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미래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 |
Ⅰ. 서론
공산권이 도미노 쓰러지듯 무너지면서 20세기의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완승한 듯싶던 것이 불과 20여 년 전 일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선진국 경제에 양극화를 불러오고 뉴욕 월가 발 금융위기가 유로존 위기로 이어지는 등 글로벌 경제위기가 지구촌을 강타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는 반드시 붕괴한다고 예언한 칼 마르크스의 재조명이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일어날 정도다. 자본주의의 기본은 자유방임과 경쟁이다. 사람들에게 생업선택의 자유를 허용하고 최종적으로 누가 어떤 생업을 차지하는지는 경쟁을 통하여 결정한다. 그런데 이기적 개인을 자유방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도덕 기준이 높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남을 해치는 일도 마다 않는다. 남을 해쳐서 자신의 이익을 얻는 일까지 허용하는 자유방임은 바로 약육강식의 정글로 직행하는 길이다. 경쟁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규칙 없이 힘센 강자만 좋은 생업을 차지하는 경쟁 역시 정글의 법칙으로 전락하기 쉽다. 사람들은 경제생활을 통하여 개인별로 사용할 몫을 확보하는데, 각자의 몫을 사회적으로 존중받도록 만드는 것은 그 사회가 공인한 재산권이다. 사람들을 자유방임하여 서로 경쟁하도록 허용하는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정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남을 해쳐서는 이익을 얻을 수 없어야 한다. 재산권 보호가 잘 된 사회에서는 어느 누구도 남의 것을 부당하게 편취할 수 없고, 개인이 이익을 얻는 길은 다른 이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고 대가를 받는 것뿐이다. 또 이상적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생업 선택의 자유를 주되 최종적으로 누가 무슨 생업을 가질 지는 생업의 성과를 사가는 소비자들의 결정에 맡긴다. 그러므로 생업선택의 경쟁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으려는 경쟁이다. 높은 소득은 좋은 생업에서 나오는데 경쟁이 공정하지 않아서 생업 배정이 왜곡될 때 야기되는 문제는 결국 재산권 침탈이다. 자유방임의 경쟁이 재산권 보호의 틀 안에서 전개된다면 어느 누구도 남의 몫을 부당하게 가로챌 수 없다. 그런데 이 재산권 보호가 쉽지 않다. 공권력이 특정 개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편파적으로 감싸는 경우도 문제지만 누구의 재산인지 판별하고 그 재산권이 어떻게 침해받았는지를 구명하는 일 자체가 매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자본주의를 약육강식의 부익부빈익빈 체제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까닭은 현실 경제의 재산권 보호가 완벽하지 못한 탓이다. 현실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재산권 보호의 실패다. 최근의 금융위기도 그 본질은 금융자본의 농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축적한 재부를 날려버린 사태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경쟁의 패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면서 실업은 급증하는데 이들을 속수무책 외면하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면모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혐오의 눈으로 본다. 특히 지난 세기말부터 세계화가 급격히 진전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문제들은 자본주의체제의 작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문제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본고에서는 세계화의 본질을 먼저 재조명해 본 뒤에 자본주의 체제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 과제를 논의해보기로 한다.
Ⅱ. 세계화
1. 세계화의 본질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본격화한 20세기말의 세계화는 국경을 넘는 인적 물적 교류의 범위를 크게 넓혀오고 있다. 세계 각국이 이 시대적 추세를 수용하기 위하여 국경을 넘나드는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글로벌 표준에 따라서 원활하게 교류하도록 제도를 개선해 오는 중이다. 국제 경제교류는 상품무역에서 서비스 교역을 거쳐 투자확대에까지 이르고 일부 선진국에서만 존중받던 지적 재산권 보호가 글로벌 표준으로 관철되었다. 다만 급증한 국제 인적 교류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의 자유로운 국제이동만은 아직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는 상태다. 국경을 넘는 투자의 확대는 세계의 경제지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선진국 자본은 개도국에 투자함으로써 개도국의 우수한 노동력을 저임금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개도국 실업 노동자들은 새로 설립된 외자기업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개도국의 산업활동이 일어나면서 세계의 공장은 개도국으로 옮겨 갔고 선진국들은 탈산업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 동안 선진경제의 주축이던 제조업은 공해유발형 저부가가치 부문부터 개도국으로 그 무대를 옮겨갔다. 과거에는 농수산물 등 1차 산업제품을 주로 수출하던 개도국들이 공산품을 수출하게 되었고, 이 공산품을 수출하던 선진국들은 공산품 수입국으로 바뀌었다. 중국과 인도 등 거대 개도국들의 산업화가 고도성장으로 이어지면서 세계의 빈곤인구는 크게 감소하고 있다. 중국이 단숨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좁히는 데서도 들어나듯이 세계화는 지구촌의 빈국과 부국 간의 격차를 눈에 띄게 좁혀가는 중이다. 국내로 한정되던 경제협력의 범위를 지구촌 전체로 확대한 세계화는 그 동안 국경이 봉쇄해온 글로벌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면서 세계경제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2. 세계화에 따른 양극화
그러나 세계화를 겪는 선진국의 사정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세계화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집단이 선진국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공장이 개도국으로 이전하면 그 공장에서 일하던 선진국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그런데 새로운 일자리가 없다. 세계화는 선진국의 산업구조를 고부가가치형 첨단산업과 서비스산업으로 몰아가는데 선진국의 제조업 노동자는 이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봉제공장의 재봉사가 R&D센터의 첨단섬유 개발연구원으로 직업을 바꾸지는 못한다. 저부가가치 제조업은 선진국을 떠나 개도국으로 이전해 가지만 그 제조업에 전문화한 노동자들은 그들의 모국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종전의 직장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이들은 개도국 수준의 임금을 수용해야 한다. 굳이 선진국의 생활비가 개도국보다 더 많이 든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노동자들이 받아들일 리 없다. 그런대로 생활을 유지해 오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빠르게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세계화는 시장을 전 지구촌으로 넓히면서 개도국의 산업화를 촉진하여 개도국 시장의 구매력을 키운다. 지구촌의 수많은 인구가 과거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승용차과 사치품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의 혜택은 고부가가치형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선진국 인구에게 돌아간다. 선진국의 인구는 새로운 일자리를 못 찾고 몰락하는 계층과 새로운 기회를 얻어서 비상하는 첨단산업 종사 인구로 나뉜다. 이것이 소위 양극화다.
3. 그러나 세계화는 시대적 추세
과거 인류는 씨족 단위로 모여 살았다. 외부인과의 접촉은 거의 없었기에 자신들만의 생활권을 구축하였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활동 범위가 넓어지자 씨족 간 접촉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호적 공존이기보다는 전쟁과 정복이었고 그 결과 현재의 국가로 정리되었다. 국제관계도 평화공존과 전쟁을 거듭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전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평화공존적 국제교류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때 마침 전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묶을 수 있는 통신 수송기술이 발달하면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합의한 것이 세계화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거쳐서 진행되고 있는 세계화는 역사의 소명으로서 결코 거스를 수 없다. 양극화의 문제는 세계화로 이익을 보는 다수가 피해자들을 돕는 형태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선진국 근로자들이 세계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세계화를 중단할 수는 없다. 세계화 이전의 체제는 선후진국 간의 국경이 개도국 근로자들의 기회를 차단하는 체제였다. 세계화가 이 차단의 벽을 허물어 개도국 근로자들에게 기회를 제공하였는데 이와 함께 선진국 근로자들은 선진국민으로 누리던 특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만약 선진국 근로자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세계화를 포기한다면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구체제로 회귀해야 한다. 문제는 세계화가 빚은 양극화를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문제를 파악하는 시각이다. 현실의 양극화를 부익부빈익빈을 부채질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탓으로 규정하면 양극화 해소를 위한 대책은 자본주의 체제의 개선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양극화가 세계화의 산물인 만큼 이 접근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현실 자본주의의 개선 방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현실의 양극화는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화의 문제라는 사실을 먼저 분명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현실 자본주의의 문제는 무엇일까?
Ⅲ. 재산권보호가 완벽한 자본주의
재산권 보호가 완벽하다면 어느 누구도 남의 재산을 소유자의 동의 없이 부당하게 탈취하는 방법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 사람들은 서로 협력하여 이익을 창출하고 합의를 거쳐서 이것을 나누어 가지는 경제관계로 엮이게 마련이다. 협력의 방식은 크게 교환과 공동생산 등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공동생산도 그 생산물을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판매하므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 간 경제관계는 각자 생업에 종사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생산물을 판매 교환하는 사회적 분업 관계이다. 이처럼 시장을 매개로 하여 전개되는 사회적 분업체제에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보다 적게 생산된 상품은 그 값이 오르고 반대로 많이 생산되면 내린다. 상품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소득은 상품 값이 오르면 늘어나고 반대로 내리면 줄어든다. 이기적 개인은 더 많은 소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품 값이 내리면 그 생산은 접거나 줄이고 반대로 값이 오르면 그 상품의 생산으로 몰려든다. 시장의 상벌기능은 불필요한 상품을 생산하는 생업은 저소득으로 징벌하고 긴요한 상품의 생산은 고소득을 주어 포상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상벌기능 때문에 개개인은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만 더 많은 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품목별로 상품이 사회적으로 남아돌면 그 생산을 줄이고 모자라면 늘려야한다. 즉 이기적 개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사회에서 남아도는 상품은 생산을 줄이고 모자라는 상품은 생산을 늘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기적 개인들을 자유방임하더라도 시장이 별 혼란을 야기하지 않으면서 자원을 사회적으로 필요한 용도에 배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상벌기능 때문이다. 그러나 재산권 보호가 완벽하지 않으면 개인은 보호가 허술한 남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하여 힘들여 일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남의 것을 편취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러한 행위들을 징벌하지 못하는 시장상벌기능은 그만큼 그 효과를 상실한다. 시장의 상벌기능이 이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는 재산권 보호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재산권을 완벽하게 보호하는 자본주의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몫을 부당하게 편취하지 못하도록 보장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정당한 자기 몫만 누리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 소득분배는 공정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두루 잘 살게 만들지는 못한다. 무슨 생업을 시도하든 소비자들의 선택을 얻어내지 못한 사람은 시장에서 소외된 빈곤층으로 전락한다. 완벽한 재산권 보호의 공정성이 갖춘 다른 한 면은 빈곤층을 소외시키는 비정함이다.
Ⅳ. 불완전한 재산권 보호
현실의 재산권 보호 제도는 다음의 3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둘째, 계약이행을 강제하고, 셋째, 재산권에 관한 분쟁이 제기될 때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계약은 재산권을 획정하는 합의이므로 그 이행을 강제하는 것 또한 재산권 보호다. 재산권 분쟁의 해결에 국가권력이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재산권 보호의 기본이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에서 재산권 보호는 완벽하지 않다. 우선 법치가 부실하면 재산권 보호도 부실하기 마련이다. 또 재산권 획정 자체가 정당한 것이 아니라면 법에 의한 재산권 보호가 실제로는 오히려 유린이다. 그리고 법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재산권이 유린당하더라도 시정할 길이 없다. 재산권 획정은 토지, 개인의 능력,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권리금처럼 논쟁거리가 적지 않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깊은 논의를 거쳐야 하는 것인 만큼 본고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1. 경쟁의 문제
1) 시장거래의 공정경쟁
시장거래는 매매 쌍방이 모두 이익을 보는 경제행위로서 거래가격과 거래량은 매매 쌍방이 합의하는 수준에서 결정된다. 거래 가격이 높게 결정되면 파는 이의 이익이 더 커지고 반대로 낮으면 사는 이의 이익이 더 커진다. 매매는 거래 상품의 재산권을 파는 쪽이 사는 쪽에게 이전하는 행위인데, 매매 쌍방 간에 거래 이익을 나누는 과정은 곧 새로운 재산권의 획정이다. 가격과 기타 거래조건이 어떻게 결정되는가에 따라서 새로 획정되는 재산권의 내용은 달리 결정된다. 최종적으로 가격과 거래조건을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협상력이다. 어느 한 쪽이라도 행사한 협상력이 부당하다면 그에 따라 결정된 재산권 구조도 부당하고, 그 상대방의 재산권은 침해받는다. 나와 거래하고 싶어 하는 상대방이 많으면 나는 내게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는 상대방을 골라서 거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와 거래하기를 원하는 상대방의 숫자가 많을수록 나의 협상력은 더 커진다. 일반적으로 어느 기업의 협상력은 소비자들이 그 제품을 좋아할수록, 그리고 라이벌 기업보다 더 싼 값을 제시할수록 강해진다. 기업의 강한 경쟁력은 강한 협상력의 바탕이 된다. 그런데 경쟁력 강한 내 라이벌이 시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부당하게 진입장벽을 설정한다면 나는 내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 내가 상품 A에서는 최고의 경쟁력을 누리지만 상품 B에서는 내 라이벌이 최고의 경쟁력을 누린다고 하자. 만약 상품 A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필수품이지만 상품 B는 그렇지 않다면, 나는 상품 A의 판매 전략으로 나에게서 상품 B를 구입해가는 고객에게만 A를 판매하는 끼워 팔기를 실시할 수 있다. 이 끼워 팔기 전략은 상품 A를 필요로 하는 고객에게 상품 B를 강매함으로써 상품 B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내 라이벌을 찾지 못하게 만든다. 내 라이벌의 시장진입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이처럼 부당한 전략을 구사하여 진입장벽을 설치하는 거래는 공정할 수가 없고 피해당하는 기업은 물론 소비자들의 재산권까지도 부당하게 침탈한다. 부당한 독점화, 담합, 그리고 각종 우월적 지위 남용 등의 불공정거래행위와 경쟁제한행위를 단속하는 공정거래법은 결국 거래과정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수단이다. 거래이익을 나누는 재산권 획정과정은 시장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때 공정하다.
2) 공정한 공동생산
개인의 경제적 자유가 허용된 사회의 공동생산은 사전에 참여자들이 각자 무슨 역할을 하고 생산의 성과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합의한 뒤에 이루어진다. 이 합의는 노예계약이 아니므로 자유롭게 탈퇴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을 포함한다. 다만 임의 탈퇴가 정당한 절차를 벗어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줄 경우에는 국가가 개입한다. 사전 합의에 따른 생산성과의 분배는 각자의 사후적 생산기여도와 반드시 서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동생산을 유지하기 위한 재협상의 단계에서는 생산기여 실적에 합당한 몫을 요구할 수 있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탈퇴할 수 있다. 참여와 탈퇴가 자유로우면 참여자들이 합의하는 분배는 장기적으로 결국 생산기여도에 수렴하게 된다. 생산성과의 분배에 대한 합의는 새롭게 생산된 이익에 대한 재산권 획정이다. 이 재산권 획정의 정당성은 교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합의과정의 공정성에 달려 있다. 합의과정에 사기나 강압이 작용한다면 공동생산 참여자들의 재산권이 제대로 보호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2. 외부불경제
재산권 획정을 오도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외부불경제이다. 공해처럼 외부불경제를 유발하는 경제행위는 많은 관련 당사자들 - 이 경우에는 불특정 다수 - 의 합의를 얻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이들의 재산권을 유린한다. 외부불경제를 방치하면 재산권 보호가 허술해지므로 시장의 상벌기능도 약화한다. 경제학자 코즈 (Ronald Coase) 는 외부불경제의 경우에 정부가 굳이 개입하여 재산권 획정을 개선하지 않더라도 당사자들이 스스로 협상하여 비효율성을 해소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획정된 재산권 구조에서 불리한 측이 쌍방 모두 더 큰 이익을 얻는 협력을 제안하고 유리한 측이 이 제안을 수용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련 당사자가 다수이고 협상비용이 만만치 않으면 코즈식 협상만으로 문제를 풀어내기는 어렵다. 외부불경제의 재산권 침탈을 막으려면 그 규모를 피해자들이 동의한 수준 이내로 통제해야 한다. 외부불경제의 규모를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합의한 수준 이내로 통제한다는 것은 코즈식 협상에 의한 문제 해결과도 일맥상통한다. 다만 코즈식 협상은 외부불경제를 유발하는 사람이 유발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경우까지 포괄한다는 점이 다르다. 외부불경제 유발을 주변 불특정 다수의 재산권 침탈로 규정하고, 모든 관련당사자들이 공정한 절차를 거쳐서 합의하도록 보장하는 일은 정부의 책임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다수 간의 합의가 불가능할 경우가 많으므로 정부가 나서서 다수를 대신하여 외부불경제를 통제하는 방법이 각종 환경정책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3. 외부경제와 공공재
외부경제를 유발하는 주체는 수혜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익을 일방적으로 증여한다. 외부경제가 유발하는 증여 이익은 외부경제의 유발자가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로서 상대방 수혜자와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제공하는 자발적 증여다. 비록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증여자의 재산권이 침해당한 사례는 아니다. 적극적으로 구매의사를 밝히고 얻은 이익이 아니므로 수혜자에게 대가 지불의 의무는 없다. 경제적 이익이 대가 지불 없이 일방적으로 증여된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시장실패이지만 재산권 침탈로 인한 시장실패는 결코 아니다.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외부경제 문제는 공공재 조달이다.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고 또 공동사용이 개방된 재화가 공공재다. 그러므로 누가 비용을 부담하면서 공공재를 조달해 놓으면 그의 주변 사람들은 비용을 부담하지 않더라도 그 공공재를 소비할 수 있다. 즉 비용을 부담하면서 공공재를 조달한 사람은 주변의 불특정 다수에게 무료로 그 공공재를 사용하는 이익을 제공하는 외부경제를 유발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비용 부담 없이 외부경제의 이익을 누리는 행위를 무임편승 (free-riding) 이라고 부른다. 외부경제로 제공되지 않았다면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취득했을 이익을 무상으로 건졌기 때문이다. 무임편승을 막으려면 수혜자에게 외부경제의 이익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강제해야 하지만 이 조치는 강매와 다를 바 없으니 경제적 자유에 어긋난다. 특히 공공재의 무임편승을 막으려면 편승자들을 공공재 이용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몰아내야 하는데 이 조치는 인간의 기본권을 훼손한다. 결국 무임편승은 별도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과수원 사업자들이 돈을 주고 양봉업자를 유치하는 현상은 외부경제의 세계에도 코즈식 시장이 형성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공공재 조달비용을 합리적으로 조달하는 린달조세는 일반적으로 무임편승 유인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다. 정부는 주요 공공재에 대하여 공급을 책임지고 조세징수의 방식으로 그 비용을 조달한다. 세금은 공공재를 구입하는 가격인 셈이지만 개별 납세자에게 부과되는 조세는 주로 담세능력에 비례하여 부과되기 때문에 각 납세자가 공공재 소비로부터 얻는 혜택과는 무관하다. 그러므로 외부경제를 해결하는 정부의 조치는 개개인의 재산권을 세밀하게 보호하지 못하고 침탈하기 마련이다. 국가안보와 사회 안전, 그리고 각종 사회 인프라와 같은 공공재는 반드시 필요한데 개인의 재산권을 침탈하지 않으면서 그 비용을 조달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4. 정보비대칭성
정보비대칭성은 해당 거래에 유용한 정보를 어느 한 쪽만 알고 있는 상황을 뜻한다. 관련 당사자들이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는 상황은 일단 불공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품을 잘 만드는 방법을 혼자만 알면서 이익을 누리는 것을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정보비대칭성은 정보를 가진 측이 가지지 못한 측을 속이는 도덕적 해이 (moral hazard) 와 역선택(adverse selection)의 경우이다. 행동의 성과는 행위자의 노력과 성실성에도 의존하지만 운의 영향도 받는다.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했더라도 운이 나빠서 성과가 부진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내 일을 내가 하는 경우에는 최대한 노력하고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잘 되면 고마운 일이고 잘 안되면 그대로 받아들일 밖에 없다. 그런데 내 일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나를 대신하는 대리인도 역시 성실하게 노력했는데도 운이 나빴던 때문에 그 일의 성과가 부진했을 수 있다. 문제는 내 대리인이 과연 성실하게 노력했는지를 내가 확인할 수 없다고 하는 정보비대칭성이다. 내게서 보수를 받고 일하는 대리인이 나의 이익은 제쳐두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일했더라도 내가 그 같은 사실을 알아낼 수 없다면 대리인은 얼마든지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나의 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탈하지만 이로부터 내 재산권을 보호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역선택 또한 정보를 가진 측이 가지지 못한 측의 재산권을 침탈하는 결과를 빚는데 이 경우에도 재산권 보호는 도덕적 해이의 경우만큼 어렵다. 대리인의 일탈을 면밀한 모니터링으로 감시하든가 역선택 상황에서 신호기능을 강화하면 정보비대칭성의 피해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완벽한 통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시간을 들여서 실적을 관찰하면 사후적으로는 도덕적 해이와 역선택의 실태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유추결과를 계약 갱신 과정에서 활용하는 일은 가능하다.
5. 재산권 보호의 사각지대
재산권 보호는 결국 법치의 한 영역이다. 재산권을 침탈당한 피해자가 법치의 보호를 받으려면 반드시 그 불법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위법성의 입증에 직간접적으로 소요되는 비용이 입증에 성공하여 받는 배상금보다 더 크다면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재산권을 침탈당하더라도 법의 보호를 포기한다. 부당하게 1억 원의 피해를 받았더라도 이것을 되찾는 데 3억 원의 비용이 든다면 법의 보호를 얻는 데 성공하여 1억 원의 피해를 되찾더라도 차라리 더 손해다. 가해자가 이 상황을 잘 파악하고 나서는 경우에는 가해행위가 상습적이더라도 법치가 실효적으로 불가능하다. 피해자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수무책 당할 밖에 없다. 법이 금지한 행위가 횡행해도 그 피해자가 법의 보호를 구하지 않는다면 법치의 실효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현실의 재산권 보호에는 이러한 사각지대가 적지 않아서 시장의 상벌기능도 그만큼 왜곡 당한다. 하도급 중소기업에게는 모기업에 대한 납품이 생명줄이다. 납품하는 부품이 그 모기업에만 필요한 특수부품이면 모기업은 수요독점기업으로서 하도급시장에서 막강한 협상력을 행사한다. 이 협상력은 정당하지만 하도급시장의 문제는 모기업이 수요독점의 정당한 협상력을 넘어서는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일어난다. 모기업 임원에게 부정한 향응을 제공했는지 파악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모기업 감사실이 하도급기업의 장부 열람을 요구한다고 하자. 이 요구는 엄연히 불법이지만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는 중소기업은 없다. 거절은 곧 납품 관계의 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 신규 품목의 발주를 내세워 큰 비용이 드는 설비투자를 요구했다가, 정작 공장이 완공될 즈음에 무책임하게 일방적으로 계획을 백지화하는 경우도 있다. 중소기업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면 승소할 수는 있겠으나, 배상액의 크기가 앞으로 얻을 모든 납품거래의 이익을 능가하지 않는다면 소 제기 자체가 어렵다. 재벌그룹 계열사들이 일감을 같은 계열사, 특히 총수의 측근이 경영하는 기업에게 몰아주는 행위가 최근 문제로 제기되었다. 일감몰아주기는 총수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더 유능한 다른 기업들을 배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감을 주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손해다. 그러므로 일감몰아주기는 총수의 사적 이익을 위하여 해당 계열사 일반주주의 재산권을 유린한다. 일반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대상이지만 주주당 배상액이 작으면 소송비용조차 회수하지 못한다. 현재의 법체계가 일반주주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있더라도 피해 주주가 체념하고 소제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법적 보호는 없는 것과 같다. 피고용자에 대한 고용주의 횡포 또한 악명 높은 사안이다. 직장이 생명줄인 근로자로서는 해고라는 무기를 위협으로 내세우는 부당노동행위가 불법이지만 이에 저항하기가 쉽지 않다. 사정당국에 고발하여 고용주가 처벌받도록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어느 시점에 해고당할지 전전긍긍해야 하는 터이니 법의 보호를 요청하기보다는 불법적 부당노동행위를 감수하는 편이 더 낫다. 근로기준법 상 고용보호법제는 일방적 해고를 사실상 금지함으로써 사용자가 해고를 위협으로 내세우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제도다. 그러나 기업 경영 여건상 불가피한 해고까지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노동시장 경직화의 직접적 원인이 되고 있다. 하도급기업이나 재벌기업의 일반주주처럼 엄연히 법으로 금지된 부당행위에 의한 재산권 침탈을 감수해야 하는 모순을 해소하려면 법적 사각지대의 약자들에게 강력한 자기방어의 힘을 부여해야 한다. 법적 보호 요청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을 충분히 회수하고도 남는 징벌적 배상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자기방어 능력을 강화하는 한 방법이다. 중소기업이 모기업의 불법적 횡포를 입증하는 데 성공할 경우 모기업과의 모든 하도급거래를 포기하더라도 그 손실을 만회하고 남을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자. 피해 중소기업은 자기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고 모기업은 불법적 횡포를 스스로 자제할 것이다. 일반주주 소송에도 징벌적 배상제도를 도입한다면 재벌기업의 경영진은 일반주주의 이익을 함부로 침탈하지 못할 것이다. 징벌적 배상제도를 도입하더라도 하도급기업은 입증하지 못할 소송은 아예 제기하지 않을 것이므로 남소의 우려는 없다. 그러나 일반주주 소송은 남소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크므로 보완적 조치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사용자가 피고용자를 부당 해고할 경우에 그 근로자가 직장을 떠나도 좋을 정도로 충분한 징벌적 배상을 부과하도록 한다면 고용보호법제는 불필요해진다. 미국은 유럽식 고용보호법제를 수용하는 대신 징벌적 배상제도를 채택하여 근로자들을 부당해고로부터 보호하면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운용하고 있다.
Ⅴ. 금융시장의 상벌기능
현행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문제를 야기하는 부문은 최근의 경제위기에서 드러났듯이 금융시장이다. 원래 금융시장의 기능은 국가경제내의 (민간) 저축을 끌어와서 각종 투자사업의 자금으로 조달하는 것이다. 금융시장이 이상적으로 작동한다면 가계의 저축을 유망한 투자에 연결함으로써 국가경제의 성장기반을 건전하게 구축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금융시장의 오작동은 수시로 경제위기를 불러온다. 사람들의 저축이 최종 수요자에게 이르는 과정은 다양하지만 수요자가 발행한 금융상품을 매개로 금융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자금의 수요자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발행하는 주식이나 채권 등은 대표적인 금융상품이다. 예치금에 대하여 일정한 비율의 이자를 지불하면서 수시로 인출할 수 있도록 한 금융상품이 은행 예금이다. 자금의 공급자인 가계는 자신의 저축으로 안전하면서도 수익률이 높은 금융상품을 구입하려고 한다. 금융상품의 안전성과 수익성은 해당 투자사업의 안전성과 수익성, 그리고 금융상품 발행자의 신뢰도에 직결되어 있다. 모든 가계가 시장에 나온 모든 금융상품의 안전성과 수익성에 대하여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금융시장은 수요공급의 법칙에 따라서 자금을 배분하는데 그 자금배분은 사전적으로 효율적이다. 그런데 일반 가계는 어떠한 투자 사업이 유망한지를 판단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직접 주식이나 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투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문 금융기관으로부터 투자를 알선 받거나 자신의 저축을 전문 금융기관에 위탁하여 투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용하는 은행예금은 예금주가 수익사업 대출을 은행에게 위탁하도록 하는 금융상품이다. 현실의 금융상품 거래는 대부분 전문 금융기관이 중간에서 중개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전문 금융기관은 최종자금수요자가 발행한 금융상품을 보증 추천하여 판매를 알선하기도 하고 위탁받은 자금을 이용하여 스스로 직접 구매하기도 한다. 최종 자금수요자는 아니지만 최종수요자에게 공급할 자금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중간매개자가 스스로 금융상품을 발행하기도 하는데 은행예금이나 사모펀드, 그리고 투자신탁이 좋은 예이다. 최근 문제로 된 파생금융상품도 최종수요자 아닌 중간 금융기관이 발행한 금융상품이다. 금융시장은 대부분의 거래를 전문 금융기관이 중간에서 매개한다는 점에서 실물시장과 크게 다르다. 물론 중간 매개자가 전적으로 의뢰인의 이익만을 위하여 행동한다면 이 차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안전성이 높다고 평가된 사업도 실패할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에 정보비대칭성이 두드러진 금융시장에서 매개자가 도덕적 해이에 휘둘릴 가능성은 매우 높다. 중간에서 금융거래를 매개하는 전문 금융기관이 자금수요자나 공급자의 이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사적 이익만 추구한다면 금융시장의 상벌기능은 크게 왜곡된다. 이에 더하여 은행은 현대 경제거래에서 지불체제의 핵심이다. 거래규모가 커질수록 현금거래는 불가능하고 은행 간 계좌이체를 통한 지불 방식으로 거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은행이 대출을 잘못 관리하여 큰 손실을 입으면 그만큼의 예금을 환불해 줄 수가 없다. 이를 아는 예금주들은 다투어 예금을 인출해간다. 아무도 예금하려하지 않는 이 은행의 계좌에 지불금액을 입금하도록 요구할 거래자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은행은 계좌이체의 지불기능을 감당하지 못한다. 한 은행이 파산하면 이 은행에 예금했다가 큰 재산을 잃은 사람들도 파산한다. 연쇄적 파산이 다른 은행들에게까지 이어지면 국가경제 전체의 지불체제가 마비된다. 국가경제의 지불체제가 와해되면 거래가 불가능해지므로 사회적 분업 자체가 무너진다. 결국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에 대한 시장의 징벌은 사회적 분업체제 자체의 붕괴를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재난적 사태를 막으려면 정부가 공적 자금을 제공해서라도 은행의 부실을 구제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구제금융은 결과적으로 시장의 징벌기능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시장의 자유방임이 효율적 자원배분에 성공하는 까닭은 상벌기능이 엄격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대출 사업이 잘 되었을 경우에는 높은 소득의 포상을 챙기다가 사업을 잘못하여 징벌을 받게 될 때 정부가 나서서 구제해준다면 금융시장의 자유방임이 자금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리 없다. 사업을 실패할 경우에 공적 자금에 의한 구제금융이 불가피함을 알고 있는 은행이 새로운 도덕적 해이에 빠져드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금융시장은 전문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자유방임에 대한 책임 추궁의 상벌기능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한다. 은행이 담당하는 지불체제의 역할 또한 결정적 순간에 시장의 징벌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금융시장의 상벌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실물시장보다 훨씬 더 정교한 제도적 기반을 필요로 한다.
Ⅵ. 이익집단의 정치로비
현실 자본주의의 자유방임과 경쟁은 수많은 인위적 제도 위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민주적 절차를 거친 정치적 결정의 소산이다. 사유재산권을 인정하고 경제활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제도에서부터 아동노동은 금지하고, 소액예금은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등의 세부적 사항에 이르기까지 현실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제도의 내용은 다양하다. 민주적 정치는 국가질서의 근간인 헌법은 물론 소소한 시장제도까지 결정한다. 앞 절에서 제시한 재산권 보호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자기방어능력 강화’ 역시 민주적 절차를 거친 정치적 결정이 있어야 실현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기적 인간들이 이익을 경쟁하는 전선은 주어진 시장제도의 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치활동을 통해서 시장제도 자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꿈으로써 얻는 이익이 훨씬 더 클 수도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키우기 위한 이익집단들의 정치적 경쟁은 시장제도의 내용을 결정하는 ‘시장의 민주적 통제’에 영향을 끼친다. 이익집단들이 벌이는 정치 로비의 성패에 따라서 시장제도는 경제주체들의 재산권을 보호하기도 하고 침탈하기도 한다.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의 경우 아동노동 금지나 노동3권 보장은 다른 주체들의 재산권을 침탈하지는 않으면서 약자들의 재산권을 보호하지만 고용보호법제는 피고용자의 권리를 과도하게 확대하면서 사용자의 재산권을 침탈한다. 징벌적 배상제도를 채택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법제는 가해자의 재산권 보호에 치중하여 결과적으로 피해자 보호를 포기한다. 소액예금의 보호는 소시민의 재산을 보호하자는 좋은 취지의 제도이지만 고금리만 보고 경영상태는 외면하면서 은행을 선택하는 예금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기도 한다. 사회적 의사결정을 민주적 과반수의결로 처리하는 것은 양보할 수 없는 기본원칙이다. 비록 처리결과가 일부의 재산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부작용을 예방 또는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의 현명한 지혜뿐이다. 시민들의 선택이 재산권 보호를 왜곡하는 이익집단의 로비에 내둘리지 않도록 하려면 건강한 교육, 특히 경제교육을 강화하여야 한다.
Ⅶ. 경쟁패배자의 소외
자본주의는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면서 그 대가로 각자의 생활은 스스로 책임지도록 요구한다. 열심히 일하고 시장이 주는 상이나 벌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빌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거부도 나오고 노숙자 같은 빈민도 나온다. 그리고 시장은 빈민의 비참한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각자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유의 가치는 숭고하지만 남의 곤경을 나 몰라라 하는 비정함은 너무 비인간적이다. 하는 일마다 시장의 징벌만 받는 경쟁패배자는 자본주의가 공정하게 운영되더라도 설 땅이 없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면 패배자를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의 결함을 따뜻한 배려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 배려가 시장의 상벌기능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복지는 경쟁패배자를 비롯하여 사회의 보조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제공하는 제도다. 복지혜택은 일하고 얻는 소득과는 다르므로 도움을 받는 사람은 복지수혜자다. 도움의 재원은 다른 사람들의 재산 또는 소득에서 나온다. 자발적 기부 또는 출연으로 재원을 조달한다면 제공하는 사람들은 시혜자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회복지재원은 국가재정자금이므로 납세자들이 부담한다. 납세는 자발적 기부와는 다르므로 납세자들을 시혜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위에서 이미 지적하였지만 담세능력에 따른 납세는 납세자들의 재산권을 합당하게 존중하지 못한다. 재산권 보호가 생명인 자본주의가 조세를 징수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필수적인 공공재는 재산권을 침탈하더라도 반드시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의 기능은 소외계층을 품어 안음으로써 사회적 안정이라고 하는 공공재를 조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납세자는 필요한 공공재를 구입하는 소비자일 뿐 사회복지혜택의 시혜자가 아니다. 남유럽처럼 사회복지가 과다하면 소위 복지병을 유발하여 나라경제를 위기로 몰고 간다. 그러나 사회복지에 인색하면 최근 양극화에 시달리는 미국에서 보듯이 체제의 유지가능성이 도전받는다. 민심의 동향에 가장 민감한 것이 정치권이다. 대선을 앞둔 국내 정치권이 다투어 복지공약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불만 수위가 상당히 높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Ⅷ. 더 나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길
이상적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은 완벽한 재산권 보호를 토대로 하는 자유경쟁이다. 그리고 적절한 사회복지제도로 경쟁의 비정함을 보완해야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을 갖춘다. 현실 자본주의의 문제는 결국 불합리하고 부실한 재산권 보호와 부적절한 사회복지제도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그 해법은 재산권 보호 체제와 사회복지제도의 확충을 내용으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서 나라별로 서로 다른 제도를 조정하여 공통의 글로벌 표준을 도출하는 일도 아울러야 한다. 공정한 경쟁질서의 확립과 외부불경제의 내부화는 더 나은 자본주의가 갖추어야 하는 기본 조건이다. 외부경제의 이익을 희망하는 집단 간에 경쟁을 유발하면 과수원과 양봉업자의 관계에서 보듯이 외부경제도 내부화할 수 있다. 사안별로 경쟁을 유발하는 방안을 강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담세능력에 따른 조세징수는 현재로서는 불가피하다. 누가 조세를 얼마나 부담해야 하는지는 정치적 합의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된 조세징수규칙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재산권 획정이다. 탈세는 이렇게 획정된 재산권을 침탈하는 행위이므로 재산권 보호의 차원에서 단속해야 한다. 정보비대칭성의 문제는 단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도덕적 해이에 휘둘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성과는 시간이 경과하면 차이를 들어내기 마련이다. 시간을 두고 구축되는 평판과 그에 따른 상벌은 장기적으로 도덕적 해이를 퇴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징벌적 배상제도를 도입하여 법치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피해자들의 자기 방어능력을 키워주고, 경제교육을 강화하여 사회의 의사결정이 집단이기주의에 내둘리지 않도록 시민들의 경제이해능력을 제고해야 한다. 금융시장의 도덕적 해이를 막으려면 사기 가능성이 농후한 제품의 유통을 금지하고 좋은 평판을 추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규제 체제를 대폭 정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CDO 상품은 그 기본자산을 철저히 점검하여 우량품만 유통을 허가하고, 장기투자를 보증하는 투자은행은 합자회사 체제로 제한하여 임원이 장기적 책임을 질 수 없는 주식회사 체제를 배제해야 한다. 이상의 조치는 결국 시장 상벌기능을 왜곡하는 재산권 보호 실패를 시정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러나 재산권 보호 실패가 시정된 자본주의 시장도 냉혹한 징벌로 소외시킨 빈곤 계층을 돕지는 못한다. 소외계층을 따뜻하게 배려하여 시장 징벌의 비정함을 보완하는 적정한 사회복지제도가 갖추어져야 진일보한 자본주의다. 더 나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려면 재산권 보호를 합리적으로 강화하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사회복지제도로 보완해야 한다. 글로벌 표준을 도출하는 과정에서도 각국은 서로 자국에 유리한 표준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는 중이다. 세계화의 질서 속에서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으려면 이 경쟁이 최선의 표준을 걸러내야 함은 물론이다.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겠지만 종국적으로는 그렇게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아닐 것인데 감히 그 전망을 함부로 예단하기 두려운 까닭에 본고에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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