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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基源 前 KBS 사장의 특별기고 -「역사청산이란 굿판을 보고 - 2004년 10월

이강기 2015. 10. 27. 22:59
徐基源 前 KBS 사장의 특별기고 -「역사청산이란 굿판을 보고」
 
인간의 삶을 모욕한 盧武鉉의 말
 
盧武鉉 대통령은「군사독재 시절에, 판·검사가 되겠다고 고시공부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삶을 모욕하는 말이라고 느꼈다. 나를 포함하여, 「군사독재 시대」를 열심히 살아온 대다수 한국인들에 대한 모욕이요, 中傷이었기 때문이다.

徐 基 源
1930년 서울 출생. 서울大 상대 중퇴. 朝鮮日報·서울신문 기자, 대통령 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문예진흥원장, 한국신문협회장, KBS 사장 등 역임. 저서 「혁명」, 「김옥균」, 「왕조의 제단」 등.
徐基源 소설가·前 KBS 사장
2004년 10월
비난만 있고 自省이 없는 역사
 한국인에게 내재하는 역사의식 속엔 피해자 의식과 이에 따른 원망과 恨이 짙게 깔려 있다. 이를 보상하거나 상쇄하려는 심리에서인지는 몰라도 자기 자신이 간직해 온 삶의 방식과 문화적 유산에 대해 과장된 가치부여에 열심이다.
 
  문제는 가해자를 비난·성토하는 데 그치고, 피해자가 된 자신의 위치와 實相에 관해서는 자기 성찰이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으므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실천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해자를 탓하고 원망하는 행태를 반복한다.
 
  우리는 역사가 매우 重層的(중층적)이고 單線的(단선적)이 아니라는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역사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구체적인 總體(총체)라는 인식이 모자란다.
 
  좋은 예가 韓日관계, 특히 韓日 과거사에 대한 한국인의 반응이다.
 
  日帝의 강점, 가혹한 탄압과 수탈, 가해자로서 반성이 없는 日本의 非도덕성에 대한 비판과 규탄이 줄기차게 계속되어 거의 습성화·도식화돼 있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자신의 無能과 못남으로 귀착시키는 自虐的(자학적) 심리가 표출되기도 한다. 심지어 민족성에 원인이 있다는 넋두리가 나오기도 한다.
 
  두 가지 자세 모두 균형 잡힌 人間觀(인간관)에 입각한 올바른 역사의식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삶과 역사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큰 잘못이다.
 
  人間性을 제쳐놓고 역사가 자신의 법칙에 의해 獨走(독주)한다고 생각하는 역사관 중의 하나가 마르크스·레닌의 唯物史觀(유물사관)이다.
 
 
  국가 분열을 막은 鄧小平의 역사 인식
 
  마르크스의 역사발전론은 20세기 末에 완전히 파기됐다.
 
  자본주의의 自己修正(자기수정) 내지 變革(변혁)으로 공산주의의 유물론적 발전 논리가 와해되고, 공산사회 내부의 모순이 확대되어 그들이 꿈꾸던 理想사회는커녕 궁핍과 인권말살이 日常化된 人間상실의 사회로 전락하면서 마침내 공산주의 자체가 무너져 내렸다.
 
  아직 迷夢(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소련이 망한 것은 공산주의가 官僚化(관료화)되어 變質(변질)되었기 때문이므로, 이를 고쳐 나가면 된다」는 식의 궁색한 논의에 매달리는 부류가 있다. 딱한 일이다.
 
  毛澤東(모택동)이 文化革命을 일으킨 바탕은 權力 쟁취였다. 내세운 名分은 「중국의 공산주의가 관료화되어 변질되었기 때문에, 관료기구를 타파하고, 관료기구에 매달렸던 旣成層(기성층·走資派)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毛澤東의 카리스마에 의해 더욱 증폭된 大衆運動은 중국 전체를 狂的인 혼돈 속으로 몰아넣어 近代國家로서의 중국의 발전을 후퇴시켰다.
 
  文化革命이 진정된 다음, 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중국 지도부의 毛澤東에 대한 역사적 평가야말로, 單線的 歷史觀에 사로잡혀 있는 한국인들에게 他山之石(타산지석)이 되고 있다.
 
  文化革命에 희생된 중국인의 피해의식과 원한은 피해 당사자인 鄧小平의 大局的인 역사의식으로 크게 완화됐고, 국가의 분열을 막았다.
 
  그는 과거를 탓하기보다, 未來를 생각하자고 했다. 北京 天安門(천안문)에는 지금도 毛澤東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鄧小平은 중국 국민에게 「역사를 총체적이고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비판하고 반성할 것은 하되, 역사의 全面否定이나 顚覆(전복)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過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자는 것이다.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성격인 중국인들은 이러한 이치를 지지하여 공동체의 합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지금의 중국이라 할 수 있다.
 
  貧富의 격차, 지역 간의 불균형, 실업의 증가 등 사회모순과 갈등 요인은 한국의 類(유)가 아닐 정도로 심각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은 鄧小平이 내건 實用路線(실용노선)을 인내심을 가지고 동조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국가 지도자의 역사관과 역사 소화능력이 국민통합의 관건이자, 국가발전의 기회임을 痛感(통감)하게 된다.
 
 
  自國의 역사를 긍정하는 일본
 
  우리는 自國의 역사에서 배우고, 이웃나라 역사에서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한국인의 역사의식 속에 요지부동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식민지 피해의식과 自虐史觀(자학사관)이다. 정당한 자기 비판을 日帝의 식민지史觀이라고 매도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上古史를 포함한 역사 연구를 저해하는 경우가 있다.
 
  日本 고유의 文化와 유산을 걸핏하면 모두가 한반도에서 傳授(전수)한 것, 모방한 것으로 치부하고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려는 심리가 있다. 열등감을 뒤집으려는 보상심리에서 나온 경우이다.
 
  어느 나라든 文化국수주의가 있다. 그렇지만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그것은 극단적이고 非理性的이다.
 
  일본인들의 역사관은 자기반성이 없다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사를 共時的(공시적)인 삶을 계승한 자산으로 내부의 부정적 가치도 감싸려고 한다.
 
  여기에는 대중적인 공감을 얻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 등 작가들과 NHK의 일련의 史劇(사극), 일본의 지식인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그 알맹이를 이루고 있다. 학교교육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일례로 明治維新(명치유신)의 元勳(원훈)이었지만, 士族들에게 추대되어 반란을 일으켰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지금 일본인들의 존경 대상이다. 일본의 역사가들은 幕府(막부)체제를 타도하고, 明治維新을 이룩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自國의 역사를 긍정한다는 것과 부정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리고 계승과 斷切(단절)의 의미를 생각케 한다.
 
  역사 속에는 자기 先祖의 삶이 담겨 있고, 우리는 그 資産(자산)과 負債(부채) 그리고 혜택과 損失(손실)을 동시에 상속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 감각」이고, 역사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관념론에 의지하는 역사 인식은 인간의 삶과 실체가 빠진 허구임을 이해하는 것이 곧 「역사 감각」이다.
 
 
  朴正熙 시대는 암울하지 않았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관념론적 역사관에 사로잡혀 왔고, 지금도 거기에서 제대로 脫皮(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근래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있었던 이른바 疑問死(의문사)나, 光復 후 左右翼 투쟁, 6·25 전쟁 당시 있었던 사건들, 親日派 문제, 더 나아가 東學 농민전쟁까지 소급해서 진상을 규명하자는 목소리가 있다.
 
  역사가들과 연구자들이, 속속들이 파헤친 東學 농민전쟁을 놓고 거듭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려내자는 얘기인지, 도무지 발상이 허황하다. 그런 식이라면 요새 돌아다니는 농담처럼, 李成桂(이성계)의 쿠데타까지 소급해서 진상 규명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신라의 三國통일은 외세(唐)와 결탁한 잘못된 역사이고, 고구려-고려-조선-日帝시대 金日成의 抗日투쟁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정통성이 있다는 양,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가짜 학자들이 있다. 金正日 집단은 이런 황당한 역사관으로 남한 사람들까지 세뇌하고 있다.
 
  가짜 檀君陵(단군릉)과 고구려 東明聖王陵(동명성왕릉)을 요란하게 꾸며, 인민들에게 숭배하게 강요하고 있다.
 
  抗日 무장투쟁사만 해도 그렇다. 金日成의 활동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는데, 한국內에 그에 동조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맹랑한 노릇이다.
 
  걸핏하면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라는 표현을 즐겨 쓰면서, 光復 후 半세기의 建國史와 국가 형성기를 모두 부정하려는 세력이 있다. 언론은 거의 습관적으로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라는 표현을 쓴다.
 
  朴正熙 시대가 암울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일반 대중이 더 잘 알고 있다.
 
  그 시대는 농촌의 노동력을 흡수하여 전반적으로 고용이 증가하고, 소득이 높아져 생활수준이 향상됐음을 대다수 국민은 실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朴正熙 시대의 산업화와 국가발전은 개발도상국을 위한 성장 모델로, 현대사상 성공의 神話를 창조했으며 이는 세계가 공인하고, 중국 지도자들을 위한 교과서가 되고 있다.
 
  새마을 운동에 동참한 농민들은 암울한 시대를 보내지 않았고, 全세계로 누비며 땀을 흘린 비즈니스맨들은 결코 암울한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물론 봉제공장에서 부당하게 혹사당한 직공들도 있었다.
 
 
  盧武鉉의 발언은 인간에 대한 모욕
 
  한국의 역사를 말할 때는, 북한의 金日成·金正日 체제가 조작한 역사를 염두에 두고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단 이후, 남북의 발전과정은 어쩔 수 없이 상호제약적이고 상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比較優劣(비교우열)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체제경쟁」이란 말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지만, 단적으로 상호 국가 지도자 및 엘리트 집단 간의 비교우열로 귀착된다.
 
  북한은 「잘못 선택된(물론 舊소련에 의해 강요된 것이지만) 체제」와 「잘못된 집권자」의 결합으로 인한 「大실패」였고, 한국은 그 정반대였다.
 
  盧武鉉 대통령은 「군사독재 시절에, 판·검사가 되겠다고 고시공부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삶을 모욕하는 말이라고 느꼈다. 나를 포함하여, 「군사독재 시대」를 열심히 살아온 대다수 한국인들에 대한 모욕이요, 中傷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군사독재 시대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평가절하할 생각은 없고, 민주화 투쟁에 헌신한 사람들을 역사에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희생과 공로를 내세워, 지난 半세기의 대한민국 역사를 모두 매도·부정하려는 것은 역사의식의 결여이며, 이는 人間 不在의 관념론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의 親日행위 규명 문제 역시 人間不在, 삶의 공백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국내외에서 日帝에 항거하여, 자신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을 찬양하고 존경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日帝에 순응하거나 추종한 진실을 외면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허물 캐는 것을 능사로 삼는 것은 非인간적이고, 反역사적이다.
 
  현재를 사는 모든 한국인의 조상이 日帝식민지下에서 삶을 영위했다. 少數의 독립투사들은 해외에 망명했지만, 대다수는 그런 행동이 불가능한 속에서 나름의 고민과 고통을 받고 살았다. 국내에서 몰래 독립운동을 도운 사람도 적지 않았다.
 
  「북한의 金日成은 親日派를 말끔히 숙청했고, 그러기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다」는 따위의 단순논리에 현혹된 사람들이 있고, 또 많은 젊은 세대가 여기에 혹하고 있다. 金日成은 권력 장악을 위한 수단으로 親日派를 숙청했다. 政敵을 親日派나 美帝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알다시피 진짜 공산주의자는 朴憲永(박헌영)이었다. 그와 비교하면 金日成은 변변한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는 스탈린의 走狗(주구)로서 권력 쟁취를 위해 親日派, 親蘇派, 親中派 등 모든 反對세력을 싹쓸이 한 독재자일 뿐이다.
 
  그 歸結(귀결)이 唯一思想(유일사상)이요, 개인 神格化(신격화)였음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의 권력을 세습한 金正日은 아예 出生 연도와 장소부터 날조하고 있다.
 
 
  盧武鉉과 열린당은 金正日 편인가, 북한 주민 편인가
 
  그러한 역사 날조의 결과는 어떠한가?
 
  북한의 참혹한 實相에 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집단이 궁지에서 탈출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民族共助(민족공조)」라는 부적이다. 지금 金正日은 이 부적의 효험을 톡톡히 보고 있다. 감상적인 民族至上主義(민족지상주의)에 마취된 사람들이 한국內에 불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대중, 특히 젊은 세대의 민족지상주의보다 더 고약한 것은 金大中 정권에서 現 정권에 걸친 권력자들의 민족타령이 권력 장악과 강화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6·15 공동선언 이후, 민족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상호협력이 증진되는 가운데, 전쟁위협이 사라졌으니, 감지덕지하라는 투의 言說이 橫行(횡행)해 왔다. 이런 노선을 이어받은 盧武鉉 정권 역시 金正日과의 회담을 갖게 되면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앞당겨지는 양 迷夢(미몽)을 선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북한동포들이 겪고 있는 人權유린 실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그 생지옥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한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동포들을 무시하거나 냉대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동포애이며, 민족의 和合이란 말인가.
 
  미국 下院을 통과한 북한人權 관련 법안을 저지하려는 열린당 의원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폭정에 고통받는 북한 동포들 편인지, 폭군 金正日의 편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인권법안」이 남북화해를 저해하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하니, 人權유린을 눈감아 주는 화해야말로 反民族的인 것이다. 국가보안법에는 人權침해의 조항이 있으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法理논쟁 이전에 굳이 그렇게 하려는 底意(저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민족지상주의의 反작용이 「反美」이고, 그 슬로건이 「自主」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이런 傾向性(경향성)이 反美·親中 노선으로 表出되고 있는 중에, 盧武鉉 정권은 中國의 고구려史 왜곡으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쩔쩔매고 있다.
 
  더욱 꼴불견인 것은 金正日 정권의 태도이다. 고구려를 신주 모시듯 하면서, 말 한마디 못 하고, 南北학자들의 공동연구마저 미적거리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對中事大主義이며, 스스로 중국의 屬邦(속방)이 되기를 甘受(감수)하는 작태이다.
 
 
  명분의 선비 對 실용의 武士
 
  세계 정세의 동향을 直視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갈팡질팡하다가 亡國을 自招(자초)하다시피 한 조선왕조(형식상은 대한제국이었지만)의 歷史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당시 對應의 잘못에서 南北韓 모두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亡國을 自招했다」는 말을 했는데, 앞서 歷史의 重層性을 지적한 바, 반드시 亡國이 自身의 과오와 책임만에 들씌우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自招했다는 것은 「그럴 틈새(弱點)와 빌미를 제공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朝鮮의 망국은 현실인식의 잘못, 이는 전적으로 관념론과 名分주의의 포로가 된 思考停止(사고정지)와 感情에 사로잡힌 데서 비롯됐다. 이 대목에 있어서는 근래 한국 내의 名分주의와 배타적 감정에서 나온 여러 정치적·경제적 사상들과 유사하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재빨리 變身하여 西歐의 科學文明을 받아들여 近代化를 시작했기에 앞서서 성공했고, 한국은 이른바 西勢東漸(서세동점)의 물결을 거부하고, 이 潮流(조류)를 타지 못해서 日本에 뒤졌다고 한다.
 
  이 갭이 20~30년 정도라고 한다. 日本은 西歐列强의 문호개방 압력으로 國論이 분열하고 이른바 「尊皇派(존황파)」와 幕府派(막부파)」로 兩分되어 內戰을 겪었다. 그러나 막부체제가 와해되고 명치 新정부가 구성되자, 國家의 進路를 개방으로 정하고, 富國强兵의 국민국가 건설의 길로 나섰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서구 과학문명의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우고 모방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이다. 名分과 實質 중에서 實質을 택했다. 이러한 思考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
 
  日本人들은 그 이전부터 名分이나 觀念論보다 實質과 구체적 思考에 익숙해 있었다. 이는 힘을 존중하는 武의 정신과 상통하는 것으로, 조선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도덕적 열성 또는 야만으로 비쳤다.
 
  중국 문화를 존중하여, 小中華사상에 사로잡힌 왕조의 爲政者(위정자)와 지식인들은 「힘의 劣勢(열세)」를 「도덕적 優位(우위)」로 대치하여 심리적 균형을 얻으려고 했다. 필경은 도덕적 優位마저 僞善과 虛構임이 노정된 것이었다. 더구나 도덕적 자만심이라는 것도 자기기만에 불과함을 스스로 폭로했다.
 
  왕조는 亡國으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두차례의 전쟁을 겪었다. 丙寅(병인)과 辛未(신미)의 두 洋擾이(양요)다.
 
  집권자인 대원군은 이미 淸國이 아편전쟁등에서 패하여 국토의 상당부분을 뺏긴 현실에서 배우지 못하고, 소꿉장난 같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衛正斥邪(위정척사)를 부르짖으며, 內部의 반대와 비판을 壓殺(압살)했다.
 
  당시엔 민족自主·민족正氣 같은 말은 몰랐지만, 中華文化에 反하는 것은 모두 오랑캐이며, 오랑캐는 事必歸正(사필귀정)으로 망하게 될 것이므로, 斥邪(척사)로 正義를 바로잡으면 된다는 허망한 心算이었다.
 
  大院君(대원군)이 처음부터 과학과 기계의 힘을 전혀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平安감사 朴珪壽(박규수)가 대동강에서 불사른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號의 동력기관을 모방하여, 증기선을 만들어 한강에 띄우기도 했으나, 우스갯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일본은 지체 없이 젊은 人材를 유럽 각국의 조선소, 조병창 등에 파견하여 기술을 배워오는 한편, 영국의 조선소에 군함을 포함한 선박을 주문 제조하고, 항해술과 砲術(포술)을 익혔다.
 
 
  어리석은 자들을 기다리는 건 운명의 장난
 
  우리는 서양의 文物(문물)을 들여오거나, 배우는 것은 오랑캐나 다름없는 행위이며, 正氣와 大義에 어긋난다고 置之度外(치지도외)하거나 배척했다. 日本을 통해 간접이나마 서구문물을 배우려고 했던 이른바 開化派(개화파)는 권력투쟁에서 一敗塗地(일패도지)하기 이전에 여론형성층인 유생·선비들의 비난과 공격에 이미 패배했다.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벌인 소수 동지들 간의 쿠데타는 淸軍의 개입으로 三日天下에 끝나 비극적 종말을 고했다.
 
  물론 왕조 패망의 원인 역시 매우 複合的(복합적)이어서 너무 단순화시키기엔 難點이 있으나, 한마디로 하면 당시 정치지도층과 지식인들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허깨비 名分을 붙들고 사물에 盲目이었던 까닭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大院君은 천주교 신자를 통해 프랑스인 선교사와 접촉하려고 했으나, 반대파들의 비난을 받게 되자, 권력을 뺏기는 것이 겁나, 一轉하여 극단적인 洋夷(양이)배척으로 나갔다.
 
  지금 미국과의 협력을 강조하면, 민족공조에 反하느니 자주의식이 없다느니 하며 비난을 받는 것과 닮은 데가 많다.
 
  그처럼 위정척사를 부르짖고, 문화적으로 열등하다고 멸시하던 「倭(왜)」에게 나라를 뺏긴 것은 어리석은 者에게 내린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와서 「親日의 眞相을 규명해야 한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民族正氣를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발전한다」는 주장인데, 이는 觀念論(관념론)의 極致(극치)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가 유행어처럼 돼 있다. 우리 역사가 언제 누워 있었나? 하는 농담도 있지만 역사는 누워 있지도, 서 있지도 않고 거기 存在(존재)할 뿐이다.
 
  그 실체는 우리 조상의 모습이며 동시에 지금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신의 실패와 과오는 냉철하게 반성·비판하고 다시 이 같은 前轍(전철)을 밟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옳은 방향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 歷史에서 교훈을 얻고, 살리는 길이다.
 
 
  「역사청산」이란 굿판을 걷어야
 
  이와 동시에 역사의 총체는 다른 것과 바꾸거나 변하게 할 수 없는 지금의 우리에게 주어진 遺産(유산)이며,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나는 우리 역사, 특히 王朝史를 말할 때, 「批判的 受容(비판적 수용)」이란 개념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反省과 批判, 그리고 包容과 愛情이 담겨 있다.
 
  『우리 것이 제일이여!』하는 우물 안 개구리 식의 文化국수주의나 수천년의 평화애호 민족이란, 그다지 자랑거리가 못 되는 自己愛를 벗고 한 단계 뛰어넘어야 한다.
 
  잘 된 나라, 잘 되고 있는 나라 치고, 이른바 과거청산에 열중한 나라는 없다. 곧잘 나치 占領下의 프랑스의 경우를 예로 드는데, 3년과 36년의 시간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우리가 조상의 허물을 캐고, 후손을 욕되게 하는 것이 어찌 他人의 일일 수 있는가.
 
  나는 親共·左派의 과거도 같은 차원에서 청산해야 한다는 맞대거리가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크게 보면 親日도 일제강점의 희생물인 것과 같이 6·25 전쟁 전후한 附逆(부역)은 分斷(분단)과 전쟁의 희생물이다.
 
  역사에 대한 自虐행위는 중단해야 한다. 역사 청산이라는 굿판은 걷어야 한다.
 
  인류문명이 수천 년간 시행착오 끝에 도달한 공통된 價値(가치)-인간의 존엄성, 자유로운 인간다운 삶-를 구현하는 국가사회를 어떻게 건설해 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것을 가리켜 국가의 비전·미래상이라고 한다. 정권 담당자가 노심초사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 前提는 피해의식과 自虐史觀을 청산하고 歷史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성숙된 역사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