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術, 敎育

한국 교수도 탄성 지른 '우즈베크 한글 백일장'

이강기 2015. 10. 20. 14:40

원문출처 : 한국 교수도 탄성 지른 '우즈베크 한글 백일장'

원문링크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1/25/2014112500289.html

입력 : 2014.11.25 05:44

 

 

[타슈켄트 모인 중앙대학생 60]

 

입상땐 성균관대 석사 등록금 혜택, '코리아 드림' 직행 코스로 손꼽혀

 

"윤동주·겨울연가 보면서 공부"

 

뛰어난 실력에 심사위원도 놀라 "동화 작가 할 만큼 아름다운 글"

 

예정보다 수상자 2명 늘려 5명 뽑아

 

"후텁지근한 여름을 보내고 시원한 바람으로 가을을 맞이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를 들으면서 산책 중이다. 맞다! 오늘은 우리 언니가 선보러 가는 날이다."

 

원고를 읽던 김인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가 깜짝 놀라 시험지 상단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글로 또박또박 '허지예봐 마디나'라고 쓰여 있었다. 마디나(21·우즈베키스탄 국립동방대 한국어과 3학년)는 언니와 형부가 처음 만났던 가을날의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 살배기 아들과 아내를 두고 러시아의 공장 노동자로 일하러 떠난 형부와 그를 기다리는 언니 이야기였다. 형부는 3개월치 임금을 받지 못해 귀국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한 지 1년 반이 지나 사랑의 열매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나 형부는 일자리를 잃었고 추운 러시아로 일하러 가게 됐다. '1년이 지나면 꼭 돌아온다'는 말을 믿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남편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언니. 외삼촌을 '아빠'라고 부르는 불쌍한 조카. 가뭄에 콩 나듯 전화하는 남편을 언니는 그토록 사랑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난 국문과 천정환 교수는 먹먹한 표정이었다.

 

   
	지난 20일 오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제6회 중앙아시아 성균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이 ‘약속’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지난 20일 오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제6회 중앙아시아 성균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이 약속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지난 20일 오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제6회 중앙아시아 성균 한글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이 약속을 주제로 글을 쓰고 있다. /이슬비 기자

지난 20일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올해로 6회째인 '중앙아시아 성균 한글 백일장'이 열렸다. 이번 대회는 삼성그룹과 한국고전번역원이 후원했다. 멀리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까지 중앙아시아 4개국 대학생 60명이 모였다. 오전 10시 출제위원장인 박정하 교수가 주제가 적힌 두루마리를 펼쳤다. 곳곳에서 "!"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글제는 '약속'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이번엔 심사에 나선 성균관대 교수 4명이 탄성을 질렀다. "외국인이 어떻게 이런 묘사를 할까요?" "우리말 동화 작가를 꿈꿔도 될 만큼 글이 아름답네요!"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나르기자(22·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국립 외대)는 어느 날 피아노 건반 위에 뒀던 휴대폰이 폭발해 건반이 불타버렸다. 음악회를 한 달 앞둔 때였다. 다음 날 집에 새 피아노가 들어왔다. 위암 투병 중이던 아빠가 수술비를 털어 딸의 피아노를 산 것이었다. 몇 달 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빠의 사랑은 산처럼 든든하다. 산이 골짜기를 둘러싸 방풍(防風)하듯이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아빠가 항상 지켜주신다. 이제는 인생의 혹한에도 맞설 수 있다." 아흐메도바 비비파티(22·타지키스탄 국립 외대)는 자기 학비 때문에 팔려나간 '망아지' 사만드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꼭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동생 사만드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려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만드를 찾았다. 그런데 동생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팔았다. 사만드가 없었으면 넌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없었을 거야'라고 말했다."

 

심사위원들의 놀라움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참가자들의 실력에 예년 두 시간 반이면 끝나던 심사가 4시간 가까이 계속됐다. 결국 긴급회의를 연 끝에 이석규 국제처장이 "이번 참가자들의 실력이 뛰어나 수상자를 애초 3명에서 5명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2008년부터 열린 이 대회는 3등까지 한국행 왕복 비행기 삯과 성균관대 석사과정 등록금 전액이라는 파격적 시상을 한다. 그래서 '코리안 드림'으로 직행하는 코스로 꼽혀왔다.

 

마디나, 나르기자, 비비파티가 1·2·3등을 했고, 두 명이 더 입상했다. 마디나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같은 설화를 수십 번씩 읽고 한국 소설과 시를 수십 번 베껴 썼으며 드라마 '겨울연가'는 대사를 외울 정도로 돌려 봤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공부해 통·번역가가 돼서 가족의 희망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타지키스탄 국립 외대에서 14년째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최미희(53)씨는 제자 비비파티씨가 수상하자 "정말 장하다"며 울먹였다. 코이카 단원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는 이석례(60)씨는 "학생들은 교재 살 돈이 없어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교재를 들여다보면서 공부할 만큼 가난하지만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외워 낭송할 정도로 열성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