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22 13:52 | 수정 : 2015.07.22 14:00
[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박헌영의 비극적 삶 뒤에 두 여인과의 엇갈린
사랑이④
해방 정국에서 박헌영의 활약은 뜻과 같지 않았다. 그는 조선정판사(朝鮮精版社) 위조지폐사건(1946년 5월
15일)으로 체포령이 내리자 남한을 탈출하여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미군의 수색을 피해 관 속에 숨은 채로 9월 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하다가 평양에 도착했지만 일제나 미 군정보다도 더 가혹한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조선정판사 사건은 조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가고 있다. 공산주의자 탄압을 위해 사건 자체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 쓴 임성옥의 박사학위
논문(한국외국어대학·2015)이 최근에 통과되었다. 내가 조선정판사 사건에 대한 글을 처음 발표했을 때 몇 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그 주모자인
박락종(朴洛鍾)이 정치인 박지원(朴智源)의 할아버지인 것을 알고 썼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박락종이 박지원 의원의 할아버지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느냐”고 물었더니 “향토예비군 교육장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박지원
의원도 싫지만 그런 식의 우익도 싫다. 박헌영은 북한에서 재기할 꿈을 꾸며 1947년 12월 초에 그의 정치적 보루로서 혁명의 전위 계급을
양성하기 위해 강동(江東)정치학원을 창설하여 1948년 1월 1일자로 개원했다. 이 학원이 적어도 남한에서 그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남쪽 출신 360명 가운데 강동 정치학원생이 200명이 넘었다. 남한 출신 학생들은 사석에서
박헌영을 ‘조선의 레닌’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추종했다.
박헌영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소련의 군부가 북한의
지도자로 박헌영과 김일성을 택일하는 문제를 결정한 무렵인 1946년 7월 말, 박헌영이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스탈린이 두 사람을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하는 자리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이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으나 1928년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으며, 일제하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며 10여년 동안 세 차례 투옥
생활을 하면서도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그 과정에서 일본에 전향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북한 대중에게는 박헌영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남한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박헌영은 북한의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박헌영 관련 보도를 본
현앨리스는 우선 아들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갔다가 거기에서 헝가리~러시아~울란바토르~베이징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여정이 20일 정도 걸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했을 것이다. 앨리스가 평양에 들어간 것은 11월 말경에서 12월
초 사이였다.(정병준 교수의 기록) 동토를 통과하기가 몹시 추웠을 것이다. 그는 박헌영이 장관으로 있는 외무성의 타자수 겸 통역으로 채용되었다는
설(박갑동)과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했다는 설(박헌영 기소장), 그리고 박헌영의 비서였다는 설(피터현)이 있다. 그 어느 쪽이든 박헌영과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왜 그 먼 길을 찾아갔을까?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가 아닌 바에야 이념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1953년 2~3월경에 체포되어 1956년 8월 무렵에 처형되었으리라는 것이 정병준 교수의
추정이다.
경향신문(2002년 11월 9일)은 상자기사로 현앨리스의 사진과 함께 그를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소개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가 과연 이중간첩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박헌영에게 씌워진 간첩죄와 그를 통한 공화국 전복 음모의 빌미가
된 것은 사실이다. 북한최고재판소의 ‘박헌영 기소장’에 따르면, 그는 “서울에서 활약할 당시 접선한 연희전문학교 교장이자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보 기관의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元漢慶)에게 고용된 간첩”으로서, “인민군대의 진격으로 단절된 노블(H. J.
Noble)과의 간첩 연락선을 다시 회복할 목적으로 미군이 밀파한 최익환(崔益煥)·박진목(朴進穆) 등과 접선하였고” “1948년 6월
하지(John R. Hodge)의 지령을 받은 미국 간첩 현앨리스를 중앙통신사 및 외무성에 배치시켜 간첩 활동을 지원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1956년 7월에 처형되었다.
인생에서의 야망과 운명
이념의 선악을 떠나 박헌영의 생애는 불우한 시대의 한
지식인의 비극적 생애를 소설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서울로 돌아와 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헌영은
전략적으로 실수했다. 그는 남한의 우익과의 투쟁에 몰두하는 동안에 이미 탈진해 있었으며, 신진 공산주의자인 해외파, 특히 코민테른과의
연계·배려를 소홀히 한 것이 실수였다. 고전적 공산주의자인 그는 이 점에서 순진했으며, 김일성을 너무 낮고 어리게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박헌영은 전술적으로 실수했다.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이 한국 정치의 중심지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서울에 집결했다. 그들이 이곳에서 생존하지
못하고 월북했을 때, 그것은 이미 늦었다. 현지 기반이 없는 그들은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꿈이나 야심은
중요하다. 더욱이 신분 상승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야심은 허물이 아니다. 당대에 일가를 이룬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러나 야망이
전략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재앙의 단초가 된다. 현실정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N. Machiavelli)가 인간의
성공 조건으로 세 가지를 뽑으면서 첫째는 운명이고, 둘째는 덕을 베풂이고, 셋째는 역사가 부를 때 너는 거기에서 준비하고 있었느냐고 물은 것은
그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한 결론이었다. 박헌영의 생애를 보노라면 그의 말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