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입력 : 2015.07.09 03:00
8일 오후 1시 25분 수많은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국회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왔다. 굳은
얼굴의 유 원내대표는 직접 쓴 사퇴서를 꺼내 "내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표현은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시위대가 "이명박 정권이 독재를 하고 있다"며 수없이
외치던 구호였다. 유 원내대표의 거취 문제를 둘러싸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워낙 많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런 표현까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그는 지난 2005년 라디오 인터뷰에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보면 너무 민주적으로 하다 보니까 저렇게까지 민주적으로
할 필요가 있나 싶은 그런 순간도 있었다"고 했었다.
유 원내대표는 또 자신이 사퇴를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의원들이 뽑은
원내대표를 대통령이 그만두게 할 수 없다"고 해왔다. 그는 이날도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란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늘
'당 지도부 저격수'의 선봉에 섰었다. 2011년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 체제는 당시 최고위원이던 유 원내대표가 사퇴하면서 무너졌다. 당시 선관위
홈페이지 디도스 공격 여파의 정치적 책임을 홍 전 대표에게 물은 것이었다. 2012년엔 대선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은 뒤 '친박 2선 후퇴'를
주장하며 사퇴를 발표했고, 그 여파로 당시 최경환 비서실장이 물러났다. 지난 2007년엔 이재오 최고위원을 '당 화합'을 이유로 사퇴시켰던 일도
있었다. '정치인이 정치적으로 책임질 때는 책임져야 한다'는 건 유 원내대표의 오랜 소신인 셈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이날 사퇴의
변(辯)에서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고 했다. 이 표현은
그가 박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 기조를 비판하며 중도(中道) 강화를 주장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친박(親朴)계에선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기조를 기초한 사람이 유승민 원내대표"라고 말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운
것이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였다. 그는 당시 박 대통령의 핵심 경제 참모였다. 한 정치학 교수는 "당시에
앞장서서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만들고 홍보했던 사람이 유승민 원내대표"라며 "유 원내대표가 왜 갑자기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고, 중도 강화를
주장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전날 밤을 새워 작성했다는 사퇴의 변 문구 사이에 읽히는
것은 자성(自省)이 아니라 책임 전가와 비난이었다. 물러나는 입장이더라도 그는 어쨌거나 집권 여당의 정책과 국회 대책을 지휘했던 원내대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당과 여권 전체보다는 '자기 정치'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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