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虐殺로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바그다드의 도살자」후세인의 삶

이강기 2015. 10. 28. 11:12
虐殺로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한「바그다드의 도살자」후세인의 삶
 
『국민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을 했으면서, 자살할 용기도 없는 비겁한 인간』
 
● 후세인의 존재 때문에 이라크인들은 그가 체포될 때까지 공포를 떨쳐내지 못했다
●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이 학살한 인명수는 수십만 명선
● 혁명 동지와 恩人, 그리고 가족까지 처형시키는 冷血漢
李相欣 月刊朝鮮 기자 (hanal@chosun.com
후세인 체포 뉴스를 듣고
 月刊朝鮮 마감이 끝난 2003년 12월14일 저녁 7시, CNN은 이라크 前 대통령 후세인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하고 있었다. 그 순간 기자의 머리에는 2003년 5월, 20일간 취재차 이라크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이라크 백성들이 후세인의 사인 하나로 닭처럼 도살되고 있을 때 反戰운동을 벌여 독재자 후세인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한 인권운동가 사타르 자바르(39)씨. 그는 이슬람 비밀정당인 다와黨에 가입했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10년을 복역했다.
 
  『후세인은 우리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전쟁을 했으면서, 자기는 히틀러처럼 자살할 용기도 가지지 못하고 도망간 비겁한 인간』이라고 분개하던 이라크 항공 교통관제사 압둘 카림(44)씨. 그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후세인이 없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
 
  아버지와 형제 다섯 명이 후세인 정권에게 처형 당했지만, 그 이유조차 듣지 못한 아미르(38)씨, 기자를 아부그레이브 교도소까지 태워 준 후 자기의 사촌이 갇혀 있었던 교도소 감방 쇠창살을 붙들고 울던 택시 운전기사 압바스(33)씨. 후세인 체포 소식에 환호하는 이라크 군중의 모습 위로 이들의 얼굴이 교차되어 떠 올랐다.
 
 
  무엇을 위한 反戰平和 운동이었나?
 
  기자가 머물던 팔레스타인 호텔 뒤편에 있는 한 여관에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인간방패를 자처했던 한국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전쟁에 고통 받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을 돕고,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겠다는 것이 이들이 이라크에 온 이유라고 했다.
 
  취재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우연히 이라크의 한국 反戰平和팀과 함께 활동했던 20代의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열린 무슨 「세계평화회의」에 참석하고 돌아 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전쟁이 끝났는데 이라크에서 反戰平和 운동을 할 것이 더 남아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는 『우리는 모든 점령정책을 반대한다』며 『이제 이라크의 일은 이라크 국민에게 맡기고 美軍이 철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이대로 美軍이 철수하면 후세인과 그 일당들이 다시 政權을 잡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1991년 시아파 봉기 진압 때와 같은 대량 학살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싶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참았다.
 
  反戰平和를 외치던 사람들은 국내에 돌아와 이라크인들의 궁핍한 모습을 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누가 이 이라크인들을 이렇게 만들었냐』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았다. 국내 방송사들은 이라크의 혼돈 상황을 보도하면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는 이라크에 빨리 평화가 와야 한다』는 방송을 수없이 내보냈다.
 
  도대체 그 많은 한국의 기자들과 反戰平和팀 운동가들이 이라크에서 무엇을 보고 온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에게는 후세인의 몰락을 축하하며 거리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후세인의 독재에 고통받으며 죽어간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기자는 이라크 취재기간 동안 통역을 해준 압바스(38)씨와 헤어지는 날 그에게 한글 편지 한 통을 써 주었다. 「한국인들은 이 사람에게 믿고 통역을 맡기라」는 일종의 추천서였다.
 
  아이 세 명을 둔 압바스씨는 『후세인이 없어져서 이제 내 아이들에게도 미래가 있다』고 기뻐했다. 그는 『지난 35년간 그랬듯이 앞으로 35년이 지난다고 해도 외부의 도움 없이는 이라크인들 스스로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美國의 도움을 고마워했다. 독실한 시아파 무슬림 신자인 그는 후세인 정권에게 조카 두 명을 잃었다. 그는 『祖國에 美軍이 주둔하는 것을 누구보다 반대하는 사람이지만, 평생 후세인의 몰락을 기도했다』고 말했다.
 
 
  후세인에 대한 공포
 
  후에 이라크에 다녀온 기자를 통해 알아 보니 압바스씨는 이라크를 방문한 대한적십자사 일행의 통역을 했고, 현재는 美軍 군정청의 통역사로 일하면서 돈을 제법 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자가 이라크에 갔을 때는 부시 대통령이 사실상의 종전을 선언한 이후였다. 당시 현지 치안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시민들의 대량 약탈이 조금 진정되기는 했으나, 바그다드 곳곳의 빈 관공서 건물에는 방화로 추정되는 불길이 매일 치솟았고, 밤거리에는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치안 부재」를 가장 큰 불만으로 이야기했다. 강도들에게 차를 잃었다는 한 시민은 『빚 3000달러를 내서 차를 구입해 택시 영업을 했는데 빚을 갚을 길이 막혀 버렸다』며 『자살을 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내가 기자라고 하자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하며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 외에는 없었다.
 
  매일 택시를 타고 취재에 나서면 『어제는 이웃에 강도가 들어 세 명이 죽었다』, 『대낮에 거리에서 차를 뺏는 강도를 보고도 어쩔 수 없이 구경만 했다』는 험악한 이야기를 들었다. 바그다드 서쪽지역에서 구두 가게를 하는 지야드(36)씨는 『사담 시절에는 장사하는 데 걱정이 없었는데 지금은 무서워서 못 살겠다』며 『빨리 새 정부가 들어서든지 美軍이 순찰을 강화해야 하든지 해야 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세계 최강의 美軍이 기본적인 거리 치안을 장악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보냈다. 심지어 『美軍이 본격적인 이라크 再建 작업이 들어갔을 때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치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소문이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 상식처럼 퍼져 있을 정도였다.
 
 
  영원히 죽지 않는 大兄 사담
 
  미국은 심각한 이라크의 치안상태를 조기에 회복하기 위해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이라크의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에 파병에 신중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동맹국의 요청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후세인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라크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를 보내며 기뻐했다. 기자는 이 모습을 보면서 「이들이 이제야 후세인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에게 가졌던 공포의 깊이를 알 수 없을지 모른다. 기자는 바그다드에 머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후세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 질문을 받은 이라크인들은 일단 얼굴 표정이 심각해지며 귓속말을 할 듯 바짝 다가선 후 낮은 목소리로 『후세인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미국 방송국에서 통역을 하던 한 이라크인은 『후세인은 지금 티크리트 자기 고향 어딘가 땅 속에 숨어 있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후세인은 영원히 죽지 않는 「大兄(대형)」이었다.
 
  기자는 이라크에 머무는 동안 후세인이 죽었다고 믿고 있는 이라크인은 단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많은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을 미국이 보호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심지어 후세인이 미국의 간첩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전직 경찰관 알리 아브라힘(32)씨는 『美軍은 이라크 질서유지를 위해 다시 사담을 權座(권좌)에 세울 수도 있다』며 겁을 먹고 있었다. 이라크 사람들은 1991년 걸프 전쟁 때 후세인이 제거될 것으로 믿고 봉기를 했다가 미국이 발을 빼는 바람에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을 당했던 쿠르트族 시야派 이슬람 교도들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후세인의 확실한 말로를 보지 않은 한 그가 살아 있다고 믿을 것이고, 그에 대한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 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후세인을 체포한 이후 미국은 『후세인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라크인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힌 후세인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고통을 잊지 못하는 가족들
 
  후세인은 상상하기 힘든 공포정치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그는 이라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 주민들을 감시했다.
 
  기자는 바그다드 취재 중이던 2003년 5월 중순경 힐라市 (바빌론) 북쪽 1km 지점인 마하윌에서 1991년 후세인에게 대량 학살당한 시신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방문했다. 현장에는 약 3000구의 시신이 발굴된 상태였다. 힐라 주민들은 『이 일대에 1만여 구의 시신이 더 묻혀 있다』고 말했다.
 
  이곳 주민들은 『1991년 후세인이 힐라市에 탱크를 몰고와 길에 보이는 사람들은 무조건 체포해 생매장을 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힐라 부근 여러 곳에 학살된 주민들이 매장돼 있다고 증언했다.
 
  이곳에 사촌을 찾으러 왔다는 케림 하심(36)씨는 『사담 후세인에 맞서 싸워준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한국인들도 사담에 대항해 싸워줘서 감사한다』고 말했다. 그는 바그다드 남쪽 나시리야에 파병된 한국군의 이야기를 듣고 한국도 이번 전쟁에서 싸웠다고 알고 있었다. 그는 『사담은 전쟁 범죄자, 아비 없는 자』라고 욕을 퍼 부은 후 사라졌다.
 
  차도르를 쓴 늙은 여인이 울면서 『1991년 실종된 17세 된 아들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 여인은 『아들이 실종되자 티크리트에서 온 정부 관리들이 「자기들이 아들을 데리고 있다」며 후세인 사촌이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고 한다. 그후 이 여인은 후세인 사촌이라는 사람에게 『아들을 살려달라』며 200달러씩 10번 가량 돈을 주었으나 아들을 끝내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이날 저녁 리비아의 한 TV방송은 후세인 정권의 비밀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들의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해서 리모컨으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2003년 10월30일, 미국 폭스 뉴스와 CNN은 후세인 치하에서 軍과 경찰이 정치적 반대자를 처참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이 비디오는 다음날 국내방송에도 일부가 소개 됐다. 23분짜리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웃통이 벗겨진 채 두 팔이 기둥에 묶인 남자의 알몸을 철봉으로 수없이 내리치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혀를 뽑거나 팔목을 자르는 장면, 목을 치기 위해 머리를 나무받침에 끌어 올리는 장면,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10m 아래의 위에서 밀어떨어뜨려 관절을 골절시키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알리 알 딜라이미(48)씨는 이슬람 정당(다와黨)에 가입했다가 1984년 체포되어 20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1989년 이란-이라크 전쟁 후 풀려 났다. 그는 감옥에서 고문당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형제 아홉 명 중 세 명이 이슬람 정당에 가입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한 명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戰死했고, 두 명은 국외로 탈출했다고 한다.
 
  그의 삼촌도 네 명의 아들을 잃었다. 그 자신이 감옥에 6년 동안 있는 동안 가족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처형된 알리씨의 형의 장례식에는 아버지 혼자만 참석이 허락됐고, 비밀경찰은 아들을 쏜 총알을 강제로 아버지에게 사게 했다고 말했다.
 
 
  다섯 명의 이름을 댈 때까지 고문 계속
 
  『잡혀 온 많은 사람들이 조사과정에서 죽었다. 비밀경찰은 잡아 온 사람들을 총으로 쏘거나 때리거나, 복부를 걷어 차서 많이 죽였다. 내 친구 마하무드는 신장을 차여 즉사했다. 그는 이슬람 정당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가 죽은 후 경찰은 그가 다와 정당에서 활동했다고 서류를 조작했다』
 
  알리씨는 후세인 비밀 경찰들의 다양한, 그리고 기상천외한 고문 방법을 들려주었다. 콜라병에 앉게 해 항문을 찢는 고문, 신체의 가장 민감한 부위에 전기 충격을 주는 고문, 눈을 가린 후 무조건 구타하는 고문, 손을 뒤로 묶고 천장에 매달아 어깨를 탈골시키는 고문…. 그가 직접 당하거나 목격한 고문이다.
 
  비밀경찰들은 잡혀 온 사람들 입에서 다섯 명의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올 때까지 고문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야 자기들의 실적이 올라가고 명단에 이름을 채워 상부에 보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리씨는 『잡혀 온 한 남자가 고문에 못 이겨 자기 부인의 이름을 말하는 광경도 보았다』고 했다. 비밀경찰이 이 사람의 아들을 잡아와서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이자, 겁에 질린 그는 자기 부인의 이름을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잡혀 온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연행되어 같은 식으로 고문을 받고 처형됐다고 한다.
 
  아미르(38)씨의 아버지와 아미르씨의 형제 다섯 명이 같은 날 처형당했다. 그는 가족들의 시신을 인수하러 갔을 때 형들의 시신 머리부분에 도끼자국이 나 있었다고 말했다.
 
  전직 육군 대령 아하메드(57)씨는 기자에게 『당신이 10년을 취재한다고 한들 이라크인들이 고통받은 이야기를 다 취재하지 못할 것』이라며 『美軍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쉽게 나가지 않겠지만, 미국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떻게 후세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라크인들을 만나면서 「바그다드의 도살자」, 「중동의 히틀러」 등 그 동안 미국이 후세인을 칭했던 별명이 조금도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후세인은 1937년 바그다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티크리트의 가난한 농촌마을인 알 아우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그는 의붓 아버지 아래서 구박받으며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18세 때 외삼촌을 따라 바그다드로 와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 다니며 아랍 민족주의에 깊이 빠진 후세인은 학생운동에 참여 했다. 후세인은 1957년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바트黨의 암살 행동대원으로 가입했다. 1958년 압둘 살람 아레프 대령이 압둘 카림 카심 총리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연루돼 후세인도 투옥됐으나, 곧 탈출했다. 후세인은 다시 카심 총리 암살 계획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이집트로 가서 망명 생활을 했다.
 
 
  인간 도살자 후세인
 
  1963년 바트黨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후세인은 바그다드로 돌아왔다. 1964년 다시 정권이 뒤집히자 체포되어 1966년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쯤 바트黨에서 후세인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1968년 쿠데타로 바트黨이 再집권하는 데 핵심역할을 한 후세인은 혁명평의회(RCC) 부의장이 되어 권력의 실세로 떠 올랐다. 1979년 후세인은 바크르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9년 7월 대통령에 취임하기 며칠 전 후세인은 22명의 바트黨 지도급 인사에게 반역죄를 씌워 처형했다. 이때 처형한 사람 중에는 과거 그가 지하 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그의 친한 친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의 비밀재판 과정은 비디오로 생생하게 녹화되어 있다.
 
  넓은 회의실에 400여 명의 바트黨 고위 간부와 RCC 소속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RCC 서기장인 마샤디가 단상에 서서 『내가 반역을 했다』는 자백을 털어놓았다. 고문에 의한 사전 각본에 따른 자백이었다. 마샤디의 입에서 공모자의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비밀경찰들은 그 사람을 회의장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들에게는 변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후세인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권총을 지급한 뒤 반역혐의를 받은 이들을 즉결 처형하게 했다. 후세인은 자기와 가장 친했던 인사와, 유력 가문 인사들은 더욱 가혹하게 처형했다. 후세인은 심지어 죽은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자고 한 사람도 불필요한 동정을 보였다는 죄목으로 처형했다.
 
  기자가 만났던 이라크 국민협정(INA)의 알 아와디(60)씨도 이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은 후 투옥됐으며, 그 후 후세인을 피해 12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그가 망명하자 후세인 일당은 그 아들과 부인을 잡아 고문한 후 처형했다.
 
  후세인은 자기의 가족에게조차 관대하지 않았다. 1995년 그의 두 사위가 요르단에 머물며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폭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세인은 사위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다』며 귀국을 종용했다. 두 사위가 귀국하자 후세인은 72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들을 살해했다.
 
  후세인은 1984년에는 자신의 측근이던 오마르 알 하자 중장이 후세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오마르 중장과 그의 아들의 혀를 자른 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란의 호메이니가 평화조약 체결 조건으로 후세인의 퇴진을 요구했을 때 이브라힘 보건장관이 『각하께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협정 체결 후 다시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했다. 다음날 이브라힘 장관은 토막 살해된 채 발견됐다.
 
  1991년 걸프戰을 틈타 이라크 남부 바스라에서 시아파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후세인은 탱크를 몰고 도시를 쑥대밭을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약 1400명 이상의 시민들이 죽었다. 반군 부상자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15개의 병원이 파괴됐고, 시민들은 산 채로 헬리콥터 위에서 던져졌다.
 
 
  1991년 30만 명 학살
 
  바스라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도 투옥 후 살해됐으며, 반군에 동요한 수많은 軍 장교들은 즉결 처형됐다. 이 당시 바스라를 비롯한 이라크 남부에서 죽은 사람은 약 5만 명에서 3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북부 쿠르드族은 당시 무덤을 만들지 못해 시신들을 불도저로 밀어넣을 정도로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쿠르드族은 이미 1988년 후세인에게 독가스 공격을 받아 5000여 명이 학살당한 경험이 있었다.
 
  바그다드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도시인 나자프를 방문했을 때 그곳 주민들은 1991년 당시 후세인 군대가 도시의 몇 개 블록을 밀어 버렸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걸프戰에서 갓 돌아온 젊은 군인 수천 명은 따로 어디론가 끌려가 모두 처형됐다』고 말했다.
 
  국민들에게 최후의 일인까지 聖戰(성전)을 펼치라던 후세인은 바그다드 함락과 동시에 사라져 토굴에 숨어 지내다 8개월 만에 美軍에게 총 한방 쏘지 못한 비겁한 모습으로 체포됐다. 후세인은 서방언론을 향해 『나는 미군에게 살아서 체포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저 초라한 모습의 인간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인생을 고통 속에 빠뜨렸나」하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왔다.●

월간조선 2004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