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시초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이 위독해지자 그의 오른팔이던 베리야는 스탈린을 비웃으며 의기양양해했다. 스탈린 死後(사후) 흐루시초프는 베리야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스탈린의 공식적 후계자 말렌코프를 비롯한 黨 간부와 軍 수뇌부를 설득, 전격적으로 베리야를 숙청했다.
흐루시초프의 스탈린에 대한 비판 연설은 공산주의 체제에 일대 타격을 가한 사건이었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 失脚(실각)했지만, 그가 주도한 스탈린 格下운동은 21년 뒤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시행한 페레스트로이카(改革)의 등장을 예고한 제1차 改革이었다.
고르바초프는 守舊세력에 의한 흐루시초프의 失脚을 보고 改革은 소련 民衆(민중)의 각성을 통해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소련 지식인들이 大衆에게 공산주의의 실상과 문제점을 알리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의도와는 반대로 공산주의 改革이 아닌 공산주의의 終末(종말)로 나아갔던 것이다.
月刊朝鮮은 흐루시초프의 회고록(Khrushchev Remembers: Little, Brown) 중에서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을 때의 상황 ▲스탈린 치하에서 이뤄진 숙청과 학살의 집행자 베리야의 축출 ▲1956년 2월의 20차 공산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규탄한 「비밀연설」의 막후 배경 등을 소개한다(해설 부분도 회고록에서 따왔다).
[제1부·스탈린의 죽음]
<해설: 1953년 3월4일 아침 소련 官營(관영) 「라디오 모스크바」는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全세계에 전했다. 사실 흐루시초프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당시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처에 있는 그의 다차(Dacha·소형 별장)에 있었다. 「라디오 모스크바」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최고회의 간부회의(최고회의 각료회의와 더불어 소련의 국가 최고 지도부)의 담화문을 인용해 『이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 인민들의 화합과 인내를 촉구하며 경계심을 강화』하도록 촉구하고 『러시아 정교의 총주교와 랍비의 수장은 특별 의식을 거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틀 뒤인 3월6일 새벽 4시경 다음과 같은 발표가 나왔다.
『레닌의 동지로서 그의 천재성과 理想(이상)을 전한 기수이며, 공산당과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이자 스승인 인물의 심장 박동이 멈췄다』
스탈린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에 관한 흐루시초프의 언급은 대체로 정확하며, 스베틀라나 알리루예바(스탈린의 딸)가 쓴 「한 친구에게 쓴 20통의 편지」에 의해 입증됐다. 두 사람 모두 스탈린의 오른팔로 불리던 베리야가 스탈린의 臨終(임종) 때 믿어지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흐루시초프는 베리야가 국가보안부(소련 국가보안위원회인 KGB의 前身)를 장악하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워했다. 베리야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일원으로서 내무부와 국가보안부에 대해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실제로 흐루시초프가 우려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스탈린은 1953년 2월 말에 쓰러졌다. 토요일 밤 나(흐루시초프)는 정치국 위원인 말렌코프, 베리야, 불가닌 동지와 함께 크렘린에서 영화를 본 뒤 근처에 있는 스탈린의 다차에 함께 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식사는 다음날 오전 5~6 시까지 이어졌다.
스탈린은 식사 후에 술을 꽤 마신 터라 매우 흥겨워했다. 신체적으로 어떤 이상이 있다는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자리를 나설 시간이 되자, 스탈린은 배웅하기 위해 현관까지 나왔다. 그는 농담을 늘어놓으며 손으로 내 배를 툭툭 치면서, 기분이 좋을 때면 으레 그랬듯 우크라이나 억양으로 나를 「니키타(흐루시초프의 이름)」라고 불렀다.
이 회합은 평범했지만 특별했다. 우리는 저녁 모임이 아무 문제 없이 끝났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겼다. 스탈린과의 저녁식사 자리가 항상 유쾌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지만, 나는 스탈린이 어떤 이유로든 우리를 부르리라 믿고 있었다. 일요일 저녁, 나는 식사도 미루면서 그의 전화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가 기다리기를 단념하고 배를 채웠다. 스탈린의 호출을 받지 않고 하루가 지나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한밤중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말렌코프였다.
『잘 들으시오. 방금 체카(비밀경찰) 요원들이 스탈린의 다차에서 전화를 걸어왔소. 요원들은 스탈린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소. 그리로 가보는 게 좋겠소. 베리야와 불가닌에게는 연락했소』
나는 그와 통화한 지 15분 만에 스탈린의 다차에 도착했다. 우리 네 사람은 스탈린의 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당번장교를 만났다. 그는 뭔가 이상이 있다고 설명했다.
『스탈린 동지는 항상 밤 11시에 사람을 불러 차나 간식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체카 요원들은 하녀 마트리오와 페트로브나에게 스탈린을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두 여성은 스탈린 밑에서 오랫동안 시중을 들어 왔고 스탈린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스탈린이 평소 잠자던 큰 방 바닥에 누워 있다고 체카 요원들에게 보고했다. 우리는 스탈린이 잠을 자다가 침대 아래로 떨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체카 요원들은 우리에게 스탈린을 식당 옆 작은 방에 있는 소파에 뉘었다고 보고했다.


우리는 스탈린이 그런 민망한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덮어두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우리가 온 것을 스탈린이 아는 것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말렌코프에게서 전화가 또 왔다.
『요원들이 스탈린 동지의 다차에서 전화를 걸어왔소. 스탈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다는 것이오. 마트리오나 페트로브나는 스탈린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말했지만, 평상시의 그런 잠이 아니라는 것이오.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소』
말렌코프는 전날 모이지 않았던 정치국의 다른 위원들, 즉 보로실로프와 카가노비치에게 연락하고 의사도 불렀다. 우리는 스탈린의 다차에 도착해 당번장교 처소에서 회의를 가진 뒤, 스탈린이 잠든 방으로 갔다. 의사들에게는 스탈린의 상태를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나는 의사들 중 루콤스키 교수가 기억에 남는다. 루콤스키 교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더니 스탈린의 손을 잡자마자 뜨거운 쇳덩어리라도 잡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베리야가 퉁명스레 말했다.
『당신은 의사잖소? 어서 그분의 손을 제대로 잡아 보시오』
루콤스키 교수는 스탈린의 오른팔이 움직이지 않으며 왼쪽 다리도 뻣뻣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은 말도 하지 못했다. 의사들은 스탈린의 옷을 벗기고 바람이 잘 통하는, 그가 평소에 잠자던 큰 방 소파로 옮겼다.
의사들은 순번을 정해 스탈린을 지켜보기로 했다. 정치국 위원들도 24시간 불침번을 서기로 하고 두 사람씩 組(조)를 편성했다. 베리야와 말렌코프, 카가노비치와 보로실로프, 그리고 불가닌과 내가 한 組였다.
스탈린은 위험한 상태였다. 의사들은 그가 회복해도 정상적으로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런 질환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오래가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나는 스탈린을 잃게 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스탈린의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우리는 스탈린이 의식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사가 스탈린의 소변 샘플을 받고 있는 동안, 나는 스탈린이 (음부를) 가리려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낮 시간에 한 번 스탈린이 의식을 찾았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얼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호하던 사람들은 달콤한 차를 수저로 떠 먹였다. 스탈린은 왼손을 들어 벽에 있는 뭔가를 가리키며 미소를 지었다.
벽에는 잡지 「오고니오크」에서 오려낸 사진이 한 장 걸려 있었다. 그 사진은 어떤 작가의 그림을 복제한 것으로, 어린 소녀가 뿔을 가지고 새끼 양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이었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저 새끼 양과 같은 처지로구나. 당신들은 뿔을 든 소녀처럼 수저를 들고 내게 음식을 먹이고 있다』
스탈린은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했다. 나도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탈린은 악수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쓰러지기 무섭게 베리야는 스탈린에 대한 혐오감을 쏟아내며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베리야는 스탈린의 의식이 약간 돌아와 그가 회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자마자, 그 앞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스탈린의 손을 부여잡은 채 키스를 퍼부었다. 스탈린이 다시 의식을 잃고 눈을 감자, 베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을 뱉었다. 그것이 스탈린을 찬미하고 경배했던 베리야의 참모습이었다.

어느 날 저녁 불가닌과 나는 스탈린의 다차에서 불침번을 섰다. 우리는 낮에도 대부분 자리를 지켰다. 의사들이 스탈린을 돌보는 동안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나는 불가닌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이여서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불가닌), 스탈린은 일어나지 못할 것 같소. 의사들도 그분이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소. 스탈린이 죽고 난 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 아시오? 베리야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생각해 보셨소?』
『무슨 말이오?』
『그는 국가보안부 장관이 되려 할 거요. 베리야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해선 안 되오. 그를 막지 못한다면 우리의 최후가 시작될 거요』
불가닌은 나와 뜻이 같다고 말했고, 우리 두 사람은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의견을 나눴다. 내가 말했다.
『내가 말렌코프에게 말하겠소. 그는 우리가 무슨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는 점을 이해할 거요. 이 문제는 우리 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오. 베리야가 정권을 잡으면 黨은 더 큰 화를 입게 될 거요. 베리야는 우리나라를 1930년대 末의 상황으로 되돌리려 할 뿐 아니라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요』
나는 베리야가 진정한 공산당원인지조차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러시아 혁명 초기에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市 공산당 서기로 재직 중에 영국 방첩국의 비밀요원으로 일했다는 그리샤 카민스키의 말이 떠올랐다. 1939년 2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카민스키는 이 같은 혐의로 베리야를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베리야는 기만과 배신을 통해 스탈린의 신뢰를 얻은 뒤 고위직에 버티고 앉아 있는 셈이었다.
불가닌은 내 말에 수긍했다. 불침번이 끝나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나는 수면제를 한 알 삼키고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몸을 눕히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말렌코프였다.
『빨리 오시오. 스탈린이 위중하오』
나는 스탈린의 다차에 도착한 직후 스탈린의 생명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의 숨이 멈췄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스탈린에게 마사지와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나는 사내의 손이 스탈린의 몸을 두드려 대는 모습을 참고 보기가 괴로웠다.
『이보시오! 대체 어쩔 셈이오? 당신이 이분을 다시 살릴 수는 없는 일이오. 이분은 이미 죽었단 말이오』
사람들은 스탈린을 소생시키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스탈린이 죽은 것이다. 베리야는 자신의 차에 올라타고 가버렸다.
[제2부·베리야 숙청]
<해설: 흐루시초프는 자신들이 스탈린의 臨終을 지킬 때부터 베리야의 陰謀(음모)가 시작됐다고 확신했다. 흐루시초프와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리루예바는 스탈린이 죽던 순간, 베리야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베리야는 국가보안부를 장악해 최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베리야를 제치고 스탈린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떠오른 총리(최고회의 각료회의 의장) 겸 공산당 제1서기 말렌코프도 마찬가지였다. 베리야와 말렌코프는 일시적으로 연합한 상태였지만, 각자 다른 협력자를 구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바가 없었다.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와 베리야 간의 연합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스탈린 死後 열흘 동안 말렌코프는 黨의 제1서기職(직)을 흐루시초프에게 넘겨 주라는 압박을 계속 받았다. 흐루시초프는 6개월 뒤 그 자리를 인수했다.
흐루시초프가 베리야 축출 계획에서 정신적 리더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대부분 진실이지만, 다른 사람들도 베리야에게 권력이 집중될 경우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고회의 간부회의 멤버들은 물론, 軍 수뇌부도 같은 생각을 했다. 軍은 말렌코프에 대해서도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스탈린의 첩자로 활동했다는 점을 혐오했다.
다음부터 나오는 흐루시초프의 베리야 축출 계획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할 점도 있다. 축출에 가담한 軍사령관들은 여기에 언급된 것보다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베리야는 1953년 6월22일에 체포됐다>


스탈린의 죽음은 비극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 두려웠다. 나는 스탈린에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이가 많았고, 오랫동안 죽음이 그를 좇고 있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죽음 자체보다 스탈린이 남기고 간 최고회의 간부회의 조직과 베리야가 차지하려 하는 자리(국가보안부 장관)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이 모든 것이 불길한 사태를 예고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죽자마자 베리야는 다시 태어났다. 베리야는 스탈린의 시신이 관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잔칫상을 벌이고 있었다. 베리야는 자신이 오래도록 추구하던 목표에 도달한 것으로 확신했고, 세상에는 그를 몰아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지금 가진 권력으로도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스탈린이 죽던 날 베리야가 우리를 남겨 둔 채 자신의 차를 타고 가버리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에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말렌코프가 스탈린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핵심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이렇게 말하곤 했다.
『말렌코프는 좋은 사원 같은 사람이야. 이 사람은 해결책을 잘도 만들어 내지. 책임을 나누기에도 적당한 사람이지만, 독자적인 생각이나 창조적인 능력은 전혀 없어(해설자 注-1952년 10월 스탈린은 그에게 19차 공산당 대회에 관한 총괄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흐루시초프의 말과 달리 스탈린이 말렌코프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말렌코프는 베리야가 자신을 홀대해도 그와 협력하는 편이 이롭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옳았다. 스탈린이 죽은 지금, 말렌코프는 베리야가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는 데 「쓸모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의 다차(별장)에서 그의 주검 곁에 서 있던 당시, 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베리야가 나간 뒤 우리는 정치국과 최고회의 간부회의 멤버들을 소집하자고 결정했다. 그들을 기다리면서 말렌코프는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말렌코프에게 말을 걸자 그는 냉랭하게 물었다.
『무슨 얘기요?』
『스탈린이 죽었으니 상의할 일이 많지 않소?』
『사람들이 다 모이면 얘기합시다. 그래서 회의를 하자는 것 아닙니까』
민주적인 말처럼 들리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다르게 해석했다. 말렌코프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베리야와 의견을 교환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모든 것이 결정되리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다차에 모인 사람들은 스탈린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스베틀라나는 울기 시작했고, 나도 스탈린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는 스탈린 때문에 운 것만은 아니었다. 黨과 국가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黨과 국가에 대한 終末이 시작될 터였다.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기회주의자, 배신자, 도살자에다 암살자일 뿐이었다.


회의가 소집되자, 베리야는 각료회의 의장(수상 또는 총리) 자리를 말렌코프가 맡을 것을 제안했다. 말렌코프는 베리야를 자신의 제1副首相(부수상)으로 임명했고, 국가보안부와 내무부를 내무부로 통합하면서 베리야를 장관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내무부 장관은 베리야에게 위험한 자리였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해설자 注-흐루시초프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두려워하던 바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불가닌이 그 부당성을 주장할까 봐 우려했으나 그도 침묵을 지켰다. 만일 우리 두 사람이 베리야와 말렌코프의 제의에 반대했다면, 우리는 스탈린의 주검이 채 식기도 전에 黨에 평지풍파를 일으킨다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사태는 내가 우려하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두 사람은 베리야와 함께 제1副首相으로 임명됐다. 보로실로프는 쉬베니크를 제치고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으로 임명됐다.
베리야는 쉬베니크가 국가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모든 조치가 베리야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보로실로프를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에 앉힘으로써 숙청을 단행할 때 힘을 얻으려 한 것이다.
베리야는 내게도 중앙위원회 서기장 직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스크바 공산당위원회의 서기 자리를 내놓을 것을 제안했다. 각종 임명과 제안 절차가 마무리된 뒤에야 장례식 절차와 국민들에게 스탈린의 죽음을 알릴 방법을 결정했다.
스탈린의 장례식을 前後(전후)해 베리야는 말렌코프를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베리야와 말렌코프는 크렘린을 기반으로 한 자신들의 세력에 나를 동참시키려 했다. 최고회의 소집 때는 말렌코프와 내가 議題(의제)를 상정하기로 결정됐다.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베리야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확고해졌다. 그의 우호적인 행동은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른바 「베리야의 교활함」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내 경계심을 늦추는 동안 누구보다 먼저 나를 처치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베리야는 자신의 권력 강화에 비례하여 오만해졌다. 이 때문에 베리야와 말렌코프 간에, 또 베리야와 최고회의 간부회의의 나머지 인원들 간에 첫 충돌이 일어났다. 어느 날 회의에서 베리야가 이런 제안을 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체포된 수감자와 추방자 중 상당수의 刑期(형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刑을 마치고 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나는 이들에 대해 「내무부의 특별 승인 없이는 누구도 고향으로 갈 수 없으며, 내무부가 명하는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자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수감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내무부 장관인 베리야 자신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반대 발언을 했다.
『난 당신의 獨斷(독단)에 단호히 반대하오. 더 이상 법을 핑계 삼아 이런 불법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소. 당신은 刑을 마친 사람들이 다시 범죄자 취급을 받으면서 자신이 살 곳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도록 하자고 주장하지만, 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소』
다른 이들도 내 의견을 지지하자 베리야는 자신의 제안을 철회했다. 말렌코프가 議事錄(의사록)을 적고 있었으므로, 이 내용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후에 베리야는 자신의 아량을 보이는 듯한 제안을 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체포되어 최고 20년 刑 이상을 받은 사람들의 형량을 10년으로 줄이자고 한 것이다. 나는 베리야의 의중을 헤아리고 발언을 요청했다.
『나는 이 제안도 반대합니다. 단순히 형량을 줄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감자들에 대한 체포 및 조사 과정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법적 투명성이 없는 상황에선 당신이 누군가에게 10년을 복역시킨 뒤에도 마음대로 刑期를 늘릴 수 있소. 우리에게 필요한 사항은 스탈린 통치 기간 만연했던 불법 체포와 형량 선고에 대한 관행을 改正(개정)하는 것이오. 범죄자 처벌 관련 기록에는 당신의 정책이 얼마나 독단적으로 적용됐는지, 그 때문에 黨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나와 있소』
베리야는 그 제안도 철회했다. 나는 두 번이나 그에 대한 반대의견을 낸 것이다. 나는 베리야가 내 심중을 알고 있고, 나의 제거를 위해 모종의 행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베리야는 자신에 대한 방해자를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다.


베리야의 다음 조치는 무엇이 될 것인가? 언젠가 나와 베리야, 말렌코프 세 사람이 모처에서 함께 거닐고 있었다. 베리야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밝혔다.
『우리는 神의 가호 속에 살고 있지만 젊음을 되찾을 수는 없소. 우리가 죽으면 우리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소? 나는 정부가 국가 지도자들을 위해 건립할 다차를 간부들의 개인 용도로 쓰도록 하자고 제안합니다』
나는 베리야에게서 이런 非공산주의적인 발상이 나오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일종의 유인책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리야는 내가 반대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했다.
『다차는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것보다는 흑해 연안의 수쿠미 중심지에 있는 것으로 합시다』
베리야는 수쿠미가 아름다운 도시이며, 그곳엔 복숭아와 포도가 자란다는 등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간부 私用(사용) 다차 건립을 위한 인원 배치와 재료 조달 방안을 말했다.
『내무부 장관인 내가 이 계획을 감독할 것이오. 우선 이고르(말렌코프), 당신 다차부터 지을 거요. 다음으로는 니키타(흐루시초프) 당신 것과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그리고 다른 사람들 것도』
그가 말하는 동안 나는 그와 논의하는 것처럼 『그렇소. 생각 좀 해봅시다』라고 말했다.
우리 세 사람은 교외에 있는 자신들의 다차로 갔다. 우리는 루블레프 거리의 갈림길에 이를 때까지 베리야의 차를 탔다. 말렌코프와 나는 왼쪽 길로 가야 하기 때문에 다른 승용차로 갈아탔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나는 말렌코프에게 말을 걸었다.
『베리야의 발언은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사탕발림이오』
『어째서요?』
『수쿠미의 다차 건립은 베리야의 미끼요. 하지만 잠시 지켜 봅시다. 원하는 대로 놔두면, 베리야는 자신이 무엇을 꾀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요』
베리야는 자신의 생각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수쿠미에 다차를 세우기 위한 계획案(안)을 만들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저명한 건축가가 다차 설계를 맡았다. 어느 날 회의 도중에 베리야는 『말렌코프의 다차가 흑해 연안에 지어질 예정』이라며 『말렌코프 동지는 그 창가에서 흑해를 볼 수 있으며, 인접한 터키도 감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리야가 말렌코프에게 농담을 던졌다.
『이고르, 얼마나 아름다운 집이 될지 알겠소?』
회의가 끝난 뒤 나는 말렌코프에게 말했다.
『당신의 다차를 수쿠미 중심부에 세우겠다는 베리야의 계획은 너무도 잔인하오. 그 계획을 이행하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거주지를 빼앗아야 되오. 주민들은 代를 걸쳐 살아오던 자신의 소유지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단 말이오. 베리야가 사탕발림을 내놓은 의도를 모르겠소? 베리야는 수쿠미에 지어질 다차를 당신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데 이용할 거요. 당신의 다차와 정원은 담으로 둘러쳐질 테고 도시는 분노와 敵意(적의)로 들끓을 것이오. 주민들은 이렇게 묻겠지.
「대체 누굴 위해 이걸 지은 거냐?」
모든 공사가 끝났을 때, 주민들은 각료회의 의장인 당신이 도착해 그 저택 안으로 유유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될 거요. 그때 수쿠미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당신에 대한 증오심이 퍼질 거요. 이것이 베리야가 바라는 상황이오. 그는 당신이 사임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당신을 그런 醜聞(추문)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요. 그 증거로 베리야는 자신의 다차 건립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 진행시키지 않고 있소』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겠소? 베리야는 모든 걸 나와 상의하고 있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말렌코프의 생각도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베리야가 내게 다차에 대한 계획을 보여 주면서 그 탁한 그루지야 공화국 억양으로 말했다.
『아름다운 집들이 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훌륭한 생각이오』
『이 계획안을 집으로 가져가는 게 어떻겠소?』
나는 계획안들을 집으로 가지고 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니나 페트로브나(흐루시초프의 부인)가 다가오더니 이것이 뭐냐고 물었다. 내가 사실을 말해 주자 니나는 노발대발했다.
『정말 비열한 생각이군요!』
나는 할 말이 없어 이렇게 말했다.
『일단 한쪽으로 치워 놓고 나중에 얘기합시다』
베리야는 수쿠미의 다차 건립에 박차를 가했지만 그가 체포될 때까지 아무 성과도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다차에 대한 계획안을 집에 보관했다.
사태는 급변하고 있었다. 그는 非러시아 공화국을 지도하고 있는 러시아人들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베리야가 모스크바의 핵심 지도자들과 공화국의 지역 지도자 간의 긴장은 물론, 러시아와 非러시아 간의 민족적 긴장을 심화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는 말렌코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렌코프 동지, 사태가 어디로 갈지 모른단 말이오? 우리는 대재앙을 향해 나가고 있소. 베리야는 칼을 갈고 있단 말이오』
말렌코프가 물었다.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지만,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소?』
『반격할 시기가 왔소. 당신도 베리야가 反공산주의적인 인물임을 알았을 거요. 이를 용납해서는 안 되오』
『나 혼자 그에게 대항하라는 거요? 난 그러고 싶지 않소』
『왜 당신 혼자라고 생각하시오? 당신과 내가 있으니 우리는 벌써 두 사람이오. 우리가 확고한 黨의 입장을 바탕으로 反論(반론)을 펴 나간다면 불가닌이나 다른 이들도 우리에게 동참할 거요. 문제는 당신이 최고회의 간부회의 때 그 누구에게도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데 있소. 베리야가 어떤 제안을 내놓자마자 당신은 「베리야 동지, 동의합니다. 반대하는 사람 있습니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표결에 들어가지요.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의사 표시의 기회를 주시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게 될 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편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소. 당신과 내가 함께 議題를 내고, 베리야가 잘못한 몇 가지 문제를 토론에 포함시킵시다. 그럴 경우 그와 對敵(대적)할 수 있고, 최고회의의 다른 간부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소』


말렌코프는 동의했다. 나는 놀랍고 기뻤다. 우리는 다음 번 최고회의 간부회의에 대비하여 議題를 작성했고, 불가닌을 비롯해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몇 가지 문제를 포함시켰다. 이 회의에서 패배한 사람은 베리야였다. 그때부터 말렌코프는 黨이 베리야의 의도를 좌절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
최고회의 간부회의 멤버들이 자신을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베리야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하려 했다. 나는 상황을 대결로 밀고 나갈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말렌코프에게 최고회의 간부회의의 다른 멤버들도 우리 편으로 끌어와야 한다고 말했다. 마침내 말렌코프가 동의했다.
『그렇소, 행동해야 합니다』
말렌코프와 나는 보로실로프 동지부터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내가 보로실로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고 싶다고 하자 그는 중앙위원회로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당신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나는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말렌코프의 집에 들러 결과를 말해 주기로 했다. 나와 말렌코프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나는 보로실로프 동지의 사무실로 갔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의 사무실 안으로 채 들어가기도 전에 보로실로프는 나를 보며 베리야를 찬양했다.
『라브렌티 파블로비치(베리야)는 얼마나 비범한 인물이오, 흐루시초프 동지! 그는 정말 비범하오!』
나는 대답했다.
『아닐 거요. 당신은 그를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소』
나는 베리야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보로실로프는 평소에 자신이 염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베리야의 귀(도청장치)」에 들어가라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나를 베리야 편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한 말일 수도 있었다.
내가 마음속의 말을 한다면, 보로실로프의 입장이 어색해질 터였다. 그는 자존심 때문에 내 말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는 우리 두 사람이 소속되어 있는 어떤 위원회에 관해 몇 마디 나누고 자리를 떴다. 나는 말렌코프에게 큰 성과가 없었다고 말했다.

다음 목표는 외무부 장관 몰로토프였다. 그는 외무부 人事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를 두고 나를 만나자고 했다. 나는 몰로토프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人事 문제이긴 한데, 외무부 人事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몰로토프에게 베리야가 어떤 인물이며, 그가 黨지도부에 대해 품고 있는 계획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 黨에 어떤 위험이 닥치게 될지 설명했다. 나는 베리야가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민족주의 갈등을 격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계획을 추진했는지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몰로토프는 이 문제에 대해 많이 고민한 듯했다. 그는 스탈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을 때도 베리야에 대한 반대 의견을 말하곤 했다. 비록 스탈린 앞에서 그런 적은 없지만 말이다.
몰로토프는 베리야의 僞善(위선)과 도발 행위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베리야 앞에서 베리야를 비판하는 것을 몇 차례 들을 수 있었다. 몰로토프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말렌코프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난 말렌코프와 불가닌을 대표해 당신과 얘기하고 있는 거요. 우리는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소』
『나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선 베리야를 최고회의 각료회의 제1副수상과 내무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해야 합니다』
몰로토프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베리야는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더 강력한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를 붙들어 조사하자는 말입니까?』
베리야의 범죄상에 대한 고발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체포」 대신 「붙든다」고 표현했다. 1939년에 카민스키에게 베리야의 간첩 혐의에 관한 내용을 들었지만 입증된 적은 없었다. 直觀(직관)으로 사람을 체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몰로토프와 나는 베리야에 대한 의견이 같았다. 나는 말렌코프와 불가닌 동지에게 그 내용을 전했다.
혹 「베리야의 귀」가 우리 얘기를 듣거나 누군가 비밀을 누설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의 논의가 베리야에게 발각된다면, 그는 우리를 모두 체포하고 말 것이었다. 우리는 일을 서두르기로 했다.
최고회의 간부회의 멤버 중 한 사람인 사부로프에게는 내가 얘기하기로 했다. 사부로프는 내 말을 듣고 『전적으로 찬성』이라고 답한 뒤 물었다.
『말렌코프는요?』
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질문을 했다.
역시 간부회의 멤버인 카가노비치는 모스크바를 떠나 시베리아 벌목 사업소를 시찰하고 있었다. 그가 돌아온 뒤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시베리아와 제재공장에 대한 얘기를 시시콜콜 늘어놓았다. 나는 참견하지 않고 그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좋은 말씀입니다, 카가노비치 동지. 이번엔 내가 모스크바의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베리야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말했다. 카가노비치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 「우리」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카가노비치는 어느 쪽으로 힘이 실려 있는지 가늠하고 있었다. 나는 말렌코프·불가닌·몰로토프·사부로프 그리고 내가 마음을 합쳤으며, 카가노비치가 없어도 과반수가 됐다고 말해 주었다. 카가노비치는 우리 의견에 동감했지만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보로실로프는 어떻죠?』
나는 보로실로프가 어떻게 베리야를 찬양하던가를 말했다. 카가노비치가 놀라며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말했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사무실로 들어서던 순간부터 베리야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소』
카가노비치는 보로실로프를 욕했다.
『간사하고 못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는 당신을 속인 겁니다. 보로실로프는 언젠가 내게 더 이상 베리야를 봐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베리야가 위험인물이며,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했어요』
『보로실로프가 솔직하게 말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그가 한 말이 있으니…』
『그 사람 말은 신경 쓸 것 없습니다』
『그와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나보다 말렌코프가 나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를 쑥스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카가노비치는 최고회의 간부회의의 다른 멤버인 미코얀의 참가 여부를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미코얀에게는 말하지 못했습니다』
미코얀은 베리야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는 미코얀에게 말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말렌코프에게 카가노비치와 나눈 얘기를 전해 주었다. 말렌코프는 자신이 보로실로프에게 접근하는 편이 낫다는 데 동의했다. 남은 사람은 페르부킨이었다. 말렌코프가 말했다.
『페르부킨에게는 내가 말하겠소』
『얼마든지 좋습니다만, 페르부킨은 까다로운 인물이니 주의해야 합니다』
『나도 그를 알고 있소』
말렌코프는 페르부킨에게 만나러 와달라고 청했다. 그를 만난 뒤 말렌코프가 내게 말했다.
『페르부킨을 불러 모든 얘기를 했지만, 그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소. 「생각해 보겠다」는 것은 위험한 대답이오. 당신이 그에게 말해 보는 것이 좋겠소』
나는 페르부킨 동지와 만나 그에게 모든 것을 말했다. 페르부킨이 대답했다.
『말렌코프가 당신처럼 말해 주었다면, 난 거리낌이 없었을 겁니다. 나도 여러분과 동감입니다』
우리는 보로실로프와 미코얀을 제외한 최고회의 간부회의 전원의 동의를 얻었다. 우리는 남은 두 사람에게도 얘기하기로 뜻을 모았다. 말렌코프가 보로실로프의 설득을 맡았다. 그 뒤 나는 말렌코프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떻게 됐소? 보로실로프는 여전히 베리야를 찬양하는 소리나 하고 있소?』
『보로실로프는 우리 계획을 듣자마자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소』
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렌코프 동지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남아 있었다. 우리가 베리야의 직책을 박탈한다 해도, 누가 그를 가둘 것인가? 최고회의 간부회의 경호대와 체카 요원들이 베리야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베리야는 부하들에게 우리를 체포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
우리는 軍의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베리야를 억류하는 임무는 방공부대 지휘관인 모스칼렌코 동지와 다섯 장군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말렌코프는 거사 직전에 주코프 元帥(원수) 등을 합세시켰다. 총인원은 11명이었다.
크렘린으로 들어갈 때 군인들은 무기 휴대 여부를 검사받아야 했다. 불가닌 동지는 주코프 元帥 등이 무기 지참을 허가받을 수 있도록 힘쓰기로 했다. 우리는 군인들에게 회의 동안 다른 방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말렌코프가 신호를 보내는 즉시 회의실로 들어와 베리야를 감금하라고 했다.

1953년 6월22일 우리는 최고회의 각료회의를 소집하고 중앙위원회 위원들도 모두 참석시켰다. 말렌코프가 회의를 시작했다. 보로실로프 동지는 각료회의에 통상적으로 참석한 것은 아니지만,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꼭 참석해야만 했다. 말렌코프는 회의를 시작하자마자 말했다.
『黨의 쟁점을 논의합시다. 처리할 문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사전에 계획한 대로, 나는 말렌코프 의장에게 발언을 요청하고 베리야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베리야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다가 내 손을 잡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니키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명심하고 들으시오. 곧 알게 될 거요』
나는 1939년 2월의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베리야를 영국 스파이 혐의로 고발한 그리샤 카민스키 동지를 떠올렸다. 당시 회의가 끝난 뒤 카민스키는 물속에 빠진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나는 왜 黨이 카민스키의 고발을 조사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탈린이 죽고 난 뒤 베리야가 보여 준 행적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그리고 발트해 3國의 공산당 조직에 그가 간섭했던 일을 비판했다. 베리야가 소비에트 연합을 약화시키기 위해 어떻게 민족주의적 적대감을 이용했는지 설명했다. 나는 그가 추방자와 수감자들에 관해 내놓은 최근 정책을 지적하면서, 원칙 없는 규정을 합법화하려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베리야의 행적을 볼 때, 나는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黨에 파고든 출세주의자입니다. 진정한 공산당원은 그 같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내 발언이 끝나자, 불가닌이 발언권을 요청하여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다른 이들도 차례로 발언했다. 몰로토프는 베리야에 대해 黨이 취할 입장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미코얀만은 예외였다. 나는 회의가 시작되기 전, 그와 이야기를 나눴는데 미코얀은 베리야를 구제하자는 말을 반복했다. 베리야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일 것이며 대중에 대한 지도력 결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말렌코프는 의장으로서 결단을 내려야 했지만, 마지막 순간 기가 죽었다. 마지막 발언이 끝났음에도 회의는 마무리를 짓지 못했고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말렌코프에게 발언을 신청했다. 사전에 약속된 대로, 나는 최고회의 간부회의가 베리야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제1부수상)職(직)과 내무부 장관職을 비롯한 모든 公職(공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말렌코프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내 제안을 표결에 부치지도 않았다. 그는 비밀 버튼을 눌러 옆방에서 대기 중인 장군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주코프 元帥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모스칼렌코와 다른 장군들이 들어왔다. 말렌코프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주코프 동지에게 말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베리야에 대한 고발 사항을 조사하도록 그를 체포할 것을 요청하는 바요』
주코프가 베리야에게 명했다.
『손을 올리시오!』
모스칼렌코와 다른 장군들은 베리야가 반항할 경우에 대비해 권총 케이스를 열었다. 베리야는 등 뒤 창턱에 놓여 있던 서류가방을 잡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서류가방에서 무기를 꺼내는가 싶어 그의 팔을 잡았다. 나중에 보니 베리야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움직인 것은 단순한 반사 행동이었다.
베리야는 말렌코프의 사무실 옆에 있는 각료회의 건물에 갇힌 채 무장한 보초의 감시를 받았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베리야를 구금하기는 했지만,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그의 수하들이 득실거리는 내무부로 넘길 수는 없었다. 나는 베리야의 부관인 세로프에게 이 일을 맡기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이들은 반대했다.
베리야의 부관은 크루글로프와 세로프였다. 나는 크루글로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세로프를 잘 알고 있었다. 세로프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면, 다른 체카 요원들도 믿을 수 없었다. 세로프는 스탈린의 정책이 낳은 희생자일 뿐이었다.
우리는 방공부대 지휘관인 모스칼렌코 동지에게 베리야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모스칼렌코는 부하를 시켜 자신의 사령부에 있는 벙커로 베리야를 데려가게 했다. 모스칼렌코 동지는 黨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사람이었다.
모든 사태가 끝난 뒤, 말렌코프는 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 경비대장이 하는 말 좀 들어 보시오』

경비대장이 와서 말했다.
『저는 방금 베리야의 체포 소식을 듣고, 그자가 중학교 1학년인 내 의붓딸을 性폭행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1년 전 그 아이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 아내는 병원에 가고 딸아이 혼자 집에 남았죠. 어느 날 저녁 아이는 빵을 사러 베리야가 살고 있는 집 근처의 빵집으로 갔답니다. 그런데 한 사내가 심상치 않은 눈길로 아이를 지켜보았고, 다른 사내가 오더니 아이를 베리야의 집으로 데려갔답니다. 베리야는 아이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습니다. 아이는 뭔가를 마신 뒤 잠이 들었고, 그자가 딸을 범했습니다』
나는 사내에게 말했다.
『그 얘기를 꼭 檢事(검사)에게 하시오』
우리는 베리야에게 性폭행당했다는 100여 명이 넘는 소녀와 부녀자의 명단을 입수했다. 베리야는 피해자들에게 똑같은 수법을 썼다. 그는 저녁을 먹이고 수면제가 섞인 와인을 마시게 했다.
방공부대 사령부의 독방에 감금된 베리야는 펜과 종이를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 중 몇몇은 미심쩍게 생각했지만, 그가 자신의 혐의를 털어놓을 경우에 대비해 원하는 것을 주기로 했다. 베리야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말렌코프 앞으로 쓴 것이었다.
「이고르, 나를 모르는 거요? 우리는 친구 아니오? 왜 흐루시초프를 믿는 거요?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인 건 바로 그요, 안 그렇소?」 등의 내용이었다. 그는 내게도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두세 통 보내왔다.
우리는 담당 檢事가 베리야 사건을 객관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고 믿지 못했기에, 그를 해고하고 루덴코 동지를 임명했다. 심문 결과, 우리는 베리야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공산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다운 존엄성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베리야를 체포한 뒤 국가관리부 장관인 메르쿨로프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는 나무랄 데 없는 교양인이었고 나도 그를 훌륭한 공산당원이라 생각했다. 나는 동지들에게 말했다.
『메르쿨로프가 그루지야에서 베리야와 협력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베리야의 共犯(공범)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베리야를 위해 일했던 모든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동지들의 동의를 얻어 메르쿨로프를 중앙위원회 사무실로 소환한 뒤 우리가 베리야를 감금했다는 것,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당신은 오랫동안 베리야를 위해 일했소, 메르쿨로프 동지. 우리는 당신이 베리야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조사에 협력하리라 생각하고 있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습니다』
『그럼 보고서를 쓰시오』
며칠 뒤 메르쿨로프는 베리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문서는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그 보고서를 檢事 루덴코의 사무실로 보내자, 루덴코는 나를 만나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내게 메르쿨로프를 체포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메르쿨로프는 베리야가 저지른 몇몇 범죄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후에 메르쿨로프는 법정에서 死刑(사형)을 선고받은 뒤 최후 辯論(변론)에서 처음 베리야를 만났던 그 날 그 시간을 저주했다.
[제3부·스탈린 格下 비밀연설]
<해설: 1953년 6월의 베리야 숙청 뒤 소련의 정치 상황을 살펴보려면 1956년 2월에 개최된 제20차 공산당 대회에 주목해야 한다. 베리야가 숙청된 1953년 6월부터 1956년 2월까지는 흐루시초프의 成敗(성패)가 판가름 나는 시기였다.
1953년 9월 흐루시초프는 黨의 제1서기에 취임했다. 스탈린 사망 뒤 제1서기職은 말렌코프가 차지했지만, 총리職을 보유하는 대신 제1서기職을 포기하라는 압력을 받고 열흘도 안 돼 내놓았다. 흐루시초프가 취임하기 전까지 이 직책은 空席(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스탈린 死後에 소련 수뇌부의 虛想(허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렌코프는 1955년 2월에 최고회의 각료회의 의장직을 사임했고, 그 뒤를 불가닌이 이었지만 말렌코프의 보조 역할에 머물렀다. 정치국에서 말렌코프의 위세는 여전히 컸고, 몰로토프와 미코얀 등은 흐루시초프를 집중 감시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가 覇權(패권)을 잡으리라는 징조가 여러 부분에서 나타났다.
흐루시초프는 산업과 농업에 대한 기존 정책을 뒤집었다. 그것은 「處女地(처녀지) 개척 캠페인」(해설자 注-1950년대 중반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에 실시된 운하 건설 및 농지 확장 사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을 실질적인 소련의 지도자로 부상시켰다. 동료 당원들이 그의 정책을 반대해도 밀어붙였다.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處女地 캠페인에 반대했지만 黨에 의해 공개 비판을 당해야 했다.
제20차 공산당 대회가 열릴 무렵에도 흐루시초프의 지위는 높았지만, 그가 최고지도자가 된 것은 그로부터 16개월이 흐른 1957년 6월이었다. 그때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이른바 「反黨(반당)그룹」도 몰락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권력기반은 취약했다. 1964년 10월 그가 失脚할 때는 흐루시초프와 가까운 동지들마저 만장일치로 그에 반대하는 의견을 낼 정도였다>

스탈린의 죽음과 베리야 체포 후에도 스탈린주의 정책은 유효했다. 죄인으로 몰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復權(복권)시키거나 죄수를 풀어 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상황은 1956년 제20차 공산당 대회가 열릴 때까지 변화하지 않았다.
스탈린 死後 3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과거를 끊어 버릴 수 없었다. 스탈린 정권下에서 일어난 체포, 재판, 전제정치, 처형 등에 숨겨진 내막을 알아낼 용기조차 없었다. 우리가 스스로 스탈린의 통제下에 있을 때처럼 행동했다.
1956년에야 우리는 스탈린 체제의 후유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스탈린이 강조한 것들, 즉 우리는 사방의 敵들과 싸워야 하고, 혁명 완수를 위해 스탈린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망상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법률적 견지에서 스탈린 치하에 일어난 숙청과 사형집행이 범죄라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스탈린에 의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히틀러나 무솔리니 체제의 파시즘 국가에서나 가능했던 범죄가 소련에서 저질러졌던 것이다.
베리야의 체포와 조사 과정에서 스탈린 통치 기간 중 많은 사람을 처형했던 비밀조직이 드러났다. 나는 케드로프 장군이 민중의 敵으로 몰려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케드로프는 영국에 맞서 북부지역에 처음으로 방어체계를 구축한 지휘관이었다.
우리는 당시 베리야의 배후에 스탈린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베리야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과거의 사건에 대해 黨과 국민들에게 잘못 설명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천하의 범죄자이자 암살자이며 대량 학살범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그를 덮어 주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1955년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해 티토 대통령과 얘기를 나눴을 때, 나는 우리 입장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스탈린 시절 이뤄진 범죄의 책임자로 베리야를 언급하자, 티토는 우리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우리는 티토의 말에 흥분했고 스탈린을 옹호하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나도 스탈린주의의 죄상을 파헤치고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내 입장이 틀렸음이 명백해졌다.
스탈린이 강력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가 권력을 남용했지만, 사회주의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믿었다. 스탈린이 잔인하다고 해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자격이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탈린 체제에서 체포되거나 투옥된 사람들 중 풀려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궁금해졌다. 그중 몇 명이 공정한 재판을 받았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스탈린이었다. 우리는 그가 권력을 남용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베리야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폭로됐다.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 그들에 대한 심문 방법, 범죄에 관한 증거 등이 불분명했다. 나는 최고회의 간부회의에 이 문제를 상정해 스탈린 정권下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특히 1956년 2월 제20차 공산당 대회 개최 前後에 이 문제를 처리하고 싶었다.
보로실로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는 내 제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미코얀은 나를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방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20차 공산당 대회는 스탈린 死後 열리는 첫 대회이기 때문에 과연 우리가 黨과 조국에 책임을 질 능력이 있는지 검증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포스펠로프를 책임자로 앉혔다. 조사를 마친 뒤 포스펠로프의 위원회가 제출한 증거를 보고 우리 중 몇 사람은 경악했다. 「몇 사람」이란 나를 포함해 불가닌, 페르부킨, 사부로프 등을 말하는 것이다. 몰로토프와 보로실로프는 사태의 진상과 스탈린주의자들의 억압에 대해 알고 있으므로 놀랄 이유가 없었다.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던 미코얀도 놀라지 않았다.
카가노비치는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것 같다. 스탈린이 그를 신용했을 리가 없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의 눈짓만 있어도 자기 아버지의 목까지 바칠 수 있는 아첨꾼이었다. 스탈린이 비밀을 알려 주면서까지 그를 측근으로 만들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말렌코프는 숙청 기간 黨중앙위원회의 위원직을 맡고 있으면서 경제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여러 인사들의 신분 상승을 도왔지만 진짜 목적은 그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가 불법처형을 주도한 것은 아니지만, 스탈린이 말렌코프를 책임자로 보낸 지역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됐다는 사실이 진실을 말해 준다.

제20차 공산당 대회를 하루 앞두고 있었다. 나는 이 대회 개막식에서 공산당의 성과와 향후 목표를 명시한 「총괄 보고서」를 읽고 싶지 않았다. 대회 개최 직전에 열린 최고회의 간부회의에서 나는 누가 보고서를 읽을 것인지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가장 적당한 인물은 몰로토프였지만, 그는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만장일치로 나를 지목했다. 제1서기인 내가 보고자로 나서야 잡음이 없을 것이었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의 지도자로 인정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후보자들은 있었지만 누구도 명확하지는 못했다(해설자 注-이 시기 유력한 후보자는 흐루시초프와 말렌코프였다). 나는 총괄 보고서 草案(초안)을 작성하여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 제출했다. 총괄 보고서는 각 연구소 및 단체들의 의견을 받아 작성한 공동 작품이었다.
黨대회가 열렸다. 내가 보고서를 낭독했고 토론이 시작됐다.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내 보고서도 호의적인 평을 받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대회가 끝나면 우리 정책을 승인하는 결의안은 통과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1934년의 제17차 공산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사람들 중 3분의 2를 포함하여, 숙청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뇌리에 남아 있다. 당시 黨의 실질적인 구성원들은 스탈린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거나 감금됐다. 포스펠로프의 조사 결과도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休會(휴회) 시간에 최고회의 간부회의 멤버들만 모인 방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동지들, 포스펠로프 동지의 조사결과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체포되거나 제거된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대회가 끝나면 우리는 스탈린 아래서 자행됐던 잔악행위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해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통당했던 사람들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혁명에 열성적이었을 뿐 아니라, 레닌주의의 大義(대의)와 사회주의 건설에 혼신을 다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復權시킬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간부들이 나를 공격했다. 그중 보로실로프가 가장 열심이었다.
『당신,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니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소? 그 때문에 우리 黨과 조국의 위신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봤소? 스탈린 치하에서 일어났던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 손가락질받을 사람은 바로 우리란 말이오』
그의 말이 끝나자 카가노비치도 맞장구를 쳤다. 카가노비치는 黨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내게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일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려 했다. 내가 말했다.

『여러분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나는 모든 일을 덮어두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스탈린 치하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고향 친척과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할 겁니다. 결국 온 나라가 그들이 10년 이상 감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들에 대한 혐의는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날조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설득을 계속했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스탈린이 죽은 뒤 처음으로 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공산당 지도부가 행한 일을 중앙위원회 대의원들에게 공개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 死後의 소련을 책임지고 있지만,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도 중앙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있었습니다. 어떻게 모른 체하겠습니까?』
나는 부드럽고 확신에 찬 태도를 유지했다.
『동지들, 나를 지지해 주십시오.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고, 감옥에서 석방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이 겪은 일을 폭로할 경우 대의원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당신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어째서 黨 대회에서 말하지 않은 겁니까?」
우리에게는 포스펠로프가 작성한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黨이 독단적인 권력에 휘둘리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이것을 대회 때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다시 반대의견이 들끓었고, 보로실로프와 카가노비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에게 비난이 쏟아질 거요. 黨은 스탈린 통치 기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소. 그때 벌어진 일을 몰랐다 해도 우리는 지도부였지 않소!』
내가 말했다.
『우리 중 일부는 스탈린 치하의 불법행위를 몰랐지만 몇 명은 알고 있었고, 몇 명은 그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소. 나는 17차 공산당 대회 이후로 중앙위원회의 일원이었으므로 黨의 비난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돼 있소』
몰로토프도 내 의견에 반대했다. 보로실로프는 내 제안이 불필요하며, 우리 손으로 黨의 분노를 불러올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되풀이해서 물었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일을 시킨 거요? 이런 일을 대회에 말해야 한다고 누가 그럽디까?』
나는 대답했다.
『그런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범죄행위를 숨길 수 없소. 최소한 우리 자신에게라도 시인해야 합니다. 대의원들이 고향에 돌아온 수감자들을 통해 진실을 알기 전에 우리가 스스로 문제를 끄집어내는 게 낫습니다』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최고회의 간부회의의 합의 없이 이 사안을 대회장에서 제기할 수도 없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이 문제에 대해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통합된 지도력을 갖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내가 (포스펠로프 위원회의) 보고서를 대회장에서 낭독할 때 자신의 견해가 그 내용과 불일치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이를 밝힐 권리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나는 연설을 통해 스탈린 시대의 체포와 처형에 관한 내 의견을 제시할 준비도 되어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덧붙여 말했다.
『범죄자는 잘못을 고백할 때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스탈린의 잔악행위를 공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다.
『좋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니, 누군가 스탈린의 만행에 대한 연설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모두들 마지못해 내 의견에 동의했다. 불가닌, 페르부킨, 사부로프, 어쩌면 말렌코프도 나를 지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은 것은 누가 연설을 할 것인가였다. 나는 조사결과가 공신력을 얻을 수 있도록 조사위원회의 위원장인 포스펠로프를 추천했지만 다른 이들은 나를 지명했다.
『당신이 연설하지 않는다면, 대의원들은 지도부에 분쟁이 일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그 말에 승복했고, 우리는 특별 非공개회의를 개최했다. 대의원들은 숨을 죽이고 내 연설을 들었다. 대회장은 넓었지만 벌레가 날아다니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였다.
스탈린 치하에서 행해진 잔학행위의 실상을 듣고 난 뒤,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상상해 보라. 이런 비극은 레닌이 자신의 유언장에서 경고했듯이, 스탈린 자신이 미코얀과 내게 고백했듯이(스탈린은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심지어 내 자신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스탈린의 사악한 인간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스탈린의 만행에 대한 20차 공산당 대회에서의 연설 내용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는 폴란드를 비롯한 友邦國(우방국)의 공산주의 정당에 연설문 寫本(사본)을 돌렸는데, 이 기간 중에 폴란드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서기 비에리 동지가 죽었다. 그의 死後에 폴란드는 혼란을 겪었고, 그 와중에 우리 연설문은 소련에 적대적인 폴란드人들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내 연설문의 寫本을 복사해 팔았다. 非공개로 낭독된 흐루시초프의 연설문이 그런 값싼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全세계의 비밀요원들은 시장에서 내 연설문을 구할 수 있었다.
연설문은 그런 경로로 공개됐지만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내게 묻곤 했다.
『이 연설문은 당신이 지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설문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이와 같은 질문을 앨런 덜레스라는 미국인 첩보원에게도 했다.

나는 20차 공산당 대회라는 시점을 잘 포착했다는 사실이 만족스럽다. 사태는 달라질 수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스탈린의 죽음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감옥과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설명해야 할지, 그들이 풀려난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우리는 「베리야式 통치」로 후퇴할 수도 있었고, 스탈린의 만행을 베리야에게 전가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스탈린을 「인민의 아버지이자 친구」라는 환상 속에 남겨 두었다면 일은 쉬웠을 것이다. 지금도 베리야를 탓하며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일이 터지면 그 원인을 「하나님이 아닌 천사의 탓」이라고 한다. 천사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에게 그릇된 보고를 했기에, 하나님이 세상에 홍수와 번개 같은 재앙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인 스탈린이 아니라 사악한 천사 베리야 때문에 자신들이 고통을 겪었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나는 라디오를 듣다가 숄로호프의 소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에 나온 한 대목을 듣게 됐다. 숄로호프는 두 어부의 대화를 통해 스탈린의 폭압정치 기간에 일어난 일을 묘사했다. 한 어부가 다른 어부에게 묻는다.
『스탈린 동지를 어떻게 생각해? 사람들이 그러는데 스탈린은 온갖 끔찍한 일이 벌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대. 정직한 사람들은 몽땅 재판을 받고 처형을 당했지. 스탈린 동지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두었을까?』
『그러게 말야, 잘 믿어지지 않아』
『베리야가 주범 아니야? 스탈린에게 고자질한 게 그 사람 아니었어?』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숄로호프)는 좋은 작가지만 한 가지 사실을 잘못 알았다. 베리야가 스탈린을 만든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베리야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스탈린은 베리야 이전에 예조프를 만들었고 예조프 전에는 야고다가 있었다. 그들은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스탈린은 무고한 사람들을 파괴하기 위해 꼭두각시를 이용했다. 붙잡힌 사람들이 무죄라는 것은 스탈린 자신도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한 살인자가 지나치게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인물로 교체했다. 이렇게 세 악당들이 나타난 것이다. 스탈린이 죽자 그 연결 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에 베리야는 범죄자로 체포되어 인민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제20차 공산당 대회 직전에 나는 檢事인 루덴코 동지를 불렀다. 그는 스탈린 치하의 세 차례에 걸친 숙청작업에서 많은 일에 관여한 사람이었다.
『루덴코 동지, 나는 스탈린 치하에서 행해진 공개재판에 대해 알고 싶소. 부하린, 리코프, 시르초프, 로미나츠, 크레스틴스키, 그밖의 많은 사람들과 정치조직에 대한 고발 중에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이 얼마나 되오?』
루덴코 동지는 당시에도 그들의 有罪를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들에 대한 기소는 그들이 육체적·정신적 고문을 받는 가운데 튀어나온 자백을 근거로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런 자백은 누군가를 재판에 회부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될 수 없다.
내 비밀연설에는 공개재판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리코프, 부하린 등 인민의 지도자들이 재판에 회부되고 판결을 받을 때, 그 자리에 友邦國의 공산주의 정당 대표자들이 참석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 판결이 공정했다고 자기 나라에서 증언했다.
우리는 그들이 自國에서 신뢰를 잃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부하린, 지노비에프, 리코프를 비롯한 인사들의 復權을 미루고 있었다. 그것이 잘못된 결정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모든 것을 얘기하는 게 나았다. 나쁜 짓은 탄로 나게 마련이다.
그런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제20차 공산당 대회가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주요 성과는 우리가 스탈린주의 정당의 순화 운동에 착수하고, 우리 조국의 아들딸들이 일궈 낸 레닌주의적 삶을 再建(재건)하기로 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