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치사상의 근간,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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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의 정치사상...김한교 University of Cincinnati 정치학 명예교수 |
<지난
12일,13일 양일간에 걸쳐 연세대 상남기념관에서 개최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재평가에서 발표된 내용을
요약게재합니다> 미국항의 무릎 쓴 모든 기준, 한국의 독립과 생존 반미, 반일, 반러주의자 아닌 국익수호 親한국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사상을 압축한다면 이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로 압축될 수 있다. 이승만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독립과 생존이라는 국가이익을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로 나타났다. 독립운동과정은 물론 해방 이후 남북통일, 휴전반대, 대외관계 등 모든 정책의 선택기준은 오로지 한국의 독립과 생존이었다. 특히 이승만은 대미, 대러, 대중, 대일관계에서 국익수호를 위해 국내외 반대여론 특히 맹방 미국의 항의도 묵살했고 고집이 세다느니 비타협적이라니 하는 인신공격도 감수했다. 우리의 힘이 약하므로 미국과 제휴(提携)하여 힘을 빌리면서도 시시비비를 따져 한국의 국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를 가장 잘 아는 미국인 중 하나인 올리버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이 대통령은 반일, 반러 심지어 반미주의자라고 하지만 가장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친한국(pro-Korean)적 인물’이었다. 이승만의 반공사상 역시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 이전에 소련, 중공, 북한과 같은 나라가 한국의 독립과 생존을 위협하는 데 따른 민족주의적 자위본능의 소산이었다. 한국주변의 공산권 집단이 국내반란세력인 이북정권을 사주하고 뒷받침하는 데에서 반공이 한국국내의 문제가 되었고, 남한 내의 공산당 조직이 반정부활동에 앞서 있다는 인식이 더욱 이 대통령의 반공사상을 부채질했다. 흔히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김구의 정치사상을 비교하면서 후자는 보다 더 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평가하는 예가 있다. 그러나 본인은 이 두 정치인이 민족주의를 선행시켰으며 다만 실천과정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본다. 4*19후 “훌륭하다, 한국민은 살아있다” 민족주의 다음가는 요소는 민주주의이다. 그는 한국을 서구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데 불가결한 요건이 민주화라고 보았다. 서향식(西向式) 발전만이 부강한 한국을 이룩하는 길이라고 확신했고 자유와 인권은 그 자체가 목표가 됐다. 물론 위기의 정국 아래서 빚어진 이대통령의 장기집권은 민주주의 이론과 실천의 괴리(乖離)현상을 나타냈고 그의 하야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4*19에 참가한 학생을 “훌륭하다. 한국국민은 살아있다”고 칭찬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이상에 끝까지 충실했다. 이 대통령의 정치사상 속에 있는 민주주의를 논하는 자리에서 언급해야 할 것은 ‘일민주의(一民主義)’이다. 1952년 자유당 창당 시 이 대통령의 일민주의가 새 정당의 정강임을 밝혔다. 필자의 생각에는 일민주의의 내용은 모든 국민이 계급, 빈부, 파벌, 남녀성별, 출신지방으로 인한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생각을 민주주의의 테두리 속에서 국민에게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는 서향(西向), 가슴은 동향(東向) 이 대통령의 정치사상은 ‘서향(西向)주의’와 동시에 유교전통이 끈질기게 작용했다. 그의 머리는 서향했지만 폐부(肺腑)는 동양에 머물고 있었고, 동과 서의 융화(融和)나 퓨전(fusion)을 시도했다. 이 대통령은 서향식 민주발전을 역설하면서도 동방예의지국 전통의 부활과 진흥을 바랬고, 기독교와 유교 사이에 근본적 모순이 없다고도 주장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 대통령에게 기독교 신앙은 정치사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700여건에 달하는 이 대통령의 담화록을 검토해 본 결과 기독교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거의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대통령은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지켜나갔다는 것이 내 개인적 분석이다. 이 대통령이 개인으로서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을지라도 공식발언에서는 종교적 색채를 띠우지 않았던 이유는 이승만이 숙지하는 미국정치과정에서 국가와 교회를 분리하여 상호간섭을 못하게 하는 비종교적(secular)철칙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나타난 것으로 보여진다. 이론적 학구(學究) 아닌 현실서 정치철학 실천 이승만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갑론을박의 단계에 있어 보이나, 그의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는 훼예포폄(毁譽褒貶)이 뚜렷해 보인다. 물론 그는 심오한 정치철학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학구(學究)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현실정치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천해간 정치실천가였으며, 그 사상은 일관된 흐름을 유지해왔다. 이승만의 학식이나 주장이 지적 깊이가 없다는 평가에도 동조할 수 없다. 청년 이승만은 선각자로서 서양문명과 정치제도를 조리 있게 소개한 업적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옥중에서 그가 쓴 ‘독립정신’은 약관 29세의 젊은 나이에 쓴 글로서는 놀라울만한 해박한 지식과 명석한 논리 그리고 뜨거운 애국정신을 힘차게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 이후 등소평 시대가 열리면서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이론’이라고 등급을 지은 표현이 통용된 것을 기억한다. 이승만 역시 그의 ‘정치사상’을 논하는 것이 지나친 시도는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정리 김성욱 기자/미래한국신문
(2004년에 퍼 온 기사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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