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미당 서정주 탄생 100년 - 내가 만난 미당

이강기 2015. 10. 15. 22:34

[스페셜 리포트 | 미당 서정주 탄생 100년] “나는

떠돌이 기질이고 참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이야

내가 만난 미당

박해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주간조선[2341호] 2015.01.19

 

▲ 1985년 서울 남현동 자택에서 포즈를 취한 서정주. photo 조선일보 DB
미당 서정주 시인(1915~2000)의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로 불리는 미당은 시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 혹은 ‘가장 영향을 받은 시인’으로 꼽혀왔다. 미당의 시는 사계절이 순환할 때마다 떠오른다. 봄엔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설움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풀리는 한강가에서’ 도입부)를 외게 된다. 여름엔 시 ‘상가수(上歌手)의 소리’가 들린다. ‘질마재 상가수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모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을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면 상여 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가을엔 단연코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를 읊게 된다. 겨울엔 시 ‘동천(冬天)’이다. ‘내 마음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은 말년에 심장표피건조증을 앓았다. 그는 “평생 시상(詩想)을 떠올리느라 심장을 혹사했더니 병이 나고 말았다”며 껄껄 웃곤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심장은 시의 원천이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연인을 기다릴 때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으며 “내 심장은 당신의 발자국일 뿐”이라고 읊었다. 그 연인은 시의 여신(女神)이기도 했다. 미당은 보기 드물게 그 여신을 쉼 없이 맞아들인 행복한 시인이었다.
   
   미당은 2000년 10월 아내 방옥숙 여사가 노환으로 세상을 뜨자 갑자기 기력이 쇠약해지더니 그해 12월 아내 뒤를 따랐다. 미당은 1970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서울 관악구 남현동에 살았다. 집에 ‘봉산산방(蓬蒜山房)’이란 이름을 붙였다. 쑥 봉(蓬), 마늘 산(蒜)이 있는 산방이란 뜻이었다. 곰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왔다. 시인이 시 한 편을 탈고하는 집이 신화에서 동물이 사람으로 변하는 공간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였다. 미당이 생전에 머물던 집 마당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미당은 가을에 탐스러운 감이 빨갛게 익어도 까치밥을 줄 요량으로 손도 대지 않았다. 가을엔 멀리서도 미당의 집을 알아볼 수 있었다.
   
   1992년 팔순을 코앞에 둔 미당이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내가 봉산산방에 취재를 하러 갔더니 미당은 2층 응접실에서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약 3년 동안 모스크바 대학에서 러시아어 어학연수를 하고, 방학에는 조지아공화국의 캅카스산맥에 있는 장수촌에 들어가 시를 쓰겠다.” 미당은 아내와 함께 간다고 했다. “우리 할망구는 나 없이는 못 살어. 우리는 서로 그래. 우리 할망구는 대학을 안 다녔어. 학교 공부를 못했어. 그래도 사람의 근본적 자격은 나보다 나아. 할망구가 2년 전 디스크수술을 한 뒤 기억력이 쇠퇴해서 속옷도 내가 챙겨놔야 찾아 입을 정도야. 이미 월급몰수권을 할망구에게 줬으니까 그나마 이 집도 장만한 거야.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미국에서 의사, 변호사 하는 것도 다 그 사람이 만든 거야. 나는 그냥 심부름이나 해. 그런데 그게 좋아.”
   
   미당은 한참 동안 아내 자랑을 하더니 곁에 둔 스위스 목동의 뿔피리를 집어들었다. 미당이 힘껏 뿔피리를 불자 집안 곳곳에 소리가 퍼졌다. 아래층에 있던 부인이 “부르셨어요?”라며 올라왔다. 미당은 “커피보다는 맥주가 좋아. 두 병 갖고 와”라고 했다. 부인의 청력이 약해진 뒤 뿔피리를 불어서 찾는다는 거였다. 미당은 밤중에 집에 도둑이 들자 뿔피리를 크게 불어 도둑을 혼비백산케 해 내쫓은 적도 있다.
   
   미당은 말년에 전 세계 산 이름을 외기 시작했다. 날로 약해지는 기억력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7년에 걸쳐 산 이름 숫자를 늘려가면서 매일 아침 외우기를 되풀이했더니 나중엔 1625개를 줄줄 왼다고 했다. 아내도 틈틈이 배워 100개는 왼다고 했다.
   
   미당이 러시아 유학을 결심한 것은 언젠가 모스크바 여행을 갔다가 본 구름에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구름은 날이 밝은 날 순백색이고 날씨에 따라 색깔도 다양해. 모스크바에서 어느 날 해질녘 구름을 봤는데 그게 흑장미 빛깔이었어. 흑장미빛은 칼로 심장을 찌르면 나는 핏빛인데, 이런 구름을 보는 것은 무척 오래간만이었어.”
   
▲ 1997년 서정주 시인이 시인 문정희(왼쪽), 김형영(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만났을 때 동석한 박해현 기자(오른쪽). photo 조선일보 DB

   미당은 젊은 날에 쓴 시 ‘자화상’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러시아에 가려는 까닭에 대해 “나는 원래 떠돌이 기질이야. 오래 찝찝하면 못 견뎌. 어린애 같은 호기심도 건재해”라고 말했다. 미당은 6·25전쟁 직후 러시아어를 잠깐 익힌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러시아어를 들여다본 것은 6·25를 일으킨 스탈린에게 항의하기 위해서였어. 김일성이 나를 부르주아니 뭐니 해서 몰아대는데, 나하고 텔레파시가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뒤에 앉아있는 스탈린에게 직접 항의하려면 러시아어를 알아야겠더군. ‘파체므 웨스처 라즈 외자 곤지미 첼라미’. ‘왜 또다시 불법행위를 하느냐’라는 러시아말이야.”
   
   미당은 결국 1992년 7월 16일 아내와 함께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당은 공항에서 “공기 맑은 산수 덕분에 캅카스에서 10만명 중 6000명은 100살이 넘었다고들 하잖아”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미당은 11월 갑자기 장수촌의 꿈을 접고 귀국했다. “러시아에 도착하자 주변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민족 분리독립 운동이 첩첩이 일어나서 위험하고 음식도 귀한 형편이니 캅카스 지방에 가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만류하더라. 주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돌아다니다 왔어.”
   
   미당은 어쩔 수 없이 돌아왔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나는 참으로 그리워하는 사람이야.” 아쉬움 탓인지 한동안 미당은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993년 11월 나는 미당의 봉산산방을 다시 찾아갔다. 조선일보가 중국에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촬영해 연 ‘아! 고구려’전에 미당을 모시고 가서 관람기를 써달라고 청탁할 생각이었다. 미당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모자를 꺼내 쓰고 지팡이를 쥐었다. 미당은 ‘해와 달의 신의 춤’이라는 벽화 사진을 눈여겨보곤 이렇게 썼다. “밀착해서 춤추는 게 아니라 적당한 사이를 두고 따로따로 떨어져서 느릿느릿 점잖게 춤의 가락을 펴고 있는 이 해의 신과 달의 신의 관계는 언뜻 보기엔 애인이나 부부의 사이같이는 보이지 않고 오빠와 누이의 사이쯤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는 걸 언제나 난잡하지 않게 보이려 해 온 우리의 전통적인 예의에 비추어보자면 이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사이의 아조 점잖은 애인 한 쌍의 춤으로 보인다.”
   
   미당은 부사어 ‘아주’를 늘 ‘아조’라고 썼다. 제자들은 스승을 회상할 때 “아조, 그러니까, 아조 보기 좋게…”라고 그 말투를 흉내 내곤 했다. 미당은 1994년 팔순을 맞았다. 그 당시 서희건 조선일보 문화부장과 봉산산방에서 대담을 했다. 미당은 일제강점기 때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다니며 불경을 공부하던 때를 회상하면서 불교와 풍류(風流)를 예찬했다. “토인비는 21세기가 되면 불교정신이 세계를 이끌어간다고 봤어요. 다른 종교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정화하는 방법은 없고 오직 계율만 있다고 봐요. 그러나 불교는 정신 정화의 방법을 갖고 있어요. 또 하나 중요한 동양정신은 우리 고유의 국선(國仙) 사상이에요. 신라 때는 풍류라는 게 있었잖아요. 불교, 유교, 도교가 다 풍류 속에 있잖아요. 그건 단군 이전부터 있어 온 걸로 알아요.”
   
   그 이후 나는 미당을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제자들이 스승의 집에 간다고 하면 동행하곤 했다. 시인 김형영과 문정희를 따라 간 적이 있다. 미당은 제자들을 위해 술상을 차렸다. 김형영 시인이 스승의 건강을 염려해 술잔을 반만 채우자 미당은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문정희 시인에게 잔을 채우라고 내밀며 “정희야, 너는 손이 크지?”라며 눈웃음을 쳤다.
   
   미당은 평생 친일(親日) 문인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그는 “친일 문학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며 “젊은 시절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그것이 새삼 아픔으로 다가온다”고 참회한 적이 있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받으신 게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미당이 좋아하는 맥주 한 상자를 사들고 갔을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미당은 “돈을 받아서 집에 에어컨 한 대를 장만하곤 나머지 돈으로 월간 문예지 ‘문학정신’을 창간했지”라고 소탈하게 답했다. ‘문학정신’은 1980년대 말까지 나오다가 재정난으로 김수경 시인에게 넘어갔다가 이젠 문학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문예지다. 미당도 문학사에 긴 발자국만 남긴 채 떠나갔다.
   
   그러나 잠 안 오는 밤에 미당의 시를 읽으면 항상 새롭게 해석되곤 한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감흥이 나이를 먹으면서 생겨난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을 수 없듯이, 시도 읽을 때마다 달라진다. 시는 영원한 생성을 누린다. 미당은 앞으로 세월이 흘러도 새 독자를 만나면서 늘 거듭나는 시인으로 살아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