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명성황후

이강기 2016. 12. 9. 09:42

인물로 본 한국 외교사 - 명성황후

고종의 정치·외교 대리인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전 스위스 대사

월간조선, 2016년 9월호

 

 

⊙ 고종 친정(親政) 후 개화 주도, 청일전쟁 후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추진하다가 시해당해
⊙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 …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릴리어스 언더우드)
⊙ “일본으로서는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밖에는 방책이
    없었다”(고바야카와 히데오)

장철균
1950년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 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라오스 대사·주스위스 대사 / 현 서희외교포럼 대표, 중앙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
《21세기 대한민국 선진화 전략 스위스에서 배운다》 출간
명성황후의 초상. !
종래 명성황후 사진으로 알려진 것들은 신빙성이 떨어져 새로 그린 것이다.
  조선 왕조의 대외관계사에 여성이 등장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예외가 있다면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년)이다. 그는 구한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거친 파고 속에서 고종을 대신해 조선의 정치와 외교의 한 축을 감당했던 여장부였다. 

 

  
  흥선대원군은 1866년 고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가인 여흥 민씨 가문의 민자영(閔玆暎)을 주목한다. 안동김씨 왕실 외척이 정치를 좌우하는 폐단을 경험한 흥선대원군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는 그녀야말로 왕비에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왕비 간택과정은 《동치오년병인삼월가례도감의궤(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민자영은 노론의 거물이었던 민유중의 6대손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이었다. 민치록은 훗날 대를 잇기 위해 11촌 아저씨인 민치구의 아들 민승호(閔升鎬)를 양자로 들였는데, 민승호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친동생이다. 민치록은 딸에게 《소학(小學)》 《효경(孝經)》 등을 가르쳤지만 그녀는 역사를 좋아했다고 한다. 

 

  
  민 왕후는 대원군의 집권에 공을 세웠음에도 소외당한 조대비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 형제, 대원군 시절 남인·북인 세력 등용에 반발하던 노론, 흥선대원군과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던 그의 형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 서원철폐 과정에서 등을 돌리게 된 유학자 세력 등을 포섭해 반(反)대원군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1873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실현됐다. 이후 민 왕후와 대원군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정적(政敵)이 됐다.
 
 
  문호개방과 친청배일(親淸排日) 외교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대원군이 일시 정권을 장악했다. 민 왕후는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청나라 군대의 지원으로 정권을 탈환한 민 왕후와 민영익(閔泳翊) 등 척족(戚族) 세력은 친청사대를 견고히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친일 급진개혁 세력이 일본을 등에 업고 1884년 10월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이번에도 민 왕후는 민영익 등으로 하여금 다시 청군에 원조를 청하도록 했다. 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개입으로 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민 왕후는 일본을 경계하면서 친청사대(親淸事大)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민 왕후는 동학교도들을, 대원군을 추종하면서 조정을 뒤엎으려는 비적으로 ‘동비(東匪)’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특히 흥선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에 주목했다. 전봉준이 1890년부터 운현궁의 식객 노릇을 했고, 이후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폐위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민 왕후는 민영준을 청에 보내 원병을 청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동학의 무리를 내 어찌 왜놈처럼 여기랴만 임오군란과 같은 일을 다시는 참을 수 없다”면서 청병(請兵)을 주저하는 민영준을 나무랐다고 한다.
 
 
  민 왕후, 친러정책으로 전환
 
  청군이 파병되자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빌미로 파병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진주하면서 정부 차원에서 미리 ‘조선보호국화’를 결정했다. 일본군은 고종 부부를 연금한 후 친청(親淸) 노선의 민 왕후가 정치에서 물러나도록 서약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원군을 앞세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의 영향력이 거세졌다. 그러자 1895년 4월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얻어냈던 랴오둥(遼東) 반도를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일본은 이에 굴복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이러한 국제정세 변화를 면밀히 주시하던 민 왕후는 청을 대신해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했다. 친러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균세(均勢)외교로, 소위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이다. 

 

  
  1895년 7월, 민 왕후는 일본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친러내각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해 민씨 척족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친일내각이 추진해 왔던 내정개혁은 취소했다.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훈련대도 해산시키려 했다. 이는 청일전쟁 개전 이래 일본이 추진해 온 조선보호국화 작업을 백지화하는 것이었다.
 
 
  ‘여우사냥’
 
을미사변을 저지른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
  이 시점에서 1894년 조선에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일본공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외상·내상 등을 두루 역임한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함께 당시 일본정계의 거물로 정한론(征韓論)의 선두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민 왕후를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병탄을 실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는 비밀리에 왕비시해 음모를 마련한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내각회의에서는 외교 경험이 전혀 없는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를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결정했다. 

 

  
  조선에 부임한 미우라 공사는 이노우에가 기획한 시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일본공사관 밀실에서는 미우라,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공사관 서기), 오카모토 류스노케(岡本柳之助·공사관부무관 겸 조선 군부 고문), 구스노세 사치히코(楠瀨幸彦·포병중좌) 등이 행동계획을 마련하였다. 작전명은 ‘여우사냥’이다.
 
일본 구시다(櫛田)신사에서 발견된 일본도.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거사 전, 일본은 대원군으로부터 민 왕후 제거와 관련된 문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왕비 사후 대원군이 국왕을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내각에 정사를 맡겨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895년 10월 8일, 미우라는 작전 결행에 들어갔다.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가 이끄는 일본 낭인 30여 명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 앞에 도착했다. 폭도들은 건청궁(乾淸宮)에 난입한 다음 왕후와 용모가 비슷한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결국 민 왕후는 뜰에서 붙잡혀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녹원(鹿園) 숲속으로 옮긴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질렀다.

 

  
  이 충격적인 왕후 시해범은 전 조선 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와 스즈키, 와타나베 등이었다. 왕후를 시해한 지 꼭 100년째가 되는 지난 1995년에 당시에 사용되었던 일본도가 규슈(九州) 지방 구시다(櫛田)신사에서 발견되었다. 이 절 금고 속에 보존되어 있는 이 칼의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단숨에 전광과 같이 늙은 여우를 베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진실 밝힌 일본인 보고서도 있어
 
  일본은 이 사건을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에 의한 우발적인 것으로 날조하려 했다. 범죄자 처벌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이 들끓자 범인으로 지목된 미우라 외 56명의 용의자를 일본으로 소환해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수감했다. 히로시마 재판부는 “피의자들이 광화문을 통해 왕성 안으로 들어가 바로 건청궁까지 이른 등의 사실은 인정되나 이들 중에 범죄를 실행한 자가 있음을 인정할 증거는 확실하지 않다”며 시해범들을 모두 석방했다. 

 

  
  이 만행은 미국 대리공사 알렌(H. N. Allen), 영국 영사 힐리어(Hilie), 러시아 베베르 등 주한 외교관들의 보고와 《뉴욕헤럴드》 특파원 코커릴(Colonel Cookerill) 등에 의해 국제사회에 알려졌다. 1895년 10월 31일 자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은 〈일본이 깡패들이 흔히 저지른 하찮은 소란으로 의미를 축소하려는 것은 일본인들의 잔꾀〉라고 보도했다.
 
  일본인이 작성한 보고서 중에서도 왕비 시해를 입증하는 것들이 있다. 1895년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보고서는 일본인이 작성한 보고서로는 이례적으로 사건 주범을 일본인이라고 명시했다. 조선 정부 내부(內部) 고문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는 일본 법제국 장관에게 직접 보고한 보고서에서 사건의 원인에서부터 실행자, 사후대책까지 충실히 기록하면서 미우라 공사의 책임과 처벌 필요성을 암시했다.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朴鍾涍) 교수는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Karl I. Waeber) 조선공사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에게 보낸 보고서를 찾아냈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 J. 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이 첨부되어 있다. 니콜라이2세는 베베르의 보고서를 직접 읽은 뒤 표지에 자필로 ‘정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즉각 한반도에 가까운 아무르주(州) 주둔군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다고 한다.
 
 
  남은 의혹들
 
러시아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0일 자에 실린 명성황후 스케치 사진.
  2013년에는 독일과 영국에서 민 왕후가 을미사변 이후에도 비밀리에 생존했으며 사건 현장을 탈출했다는 내용이 담긴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독일 외교관 리돌린이 1896년 2월 6일 작성해 독일제국 총리에게 보낸 이 보고서에는 〈왕비가 살아 있고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어느 조선인으로부터 왕비의 공사관 피신을 비밀리에 요청받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는 1986년 2월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에게 보낸 문서에서 〈왕은 여전히 왕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를 발견해 공개한 정상수 교수는 “독일과 영국 등 당시 조선과 관계를 맺었던 나라들의 외교문서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사료의 진실성을 검증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 외교문서들이 정설을 뒤집을 만한 반증자료는 아니라고 보는 주장이 많다. 

 

  민 왕후의 사진과 초상화에 대한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광복 이후 국사교과서에 실렸던 왕후 사진의 주인공이 ‘궁녀’라는 논란이 일어 2000년대 초반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학계에서는 명성황후 사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명성황후의 사진이 부재한 이유를 그녀가 생전에 흥선대원군 추종 세력에 의해 친척들이 암살당하면서 노출기피증과 대인기피증, 암살공포증이 심해져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만나지도 않았고 초상화나 사진을 일절 찍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추측한다.
 
  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은 최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행된 일간지 《노보예브레먀》 1895년 10월 21일 자에 실린 민 왕후로 추정되는 세밀화를 공개해 관심을 끈 바 있다. 

 

  
  
  민 왕후에 대한 엇갈린 평가
 
민 왕후를 호평한 릴리어스 언더우드.
  민 왕후에 대해서는 긍정·부정적 평가가 교차한다. 그녀는 정치적으로는 절대왕권을 유지하면서 서양 문명을 절충하는 정책노선을 취했다. 때문에 급진개혁파로부터는 개혁이 미진하다고, 척사파로부터는 문호개방을 추진한다고 비판받았다. 

 

  
  비판의 다른 이유는 민씨 일족이 당시 요직을 독차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80년대 중앙과 지방 관직에 진출한 민씨 친족은 260여 명에 이르렀다. 요직에 오른 일부 민씨가 전횡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왕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이 도마 위에 올랐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과 왕후가 원자(元子)가 잘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내 국고를 탕진했다고 비판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內需司·왕의 사유재산을 관리하던 관청)만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다. 권력유지를 위해 외세를 이용한 결과,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청과 일본을 끌어들여 이 땅을 그들의 대리 전쟁터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외국인이 본 민 왕후는 어떤가? 명성황후의 어의였던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어스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는 《조선견문록(Old Korea)》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우아하고 근엄하다. … 순수하면서도 뛰어난 기지와 매력을 지닌 분으로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에도 완벽한 귀부인이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 일본을 반대했고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을 발간한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도 유사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 외교관들은 그녀를 ‘여우’라고 불렀다. 《한성신보》 기자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는 훗날 왕후가 시해된 후 “조선의 정치 활동가 중에도 그 지략과 수완이 민후의 위에 가는 자가 없었으니, 민후는 실로 당대 무쌍의 뛰어난 인물이었다”면서 “일본으로서는 대표적 인물인 민후를 제거하여 조선과 러시아가 결탁할 여지를 없애는 것밖에는 방책이 없었다”고 했다.
 
 
  고종의 정치·외교적 대리인
 
  민 왕후의 총명함과 자질의 비상함은 그녀의 비판세력들도 인정했다.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오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서재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김옥균의 지략은 역사적인 것이었소. 박영효와 홍영식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재사들이었지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기지와 계략을 모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왕비 앞에 나가면 으레 그녀에게 기선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왕비는 실로 당할 길 없는 지략과 재략을 지닌 걸물이었소.”
 
  고종의 왕후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외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종의 입장에서는 왕비가 자신의 친정을 위한 정치적 후원자였고 외교의 일급 조언자였다. 고종이 직접 지은 명성황후 행록(行錄)을 보면 이런 내용이 보인다.
 
  〈경서와 역사를 널리 알고 옛 규례에 익숙하여 나를 도와주고 안을 다스리는 데 유익한 것이 많았다. 사변에 대처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와 임시변통을 잘 배합했다. … 일찍이 왕비가 말한 것마다 모두 들어맞았다.〉
 
  민 왕후는 안으로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의 생사를 건 권력투쟁에 함몰되면서 나라의 이익보다는 왕권과 가족의 수호를 위해 살았다. 밖으로는 일제의 조선 병탄을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와 러시아 등 외세를 이용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했다. 그녀의 삶은 구한말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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