 그 소용돌이에서 무사하게 넘어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과연 어느 정도의 홍역을 치렀을 것이냐. 그 어름에 수용소 같은 데서 세상 떠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대로의 짐작이었으나, 그때 원체 어렸던
막내누이동생은 큰이모 댁에서 자랐다는 그 한마디로서 대강의 전체 정황이 미루어 헤아려지기도 하던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외가나 큰이모 댁은 그때부터 이미 북한 체제 쪽 집안이어서, 큰 이모의 둘째아들, 내 이종사촌 형님은 해방 후 서울대 상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일찌감치 월북, 1946년에 제1차로 모스크바에 유학을 갔었고, 내가 월남한 뒤에는 평양으로 돌아와 곧장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외삼촌 둘과 외육촌 하나는 1942년인가, 不純分子(불순분자)로 함께 검거되어 함흥 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풀려나, 그 이틀 뒤인가 나는 어머니를 따라 14세 소년으로 외가집엘 가기도 했었다. 그 뒤 1948년엔가, 작은 외삼촌은
기어이 옥살이 후유증으로 세상을 뜨셨다. 그때 외삼촌 둘과 같이 풀려났다가 곧장 1946년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갔던 외육촌 형님도 내가 월남한
뒤에는 중앙 민청위원장이라는 요직에 있던 것이었다. 그이의 부친되는 사람이자 어머니와 4촌 지간이던 박문병이라는 분은 내가
태어나던 무렵인 1930년대 초에 소위 「東京 유학생 사건」의 주범으로서 東京에서 재판을 받아 당시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3단 기사로 크게
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이는 1933년에 일본의 황태자(현재의 일본 천황)가 탄생되어 기념 특사로 풀려났지만 옥살이 후유증으로 몇 년 뒤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었다. 물론 그때 어머니랑 아버지는 그이의 장례 행사에도 참가하였었고, 노랗게 바랜 그때의 사진
몇 장은 우리 집에도 있어, 열 살 전의 나는 이따금씩 가만가만 혼자서 그 사진을 한참씩 들여다보기도 했다. 특히 그때부터 일본으로 드나들며
감옥살이 뒤치다꺼리를 하던 내 막내이모는 그 일에 전심전력하다가 혼기까지 놓쳐, 해방된 뒤에는 안변郡인가의 여맹위원장 자리에 있었음을 나는
아슴아슴 기억하고 있다. 그 막내 이모는 특히 어린 때의 나를 무척 이뻐하고 사랑했던 것이었다. 내가 월남한 뒤,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
오래 동안 재직했던 그 이종사촌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의 나를 재주 있다고 무척 아끼곤 했었다. 그렇다면 그런
연줄연줄로 아버지는 그때의 그 험한 고비를 혹여 목숨만은 살면서 넘긴 것인가. 사실은 아버지로 말하더라도 내가 알기로는 현 북한 체제로서 특별히
악질적으로 보일 만한 행태는 없었다. 아버지는 본래적인 사람됨이, 해방 직후 5년 동안 북한 사회의 그 급격한 혁명적 변화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너무 나이브한 성격이고, 품위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말이 좋아서 「혁명적 변화」이지,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다시
그때를 돌아보면, 사람살이 중에 어찌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었을까 싶게 너무너무 저질 행태들이 무성했던 것이었다. 기본적인 문화 수준이 아직
낮을 때의 그러저러한 「혁명적 행태」는 명실공히 狂氣의 분출이고, 제대로 양식 있는 사람에게는 생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현 북한 사회에서 1975년까지 살아계셨다는 것이 나로서는 좀체로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점, 거푸거푸 대견하고
고마우면서도 「정말인가, 정말 그렇게 오래 사셨는가?」 하고 의아한 느낌도 어느 구석 남곤 하였다. 나의 그 의아한 느낌을
뒷받침하듯이, 그렇게 보통강 려관의 1층 방 하나에서 누이동생과 단 둘이 서너 시간이나 마주앉아 냉면 한 그릇씩도 시켜 먹고 나는 들쭉술 한
병도 시켜 마시는 동안, 누이동생은 시종 뭔지 모르게 좌불안석, 조마조마해 하던 것은 서울 돌아온 뒤에도 자꾸 마음 속으로 걸렸다. 물론 그
점도 나로서는 전혀 짐작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누이동생도 누이동생대로 이미 2~3일 전에 평양에 와서 북쪽 관계기관 요원들의 나름대로의
사전 교양이랄까, 닦달을 받았을 터이었다. 그 점은 현 북한 체제로서는 어쩔 수 없이 필수적이었으리라는 것까지도 나대로 헤아려진다.
좌불안석하던 누이동생 사실은 그런 쪽으로 말한다면, 나는 현 북한 안의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누구보다도 이해하려는 쪽의 한 사람이고, 따라서 누이동생도 50년 만에 모처럼 처음으로 만나는 이 남쪽 세상에서 들어간 큰오빠를 일말의
당혹감 섞인 「두려움」으로 대하리라는 점도 충분히 이해는 된다. 그런저런 것을 무릅쓰고라도 그 옛날의 오빠를 만나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부터가
나로서는 대견하고 황감하기까지 하다. 이번 旅程에서도 드물게 어떤 경우는 아예 만나고 싶지 않다고 나오지를 않아, 만나지 못한 채 그냥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고 알고 있다. 또한 내 경우도, 앞에서 든 이미 80을 넘어섰을 고령의 이종사촌 형님이나 막내이모는 사전에
적어넣는 「만나고 싶은 사람」 다섯 사람 가운데 아예 신청조차 하지 않았지만, 손아래인 이종사촌 누이동생이나 이종 사촌동생 이름은 적어넣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혹여나 싶었는데, 결국은 누이동생말고는 내 앞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이종사촌 누이동생이나 이종사촌
동생도, 내 신청을 접하고는 아예 기겁을 하며 그런 반동적인 사람, 자기는 애당초에 모른다고 처음부터 딱 잡아떼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남북 관계가 앞으로 더 진전되면서 남북 피차 간의 분위기가 엄청 달라진다면 또 모르거니와, 이산가족 상봉이 지난 「6·15
선언」이 나온 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이뤄지는 이 마당에서는, 북한 당국으로서도 이쪽에서 만나고 싶다고 신청한 많은 사람들을 가감 없이
한꺼번에 죄다 만나게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담스러웠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러저러한 점을 두루두루 널리 깊이 유념할수록 모처럼
50년 만에 만났던 누이동생이 그렇게 시종 좌불안석, 조마조마해 하던 것도 새삼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하면서도 한쪽으로 이해도 되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상봉은 남북 모두 부담이 크다 이번 제1차 이산가족 상봉에
지원인원으로 들어갔던 한 사람으로 강하게 건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이 아니다. 2차, 3차, 4차도 같은 식으로 진척시킨다는 것은
서로간에 부담도 너무 크고 무리가 따르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 하나의 代案(대안)으로 이미 양측 적십자사 간에도 이심전심
공감대가 이뤄져 있는 것으로 알거니와, 하루 빨리 남북 이산 가족들 간의 생사 확인과 우편물 교환이 이뤄져야 하겠고, 바로 그런 전제 위에서
면회소 설치를 서둘러야 하겠다. 면회소도 한두 군데가 아니라 장단, 철원, 인제나 양구, 금강산 등으로 너댓 군데 설치하여 남북 양측 적십자
간에 운영하고 양측 당국은 그 기본 관리에만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일언이 폐지하여, 이번에 2박3일간 직접 평양으로
들어가서 겪어본 바에 의하면, 「6·15 선언」 이후 새 패러다임에 들어섰다고 서울에서 온통 호들갑들을 떠는데 비해서는, 현 남북 관계는 썩
밝아보이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울에 앉아서 서울 안에서의 기대가 과하게 껴든 분위기를 기준으로 한 外觀(외관)일 뿐이지, 정작
金正日 국방위원장이 북한 안에서 지금 부닥쳐 있을 여러 가지 부담은 꽤 만만치가 않겠다는 점의 강한 실감이었다. 겉으로
보는 현 남북 관계의 급류를 탄 변화 국면에 비해서는 북한 안의 對內 분위기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다. 그만큼 지난 50년간 간고하게
견뎌온 북한 사회의 일사불란하고 강고한 분위기는 여전히 끄떡없었고, 북한 체제의 기본 패턴에는 전혀 변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건 너무너무 당연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 남북 관계에서 상호주의 원칙이라는 것은 애당초에 설 자리가 없으며, 북한
내에서 당장 처해 있을 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입지에 도움이 되고, 그 체제 안에서의 그이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물심 양면으로 흔쾌히
나서야 할 것이라는 점이 새삼 확인이 되었다. 일부에서 걱정하듯이 물론 거기에는 적지 않는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이
세상에 진짜배기로 뭘 풀자고 들 때 아슬아슬한 모험 없이 이뤄지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지난 50년간 삼엄하기 짝이 없었던 휴전선 155마일의
긴장을 위시한 우리 남북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너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6월에 그렇게 평양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던 것부터가, 金正日 국방위원장 말마따나, 『이 무서운 곳에 들어올 생각을 하신』 金대통령의 그 결단이야말로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 제2단계는 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이다. 그이의 서울 방문이 두 번째 큰 획을 긋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매사가 그러하지만,
대소사를 막론하고 현지에 가보아야 모든 것은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이미 남북 관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하지만 그냥저냥 순조롭게만 진행되기에는 남북을 막론하고 장애가 많다. 그 장애로 말하더라도 현 남쪽의 그것보다도 북쪽의 그것이
몇 배, 몇십 배 클 것이라는 점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 지난 3박4일간 평양 체류의 핵심 결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질러 놓고 보자 요컨대 남북 간에 서로 사사롭게들 많이 만나는 것, 그렇게 사사롭게
만나서 만나는 만큼으로 정분을 쌓아가는 것, 한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세 번 만나면, 그야말로 동질성이라는 낱말부터가 무색해질 것이다. 그렇게
각자가 세 번만 만나면 동질성이라는 것은 회복되고도 남아 있을 것이다. 사람들 생긴 거 같지, 말하는 거 같지, 김치, 깍두기, 밥, 냉면,
지짐이, 취나물 등등 음식 같지, 게다가 산천 같지, 공기 알갱이까지도 우리 남북 간에서는 특별히 같더라, 이것이다. 외국에 나갔을 때하고는
공기 알갱이까지도 다르더라, 이것이다. 천년, 만년, 우리 조상들이 깊이 길들여졌던 그 공기 알갱이까지도 어쩌면 그렇게도 뭉클하게 익숙하게 가슴
깊이 다가들던지. 그렇게 많이들 만나고, 형편형편만큼으로 부분부분일망정 자연스럽게 「한 살림」을 차려가는 일, 그 길
이외에 합당한 길은 없어보인다. 이러자면 남북 양측 당국은 조금 비켜 서서 아주아주 요긴한 때에만 얼굴을 내비치며,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해결」하는 쪽으로만 나서도록 해라, 이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부터 벌써 이의제기를 할 사람이 없지 않을 터이다.
『순진한 소리 집어치워라, 이쪽 남쪽에야 그런 순수 민간이라는 게 있지만 북쪽에도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보느냐』 라고.
하지만 그렇게 저렇게 사사롭게 여러 사람이 여러 국면으로 만나다 보면 결국은 끝내는 그 私私(사사) 개개인의 감정이나 생각으로 돌아오게 마련
아니겠는가. 그 점은 이런 자리에서 또 왈가왈부할 것없이, 일단은 매사는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질러 놓고, 그 저지른 만큼
굴러가다가 보면, 전혀 의외성의 새로운 지평도 열리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닐 것인가. 우리 남북은 그렇게 서로간에
저지르는 세계로 지금 들어섰다고 볼 수는 없겠는지. 끝으로, 내가 이 글을 굳이 조선일보에서 발행되고 있는 「월간조선」에,
문단 일부 젊은이들의 움직임에도 무릅쓰고 싣는 이유는 나대로 있다. 이런 글은 이런 잡지에 가장 알맞아 보였기 때문이다. 혹여 이 글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면 그 반론의 됨됨이를 보아서 응답할 용의도 있음을 밝혀둔다.● 월간조선 2000년
1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