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비판 - ‘문체미학주의’에 가려진 오류, 그리고 편견

이강기 2015. 10. 13. 22:41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비판

 

‘문체미학주의’에 가려진 오류, 그리고 편견

 

 

 

 

◇이 글은 93년 유홍준교수의 첫 답사기가 나온 지 5년이 지난 현재, 학계 및 일반인들이 유교수의 글에 대해 내린 평가를 다양하게 취재한 것이다. 유교수가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과 지평을 한 단계 넓힌 공적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이제는 유교수의 글이 보여주는 한계를 짚고 한차원 높은 문화유산에 대한 토론을 유도하기 위한 취지다. ‘신동아’는 이 기사에 대한 유교수의 반론, 혹은 학자들의 찬반 토론을 기대한다.

 

 

안영배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지난 8월 하순 여름방학 시즌이 끝을 볼 무렵,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감은사 터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두 개의 삼층석탑이 동서로 마주해 나란히 서 있을 뿐, 별다른 특징이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등에 베낭을 멘 두 여성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한 여성의 손에는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들려 있었는데, 그녀가 책을 펼쳐보며 말했다.

 

『유교수님은 책에서 감은사 탑이 「대지에 굳건히 뿌리내린 팽창된 힘에 유지돼 있어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엄정한 기품이 서려 있다. 석탑 앞에 서면 나는 저 장중한 위세 앞에 주눅이 들어 오금에 힘을 쓸 수가 없다」고 느낌을 말하셨는데, 우리도 한번 체험해보까?』

그러더니 두 여성은 탑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고, 탑 꼭대기를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감은사 탑에 「빠져보려고」 애쓰는 듯했다. 다른 한 여성이 감격한 듯 말했다.

『진짜네, 탑이 살아 있는 거 안 같나!』

두 여성은 탑을 한번 더 그윽하게 살펴본 뒤 유교수의 「답사 교시」에 따라 곧장 대왕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은사 터는 유교수의 책에 소개되기 이전만 해도 일반인에게는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던 곳. 사람들은 감은사 터에서 차로 5분이 걸리지 않는 인근 대왕암(양북면 봉길리)만 바닷가에서 잠시 바라보고 『저 곳이 신라 문무대왕의 뼈가 묻혀 있는 곳이래』하고는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유교수의 책에서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없는 법이라며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하고 감탄을 연발한 이후 감은사 터는 경주 일대 문화유산 답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자리잡게 됐다.

유홍준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2,3권)는 93년 초판(1권)이 100만 부, 2권이 60만 부가 넘게 팔린 초(超)베스트셀러.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고 말하는 이 책은 전국적으로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일으켜 90년대 우리 사회의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자리잡았고, 저자는 광복 이후 미술평론가라는 직함으로는 최초로 「국민적 스타」가 됐다. 그는 『박경리의 토지가 한국의 정신적 GNP를 올려놓았다면, 유홍준은 우리나라의 면적을 열배는 넓혀놓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출판인들은 책이 100만권 이상 팔려나가면 그것은 이미 출판 영역을 넘어선다고 한다. 그런 책이 「발언」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거대한 「담론」이며 「권력」의 속성마저 띤다는 것이다.

지난해 문화유산 답사기 3권이 출간된 기념으로 어느 지방서점이 주최한 「저자와의 대화」에 참여한 유교수는 『(97년12월 대선을 앞두고)문화대통령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대권에 도전할 의사가 없느냐』는 한 독자의 질문에 『저도 대통령입니다』하고 응수했다. 비록 농담으로 말한 것이지만, 문화유산에 관한 한 독자들로부터 이미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권력자의 면모」마저 보이는 것이다. 이제 문화 유산에 대한 그의 평 하나하나는 독자들에게 절대적인 진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더불어 유교수가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자신의 신조로 내건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은 어느새 국민적 화두(話頭)로 자리잡았다.

 

 

 


 

 

「아는 것」이 거꾸로 방해돼

 

 


 

 

기자는 감은사 터에서 유교수가 「가르쳐준 것」을 느껴보려고 애쓰다 떠나는 두 여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유교수와 같은 학교(영남대)에 몸담고 있는 박홍규교수(법학)의 말이 생각났다.

『최근 「아는 만큼 본다」라는 식의 지식주의적인 문화답사가 유행하여 관련 책자를 들고 국내외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러나 지식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갖는 「봄」을 도와주는 것으로 이용될 수는 있어도, 그 지식에 의해 보는 것이 제한당한다면 진정으로 스스로 보는 능력을 제한당하게 될 것이다』( 『아나키, 환경, 공동체』 279쪽)

「아는 것」이란 말은 「모르는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표현될 때 하나의 지식 개념이다. 그런데 그 지식 때문에 보는 것이 제한당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를 유교수처럼 감은사 터를 찾아가 답사기를 발표한 최창조 전서울대 교수(지리학)의 글에서 살펴보자.

「나는 감은사 석탑을 보며 이상한 감흥을 얻은 뒤에, 혹시 이곳의 사찰 입지가 우리 풍수사상의 원형을 찾아낼 수 있는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몹시 흥분했다…(감은사와 지척 거리에 있는) 문무대왕암이 있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에는 대금천(大錦川)이라는 비교적 큰 하천이 동해로 유입된다. 이곳에서 대금천 유로를 따라 북서진하다가 추령을 넘어 서쪽으로 가면 바로 신라의 중핵지인 경주에 닿게 된다. 말하자면 왜구들이 상륙해 경주로 가기 위한 최단 거리의 통로가 이곳에 마련돼 있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서도 왜구를 걱정하고, 심지어 자신의 사후에까지 용이 돼 그들을 막겠다고 이곳에 몸을 묻은 까닭도 결국 이곳이 왜구들의 침입경로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문무왕릉이 있는 대금천 하구에서 육지쪽을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하다. 그 입을 통해 왜구들이 들락거린다. 만약 그 용이 입을 다물어버린다면 왜구들을 씹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왜구의 배들과 도적때를 감은사지의 용이 씹어 삼킨다면 만사는 평안해진다. 이때 대금천 양옆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감은사 삼층석탑 2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식 풍수의 원형이랄 수 있는 신라인의 풍수 비보책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한국의 자생풍수』 1권 101~103쪽)

다음은 최창조교수의 보충 설명.

『문화는 인공이고 풍수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상을 정하는 주체가 사람이기에 풍수도 문화의 눈으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풍수유적 또한 문화유산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사찰은 풍수지리학적 배경을 기반에 두고 있다. 절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는 풍수가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 특히 감은사 터는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우리 고유의 자생풍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감은사 터를 풍수적으로 해석해놓고 보면 ▲왜 문무왕이 죽어 용이 되겠다고 했는지 ▲이 부근에 왜 용(龍) 자 돌림 지명이 많은지 ▲두 개의 삼층석탐은 왜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지가 확연하게 밝혀진다』

감은사 터라는 문화유적을 놓고 유교수와 최교수의 시각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유교수는 감은사 석탑의 미학적인 측면만 크게 부각한 반면, 최교수는 풍수지리학이라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거시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다. 두 시각 모두 우리 문화유산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지만, 독자들이 어느 한 지식에 매몰됐을 때 「보는 능력이 제한당하게」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다.

 

 

 


 

 

북한 문화유산 답사의 편견

 

 


 

 

요즘 한 중앙일간지에서는 유홍준교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가 연재되고 있다. 북한의 문화유산을 현지 답사한 후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본 것」을 기록한 유교수의 글에도 역시 아는 것이 제한당해 생긴 편견이 보인다는 지적이 있다. 유교수는 평양 인근의 고인돌을 답사하면서 귀일리 고인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귀일리 고인돌은 오덕형으로 받침대가 낮은 편이나 덮개들은 상당히 컸다. 덮개들 위에는 별자리 무늬라는 구멍이 곳곳에 파여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별자리로 읽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라북도 남원과 순창에서도 본 바 있는 성혈(性穴) 같았다. 여자의 성기 모양으로 구멍을 파면서 다산(多産)과 풍요를 기원했던 샤먼의 전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유교수는 『96년에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와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가 공동으로 펴낸 보고에 의하면 북극성을 중심으로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헤라클레스, 케페우스 등 여러 별자리가 새겨져 있는데, 각 별의 방향을 계산해보니 4900년 전의 별의 위치』라고 북한측 설명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인돌의 별 무늬는 북한 뿐 아니라 96년 현장을 방문한 일본팀도 별자리로 추정된다고 얘기한 것이다. 일본 대정대의 사이토 다다시(齋藤忠)교수는 『별자리를 의식해 구멍을 판 것이 분명하다』고 해석했고, 한국의 이형구교수(선문대·한국 고대사) 역시 『별 모양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고인돌에서 주목을 받는 것이 북두칠성(윗 그림 참조). 고인돌의 북두칠성 무늬는 꼬리모양이 하늘의 북두칠성과는 달리 생겨서 별 문양이 아닌 성혈이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의 고분인 장천1호분 벽화에 새겨진 북두칠성 그림은 귀일리 고인돌의 그것과 똑같다. 고대인들은 북두칠성을 하늘의 별자리와 똑같이 묘사하거나 꼬리부분을 직선으로 묘사하는 등 일정하게 추상화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물론 유교수가 말한 것처럼 바위에 성혈을 새겨놓은 것도 있다. 그러나 사단법인 한배달(학술단체)에서 「천문(天文)과 고대 역사」를 강의하는 박희준씨(한배달 편집위원)는 『고인돌에 새겨진 별 문양과 성혈은 고대 천문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만 있으면 쉽게 구별된다』고 지적한다.

 

 

 


 

 

천문지식으로 본 소쇄원

 

 


 

 

사실 천문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화유적은 우리나라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홍준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권)에 소개한 전남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다. 유교수는 소쇄원을 우리나라 원림(園林) 중에서 단연코 으뜸이라 소개하면서 『소쇄원 원림은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다』고 감탄한다.

또한 그는 정자에 대해서는 『답사의 초보자들은 이름난 정자에 다다르면 정자의 건물부터 유심히 살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답사라고 생각하는 습성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건물이 아니라 위치이니 정자의 누마루에 걸터앉아 주변을 조용히 둘러보는 맛, 그것이 본질인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런데 소쇄원은 천문 지식을 바탕으로 그 주변을 둘러보지 않으면 참맛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박희준씨의 주장이다. 물론 유교수는 소쇄원에 대한 답사에서 단 한마디도 천문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는데, 다음은 박희준씨가 한배달 학술 세미나에서 「소쇄원, 하늘과 땅과 사람의 어울림」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것을 일부만 요약한 글.

『소쇄원이 있는 담양군 남면 지곡리 일대에는 증암천(甑岩川)이라는 냇물이 광주호로 흘러들어간다. 증암천은 현지에서는 자미탄(紫薇灘)이라고 부른다. 「자미」는 목백일홍나무의 별칭이고,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니 개울 양옆으로 늘어선 목백일홍(배롱나무)의 아름다움으로 얻은 이름일 것이라고 한다.

하필이면 왜 자미꽃을 이곳에 심었을까. 자미탄은 결론부터 말한다면 하늘의 자미원(紫薇垣), 즉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하늘의 중심에서 비롯된 말이다. 말하자면 자미탄은 하늘의 자미원 세계를 인간 세상에 재현해놓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자미탄이 흘러드는 광주호 물속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고인돌 7기(수몰지역의 충효동 지석묘)가 있는데 가끔 물이 마르면 모습을 드러낸다. 소쇄원을 관리하는 양재영씨와 그곳 주민들은 이 고인돌의 옛 명칭이 칠성바위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이 별뫼(星山)라는 이름도 자미원과 연계돼 있다. 정철이 읊은 「성산별곡」의 성산이 바로 이곳이다. 말대로라면 이 지역은 「별처럼 많은 산들」이 흩어져 있어야 하는데, 현지의 별뫼는 여느 남도의 들녘처럼 아늑한 기분이 드는 지형이어서 실제로는 이 지역이 자미원임을 상징하기 위해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자미원에 깃들인 소쇄원을 보면 더욱 천문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소쇄원을 이해하는데 주목해야 할 조영물은 매대(梅臺)와 애양단(愛陽壇)이다. 이 두 개의 건축물은 소쇄원을 관통해 흐르는 시내를 사이에 두고 매대는 서쪽에, 애양단은 동쪽에 있다. 소쇄원의 주인인 양산보(1503~1557)와 사돈간이었던 김인후는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기리는 시를 많이 남겼는데, 그가 읊은 「매대에 올라 달을 맞으니(梅臺激月)」에서 알 수 있듯이 매대는 달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또 애양단은 김인후의 시에서 「볕이 든 단의 겨울 낮(陽壇冬午)」이라고 했듯이 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묘방(卯方)에서 해를 맞이하고 유방(酉方)에서 달을 맞이하여 햇빛과 달빛이 어울리는 집이 소쇄원이다…』

유교수의 소쇄원 답사기와는 180도로 다른 시각이다. 박씨는 이렇게 말한다.

『천문이나 풍수는 우리 문화의 또다른 숨결이다. 그것은 단순히 미학의 개념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감춰진 속살이기도 하다. 천문은 하늘과 사람의 어울림이고 풍수는 땅과 사람의 어울림이다. 우리 문화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어울림의 문화다. 그 어울림을 읽어낼 때 우리 선조들의 품 속으로 들어가는 길도 보일 것이다』

 

 

 

 

 

 

 


 

 

유홍준의 문체 미학주의

 

 


 

 

유교수가 시종 일관 미적 개념으로 우리 문화유산에 접근함으로써 일면만을 강조하는 데에 대한 비판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유교수와 가까운 한 역사학자는 『유교수는 너무 자기 식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고 단정적으로 규정짓는다. 학자로서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것같아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유교수와 친분 있는 학자들, 미술평론가,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문제다.

유교수가 미술사가로, 또 개인적으로 미학적 접근을 하는 데는 누가 뭐라 할 것은 없으나 이미 대중스타가 된 유교수가 사학과 고고학을 넘나들며 문화유산을 단정적으로 평하고 그것을 마치 진실인 양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 유교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목소리는 아직 없다. 서울대 인문대학의 한 교수의 말.

『유교수를 학문적으로 비판하려면 문화유산과 관련한 유교수의 학술서적이나 논문이 있어야 한다. 지금 베스트셀러가 된 「문화유산답사기」는 학술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유교수를 비판하는 것이 마치 유교수를 시샘하는 것처럼 오인될 우려가 있어서 자제하는 분위기도 있다』

그는 학계에서 유교수를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찾기는 앞으로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여하튼 여러 가지 비판이 있어도 유홍준교수의 책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소설가 성낙주씨(서울 창동중교 국어교사)는 유교수의 책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데도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유로 ▲유교수의 유려하면서도 공격적인 글쓰기 ▲문화재와 권력의 감춰진 관계에 대한 폭로 ▲건강한 운동권 정서를 적절히 가미한 것 등을 꼽았다.

여기서 유교수의 뛰어난 글솜씨가 인기를 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유교수를 옹호하는 쪽이나 비판하는 쪽 모두 동의하고 있는 점이다. 사실 그의 글은 아름답다. 그의 문장을 읽으면 그가 이끄는 세계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이는 유교수의 글을 「문체 미학주의」의 백미라고도 평한다.

그런데 유교수가 문체 미학주의에 「빠져들다가」 실수를 저지른 대목도 나온다. 유교수는 책에서, 가람이나 건축물을 볼 때 그것을 품은 주변 자연과의 「행복한 조화」를 통해 아름다움의 해법을 찾는다. 다음은 유교수의 글이다.

「태백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이루며 호기있게 치닫던 노령산맥의 끝자락이 망망한 남해바다를 내다보고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주춤거리면서 이루어낸 분지평야가 삼산벌이고 문득 정지한 지점이 두륜산인 것이다」(1권 65쪽)

백두대간 복원운동을 벌이고 있는 산악인 조석필씨( 「사람과 산」편집위원)는 그의 저서인 『태백산맥은 없다』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노령산맥이 단순히 삼산벌과 대둔산의 아름다움을 수식하기 위한 시적 형용구로 동원됐을 뿐이라고 변명하기에는 서술이 너무 구체적이다. 읽고 있노라면 노령산맥이 태백산에서 해남까지 줄달음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노령산맥은 아마도 소백산맥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라 치고, 지리산까지 내려온 산맥이 어디서 느닷없이 정지하여 해남 대흥사 땅의 두륜산(대둔산)을 일으켰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사실(事實)과는 상관 없는, 저자의 글솜씨뿐이다』(198쪽)

조씨는 이런 부분은 유교수의 책 곳곳에서 눈에 띈다고 말한다. 또 유교수의 저서는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닌, 국토박물관의 바른 길눈이를 자처한 인문지리서이기 때문에 사실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지리가 저자의 글과 상상력을 위해 마음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물건이 아닌 이상, 사실성은 인문지리서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편파적 시각 논쟁

 

 


 

 

한편 유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는 특정 학맥, 특정 학파에 대한 편파적 시각이 개입돼 있다는 주장도 간간이 제기돼왔다. 이 주장은 유교수가 매우 비중있게 다룬 석굴암 문제를, 소설가 성낙주씨가 지난해에 이어 올 7월에 「문화권력 유홍준의 지적 타락-석굴암을 위한 변명」( 『인물과 사상』7호)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데서 나타난다.

현재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학계의 입장은 크게 둘로 양분돼 있다. 목조 전실 등의 현재 상태가 옳다며 기존 입장을 견지하는 쪽과 그것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해온 쪽이 그것이다.

성씨는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석굴암에 대해 『석굴암은 민족 문화유산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는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석굴암을 점령하면 그쪽 분야의 이른바 권력을 장악하고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는 식』이라고 하면서, 유교수의 석굴암 탐구는 객관적 잣대에 기초한 학문의 성과라기보다는 「세몰이식 담론」에 바탕해 이뤄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여기서 세몰이식 담론은 석굴암에 관한 한 철저히 서울대 학맥의 목소리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서울대 미학과 출신인 유교수가 스승뻘인 서울대 김원용교수(작고), 남천우교수(물리학) 등이 현재의 석굴암은 잘못됐다고 한 주장을 옹호함으로써 「인맥 관리」를 하고, 그 반대되는 의견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대목이 없지는 않다. 그는 1권에서 대왕암 발굴을 「최고 권력자의 정치 수요에 편승한 사기극」이라면서 몰아쳤는데, 그 사기극의 「주범」이 돼버린 황수영 박사(전 동국대 총장)가 석굴암 보수 공사에서는 김원용교수와 반대 쪽에서 석굴암을 망친 장본인으로 다시 한번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씨는 또 석굴암 글에서 유교수가 제시한 광창의 존재나 전실부의 개방, 목조 전실의 존재에 대한 주장은 지나친 「미학 지식주의」에 빠져 상식을 벗어난 오류 투성이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반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성씨는 광창이 있어야 한다는 유교수의 주장은 석굴암에 햇살이 들어가야 한다는 「햇살 콤플렉스」가 빚어낸 환상이며, 만약 광창이 존재했을 경우 그곳을 통해 각종 날짐승과 빗물이 들어가 석굴암은 심각하게 망가졌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석굴암과 동시대에 건립된 불국사를 볼 때 외향성의 열린 공간인 불국사와는 달리 석굴암은 내향성의 닫힌 공간이어서 「빛과 어둠과 시간까지도 자신의 내부로 수렴하려는 철저하게 의도된 구조물」이라는 것. 또 목조 전실의 경우 지형과 기후 등의 상식을 고려해보면 전실이 없어야 한다는 유교수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한다.

성씨의 공격에 대해 유교수는 지난해 「교수신문」 인터뷰(97.7.7)에서 특정 학맥에 대한 편파적 시각이라는 지적에 대해 『인맥 관리를 위한 자의적 해석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비판하는 그 자신이 인맥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며 일축했다.

 

 

 


 

 

유교수에 대한 기대와 걱정

 

 


 

 

유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집중돼 부담스러움을 느꼈는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그야말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읽어달라』(교수신문)고 주문한 바 있다. 즉 한 개인의 글로 읽어달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교수의 글을 보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스타에게 쏠리는 엄청난 질시」라고 그를 감싸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어떤 이는 『유교수의 글은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쓰였으므로, 아름다움만 느끼면 됐지 구체적 사실 확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견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유교수의 글은 이제 자신만의 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스타가 된 유교수의 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지난 9월 유교수가 얼마 전 석방된 시인 박노해와 주고받은 대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홍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이네만 지금 연재하고 있는 북한문화유산답사기는 어떻게 보는가.

박노해:남한만의 답사기를 읽으며 나는 간절히 원했습니다. 형님(유홍준)을 북한에 보내 분단 극복에 초석을 놓게 해달라고. 정치 경제보다 먼저 문화, 그중에서도 공동의 뿌리인 문화유산의 속살을 만지고 부비고 본 그대로 써서 남북이 한몸뚱어리라는 것을 확인시켜 달라고. 그런데 정말로 저의 그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형님의 북한답사기는 통일된 정신문화의 상징이요, 그 어느쪽 정권도 거부할 수 없는 통일의 다리를 놓아가고 있다고 봅니다(중앙일보 98년 9월25일자)

시인 박노해의 바람은 개인 유홍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담론을 이끌고 있는 스타 유홍준에 대한 기대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유홍준 교수는 우리 문화의 지평을 활짝 넓혔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부정적인 평가도 받고 있다.

『아는 만큼 느낄 수 있고, 느낀 만큼 보이는 눈은 열어주었을지 모르나, 그 배우고 느끼는 심미적 감각과 학문적 지식을 철저하게 지은이 수준에 맞췄다는 데서 지식인의 문화 독점주의를 읽게 된다』(생태주의 운동가 천규석씨)

『지나치게 글맛내기에 몰두해 본질이 자꾸 흐려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화가 홍성담씨)

『유교수가 엄밀하고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해야 할 곳에서 단정적으로 주장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고 「문화권력」이라는 매우 위험한 칼을 느껴 소름이 끼쳤다』(유교수와 친분있는 사학자)

한 미술평론가는 『미술계에서 유교수는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그리하여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상태다. 그가 그런 위치를 이용해 타락하지나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이제는 유교수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열린 토론과 논쟁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그것이 곧 대중에게 문화유산에 대한 한층 승화된 인식을 제공하는 길 아닐까. (신동아 1998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