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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기업이 대아레저, 대아레저가 경남기업 ● 정치실세 짝사랑…돌아온 건 ‘배신’ ● ‘능력 밖’ 해외자원·부동산 개발이 발목 잡아 ● 30년 전부터 정치 기웃…기업인 신분으로 총선 지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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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아건설은 1990년대 후반부터 평택, 인천, 통영의 액화천연가스(LNG) 기지, 태안화력발전소, 여의도 변전소 등을 건설해 플랜트 분야에도 진출했다. 대아건설 출신의 전직 경남기업 임원 A씨는 “LNG 기지 건설 경험은 업계 1위 삼성물산도 없는 것”이라며 “성 전 회장은 대아건설보다 규모가 작은 건설사의 하청까지 맡는 등 포트폴리오 관리를 잘했다”라고 회고했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8월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자수성가 신화’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경남기업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해외건설사업에 진출하고 건설사 최초로 증권시장에 상장된 회사다. 더욱이 당시 대아건설은 업계 순위가 33위로 30위 경남기업보다 세 단계 아래였다(대한건설협회 시공능력평가).
성 전 회장은 이후 해외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05년부터 베트남 하노이에서 총공사비 1조2000억 원 규모의 고층 복합건축물 ‘랜드마크72’ 개발에 착수하고, 해외자원개발에도 뛰어들었다. 경남기업은 2008년 사업보고서에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니켈)를 비롯해 러시아(석유), 우즈베키스탄(금), 카자흐스탄(가스), 아제르바이잔(석유), 미국 멕시코만(가스) 등 총 6개 해외자원 개발 내역을 게시했는데, 투자 예상액을 모두 합치면 1억4500만 달러(약 1600억 원)에 달했다. 복수의 경남기업 전직 임원은 “결국 이 사업들이 경남의 발목을 잡았다”고 회고했다.
“성 전 회장이 경남 인수로 ‘뜨자’ 여기저기서 브로커들이 몰려와 펌프질을 해댔다. 해외자원개발 경험은커녕, 국내 시행 경험조차 없는데도 무리하게 해외자원 개발과 해외부동산 직접 개발에 나섰다. 암바토비 투자 소식에 주가가 크게 오르자 거기에 고무돼 더 많이 투자하려 했다. 한마디로 헛바람이 들었던 셈이다.”(A씨)
해외사업이 ‘능력 밖’이었던 것은 캐나다 국제상업회의소에 제기된 2000억 원대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경남기업은 암바토비 니켈 광산에 지분 투자를 하면서 대우인터내셔널, 현대엔지니어링과 함께 암바토비 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 건은 당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패키지형 자원개발’(자원개발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 지역 건설사업을 수주)의 성공사례로 각광받기도 했다. 하지만 공사가 잘못돼 발주사가 이들 3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업에 관계한 전직 임원 B씨는 “경남기업은 공사 현장에 계약직 인력만 배치하는 등 관리를 소홀히 해 부실을 자초했다”고 전했다.
이후 경남기업의 사정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금 사정이 계속 악화하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가 회생절차를 밟는다.
“무시할 수 없었다”
성 전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정계 진출을 도모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자민련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했고,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자민련 비례대표 2번을 얻었지만 정당 득표율이 너무 낮아 국회 진출에 실패했다. 정치에 뜻을 품은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2004년 당시 성 전 회장과 함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를 보좌한 정진석 전 국회 사무총장은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를 하고 싶어 했다. 내가 민정당 출입 말진 기자를 할 때부터였으니 30년쯤 전인 것 같다”고 기억했다. 1980년대 중반경이니 성 전 회장이 대아건설을 인수했을 즈음이다. 정 전 사무총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 전 회장은 그때부터 “반은 정치인이고 반은 기업인”이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았을 뿐 사실상 정치적 활동을 해왔다는 이야기다.
“(2004년) 내가 자민련 대변인을 할 때 그 사람은 국회의원 신분이 아니면서 총재 특보단장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2008년 총선 때 성 전 회장은 출마도 하지 않으면서 기업인 신분으로 나와 함께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충남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서산장학회와 충청포럼 등 성 전 회장 중심의 충청권 조직이 사설 조직이긴 하지만 선거 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성 전 회장이 그토록 갈망하던 배지를 단 것은 2012년 총선 때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을 오가던 그는 고향인 충남 서산 · 태안에서 자유선진당(과거 자민련 잔류세력 중심으로 2008년 창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불거졌다. 자유선진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지내고 같은 지역에서 3선을 한 변웅전 전 의원의 공천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갑자기 성 전 회장으로 바뀌는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지역구 대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변 전 의원은 결국 배지를 달지 못하고 정계를 떠났다.
당 안팎에선 ‘성 전 회장이 거액의 공천헌금을 내고 지역구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당 대표는 심대평 전 의원(현 지방자치발전위원장)이었다. 자유선진당은 총선 이후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인제 의원이 당 대표를 맡았다. 국회에 진출해 당 원내대표 자리까지 꿰찬 성 전 회장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과의 합당을 강력히 추진했다.
당 원로인 심 전 대표와 이회창 전 총리 등의 거센 반대에도 이인제 당 대표를 중심으로 그해 11월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이때 성 전 회장의 새누리당 측 협상 파트너가 서병수 원내대표(현 부산시장)다. 성 전 회장이 자살하면서 남긴 메모에 등장한 ‘부산시장’으로 서병수 시장이 지목되는 이유다.
성 전 회장은 이후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이 과정에서도 성 전 회장이 거액의 선거자금을 대선캠프에 제공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200억 원 정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성 전 회장은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선 때 홍문종 새누리당 조직총괄본부장에게 2억 원 정도를 현금으로 줬다.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이) 통합하고 매일 거의 같이 움직이며 뛰고 조직을 관리하니까 해줬다”고 주장했다. 당사자인 홍문종 의원은 강력하게 부인하지만.
4월 9일 오전 9시,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동 경남기업 1층 대강당에서 이성희 법정관리인(전 두산엔진 대표) 취임식이 열렸다. 법원은 이틀 전 경남기업에 대해 회생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이 전 대표를 법정관리인으로 선임했다. 이 전 대표는 취임인사를 마친 후 강당에 모인 200여 명의 임직원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잠시 뒤 같은 장소에서 대아레저산업 법정관리인 취임식이 열렸다. 참석한 50여 명의 임직원도 같은 경남기업 직원들이었다. 법원은 경남기업에 회생절차 개시결정을 한 날 계열사 경남인베스트먼트와 대아레저산업에 대해서도 같은 결정을 내리고 별도의 법정관리인을 정했다. 아무리 지배회사와 계열사 관계라 하더라도 경남기업 직원들이 전혀 다른 법인인 대아레저산업 법정관리인 취임식에 참석한다는 건 의아했다. 취임식 직후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만난 한 조합원의 설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경남기업이 대아레저이고, 대아레저가 곧 경남기업이다. 서류상으로만 다른 회사지 같은 직원들이 경남기업 일도 하고, 대아레저 일도 한다. 아마 잘 이해가 안 갈 거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은 회사라는 뜻으로 들렸다. 좀 더 대화를 이어가려는 순간, 갑자기 노조 사무실 전화기와 노조 간부들의 휴대전화가 거의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TV로 달려가 전원을 켜자 빨간색 자막의 긴급 속보가 떴다. ‘성완종 전 회장, 유서 남기고 잠적’. 다들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앞으로 닥쳐올 불길한 사태를 예감하는 듯했다. 검찰 조사를 한 차례 받고 나온 임희동 노조위원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무겁게 입을 뗀 임 위원장은 성 전 회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 그의 억울함을 대변했다. “그(성 전 회장)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것은 맞는데, 억울한 면도 좀 있다. 현 정부가 이명박 정권의 자원외교를 잡으려고 경남기업을 뒤지는 것 아닌가. 무슨 일인지 몰라도 타깃이 된 건 분명한 것 같다.”
죽은 자의 복수
결국 이날 오후 3시쯤, 성 전 회장은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 인근에서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성완종의 복수’가 시작됐다. “김기춘, 허태열에게 돈을 줬다”는 성완종 전 회장의 폭로(‘경향신문’ 인터뷰)와 정치인 8명의 이름이 적힌 그의 메모가 공개되면서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메모지에는 허태열(전 대통령비서실장) 7억, 유정복(인천시장) 3억, 홍문종(새누리당 의원) 2억, 홍준표(경남지사) 1억, 부산시장 2억, 김기춘(전 대통령비서실장) 10만 달러라고 적혀 있고, 이완구 국무총리와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액수 없이 이름만 쓰여 있었다. 김 전 실장 이름 뒤엔 ‘2006년 9월 26일이라는 날짜도 명기돼 있었다. 경향신문은 며칠 후 이 총리에게 3000만 원을 건넸다는 성 전 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추가로 보도했다. “지난번 (2013년 4월 부여·청양) 재·보궐선거 때 선거사무소에 가서 이 양반한테 3000만 원을 주고 왔다”는 것이다. 현 정권 실세들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은 2012년 대선자금으로까지 확대됐고, 김진태 검찰총장의 지시로 특별수사팀이 꾸려졌다. 총책을 맡은 문무일 특별수사팀장은 “수사 대상과 범위를 한정짓지 않고, 수사 대상으로 나오면 좌고우면 없이 수사하겠다”고 말해 수사가 대선자금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성 전 회장은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더욱이 마지막 가는 길에 현 정권을 향해 이처럼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올 ‘저주’의 화살을 쏜 이유는 뭘까.
경남 인수 후 ‘헛바람’
1951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성 전 회장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떠났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집에 주점을 차린 새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어린 세 동생까지 돌봐야 했다. 결국 서울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 하지만 주인집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 그는 교회에서 더부살이하며 신문 배달, 약국 심부름꾼 등 온갖 잡일을 하며 돈을 모았고, 6년 만에 어머니, 동생들과 살 집을 마련해 귀향했다. 그때가 스물 한두 살 무렵이었다. 성년이 된 그는 날품팔이에서 시작해 화물영업, 화물중개업 등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건설업에 입문한 것은 1975년 스물다섯에 서산토건 주주가 되면서다. 10명의 주주는 각자 맡은 구역에서 공사를 수주하며 독자적으로 일했다. 7년 후 그가 서산토건을 나올 때, 200만 원을 주고 산 주식은 1억6000만 원이 돼 있었다. 그 돈으로 충남지역을 기반으로 둔 대아건설을 인수, 사업 분야를 관급 토목공사 위주에서 민간토목, 주택공사 등으로 확대하며 사세를 키웠다.
대아건설은 1990년대 후반부터 평택, 인천, 통영의 액화천연가스(LNG) 기지, 태안화력발전소, 여의도 변전소 등을 건설해 플랜트 분야에도 진출했다. 대아건설 출신의 전직 경남기업 임원 A씨는 “LNG 기지 건설 경험은 업계 1위 삼성물산도 없는 것”이라며 “성 전 회장은 대아건설보다 규모가 작은 건설사의 하청까지 맡는 등 포트폴리오 관리를 잘했다”라고 회고했다. 성 전 회장은 2003년 8월 경남기업을 인수하면서 ‘자수성가 신화’의 화룡점정을 찍었다. 경남기업은 국내에서 가장 먼저 해외건설사업에 진출하고 건설사 최초로 증권시장에 상장된 회사다. 더욱이 당시 대아건설은 업계 순위가 33위로 30위 경남기업보다 세 단계 아래였다(대한건설협회 시공능력평가). 성 전 회장은 이후 해외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2005년부터 베트남 하노이에서 총공사비 1조2000억 원 규모의 고층 복합건축물 ‘랜드마크72’ 개발에 착수하고, 해외자원개발에도 뛰어들었다. 경남기업은 2008년 사업보고서에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니켈)를 비롯해 러시아(석유), 우즈베키스탄(금), 카자흐스탄(가스), 아제르바이잔(석유), 미국 멕시코만(가스) 등 총 6개 해외자원 개발 내역을 게시했는데, 투자 예상액을 모두 합치면 1억4500만 달러(약 1600억 원)에 달했다. 복수의 경남기업 전직 임원은 “결국 이 사업들이 경남의 발목을 잡았다”고 회고했다. “성 전 회장이 경남 인수로 ‘뜨자’ 여기저기서 브로커들이 몰려와 펌프질을 해댔다. 해외자원개발 경험은커녕, 국내 시행 경험조차 없는데도 무리하게 해외자원 개발과 해외부동산 직접 개발에 나섰다. 암바토비 투자 소식에 주가가 크게 오르자 거기에 고무돼 더 많이 투자하려 했다. 한마디로 헛바람이 들었던 셈이다.”(A씨) 해외사업이 ‘능력 밖’이었던 것은 캐나다 국제상업회의소에 제기된 2000억 원대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경남기업은 암바토비 니켈 광산에 지분 투자를 하면서 대우인터내셔널, 현대엔지니어링과 함께 암바토비 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 건은 당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패키지형 자원개발’(자원개발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그 지역 건설사업을 수주)의 성공사례로 각광받기도 했다. 하지만 공사가 잘못돼 발주사가 이들 3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업에 관계한 전직 임원 B씨는 “경남기업은 공사 현장에 계약직 인력만 배치하는 등 관리를 소홀히 해 부실을 자초했다”고 전했다. 이후 경남기업의 사정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금 사정이 계속 악화하면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다 최근 법정관리에 들어가 회생절차를 밟는다.
“무시할 수 없었다”
성 전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정계 진출을 도모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선 자민련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탈락했고, 2004년 17대 총선 때는 자민련 비례대표 2번을 얻었지만 정당 득표율이 너무 낮아 국회 진출에 실패했다. 정치에 뜻을 품은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2004년 당시 성 전 회장과 함께 김종필(JP) 자민련 총재를 보좌한 정진석 전 국회 사무총장은 “그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를 하고 싶어 했다. 내가 민정당 출입 말진 기자를 할 때부터였으니 30년쯤 전인 것 같다”고 기억했다. 1980년대 중반경이니 성 전 회장이 대아건설을 인수했을 즈음이다. 정 전 사무총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 전 회장은 그때부터 “반은 정치인이고 반은 기업인”이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않았을 뿐 사실상 정치적 활동을 해왔다는 이야기다. “(2004년) 내가 자민련 대변인을 할 때 그 사람은 국회의원 신분이 아니면서 총재 특보단장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2008년 총선 때 성 전 회장은 출마도 하지 않으면서 기업인 신분으로 나와 함께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충남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서산장학회와 충청포럼 등 성 전 회장 중심의 충청권 조직이 사설 조직이긴 하지만 선거 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성 전 회장이 그토록 갈망하던 배지를 단 것은 2012년 총선 때다. 자민련과 한나라당을 오가던 그는 고향인 충남 서산 · 태안에서 자유선진당(과거 자민련 잔류세력 중심으로 2008년 창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당선됐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불거졌다. 자유선진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지내고 같은 지역에서 3선을 한 변웅전 전 의원의 공천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갑자기 성 전 회장으로 바뀌는 과정이 석연치 않았다. 지역구 대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은 변 전 의원은 결국 배지를 달지 못하고 정계를 떠났다. 당 안팎에선 ‘성 전 회장이 거액의 공천헌금을 내고 지역구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당 대표는 심대평 전 의원(현 지방자치발전위원장)이었다. 자유선진당은 총선 이후 선진통일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인제 의원이 당 대표를 맡았다. 국회에 진출해 당 원내대표 자리까지 꿰찬 성 전 회장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새누리당과의 합당을 강력히 추진했다. 당 원로인 심 전 대표와 이회창 전 총리 등의 거센 반대에도 이인제 당 대표를 중심으로 그해 11월 새누리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이때 성 전 회장의 새누리당 측 협상 파트너가 서병수 원내대표(현 부산시장)다. 성 전 회장이 자살하면서 남긴 메모에 등장한 ‘부산시장’으로 서병수 시장이 지목되는 이유다. 성 전 회장은 이후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전력투구했다. 이 과정에서도 성 전 회장이 거액의 선거자금을 대선캠프에 제공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200억 원 정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고 귀띔했다. 성 전 회장은 자살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선 때 홍문종 새누리당 조직총괄본부장에게 2억 원 정도를 현금으로 줬다. (새누리당과 선진통일당이) 통합하고 매일 거의 같이 움직이며 뛰고 조직을 관리하니까 해줬다”고 주장했다. 당사자인 홍문종 의원은 강력하게 부인하지만.
단 1%의 가능성도 없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정치권을 향한) 성 전 회장의 짝사랑인 경우가 많았다”며 “공천에 매번 탈락했다는 점만 봐도 그렇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성 전 회장의 한 측근은 노무현 정부 시절 두 번이나 특별사면 받은 것에 대해 “사업이든 정치든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단 1%의 가능성만 보여도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집요한 분”이라며 “사면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 1%의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성 전 회장은 ‘성완종 리스트’ 메모와 함께 ‘방명록’을 남기고 떠났다. 2004년부터 11년간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의 면담 날짜와 시간, 장소 등이 구체적으로 기록된 방명록이 앞으로 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주목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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