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 韓.中關係

개화기 언론과 중국

이강기 2015. 10. 27. 21:29

 

 

개화기 언론과 중국

 

- 梁啓超를 중심으로 -

 

 

李萬烈(숙명여대 한국사학과 교수)

 

 

목 차

 

1. 개화 초기 언론과 한 중 문화교섭

 

2. 梁啓超生涯著作

 

3. 韓末 梁啓超著作收容

 

4. 韓末 言論愛國啓蒙思想形成

 

 

 

1. 개화 초기 언론과 한 중 문화교섭

 

 

이 글은 한말 애국계몽기에 우리의 언론 사상계가 중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개화기 전체에 걸쳐서 우리의 언론이 맺은 중국 언론과의 관계도 관심의 영역이지만, 이 글에서는 특히 당시 중국의 근대 언론인이자 사상가였던 梁啓超와의 관계를 살피려고 한다. 종래 양계초의 활동과 사상이 한국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李光麟 申一澈 교수를 비롯한 여러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고, 필자도 申采浩의 역사학을 고찰하면서 梁啓超의 역사학에 대하여 일정하게 관심가진 바 있다. 그러나 언론 문제에 중점을 두고 직접적으로 천착한 것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양계초와 애국계몽기의 한국의 신문 잡지 등 언론계와의 관계 규명에 역점을 두고, 양계초의 학문과 사상이 한말의 지성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개화초기 언론

 

 

우리나라의 최초의 근대언론은 漢城旬報(18831031일 창간)漢城周報(1886125일 창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강화도조약(1876)으로 일본에 대한 개방에 이어 미국(1882)과 구미제국에 대한 문호를 조심스럽게 열고 있던 때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안으로는 종래의 봉건적인 적폐를 개혁해야 했고 밖으로는 어쩔 수 없이 우리나라가 외국에 대해 문호개방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나라의 자주독립을 수호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였다. 實學의 전통과 명맥이 강하게 유지되었더라면, 이 무렵쯤이면 안으로부터 성장한 자생적이고 강건한 개혁전통은 외국에 대해 개방성을 고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무렵부터 서세동점의 물결이 우리나라의 울타리를 넘보고 있을 때 우리는 쇄국의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개국의 필요성을 대중적인 여론으로 수렴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과 많은 정력을 소모하여야만 했다.

 

漢城旬報漢城周報가 간행되기 전에 '朝報'라는 서한형태의 새소식 홍보매체가 일종의 공적 전달기구로서 존재하였다. 이것은 근대이전에도 새소식을 전달하기 위한 매체가 어떤 형태로든 필요하였으며 그 필요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그것을 적절히 창안, 이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朝報' 형태의 전근대적인 뉴스 전달매체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있었다고 지적된다.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實學 이후 자체의 내적인 몸부림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추세이지만, 전제군주 사회에서 근대화를 향한 사회변화가 완만하였음에 비해 외세로부터의 급격한 개항충격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적극적인 추진력을 제고시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개항은 외국의 문물은 도입하게 되어 '開化'라는 용어를 낳게 되었고, 개화의 중요한 방편으로서 여론매체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컸던 바, 여론매체의 하나로서 우리는 근대언론의 핵심인 신문과 잡지가 창간, 발행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나라 개화기에 우리의 언론매체가 창간, 발행된 것은, 사회의 다른 여러 측면에서도 그러한 요소가 많이 보이지만, 이웃 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漢城旬報漢城周報의 간행은 일본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우리 나라의 근대 언론이 창간, 발행에서부터 서양문화 혹은 이웃 나라와의 관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러한 언론의 조직이나 체제, 편집의 구도나 내용, 그 언론을 통해 주장하려는 사상이나 근대지향성 등에서도 서양 문화 혹은 이웃 나라들로부터 일정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은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웃 나라들의 근대화가 근대 언론의 역할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근대화에서도 언론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근대화의 이념과 방법이 외부로부터 일정하게 수용되는 입장이었다면 우리의 언론도 우리 이웃으로부터 일정하게 영향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언론이 이웃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2) 한 중의 문화교섭 관계

 

 

한국과 중국의 문화적 관계는 조선조에 들어와 정기적인 사절이 내왕함에 따라 빈번하게 되었지만, 실학시대에 이르러 漢譯西學書가 소개됨으로 중국을 매개로 한 泰西 각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통로구실을 하게 되었다. 일찌기 東道西器的 입장에서 西學을 수용하였던 실학자 李瀷은 중국에서 발간된 여러 서적들을 섭렵함으로 서학연구를 정착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가 쓴 천주교에 관한 <天主實義>와 알레니(Giulio Aleni, 艾儒略)가 쓴 세계지리에 관한 <職方外紀>, 프톨레마이오스의 天文學에 관한 디아즈(Emmanuel Diaz, 陽瑪諾)<天問略> 등에 각각 跋文을 부침으로 서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개화기에 들어서서 중국에서 들여 온 서적들 중에는 한국의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들이 있다. 그 중에는 중국이 阿片戰爭(1840)에서 패배한 뒤에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간행한 책들도 있다. 그러한 책들은 주로 서양의 지리와 문물에 관해 고찰, 소개한 것으로 중국이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의도로 저술된 것이다. 그 중 魏源<海國圖志>徐繼樽<瀛環志略> 등은 개화파 인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나라 밖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던 大院君 집정 시절, 18674월 조선 조정은 나라로가 전해준 密咨를 통해 신문이 있다는 것과 그 위력이 어떠한가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18671월 영국령 홍콩에 체류 중이던 일본인 八戶順叔廣東에서 발행되는 한 중국 신문에 일본이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치려 한다는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청의 조정은 이를 同治帝에 보고하는 한편 冬至使 편으로 조선 정부에 密咨하여 조선을 당황하게 한 바가 있었다. 이 사건은 그 뒤 1876丙子修好條約을 논의하던 회담에서 조선 대표 申櫶이 일본 대표 黑田에게 그동안 일본과 국교가 단절되었던 이유를 바로 중국 신문에 난 이 기사와 그 후의 <萬國公報>에 실린 우리나라 모독기사 때문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신문의 위력이 이미 쇄국 조선에도 어느 정도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이 개화에 눈뜨게 되는 것은 이렇게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과 역관들에 의해서 이뤄졌지만, 개항(1876)과 그 후에 이루어진 일련의 개방화조치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민씨 정권은 대외정책면에서 大院君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에서 일본에 대한 개방정책을 채택했으나 체질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함으로 도리어 그 후에 개화를 적극화하려는 세력에게 장애물로 되면서 중국 의존적인 守舊勢力으로 전락하였다. 이와는 달리 개방 개화정책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던 개화파는 수구세력과는 달리 일본 편향적인 개화운동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急進開化派'에 의한 甲申政變(1884)은 그 대표적인 본보기다.

 

급진개화파 운동이 퇴조하면서 1890년대에는 '穩健開化派'의 개화운동이 본격화된다. 이 때에 새롭게 소개되는 것이 중국 洋務派들의 글과 주장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대중이 볼 수 있는 신문과 잡지가 간행되는 것과 때를 같이한다. 한자문화에 익숙한 온건개화파 인사들은 중국의 康有爲, 嚴復, 梁啓超 變法自强論자들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의 개혁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개화 초기에 일본을 모델로 반봉건 개혁을 추진하려던 세력을 開化派라 할 때, 변법 양무운동에 힘쓰던 중국을 모델로하여 개화 후기에 개혁을 추진하던 세력을 自强派라고도 불렀다. 따라서 후기의 온건개화파를 중심으로 한 개화세력을 자강파라고 할 때, 이들은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실질적인 추동세력이 되었다.

 

한말 중국으로부터 혹은 중국을 통로로하여 들어온 개화사상은 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하여 소개되었다. 淸末 변법자강론자들 중에서도 梁啓超의 글이 많이 소개되었다. 그래서 당시 그의 사상적 영향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이었다. 서구문명의 충격 속에서 양무운동을 통해 몸부림치던 淸末 한 지식인의 고뇌는 같은 시기 비슷한 처지에 있던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2. 梁啓超生涯著作

 

 

양계초(任公, 卓如)는 중국이 격변기를 겪고 있던 시기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자신의 민족에 봉사한 분이다. 그는 1873(同治 12)126廣東省 新會縣의 남쪽 熊子鄕茶坑村이라는 조그마한 섬에서 소지주인 梁寶瑛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인 광동성은, 그 자신이 자부하고 있었듯이, 秦 漢 시대의 먼 옛날부터 많은 영웅들을 배출하여 영웅의 명예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먼저 해외개방이 시도되어 선각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들을 배출하였던 곳이다. 중국 근대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洪秀全, 康有爲, 孫文 등이 모두 광동 출신이던 것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릴 때에 그는 祖父로부터 家學的인 전통 속에서 중국의 역사와 五經을 익혀 8세 때에는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12세 때에는 博士弟子員이 되어 학문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한편 唐詩詞章에도 관심을 가져 거기에 관계된 책을 읽고 수련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史記》《漢書등의 사서도 읽어 뒷날 역사이해의 기초를 닦았다. 16세에 이르러 學海堂에 들어가서 그는 訓嘁詞章에 전념하게 되었다.

 

1889년 그가 17세 되던 해에 그는 鄕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會試에 응시하였다. 귀향하는 길에 그는 上海에서 瀛環志略漢譯西學書들를 구하여 읽게 되었는데, 이 때에야 그는 중국 이외에 5대주와 만국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해 가을 그는 康有爲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陸 王心學을 비롯하여 經世致用公羊學 및 국제정세와 구국에 대한 강론을 듣고 크나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한편 앞서의 향시 응시를 계기로 그는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 시험의 主考官이던 李端掲의 여동생 李蕙仙1891년에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혼인으로 그는 뒷날 중앙무대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19세가 되던 해(1891)에 그는 廣東省 長興萬木草堂에서 스승 강유위로부터 집중적으로 학문을 수련받았다. 이 때를 회상하면서 그는 "선생은 수천년을 내려온 학술원류에 관하여 강의하였는데 내 일생의 학문적인 실력은 모두 이 해에 얻었다"고 할 정도로 이 강의에서 받은 감화는 컸다. 그는 거기서 宋元明儒學案二十四史》《文獻通考등을 수업받는 한편 草堂 안에 있는 장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이미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강유위가 新學僞經考를 저술할 때 교감을 보면서 그의 스승의 독단성과 주관성을 비판하기도 하였고, 孔子改制考를 분담, 편찬하면서 취했던 학문적인 객관성을 제고함으로 수천년간 신성불가침으로 공인되어 내려오던 경전에 대해 그 뒤의 학자들이 의심, 비판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런 학문적인 활동으로 그는 1893萬木草堂의 학장이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1894日 淸戰爭의 발발과 그 이듬해 청이 참패한 것은, 그러지 않아도 1892國子監太學生으로 일본을 막기 위해서는 變法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上書한 양계초로서는 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淸末의 지식인들은 變法維新의 필요성을 광범하게 공감하게 되었다. 일본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될 무렵, 강유위와 양계초는 상서운동을 전개하여, 拒和 遷都 變法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8천자에 달하는 상소문을 1,800명의 연명으로 都察院에 제출하였다. 상소의 내용 중, 拒和는 일본과의 굴욕적인 화의를 막아야 함을 뜻하고, 천도는 수도를 關中으로 옮겨 항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며, 변법은 부국강병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법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혁의 요체는 한마디로 변법이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 사회의 좌절과 침체의 근본원인이 변법적인 개혁을 도모하지 못함에 있음을 절감하면서, "변법을 앞서서 했다면 오늘과 같이 화가 없었을 것이며, 금일에 변법을 함으로써 장래의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今日에도 변법을 하지 않는다면 後日이 오늘보다 더욱 비참하게 될 것이다"고 변법의 시대적인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日 淸戰爭 후 강유위와 양계초 등은 개혁과 변법을 조직화하기 위해 1895'强學會'를 설립하고 이어서 변법을 위한 국민적인 여론을 환기하고자 <萬國公報>를 창설하였다. 비록 이 두 기관은 오래가지 못하였으나, 그 뒤 양계초 자신의 성장은 물론 중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양계초는 그 뒤 상해에서 창간된 <時務報>(18961898)를 통해 <變法通議> <西學書目表> 등의 발표하면서 자신의 변법 개혁 사상을 널리 펴 나갔다.

 

<時務報>를 통해 발표한 <變法通議>에서 그가 정치 사회의 모든 현상을 三世說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계초의 변법사상은 萬木草堂시절에 깊은 감동을 받은 스승 강유위로부터 계도된 바 크다. 그의 사상은 또 당시 서구로부터 귀국하여 진화론 등을 소개한 嚴復, 仁學의 체계를 세운 譚詞同 등의 영향을 받아 체계화되었다. 이 무렵 양계초는 스승 康有爲公羊學, 三世之義의 영향을 압도적으로 받아 '公羊三世說'을 발전시켜 '三世六別說'이라는 변법사상의 논리를 정립시켰다. 그 시기는 그의 활동이 현저해지는 <視務報> 간행 시기부터 戊戌變法(1898)의 시기까지라고 하겠다. 따라서 梁啓超는 공양학의 洗禮에 그 시발점을 두고 변법사상의 노리적 근거인 역사진화사상을 전개시켰던 것이다. 강유위의大同書에서는 "春秋公羊傳禮記<禮運篇>에 근거하여 역사의 발전을 據亂世 升平世 太平世 또는 小康 大同으로 계기적으로 파악하되, 이렇게 대동(太平世)이라는 이상단계를 과거 아닌 미래에 설정하였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인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聖賢(先王), 즉 이상적인 시대를 과거에 두던 復古 尙古思想과는 달리, 미래에 진보의 목표를 둔 三世說은 서구문명을 혹은 대동으로 혹은 小康(升平)으로 잡아 현실의 중국의 변법을 역사적 필연이라고 규정하게 하였던 것이다. 양계초는 이 三世說嚴復이 소개한 進化論(天演論)의 영향을 받아 강력하게 變法進步自强救亡의 일련의 變法論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그가 중국의 積弱自强으로 補救하기 위해 變法을 제창하였고 변법의 모델을 서구에서 구하여 변법의 필연성을 三世之義로 설명한 것은, 결국 변법사상이란 "중국 고대의 今文經學(公羊學)과 사방의 진화론을 교묘하게 융합한 이론과 사상"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三世說'을 주장하면서도 현재의 중국이 三世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 하는 것은 변법을 마련함에 중요한 요소였다. 양계초는 막연하게나마 중국도 升平의 단계에 들어갔음을 인식하고 서구와 같이 民主(總統之世) 文明(智勝力) 平等(貴族 男女 平等)이 실현된 太平으로 옮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서구문명을 太平의 단계로 잡았기 때문에 중국은 당연히 그 아래 단계로 설정되었고 서구문명의 도입을 전제로 하는 현실이해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또 변법운동의 실패는 그 자신 중국의 현실을 升平의 단계로 규정하는 데에 회의를 품게 하였다. 여기서 그의 개혁사상은 중국의 개혁운동이 升平을 지향해야 한다는, "보다 온건한(民主共和政에서 立憲으로) 개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더 나아가 그러한 공식의 무의미함을 깨닫자, 進化論으로 옮아가 三世說을 거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강유위 양계초 등의 변법 자강사상은 당시 중국인들의 광범한 지지를 얻게 되어 光緖帝18984變法에 대한 결심을 굳히고 變法維新 新政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西太后를 둘러싼 수구파의 완강한 반대에 봉착, 光緖帝는 유폐되고 변법파는 제거되었다. 이른 바 戊戌政變이다. 譚詞同 '戊戌六君子'는 처형되고 강유위와 양계초는 일본에 망명하였다.

 

18989월 일본으로 망명한 양계초는 주로 언론을 통해 계몽적인 활동에 나서는 한편 保皇會의 조직과 美洲旅行 등으로 망명생활을 보냈다. 그가 주력한 것은 언론활동으로서 1898년부터 190111월까지 <淸議報>旬刊으로 百號까지 간행하였으며, 19022월부터는 橫濱에서 啓蒙紙<新民叢報>半月刊으로 간행, 19077월까지 계속하였다. <淸議報>支那人論說 日本及泰西論說 萬國近事 支那哲學 政治小說 등의 6개분야로 나누어 서양과 일본의 학술 사상을 발췌하거나 번역 전재하는 한편 淸廷을 공격하는 내용도 게재한 데 비하여, <新民叢報>圖書 論說 學說 時局 政治 地理 史傳 敎育 宗敎 16개 분야로 나누어 '改造'를 목적으로 중국문화와 서양문화를 함께 소개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 무렵에 저술한 것은 중국에 관한 것으로 <中國學術思想變遷> <中國專制政治進化> <中國地理大勢> <中國敎育政策> <中國改革財政私案> <新史學> 등이 있으며, 서양에 관한 것으로는 <古代希臘學術論> <亞理斯多德之政治說> <格致沿革> <政治學理>와 베이컨, 데카르트, 다아윈, 벤담의 학설 등이다.

 

<新民叢報><淸議報>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논조를 폈으며 "排滿革命을 공언하거나 민족주의를 고취하지도 않았지만" "발간 6개월여만에 중국 언론계의 맹주격이 되어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辛亥革命 10여년간의 강유위 진영의 개혁론이 더 이상 정치사상의 흐름을 지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양계초 등의 개혁파의 노선이 점차 온건화되고 있다는 다음의 지적에 유의하고자 한다.

 

, "新民叢報(19021907)梁啓超가 편집하였는데 그는 자신과 동등한 명성을 얻고 있던 정력적인 사상가요 수많은 글을 쓴 사람이다. 개혁파들은 혁명은 파괴와 무질서를 가져오고 끝내는 외국의 간섭이 있게 되며 어쩌면 열강에 의한 중국의 분할까지도 일어날지 모른다하여 혁명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정치적인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인민의 능력을 증진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양계초는 그의 '新民說'에서 중국인의 생활양식 특히 공공도덕은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한말 한국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양계초의 '新民說'이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본 셈이다.

 

그러나 <新民叢報>의 창간 초기까지도 保皇的인 색채가 그렇게 뚜렷하지 않던 양계초가 1903美洲 保皇會의 초청을 받아 미주에 여행한 후 그의 논조가 점차 보수화되었고, 정치적인 입장도 保皇的인 색채를 띤 立憲君主制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정치사상이 브른츄리의 國家有機體說을 전환의 이론으로 수용하는 시기와도 일치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의 이러한 轉變의 시기는 흔히 光緖 298월에 브른츄리를 소개하는 것을 고비로 잡거나, 旅美(內心轉變)로 잡는다는 것이다. 의 이같은 변전의 싹은 1902(光緖28)년 정월 신민총보 1호에 발표한 <論學術之勢力左右世界>에서 브른츄리를 '20世紀之母'(루소를 19世紀之母)라고 했을 때 이미 보이고 있으며, 光緖 2810월에 출판한 <新小說> 1호에 발표된 <新中國未來記>의 서언에서 "國家人群皆爲有機體之物"이라고하여 '20世紀之母'인 브른츄리의 國家有機體說에 언급하고 있는 데서 보이고 있다.

 

혁명파의 기관지인 <民報>가 양의 이같은 변전을 간과할 리가 없없다. <民報>의 신랄한 공격의 대상이 된 <新民叢報>는 결국 19077월에 정간되고 말았다. 이 해 겨울 양계초는 다시 <政論>이라는 월간지를 간행하였으나 7호로 끝났고 1910년 봄에는 그 자신 東京에 거주하면서 상해에서 간행되는 <國風報>를 주도하였으나 1911년 여름에 정간되고 말았다. 이렇게 여러 잡지들을 통하여 양계초는 그의 사상을 피력하였지만, 그의 사상이 한말 한국 언룐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대략飮氷室文集(초간 1903)과 위의 <新民叢報>에 실린 저작내용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계초는 辛亥革命 19129월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반월간지 <庸言報>를 발행하였고, 1913년에는 共和黨을 거쳐 進步黨에서 활동하였으며, 이해 9월에 발족한 熊希齡內閣에서는 司法總長에 임명되었고, 1917년 성립된 段祺瑞內閣에서는 財政總長으로 입각하였으나 11월에 段內閣의 붕괴와 함께 정계에서 아주 물러났다. 191811월부터 19203월까지 유럽을 여행하고 귀국한 후 그는 여러 대학(天津南開大學, 北京淸華大學師範大學, 南京東南大學 )에서 강의하는 한편 중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게 되었다. <淸代學術槪論> <中國文化史目錄> <先秦政治思想史> <中國近三百年學術史> <中國歷史硏究法> <中國文化史> 등은 유럽 여행 후 중국의 문화를 새롭게 재평가할 수 있었던 안목과 역량 위에서 이룩된 업적이다. 이 시기에 그가 연구와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북경도서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자료들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韓末 梁啓超著作收容

 

 

중국의 저작물이 한국에 소개된 예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빈번해진다. <萬國公報>, <蘇報>등에서 난 기사들이 조선의 <大朝鮮獨立協會會報>에 자주 실리고 있음도 그 한 예다. 특히 <만국공보>의 편집자였던 존 프라이어(중국명 簿蘭雅)'格致彙編'을 여러 호에 걸쳐 연재하였으며 그의 '人分五類說'을 통해 다아윈의 진화론을 설명하면서 백인이 가장 우수한 인종이라는 인종주의적 견해를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양계초의 저작들이었다. <飮氷室文集>을 비롯하여 <越南亡國史> <伊太利建國三傑傳> 등이 그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음빙실문집>은 양계초가 戊戌政變 前 변법을 주장했던 18967, <時務報>(상해에서 창간)에 관여했을 때부터 정변 후 <淸議報>(1898. 111901. 1)를 거쳐 1902橫濱에서 <新民叢報>(1902.11907.10)를 간행한 기간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양계초는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189911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반동안 체류하였으며, 19014월에는 다시 일본에 돌아왔다. 그가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淸朝가 멸망하고 中華民國이 수립된 1912년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1898년부터 14년간이나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는데, 그가 일본에서 망명하고 있는 동안, "평이하고 유창한 문장으로 당시 부패한 본국 정부를 공격하고 舊思想의 파괴와 아울러 新思想의 선전에 힘썼"으며, 따라서 "과격한 사상이 담긴 그의 글은 많은 독자를 얻었고, 그리하여 몸은 비록 일본에 있었으나 중국 안에서의 명성과 영향"은 물론 한국에서도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 단행본 소개

 

 

 

그의 저술들은 초간 즉시 조선에 전해져 당시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개화자강파의 애국계몽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그가 일본에 망명한 직후에 쓴 [戊戌政變記]만 하더라도 한국에 들어오자 곧 번역 간행되었는데, 玄采 번역에 學部 간행이었다. 학부에서 펴낸 것을 두고, "학생들에게 읽히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생각되나 일반에게도 읽혀졌다"고 지적된 바 있다. 양계초의 [越南亡國史]도 역시 현채에 의해 번역되었고, 伊太利建國三傑傳은 신채호의 역술로 19071025일에 교열자 장지연의 를 달고 출간되었다.

 

 

2) 잡지와 신문에 소개된 글

 

 

한말 개화 지식인들이 큰 영향을 받은 양계초의 글들은 신문 잡지 등에 수많이 번역 혹은 소개되어 있는데, 이를 연도별로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906년도-

 

*1906. 1. <서우> 1自勵 (양계초의 글)

 

*1906. 8.289.5 <황성신문> 논설: 讀越南亡國史 (양계초 저서 '월남망국사' 번역소개)

 

*1906. 9.9 <대한매일신보> 논설; 讀越南亡國史有感 양계초의 월남망국사를 읽고 월남에 대한 프랑스의 침탈을 일본세력의 한국 침투에 비교 공감하여 위기의식을 표현

 

*1906. 9.30. <대한매일신보> 논설: 擧滅國新法論하야告全韓人士 지금 전세계는 優盛劣敗, 弱肉强食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이 되지않으면 곧 멸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강국인 나라의 경우 신법이 있어 이를 통하여 모든 사회 문화를 새롭게 하므로 강국이 되었으니 우리도 법을 새로이하여 강국이 되자는 요지.

 

*1906. 9.25 <대한자강회월보> 3敎育政策私議 (양계초 글, 장지연 번역) 사람은 연령에 따라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인 성취정도가 다르므로 학교교육에 있어서 그연령 수준에 맞는 제도가 있어야함을 주장하면서 유아기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의 교육제도를 제시함.

 

*1906. 10. <대한자강회월보> 4敎育政策私議 續 (양계초글, 장지연 번역) 영국과 프랑스 및 중국의 소학교 교육제도를 소개하며 소학교가 국가 차원이나 지방차원의 세금으로 전국에 세워져 기본교육제가 되어야하며 이러한 바탕위에 고등학교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1906. 12.18.12.28. <황성신문> 논설: 讀意大利建國三傑傳 '이태리건국삼걸전' 번역소개

 

*1906. <朝陽報> 9호 갈蘇士匈加利愛國傳] 번역

 

 

 

-1907년도-

 

*1907. 1 <서우> 2호 문원: 支那人任公 (양계초의 글) 국가가 자립의 권리가 있고 백성이 자립의 의사가 있어야 국가가 존립할수 있으나 오늘날 중국이 자립이 위태롭게된 것은 통치자들의 책임이외에도 백성들의 악습과 나쁜 사고에서도 연유한다.

 

*1907. 1 <서우> 2學校總論 (양계초 글, 박은식 번역) 예전에 몽고 거란 등이 중국에 강자 노릇을 했듯이 지금은 서양무리들이 강자로 등장 하였다. 지금 승패의 근원은 知力이니 自强을 위해서는 民智第一로삼아라하며 연령별 학교제도에 대해 언급.

 

*1907. 1 <서우>2雜俎: 애국론 1, 支那衰時客稿 (박은식 번역) 서양인 중 중국인이 애국심이 없어 국가가 위태로와졌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중국이 애국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래동안 다른 나라와 경쟁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애국심을 인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것 뿐이라며 중국인들에게 애국심을 알아야 국가가 강해지고 그것이 곧 개인이 강해지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애국심을 아는 것은 연합과 교육으로 그 기점을 삼아햐한다.

 

*1907. 1 <서우> 2雜俎 애국론 2; 국민보호가 즉 국가보호라 사람이 자기동생은 사랑하지만 남의 동생은 그렇지 못한 것과 같이 타인의 나라면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내나라가 나라를 통치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절료생겨 강제로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애국의 마음으로 단결하여야 한다.

 

*1907. 1, 2<대한자강회월보> 7. 8論報館有益於國事 (양계초 저) 轉載 언론기관은 각분야 상세정보를 원활히 제공함으로서 국익에 도움이 된다.

 

*1907. 2 <서우> 3學校總論(前號續) (양계초 글, 박은식 번역) 중국은 ....의 백성을 갖고 있으나 서양인 처럼 농공상병에 있어 각각을 연구하는 전문가를 두어 개발전력하지 않으므로 서양에 뒤질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농공상병의 각 분야별 전문교육인을 양성해야한다.

 

*1907. 2. <서우> 3動物談 支那衰時客稿 세계 여러 나라의 풍물 및 문명생활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함

 

*1907. 3 <서우> 4論學會 (양계초 글, 이갑 번역)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한 것은 여럿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룰 위한 모임은 의회고 상업을 위한 모임은 공사고 사의 모임은 학회이나 이중 학회가 가장 근본이되는 모임이다 학회가 성해야지 인재가 성하게 되고 국세가 일어날것이니 학외진훙에 노력하자.

 

*1907. 3 <서우> 4學校總論 (前號續) (양계초 글, 박은식 번역) 중국의 사서육경 및 과거는 교육이 미진하게된 근원으로, 서양학교의 제도 및 교육내용을 중국에 맞게 채택하여 개혁하여야 한다.

 

*1907. 3 <서우> 4惟心論 (양계초 저) 모든 경계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

 

*1907. 4.54.16 <황성신문> 논설: 斯巴達小志

 

*1907. 4.25 <대한자강회월보> 10. 理財說 (양계초 글, 김성희역) 부강한 국가의 형세는 그 국민이 農工商을 막론하고 자기의 한 바를 근면히 진력해 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1907. 4 <서우> 5學校總論 (양계초 글, 박은식 역) 교육제도 건의 , 과거제 폐습을 개혁, 사범학교를 설립하고 전문업을 구분하여 교육하자는 등.

 

*1907. 5.15.4 <황성신문> 논설: 滅國新法論 제국주의에 패배한 멸국의 사례룰 들며 신벙으로 개혁하자고 주장.

 

*1907. 5 <대한자강회월보> 11理財說 (양계초 글, 김성희 역) 실업계학교건립.

 

*1907. 6 <대한자강회월보> 12理財說 (양계초 글, 김성희 역) 산업마다 흥쇠에 주기가 있는 고로 그것을 잘 계측하여 부를 축적하자.

 

*1907. 5.6.7.8.9<서우> 6.7.8.9.10論幼學 (양계초 글, 박은식 역) 유학의 폐단을 논함.

 

*1907. 9. 6 <대한매일신보> 논설: 蜜啞子經歷 밀아자劉元杓의 수원방문을 쓰며 음빙실문집이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명약이라고 소개.

 

*1907. 12.201908.11.18 <공립신문> 譯膽: 중국혼(양계초 저)이라는 책을 번역소개.

 

 

 

-19081909년도-

 

*1908. 4 <호남학보> 梁氏學說: 敎育次序第一 (李沂 ) 양계초의 연령별 교육시기구분론 소개.

 

*1908. 4 <호남학보> 정치학설(양계초의 입법국가론, 이기 역) 양계초의 입법국가론 소개.

 

*1908. 4. <대한협회회보> 斯賓塞論日本憲法語

 

*1908. 4 <대한협회회보> 動物談 (양계초 저)

 

*1908. 5 <대한협회회보> 氷集節略: 變法通議序 (홍필주 역)

 

*1908. 6 <대한협회회보> 氷集節略: 학교총론 (홍필주 역)

 

*1908. 71909.3 <호남학보> 2-9호 정치학설; 입법권론

 

*1909. 1, 3 <호남학보> 8, 9政治學學理瓸言

 

*1908. 7 <서북학회월보> 세계최소민주국

 

*1908. 7.8.9<대한협회회보> 氷集節略: 학교총론 (홍필주 역)

 

*1908. 11 <대한협회회보> 氷集節略: 논학회 (홍필주 역)

 

*1909. 1 <기호흥학회월보> 정치학설: 藿布士學說

 

*1909. 1.2<대한협회회보> 論幼學 (홍필주 역)

 

*1909. 2.3<기호흥학회월보> 정치학설: 藿布士學說

 

*1909. 3 <대한협회회보> 國民十大元氣 (홍필주 글)

 

*1909. 3.4<서북학회월보> 論毅力

 

*1909. 4 <기호흥학회월보> 정치학설: 藿布士學說

 

*1909. 4 <嶠南敎育會雜誌> 支那梁啓超新民說 (이종만 역)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양계초의 저작물들이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되는 과정은 1906년경 황성신문에서 양계초의 <월남망국사> <이태리건국삼걸전>이 연재된 이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월남망국사를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였다. 그의 단행본 소개 외에 1906년에서 1907년 사이에 주로 소개된 그의 사상들은 주로 교육개혁에 관련된 것이 많이 발견된다. 공자사상에 의거한 구교육제도를 비판하고, 실업교육진흥책을 강조하며, 서양학제를 도입한 새로운 교육제도를 건의하는 한편 학회설립 종용 등등의 글들이 그런 것이다. 1907년 애국심고취의 필요성을 강조한 글이 소개된 이후 1908-09년에 이르러는 그의 정치사상, 신민사상이 주목을 받으며 언론에서 소개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앞에서 든 19061909년까지 양계초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된 경우는 대략 다음과 같다. , 신문으로는 황성신문(4), 대한매일신보(3), 공립신문(1년간 연재) 등이며, 협회 기관지로는 서우(11), 대한자강회월보(6), 대한협회회보(8), 호남학회(4), 서북학회월보(2), 기호흥학회(3) 등으로, 개인의 저작물이 여러 언론기관에 의해 이렇듯 자주 소개된 예는 보기드문 현상이었다. 양계초는 이렇게 한말 언론에 종사하는 지식인 사회에 파고들어 여론을 주도하고 민중을 깨우치는 데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렇게 양계초의 사상은 한말 우리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양계초사상에서 영향을 받고 쓰여진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저작활동도 상당 수에 이르렀다. 이들 저작을 각 사상의 분야별로 묶어 보면, 사회진화론적 대외인식, 교육개혁론과 관련하여 '교육이 국가자강의 기초'라는 사상은 장도빈의 <교육의 성쇠는 국가승패의 원인>(서북, 169)을 비롯하여 여러 편이 있고, 실업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상과 교사양성 논의, 또 실업진흥론과 관련된 것으로는 옥동규의 <실업의 필요>(서우, 829)를 비롯하여 박은식(<人民生活上 自立으로 國家自立>, 서우, 834), 김원극(<實業奬勵爲今日急務>, 서북, 125), 김영재(<과학의 급무>, 태극, 20810), 竹圃生(<農方要論>, 서북, 11145), 김진초(<我農界前途>, 태극, 113436) 耕世生(<농업의 개량>, 서북, 141415) 등의 주장이 있다. 특히 신민사상에서도 박은식의 <구습개량론>(서우, 27)을 비롯하여, 이규영(<本會前途興替關係에대하여 心注意할것을 互相警告>, 서우, 323), 박성흠(<국민의 성질과 책임>, 서우, 3152-154), 박재원(<습관개량론>, 태극, 101014), 백남산인(<국민하과 성질학>, 서북, 76), 선우(<국가론의 개요>, 서북, 1111418) 및 김익룡(<今日 吾人國家에 대한 義務 及權利>, 서북, 112732) 등이 있다.

 

 

3)飮氷室自由書의 간행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양계초의 <음빙실 문집>을 부분적으로 번역해 내는 작업이 한말에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음빙실문집,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양계초가 변법을 주장했던 18967<時務報>에 관여했을 때부터 무술정변 후 <淸議報>(1898.11-1901.1)<新民叢報>(1902.1-1907.10)를 간행한 기간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이 점에 관해 이광린 교수는 "양계초의 글 중에서 널리 읽혀지고, 또 진정으로 영향을 주었던 책은飮氷室文集이었다."고 하면서, 이것은 19032上海廣智書局에서 18책으로 간행되었고, 내용은 18967월 상해에서 창간한 [時務報]에 관여할 때부터 1902년 요코하마에서 [신민총보]를 창간할 때까지 7년간 쓴 글을 모은 것이다. 이 문집은 간행된 즉시 서울에 들어왔고, 全恒基가 번역하고 邊瑩中이 교열하여飮氷室自由書라는 이름으로 19084월 국판 240면으로 搭印社에서 간행하였다.

 

飮氷室自由書飮氷室文集과 항께 양계초의 근대사상을 우리 나라에 소개하는 데에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내용 중 <英雄與時勢>는 영웅이 시대를 만드는가,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의 중요한 물음을 던져주면서, "영웅이 진실로 능히 시세를 하고 시세가 또 능히 영웅을 하나니 영웅과 시세의 二者形影相隨함과 하여 暫離치 못할지라"고하여 영웅과 시세의 인과됨을 말하면서도 "영웅의 능사는 시세를 함으로써 起點을 삼고 시세를 함으로써 究竟을 삼는다"고 주장하였다. 영웅에 관한 글은 <善變之豪傑> <豪傑之公腦><無名之英雄<舌下無英雄筆底無奇士> <文明與英雄之比例> 등의 글에서도 소개되고 있다. 이런 글들은,飮氷室自由書의 출간 이전에飮氷室文集을 통해 이런 내용들응 이해하고 있었을 박은식이나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사학자들이, 한말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주장하였던 英雄待望論의 근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草茅危言> 에서는 <民權篇><共治篇>, <君權篇>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孟子"君爲輕 民爲重"을 논지의 핵심으로 삼아 '從衆君德'이요, "비록 전제독재의 라도 그 초에 衆心치 못하면 大位치 못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말에 민권론에 기초한 입헌군주제 내지는 민주공화정에 대한 기대는飮氷室自由書의 출간 이전에 漢文識者層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보급되어 있었는데,飮氷室自由書의 출간은 그런 사상을 민중에까지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國權與民權>에서는 백성과 나라가 自由權放棄함으로 民敵虎狼國이 침략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飮氷室自由書에는, 그 전에 들어볼 수 없었던 서구의 위인 사상가들이 소개되고 있다. 이미이태리건국삼걸전에서 이태리 건국에 공훈을 세웠던 세 위인이 소개된 바 있지만, 飮氷室自由書에서는 독일 통일의 주역을 맡았던 프러시아의 비스마르크(搋士麥)와 영국의 정치가 그래드스톤(格蘭斯頓)을 소개하면서, 비스마르크는 독일을 다스림에 "시종을 전혀 一主義하니 그 주의는 등 열방을 통일함"이었고, 그래드스톤은 이와는 달리 一主義一政策으르 고수하지 아니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 따라 屢變하였는데 이는 '일신의 공명'을 위함이나 '일시의 詭遇'를 행함이 아니라 '至誠에서 ' 것으로 평가하면서 "格蘭斯頓과 같은 자라야 眞維新이라 可謂할 것이오 또한 眞守舊可謂할지라"고 하여, 두 사람의 유럽 정치인을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위인 윌슨(訥耳遜)'의 일사가 소개되고 카부르(加布兒)諸葛孔明과 대비하고 있다.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큐(孟德斯鳩, 蒙的斯鳩)의 학설을 소개하면서 그가 <萬法精理書>를 써서 君主 民主 君民共主의 세 종류의 政體의 득실을 말했다고 소개하였다. 이 밖에도 루소(盧梭)를 두고 民約論을 저술, 국가가 민간의 계약을 늘려주고 이룩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 마약 몽테스큐와 루소가 없었다면 "法國(프랑스)이 능히 혁명의 치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종교개혁자 路得(Luther)과 신대륙에 건너간 哥倫布(Columbus), 미국의 초대대통령 워싱턴(Whashington), 地動說을 주장한 哥白尼(Copernicus) 등도 소개되고 있다.

 

이 번역본이 이미 국권이 기울어지고 있을 때에 간행(1908)되어 한자권에서 소외되어 있는 민중층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쓰러져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한 민중운동에 직접적으로 공헌하였다고는 단정할 수 없지만, 당시 민중들의 의식세계를 상당히 넓혔을 것만은 틀림없다. 일제하에 들어서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할 때에 초기에는 復抗運動的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그 뒤 3.1운동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민주공화국 건설의 이념 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데에는 한말에 수용된 민주 민권의 사상적 전파자라 할 이같은 서적들의 번역 간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4. 韓末 言論愛國啓蒙思想形成

 

 

한말 양계초 저술의 보급은, 개화기 이래 중국을 통해 세계에 눈을 떠 있던 한국 사회에, 각 방면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더구나 종래에는 개화와 애국계몽운동의 모델을 취사할 때에 정치적 사상적 입장에 따라 한국의 지식인들 간에는 다소 편향된 잣대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 앞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초기의 급진개화파가 일본에 선을 대고 있었다면, 후기의 온건개화파 혹은 자강파, 애국계몽파들은 중국을 선호하고 있었다. 강유위나 양계초의 사상은 그래서 더욱 한국의 지식인 및 애국계몽가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장지연이나 박은식, 신채호의 이 무렵의 저술들이 양계초의飮氷室文集을 때로는 거의 복사하고 있는 듯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다 1898년 이래 양계초는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가 일본의 지식인 사회의 동향을 어느 정도 소화하게 되는 게기를 마련한 것이라 생각된다. 양계초는 또 미주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또한 서양의 소식을 일본을 통해서 더 많이 듣고 있던 한국 지식인에게 일본인 아닌 아시아인을 통해 서구의 소식을 듣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지식인들은, 우리와 어느 정도의 성향을 같이하고 있던 '중국인' 양계초를 통해, 일본과 서구의 동향까지 파악할 수 있게 되어 그에게 더욱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글과 사상적인 영향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던 한국은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용어로 포괄되는 국권회복운동에 나세게 되었다. 그 몇가지를 언급하겠다.

 

 

 

1) 社會進化論收容自强思想

 

 

양계초는 1896嚴復<天演論>을 통해 스펜서, 헉슬리 등의 학설인, 優勝劣敗 生存競爭과 같은 자연계의 현상이 인간사회에도 적용된다는 사회진화론적 입장을 갖게된다. 이러한 논리는 <음빙실문집>을 통해 당시 한국의 애국계몽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20세기 각 언론의 주요 논거로 등장함을 볼 수 있다.

 

 

 

"今日競爭時代優勝劣敗하면 弱肉强食하나니".

 

"20세기의 세계는 强者弱者연하며 優者劣者擇食하나니".

 

"人之在世間必爭自存이니 爭自存이면 有優劣이오 有優劣이면 有勝敗劣而敗者난 그 權利必爲優而勝者呑幷이니".

 

"우리민족의 지식과 세력이 하고 하여 민족간의 경쟁에서 敗者의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겨 민중은 이제 일제의 노예가 되고 종족이 소멸의 지경에 이르렀다".

 

 

 

찰스 다아윈의 진화론을 계승한 헉슬리와 H.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양계초의 변법자강론과 新民說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飮氷室文集'은 간행되자마자 조선에 소개되어 한말 지식인 사회에 수용되었는데, 張志淵自强主義와 거기에 일정하게 영향을 받은 신채호는 1908自强論的 史論'讀史新論'을 펴내 丹齋史學의 골간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국 한말의 민족주의적이고 애국계몽적인 言論史學은 다아윈 스펜서進化論, 天演論과 두 원리인 物競, 天擇公理에 기초해 있었다.

 

사회진화론의 논리에서는 자연세계와 마찬가지로 열국도 제국주의적인 경쟁에서 우승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절박한 상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救亡의 당면목표는 바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결국 스스로를 강하게 하려는 '자강사상'밖에 도리가 없었다. 물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급진적인 혁명이냐, 점진적인 개화냐 하는 방법론상의 차이가 있었다. 한말 한국 내에서는 혁명론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고 해외의 동포들에 의해 제창되었지만, 그것은 실행하기에는 국내의 정치환경이 너무나 수구적이었다. 따라서 그 방법은 점진적인 개화 개혁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 방법으로 신교육론과 신민설이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2) 신교육론과 실력양성론

 

 

 

양계초는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劣者에서 優者가 되는 첩경을 교육에 입각한 실력양성이라고 보았다. 즉 그의 변법적자강론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動因은 바로 民智이며, 역사발전을 위해서는 民智開發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또 역사적 진보룰 위해서는 의 상태에서 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의 상태에서 민지가 높아지고 강해진다고 보아, 생존경쟁적 상황에 대응하여 멸망하지 않기 위해 인위적으로 사회의 결합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합체 중에 가장 공고하고 효과적인 것이 학회의 결성임을 들었다.

 

한말 교육의 진흥을 위한 논설이 제기되고 학회가 결성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19059國民敎育會가 조직된 것을 선두로 190610월에는 朴殷植 등이 西友學會를 발기하고, 같은 날 李儁 李東輝 등은 漢北興學會가 창립하였는데, 19081월 이 두 학회는 西北學會로 통합하였다. 이어서 19077월에는 湖南학회와 湖西학회, 19081월에는 畿湖興學會, 3월에는 關東학회, 또 이 무렵에 嶠南학회도 설립되었다. 이와는 달리 지방을 초월한 범국민적인 학회도 세워졌으니, 兪吉濬 등이 중심이 된 興士團秦學新 등에 의한 女子敎育會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도 太極학회, 共修학회, 同寅학회 등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여러 학회들은 학교의 설립 경영과 학보 간행을 통해 국민의 교육열과 지식열을 북돋아주었다. 한말 3,000이상의 사립학교가 설립된 것은 바로 이같은 학회 활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교육의 내용에도 변화가 왔다. 종래의 공자(주자학)사상 중심의 과거지향적인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사상위주의 교육대신 서양처럼 농...병의 실업교육의 진흥을 강조하며 이러한 분야에서도 각 분야룰 발전시킬 전문가들이 나와야 함을 지적하였다. 그는 사람에게는 연령에 따라 신체적 정서적 지적 발달단계가 다르므로 연령별로 적합한 수준의 교육제도룰 마련해야 한다며 나름대로 학제룰 제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신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교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교사양성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교사란 상당한 지식과 도덕과 품행과 이상을 구비한 사람이라야 하는데 지금의 교사들은 교수방법에서 구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거나 내용면에서도 구태의연하고 국민정신을 실추케하는 외양만의 풍조에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필요로 하는 신교육을 담당할 사람이 없음을 통탄하였다. 그 밖에도 국민교육을 위한 소학교의 설립문제등에 관하여서도 적극적으로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한말 교육구국론을 부르짖고 애국계몽교육을 실천한 지식인 중에는 朴殷植을 손꼽을 수 있다. 그는 <學規新論>을 써서 당시 근대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의 주장에는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주장한 것도 있지만, 양계초의 영향을 받은 것도 일정하게 발견할 수 있다.

 

 

 

3) '新國民'思想新民會

 

 

 

양계초는 서구근대를 구성하는 핵심이 국가임을 알았다. 그런데 중국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근대적인 의미의 '국민'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종래의 중국 백성은 部民이었을 망정 '國民'은 아니었다. 양계초는, 국민이란 권리를 주장하고 자유를 享受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런 국민을 '新民'이라 하였다.

 

양계초의 <신민설>은 처음에 <신민총보>에 오래도록 연재하였다가 그의飮氷室文集상권에 수록하였다. 그가 신민을 강조한 것은 국제사회에 살아 남을 수 있는 근대국민국가 신문명국가 근대민족국가는 정치적으로 의식있고 활동적인 국민의 실체를 전제로 함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민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신민설에서 요구되는 신민의 자격요건은, 국가의식을 갖는 국민, 권리 의무의식을 갖는 국민, 진보사상을 갖고 모험심을 발휘할 수 있는 국민, 단합하는 국민, 공리 공익을 위할수 있고 근면, 노동하는 국민 등을 그 요건으로 들고 있다. 이 중 무엇보다 新民의 요건으로 국가의식 국민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는 국가사상에 대해 다음 네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一身에 대해 국가 있음을 알고, 둘째, 조정에 대해 국가 있음을 알고, 세째, 外族에 대해 국가 있음을 알고, 넷째, 세계에 대해 국가 있음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국가의 일성원이 되었을 때 그 존립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로 본다면 그가 지향한 근대국가란 중화세계의 국가에서 탈피하는 것으로 국민국가룰 이룩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는 公德論에서 新民公德개념을 국가적 이익이라는 목표에 두었다. 그가 국민에게 요구하고 있는 자유나 자치나 권리나 진취 모험 등도 종국에는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에서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었다. 국가의 발전과 국력 강화를 강조한 나머지 거기에 연결되지 않는 공덕은 신민에게서 배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종래 중국의 도덕이 주로 개인적인 관계에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면에서는 결함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근대적인 국가관념, 민권사상, 자유 진보사상, 자치 독립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하는 한편 인민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사상도 서양의 공중도덕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다.

 

신민사상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嶠南敎育會雜誌> 1(1909.4) '支那 梁啓超 新民說'에서였지만, 이미 그 전에 <신민총보>飮氷室文集이 수입되고 있었음으로 한자식자층에서는 그보다 훨씬 먼저 소개받고 있었다. 그것은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新民會가 비밀결사로 조직된 것이 1907년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그렇다. 이것은 신민사상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하여 국민에게 널리 소개되기 전에 신민사상에 의한 운동세력이 신민회라는 이름으로 형성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민사상이 우리나라 언론을 통하여 널리 소개되는 것은 아마도 19102월 대한매일신보에 <20世紀 新國民>이라는 이름의 논설을 통해서다. 이 논설은 단재 신채호가 쓴 것으로, 그는 양계초의 新民說을 읽은 데다가 1907新民會가 조직될 때에 가입한 적이 있어 거기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논설에서 주장하는 신()민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인 요건은 평등 자유 정의 毅勇 公共으로 규정하고, ()민이 해야 할 국방 경제 정치 교육 종교 등의 일은 병역의무제와 국민경제, 의무교육제, 국민종교 및 입헌국가의 건설구상 등으로 요약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주장들은 양계초의 신민설과 대동소이하지만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민설이 양계초의 영향을 일정하게 받으면서도 한말 우리의 고민이 가미되어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4) 民族主義史觀의 형성

 

 

한말 사학자로 활약한 朴殷植申采浩의 중요한 역사 서술은 1910년 일제의 강점 후 해외망명 생활에서 발표되었지만, 그들의 사관은 皇城新聞이나 大韓每日申報에서 논설을 쓸 때에 정립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조용히 서재에 앉아 많은 사료를 뒤지면서 역사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실천과 연결된 속에서 연구하였다. 신채호의 경우만 하더라도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면서 한편으로 동 신문에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 <東國巨傑崔都統傳> <讀史新論> 등을 발표하였고, 이를 단행본으로 묶어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을 펴냈다.

 

민족주의사학자들은 역시 당시의 일반 지식인들과 같이 양계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래서 신문에 논설을 뜰 때 [飮氷室文集]을 참고서처럼 사용하였고, 또 양계초의 저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앞에서 본 것처럼, 신채호의 <伊太利建國三傑傳>을 비롯하여 장지연이나 박은식도 양계초의 저술을 번역, 소개하였다. 신채호가 앞에서 거론한 을지문덕과 최영, 이순신 등의 우리나라의 세 영웅의 전기를 쓴 것은 이태리건국삼걸전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특히 신채호 등이 한말 자강사상에 입각하여 英雄史觀을 표출하고 英雄待望論을 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박은식도 초기에는 일정하게 영웅대망론에 입각하여 역사연구를 진행하여 우리나라 영웅들의 전기를 썼던 것이다.

 

한편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역사와 현실을 구명코자 한 양계초의 新史學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양계초는 그가 쓴 영웅론에 나타나는 역사관과 사회진화론에 우승 열패의 사상을 통하여 한말 민족주의사학 형성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 된다. 사회진화론은 자강사상을 불가피하게 유도했던 만큼, 당시의 역사연구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져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앞장 섰던 이가 신채호로서 그는 애국심과 국가관념 나아가서는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무렵에 쓴 그의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는 그의 민족주의적인 역사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은 위암 장지연선생 기념사업회 주관의 연구발표회에서 발표하고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다 - 1996.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