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이승만

이강기 2016. 12. 9. 09:01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이승만

‘외교를 통한 독립’ 추구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원간조선 2016년 11월호

 

⊙ 구한말 고종의 밀사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만나 구국 외교
⊙ 카이로선언의 공로자는 김구-장제스라는 설과 이승만-홉킨스이라는 설이 엇갈려
⊙ 태평양전쟁 때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 요청 …, 한국 독립운동단체의 분열 이유로 거절당해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시절의 이승만.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이자 상하이 임시정부의 초대(初代) 대통령으로 미국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로 보고 외교활동에 진력했다. 이러한 그의 독립외교론은 무장투쟁 노선과 대립했다. 해방 공간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했으나 일부에서는 그에게 분단과 친일파 청산 실패의 책임을 묻는다. 대한민국 1~3대 대통령을 지냈지만 장기집권과 부정선거 등 부정적인 그림자도 따라다닌다. 오늘날까지도 그를 둘러싸고 ‘국부(國父)’와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서구의 물결이 쇄도하고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1895년 4월 단발(斷髮)을 결행하고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이승만은 후에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배재에 갔는데 서재필로부터 영어보다 더 중요한 민주주의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언변과 행동력이 뛰어났던 그는 서재필이 만든 청년단체인 협성회(協成會)에 참가해 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1897년 졸업 후 협성회가 독립협회(獨立協會)로 발전하자 협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과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해 언론인으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의 논조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 한다는 혐의도 받게 됐다. 얼마 안 가 그는 고종퇴위 운동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수감됐다.   
  
  대한제국의 밀사
 
  이승만은 수년 동안의 옥중생활을 하면서 한영사전을 정리하고 동료 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면서 개화 인사들을 교육했다. 1904년 러일전쟁 개전 후에는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예견되자 고종은 미국에 국권 보존을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이 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을 특사(特使)로 천거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했으나 이승만은 고종을 알현하지 않고 미국행(行)에 올랐다. 그는 고종을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고 비판했다. 

 

  
  1905년 1월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딘스모어와 국무장관 존 헤이와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으나, 헤이 장관은 얼마 후 사망했다.
 
  이승만은 호놀룰루 한인 선교부의 존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 조항에 따라 대한제국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루스벨트는 “외교적인 일이므로 문서를 국무부에 공식 절차를 거쳐 제출하면 조선 문제를 포츠머스 회담의 의제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당시 주미공사인 김윤정(金潤晶)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외면당했다. 미국은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조선과 필리핀 교환에 합의한 뒤였기 때문이다. 20여 년 후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 외교적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
 
이승만은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전시중립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밀사 활동에 실패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1907년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마침내 프린스턴 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d)〉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논문은 1776년부터 1872년까지의 국제법상에서의 전시(戰時) 중립을 다룬 것이었다. 이승만의 전공은 국제법, 부전공은 미국 역사와 서양사였다. 1910년 이승만은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하는 윌슨(T. W. Wilson)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5년 반 만에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마치고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 박사가 된 후 귀국한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일제의 압박을 받자, 1912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하와이로 가게 된다. 그는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때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는 박용만 등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윌슨 대통령은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면서 국제연맹 창설을 제의했다. 이승만은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였다. 이승만은 그와의 인연에 기대가 컸으나 당시 일본은 승전국이었던 관계로 한국 문제는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부임 환영식. 오른쪽 두 번째부터 신규식 박은식 안창호 이승만 이동휘 이시영 이동녕 손정도.
  이듬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이 운동이야말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침 3월에 수립된 노령(露領) 임시정부가 그를 외무총장으로 임명하고, 4월에는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 임시정부가 그를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일제는 이승만에 3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6월부터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일본 등의 국가원수들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이어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선언서’를 발표하고,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해서 거둔 의연금을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기도 했다.

 

  
  1919년 9월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했다. 이승만은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그의 외교론과 민주제는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 여운형(呂運亨) 등과 대립했다. 신채호(申采浩)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李完用)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비판했다.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상하이 임정에서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돌아오라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그는 마지못해 1920년 12월 처음으로 상하이에 잠시 건너왔다가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 참석차 미국으로 돌아가 활동했다. 그러자 1925년 3월 임시정부 의정원은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는 이승만을 탄핵, 대통령 직을 박탈했다.
 
  1920년대 후반 들어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다. 임정의 김구(金九)는 고민 끝에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 자금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교민들의 성금 일부를 임시정부에 송금해 주면서 임정과의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다. 1932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 한국 전권대사로, 1933년에는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어 탄핵당한 지 8년 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게 된다. 임정 일각의 반대가 없지 않았지만 그의 외교적 역할도 크다는 이동녕(李東寧), 김구 등의 주장이 반영됐다.   
  
  태평양전쟁과 임시정부 승인 외교
 
  이승만은 임정의 각료 자격으로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한국의 독립외교를 전개했다. 이러던 중 1933년 2월 한 식당에서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나 후에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다.
 
  이승만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기 이전인 1941년 6월,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장차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한 《일본을 벗기다,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를 발간했다. 이 책이 출간될 당시에는 혹평이 쏟아졌다. 6개월 후 12월에 실제로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의 명성도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은 전후(戰後)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정부에 로비를 하기 위해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조직하여 국무부와 접촉하는 한편, 임정과 연락해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공한을 전달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서 주목받던 알저 히스(Alger Hiss)와 면담하고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히스와의 면담은 실수였다. 히스는 후에 소련 첩자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 측에 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왜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인가? 당시 중국에는 임시정부 이외에도 러시아와 연계된 사회주의 노선, 그리고 마오쩌둥의 공산당과의 연합 등 중국과 러시아 여러 방면에서 독립운동이 각자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승만의 요청을 접한 미국은 우선 중국 충칭(重慶) 소재 미국 대사관에 현황 파악과 현지 의견을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미 대사관은 정보가 많은 영국 대사관과 중국 국민당 정부에 문의했다. 영국은 “한국인 간에 상당한 분열이 있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효과적 저항 가능성은 적다”고 답신했다. 당시 영국 외무부의 보고서도 “해외의 한인단체는 그들의 힘을 전적으로 상호 알력에 소모하고 있으며 일본이 물러가면 싸움이 천 배로 증가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중국 정부도 “한국인 간 정치적 분열이 있으며, 반일 행동은 유용하지만 파벌 해결 전에 한국해방 운동의 승인은 불가하다”면서 “중국의 거중조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충칭의 미국대사는 이러한 회신을 본국에 보고하면서 “미국이나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시베리아 거주 한국인 2개 사단이 한국으로 진격해 별도 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고 … 소련의 한반도 점령 우려도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첨가했다.
 
  내부 검토를 마친 미국정부는 이승만에게 “한국인 단체 간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고 해외단체와 본국 대중 간의 관계가 미비하여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다”고 회신했다. 계속된 치열한 항일투쟁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열이 미국과 연합국으로 하여금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카이로선언의 진실은?
 
  전후 한국의 독립문제가 표류하는 가운데 1943년 11월 27일 한국독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카이로선언이 나왔다.
 
  “한국인들의 노예 상태를 유념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한국을 자유로운 독립국가로 수립할 것을 결의한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공동으로 발표한 이 선언은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된 역사적 선언이다. 

 

  
  이 선언이 최근 들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문구가 들어간 것이 누구의 공로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크게 장제스가 주도했다는 의견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작성했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본질은 김구 등 임시정부의 공이냐, 이승만 외교의 덕이냐의 문제로 다투는 것이다.
 
  김구-장제스 설은 1943년 4월 미국과 영국이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 관리하에 두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구 등이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를 찾아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창해 달라고 요청했고, 장제스는 한국 독립을 위해 미국과 영국에 힘껏 싸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승만-홉킨스 설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제기했다는 근거가 없으며, 루스벨트의 전후 식민지 독립 구상에 따라 그의 측근 해리 홉킨스가 독자적으로 작성한 문안이라는 것이다. 장제스는 공식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거론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장제스와 단독 회담한 루스벨트가 처칠에게 ‘그의 목적은 한국의 재점령’이라고 밝힌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해리 홉킨스와 카이로선언과의 관계, 이승만과 홉킨스의 연관성 등은 아직 더 연구해야 할 분야이다. 다만 홉킨스가 독실한 감리교 신자로 이승만도 미국 감리교단에 많은 지원자를 갖고 있었고, 의회에도 감리교 출신의 의원들이 있어 이들과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홉킨스의 연결 개연성은 있다. u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카이로선언에 한국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이 누구의 공로이냐를 주장하기 이전에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을 살펴보아야 그 전모가 파악된다는 점이다.
 
 
  신탁통치는 대륙세력에 대한 ‘안전벨트’
 

카이로회담에 참석한 3거두. 왼쪽부터 장제스, 루스벨트, 처칠. 오른쪽 끝은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

  1941년 8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기 4개월 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총리는 대서양헌장을 통해 피(被)침략국의 민족자결을 명시하고 통일된 경제제도와 국제기구 유엔 창설을 시사하는 전후 국제정치경제 신질서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이 구상에서 식민지는 국제기구가 관리한다는 데에도 합의가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3년 1월 카사블랑카에서 스탈린과 회동하여 대서양헌장에 대한 그의 동의를 받아내려 했다. 이를 눈치챈 스탈린이 불참하자 2개월 후 3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카이로에서 장제스와 먼저 회동해 전후 문제를 논의하고 만주의 중국 반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등에 합의했다. 이 합의는 전쟁과 전후 질서 창출에 주도권을 쥔 미국의 정책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이 회의를 준비한 〈미국 국무부자문위원회 한국보고서〉(1942년 8월)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주로 루스벨트의 세계관과 한국에 대한 인식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의 남하 저지가 1차 목표이고, 일본 통제가 2차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이를 위해 만주는 중국에 반환하고 한국은 관련국이 신탁통치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신탁통치안은 대륙세력에 대한 ‘안전벨트’라고 그 의미까지 부여되어 있다.
 
  이는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필리핀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 접목되면서 한국도 독립시키기 전에 40여 년 정도의 자치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카이로선언문에 나타난 ‘적절한 절차를 밟아서(in due course)’라는 단서와 관련해 이승만은 미국 측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히 밝혀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이 문구가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였다.
 
 
  이승만의 무장투쟁 계획
 
  ‘외교독립론자’로 알려진 이승만은 흔히 무장투쟁을 배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후 이승만은 전후 독립을 위해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연합군과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대일 무장투쟁이 충칭의 임시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일본군과 싸울 한인 전투부대를 창설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했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미군 정보조정국(COI)에 재미 한인들의 독립적인 특수부대를 창설해서 일본 전투에 투입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미군과의 연결은 나중에 그 기구의 중국 책임자가 된 에슨 맥도웰 게일과 알게 되면서 성사되었다. 게일은 이승만이 한국에 있을 때 아주 가까이 지내던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조카였다. 게일을 통해 이승만은 그 기구의 책임자인 도노번과 프레스턴 굿펠로 대령과도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은 1941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열린 여러 차례의 정보조정국 회의에도 직접 참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미국 육군의 전략정보처(OSS)는 ‘독수리계획’이나 ‘냅코(NAPKO)계획’과 같은 특수유격훈련 계획을 마련하고 훈련을 마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진공(進攻)하는 작전을 세웠다. 독수리계획은 중국에 있는 광복군 소수정예를 공수부대처럼 한반도에 침투시키는 것이고, 냅코계획은 미국 하와이의 한인을 한반도와 일본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OSS는 이들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광복군 안에 한미합동지휘부를 세웠다.

 

  
  또한 이승만은 1944년 7월, 미국 체신청에 태극마크가 들어 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해 주도록 교섭해 11월에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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