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남북첩보전쟁 반세기(하) | ||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vs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
조선로동당 대남공작 부서의 조직과 인원 예산은
얼마나 될까. 한국을 드나드는 북한 공작원의 수는 얼마나 되고, 이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이에 맞선 한국의 대공수사기관이 펼치는
역공작은…? 6·25전쟁 후 조선로동당은, 남조선 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 남로당의 유업을 이어받기 위해 끊임없이 지하당을 구축해왔다. 지하당 구축의 달인인 정경희와 이선실, 그리고 북한 공작원이 제대로 일을 하는지 검열 나온 검열간첩 김동식 등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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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hoon@donga.com | ||
김대중 정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북정책이다. 지난해 6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김대통령을 비롯한 이 시대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은, 이 회담을 남북 통일을 향한 초석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남북 교류를 통일 물꼬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조심해야 할 것인가. 통일 물꼬를 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남북한군 사이에 군사력 감축(軍縮)이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북한은 병영국가이기 때문에 군축에 매우 소극적일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군축 협상에 끌어내고 실질적인 군축을 이뤄낸다면, 한국은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이 된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과연 그럴까? 북한을 군축 협상에 끌어내 군축 합의문에 서명케 하는 것이 북한을 굴복시켜 역사적인 남북통일로 가게 하는 첩경이 될 것인가? 북한에서는 군사력 감축을 ‘축감(縮減)’이라고 표현한다. 북한에서 실력자로 있다가 귀순한 엘리트 탈북자는 “한국인들이여 꿈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다. 그는 “정상회담 후 김대중 대통령은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인민들에게 2004년까지 통일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통일 시기를 정해 놓은 것은 통일방안을 마련해 놓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열심히 축감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축감은 오히려 북한이 잘할 것이다. 축감 협상 주도권은 북한이 쥘 것이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6·15 공동선언 제1항에는 ‘통일문제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가자’는 문구가 있다(自主 조항). 한국 사회에서는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해 신경을 쓰는 사람이 사라졌지만, 북한에서는 6·15 공동선언을 잘 이행하자는 목소리가 계속 터져나오고 있다. 왜 북한은 6·15 공동선언 이행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북한은 6·15 공동선언을 그들 주도 통일의 초석으로 보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군사력 축감을 위한 예비 회담을 가지면, 북한은 6·15 선언의 자주 조항에 따라 미국을 배제하고 본회담을 갖자고 주장할 것이다. 한국 역시 민족주의가 강한 만큼 이를 받아들여, 남북한은 단독으로 군사력 축감을 위한 본회담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은, 병영국가 북한이 군사력을 축감하는데 부정적일 것이라는 시각을 갖고 있다. 때문에 북한은 축감을 피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 주한미군을 줄이는 만큼 인민군을 줄이겠다’고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큰 오산이다. 물론 협상 초기에는 북한이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다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는 한국측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주한미군 주둔에 동의해 주면 한국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고 역공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이 가장 역점을 두는 것은 이 역공이다. 여기서 북한은 단물(경제적 지원)을 최대한 짜낸 뒤, ‘주한미군은 상징적으로만 축감하라’고 제의해, 한국의 동의를 받아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은 국군과 주한미군을 합쳐 15만을 축감하고 북조선 인민군도 15만 명을 축감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한미군을 상징적으로만 철수했을 뿐 실제적으로는 축소하지 않아, 한국은 군축회담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고 자축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북한의 전략에 말려든 결과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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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군축에 적극적이다” | ||
북한은 왜 주한미군 철수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 이 소식통의 분석은 예리하게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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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축과 연계한 대남공작 | ||
소식통은 북한은 한국민을 상대로 자주 조항을 더 강조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민을 자극해, ‘김정일=민족주의자’라는 등식을 심어줘, ‘김정일=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암암리에 한국
흔들기에 들어간다. 지하당을 이용한 대남 공작을 강화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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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 서울지도부와 한민전 | ||
남로당은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간첩사건 때마다 거론되는 지하당을 거쳐,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조직을 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로 통칭하기로 한다. 평양에서 이를 지휘하는 사람이 곧 조선로동당
대남비서인 김용순인 것이다(남로당과 조선로동당 관계에 대해서는 이 기사 말미에 있는 별도 기사를 참조하기 바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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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급 잠수정 운영하는 작전부 | ||
이러한 사회문화부와 일심동체로 움직이는 것이 작전부다. 작전부는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을
한국으로 침투시키고, 임무를 마친 공작원을 북한으로 데려오는 일을 한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수십 개의 침투 지점을 갖고 있어야 한다.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작전부(당시는 조사부라고 했다)는 휴전선을 통해 주로 육상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한국이 남방한계선 전체에 철책을 친
다음부터는 해상침투가 많아졌다. 해상침투를 위해 작전부는 서해의 남포와 해주, 동해의 원산과 청진에 연락소를 운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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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은 포경수술을 하지 않는다 | ||
공작모선으로 침투할 경우에는 해안에서 40해리(약 72km) 떨어진 곳에서 반잠수정을 내린다.
그러나 유고급 잠수정으로 침투하면 1∼2km까지 바짝 접근한다. 해안까지의 거리가 1km 내외일 경우 작전부 소속 안내조와 사회문화부 소속의
공작원이 오리발을 신고 수영해서 침투한다. 그 이상일 경우에는 추진기를 타고 들어온다. 추진기는 스크루를 가진 소형 엔진인데, 수중에서 이를
붙잡고 있으면 수영보다 훨씬 빠른 3∼5노트의 속도로 침투할 수가 있다(추진기는 스쿠터라고도 하는데, 스쿠버를 즐기는 사람들은 잠수시 스쿠터를
자주 이용한다. 스쿠터는 이미 레저 용품이 된 지 오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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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3호청사 | ||
통일전선부를 비롯한 조선로동당의 4개 대남 부서를 북한에서는 ‘3호청사’로 부른다. 대남공작
부서가 3호 청사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한민국 총무처는 경기도 과천시에 여러 동의 건물을 지어놓고 정부 기관을 입주시켰는데 이를 가리켜
‘과천 정부청사’라고 한다. 1982년 그와 똑같이 조선로동당도 중앙청사를 짓고 로동당 산하 부처를 입주시켰다. 이러한 건물에는 1호 청사·2호
청사…7호 청사란 이름이 붙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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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조선 혁명인가 | ||
현재 한국에는 전문적으로 대북공작원을 양성하는 기관이 없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HID로 불렸던 육군 첩보부대 예하에 대북공작원을 양성하는 기관을 운영했다. HID가 관리했던 대북공작원들은 북한에 들어가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첩보를 수집했다.(‘신동아’ 2001년 1월호에 실린 ‘피의 보복 부른 공작원의 세계’ 참조). 그러나 한국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후 테러와 폭파로 점철된 대북공작을 중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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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부는 위탁교육 | ||
작전부가 운영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은 사회문화부를 비롯한 타 부서가 뽑은 요원을 위탁
교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작전부로 갈 학생들과 뒤섞여 공부하지 않고 별도의 장소에서 개별교육을 받는다. 일반 대학을 다니다 이 학교로
옮겨오는 학생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울산 부부간첩으로 생포된 최정남이다. 최정남은 사리원대학을 다니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이 대학에 들어와
교육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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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면과 한국음료수 먹는다 | ||
북한 공작원 출신들은 “한국 해안을 지키는 육군 향토사단이나 해병대는 별것 아니다. 그러나
해상에서 날씨가 나빠지면 정말 괴롭다”고 말한다. 96년 9월 강릉에서 좌초한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은 조선로동당이 작전부가 아니라 인민무력성
정찰국 소속이었다. 잠수함 내부를 조사한 합신조는 ‘신라면’ 봉지를 발견했다. 이 봉지를 근거로 유일한 생포자인 이광수를 추궁하자 이런 대답이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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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600工數’ 처녀와 결혼” | ||
“성혜림은 월북작가 이기영씨의 며느리인데, 이기영씨는 며느리에게 ‘배우를 그만두라’고 했다.
성혜림이 이를 거부하면서 이기영의 아들과 이혼했다. 이러한 성혜림을 로동당은 해외 공작 파트 요원으로 내보냈다.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이
시퍼렇게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다. 이때는 김일성식 공산주의 사상이 극성하던 때였으므로, 김일성은 공산 사상에 투철한
‘서민(庶民)’ 여성을 김정일의 배필로 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김정일은 ‘600공수(工數)’라는 별명을 가진 서민 출신의 협동농장 농장원과
결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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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공작원 정경희 미스터리 | ||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할머니 공작원이 ‘정경희(鄭慶姬·사망)’다. 73년 정경희는
한국에서의 장기 공작을 마치고 북한에 돌아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연락부(사회문화부의 전신) 부장이 되었다. 정경희는 지하당 구축과 관련해 대단한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부장이 된 것인데, 아직도 한국의 대공수사기관들은 정경희가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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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 정도는 기상악화로 침투 실패 | ||
정확치는 않지만(정확한 것은 작전부만 알 것이다), 조선로동당이 시도한 침투 중에서 약 절반은
기상악화나 한미연합군의 훈련, 기타 기밀 누설 등으로 중지된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의 침투를 막는 최대 세력은 해안 경비를 서는 육군 향토사단이
아니라 일기 불순을 일으키는 조물주의 조화인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정도는 침투에 성공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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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財政을 말리는 대남공작 | ||
한국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북한 공작원이 대공수사요원과 정면으로 마주치는 것은 우리의 역공작이
성공했을 때다. 역공작은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한국인을 붙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대공수사기관은 이 한국인으로부터 언제 북한 공작원이 오는지를
알아내고 약속한 날짜에 만나자는 전문을 치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접선이 이뤄지는데 접선으로 북한 공작원 잡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다. 접선은
“동지 그 동안 수고 많았소” 하며 굳은 악수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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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대공수사국 | ||
조선로동당의 대남부서와 대남공작 분석은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남북통일을 전제로 한 군축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앞서 지적했듯 북한은 군축 회담에 적극 임하면서 동시에 막강한 대남 공작조직을 동원해 남한 흔들기를 할 가능성이 높다.
주한미군을 상징적으로만 감축시키되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감군하자고 주장해 대외적으로는 명분을 쌓은 후, 테이블 밑으로는 남한 내의 지하당을 움직여
‘혁명 만조기’를 만들려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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