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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流국가 연구/프랑스의 전쟁과 평화: 獨佛 전장 알자스 로렌 紀行

이강기 2015. 10. 14. 09:42
一流국가 연구/프랑스의 전쟁과 평화: 獨佛 전장 알자스 로렌 紀行
 

獨佛 전장 알자스 로렌 紀行

趙甲濟   

 一流국가 연구/프랑스의 전쟁과 평화: 獨佛 전장 알자스 로렌 紀行
 
 
  佛, 20∼32세 남자 半이 戰死(1차대전)!
 
  기자는 지금 보잉 747의 점보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늘(3월20일) 오후 1시30분에 김포 공항을 출발하여 11시간30분 뒤 파리의 드골 공항에 도착하는 대한항공편이다. 지금 한국 시간으로 오후 8시10분, 시베리아 상공을 날고 있다.
 
  이번 여행은 月刊朝鮮과 한진관광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역사문화 기행 그 세 번째이다. 주로 라인강 주변의 프랑스(알자스 로렌 지방), 독일 남부(바덴바덴 등), 스위스(제네바 등)의 중소도시를 여행할 계획이다.
 
  인천 공항을 출발하기 직전에 부시 美대통령의 開戰 성명이 있었으니 지금쯤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드골 공항에 내릴 때까지는 정확한 戰況은 모르는 것으로 해두려고 한다.
 
  이번 여행 경로 주변에는 세계사를 바꾼 戰場이 많이 있다.
 
  1815년 6월18일에 있었던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 엘바섬을 탈출하여 황제에 복귀했던 나폴레옹은 여기서 영국의 웰링턴 장군에게 패전하여 대서양上의 孤島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귀양가서 거기서 죽었다. 워털루 전투 하룻동안 죽거나 다친 군인은 4만 명이 넘는다. 한국전쟁 3년간 죽은 미군 수와 비슷하다.
 
  프랑스 아르덴느 지방의 세단. 1870년 9월1일 이곳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군대 10만 명이 프러시아의 참모총장 大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20만 대군에 패전하여 항복했다. 普佛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독일의 수십 개 연방국가를 통합하여 통일독일제국을 건설한다.
 
  세단에서 프랑스 사령관은 항복 교섭을 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軍이 명예롭게 항복하도록 해주시오. 우리는 무기를 갖고 편제를 갖추어 퇴각하고, 다시는 프러시아 군대와 싸우지 않겠소. 이렇게 해야만 장차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과 복수전이 없을 것이오』
 
  이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는가. 프랑스는 지난 2세기 동안 우리 독일을 서른 번이나 침략하였다는 것을.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민족이 통일국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부 독일의 작은 나라들이 프랑스의 영향권에서 독립하여, 독일帝國에 편입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를 꺾어야 수백년 동안 독일민족이 당했던 피해에 대해 복수를 하면서 독일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프랑스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비스마르크는 普佛전쟁을 역사적인 복수전으로 이해한 측면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는 기간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王 빌헤름1세를 독일帝國의 황제로 추대하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독일민족으로서는 통쾌한 복수의 상징적 행사였지만 프랑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독일이 유럽의 패권 국가로 등장하다
 
  1870년 프러시아가 普佛전쟁에서 이기고 그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통해서 알자스와 동부 로렌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간 것은 크나큰 후유증을 남겼다. 알자스는 주민이 원래 독일 사람들이었지만 로렌은 프랑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그 뒤 사사건건 독일과 적대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대항하려는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일단 프랑스와 손잡으려고 했다. 프랑스-독일의 리턴 매치는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알자스 합병에서 이미 예비된 셈이다.
 
  普佛전쟁은 유럽 및 세계사의 흐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유럽의 패권국가이던 프랑스를 꺾음으로써 독일이 유럽의 주도권을 쥐면서 「팍스 브리타니카(大英帝國의 패권下 평화)」 질서에 도전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를 견제하면서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왔다. 유럽의 세력 추가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되자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독일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외교 전략을 선회한다. 제1,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군이 되어 독일에 대항한 것은 普佛전쟁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육상의 패권을, 영국이 해상의 패권을 쥐게 됨에 따라 세계 시장에서 두 나라가 각축하게 되었다. 이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양국은 산업화를 통한 국방력 증강을 도모하게 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군사력 건설 경쟁에 뛰어들었다.
 
  普佛전쟁은 전략 전술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병보다 포병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병력을 동원하고 집중시키는 데 철도망의 중요성이 입증되었다.
 
  ▲프러시아 군대의 참모조직이 세계 군사조직의 모델이 되었다.
 
  ▲과학기술력과 士氣가 승리의 요인이었다. 즉 이기겠다는 의지와 수단이 승리의 어머니란 사실이 이 전쟁으로 새삼 정리된 것이다.
 
  북한 핵개발을 저지해야 할 한국인들은 그런 의지를 갖고 있는가. 金大中 정권은 국민들의 그런 승리 의지를 파괴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은 위선자(또는 반역자)이다. 북한정권에 이길 수단이야 한국이 많지만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이다. 북한정권은 의지는 있는데 수단이 없는 경우였으나 핵무기를 개발하면 그 수단까지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普佛전쟁에서 진 프랑스는 그 뒤 44년간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1914년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벨기에를 침공하여 거대한 우회전으로 파리를 향해서 진격할 때 프랑스 사령관 조프레는 이 예봉을 파리 근교 마른느에서 꺾었다. 마른느에서 진격이 저지된 독일군은 속전속결의 승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 뒤 독일군대와 프랑스-영국 군대는 서부 전선에서 참호전, 독가스전을 계속하면서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어갔다. 마른느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꾼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베르당 전투나 솜느 전투가 더 대규모였지만 전략적 의미는 마른느 전투가 더 무겁다).
 
  이 마른느 전투를 총지휘한 독일의 참모총장은 小몰트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서 普佛 전쟁 세단 전투의 승리자 大몰트케의 조카였다. 마른느 패전의 충격으로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한 小몰트케는 2년 뒤 병사하였다. 프랑스로서는 몰트케 집안에 대한 복수도 한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에 나이 20~32세 사이의 프랑스 젊은이들(남자) 중 半이 전사했다. 140만 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이 유럽전쟁에서 죽었다. 우리 여행단이 내일 들르게 될 베르당도 유명한 戰場이다.
 
 
  라인강 주변의 전쟁과 인간
 
  1916년 2월 독일軍은 이 베르당 요새를 수십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한다. 목표는 점령이 아니라 섬멸이었다. 독일은 프랑스軍을 이 결전장으로 끌어들여 5(프랑스)대 2(독일)의 비율로 죽임으로써 병력의 원천을 고갈시키겠다는 전략목표를 두고 있었다. 페탕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軍은 영웅적인 방어전을 펼쳐 獨佛 양쪽의 사상자가 비슷해졌다. 근 10개월을 끈 이 전투에서 쌍방 합쳐서 약 80만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主전장은 라인강 연변 서부전선(독일 측에서 보았을 때)이었다. 대포, 기관총, 참호, 나중엔 비행기와 탱크도 등장한 총력전이었다. 그 전의 전쟁은 결전을 몇 번 하면 어느 나라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1차 세계대전부터는 그 나라의 국력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하는 총력 소모전이 되었다.
 
  우리는 모레 마지노 지하 요새를 구경할 예정이다. 마지노 요새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너무나 많은 인명손실을 기록한 프랑스가 그런 희생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만든 지하요새였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선을 따라 10년간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요새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1940년 5월 독일군이 마지노 요새를 우회하여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대군의 옆구리를 강타하여 기절시켜버린 바람에 요새를 써먹지 못한 것이다.
 
  이때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아르덴느 돌파작전을 감행했다. 아르덴느는 벨기에의 숲지대인데 탱크부대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프랑스의 판단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아르덴느 숲의 前方에는 아주 미약한 방어선을 폈고, 벨기에 북부전선에 主力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벨기에 북부전선을 主攻으로 하는 것처럼 페인팅 묘션을 취했다.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작전을 또 쓴다고 판단하여 주력군을 벨기에 쪽으로 北進시켰다.
 
  이 틈을 탄 독일군은 기갑군단을 핵으로 한 주력군으로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난 뒤 프랑스의 약한 방어선을 돌파하여 프랑스 주력군의 배후로 나왔다. 롬멜, 구데리안 등 맹장들이 지휘하는 전차부대는 무인지경을 가듯이 쾌속 진격을 하여 도버해협까지 나가 프랑스 주력군과 파리 방어군을 양단하고 주력군을 북쪽에 고립시켰다. 프랑스는 6주 만에 붕괴되었다.
 
  독일군은 문짝의 경첩에 해당하는 부분을 강타하니 문짝이 날아가는 것과 같은 효과를 거둔 것이다.
 
  히틀러는 1914년 마른느 패전의 복수를 한 것이다.
 
  베르당 승리의 영웅이었던 프랑스의 페탕 원수는 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와 협력하여 프랑스 남부에 비시 정부를 만들어 나치에 협력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드골이 한때의 상관이던 그를 종신형으로 감형시켰다.
 
  이처럼 라인강 주변은 수많은 군대와 전쟁영웅들이 승리와 패전을 거듭하면서 영화 같은 인간 희·비극을 연출한 곳이다.
 
  러시아에서 피레네 산맥(프랑스와 스페인 국경)까지는 거의 대평원이다. 이런 곳에선 대규모 기병전이나 기갑전이 전광석화처럼 벌어진다. 산악이 많아 기갑전의 효과가 강하지 못한 한국과는 다르다. 유럽은 또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다 보니까 전쟁이 많았다. 전쟁의 비극을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체험한 사람들이 유럽인들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은 전쟁이 적었던 곳이다(특히 동양에선 종교전쟁이 없었으므로). 그러다 보니 군사문화와 군사과학이 발달하지 못해 결국은 서구 열강의 먹이가 된 면도 있다.
 
 
  독일 에너지의 대폭발·대재앙
 
  서기 1517년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해였다. 가톨릭에 도전한 루터로 인해 유럽은 종교전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신교 편인가, 구교 편인가. 유럽국가, 귀족, 군대, 신도들은 양자택일해야 했다. 그것은 또 죽음이냐 생존이냐의 선택이기도 했다. 프랑스에선 왕들이 신교도로 개종했다가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 쫓겨나고 암살되곤 했다. 결국 프랑스에선 가톨릭이 승리한다.
 
  종교개혁의 진원지인 독일은 17세기 초 본질적으로는 종교전쟁이지만 국제전쟁으로 비화되는 바람에 성격이 복잡해진 30년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스페인, 스웨덴, 프랑스가 독일에 군대를 보내 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때 독일은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 30년 전쟁으로 독일 인구의 약 35%가 죽었다고 한다. 인구비례의 피해로는 1, 2차 세계대전보다 더 심했다. 이 때문에 독일은 프랑스보다도 후진국이 되어버린다. 약 200년이 지나서야 독일은 프랑스의 국력을 따라잡게 된다. 내전에 잘못 빠지면 몇 세기를 공친다는 이야기이다.
 
  외교의 천재 비스마르크와 군사의 천재 몰트케가 합작하여 성공시킨 프러시아 중심의 독일통일은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독일을 분열상태로 두어야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그런 정책을 안보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普佛전쟁은 프랑스의 이런 對獨 간섭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게르만族은 로마시대부터 그 용맹을 날렸다. 로마도 이 야성적 부족을 복속시키지 못했다. 로마 시대의 라인강은 문명의 최전선이고 야만이 시작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라인강 동쪽 숲속의 주인공들인 게르만族은 결국 5세기에 西로마 제국을 멸망시킨다. 게르만族의 대이동이 그것이다. 지금 몽골에 있었던 흉노族이 기원 전 1세기 중국 漢武帝의 토벌전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서기 4세기에 갑자기 유럽에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들 기마군단은 훈族으로 불렸다. 훈族이 게르만族을 치니 게르만族은 로마영내로 밀려들었고 로마 문명이 파괴되었다.
 
  게르만族은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을 휩쓸었다. 이들도 결국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문명화된다.
 
  게르만族의 피를 이어받은 독일인들은 집단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종족이었다. 와그너의 장엄한 음악, 니체의 超人철학, 히틀러의 선동력·조직력·과학정신, 음악·관념철학 등 독일인들은 아주 깊고 복잡하며 어두운 내면을 갖고 있다고 한다.
 
  순수음악과 관념철학은, 절대를 추구하는 이 독일인들의 영혼을 보여 준다면 과학정신과 조직력은 이 사람들의 실용정신을 보여 준다.
 
  독일통일은 이 에너지를 큰 그릇에 담는 일을 했다. 통일국가란 조직 안에 들어간 독일인들의 에너지는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 주었다. 거의 혼자서 세계 전체를 상대로 두 번에 걸쳐 10년 전쟁(1, 2차 세계대전)을 벌인 독일이 아닌가. 독일과 단독 결전을 해서 이길 나라는 미국뿐이다.
 
 
  獨佛의 각축장:알자스 로렌
 
  그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후 갈라져 있다가 하나가 되는 데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미국의 부시(아버지) 정부였다. 독일의 콜 수상은 부시의 지원下에 프랑스와 영국의 방해를 물리치고 고르바초프의 소련을 설득하여 1년 만에 독일통일 사업을 끝냈던 것이다. 이 독일이 이라크 전쟁에서는 미국에 반기를 들고 나왔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는 세상이다.
 
  月刊朝鮮 여행단이 방문할 알자스 지방은 여러 小도시국가 형태로 있다가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조약 이후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이 조약은 30년 전쟁을 끝낸 평화조약으로서 그 뒤 약 200년간의 유럽 판도를 결정했다. 알자스와 로렌 지방의 일부는 1870년 普佛전쟁 이후 독일 영토가 되었다. 1918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가 1940년부터 4년간은 나치 독일 치하에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구교를 믿는 독일계 사람들이 主였다. 이들은 종교전쟁 중 舊敎가 많은 프랑스 편을 들었다. 종교가 민족보다도 앞선 경우다.
 
  로렌 지방은 1766년에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 전에는 퇴위한 폴란드 前 왕(스타니슬라스 1세)의 영지였다. 히틀러가 2차 세계대전 때 알자스 지방을 점령한 뒤에는 프랑스語를 쓰면 감옥에 보내기도 했다.
 
  알자스 사람들은 수십만 명이 스위스나 프랑스 남부의 비시 정부 쪽으로 피신했다. 알자스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나치 군대에 들어가 부역했는데, 이들은 전쟁 후 돌아온 알자스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6·25 전쟁 때 서울을 탈출했던 일부 사람들이 9·28 수복 후 돌아와 渡江派를 자칭하면서 남아 고생하던 사람들을 공격한 일이 생각난다.
 
 
 
  [인간 도살장 베르당을 가다]
 
  「평화의 도시」로 변신
 
  우리 여행단은 3월21일 오후 프랑스 로렌 지방의 베르당을 찾았다. 오전에 우리는 샴페인 포도주로 유명한 샴파뉴 지방의 에페르네市에 있는 모에 샹동 회사를 방문하여 점심 때 고급 샴페인을 곁들인 식사를 대접받았다. 모에 샹동 회사는 地下에 땅굴 같은 총연장 28km의 샴페인 보관 창고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약 9000만 병이 숙성중이었다. 인구 2만7000명인 에페르네市의 지하에 나 있는 샴페인 보관 땅굴의 길이는 100km.
 
  한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전후하여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너무 도취하여 축하를 서둘러 하는 바람에 오만해졌다는 뜻이다.
 
  점심 때 내 앞에 앉은 홍보담당 부사장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왜 샴페인이 축하주로 쓰이는지 물었다. 사람 좋은 인상의 부사장이 하는 이야기는 전설 같았다. 나폴레옹은 이 회사 주인과 친해 戰場에 나갈 때 이곳에 찾아와 샴페인을 자주 마셨다는 것이다. 1815년 6월18일 워털루 결전이 있기 전 나폴레옹은 이 양조장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대신 프러시아, 러시아, 영국의 장군과 왕족들이 모에 샹동의 샴페인을 마셨다는 것이다.
 
  워털루 결전에서 나폴레옹은 패배하고 영국과 프러시아 군대는 이겼다. 모에 샹동의 사장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샴페인을 마시면 전쟁에서 이긴다, 샴페인엔 행운이 따른다는 소문을 군인들 사이에 퍼뜨렸다.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징벌하기 위하여 참전했던 연합군이 돌아갈 때 이 영업사원들은 군인들 대열에 끼어 샴페인 선전을 하면서 돌아다녔다고 한다. 삽시간에 샴페인을 마시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문이 유럽의 王家와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탈레랑은 나폴레옹 실각 후의 비엔나 회의 때 각국 대표들에게 샴페인을 선물하여 환심을 샀다고 한다.
 
  샴파뉴 지방의 에페르네를 출발하여 로렌 지방으로 들어가 베르당까지 가는 길 주변은 풍요한 들판이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여러 번 영토를 주고받은 격전지로 가는 길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베르당에 가까워오니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의 간판이 자주 나타났다. 1916년에 프랑스와 독일군이 300일간의 격전에서 80만 명의 젊은이들을 희생물로 바친 도시가 「평화의 도시」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 지도부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근년엔 양국 頂上이 베르당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兩國의 화해를 다짐하기도 했다.
 
  베르당은 인구 2만 명의 작은 마을이다. 로마시대인 서기 3세기부터 게르만族과 접경한 古都였다. 中世의 성당이 있다. 이 마을 입구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영어 가이드(여성)를 태웠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베르당 전투가 벌어졌던 야산으로 향했다. 높이가 수백 m에 지나지 않는 丘陵地(구릉지)였다. 달 표면처럼 움푹움푹 들어간 포탄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포탄자리가 하도 많아 평탄한 곳이 전혀 없는 산비탈이었다. 지금도 숲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한다. 불발탄을 건드려 다치고 죽는 사고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13만 명분의 유골
 
  베르당 전투 참전자는 현재 프랑스에서 수십 명만 생존해 있다고 한다. 南佛 출신 군인들이 이곳 전투에 특히 많이 참전했다. 베르당 지역에는 독일군인들의 공동묘지도 수십 개 있다.
 
  프랑스의 가장 큰 공동묘지는 야산 頂上 두모 요새 근방에 있다.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1만5000명의 무덤과 無名전사자 유골 13만 명분이 보존되어 있다. 13만 명의 유골이 어떻게 보존되어 있는가. 길이 137m의 석조 건물에는 창이 많이 나 있다. 그 창을 들여다 보았더니 안이 온통 유골더미였다. 해골, 팔 다리 뼈, 가루가 된 것 등등. 이 유골 위에 거대한 전당이 섰다. 긴 회랑 안에 石棺이 놓여 있다. 석관 안에는 유골이 없다고 한다. 높이 46m의 충혼탑, 교회, 타고 있는 촛불….
 
  세계 戰史에서 베르당처럼 좁은 지역에서 많은 戰死者가 생긴 전장이 없다. 읍 정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고지전, 진지전, 포격전, 백병전으로 젊은이 80만 명이 죽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13만 명분의 유골이 꽉 들어 차 있는 거대한 석조 건물 전체가 棺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베르당 전투를 기획한 사람은 小몰트케(普佛전쟁의 원훈인 몰트케 원수의 조카)가 마른느 결전에서 패배하고 사직한 이후 참모총장이 되었던 팔켄하인 장군이었다. 그의 베르당 전략개념이란 것이 이곳을 인간 도살장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고지 점령도, 도시 점령도 아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프랑스 군인들을 이 요새지역으로 끌어들여 도륙함으로써 프랑스의 병력자원을 고갈시킨다는 무지막지한 전투였다.
 
  이 두모 국립묘지로 오는 산길 옆에 동상 하나가 있다. 내려서 다가가 보니 「Andre Maginot」라고 쓰여 있었다. 아, 마지노선을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하는 놀라움! 마지노는 의사였는데 베르당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나자 지원하여 참전했다가 부상하고 불구자가 되었다.
 
  戰後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獨佛 국경선을 따라 마지노 요새를 건설하기로 한다. 그는 고향 베르당에서 벌어진 살육전을 장차전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인명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요새를 생각해 낸 것이리라. 인간이란 존재는 역시 과거와 체험의 포로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프랑스의 발상지 랭스 대성당 이야기]
 
  佛王들의 대관식 장소
 
  우리 여행단이 첫날 묵었던 샴파뉴 지방 에페르네와 아주 가까운 곳에 랭스(Reims)란 古都가 있다. 이곳에도 노트르담 성당이 있다. 노트르담이란 佛語로 「우리의 聖母」란 뜻으로 파리, 스트라스부르, 샤르트르 등 여러 도시에 同名의 성당이 있다.
 
  랭스 성당은 13세기에 건축을 시작하여 16세기에 첨탑이 올라가고도 계속 증축, 파괴, 개축을 되풀이한 역사적 건물이다. 크기는 길이 138m, 폭이 38m로서 스트라스부르 성당과 비슷한 규모이다. 역대 프랑스 왕들의 대부분이 이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나폴레옹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올렸다. 英佛 백년 전쟁 때 활약한 잔 다르크는 로렌 지방 출신인데, 15세기 이 소녀의 敢鬪(감투)정신으로 왕이 된 샤를 7세도 이 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고 그 옆에 잔다크가 서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잔 다르크는 파리 공략에 실패하고 부르고뉴軍에 포로가 된다. 프랑스의 심장부 沃土(옥토)를 장악하고 있던 부르고뉴 公國은 영국과 연합하여 프랑스 왕국과 싸우고 있는 입장이었다. 당시 부르고뉴는 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지방까지 통치한 강국이었다.
 
  英佛 백년 전쟁에서 영국이 이겼더라면 프랑스가 부르고뉴에 합병되었을 것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르고뉴는 프랑스를 배신하여 敵國에 붙은 것처럼 되지만 당시는 요사이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 단위의 국민국가가 탄생하기 전 王朝 시대였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부르고뉴 公國은 잔 다르크를 영국군에 넘겼고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다시 파리의 종교재판소에 넘겼다. 종교재판소는 이 소녀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화형에 처해 버렸다.
 
  랭스 대성당이 프랑스 王家의 정통을 잇는 상징적 聖所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램스가 프랑스라는 나라의 건국과 관계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기 3~5세기는 게르만族의 대이동 시기였다.
 
  고트, 반달 등 여러 부족의 게르만族이 지금의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즉 문명세계로 몰려들어가 결국은 로마제국을 멸망시키게 된다.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나타난 것은 프랑크族이었다. 프랑크族은 소수 지배층이 되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왕국을 건설했다. 이 프랑크族의 王 클로비스는 서기 498년 랭스 지방의 주교로부터 傳道(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한다.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세워진 곳이 바로 그 改宗의식의 장소라고 한다.
 
  프랑스란 말은 프랑크란 말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의 프랑스 사람들은 그 구성이 라틴·게르만族의 혼합 등 아주 복잡한데, 國名은 지배층의 출신을 반영하여 게르만 부족 이름을 채용한 것이다.
 
  서구 문명세계를 점령한 게르만族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그리스-로마-기독교 문화의 파괴자가 아닌 계승자가 된다. 이는 중국을 점령한 여러 북방 유목민족이 漢字-유교문화를 흡수하여 중국화된 것과 비슷하다. 야만이 문명을 점령한 뒤 문명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과정이 동서양에서 비슷하게 진행되었다(지금까지도 중국화를 거부하여 정체성을 지킨 몽골은 예외이다).
 
 
  美佛 우호의 상징물들
 
  프랑크族이 세운 프랑크 왕국은 8세기말 9세기 초에 걸쳐 샬레망 大帝 시절(영어로는 찰스 대제)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프랑크 왕국은 최초의 西유럽 통일국가라고 불린다. 샬레망 대제는 동쪽에서 스페인을 점령한 뒤 밀고들어오는 이슬람 군대를 막아 西유럽의 기독교세계를 수호했다. 서기 800년 그는 神聖(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중부유럽의 느슨한 연방제 국가였다. 그 황제 자리는 전통적으로 독일왕이 차지했고, 나중엔 비엔나에 본부를 둔 합스부르그 왕조가 맡았다. 나폴레옹에 의해 황제란 명칭이 없어지는 1806년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함께 유럽의 兩大 세력을 대표했다. 즉 王權과 敎權의 대표자였던 것이다.
 
  샬레망 大帝가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프랑크 제국(수도는 지금의 독일 아헨)은 아들들 사이에서 지금의 독일 땅과 프랑스 땅 등으로 분할되었다. 알자스 지방은 9세기 말 이후 프랑스와는 떨어져 독립적으로 700년간(17세기까지) 도시국가로 존재했다.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제1차 세계대전 때 獨佛軍의 격전지가 되어 많은 포격을 받았다. 戰後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성당은 복구되었다. 1945년 5월7일 나치 독일군은 랭스市에 본부를 두고 있던 연합군 사령부의 아이젠하워 사령관에게 항복했다.
 
  알자스의 古都 콜마에 가보았더니 조각가 아우구스트 바톨디의 生家가 있었다. 바톨디는 뉴욕의 「자유의 여신像」을 만든 사람이다.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 때 워싱턴 장군을 도와 영국군을 무찔렀다. 그런 인연으로 미국 독립기념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국민들이 선물한 것이 자유의 여신像이었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프랑스가 비판적으로 나오는 가운데 알자스 지방을 여행했는데, 美佛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건물과 기념물과 인물들이 특별히 많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알자스 로렌 지역은 1,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를 도와 독일군과 싸우다가 죽은 미군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특별히 많은 곳이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새긴 역사]
 
  정오의 타종, 성당이 거대한 악기로
 
  베르당 요새를 구경한 우리는 여행 이틀밤을 로렌의 중심지 낭시市에서 보냈다. 벨기에 출신의 버스 운전사가 낭시 시내에 들어가 호텔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老人에게 길을 물었다. 이 老人이 버스에 올라타 운전사 옆 자리에 앉아 호텔까지 데려다 주었다. 여행중 이런 경우가 세 번 있었다. 우리 호텔은 낭시市의 한가운데 스타니슬라스 광장에 면해 있었다. 이 광장은 로렌 지방을 통치했던 스타니슬라스 1세가 만든 것인데 광장 주위 일곱 개의 문이 예술적이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여행 3일째 우리는 낭시를 출발하여 알자스의 州都 스트라스브르로 갔다.
 
  샴파뉴, 알자스, 로렌은 현재는 獨佛 국경선의 프랑스 측이지만 시저가 이곳을 점령한 기원 전 1세기경에는 로마 문명과 게르만 야만族의 경계선이었다. 당시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은 대체로 라인강과 일치한다. 이곳은 문명과 야만, 新敎와 舊敎, 프랑스 세력권과 독일 세력권의 충돌지역이었으므로 자주 戰場으로 변하기도 했다. 이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 1949년 유럽회의, 그 뒤에 유럽의회가 본부를 두게 된 것도 유럽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 되풀이 되었던 激戰場에 평화와 협력의 상징을 세운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지방의 큰 건물에는 역사의 파란만장이 새겨 있다. 여기서는 過客이라도 건물이 곧 역사임을 안다. 스트라스부르市 한복판에는 노트르담 대성당이 서 있다. 붉게 녹슨 성채를 연상시키는 나이 千歲의 거대한 건물이다. 이 건물의 독특한 색깔은 붉은 沙岩을 썼기 때문이다.
 
  평면도로 보면 이 성당은 60m×120m, 본건물의 높이는 60m, 첨탑의 높이는 142m이다. 정오에 이 성당의 유명한 천문시계가 打鐘(타종)할 때는 건물 전체가 오르간처럼 되어 오묘한 소리를 낸다. 거대한 성당이 거대한 악기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 여행단이 그 타종 소리를 들었을 때는 청명한 하늘 아래였다.
 
  天上의 교향악! 동행한 한 건축가가 감격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성당은 다른 중세 종교건물이 다 그렇지만 神과 인간의 합작품이다. 아니, 神이 인간을 부려서 스스로 만든 건물이다』
 
 
  종교개혁으로 신교에 뺐기기도
 
  이 건물은 고딕 성당 가운데 최고 걸작품으로 꼽힌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명단(대성당을 중심으로 한 옛시가지)에 들었다. 이 건물이 건설되기 시작한 해는 서기 1015년. 헤라클레스 신전 자리였다고 한다. 그 뒤 1880년까지 끊임없이 증축과 개축과 보수가 이어졌다. 지금도 보수공사가 진행중이다. 약800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새 건물과 새 시설이 붙어 나갔다. 그 사이 정권과 국적과 종파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이 건물을 헐어버리자는 이야기는 없었던 모양이다.
 
  스트라스부르 성당의 첨탑은 하나뿐이다. 다른 고딕 성당은 보통 두 개이다. 기자가 1994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식당 웨이터에게 물었더니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한 첨탑이 파괴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연합군이 프랑스의 문화재를 그렇게 파괴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문헌을 찾아보니 처음부터 첨탑은 하나뿐이었음을 알았다.
 
  스트라스부르 성당 건축은 11세기에 시작되어 15세기에 1단계가 완성되었으나 그 뒤 계속해서 새로운 건물과 시설이 덧붙여졌다. 총 13단계의 증축이 있었다고 한다. 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횃불을 올려 바티칸의 舊敎에 도전장을 내면서 유럽 세계는 종교분쟁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든다. 그 뒤 130년간 계속된 내란, 내전,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이 소용돌이의 절정은 17세기 초 독일을 主무대로 한 30년 전쟁이었다.
 
  스트라스부르가 있는 알자스 지방 사람들은 거의가 독일계통 인종이었다. 1523년 종교개혁파가 이곳에서 권력을 잡았다. 스트라스부르 성당도 치열한 투쟁의 결과 개혁파의 차지가 되었다. 알자스 지배층이 舊敎 편을 선택하여 프랑스의 영토가 된 후인 1681년(루이 14세 때) 이 성당은 다시 舊敎 측에 넘겨졌다. 루이 14세는 알자스 로렌 지방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인물이었다.
 
  프랑스 혁명중에는 이 성당內의 聖像 230개가 파괴되었다. 1870년 普佛전쟁 땐 프러시아軍의 포격이 쏟아졌다. 13발이 첨탑을 강타했으나 부러지지는 않았다. 1944년 연합군의 공습 때도 몇 발을 얻어맞았다.
 
  이 성당內에는 천문시계탑이 있다. 예술과 과학과 기술이 결합된 이 시계탑은 천문적인 통계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면서 낮 12시30분(이 시계는 30분이 빠르므로 실제론 정오)엔 天上의 음악과 같은 타종 소리를 들려 준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트라스부르는 獨佛 접경지역의 교통요지이다. 이름 자체가 「길의 도시」란 뜻이다. 그 때문에 이 도시는 침략자와 방어자 사이의 戰場으로 변해 파괴되고 재건되고 다시 불타고 다시 재건되는 역사를 이어갔다.
 
  이 도시는 격전지였던 만큼 여러 문명의 교차로였고 그러다 보니 아주 혁신적인 분위기를 가졌다. 구텐베르크는 독일의 마인츠에서 1395년에 태어났다. 그는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서 스트라스부르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금속 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연구했다.
 
  활자 인쇄술의 발전은 그동안 신부들이 독점하고 있던 성경읽기를 일반인들에게 확산시켜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다.
 
  젊은 모차르트는 이 도시에서 연주회를 열었고, 괴테도 이곳 대학에서 공부했다. 1770년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위해 비엔나에서 파리로 가는 길에 이 성당에서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혼란 속에서 처형된다.
 
 
  프랑스의 國歌 「라 마르세이에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스트라스부르는 그 진보적 성향 대로 혁명 지지 쪽으로 기운다. 프랑스의 유명한 國歌 「라 마르세이에즈」는 마르세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혁명열기 속의 스트라스부르 市長이 1792년엔 출정하는 라인강 지역 지원병을 위하여 리슬이란 장교에게 작곡과 작사를 부탁했다.
 
  이 사람이 하룻밤 만에 만든 것이 「라인 군대를 위한 軍歌」였다. 이 노래가 유명해진 것은 마르세유 지원병이 파리로 행진하면서 이를 불렀기 때문이고, 그래서 곡목이 「라 마르세이에즈」로 바뀌었다. 1795년에 프랑스 國歌(국가)로 정해졌다.
 
  2차 세계대전중에 제작된 명화 「카사블랑카」는 독일군이 점령한 모로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카사블랑카市의 한 술집에서 벌어지는 노래 대결 장면이 있다. 독일 장교가 악단에 군가를 연주하도록 시킨다. 비밀 레지스탕스 운동을 하는 청년이 화가 나서 악단에 「라 마르세이에즈」를 연주하도록 주문하니 술집에 앉아 있던 프랑스 사람들이 일어나 열정적으로 합창한다. 이 영화의 가장 감격적인 대목이다. 한국인이 보아도 감격할 정도이니 노래의 선동성은 정말 대단하다. 애국심이 조직적으로 高揚될 때의 힘을 실감케 한다.
 
  [라 마르세이에즈 가사]
 
  〈- 1절 -
 
 
  가자 조국의 아들들아
 
  영광이 날이 왔다 !
 
  압제에 맞서
 
  피묻은 깃발을 들었다 (두 번)
 
  들판에서도 들리는가
 
  저 포악한 병사들의 외침이
 
  그들이 여기까지 닥쳐와
 
  당신의 자식과 아내를 죽이려 한다
 
  (후렴)
 
  무장하라, 시민들이여
 
  무리를 지어라
 
  행진하자, 행진하자 !
 
  불순한 피가
 
  우리의 밭을 적실 때까지 !
 
  (2~7절 생략)〉
 
 
 
  [마지노 요새를 가다]
 
  地中艦
 
  月刊朝鮮 여행단(단원 39명)의 단장 겸 마스터 가이드는 愼鏞碩(신용석)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이었다. 朝鮮日報 논설위원, 駐佛특파원을 지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프랑스통이다. 그런 愼단장이 아니면 이런 여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過客이 프랑스·독일의 역사·문화, 그 속의 생활로 깊게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갖기는 힘들다. 다행히 우리는 프랑스·독일을 한국의 방방곡곡처럼 돌아다닌 愼단장의 철저한 사전 준비 덕분에 그의 수십년 유럽 체험에 무임 승차할 수 있었다.
 
  우리가 10일간 거쳐갔던 에페르네, 베르당, 낭시, 쉔넨부르그(마지노 요새), 바덴바덴(독일), 콜마, 안시, 본느는 여행사의 계획표에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들른 호텔과 음식점은 그 지방에서는 최고급(가장 비싼 곳이란 의미와는 다르다)이었다. 여행중 愼단장이 하도 『최고』 이야기를 많이 해서 필자가 비판을 했지만 실제로 가 보고는 그런 최상급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났다.
 
  愼단장은 석 달 전에 이미 이 여행지들을 事前에 돌면서 최고급 호텔과 식당을 예약해 두고 음식 종류까지 정해 놓았었다. 50인승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섰다가 하면서 마이크를 잡고 가이드·강사·지휘자 역할을 두루두루 한 그에게 필자는 「여행 코스 디자이너」 겸 「여행 컨덕터」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유럽에서 이런 코스를 디자인하고 이를 진행하면서 체험에 바탕을 둔 생생한 해설까지 해줄 수 있는 인물은 그 외에는 흔치 않을 것이다.
 
  愼단장도 『나도 일 때문에 바쁘게 지내다가 이런 여행의 즐거움에 신경을 쓰게 된 지가 몇 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愼단장의 체험 속에 녹아들어 있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와 교양을 공짜로 뽑아 낸 여행이기도 했다.
 
  愼단장이 마련한 이번 여행의 특별 메뉴 중 하나가 마지노 요새 방문이었다. 로렌 公國의 수도였던 낭시를 떠난 우리(버스)는 알자스 지방으로 넘어가 스트라스부르를 구경한 뒤 쉔넨부르그 요새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 휴전선 풍경을 연상시켰다. 야트막한 구릉과 숲이 이어지고 人家나 도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프랑스에 온 이후 처음으로 황량한 느낌에 젖었다. 전형적인 戰線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지만 수백년간 엄청난 규모의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전쟁의 무대였던 그 흔적은 地理와 지형에 남아 있었다.
 
  쉔넨부르그 요새에 도착하니 안내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요새는 알자스 지방의 재향군인회에서 인수하여 관광명소로 운영하고 있다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관광객이 없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인으로선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몇년 전 일본 NHK방송 기자들이 취재차 들른 것이 최초이자 최후의 아시아人이란 것이다.
 
  그의 안내를 받으면서 토치카 입구를 지나 군함 내부의 좁은 철계단 같은 시멘트 계단을 따라 지하 30m로 내려갔다. 이 요새內에는 트럭이 다닐 만한 터널이 약 3km 뻗어 있다. 레일이 있는데 군인들은 타지 않고 주로 무기와 장비를 날랐다고 한다. 내가 안내자에게 『꼭 군함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잠수함의 구조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니 개념이 잡혔다. 이 요새는 地上과 단절된 地中 잠수함인 것이다.
 
  입구의 두꺼운 쇠문을 닫고, 사발을 엎은 듯 지상에 노출된 砲塔(포탑) 뚜껑마저 내려 버리면 외부와 차단되고 철옹성이 된다. 계산상으로는 어떤 공습과 포격으로부터도 안전하다. 이 地中艦(Subgrounder-이는 필자의 작명) 안에는 병원, 부엌, 무기창고, 식량창고 등이 완비되어 있어 포위된 상태에서도 몇 달을 견딜 수 있다. 접근하는 적의 보병에게 수류탄을 던질 때 열 창이 없으니 수류탄 발사기를 설치했다. 안에서 기계에 수류탄을 넣으면 바깥으로 날아가는 설계였다.
 
  2차 세계대전 때도 이 요새는 독일군의 포격과 폭격을 수천 발 받았으나 꿈쩍 않고 견뎌 내었다. 수비군이, 파리의 중앙정부가 항복한 다음에야 항복하라는 지시를 받고 손을 들었다는, 난공불락이 증명된 요새였다.
 
 
  守勢的 발상의 패배
 
  안내자는 우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설명했다. 이 요새는 1935년에 완성되었다. 놀랍게도 기계를 쓰지 않고 手動 장비만 가지고 팠다는 것이다. 잠수함처럼 換氣가 문제였다.
 
  적이 독가스를 썼을 때의 대책에 신경을 쓴 장치들이 많았다. 부엌엔 당시로선 최신인 전기 오븐 장치가 되어 있었다. 이곳에 근무한 병력은 약 700명. 이 사람들은 地上으로 올라갈 일이 없어 잠수함 승무원들처럼 폐쇄공간에서 상당히 불안정했다고 한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포도주에다 안정제를 타 먹이기도 했다. 이 요새가 가진 각종 포는 80문인데 일제 사격을 하면 분당 약 2t 무게의 포탄을 발사할 수가 있었다.
 
  포탑은 잠망경처럼 地下에 숨겨두었다가 발사할 때 안의 기계를 돌려 地上 50센티까지 올려 쏜 뒤 다시 내리는 식이었다. 평상시엔 포탑의 뚜껑만, 엎어놓은 사발처럼 지상에 노출된다. 이 뚜껑의 철판 두께는 30cm를 넘어 직격탄을 맞아도 부서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함 포탑을 보호하는 철판 두께와 같다. 지상에 엎어진 포탑 뚜껑은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우스꽝스런 모습이다.
 
  안내자의 할아버지는 이 요새 건설에 참여했고, 아버지는 마지노 요새에 근무하였으며 자신의 아들은 전기 기술자로서 함께 이 요새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발전기 등 주요 시설들이 아직도 가동중이다. 프랑스가 가진 토목기술, 기계기술, 무기기술을 다 때려넣은 것이 마지노 요새 공사였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프랑스는 地下 굴착 기술이 많이 발달해 있다. 샴파뉴 지방의 도시 지하는 포도주 저장시설의 땅굴로 거미줄처럼 뚫려 있다. 파리의 지하 하수도 시설은 소설과 영화의 주요 장면이다. 지방도시에 가 보면 지하의 포도주 저장고 같은 곳이 고급 식당으로 운영된다.
 
  안내자는 『마지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지노선은 獨佛 경계선을 따라 지하 땅굴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쉔넨부르그 요새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 전술상 서로 연계되어 있다. 쉔넨부르그 같은 대규모 요새는 약 100개, 그 산하에 소규모 요새와 토치카가 있었다. 포탑은 1536개. 마지노 요새 지하도의 총연장은 약 100km였다. 지하시설의 벽면과 천장은 철근이 들어간 특수 콘크리트로 최고 3m 두께로 감쌌다.
 
  문제는 이 마지노선 건설이 守勢的(수세적) 발상이란 점이었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의 소모적인 참호전, 그 연장선상에서 어떻게 하면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시설을 갖출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런 지하 요새를 만들었다.
 
  독일군은 참호전을 전격전으로 극복하는 전술을 발전시켰다. 독일은 공세적인, 프랑스는 수세적인 대책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1940년 5~6월의 獨佛 결전은 공세적 태도를 가진 히틀러 군대의 승리로 끝났다.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실증된 셈이다.
 
 
 
  [1930년대 프랑스와 2000년대 한국]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꽃핀 문화·예술
 
  쉔넨부르그(프랑스 알자스)의 마지노 요새를 구경하고 독일의 바덴바덴으로 가는 車中에서 나는 마이크를 잡고 강연을 했다. 여행객들이 현장 감각이 있을 때 딱딱한 전쟁 이야기를 해야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포도주와 전쟁이 된 셈이다. 우리가 잡은 여행경로를 보면, 지나온 샴파뉴. 알자스. 로렌 지방과 앞으로 갈 부르고뉴 지방이 모두 유명한 포도주 産地이다.
 
  기자는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가 포도주 이야기를 꺼내면 골치가 아파오는 사람이다. 주로 역사와 전쟁얘기를 좋아하는 기자는 이름도 생소하고 맛도 잘 모르는 외국의 술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포도주에 접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강제적으로 약간의 지식이 들어온 셈이다.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들어가는 햇볕과 바람과 비, 그리고 농부의 땀, 맛내기에 정성을 들이는 기술자들의 집념, 포도주 산업을 뒷받침하는 과학과 공학과 기계와 기술의 엄청난 규모. 이런 것들을 가까이서 보니 포도주가 존경스러워졌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포도주를 마시면서는 헛소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포도주와 戰線 사이의 紀行은 평화와 전쟁 사이의 기행이다. 프랑스 포도주 産地는 유명한 전쟁터와 겹쳐진다. 백년전쟁(부르고뉴), 종교전쟁-나폴레옹 전쟁-普佛전쟁-1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샴파뉴-알자스-로렌 지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가 남은 것이 아니라 神과 인간의 합작품인 성당과 포도주와 문화와 예술이 남아 있다. 이것은 평화 때문이 아니라 전쟁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비참한 것이고 피해야 할 일이지만 일단 그 연옥을 통과한 생존자들(국가들)에게는 큰 변화를 준다. 인간이든 국가이든 전쟁을 겪으면 강인해지고 성숙해지며 깊어진다. 죽임과 죽음과 대면해 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력을 총동원한다. 그 국가가 가지고 있는 인적 자원, 경제 자원, 과학 기술력이 조직되고 동원되며 쓰여진다. 국가의 능력이 최고조로 고양된다.
 
  허울과 허위와 위선은 전쟁이란 현실 앞에서 힘을 잃는다. 전쟁은 인간을 실용적으로 만든다. 헛소리를 줄인다.
 
  1950년대의 한국 사회를 되돌아보면 전쟁이 가져온 적나라한 현실주의와 實事求是(실사구시)의 기풍과 힘을 느낄 수 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소년시절이던 1950年代의 풍경은 아령, 냉수마찰, 평행봉, 역기 들기, 권투, 줄말타기, 결투로 학급내에서 주먹 석차내기 등등이다. 굶주리면서도 마을마다 학교마다 소년들이 힘겨루기를 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再起하려는 잡초 같은 에너지가 우리 소년들까지 독하게 전투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자란 우리 세대가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의 영도下에서 세계로, 사막으로, 시장으로, 바다로 나갔던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도 전쟁을 많이 치르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알았을 것이다.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의 어느 시기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 평화의 시기를 더욱 값지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들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에 쫓기는 기분으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둑 아랫마을 사람들처럼 건물과 문화와 포도주를 열심히 만들어간 것이 아닐까. 전쟁이 있었기에 평화가 더욱 소중해진 것이고 그 평화를 건설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닐까.
 
 
  평화 무드 속의 國論 분열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후 1920, 30年代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을 휩쓴 것은 평화주의였다. 그 평화주의의 이론적 근거는 대강 이런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의미 없는 전쟁이었다. 우리는 戰時中 국가 선전에 속았다. 전쟁은 무기상인들이 시작한 것이지 독일이 일으킨 것은 아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너무 가혹하다. 민주주의가 모든 국가에 다 필요한 것은 아니다. 독일과 이탈리아 사람들에게도 생존공간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어느 쪽이 도발을 하더라도 한 쪽이 줄기차게 참으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
 
  일종의 自責과 자위와 자기기만에서 출발한 평화주의였다. 프랑스의 경우엔 물론 절실한 이유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20~32세 연령층 남자의 절반이 전사했다. 140만 명. 프랑스로서는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것, 그래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마지노 요새 같은 곳에 기대어 인명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대명제가 되었다.
 
  프랑스의 평화무드 뒤에는 이념·계층 갈등에 따른 국론분열이 있었다. 프랑스 우익은 전통적으로 공화주의자들을 미워했다. 그들은 좌익의 인민전선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사회혁명을 일으키려 한다고 겁을 냈다. 일부 프랑스 우익은 사회주의 세력을 요절낸 히틀러나 무솔리니를 좋아했다. 한편으로 프랑스 좌익은 우익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스탈린을 동정하고 존경하기까지 했다.
 
  우익은 잠재 적국의 독재자를, 좌익은 전체주의 국가의 독재자를 좋아했으니 국가의 통합성이 무너져 내렸다. 내부의 경쟁자를 外敵보다 더 미워하는 사회는 거의 내란적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主流정통 세력을 반역자 金正日보다 더 미워하는 좌익이 존재하는 것과 한번 비교해 보라.
 
 
  전쟁을 결심할 수 없는 佛 지도부
 
  1930年代에 들어오면 프랑스는 내부의 좌우익 갈등 때문에 히틀러의 공갈에 대해서 일관된 정책을 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戰雲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사회는 평화, 그것도 가짜 평화, 평화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환각상태를 불러온 한 이유가 마지노線이었다. 마지노線만 있으면 내분이 일어나도, 히틀러의 공갈에 양보해도 평화를 지켜 낼 수 있다는 위안과 기만이 있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주한미군만 있다면 우리끼리 아무리 싸우고 분열하고 反美해도 안보는 걱정이 없다는 공짜 심리를 가진 것과 비교된다. 1930年代의 프랑스와 요사이 한국 사회의 풍조는 정말이지 너무 너무 비슷하다. 히틀러의 전략은 또 金正日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다.
 
  黃長燁 선생에 따르면 金正日은 히틀러 숭배자라고 한다. 金은 아마도 그의 공갈전략을 연구했을 것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이런 평화무드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것이 히틀러였다. 1936년 히틀러는 로카르노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강 서쪽의 라인란트(독일 영토이지만 이 지역엔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도록 했다)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때 프랑스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갔다면 히틀러 정권은 무너졌을 것이고, 아직 再무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독일군은 항복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히틀러 군대의 라인란트 진주로 인한 조약위반 사태에 대해 무력응징을 포기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할 때만이 무력을 쓸 수 있다는 태도였고, 영국은 독일군이 자기 영토에 자기 군대를 진주시키는 것을 가지고는 전쟁 위험을 감수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것이다.
 
  히틀러는 특히 프랑스의 여론과 언론을 주시했다고 한다. 그는 反戰영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눈여겨 보면서 프랑스 사회와 지도부가 전쟁을 결심할 수 없는 심리구조에 빠져 있다고 판단했다. 독일 군부는 프랑스의 군사력을 겁냈지만 히틀러는 프랑스의 국가 의지를 경멸했다는 이야기이다.
 
  1930년대 오직 영국의 처칠만이 히틀러의 위험성을 통찰하고 경고를 보냈다. 평화주의에 물든 여론에 먹혀들지 않은 외로운 목소리였다. 그는 「수구꼴통」, 「전쟁론자」로 매도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처칠을 그런 인물로 기억할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독일 국경을 지나고 있었다. 국경 표시는 없다. 한때 있었던 국경검문소가 철거된 자리만 있다. 파리 드골 공항에 들어올 때 프랑스 공무원들이 여권을 검사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적어 낸 노란 쪽지(입국신고)만 받지 여권 기재사항을 컴퓨터에 대어 확인하지도 않았다. 저렇게 해가지고는 국제수배범죄자를 과연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獨佛 경계선에서 사라진 검문소를 넘으면서 독일은 외국인 입국자 통계를 어떻게 낼까 하는 걱정도 해보았다. 獨佛 국경선 연변에서 벌어졌던 거대한 전투, 누계로 수천만 명이 죽었을 그 전쟁의 결과가 이런 평화이고 이 공존이구나, 인간은 꼭 전쟁을 통해서만 평화에 도달하는가?
 
 
 
  [프랑스의 「이상한 패배」 연구]
 
  포도주 같은 人生의 맛
 
  이번 알자스 로렌 여행의 경로는 이러했다. 에페르네(샴파뉴州)-베르당(알자스)-낭시(로렌)-스트라스부르(알자스)-쉔넨부르그의 마지노 요새(알자스)-바덴바덴(독일)-하이델베르크-리크빌-카이저스버그-콜마(알자스)-안시(프랑스 사보아州)-샤모니(몽블랑)-리용-디존-본느-샤블리(이상 부르고뉴).
 
  우리는 열흘간 버스로만 돌아다녔다. 운전사는 「레몽」이라 불리는 벨기에 사람이었다. 불평없이 성실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유쾌한 노인이었다. 유럽에선 버스 여행을 많이 하게 되는데 운전사를 잘 만나야 한다. 대체로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 북쪽 유럽인들이 성실하다고 한다.
 
  車中에서 愼鏞碩 단장(여행단장이란 의미로 그렇게 불렀다)은 체험적인 유럽 문화, 역사, 생활상, 포도주를 이야기하고 필자는 교과서적인 역사, 전쟁을 이야기했다. 여행 참가자들도 마이크를 잡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나 우스개를 하였다. 버스 여행에서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특히 이번 여행에 참여한 사람들은 평균 연령이 60代이고 대부분이 부부동반인 데다가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한 이들이었으니 모두가 경청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었다. 포도주가 맛이 있는 것은 에이징(ageing), 즉 熟成이란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차중의 사람들이 모두 잘 숙성된 인생을 가진 분들이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포도주보다 더 맛있었다.
 
  필자는 이라크 전쟁이 진행중에 여행을 하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여 車中의 화제를, 獨佛 접경지대를 무대로 한 전쟁 이야기로 끌고 갔다. 아침마다 이라크 戰況을 해설해 드리기도 했다. 포도주와 전쟁이 이번 여행의 話頭가 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의 정신상태가 가장 안정되어 있을 때는 언제인가. 어린이들이 권투 글로브를 끼고 치고 받은 뒤의 정신상태라고 한다. 때리기만 하면 죄책감이 생기고 얻어맞기만 하면 원한이 생긴다. 때리고 맞든지, 맞고 때리든지 하면 주고받는 계산이 끝났을 때처럼 정신상태가 맑아진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의 독일·프랑스가 그런 관계일 것이다. 1870년 프러시아가 비스마르크 수상과 몰트케 장군의 영도下에 프랑스를 꺾을 때까지 독일의 여러 나라들은 프랑스의 밥이었다. 특히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으로 피해를 집중적으로 본 것이 독일민족이었다. 普佛전쟁에 진 프랑스는 제1차세계대전의 승리로 복수하고, 와신상담하던 독일은 1940년의 승리로 다시 복수하는가 했더니 연합군의 도움을 받은 프랑스는 드골 장군의 영도下에 국토를 수복하고 어느 새 戰勝國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獨佛 양국은 아데나워와 드골의 현명한 지도하에 친선관계를 다졌다. 지금 여론조사를 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을, 독일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계산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임진왜란과 日帝 36년의 압제 때문에 2-0으로 한국 측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처럼 된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일본은 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3만 대군을 400여 척의 함선에 태워 금강 하구로 보냈다. 663년 白村江의 해전에서 倭의 大軍은 신라·唐 연합군에 의해 전멸되었다. 이 패전을 일본에서는 교과서에 넣어 가르치는데 우리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13세기 말 몽골이 고려를 지배할 때 몽골·고려 연합함대는 두 차례 하카다(지금의 후쿠오카) 해변에 상륙하여 침공작전을 전개했으나 태풍을 만나 실패했다. 「元寇의 來襲」으로 불리는 이 침공작전까지 치면 우리도 두 번 일본을 친 것이 되지 않는가. 그렇게 계산하여 2 대 2로 삼고 새로운 생산적인 韓日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눠보았다.
 
  기자가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국가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命題이기 때문이다. 외교로써 100년이 걸려도 풀 수 없는 문제를 전쟁은 며칠 만에 해결한다. 전쟁은 국가와 국민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확장시킨다. 전쟁을 한번 겪은 국가와 국민은 (승리했다면) 대체로 건강해지고 실용적으로 되며 신중해진다.
 
  전쟁의 연구는 결국 인간의 연구로 귀착된다. 따라서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면 사물을 깊게 현실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볼 수 있는 훈련이 된다. 회사 경영, 인생살이에도 도움이 된다. 전쟁의 본질을 알면 정치나 외교나 경제도 그 본질을 볼 수 있다.
 
  예컨대 기자는 이라크 전쟁을 관찰하면서 두 가지를 가장 중시했다. 연합군 측의 전사자 수와 미국 여론의 전쟁 지지도 변화. 이 두 변수가 부시의 전쟁수행 능력을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이라크 전쟁은 두 戰線을 갖고 있었다. 전투현장의 전선과 언론, 특히 텔레비전 화면. 전투현장의 戰線에선 미국이 이기겠지만 언론이란 제2전선에서 지면 여론을 잃게 된다. 민주주의 국가 지도부는 여론의 뒷받침이 약해지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프랑스의 선제공격 포기심리
 
  베르당과 마지노 요새를 본 필자의 想念은 자연히 1940년 5월의 아르덴느 숲속으로 달려갔다. 베르당의 살육전에 진저리를 친 프랑스 지도부는 인명희생을 최소화하려는 뜻에서 마지노 요새를 만들어 안주했다. 이 방어적인 전쟁개념은 1930年代 프랑스의 국가적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를 간파한 히틀러는 戰爭不辭의 공갈작전으로 라인란트 進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을 성공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뒤늦게 히틀러의 확장정책에 제동을 걸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경고를 해둔다. 히틀러는 폴란드를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소련뿐이라고 생각하고 1939년 8월 말 獨蘇불가침조약을 맺어 소련을 중립화시킨다. 히틀러는 소련을 중립으로 돌려 놓으면 독일이 폴란드를 쳐도 영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誤算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전격전으로써 폴란드를 한 달 만에 요절낸다. 영국은 말로써는 독일에 경고했으나 실제로는 폴란드를 돕기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 못한다. 실제로 도울 수단이 없는데 왜 폴란드에 대한 보증을 섰는가 하는 비판이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막을 수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은 막지 못하고 막을 수 없는 폴란드 침공은 막겠다고 보증을 함으로써 히틀러를 자극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연합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 이겨 히틀러를 타도하긴 했으나 유럽의 半을 히틀러보다 더 악독한 스탈린에게 내주었다. 늑대를 쫓아 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인 격이다.
 
  히틀러가 主力을 폴란드 침공에 돌렸을 때 獨佛 전선에 배치된 병력은 2 대 1로 프랑스가 우세했다. 프랑스 98개 사단 對 독일 43개 사단. 사단의 질에서도 프랑스가 우세했다.
 
  이때 프랑스가 선제공격을 하면서 독일로 밀고 들어갔다면 프랑스 군대는 독일의 루르 공업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히틀러는 항복하든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을 것이다.
 
  왜, 프랑스는 이 선제타격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다음해 독일로부터 선제공격을 당해 6주 만에 무너져버렸던가. 많은 연구가 이 점에 집중되었다. 작년에 나온 하버드 대학의 戰史學者 어네스트 R. 메이 교수의 책 「이상한 승리」(Strange Victory-Hitler’s Conquest of France)를 이번 여행 전에 읽어보았다. 기자는 1996~97년 하버드 대학에서 니만 팰로우(언론재단 연수생)로 수학할 때 메이 교수의 강의를 1년간 들은 인연이 있다.
 
  메이 교수가 著書에 「이상한 승리」라고 이름 붙인 것은 프랑스 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쓴 「이상한 패배」에 대응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패배」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다(까치 출판사). 저자 블로크는 역사학자였는데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다. 이 책을 유언처럼 쓴 뒤 독일군에게 잡혀 처형당했다. 이 책은 프랑스의 패배를 연구하는 데 필독서로 꼽히고 가장 많이 인용된 책이기도 하다. 블로크는 프랑스가 독일군을 너무 깔보고 자신들의 戰力을 과신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메이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부는 히틀러가 감히 프랑스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블로크는 프랑스 군대가 인명희생을 최소화하는 데 너무 신경을 썼다고도 지적한다. 마지노선을 만들어둔 것은 요사이 이라크 전쟁처럼 과학과 기술로써 인명손실을 代替하겠다는 건전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인간 대신 기계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공세적 상상력이나 신속한 대응이 어렵게 된다.
 
  독일군은 프랑스군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이 劣勢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프랑스를 정면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을 때, 군부는 반대했다. 군부와 히틀러는 강대한 프랑스 군대를 꺾을 방도를 놓고 고민하다가 「기갑부대로 아르덴느 숲 돌파, 프랑스 군대의 배후를 기습한다」는 절묘한 방책을 고안해 냈다.
 
  1939년 9월이나 10월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작전에 주력을 투입함으로써 서부전선에 허점을 보였을 때 프랑스 군대가 독일로 쳐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에서 이렇게 분석했다.
 
  첫째, 프랑스군과 영국군 지휘부는 연합군이 승리하고야 말 것이라고 과신했다. 경제봉쇄나 독일군의 도발에 대한 응징 형식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선제공격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둘째, 프랑스군 지휘부는 영국군과 함께 피를 흘려야지 프랑스군만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단독 진격을 망설였다. 즉, 어차피 이길 전쟁인데 우리가 먼저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심리구조가 결정적 선제공격의 찬스를 놓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모험적 독일군과 守勢的 프랑스군의 대결]
 
  프랑스軍 지휘부의 생리
 
  하버드 대학의 어네스트 메이 교수는 上記 저서 「이상한 승리」에서 1940년 독일이 6주 만에 프랑스군을 괴멸시킨 가장 큰 功을 독일군의 정보부서에 돌렸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 티펠스킬크 장군과 그 휘하의 리스 대령이 프랑스군 지휘부의 생리와 병력배치, 그리고 방어전략을 정확히 파악하여 독일군의 공격작전계획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메이 교수는 독일과 프랑스의 전략정보 수집능력을 비교하기도 했다. 독일군의 정보기능은 작전기능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프랑스의 정보기능은 작전 담당자에게 조간신문을 던져놓고 가는 식으로 상호간에 유리되어 있었다고 했다.
 
  티펠스킬크 소장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고 프랑스語를 잘해 프랑스군에 대한 정보수집에는 적격의 인물이었다. 리스 대령은 승마선수로도 유명한 엘리트 장교로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파악한 프랑스 참모본부의 문제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프랑스 지휘부는 안전성을 대담성보다 중시한다. 즉, 모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 지휘관들의 재량권이 제한되어 있다. 승리할 수 있다는 보장이 확실할 때만 공격한다. 전투현장에서 프랑스군 지휘관이 好機를 잡았을 때 이를 이용하여 戰果를 확대하려고 해도 상부로부터의 규제가 많아 어렵다는 결론도 도출되었다.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서는 1938년 가을에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로 전쟁일보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프랑스군이 보인 반응을 면밀히 분석했다.
 
  프랑스군은 독일에 대한 공격보다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방어계획을 세우는 데 주력했다. 프랑스군은 또 벨기에 국경지대에 주력을 배치했다.
 
  독일 정보부서는 프랑스 장교들의 행태는 기본적으로 방어위주이며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않으면 스스로 공격에 나서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일군 참모본부가 분석한 프랑스군의 행태는 방어 위주의 프랑스 사회분위기와도 맞아떨어지는 현상이기도 했다. 요컨대 프랑스군은 소극적이고 관료적이라 변화무쌍한 전쟁상황에 신속하고 대담하게 대응하는 체질이 못 된다는 이야기였다.
 
  1939년 10월 독일 참모본부의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군의 행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프랑스 군인들은 감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전쟁의 목표가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면 그들은 임무를 수행하더라도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피해를 크게 보면 부대는 내부로부터 흔들리게 된다. 반면, 프랑스군은 설득력 있는 말을 들으면 쉽게 士氣가 고양된다. 국토를 지키는 전쟁에서는 항상 열정적으로 격렬하게 싸운다. 프랑스군의 핵심적 문제점은 너무 조심한다는 것이다. 대담한 작전으로 큰 전과를 거두는 것보다 안전성을 항상 우선시킨다>
 
  1939년 12월에서 1940년 초에 걸쳐 정보참모부 西部課는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의 主攻이 벨기에 북쪽으로 향할 것이라 믿고 主力 75개 사단을 벨기에 쪽 국경지대로 집결시키고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主力 가운데는 프랑스의 기계화 사단과 자동화 사단의 거의 전부가 포함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원래 「황색 작전」(Yellow Plan)이란 작전명으로 1940년 1월17일에 프랑스를 기습하려고 하였다. 작전 개시 며칠 전 이 작전문서의 일부를 갖고 가던 장교가 탄 비행기가 악천후로 벨기에 지역에 불시착하였다. 장교는 문서의 일부를 불태웠으나 나머지는 벨기에군에 넘어갔다. 히틀러는 작전계획이 누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공격을 연기했다.
 
  이 「황색 작전」의 핵심은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독일의 참모총장 슐리펜이 만들었던 작전 계획과 거의 같았다. 슐리펜 계획이라 불리는 이 작전의 핵심은, 서부전선의 우익에 主力을 집중시켜 벨기에를 돌파하고 프랑스의 옆구리를 강타한 다음 거대한 좌회전을 하여 파리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우익에 병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슐리펜이 물러나고 大몰트케의 조카 小몰트케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小몰트케는 소심하고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익에 너무 많은 병력을 집중시키면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좌익으로 역공을 펼 때 방어가 어렵게 된다고 걱정하여 우익에 붙여 주어야 할 병력을 좌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이 변형된 슐리펜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이 작전계획엔 전제조건이 있었다. 중립국인 벨기에로 우익의 主力을 진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벨기에를 작전의 공간으로 삼고 있었다. 자동적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무시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벨기에로 독일군이 쳐들어가자 그때까지 참전 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다.
 
  이 변형된 슐리펜 작전계획에 따라 진격을 계속한 독일군은 파리 근교 마른느까지 진출했으나 조프레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끈질긴 방어전에 걸려 마지막 순간에 진격을 멈추고 후퇴하고만다. 戰史家들은 당초 계획대로 우익에 압도적 병력을 배치해 두었더라면 마른느를 돌파하여 파리를 포위하고 프랑스를 쉽게 무너뜨렸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아르덴느 기습 돌파전
 
  히틀러는 이 슐리펜 작전계획의 원안대로 프랑스를 치려고 했다. 비행기 사고로 공격이 연기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독일군의 主力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영국군의 主力과 정면충돌하여 지구전으로 갔든지 독일군이 패배했을 것이라고 보는 戰史家들이 많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독일의 몇몇 장군들은 처음부터 히틀러에게 슐리펜 계획의 반복사용에 반대했다. 히틀러는 이런 반론을 무시했다가 공격이 연기된 상황에서 작전계획을 재고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참모총장 할더 장군에게 새로운 작전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
 
  이때 할더 장군은 이미 정보참모부장 티펠스킬크 소장과 리스 대령으로부터 主攻을, 벨기에 북부 평원이 아닌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을 통해 프랑스 세단으로 나오는 방향에 놓는 게 유리하다는 연구 보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르덴느 숲 지대로는 탱크가 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 전선에는 아주 취약한 방어부대만 배치시켜 놓고 있었다.
 
  1939년 12월에 독일군 참모본부는 워 게임을 했다. 이때 프랑스군의 총사령관 가므랑 장군역을 맡은 것은 독일 정보참모부의 서부과장 리스 대령이었다. 이 게임에서도 기갑군단을 아르덴느 숲지대로 보내 프랑스의 취약한 방어선을 기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리스 대령은 이런 평가를 했다고 한다. 독일군이 벨기에로 쳐들어가면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슐리펜 계획을 연상하여 이것이 主攻이라고 속단하고 자신들의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진시킬 것이다. 이때를 기다려 독일의 주력인 A집단군의 선봉 기갑군단(10개 기갑사단)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나 프랑스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버 해협 쪽으로 진격한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영국군 주력의 배후에 독일 기갑군단이 나타나 연합군을 남쪽의 파리와 북쪽 벨기에로 양단한다. 그런데 파리 쪽에는 예비병력이 소수이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다.
 
  배후가 뚫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프랑스군 지휘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리스 대령은 오랜 프랑스 지휘부의 행태 연구를 통해서 신속한 대응, 즉 돌파된 프랑스 전선으로 북쪽의 주력군을 재빨리 이동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다.
 
  프랑스군 장교들의 생리가 임기응변에 약하고 자세한 명령을 받기 전에는 작전 변경을 하지 않는 데다가 통신망이 취약하고, 전화는 도청된다고 인편을 통해서 명령을 수령하기 때문에 급변하는 상황에 제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40년 5월10일 히틀러는 변경된 「황색 계획」에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B집단군이 네덜란드, 벨기에로 쳐들어가자 프랑스 영국 연합군은 기다렸다는듯이 주력군을 벨기에로 북상시켰다. 독일군은 B집단군이 主攻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 사이 10개 기갑사단을 핵심으로 한 진짜 主力인 A집단군이 벨기에 남쪽의 아르덴느 숲 지대를 지나 프랑스 국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현지시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아르덴느 숲지대를 전차가 통과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쉽게 통과했다. 이 길가의 나무를 베어 길에 걸쳐 놓기만 해도 기갑부대의 통과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정찰기가 대부대의 이동을 탐지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 방향으로 대부대가 기동할 리가 없다는 선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프랑스군 지휘부였다.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한 독일 기갑군단 선봉은 5월13일과 14일 뮤즈江을 도하하여 프랑스 세단으로 건너왔다. 취약한 프랑스 방어군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이 지역으로 主攻이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허약한 부대만 골라서 배치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레이노 수상은 普佛전쟁의 패전에 이어 두 번째로 세단이 돌파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경악했다. 그는 5월15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화를 걸어 『우리는 졌습니다』라고 울먹였다. 레이노 수상은 격전 중인 데도 최고사령관인 가믈렝을 웨이강 장군으로 교체했다. 웨이강 장군은 中東에서 불려와 실전에 임하는 데 이틀을 까먹었다. 그 귀중한 이틀간 프랑스군은 돌진하는 독일 기갑군단에 대한 전략을 수립도, 집행도 못 하여 반격 타이밍을 놓쳤다.
 
  독일 기갑군단은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渡河와 진격을 계속했다. 기갑부대가 보병부대의 지원이 없으면 적진에서 고립될 수도 있지만 롬멜, 구데리안처럼 상상력이 뛰어난 장군들의 임기응변에 의해 기갑군단의 진격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1주간 계속되었다.
 
  독일 기갑군단은 뮤즈강 도하 1주일 만에 도버해협에 도착함으로써 英佛 연합군의 주력을 북쪽으로 포위하고 얼마 되지 않는 프랑스 예비병력을 남쪽의 파리 방향으로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다. 대혼란에 빠진 프랑스의 200만 대군은 불과 6주 만에 궤멸된다.
 
  아르덴느 돌파전이라고 불리는 이 작전은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와 함께 세계전사상 가장 뛰어난 기습전으로 꼽힌다. 독일군의 성공에는 프랑스군 지휘부의 무사안일주의를 간파한 독일의 정보부서, 안전보다는 모험과 속도를 중시한 롬멜, 구데리안 등 창의적인 장군들의 역할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세적이고 관료적이며 책임회피적으로 대처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기습을 허용하였던 것이다. 독일의 전격적 사고와 프랑스군의 진지적 사고의 대결에서 이긴 쪽은 새 전법으로 모험을 감행한 독일이었다.
 
  메이 교수는 「이상한 승리」의 결론에서 「독일군의 승리는 지휘부의 상상력에서,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패배는 느린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독일군은 연합군의 그러한 습관을 간파하여 이 약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정리했다.
 
  영국의 전사학자 리델 하트는 아르덴느 돌파전이 「모든 사람들의 장래에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세계의 진로를 바꾼 사건」이라고 평했다. 이 승리로 인해 영국은 고립되고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美蘇日까지 휘말려 들어 오늘날의 세계질서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패전과 한국의 독립도 이 전투 결과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車中 대화]
 
  『그래서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오늘(3월24일) 우리는 南獨의 바덴바덴을 떠나 버스로 남동쪽의 프랑스 콜마市를 향해 나아갔다. 다시 프랑스의 알자스 지역으로 돌아온 셈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車中에서 나는 이라크 戰況에 대해 설명했다.
 
  미군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맞고 떨어진 영국 전투기, 미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영국 기자의 예를 들었다. 전쟁이란 것은 원래 오폭과 오인사격의 연속이란 것, 전쟁은 스포츠 게임처럼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요사이 전쟁엔 두 개의 전쟁이 있는데 하나는 전투현장,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이란 것, 부시가 전투현장에선 이기겠지만 TV 화면에서도 이겨야 전쟁을 끝까지 밀고갈 수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
 
  車中에서 여행 참여자들의 자기 소개가 재미있게 진행되었다. 30여 년간 중·고교의 교사·교장·장학사로 일하다가 퇴직한 뒤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는 C씨(70) 부부의 이야기는 주로 金日成과 6·25 전쟁에 관한 것이었다.
 
  C씨는 함경북도 鏡城(경성) 출신으로 6·25 전에 월남했다. 그는 『소련군은 빼앗기만 했는데 월남해서 만난 美軍은 주기만 해서 큰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C씨의 부인은 함경남도 출신이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내려온 부인은 6·25 때 함흥에서 목격한, 金日成 지령의 함흥 감옥 학살 사건을 이렇게 말했다.
 
  『제가 그때 10代였는데 시체를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북한이 퇴각하면서 反共 우익인사들을 붙잡아 가 학살했는데, 총알이 아깝다고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갔어요. 가족들이 나와서 시체를 확인하는데, 아무도 울지 않았습니다. 가슴, 옆구리, 얼굴은 창에 찔려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명태를 말릴 때 죽 널어 놓은 것 있죠, 꼭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C씨 부인은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서울시청 앞 3·1절 국민대회에는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는데 거기에 갔다 오니 신진대사도 잘 되고 잠도 잘 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침에 바덴바덴을 출발하여 알자스의 작은 마을 리크빌(Riquewhihr)과 카이저버그(Kayserberg)를 거쳐 콜마(Colmar)에 도착했다. 카이저버그에는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生家가 있다. 교회를 겸한 生家엔 인적이 없었다.
 
  슈바이처 박사는 1875년에 카이저버그(당시엔 독일 영토)에서 출생했다. 그는 신교의 신학자이며 유명한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다. 그는 西아프리카에 병원을 짓고 의료봉사를 했다. 1952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가봉에서 죽은 것이 1965년이었다.
 
  인구 2700명인 이 마을엔 12세기에 지은 성당 건물이 있고 프랑스에서 최고로 치는 음식점도 있다. 「건축 1594년」이라고 쓰인 4층 건물도 있다. 마을 가운데를 지나가는 냇물 위에 지은 집도 있는데 「수맥」 걱정을 안 하는 모양이다.
 
  알자스 지방은 유명한 포도주 産地이다. 풍성한 농토와 부드러운 언덕과 산맥, 거기에 사는 프랑스 사람들의 느릿한 동작―나른한 봄의 오후였다. 프랑스 사람들은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적기로 유명하다. 고향이 이렇게 좋은데 왜 조국을 떠날 생각을 하겠는가?
 
  우리가 오후에 도착한 알자스의 古都 콜마는 인구가 8만3000명.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 실비아 양(40代 여성)은 콜마 자랑부터 했다. 콜마는 독일과 프랑스의 사이에서 지난 200년간 주민의 국적이 네 번 바뀌었다는 것이다.
 
  실비아는 『우리 알자스 사람들은 독일과 프랑스 사람들의 장점만 갖고 있다』고 웃었다. 그녀는 『알자스 지역은 프랑스 전역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다. 주민들이 부지런하고 기계산업이 발달해 있는 데다가, 스위스와 독일로 건너가서 취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콜마엔 천주교 성당의 첨탑과 신교 교회의 종탑이 함께 있는 교회 건물이 있다. 알자스 지방은 1517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이후 신교의 세력이 강했다. 16세기 초의 30년 종교전쟁 이후 이 독일계 도시국가는 프랑스 영토가 된다. 프랑스는 그러나 알자스 지방민들에게 종교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다. 한 교회를 신·구교가 共有하는 상황을 유도한 것이다. 지금도 알자스 지역엔 신교도들이 전체인구의 20% 가량 된다고 한다. 16~17세기 종교전쟁을 이해해야 유럽을 이해한다.
 
  프랑스 알자스의 古都 콜마의 미술관에는 「이센하임의 祭壇 그림」이 있다. 안내자 실비아 양은 『이 그림 때문에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다음으로 방문객이 많다』고 자랑했다(프랑스의 지방에 가면 이런 식으로 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루브르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센하임이 있다」는 식이다.
 
  이 그림은 16세기 초 독일인 마티스 그린발트가 그린 것이다. 병풍처럼 여러 장으로 된 그림인데 技法의 사실성과 현대성으로 유명하다. 햇빛과 색감을 중시했던 인상파의 작품 같으면서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팔뚝이 경련하는 것까지 잡아 낸 사실성이 구경꾼들을 압도한다. 이 그림은 이센하임 수도원에 있다가 1793년에 콜마로 옮겨졌다. 요사이는 독일 사람들이 순례하는 기분으로 이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몰려 온다는 것이다.
 
 
 
  [알프스 아래 호반 도시 안시의 환희]
 
  『아, 이것이 행복이구나』
 
  月刊朝鮮 여행단은 알자스州의 콜마에서 버스로 출발하여 스위스 바젤 쪽으로 들어갔다. 국경 검문소에서 스위스 경찰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여권검사를 했다. 영세중립국 스위스는 유엔에도, 유럽연합(EU)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다. 스위스 사람들은 대체로 독일사람들처럼 경직된(성실한) 표정이다.
 
  스위스에 들어가면 군부대가 많이 보이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소총·기관총을 들고 다니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호루라기를 불면 즉시 40만 명의 예비군이 동원된다. 스위스의 중립을 보장하고 있는 것은 주변국들의 慈善(자선)이 아니라 자주국방력이다. 스위스의 중립은 본질적으로 무장중립이다.
 
  용맹한 스위스 사람들은 연방을 조직하여 합스부르그 왕조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14세기 이후 약 200년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을 자주 침략했다. 1515년 프랑스에 의해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엔 중립을 선언했다. 17세기 초의 30년 전쟁을 결산하는 웨스트팔리아 조약에서 스위스는 중립국으로 인정받아 그 뒤 유럽을 휩쓴 戰禍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으나 격렬한 저항 끝에 독립을 회복했다. 1, 2차 세계대전 때도 중립을 지켰다.
 
  스위스는 자주국방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특히 방공호를 많이 만들었다. 방공호 파는 기술은 스위스가 일등일 것이다. 우리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로잔으로 가서 올림픽 공원을 구경한 다음 제네바의 한국 대표부에 들렀다. 鄭義溶(정의용) 대사를 예방했다. 한국 대표부 건물은 최근 신축한 것인데 약 2600만 달러가 들었다고 한다. 아주 예술적이고 현대적인 건물이었다.
 
  鄭대사는 『요사이 UN 인권위원회가 열리고 있는데 對北韓 인권 결의안을 채택할 것 같다. 작년에 우리 정부는 유럽연합국가들을 설득하여 1년 연기를 받았지만, 올해엔 그럴 명분이 없다』고 말했다.
 
  제네바에서 다시 프랑스 사보아州의 안시로 향하는 약 2시간의 드라이브는 오른편으로 알프스 산맥을 두고 달리는 길이었다. 기자는 눈 덮인 高山을 바라볼 때 마음이 가장 편안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비행기를 타고갈 때는 눈덮인 高山을 구경할 수 있는 경로와 창가 자리를 고르려고 애쓴다.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건너갈 때는 알프스 산맥 위를 날고, 중앙아시아로 갈 때는 天山山脈 상공을 가로지른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갈 때는 피레네 산맥 위를 날았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갈 때는 우랄산맥 위를 지나가는데 해발 1000m를 겨우 넘는 산맥이 남북으로 둑처럼 뻗어 있었다.
 
  알프스 산맥에서 흘러내린 안시 호수를 끼고 있는 인구 5만 명의 안시(Annecy)에 기자가 처음 와본 것은 1994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두 시간 정도 머물렀다. 「꼭 한 번 더 와서 자고 가야지」 하는 결심을 했었다. 여행단이 묵은 호텔은 호수변에 있는 임페리얼 팰리스. 꼭대기에 붉은 바탕의 백십자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스위스 국기와 어떻게 다른지 물어보았다.
 
  호텔 프런트의 직원이 설명해 주었다. 스위스 국기의 백십자는 가운데가 작게 그려져 있지만 이 호텔의 깃발은 백십자가 全面을 꽉 채우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것은 지금은 없어진 사보아 公國의 깃발이다. 사보아(영어로는 사보이) 공국의 역사가 재미 있다.
 
  11세기 중반에 훔볼트 1世에 의해 건국된 사보아 공국은 지금의 이탈리아 북부로 영토를 확장해 갔다. 1563년 사보아 공국은 샴베리에 있던 수도를 이탈리아 트리노(영어로는 Turin-투린)로 옮겼다.
 
  사보아 가문에선 이탈리아에 본거지를 두고도 프랑스 지역에 있던 사보아를 계속 통치하였다. 프랑스는 대부분의 주민이 프랑스語를 쓰고 있는 사보아 공국을 병합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프랑스는 대혁명 직후인 1792년에 사보아를 합병했다가 23년 뒤 다시 사보아 가문에 돌려 주었다.
 
  한편, 北이탈리아로 진출한 사보아 가문은 트리노에서 영토를 확장해 가다가 1720년엔 콜시카 섬 남쪽의 사르디니아 섬까지 차지하면서 왕국을 칭하게 되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 때였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사보아 가문이 통치하는 사르디니아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의 주체세력이 된다. 외교의 천재 카부르가 사르디니아 왕국을 통일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영웅적인 장군 가리발디, 언론인으로서 이탈리아 통일의 논리와 열정을 깨우쳤던 마치니와 함께 통일의 세 영웅으로 불리지만 카부르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독일통일을 이룩한 비스마르크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로마 중심부 캐피털 언덕에 있는 항공모함처럼 생긴 흰 건물이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한 사르디니아 왕국의 임마뉴엘 2세 기념관이다.
 
  사보아 가문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룰 때 北이탈리아를 통치하던 오스트리아를 추방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그 代價로 지금의 사보아와 니스 지역을 프랑스에 주어 버렸다. 일종의 구획정리인 셈이다.
 
  안시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청명한 날씨에 햇볕을 받기 위해 사람들이 호반의 공원으로 많이 나와 있었다. 우리 일행도 어슬렁거리면서 호반을 걸었다. 호반에서 뽑아 낸 냇물이 옛 시가지 사이를 흐른다. 수백년 되었을 것 같은 한 주택 건물은 냇물 가운데 섬처럼 서 있다. 유럽에서 가장 맑은 호수라고도 한다.
 
  기자는 거리에 나 있는 카페에 앉아 호수와 호수에 긴 그림자를 던진 알프스 산맥을 바라보면서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 지금 이 순간이 이번 여행의 피크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일종의 환희였다.
 
 
 
  [몽블랑을 향해 부른 「조국찬가」]
 
  바위로 만든 왕관을 쓰고, 구름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Mont Blanc: 흰산)은 해발 4807m로 프랑스의 사보아州 샤모니에서 올라간다. 月刊朝鮮 여행단은 안시를 출발하여 샤모니로 향했다. 맑고 건조한 공기가 행운을 예약해주었다. 기자가 9년 전 샤모니에 도착한 날은 눈 오는 날이었다. 몽블랑에는커녕 봉우리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샤모니로 접어들면서 양쪽의 산맥이 깎아지른 빙벽과 절벽으로 병풍처럼 이어진다. 이윽고 정면에 많이 본 듯한 산봉우리가 나타났다. 아, 몽블랑 만년필의 뚜껑에 박힌 문양(하얀 별표)이 바로 저 봉우리를 그린 것이구나 하는 직감이 왔다. 원추처럼 둥글한 봉우리가 후덕한 아주머니처럼 버티고 있었다.
 
  샤모니는 해발 1000m. 여기서 케이블카를 타면 2309m 지점에 내린다. 조금 작은 케이블카로 바꾸어 타고 직벽을 기어오르듯 매달려 올라가면 해발 3842m 전망대에 도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긴 스팬을 가진 케이블카라고 한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가면서 창 밖을 내려다 보니 인간들이 점점이 빙벽에 바짝 붙어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등반가들을 존경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고산증이 느껴졌다. 현기증과 구토증을 참으면서 3842m 전망대에서 몽블랑, 그랑 조라스, 로체봉의 파노라마를 구경했다. 멀리까지 보였다. 여행기간 10일간 한 번도 흐리지 않았던 날씨가 몽블랑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번 여행 최고의 순간이었다. 고딕 성당의 첨탑 같은 날카로운 봉우리는 마왕이 사는 城처럼 보였다.
 
  샤모니 사람들은 매일 고개를 쳐들어 그 산봉우리들을 올려다 보면서(목 디스크가 있는 사람들은 주의해야 한다)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 이 공포의 봉우리에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발상을 했단 말인가. 디나 롤라 토티노. 이 이탈리아 기술자가 1949년부터 케이블카 가설 공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마터호른 봉우리에 케이블카를 놓은 경력자였다.
 
  그는 케이블이 이미 놓여 있던 해발 2309m의 중간지점에서 3842m 지점까지 케이블을 놓는 일부터 시작했다. 30명의 등반가들이 선발되었다. 이들은 케이블을 나무에 동여맨 다음 30명의 몸에 줄줄이 엮었다. 그들은 이틀간 빙벽을 기어오르고 빙하를 건너 3842m 봉우리에 도착했다. 일단 케이블이 연결되니 레일을 깐 철도처럼 물건의 이동이 쉬워져 공사가 빨리 진행되었다. 전망대가 天上에 세워진 것이다. 공사에 10년이 걸려 1958년부터 케이블카가 왕래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詩人 로드 바이론은 몽블랑을 보고 이런 詩를 남겼다.
 
  <몽블랑은 모든 산의 왕자이다. 오래 전 그들은 그의 머리 위에 바위로 만든 왕관을 씌우고, 눈으로 만든 띠를 두른 다음, 구름으로 만든 옷을 입혔다>
 
  『Mont Blanc is the monarch of mountains; They crowned him long ago on a throne of rocks, in a robe of clouds, with a diadem of snow』
 
  안시로 돌아오는 車中에서 기자는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싶은 충동을 느꼈다. 김동진씨가 작곡한 「조국찬가」를 불렀다. 몽블랑도 아름답지만 대한민국의 「금수강산 옥토낙원」도 못지않다는 것을 알프스에 고하고 싶었다.
 
 
 
  [부르고뉴 公國의 복잡한 역사]
 
  한때 프랑스를 합병할 기세
 
  여행 8일째 우리는 프랑스 알프스 산록의 안시를 떠나 남동쪽으로 두 시간 달려 리옹에 도착했다. 리옹은 론 밸리(Rhone Valley)라고 불리는 평야의 중심에 있다. 론강은 알프스 산맥의 물을 받은 스위스 제네바 호수에서 發源하여 약 1000km를 흘러 알프스 산맥과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한 끝에 니스 근방에서 산맥과 함께 지중해로 들어간다.
 
  론강 유역은 로마시대 때부터 번창했던 곳이다. 프랑스에 로마 문명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며, 기독교도 서기 2세기에 들어왔다. 기원 전 43년에 로마 식민지의 거점도시로 출발한 리옹은 아우구스투스 황제下에서 가울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1473년에 금속활자 인쇄술이 리옹에 들어오자 이 도시는 유럽의 제일 가는 인쇄 도시가 되었다. 동시에 견직공업이 발달해 이 도시는 지금까지도 富의 축적에 따른 문화, 패션, 음식문화의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리옹은 인구가 약 50만 명이지만 주변 도시권까지 포함하면 200만 명으로서 파리 지역 다음의 인구밀집, 경제중심지이다. 이 도시의 舊시가지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500~ 600년 된 건물들이 商街를 이루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시가지가 보존된 규모로는 베네치아에 이어 리옹이 두 번째이다. 파리와 쌍벽을 이룬 중심지로서의 권위와 돈맛이 나는 도시이다.
 
  리옹 시내로 들어갈 때는 론강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맞은 편에 옆으로 길쭉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가로로 길이가 375m나 되는 구호병원인데, 중세에 건축된 병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불에 탄 것을 완전히 복원한 것이다. 리옹·부르고뉴 지방에는 수백년 된 구호병원이 많다. 백년전쟁 때의 부상자·난민들을 위해 지은 것들도 있다.
 
  리옹 시내의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부르고뉴州의 수도인 디종으로 향했다.
 
  부르고뉴 지방은 보르도, 알자스 지방과 더불어 대표적인 포도주 産地이다. 부르고뉴 지방은 중세에 프랑스 왕의 직할령이 되었다가 왕족의 직할령, 즉 公國이 되었다가 하는 변화를 많이 겪었다. 1366년부터 110년간의 公國 시절 네 명의 훌륭한 영주를 만나 부르고뉴는 프랑스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여 한때는 지금의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까지 통치하는 유럽의 강국이 되었다.
 
  부르고뉴의 전성기를 연 네 공작은 모두 별명을 갖고 있었다. 대담한 필립, 겁이 없는 존, 착한 필립, 대담한 찰스. 英佛백년전쟁 중 부르고뉴의 「겁이 없는 존」은 프랑스 측의 계략에 걸려 암살된다. 그의 아들 「착한 필립」은 복수심에서 영국과 동맹하고는 잔 다르크를 붙잡아 영국 측에 팔아넘겼다.
 
  서기 1477년 「대담한 찰스」는 로렌 공국의 낭시를 공격하던 중 전사한다. 이때를 틈타 프랑스의 루이 11세는 부르고뉴를 공격하여 그 대부분 지역을 프랑스에 합병시켜버렸다.
 
  부르고뉴의 마지막 지배자인 「대담한 필립」의 딸 매리는 부르고뉴의 남은 지방(콩테)을 가지고 합스부르그家의 맥시밀리안 황제와 결혼하여 필립을 낳는다. 이 필립의 아들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찰스 5세이다. 그는 스페인 王도 겸하여 이슬람 군대를 마지막 거점 그라나다에서 몰아내 스페인을 기독교下에서 통일한다. 찰스 5세는 프란시스 1세 치하의 프랑스를 자주 공격했다. 家門의 복수전인 셈이었다.
 
  부르고뉴 지방의 일부였던 콩테 지방은 스페인 찰스 5세의 아들 필립2세 소유로 다시 넘어간다. 당시 유럽은 국민국가가 성립되기 전이었으므로 公國은 유럽 王家의 사유물처럼 취급되었다. 부르고뉴 공국 중 일부인 콩테 지방은 1678년 루이 14세에 의하여 프랑스로 돌아오기까지 스페인 왕의 영토였다. 물론 콩테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語를 말하는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유럽의 국민국가는 프랑스語를 말하는 사람은 프랑스 국가를, 독일語를 말하는 사람은 독일 통일국가를, 이탈리아語를 말하는 사람은 이탈리아 통일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식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우리 여행단 일행은 밤중에 디종에 도착하여 작은 호텔의 부속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호텔은 작고 허술하게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가 보니 품격과 기품이 느껴졌다. 호텔이나 음식점 등 프랑스의 오래된 건물은 대체로 바깥으로는 별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아 허름한데 안으로는 꽉찬 內實을 품고 있다. 일부러 허술하게 보이려고 애쓴 것 같기도 하다.
 
  음식점은 지하에 있었다. 캬브(Cave)라고 불리는데 그야말로 동굴에 들어온 것 같았다. 벽면에는 쇠줄이 늘어뜨려져 있어 혹시 고문실이나 지하요새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하여 종업원에게 물어보았다. 옛날엔 포도주 창고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은근한 조명과 수백년 전으로 시간이 역류한 듯한 분위기 속에서 부르고뉴産 포도주를 마시고 있으니 對話도 근사해졌다.
 
 
 
  [포도주 마시고는 헛소리를 하지 않아야]
 
  척박한 포도밭의 가스난로
 
  부르고뉴의 옛 수도 본느에는 유명한 건물이 하나 있다. 본느 구호병원. 이 건물의 지붕은 총천연색 타일로 덮여 있다. 이 건물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물로서 관광 사진첩에 자주 나온다. 서기 1443년에 건축되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수상이던 니콜라스 롤랑이 백년전쟁으로 생긴 貧民과 병자들을 구호하기 위해 지은 大건축물이다. 건물의 양식은 플랑더스 지방(벨기에·네덜란드 지역)의 양식을 따온 것이다. 당시 부르고뉴 공국은 플랑더스를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화 수입이 가능했다. 이 건물 때문에 부르고뉴 지방에 플랑더스 건축양식이 퍼져갔다. 요사이는 이런 천연색 타일 지붕의 건물이 부르고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 병원은 대성당처럼 크고 엄숙하다. 中世에 사용했던 의료기구가 전시되어 있다. 입원실은 큰 홀처럼 되어 있다. 길이가 50m, 너비 14m, 높이가 16m.
 
  놀라운 사실은 이 구호병원이 1971년까지 병원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조 초기에 지은 병원이 朴正熙 시대까지도 500년 이상 병원으로 운영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놀라운 역사의 연속성이 아닌가.
 
  그 비결은 롤랑이란 사람이 이 병원을 설립할 때 財源으로 포도밭을 병원 소유로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병원 재단은 약58헥타르의 포도밭은 갖고 있다. 여기서 나는 고급 포도주 경매가 매년 열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행사이다.
 
  이 구호병원의 성공은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재정적인 독립을 갖추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것이 그 일과 조직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여행 10일째 아침 본느를 떠났다. 아쉬움이 남는 날이었다. 일행 모두가 이런 여행이 하루만 더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파리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여행의 의미를 마무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이번 여행은 포도주 여행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필자는 속으로 웃었다.
 
  이번 여행은 전쟁터 시찰여행으로 기록될 것인데… 「오늘의 역사는 체험이고 내일의 역사는 기록」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기록자인 필자는 돌아가서 여행기를 쓸 때 골치 아픈 포도주 이야기는 간단하게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다. 戰場 이야기와 분위기만 전할 것이다. 읽는 이들은 아, 이분들은 이라크 전쟁을 기념하여 獨佛 전장을 기행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했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역사는 기록자의 전유물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역사도 그렇게 왜곡된 것이 아닐까.
 
  愼鏞碩 단장은 파리로 가는 길에 또 한 군데를 더 넣었다.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날은 좀 편하게 갔으면 하고 바랐지만 욕심이 많아 추억거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어 주겠다는 愼鏞碩 단장은 샤블리(Chablis)란 부르고뉴의 마지막 마을을 넣어 놓았다.
 
  인구 2600명의 마을에 있는 호텔은 왜 그렇게도 아늑한지, 그 식당에서 황제처럼 먹은 점심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神은 농촌을 만들었다는 말이 프랑스 농촌을 두고 한 말이란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여론조사를 했더니 「농촌에 살면서 음악을 듣는 교사」란 답이 나왔다고 한다. 왜 「포도주를 마시는 교사」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갔다.
 
  프랑스에서 보낸 10일, 꿈결 같은 여행에서 돌아온 지 10일간 기자는 「이상한 時差 적응」에 애를 먹었다. 金正日 똘마니들에 대한 鬪志와 경멸감, 그리고 정의감마저 약해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투지를 회복하는 데 한 열흘이 걸렸다. 포도주가 투지를 허물어 뜨리고 꿈에도 나타나는 은은한 추억이 마음을 약하게(혹은 부드럽게) 만든 것이리라. 徐承穆 교장 선생님의 자살, 그리고 후세인 동상이 무너지는 장면이 기자에게 다시금 투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백포도주의 産地로 유명한 샤블리의 산비탈은 포도밭이었다. 울퉁불퉁한 돌밭이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우러나는 포도주 맛이 유별나게 좋다고 한다. 아,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척박한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얼마나 멋있고 맛있는 것일까. 朴正熙 같은 「부끄럼 타는 鐵人·超人」이 그런 사람이다.
 
  샤블리 포도밭에는 한 그루 한 그루의 포도나무마다 곁에 가스 난로를 두고 있었다. 겨울에 얼어 죽지 않게끔 난방을 한 것이다. 이처럼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포도주를 마시고는 절대로 헛소리를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차이
 
 
 이번 月刊朝鮮 여행단의 차중 강연중 「여행 大家」 愼鏞碩씨의 여행에 관한 평이 재미 있었다.
 
 『저는 골치 아프면 일단 서울을 떠나 여행을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결책이 나오고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조국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면 이런 점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 건축물이 구경거리로 존재하지만 유럽에선 역사가 생활 속에 있고 생활이 역사 속에 있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지금 살고 있는 주택은 수백년 이상짜리이고 1000년 전에 만든 성당 안에서 오늘도 예배를 올립니다. 역사와 생활이 한덩어리가 되어 함께 호흡하고 있는 셈이지요』
 
 필자는 李承晩과 朴正熙의 생애를 들여다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李承晩은 한국과 미국의 합작품이고 朴正熙는 한국과 일본과 만주의 합작품이다. 李承晩은 미국으로 여행을 갔기 때문에 거대한 안목과 국제적 감각을 가진 대인물이 되었다. 朴正熙는 산골 문경의 보통학교 교사직을 떠나 동양의 서부 만주로, 그 뒤에는 전쟁중의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국가의 운명을 건 건곤일척의 근대화 꿈을 가질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이 조선 땅을 떠나지 않았다면 절대로 역사적 인물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月刊朝鮮에 연재중인 孫世一씨의 「비교평전-李承晩과 金九」에는 李承晩의 여행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으로 유학갈 때 여객선 안에서 느꼈던 소감이 감동적이다. 그는 조선의 백성은 어느 외국의 평민들보다도 우수한데 지배층의 수준이 낮아 고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배층이 허명과 명분을 좋아하고 實事求是의 정신이 약해 부국강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00년 전의 지적이 요사이 우리 정치판에 대한 지적처럼 들린다. 李承晩은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09년 귀국할 때도 큰 여행을 했다.
 
 여객선으로 영국으로 가서 런던을 구경한 뒤 파리로 간다.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로 만주를 거쳐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의 이런 見聞은 그의 눈을 밝게 했고 나중에 대한민국을 세울 때 소용이 된 것이다. 여행만큼 효율성이 높은 투자는 달리 없을 것이다.
 
 반대로 金日成과 金正日은 비행 공포증이 있는데다가, 선진 자유세계로 여행을 안해본 사람이란 점에 북한 사람들의 비극이 있다. 金日成은 중국·만주·시베리아를 여행했고, 金正日은 동독에 유학을 했다. 두 사람이 본 것은 후진 독재국가뿐이었다. 본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대로 행동한다는 말이 맞다면 두 사람은 그 정도의 정치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李承晩과 朴正熙는 다행히 선진국으로 여행을 한 사람이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과 여행다운 여행을 안 해본 사람의 차이가 바로 남북한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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