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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⑥ 문인의 독서

이강기 2015. 10. 20. 15:12
  1. 월간조선 2014년 12월호

[발굴] 文人, 옛 잡지를 거닐다 ⑥ 문인의 독서

민족문화 자긍심 일깨운 고전물 耽讀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한글은 목숨’이라던 최현배, 한자음과 우리말 소리를 구별한 《언음첩고》
⊙ 소설가 김남천, 학창시절 수학시험 앞두고 밤새워 읽던 《헤르만과 도로테아》
⊙ 시조시인 이병기, 허균이 가장 불우한 시절 지었던 시문집 《성소부부고》
⊙ 평론가 백철, 적장과 싸워 미인을 얻는 ‘傳記소설’에 빠져들어
  1940년대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문인들은 어떤 책을 즐겨 읽었을까.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전쟁 협력 강요가 극에 달하던 일제 강점기 막바지, 그들은 무슨 책을 읽고,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해진다.
 
  잡지 《춘추(春秋)》는 1941년 2월 창간한 종합 월간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1940년 8월 강제 폐간을 당한 뒤 발간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민족주의 성향의 기사로 발행이 중단되는 곡절을 겪었다.
 
  《춘추》 1941년 10월호에 학자와 문인에게 ‘나의 독서관’을 묻는 글이 실렸다. 설문 내용은 ‘①고전물과 현대물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 ②즐겨 책을 보는 계절과 시간 ③독서 묘방(妙方) ④최근 읽은 양서(良書)가 무엇인지’였다.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崔鉉培·1894 ~1970)는 ①고전 ②가을·겨울 밤 ③작가의 심경(心境)으로 끌려 들어가 책 내용과 논리를 포착하고, 독자 입장에서 비판해 자기의 지적 성장을 꾀한다 ④조선 헌종 때 사람 석범(石帆)이 쓴 《언음첩고(諺音捷考)》 상하(上下) 2권을 꼽았다.
 
  외솔이 고른 《언음첩고》는 한자음이나 우리말의 소리를 구별하기 위한 책이다. 한자음을 한글로 쓰고 그 아래에 이 한자음을 가진 한자를 나열하는 방식으로 기술했다. 외솔은 《언음첩고》를 ‘양서’로 고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 … 한글 발음에 관한 연구가 착정(着定)하고, 체재가 정연하여 ‘한글(正音學)’의 귀중한 참고서이다. 그러나 아직 사본으로 있음은 섭섭한 일이다. …> (p150, 10월호)
 

  이 잡지가 발행되던 그해(1941년) 외솔은 파면된 연희전문학교에 다시 복직한 상태였다. 파면 당시엔 교수직이었으나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했다. 그러나 잡지가 발행될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감돼 4년간 옥고를 치르고 광복 전 출옥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어문(語文)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 규정, 회원들을 체포·구금한 사건이다. 어찌 보면 《언음첩고》는 외솔이 수감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인지 모른다.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은 ①고전 ②가을·등화가친(燈火可親·가을바람이 서늘한 저녁이면 등잔을 켜고 책을 읽기에 좋다는 뜻) ③독서에 무슨 방법이 있겠으나, 다만 한번 선택한 이상, 되도록 한자리에서, 되도록 한 정신으로 독료(讀了) ④앙드레 모로아의 《불란서(佛蘭西) 패(敗)하다》, 린위탕(林語堂)의 《북경역일(北京曆日)》, 로만롤랑의 《미켈란젤로》, 후지즈카 지카시(藤塚隣·1879~1948)가 쓴 《김완당(金阮堂)》.
 
  상허가 고른 《김완당》은 다분히 복선을 깔고 있다. 《김완당》은 청나라와 조선시대 문인들의 이야기. 저자인 후지즈카는 당시 경성제대 교수로 대표적인 일제시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연구자였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국보 180호)를 베이징에서 발견해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대가 없이 한국에 되돌려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도 2006년 초 한국 고서와 서화류 2700여 건을 한국에 기증한 일이 있다.
 
  후지즈카 교수는 1936년 도쿄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조에서 청조(淸朝)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을 쓰기도 했다.(이 논문은 2008년 《추사 김정희 연구》로 이름을 바꿔 국내 번역됐다.) 《김완당》은 조선 후기 최고 석학이자 중국과 일본 지식인들조차 흠모했던 추사 김정희의 세계를 재조명한 책이다.
 

  가람이 고전 두 권을 고른 이유를 들어 보자.
 
  시조시인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1891~1968)는 ①고전·현대 어느 것을 막론하고 필요가 있으면 읽는다 ②틈만 나면 읽는다 ③방법이 없다. 정신을 들여 읽는다 ④김성탄(金聖嘆)의 《창경당집(唱經堂集)》, 허균(許筠·1569~1618)의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골랐다.
 
 < … 김성탄과 허균 두 사람 다 절륜(絶倫)한 재자(才子)로서 그 탁견과 소회를 말한 것이다. 여러 사람의 문집을 보다 이 책을 대하매 잔산단록(殘山短麓·비바람에 깎여 나지막해진 산과 짧은 산기슭이라는 뜻)을 보다가 금강(金剛)과 같은 기봉(奇峰)을 보는 것과 같다. …>(p150~151, 10월호)
 
  《성소부부고》는 시대를 앞서간 당대 혁명가이자 문장가였던 허균(許筠·1569~1618)의 문집. 허균이 가장 불우했던 시기에 칩거하면서 쓴 글이다. ‘역적 괴수’의 글이라 공간(公刊)되지 못한 채 후학들에게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외솔과 상허·가람이 ‘양서’로 고른 고전들은 심심풀이로 읽는 책이 아니다. 나라는 잃었으나 민족문화의 자긍심만큼은 잃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춘추》 1941년 5월호에는 ‘내가 밤을 새고(새워) 읽은 책’을 주제로 여러 문인의 글이 실렸다.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1896~1989)과 소설가 이원조(李源朝·1909~1955), 시인 임화(林和·1908~1953), 소설가 김남천(金南天·1911~1953), 소설가 안회남(安懷南·1909~?), 소설가 홍효민(洪曉民·1904~1975) 등 좌익계열 인사들이 다수였다.
 
 
  투르게네프·박지원·괴테 작품 선정
 
  청마(靑馬) 이육사(李陸史)의 동생이자 《조선일보》 기자였던 이원조는 자신이 몸담은 신문의 신춘문예에 2년 연속 시·소설이 당선될 정도로 재기(才氣)가 넘쳤던 인물이다. 광복 직후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과 함께 좌익계열인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 월북했다.
 
  이원조는 ‘밤 새워 읽은 책’으로 이반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를 꼽았다. 선정이유는 이랬다.
 
 < … 생각해 보면 춘원의 《재생》 같은 책도 17~18세 때 침식을 잊고 읽은 것 같으나 열아홉 되던 해, 투르게네프의 《그 전날 밤》은 확실히 하룻밤을 꼬박 새워 읽은 것 같습니다. 그 감격으로 여주인공을 대신해 ‘인사로프 조사(弔詞)’라는 기나긴 시도 지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를 다시 본다면 아마 낯이 붉어지겠지요. 그리고 책 중에는 잠을 청하는 책, 잠을 퇴출하는 책이 있는데 열하일기는 잠을 쫓아내게 하는 책입니다. …>(p 241, 5월호)
 
  1860년에 발표된 《그 전날 밤》은 농노해방의 전야(前夜)를 그린 소설로 조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생애를 바치려는 한 불가리아인(인사로프)의 이야기다.
 
  소설가 김남천은 괴테의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추천했다. 이 작품은 1792년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연인의 이야기. 김남천은 “밤 새워 글을 읽거나 글을 쓰면 이튿날 일할 수가 없다. 우리집에 낮잠 잘 방도 없다”며 궁색한 형편을 고백했다.
 
  그러나 “소년시절, 괴테 책을 읽으며 밤을 새웠다”고 기억했다. 그것도 수학시험을 앞두고서. 그는 “시험공부 대신 소설을 읽은 것이 말할 수 없는 명예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 … (읽었던 책을) 뒤적거려 보았더니 군데군데 연필로 사이드라인을 치고 끝에는 ‘1917. 11. 27. 대수(代數)시험을 앞두고 맘을 새기며’ 하고 적혀 있었습니다. 손을 꼽아 생각해 보니 내가 열일곱 났을 때입니다.
 
  소설의 첫 대목을 오전 0시경에 읽기 시작했다면 이내 괴테의 저서를 치우고 대수 교과서를 들었을 것임이 분명한데, 아마 초저녁부터 읽기 시작해 새벽 2~3시에 헤르만과 도르테아의 샘물을 들여다보며 서로 웃는 장면을 읽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대수시험 운운하고 쓴 것을 보면 시험공부를 안 하고 이 소설을 읽은 것이 자랑스럽고, 또 말할 수 없는 명예처럼 소년의 마음에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 (p241, 5월호)
 
 
  춘향전 밤새워 읽어
 
  소설가 안회남은 프랑스 추리작가 가스통 르루의 《황색실(黃色室)》을 선정했다. 안회남은 최초의 근대 신소설로 꼽히는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安國善·1878~1926)의 아들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안회남은 이태준·박태원·이상 등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1947년 월북했다.
 
  안회남은 “애독한 책은 많지만 밤새 읽은 책은 드물다”면서도 “그야말로 밤새도록 눈 한번 안 붙여 보고 읽은 일이 있는데 《황색실》이었다. 무서워서 책을 덮고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핀 일도 있다. 소위 밀실의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인데 참 스릴이 풍부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철야 탐독했다”고 했다.
 
  《황색실》은 밀폐된 방에서 이뤄진 암살 사건을 추적하는 추리물. 이 소설은 나중 《노란방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재출간됐다.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홍효민은 《추월색》과 《춘향전》을 꼽았다. “한글을 알게 된 것이 11살인데 처음 접한 책이 《설인귀전(薛仁貴傳)》이었다. 나의 멋 모르는 고성(高聲) 낭독을 조모(祖母)가 칭찬하는 바람에 신이 나서 읽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읽은 것이 《삼국지(三國志)》. 홍효민은 “그 뒤로 소설에 재미가 붙어 《추월색》과 《춘향전》을 밤새워 읽었다”고 했다. 15살 때의 일이다.
 
 < … 그 후 잊히지 않는 것은 당시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소설 <애사(哀史)>가 연재되고 있었는데 조모께서 그동안 모아 둔 신문소설을 읽으라고 하셔서 저녁 6시부터 오전 2시까지 읽었습니다. 약 50회가량을 읽었는데 불행하게도 다음날 저녁에 조모의 의식이 혼미하여 읽어 드려도 못 알아들으시고 이튿날 돌아가신 것입니다. …> (p242, 5월호)
 
  그는 이 글 말미에 ‘최근에는 독서를 할 틈도 없지만 독서를 3시간가량 하면 눈이 아파 아무리 재미있는 책이라도 덮어 두게 된다’고 했다.
 
 
  학교 대신 《젊은 베르테르》에 빠져
 
《백민》 1949년 6월호 표지와 조연현의 <나의 문학적 산보> 첫 장.
  잡지 《백민(白民)》 1949년 6월호에 시인·문학평론가 조연현(趙演鉉·1920~1981)은 <나의 문학적 산보(散步)>라는 산문을 통해 학창시절 추억을 전한다. 조연현은 우익 민족주의 문학 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한 인물.
 
  경남 함안 출신의 조연현은 학창시절, 중학교 4곳과 전문학교 1곳을 중퇴한 반항아였다. 고등예비학교와 강습소에 적을 두었던 시절까지 더하면 10년 가까이 학교를 다녔으나, “학생 신분에 적합한 시간은 10년의 10분의 1도 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나마 빠지지 않고 학교의 출석부에 출석이라고 기록된 날은 학기말시험 시간뿐’이었다. 그 외는 조퇴가 아니면 결석. 친구들 사이에 ‘대학생’이란 별명이 붙었다.
 
 < … 나는 수학 방정식을 풀고, 영어 단어를 암송하며, 역사의 연대표를 기억하고, 산소와 수소의 성분을 공부하는 것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을 이해하며 랭보나 보들레르의 시를 외우는 것이 더욱 중대한 일 같이 느껴졌다. …>(p 178, 6월호)
 
  또 “아무리 학교와 집에서 미움을 받아도 남몰래 시를 써 보고,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나 세스토프의 《비극의 철학》을 읽는 것으로 나는 얼마든지 나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백민》 1948년 10월호 표지와 백철의 <공상적…> 첫 장.
  《백민》 1948년 10월호에 문학평론가 백철(白鐵·1908~1985)의 <공상소년(空想少年)과 각설문학(却說文學)>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평북 의주 출신인 백철은 유년시절, 학교 대신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그는 나중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 교수,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어린 시절 백철은 “10살 때 대학의 주(註)를 혼자 붙여 읽을 만큼 한문 실력이 늘어난 뒤 삼국지에 빠져들었다”고 회고했다.
 
 < … 오호(五虎)대장 중에선 마초(馬超)를 가장 좋아했고, 제갈공명의 동남풍이지(東南風利持)와 목우류마(木牛流馬)에 감탄했으며, 출사표(出師表)를 읽고 울었으나 그중에도 공명이 죽은 뒤 문자(文子)가 고성(孤城)을 지키다 전사하는 장면에 이르러 소년은 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삼국지는 소년의 동심에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보여준 중요한 독물(讀物)이었다. …>(p163, 10월호)
 
  삼국지류(類) 한문소설을 섭렵한 뒤 백철은 전기(傳記)소설에 빠져든다. 그가 읽은 전기소설은 ‘무장(武將)이 적장(敵將)과 싸워 공을 세우고 가는 곳마다 미인을 만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 … 그 긴 겨울밤, 소년의 집 사랑에 마을사람들이 담배연기가 자욱한 방에 가득 모여 방등(등잔)불을 돋우고 한 사람이 각설이 때 운운의 전기소설을 목소리를 가다듬어 내려읽으면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여가며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는데 소년은 그 마을 사람들 누구보다 전기소설의 애청자였다. 그 긴 겨울 밤 12시가 다 지나도록 소년은 졸리는 눈을 부비며 앉아 있었다. …>(p163)
 
  그 시절, 아버지를 따라 몇 달에 한 번 읍내 장에 가는 것이 그에게 큰 호사였다. 그러나 50여 리나 떨어진, 10여 개의 산등성이를 넘어야 하는 먼 거리였다.
 
 < … 아직 날이 채 밝기 전 이슬이 흠뻑 젖은 풀 사이 길로 소 뒤를 따라 나서는 소년의 가슴에는 억제할 수 없는 기대와 동경이 사무쳐 있었다. 그것도 장에 가면 노점의 울긋불긋한 신구(新舊) 소설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p163)
 
  한번은 백철 혼자 장에 갔다. 아버지가 준 용돈 ‘1원’으로 《옥루몽》 4권을 사 버렸다. 그러곤 엿 한 가락 사 먹지 못하고 왕복 100리 길을 걸어왔다. 저만치 집이 보이는 ‘국수당 고개’에 도착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장에 갔다 돌아오던 마을사람이 발견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 … 너무 시장했기에 도리어 저녁은 먹지 못하고 앓아 누웠지만 그래도 《옥루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p164)⊙
 

  발굴 잡지
 
 < 나의 讀書觀>, 《春秋》, 1941년 10월호.
 < 내가 밤을 새고 읽은 책>, 《春秋》 1941년 5월호.
  趙演鉉, <나의 文學的 散步>, 《白民》, 1949년 6월호.
  白鐵, <空想少年과 却說文學>, 《白民》, 1948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