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처리, 그 배제와 수용의 메커니즘
- 기광서
해방 반세기가 훨씬 넘은 이 시점까지도 우리 사회의 친일 청산 요구는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친일 청산 문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태까지 해방 후 북한에서는 친일파가 철저히 청산되었고, 그 잔재는 찾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왔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점과, 김일성 지도부는 친일파 처리에서 어떠한 방식을 활용했는지, 즉 법적, 제도적 강제력 이외에 사용된 수단은 무엇이었던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친일 청산 과정은 일견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그 과정과 결과는 매우 흥미롭다. 친일파 처리가 숙청 방식보다는 오히려 다른 요인들에 의해 해결된 측면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친일 기준의 혼선
소련군 진주 후 각 도 인민위원회 산하에 경찰조직인 보안대가 설치된 것은 치안질서를 유지하고, 나아가 친일세력과 ‘반동분자’들을 색출하기 위해서였다. 초기에 이 기관들을 소련군 방첩기관과 함께 이 업무를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때 진행된 친일파 숙청 작업은 아직 뚜렷한 원칙이 없는 가운데 친일 혐의가 확연히 드러난 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친일 혐의자들 중 상당수는 온전한 상태에 있었고, 심지어 인민위원회 등 자치기관의 책임자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사실 공산당과 민족진영의 중요한 시각 차이는 친일세력의 처리 문제에 있었다. 이는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이 친일 청산을 국가 수립 이후로 미루자고 한 이승만과 대립한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의 공산측은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연립적 정치 구도에 치중했었기에 구호 이상으로 친일파 청산에 전력을 기울이기가 힘들었다. 여기에는 친일 청산을 전면적으로 내세웠을 때 친일세력과 혼재되어 있던 민족주의진영의 반발에 부딪칠 수 있다는 우려가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해방 후 평양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척결을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족진영과의 단합을 역설하였다. 이를테면, 그는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를 통해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이 언사는 건국 과정에 ‘유산계층’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으로써 통상 공산 측의 통일전선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친일파 처리의 명확한 기준은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조선공산당 북부 분국은 10월 중순 토지와 재산이 몰수되는 이른바 ‘반역지주’를 규정하는 것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주들이 주위의 증명에 의해서 사면될 수 있는 매우 온정적인 내용을 포함하였다. 이후 북한지도부가 친일파 처리에 대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마련한 것은 중앙권력기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 직후였다. 1946년 3월 7일 북임위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채택하면서 친일파 청산에 본격 착수하였다. 이 조치는 북한을 정치, 경제적으로 강화 시키려는 ‘민주기지론’ 방침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과 맥락을 같이 하였다. 이 규정에 따르면, 친일파의 범주에는 일제에 복무한 고급관리는 물론이고 경찰 경시, 헌병하사관급 이상의 관리와 밀정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하위관리라 하더라도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인사들이나 민간인 역시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부칙 조항을 통해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은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고 함으로써 친일 규정 적용에 있어서 탄력적인 운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친일세력으로서는 과거에 대한 속죄 여부와 건국사업의 기여도에 따라 운명이 갈라지는 형편이 되었다.
친일분자의 명암
친일파에 대한 선별적 관용과 활용은 이미 위의 규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시행되었다. 김일성과 소련군지도부는 처음부터 권력 기관 내에 일부 친일 혐의 인사들을 등용하는데 별다른 주저함을 보이지 않았다. 가령, 일제시기 광산 지배인을 지내는 등 일제에 복무한 경력이 있었던 정준택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해방 후 북한 최초의 중앙행정기관인 행정10국에서 산업국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북한 정부 수립 시에도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북한 경제의 ‘총사령탑’에 앉았다. 그가 1973년 1월 부총리 재직 중에 사망하였을 때 그의 장례식은 김일성의 눈물 속에 성대하게 치려졌고, 그에게는 최고영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가 수여되었다.
일제 말 함흥철도국장을 지낸 바 있는 한희진은 행정10국과 뒤이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교통국장에 임명되었다. 친일 여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의학박사 출신의 윤기영이 보건국장에, 치과의사 출신의 한동찬은 상업국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또한 지주 출신으로 산업경제가이자 전기산업원가이론가로 명성이 있는 이문환은 행정10국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산업국장을 맡았다. 비록 이들 중 한희진이 문책성 인사로 1946년 8월에 해임되었고, 9월에는 한동찬이 불만을 품고 진남포항을 통해 북한을 이탈하였지만 전문 인력에 대한 우대 정책은 이후로도 지속되었다. 이러한 전문인 우대 정책은 교육기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일제시기에 복무한 교원들은 일정한 재교육을 거쳐 다시금 교육 현장에 복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전문 인력이 극히 부족한 점이 주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북한과 소련군 당국이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에 대한 적발과 처벌을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1945년말 까지 보안대에서 보안원 3,600명이 친일 경력 등 각종 이유로 면직되었는데, 이 수는 전체 보안원의 41.5%에 해당되었다. 경찰조직은 친일청산의 주체였기 때문에 조직 내부의 정화에는 그만큼 철저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친일분자는 ‘반민주주의자’로 규정된 반탁세력과 더불어 우선적으로 척결되어야 할 ‘정치범’들이 지목되어 생존을 위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게다가 1946년 3월에 시행된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목적이외에도 친일세력의 다수가 상층에 포진해 있었던 지주의 소유기반을 박탈함으로써 친일 청산의 효과를 낳았다. 북한 내 7만 호의 지주 가운데 농민과 동등하게 토지를 분여 받는 것에 동의한 4천 호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대다수의 물적 기반은 상실되었다. 북한 당국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조사도 통해 법적 처분을 아울러 진행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947년과 1948년에 279명과 182명이 각각 ‘일본인과의 적극적인 협조행위’로 적발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처벌 받은 이들은 대개 공산 측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친일분자에 대한 법적 처분이 상대적으로 적은 한 가지 이유는 친일 혐의자 상당수가 남쪽으로 도피한 데 있었다. 1946년 11월 3일 북한 최초의 선거인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친일분자로 규정되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사람 수는 총유권자 4,516,120명 가운데 575명에 불과할 정도로 그 수는 미미하였다. 주 북한 소련 민정국이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48년 8월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건너간 사람 수는 84,369명(1946년 - 44,175명, 1947년 - 30,471명, 1948년 - 8개월 9,723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토지를 빼앗긴 지주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산계층’들과 반공 성향의 주민들로서 그 중에 친일세력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다한다. 결국 북한의 친일파 청산 작업과 ‘민주개혁’은 역설적으로 반대세력의 월남을 부추겨 남한이 장차 반공 진지로 변모하는데 일조한 셈이 되었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대체로 친일분자들에 대한 당국의 체포, 구금 등 물리적 조치보다는 이들 다수의 이탈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지속적으로 반공, 반소적 태도를 견지한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생존 및 활동 공간이 철저히 봉쇄당함으로써 생존을 위해서라도 북한지역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 지역에 남은 자들은 체제에 협력하거나 순응하는 길로 나섰고, 그렇지 않으면 ‘친일파’의 멍에를 감당하는 쪽을 택하였다. 친일 혐의자에 대한 물리적 제재의 비중은 전체적으로는 매우 낮은 편이었다. 협력자들은 그들의 참회 정도에 따라 건국사업에 동참할 기회를 부여받았으며, 이는 특히 전문가 그룹에 대한 처우에서 잘 드러났다. 요컨대, 친일분자에 대한 북한 당국의 방침은 ‘배제’와 ‘수용’이라는 이중적 기준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대 기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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