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남북첩보전쟁 반세기 | ||
피의 보복전을 부른 공작의 세계 |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은 치열한 첩보전을
펼쳤다. 이 첩보전쟁은 그대로 남북 관계로 귀결되었다. 보복과 보복이 반복되던 남북 첩보전쟁은 74년 발표된 남북공동성명으로 일시 중단됐으나
북한은 이를 재개했다. 첩보전에 참여한 남북의 공작원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힘과 기지로 난관을 돌파했다. 이러한 첩보원에 대해 북한은 벤츠를
제공하며 융숭히 대접하지만, 남한은 훈장 하나만 덜렁 준 후 내팽개쳤다.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들에게는 거액의 보상비를 지급하면서도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냉대하는 정부의 처사가 그들을 분노하게 했다.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을 냉대하는 국가는 잘될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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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hoon@donga.com | ||
영어 단어 Operation은 퍽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가동·효력·조작·운영 등으로 번역되지만, 의학계 용어로 쓰일 때는 ‘수술’로 옮겨야 한다. 반면
군사 분야에서 쓰일 때는 ‘작전’으로 번역해야 하고, 첩보나 수사 세계에서 사용되면 ‘공작’으로 바꿔야 그 뜻이 통한다. 한국말
‘공작(工作)’은 음습하고 뭔가 모략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영어 단어 Operation에서는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첩보
세계 종사자들은 공작 대신 Operation이란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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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스러운 공작의 세계 | ||
이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것은 정치자금의 유통과 Operation일 것이다. 정치자금
유통은 한보나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곤 했다. 그러나 첨예한 대치 상태에 있는 남북한이 벌인 공작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2000년 하반기부터 북파 공작원 출신들에 대한 보도가 나오며, 말로만 듣던 북파 공작원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3일 북파 공작원 출신들은 국군정보사령부 앞에 모여 보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왜 시위를 벌였는가.
이들의 시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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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모형 놓고 침투路 연구 | ||
그러나 김씨는 자신이 특수공작을 벌인 북한 땅이 정확히 어디인지, 그리고 그가 사선을 넘어
남쪽으로 넘어온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심지어 그가 한국군 어느 사단이 지키고 있던 곳으로 넘어왔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김씨가 속한
특수공작대(편의대·일명 ‘돼지’로도 불렸다)를 관리하던 육군 첩보부대 소속의 공작과장(소령)이 침투지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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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을 납치하자” | ||
비무장지대에는 지뢰가 즐비하고, 아군과 인민군 수색대가 번갈아 설치한
부비트랩(boobytrap·엉뚱한 물건으로 위장된 폭발물)이 많아 길 아닌 곳으로 가면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GP소초에서 휴식을 취한 춘천대는
수색대 매복조의 길 안내를 받아 군사분계선까지 접근한다. 군사분계선을 넘은 다음부터는 지뢰와 부비트랩 그리고 각종 장애물을 알아서 통과한다.
춘천대는 이렇게 군사분계선 북쪽의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북한 땅에 들어간 후 인민군 내무반을 박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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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확인사살 | ||
춘천대는 훈련중에 여러 차례 크레모어를 터뜨려 봤기 때문에 이때 나오는 폭풍과 폭음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크레모어를 터뜨릴 때는 물안경을 써 눈을 보호하고 귓구멍에는 솜뭉치를 넣어 고막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병장에서 하는 훈련과 낙엽과 나무로 뒤덮인 현장에서 벌이는 실전은 큰 차이가 있었다. 더구나 네 발을 동시에 터뜨렸으니, 한
발씩 터뜨리는 훈련 때보다 폭풍과 폭음의 강도가 훨씬 강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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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인 탈출 | ||
김씨가 황토 언덕에 오를 때쯤 폭음에 놀란 인민군이 달려와 사격을 가했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지뢰지대여서 북한 GP에서 달려나온 인민군 병사들은 깊숙이 따라 들어오지 못하고, 정조준을 위해 무릎쏴 자세로 사격을 가해왔다. 이때
김씨는 왼쪽 복부에 또 한 발을 맞고 쓰러졌다. 이철수도 오른손 검지가 날아가버렸다. 특수부대원들은 동료를 사지에 두고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지만 상황이 다급했던지라 김씨는 이제는 죽었다 싶어, 이씨에게 자신의 총을 던져주며 “먼저 가라”고 했다. 총을 받아든 이철수씨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묵묵히 수풀 속으로 몸을 돌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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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후 최대의 남북 교전 | ||
얼마 후 이제는 분계선을 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김씨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아뿔사! 남쪽이 아니라 군사분계선과 나란한 방향’으로 기어왔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GP에서 김씨를 발견하고 또 사격을 가해왔다. 적이 사격을
가하건 말건 확실하게 남쪽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김씨는 조금 기다가 몸을 일으켜 제대로 남쪽으로 가고 있는지 살피고 풀숲으로 푹 쓰러지고, 잠시
기다가 또 일어나 살피고 푹 쓰러지며 남쪽으로 접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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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부대 물색조와의 만남 | ||
이야기는 그로부터 1년 전인 67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 고등공민학교를 중퇴한 채로
놀고 있던 김씨(당시 19세)는 친구 2명과 함께 서울 서대문 로터리의 적십자 병원에 입원한 친구 어머니 문병을 갔다가 운명의 지프와 마주쳤다.
이 지프는 첩보부대 장교를 태우고 온 것이었다. 지프에서 내린 장교가 볼일을 보러 간 사이 김씨는 지프 운전병에게 말을 걸었다. 당시는
중앙정보부가 창설된 지 얼마되지 않은 터라 중앙정보부의 힘이 매우 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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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간판 ‘대한축산연구소’ | ||
이곳에서 청년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80명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남산을 한 바퀴
돌아 강변도로를 달린 후 지금의 영등포구 양평동 해태제과 자리로 갔다. 그곳에는 ‘동북산업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민간복과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간단한 환영식을 거친 후 80명은 머리를 박박 깎고 군복과 총을 지급받았다. 총은 은박지에 싸여 있는
신품이었다. 동북산업사에서 제식훈련과 기초사격 훈련을 받은 이들은 4주 후 수료식을 하고 다시 짐을 싸들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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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장애물 통과법 | ||
이씨는 김씨 조원 중 한 명이 체력이 약해 고민하다 면담을 거쳐 단독 수집조로 빠져 나간 후
결원을 메우려고 들어왔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전쟁기념관을 찾은 김씨는, 단독 수집조로 빠져나간 동기가 71년 전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춘천대는 자율적으로 훈련하다 이따금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잠복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그러다 68년 6월 드디어 김씨 조에 북한 지역으로
침투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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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울진·삼척 사태로 보복 | ||
꽤 오랫동안 회자될 만한 두 사람의 무공은 약 보름 후 터진 울진·삼척사태에 덮여
잊혀져버렸다. 울진·삼척사태는 중대 규모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내려와 울진과 삼척 일대의 화전민촌을 습격하며 분탕질을 친 대형 유격전이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군은 특전대와 해병대를 동원했다. 울진·삼척으로 침투한 공비를 소탕하는 데는 거의 두 달이 소요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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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의 첩보전 | ||
대북공작대의 뿌리는 6·25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8년 10월 편성된 국방부
제4국은 대북공작과 한국군 내부로 침투한 북한 간첩을 잡던 곳이다. 그러나 국방부 4국은 49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미국측의 요구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생겨난 것이 육군본부 정보국. 육본 정보국은 48년 10월에 터져나온 여순반란 사건에 관여한 군내 좌익분자를 척결하면서 위상을 굳혔다.
이때 명성을 떨친 이 바닥의 장교가 김창룡(金昌龍)씨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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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HID의 작전 실수 | ||
공작대원들이 VP로 옮겨탈 때가 Q보트에 탄 사람들로서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사지로
들어가는 공작원들이 마음을 바꿔 총부리를 돌려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VP로 옮겨타는 공작원의 총에 꽂아주는 탄창의 맨 위
총알은, 격발되지 않도록 항상 거꾸로 넣어주었다. 그리고 이들이 갖고 내리는 총의 방아쇠 부분은 실로 묶어 두었다. 공작원이 탄창을 빼 총알을
바로 넣고, 방아쇠의 실을 풀어야 총을 쏠 수 있게 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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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사건이 일어난 이유 | ||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로 구성되던 대북 공작부대의 물이 흐려진 것은 70년대 들어서다.
이때부터는 군에 들어올 나이의 비교적 순수한 젊은이를 뽑지 않고, 군에서 사고를 쳐 ‘남한산성’으로 불리던 군 형무소에 수감된 자들을 대북
첩보부대 요원으로 뽑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실미도 부대였다. 실미도 부대는 공군 부대가 경계 근무만 섰을 뿐 실제로는 육군 첩보대 산하의
분견대였다. 당시 해군과 공군은 대북 첩보부대를 운영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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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년 강릉 잠수함 사건 | ||
이들이 김포까지 올라온 것이 알려졌을 때 국군은 10m 간격으로 병력을 배치해 전 김포 지역을
훑었으나 비트를 파고들어간 이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 이들이 쓴 일기를 발견했다. 이 일기는 이들이 북한에 돌아간 후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이 일기에는 광천에 상륙한 후 어떻게 변장을 해 국군 방어망을 뚫었는지 소상히 기록돼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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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인공위성 발사를 요구한 이유 | ||
이러한 사실들은 적어도 96년 이전에는 북한의 인민군 정찰국이 특수공작부대를 한국에
파견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와 달라진 점은 폭파와 테러 등은 하지 않고 정보 수집에 주력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 제공하는
첩보위성 사진 덕분에 아예 대북 공작부대를 보내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하지 않는데 이북은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정전협정을
위반해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북한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미국에 제시했다. 한 북한 전문가의 분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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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 당하는 공작원 출신 | ||
이런 일이 반복되자 직장에서도 이들을 수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아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사선을 함께 넘은 이씨와 홍씨는 나만큼도 표현력이 없는 사내였다. 이들은 점점 더 사회로부터 소외되자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씨는 왜 북파공작원들이 시위를 벌이는지에 대해 뼈 있는 말을 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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