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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 “매운 향내 萬海, 주정뱅이 憑虛, 마돈나의 相和”

이강기 2015. 10. 20. 14:13

[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④ 한용운·현진건·이상화

 

“매운 향내 萬海, 주정뱅이 憑虛, 마돈나의 相和”

 

월간조선 2014년 10월호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농담 잘하기로는 나도향이 으뜸이요, 술 주정 하면 현진건, 연애 박사에는 노자영, 의뭉하고 입담 좋기로는 방정환, 재담 잘하기로는 박영희가 으뜸이었다. 이상화는 인생에 대한 태도가 경건했다.’(김팔봉)

⊙ 박종화 “현진건은 주정뱅이가 아니요, 그의 주정은 가짜 주정”
⊙ 조지훈 “먹물 드린 적삼에 무슨 보따리를 들고 고개 넘던 만해 모습 못 잊어”
⊙ 김팔봉 “‘마돈나’를 부르는 <나의 침실로>가 이상화 시의 으뜸”
한용운·현진건·이상화(위로부터 시계 반대 방향).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식민·전쟁·분단·가난의 극단을 체험한 20세기 문인에게 잊히지 않는 이는 누구일까.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잡지 《신천지(新天地)》는 1954년 9월호와 10월호에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여러 문인의 이야기를 연재했다. 9월호에 작가이자 평론가인 팔봉(八峯) 김기진(金基鎭)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李相和)를 회상했다. 10월호에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가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을, 시인 조지훈(趙芝薰)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이른바 ‘술 주정뱅이’였던 현진건은 불평이 있으면, 아니꼬운 사람이 있으면 주정을 부렸지만 실상은 주정뱅이가 아니요, 가짜 주정이었음이 묘사돼 있다. 한용운 선생의 진면목을 ‘매운 향내’, 넉 자(字)로 집약할 수 있고, 폐가 나쁜 이북(以北) 여성을 사랑했던 이상화가 ‘마돈나’를 외치는 시 <나의 침실로>를 쓴 사연이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현진건의 호는 빙허(憑虛)다. 빙허가 주호(酒豪)로 이름을 알린 것은 30세 직전의 일이다. 빙허를 “스무 살 때는 백석(白晳-얼굴빛이 희고 잘생겼다는 뜻) 삽상(颯爽-씩씩하고 시원스럽다는 뜻)의 미청년이었다”고 월탄은 회상한다. 빙허의 집안은 구한말(舊韓末) 명문가였는데, 군령부(軍令部) 총장을 지낸 현영운(玄暎運)이 작은아버지요, 궁내부 시종(侍從)을 지낸 현보운(玄普運)이 양부(養父)다. 당시 처음으로 설치된 대구우편국장을 지낸 현영운(玄靈運)은 생부, 프랑스 공사를 지낸 현상건(玄尙健)이 그의 재종(再從), 상해임시정부 시절 독립투사로 이름을 날렸던 현정건(玄鼎健)이 빙허의 중형(仲兄)이다. 박종화는 “빙허는 신구가 교체되는 시대적 각광을 받은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처가 역시 지방의 부호여서 그는 한평생 의식의 간구(艱苟)한 것을 모르고 풀솜 속에 싸여 자라난 귀공자였다”고 했다.
 
  현진건이 대구(大邱)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그의 생부가 대구에서 근무할 때 태어났고 그의 처가 대구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중 대구의 이상화 시인이 《백조》 동인으로 추천한 이가 빙허이니 대구와 빙허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다.
 
  그러나 경술국치를 목도한 소년의 가슴에 차츰차츰 민족적 반항심이 불타기 시작했고 열아홉 때는 부모 몰래 상해 외국어학교로 도망치기도 했다. 기미(己未)운동을 상해에서 겪었고 둘째 형(玄鼎健)의 영향으로 스무 살 무렵 강렬한 배일(排日)의식을 갖게 됐다.
 
  귀국 후 《개벽》지에 <희생화>라는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발표한 것은 1920년. 이어 발표한 <빈처>로 문단의 인정을 받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조선일보》에 입사했고 1년 뒤인 1922년 《동명 주보(東明週報)》로 옮겨 편집을 맡게 됐다. 이때부터 빙허는 《동명》을 중심으로 주호(酒豪)의 길을 걷게 됐다고 월탄 선생은 설명한다.
 
  당시 《동명》에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주필을 맡고 있었고, 석농(石濃) 유근(柳瑾) 선생, 횡보(橫步) 염상섭(廉想涉), 백화(白華) 양건식(梁建植), 묵재(默齋) 최성우(崔誠愚), 순성(瞬星) 진학문(秦學文),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손준모(孫俊模), 청오(靑吾) 차상찬(車相瓚), 도향(稻香) 나빈(羅彬)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저녁마다 다방골 민순자(閔順子)의 술집으로 모여들거나 양건식의 애인 애선당(愛旋堂) 집으로 모여 코가 삐뚤어지게 마셨다. 빙허는 이때 주량이 《백조》 동인 시절보다 더해 ‘승당(昇堂) 입실(入室)을 한 격’이었다고 한다.
 
  어느 추운 겨울, 일본에서 한 다다이스트(dadaist) 시인(辻潤)이 찾아온다. 도향과 월탄, 빙허 등은 서울역 앞에 있는 주점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해 종로를 거쳐 동대문까지, 동대문 밖에서 다시 종로까지 오가며 술을 마셔댔다. 월탄은 ‘술 먹은 잔 수가 도향이 70사발, 빙허가 60사발, 월탄이 50사발, 일본 시인이 40사발을 마셨으니 이만하면 빙허와 도향의 주량을 짐작할 것’이라고 썼다.
 
 
  《동명》에 당대 酒豪들로 가득
 
문세영의 《조선어사전》.
  빙허가 근무하던 《동명》이 1923년 7월 일간지 《시대일보》로 변신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폐간하자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월탄은 “빙허가 신문인으로 큰 족적을 남긴 것은 이때의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 … 그는 (신문)대장을 놓고 제목을 붙이는데 편집 7~8명이 모여 선 중에, 붉은 잉크를 붓에 듬뿍 찍기만 하면 섬각(閃刻)을 지체(遲滯)하지 않고 주옥 같은 명 제목이 이곳저곳에 낙필(落筆) 성장(成章)으로 비치듯 떨어져서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귀재에 혀를 둘러 탄복케 할 지경이었다. …>(p140, 《新天地》 1954년 10월호)
 
  창작에 있어서는 단편엔 당대의 1인자였지만 장편에서도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월탄의 지적이다. “그의 생애 말기에 나온 장편 《무영탑》은 우리나라 100년에 남을 만한 작품이었다. 그는 술을 좋아하되 공부할 때는 여간 독실하고 치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938년 문세영(文世榮)이 《조선어사전》을 처음 펴냈을 때 빙허는 “우리말 어휘를 연구하느라 그 큰 책에 실린 단어를 모조리 글 읽듯 읽어서 고어(古語)와 신어(新語)를 비교하면서 문장에 써먹을 어휘를 수십 독하였다”고 한다. 월탄은 “이것으로 본다면 빙허는 주정뱅이가 아니요, 그의 주정은 가짜 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 …그는 불평이 있으면 주정을 한다. 아니꼬운 사람이 있으면 주정을 해 부친다. (중략) 일본놈이 미워서 주정을 한다. 일본 순경이 미워서 술김에 일 순경의 집 유리창을 부수며 야료(夜鬧)를 한다. 뜻 맞는 친구하고 술을 먹을 때면 백 잔을 먹어도 곱게 돌아간다. 한참 빙허가 거리에서 주정이 심할 때 멋모르는 사람은 그의 신상을 염려해서 그의 집까지 바래다 주느라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러나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들은 시치미 딱 떼고 없어져 버린다. 골목 뒤에 몰래 숨어서 보면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릴 것 같던 자가 딴 사람인 듯이 태연히 걸어간다.>(p141, 10월호)
 
  빙허는 둘째 형인 현정건씨가 상해에서 잡혀 와 옥사한 뒤 주정의 빈도가 더욱 잦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이 사망하여 화장한 뒤 중형수(仲兄嫂)마저 ‘순사(殉死)’했기 때문이었다. 형과 형수를 한꺼번에 잃은 뒤 빙허의 주정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자 신문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그린 ‘일장기 말소 사건’도 빙허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빙허는 거의 반년 동안 구치(拘置)를 당한 뒤 풀려났다. 출옥하는 옥문 앞에서 월탄에게 한 빙허의 일성은 이러했다.
 
  “가장 생각나는 것이 담배요.”
 
 < …확실히 불평으로 술을 먹었고 술로써 불평을 해소시켰고, 불평을 술로써 흩으러 버리려 한 사람이다. 그 뒤 빙허는 신문계를 떠났는데 그는 다시 창작 생활로 돌아가 《흑치상지》라는 장편을 집필했다. …>(p142, 10월호)
 
 
  조지훈의 萬海 회상
 
시인 조지훈.
  조지훈 선생은 만해 한용운을 떠올리면서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만해를 추도하며 쓴 시조를 인용했다.
 
 <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임에게야 견줄손가 / 이날에 님 계시면 별로 아니 더 빛날가 / 불토(佛土)가 이의 없으니 혼(魂)아 돌아오소서 …>
 
  만해 선생의 인품을 평하여 조지훈은 정인보의 시조를 빌려 ‘풍란화 매운 향내도 따르지 못한다’ 할 정도다.
 
 < … ‘매운 향내’ 이 넉 자(字)야 말로 만해 선생의 진면목을 도파(道破)했다고 할 것이니 고매한 인격과 식견은 본디 그윽한 향기를 지니는 법이지만 그 향내의 짙음이 맵다는 표현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만해 선생의 지조의 높이를 진실로 아는 사람만이 가능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p153, 10월호)
 
  정축(丁丑)년 어느 여름날, 조지훈은 만해 선생을 처음 만났다. 조지훈이 성균관(서울 종로구 명륜동 3가) 뒤에 살았기 때문에 고개 하나만 넘으면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은거(隱居)를 찾아뵐 수가 있었다. 심우장은 만해 선생이 1933년 지은 집으로 1944년 생애를 마치기 전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 … 가엄(家嚴)을 따라 심우장으로 가는 길에 만해 선생을 만난 것이다. 먹물 드린 고이 적삼에 헬멧을 쓰고 무슨 보따리를 들고 고개를 넘던 고기(古奇) 청수(淸秀)한 모습은 매우 인상이 깊다. …>(p154, 10월호)
 
  그 뒤 일제 말기, 조지훈이 서울을 떠나기 전까지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갔다.
 
 < … 나의 혼돈된 기억이 그 어느 해인지를 헤아릴 수 없으나 선생을 마지막 보온 것은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선생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을 때였다. 때가 때인지라 일송 선생의 시신을 돌볼 사람이 없어 감옥 구내(構內)에 버려 둔 것을 만해 선생이 망명시절 고인에게서 받은 권우(眷遇)와 지사(志士) 선배에 대한 의리에서 결연히 일어나 성북동 꼭대기 심우장까지 일송 선생의 관을 옮겨다 모셔 놓고 장사를 치르던 무렵이었다. …>(p154, 10월호)
 
만해 한용운이 한때 기거했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 서울시 기념물 7호로 지정돼 있다.
  조지훈이 우연히 서울에 들렀다가 그 소식을 듣고 심우장을 찾았다. 일송 선생의 영전(靈前)에 뵙고 장사 날까지 머물러 있다가 물러나온 것이 선생의 모습을 본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일송 선생의 장례식 당시 겨우 20명 안팎의 조문객만이 빈소를 찾았다. 일제 관헌의 눈치를 꺼려 오지 못했던 것이다. 조사 낭독 하나만으로 절제된 영결식에서 만해는 조사의 낭독을 조지훈의 아버지에게 양보했다. 당시 조지훈은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 … 조사의 낭독을 고인의 동향 후배라 하여 가엄께 미루시고 묵묵히 저립(佇立)하던 모습은 지금도 나의 인상에 깊이 남아 있다. (중략) 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신 분이 어찌 선생 한 분만이리요 마는 일을 위해 구구한 누(累)가 묻을 수도 있었고, 민족 정기를 지키는 지조가 어찌 선생 한 분뿐이랴 마는 보신을 위해 숨어서 약할 수도 있었으나 적나라(赤裸裸)하여 한 점 누를 용납하지 않고 숨어 있으되 삼연(森然)한 광망(光芒-빛줄기)이 굽은 적 없는 분은 선생이 첫손을 꼽을 수밖에 없다. …>(p154, 10월호)
 
  조지훈은 이런 기억도 떠올린다. 한번은 독립선언서에 같이 서명했다가 변절한 인사가 만해 선생을 찾아왔다. 만해는 옆 사람을 시켜 “없노라”고 말한 뒤 그 사람이 돌아가려 할 때 큰 소리로 “에헴, 에헴” 하고 헛기침 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수해의연금을 모금하러 심우장을 찾았다. 만해는 학생들을 극구 칭찬한 다음 ‘수력(手力)에 지나치는’ 금액을 적더니 “이 돈을 어떻게 쓰겠느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약간의 금액은 부득이 국방헌금(日帝)으로 내고 나서 이재민에게 나눠 주겠다”고 했더니 선생은 노발대발하시며 의연금을 ‘쥐어뜯고’ 이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 … 따버린(뜻을 버린) 사람이 가기 전에 들으라고 기침을 하는 것은 ‘너를 일부러 만나지 않는다’는 표적을 내기 위함이요, 허락한 금액을 말소(抹消)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나쁜 수단을 속죄(贖罪)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이해하면 이 기벽(奇癖)과 고집(固執)은 웃어버릴 수가 없는 눈물이 깃들어 있다. …>(p156)
 
 
  폐병 여인을 사랑했던 李相和
 
소설가 나도향.
  1923년 5월 중순 어느 날. 김팔봉이 일본 릿교대(立敎大)를 그만두고 귀국한 뒤 8개월간 유숙하던 집이 서울 낙원동 어느 여관이었다. 회월(懷月) 박영희(朴英熙)와 박종화의 추천으로 참여한 《백조》의 동인지 공간은 ‘낙원동 여관골목에서 큰길로 나와 비스듬히 건너다보이는 탑골공원 뒤편에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당대 문사를이 조우했는데 나도향(羅稻香), 현진건(玄鎭健), 홍사용(洪思容), 안석주(安碩柱), 노자영(盧子泳), 원세하(元世夏), 이상화 등이었다. 나중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도 가세했는데 팔봉과 소파는 이미 수년 전부터 도쿄에서부터 친하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고 한다.
 
  1924년 2월 팔봉의 아내가 상경하자, 청진동 천변에 ‘일금(一金) 15원’ 하던 월세집을 얻어 소위 신가정(新家庭)을 이루자, 그해 여름부터 이상화는 자주 팔봉을 찾았다. 그즈음, 이상화는 관동 대지진을 도쿄에서 겪고 귀국했다.
 
  그때 팔봉의 청진동 집에 자주 찾아온 이들로 회월(懷月), 심훈(沈薰), 최승일(崔承一), 연학년(延鶴年) 등이다. 당시 “이상화는 고뇌기(苦惱期)에 있었던 것 같다”는 것이 팔봉의 회고다.
 
 < …첫째는 이성과의 연애에서 빚어진 고뇌요, 둘째는 자신의 건강이 허약해지는 고뇌요, 셋째는 사상에서 순수 예술성에 대척하는 그로서 반항 정신의 문학으로의 일로를 걸음 걷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탐구하려는 고뇌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월탄 박종화.
  그는 나를 찾아오면 낮에 왔지 밤에 오지 아니했다. 술 안 마시고서 맹송맹송한 얼굴로 왔지, 눈가에라도 주기(酒氣)를 띄우고서 찾아오지 아니했다. …>(p153, 《新世界》, 1954년 9월호)
 
  이상화는 실없는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태도 전체가 경건했다”는 것이다. 다른 《백조》 동인들과는 딴판이었다. “농담 잘하기로는 나도향이 으뜸이요, 술 주정 하면 현진건, 연애 박사에는 노자영, 의뭉하고 입담 좋기로는 방정환, 재담 잘하기로는 박영희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팔봉은 ‘이상화나 박종화, 나는 무재(無才)·무능(無能)·무기(無技)·무예(無藝)의 인물이었다’고 썼다.
 
  이상화는 당시 서울 가회동(嘉會洞) 끝자락 취운정(翠雲亭)에서 그의 애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여성은 함흥 여성이었는데 폐가 나빴다. 팔봉의 아내가 이 여성을 만난 뒤 “상화씨의 애인은 참 미인인데 폐가 나쁘대요. 내가 보아도 오래 살지 못하겠던데요”라고 팔봉에게 말할 정도였다.
 
 
  <나의 침실로>와 마돈나, 폐병 여인
 
팔봉 김기진.
  1924년 겨울은 이상화가 가장 고통을 느끼던 때였다고 한다. 상화의 연인 유보화(柳寶華)의 건강이 더욱 나빠지던 시기였다.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둔 침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욱.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맘의 촉(燭)불을 봐라. 양털 같은 바람결에도 질식(窒息)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중략)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나의 침실로> 중에서)
 
  마돈나를 부르던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가 비록 그의 나이가 18세 되던 해(1918년)에 처음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가 동인지 《백조》 3호에 실린 것은 1923년 9월경이다. 또 이상화가 한 여성(柳寶華)과 사랑에 빠진 것은 1923년 봄으로 알려져 있다. 팔봉은 “이 시와 유보화 양과는 신비스런 연락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고 했다.
 
  이 폐병 여인은 그러나 1924년 가을, 병사하고 만다. 그 후 팔봉은 이상화의 소식을 드문드문 들었으나 만날 수는 없었다.
 
  상화는 주로 고향(대구)에서 두문불출했다. 1931년 팔봉이 대구에 내려가 옛 문우와 조우했다. 요릿집에 가서 소리도 듣고 그동안의 소회도 나누었다. 그러나 팔봉의 눈에 이상화는 왠지 “쓸쓸해 보이고 우울해 보였다”고 한다.
 
 < …말 수가 그 전에도 적은 편이었지만 5~6년 만에 만난 그는 그 전보다 더욱 말수가 적었다. 쾌활하게 웃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때도 있기야 했지만 그보다는 쓸쓸하고 답답해하는 그림자가 그의 전체를 보다 더 명랑하지 못하게 덮고 있었다. …>(p154, 9월호)
 
  1946년 3월 팔봉이 중국 베이징에 머물고 있을 때, 우연히 동포신문을 보다가 상화의 죽음을 전한 기사를 보게 된다. 팔봉은 깜짝 놀란다.
 
 < …더욱 놀란 것은 같은 날 현진건이 영면(永眠)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해 6월 말 평양(平壤) 헌병대의 손에 체포(逮捕)되어 쇠고랑을 차고서 압록강을 넘어왔다. 그리하여 8·15 해방 직전인 7월 하순에 석방되었다. 말하자면 상화와 나는 수일(遂日) 상종하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서로 경애하는 지기였다. 《백조》 동인들 가운데서는 상화와 가깝기로는 동일(同日)에 영면한 빙허가 동 고향사람으로 가장 가까운 터이고, 그 다음엔 회월, 월탄, 도향이었다. …>(p155, 9월호)
 
  6·25 사변이 나고 1·4 후퇴 이후 대구에서 3년간 피란생활을 하는 동안 팔봉은 1년반 동안 8번이나 이사를 했는데 당시 한 지인이 “상화의 미망인 서(徐)부인댁 방을 주선해 주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팔봉은 거절했다. “나는 부인의 마음이 괴로우실 때가 있을 것을 두려워해 사절했다”고 한다.
 
  1953년 8월에 대구 《영남일보》에서 서울로 떠나는 피란 문화인을 기념하는 송별 좌담회가 달성공원 안 ‘상화 시비(詩碑)’ 앞에서 열렸다. 이날 많은 문인들이 상화 시비를 중심으로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으로 팔봉은 기억했다.
 
  상화는 자기 아호를 일정하게 쓰지는 않았다고 한다. 초기에는 상화(想華)라고 썼고 나중에는 상화(尙火), 말기에는 백아(白啞)라고 썼다. 널리 알려진 호는 상화(尙火)다.
 
  이상화는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팔봉은 “그가 남긴 20편 내외의 시는 모두 금싸라기 같이 귀하고 빛나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 … 그의 대표작을 하나만 정하라 하다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꼽는 사람들이 많으나 나는 그의 처녀작인 ‘마돈나’를 부르는 <나의 침실로>를 쳐들어 올린다. 그만큼 이 시는 고인의 성격 내면적인 정열, 철학적인 명상(冥想), 그의 호흡, 그의 체취까지 대표하는 명작으로 인정하는 까닭이다. …>(p155,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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