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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 공화국의 불화

이강기 2015. 10. 13. 21:41

[양상훈 칼럼] 여왕과 공화국의 불화

 

입력 : 2015.07.02 03:20

박 대통령 모습이 군림하는 王 같다면 대통령과 국민이 다른 시대를 사는 것
여왕이 나라 걱정해도 不通일 수밖에 없다

양상훈 논설주간 사진
양상훈 논설주간

 

박근혜 대통령 계파였다가 결국 등을 지게 된 사람은 많다. 박 대통령의 서울 삼성동 집에서 처음으로 '친박'을 결성했을 때의 멤버 70%가 등을 돌렸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는 "박 대통령은 우리를 신하(臣下)로 여긴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 얘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당 대표와 따르는 의원이 왕과 신하 같았다면 대통령이 된 지금은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느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사실 박 대통령은 보통 사람들 상식으로는 잘 납득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적지 않다. 그는 초선 의원으로 당선되자마자 비서실장을 두었다. 당의 최고간부인 사무총장이나 정책위의장도 비서실장을 두지 않는다. 당 대표만 비서실장을 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굳이 비서실장을 두었다. 전무후무할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나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열렬 친박이었다가 완전히 갈라선 사람이 전하는 말에도 믿기 힘든 내용이 있다. 과거 그 의원이 박 대표를 모시고 차를 타고 이동할 때 박 대표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박 대표 비서들이 앞으로는 운전석 옆 흔히 조수석이라고 부르는 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당 대표와 의원 사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얘기다.

박 대통령은 대표 시절 아무리 국회의원이라고 해도 밖에서 자율적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언론에 '모 의원'이라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슨 말을 하면 끝까지 그게 누군지 찾아내 전화를 걸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이런 전화 한두 번 받게 되면 다들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박 대통령 옆을 떠났다. 한 사람은 "내가 머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말을 하면 모두 일제히 받아 적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 적이 있다. 박 대통령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하는 말을 다 받아 적는 게 뭐가 이상하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 주변엔 신비주의가 있다. 대통령이 언제 출근하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청와대 비서실장도 모를 때가 있다. 세월호 사고 때 그렇게 혼이 나고도 메르스 사태 때 또 담당 장관이 대면 보고를 하는 데 6일이나 걸렸다.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고 답답해한다. 그런데 대통령과 장관의 관계가 아니라 왕과 신하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일들을 보면 이상하지 않다.

전(前) 비서실장 시절 수석들은 업무보고를 대통령이 아닌 비서실장에게도 했다고 한다. 그 비서실장은 "윗분의 뜻을 받들어"와 같은 왕조시대 용어를 써서 대통령을 받들었다. 그러니 대통령과 장관·수석 사이는 군신(君臣)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벌어졌다. 대통령이 장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경질하면 그만이다. 그러지 않고 사상 초유의 면직 발표까지 한 것은 대통령이 법률상 임면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부하나 신하의 불충(不忠)을 응징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을 갖고 있다. 거의 무조건적인 지지다. 박 대통령이 과거 선거 유세에 나가면 어디서나 열렬한 환호에 휩싸였다. 전라도에서도 사람들이 뛰어나와 '박근혜'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다 그대로 달려나와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정치적 지지가 아니라 애정에 가까웠다. 박 대통령 가문(家門)을 향한 애잔한 마음도 섞여 있다. 이런 정치인은 그 말고는 아무도 없다. 박 대통령이 '나는 일반 정치인이 아니다'는 생각을 할 만도 하다.

박 대통령은 열두 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18년간 물러나지 않을 것 같은 통치자의 딸로 살았다. 그를 '공주'라고 부른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는 시대였다. 나중에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까지 했다. 열두 살부터 서른 살까지의 생활이 사람의 인격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모두가 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나온 뒤 18년간은 사회와 사실상 분리된 채 살았다. 공주에서 공화국의 시민으로 자연스럽게 내려올 수 있었던 그 기간을 일종의 공백기로 보냈다. 박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날 언론은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 됐다'고 썼지만 박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때 이미 "공주가 여왕 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 대통령의 불통(不通) 논란에 대해 어떤 이는 '왕과 공화국 사이의 불통'이라고 했다. 대통령과 국민이 다른 시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는 얘기인데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면 진저리를 치는데도 박 대통령이 국회 원내대표를 배신자라며 쫓아내는 데 대해서만은 부정적 여론이 높다고 한다. 왕이 군림하는 듯한 모습을 본 공화국 시민들의 반응일 것이다.

박 대통령이 여왕이라고 해도 개인 이익을 추구하는 왕이 아니라 종일 나라를 생각하는 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아무리 나라 걱정을 하고 잘해 보려고 해도 그게 옛날 제왕식이면 통하기 어렵다. 이번 일로 참 많은 지식인이 환멸을 느끼는 걸 보았다. 몸에 밴 사고 체계와 스타일을 바꿀 수 없다면 '인자하고 겸허한 여왕'이기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