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윤여정

이강기 2016. 12. 10. 09:02

"먹고살려고 俳優 하다 여기까지… 나, 대단한 사람 아니에요"

 

입력 : 2016.12.10 03:00

[송혜진 기자의 느낌] 데뷔 50주년 '제2의 전성기'…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받은 윤여정
"난 꼰대지만 젊은 사람 말 귀담아들어… 결정은 내가 해도"

“내가 신파가 잘 안 되잖아요. 오열 못 하고 소리 못 질러. 메소드 연기, 신들린 연기…, 그런 것 잘 못하겠어요(웃음).” 윤여정이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툭 한마디 한다. 뻔한 신파, 뻔한 표정이 이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알레그레토의 경쾌한 말투, 쇳소리가 섞인 음성…. 윤여정은 항상 남달랐고 신선했다. 69세인 지금까지도.
“내가 신파가 잘 안 되잖아요. 오열 못 하고 소리 못 질러. 메소드 연기, 신들린 연기…, 그런 것 잘 못하겠어요(웃음).” 윤여정이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툭 한마디 한다. 뻔한 신파, 뻔한 표정이 이 배우에겐 어울리지 않아서일 것이다. 알레그레토의 경쾌한 말투, 쇳소리가 섞인 음성…. 윤여정은 항상 남달랐고 신선했다. 69세인 지금까지도. /이진한 기자

 

 

"인터뷰를 꺼리는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윤여정(69)은 "나를 포장하는 게 싫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냥 있는 그대로만 써줬으면 좋겠는데, 자꾸 내 말에 의미를 부여하려고들 그래요. 나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니거든요. 그냥 지금껏 먹고살려고 일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그게 다예요. 별 볼일 없어요(웃음)."

스스로 별 볼일 없다는 이 배우를 7일 서울 사당동 한 극장에서 만났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은 그는 이날 이 극장에서 '2016년 올해의 여성영화인상'을 받았다. 지난달 호주 브리즈번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에선 심사위원 대상도 받았다. 올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 '계춘할망'에서 보여준 연기 덕분이다.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네자 윤여정은 이번엔 눈을 찡긋하며 이렇게 받아쳤다. "고마워요. 근데 청룡영화상은 미끄러졌지만요!"

뻔한 감탄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1966년 TBC 공채 3기 탤런트로 데뷔한 이래로 윤여정은 늘 살점 남김 없이 발라낸 생선가시처럼 군더더기 없는 모습이었다. 까슬까슬한 목소리, 예민해 보이는 길고도 가는 목선…. 이날 들려준 소감도 역시나 간결했다. "늙어서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생각 안하고 살았다. 그런데 여성영화인상을 받고 보니 '아, 내가 여자였구나' 싶다. 1984년 복귀한 이래로는 그저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다. 마치 옆을 돌아보지 않는 경주마처럼…." 시상식 열리기 세 시간 전쯤 윤여정과 마주 앉았다. 그는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영 낯설고 어색하다"고 했다.

포장지는 싫다, 알맹이로 산다

―포장하려는 게 아니라, 배우로서 잘 나가는 건 사실 아닌가요. 70세를 앞두고 다시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 않으십니까.

"무슨 전성기요? 어쩌다가 올해 그냥 영화를 두 편 연달아 찍었고, 그게 어쩌다 보니 다 주연이었고요. 내가 나이가 있으니 다들 예우 차원에서 고생했다고 상을 주는 거죠. 의미 부여를 하기도 좀 그래요. 맞아, 공정하기로 유명한 청룡영화상은 못 받았잖아요(웃음)."

―아쉬우셨나요.

"아쉬웠죠. 꼭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요. 그래도 나처럼 나이 먹은 배우가 그런 자리에 가서 후배들을 위해 박수쳐 주는 게 의미 있지 않냐고 이재용 감독이 그럽디다. 그 말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서 호주에서 시상식 끝나자마자 홍콩으로 경유하는 비행기를 타고 꾸역꾸역 들어와서 청룡영화제 시상식에 갔어요. 내가 참 젊은 사람들 말을 쓸데없이 잘 들어(웃음). 그런데 정말 이 나이에 그 일정을 소화하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어찌나 힘들던지 죽는 줄 알았어요. 영화제 끝나고 이틀을 앓았죠. 무리하느라 병나서."

―1971년에 영화 '화녀'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셨죠.

"맞아요. 45년 전이죠. 그러고 보니 아쉬운 게 하나 있긴 하네요. 내가 그때 청룡상 받을 때 소감이랍시고 '엄마, 나 상 탔어!' 이랬어요. 어른들이 무슨 수상 소감이 그 모양이냐고 야단쳤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엄마가 93세예요. 몸이 아파서 실버타운에 계세요. 내가 이번에 청룡상 받았다면 테레비 보고 있을 늙은 엄마에게 그 말 한 번 다시 해 드리고 싶었어요. '엄마, 나 상 탔어!' 그거요.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말을 TV 생중계로 듣게 해 드릴 기회를 놓친 거, 그건 좀 애석하죠(웃음)."

데뷔 초 윤여정의 모습.
데뷔 초 윤여정의 모습.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는걸요.

"글쎄,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보는 게 좋아요. 나는 나이 먹었고, 우리 엄마도 85세 이후로는 예전에 내가 알던 그 엄마가 아니고…. 그건 엄연한 사실이죠. 이 나이에 내가 무언가를 더 이뤄보겠다, 뭔가를 더 해내보겠다, 그것도 욕심이고요.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좋아요. 확실한 건 하나인 것 같아요. 인생은 한 번뿐이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 그거죠, 뭐!"

"이상한 아이가 탤런트가 됐어"

윤여정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양호 선생님이었다. 윤여정이 열살 됐을 무렵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 세 딸을 키워낸 어머니는 윤여정이 본인의 꿈이었던 의사가 되어주길 바랐다고 했다. "무모하죠…. 당신 꿈을 자식을 통해서 이루려고 하는 거니까요. 아쉽게도 내가 그 정도로 공부를 잘하진 못했어요(웃음)."

19세에 한양대 국문과에 입학하고 등록금 벌려고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TBC '어린이 열차'라는 프로그램에서 사회를 보는 김동건 아나운서에게 선물을 건네주는 일이었다. PD들이 윤여정을 눈여겨보다가 "너 탤런트 시험 한번 쳐봐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제겐 탤런트가 이순재 선생님처럼 서울대 나온 인텔리들이 하는 일처럼 보였어요. 탤런트가 되면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시험을 쳐봤죠(웃음)."

―그런데 덜컥 붙으셨군요. 어머니가 좋아하셨나요.

"아뇨(웃음). 공부해야 되는데 쓸데없는 짓 한다고 싫어하셨죠. 엄마가 이런 나를 자랑스러워하게 된 건 내가 예순 살도 넘어서였던 것 같아요. 모시고 살 때였는데, 손님 한 분이 엄마에게 '따님들이 다 박사인데 큰따님만 박사가 아니네요'라고 말하는 게 들려요. 엄마가 그런데 그 말에 '우리 큰딸은 연기 박사잖아요!'라고 대꾸하더라고요. 그 말 듣고 혼자 웃었죠."

―데뷔했을 때 고(故) 이낙훈씨가 '이상한 아이가 들어왔다'고 그랬다죠.

"어느 날인가 내가 유리창이 큰 복도 앞에 서 있었는데, 신성일 선생님이랑 이낙훈 선생님이 창 너머에서 나를 가리키면서 '쟤야, 쟤!' 하는 게 들리더라고요. 이 선생님이 '이상한 아이가 왔어' 하고 웃는 것도 들리고요. 내가 그때도 전형적으로 예쁘장한 여배우는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이낙훈 선생님이 그런 나를 유난히 더 흥미롭게 봐줬던 거겠죠."

―1969년 MBC 드라마 ‘장희빈’에서 장희빈 연기를 하면서 엄청 인기를 끌었고요.

“내가 그때 음료수 ‘오란씨’ 첫 모델이었는데 다음 해에 바로 잘렸어요. 벽에 붙은 내 얼굴 사진만 보면 사람들이 ‘나쁜 년’ ‘밉다’면서 눈동자에 구멍을 뽕뽕 뚫어놨거든요(웃음). 방송국으로 ‘저 나쁜 년 잡으라’고 남자가 뛰어 들어와서 돌을 던지질 않나. 그때 숙종 역할 했던 박근형씨가 그 사람 말려주고 그랬어요(웃음).”

1971년 영화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왼쪽에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무룡이 섰다
1971년 영화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왼쪽에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무룡이 섰다. /윤여정 제공

 

 

1971년 고(故) 김기영 감독은 21세 배우 윤여정을 영화 ‘화녀’와 ‘충녀’에 연달아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윤여정은 이 두 편의 영화에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악녀(惡女)를 연기했다. 촬영은 악몽에 가까웠다. 맨손으로 생쥐를 잡거나 계단 위에서 구르고, 물고문을 당하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윤여정은 “‘화녀’ 찍고 나서는, 앞으로 김기영 감독과 골목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하고 도망가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런데 또 ‘충녀’를 찍었죠.

“김기영 감독이 워낙 쫓아다녔으니까요. 으슥한 골목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면서 ‘미스 윤, 나야’ 이러질 않나(웃음). 이길 수가 없었죠. 그땐 정말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늘 속으로 욕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알게 됐죠. 내가 일생껏 만난 남자 중에서 그분이 가장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는 걸요.”

―왜 그렇게 윤여정이라는 배우에 집착했을까요.

“몰라. 내가 감독님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안다고 그랬어요. 나는 ‘쳇, 웃겨’ 그랬고(웃음). 어떤 날은 이래요. ‘남들은 미스 윤이 다 발랄하다고 그러는데 내 눈엔 청승맞아 보여. 그래서 미스 윤을 뽑았어.’ 그때도 속으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했는데, 나중에 마흔 넘어서인가 내가 나온 방송을 보고 있는데 어떤 장면에서 정말 내 얼굴이 청승맞아 보이는 거예요. 그때 속으로 생각했죠. ‘그분이 내가 못 보는 걸 보셨구나’ 하고요.”

―지금 김기영 감독을 다시 만난다면 뭐라고 할 것 같으신가요.

“미안하다고요. 그땐 여관에서 자기 싫고 밤새기 싫어서 도망가고 화장품 케이스 내던지면서 못 찍는다고 그랬는데, 죄송하다고요. 그리고 제가 지금껏 영화를 하는 이유는, 당신이 그렇게 찍자고 했던 영화를 내가 계속 안 찍었던 것, 거기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고요…. 어머, 근데 뭐야.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몰라. 내가 어떻게 김기영 감독을 다시 만나겠어, 응?”

눈물도 후회도 없이

배우 윤여정은 24세가 되던 해에 결혼하고 돌연 은퇴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두 아들을 낳고 13년을 살았다. 그리고 1984년 서울로 돌아왔다. 결혼 생활이 끝나가고 있음을 예감할 무렵이었다. 생계를 위해서라도 연기를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복귀가 쉽지만은 않았겠죠.

“처참했죠. 그땐 이혼한 여자가 TV에 나오기 어려웠으니까요. 미국으로 다시 갈까 고민 많이 했어요. 급하면 돈 계산을 하게 되잖아요. ‘미국엔 아직 집이 있고, 두 아들은 미국 시민이니까 고등학교까진 공립학교를 공짜로 보낼 수 있는데, 먹고사는 건 어쩐다…. 나는 타이프도 칠 줄 모르고, 수퍼마켓 계산원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그 일을 하면 시간당 2달러75센트 버는데…’ 했던 거죠. 답이 안 나왔어요.”

영화‘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영화‘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 /조선일보DB

 

 

윤여정을 받아준 건 단막극인 MBC 베스트셀러 극장 ‘고깔’이었다. 그 이후로 윤여정은 단역·조역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대로 연기했다. 김수현 작가와의 만남도 다시 시작됐다. ‘사랑이 뭐길래’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같은 작품을 연달아 찍었다. ‘김수현 작가가 윤여정을 편애한다’는 뒷말 듣기 싫어 이를 악물고 혼자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김수현 작가 드라마 보면 등장인물들이 수저 놓으면서 대사해 보고, 다리미질 하면서 대사해 보고 그러잖아요. 대본만 달달 외우면 나중에 실제 녹화 들어갈 때 정작 동작이랑 엉키면서 대사를 까먹게 돼요. 그렇게 헤매는 거 보여주기 싫어서 혼자 집에서 수저 놓으면서 대사 외우고, 다리미질하면서 대사 외우고 그랬죠. 그런 시간을 통해 연기를 다시 익힌 것 같아요.”

―연기할 때 아이들은 누가 봐줬습니까.

“도우미 쓰고 그랬죠. 우리 (아이들과) 셋이 뜨거운 눈물 많이 흘렸어요. 미국에선 내 손에서 자랐던 아이들이 갑자기 한국에 왔지, 엄마·아빠는 이혼했지…. 우리 애들이 그래서 너무 빨리 늙었어요. 철이 너무 빨리 든 거죠. 한번은 일산에서 촬영하고 밤 10시 반인가 들어왔는데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둘째가 뭘 찾아 먹지도 못하고 라면도 끓일 줄 몰라 그때까지 쫄쫄 굶고 있더라고요. 그런 걸 보면 피눈물났죠.” 윤여정 눈가가 순간 붉어졌다.

―재혼 생각을 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전혀. 한번은 김혜자 언니가 제게 ‘너 외롭지 않니?’ 하고 물어요. ‘응. 나는 외로운 게 뭔지 모르겠어’ 했죠. 언니가 제게 ‘너 안됐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말 그랬어요. 등 따시고 배불러야 외로움도 아는 거예요. 나는 정말 절박하고 급했어요.”

―그렇게 절박해서 연기를 잘했을 수도 있었을까요.

“맞아요. 절박하지 않았다면, 여유롭게 작품 골라 가면서 연기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못 했을 거예요. 내가 연기를 얼마나 못하는지, 얼마나 더 배워야 하는지도 절박하니까 알겠더라고요. 한번은 후배 하나가 촬영하다가 내게 그래요. ‘언니, 이런 역할 할 땐 그렇게 깨작거리는 거 아냐. 팍팍 먹어.’ 후배에게 연기 코치 받는게 굴욕적이었죠. 그래도 울 수는 없었어요. 이걸 이겨내고 작품 찍어야 돈을 버니까.”

―목소리 때문에 에피소드도 많았다죠.

“1984년에 복귀했을 때 (탤런트) 박원숙이 ‘저게 무슨 목소리야!’ 그래요. 어떤 후배는 또 내 목소리 듣고 ‘수챗구멍에 물 내려가는 소리 같다’고 그랬대. 첨부터 목소리가 이랬던 건 아니었는데, 미국 공기 맑은 시골에 오래 살다가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하니까 목소리가 안 나오기 시작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화녀’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윤여정. 왼쪽에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최무룡이 섰다(왼쪽). 영화‘죽여주는 여자’의 한 장면(가운데). 윤여정의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톱스타들. 이서진·정유미·전도연·김고은·김혜수·강동원·김수철·박해일·최화정이 나란히 섰다
윤여정의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톱스타들. 이서진·정유미·전도연·김고은·김혜수·강동원·김수철·박해일·최화정이 나란히 섰다.

 

―그렇게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에게 이젠 칭찬해줘도 되지 않을까요.

“예순 넘기고 아들들 다 대학 보내고 독립시켰을 때, 그때 스스로에게 그랬어요. ‘너 애썼다, 고생했다. 이젠 사치 하나쯤 해도 되겠다.’ 그 사치라는 게 ‘그동안은 들어오는 역할 안 가리고 다 했으니, 앞으로는 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때 이후로는 그렇게 살려고 해요. 하고 싶은 감독하고 작가하고만 일하고, 하기 싫은 건 억지로 안 하고. 그래서 요즘 내 별명이 ‘안 해 윤여정’이에요. ‘만해 한용운’이 아니고.”

남의 말 참 잘 듣는 꼰대

며칠 전 SNS엔 윤여정의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최화정·김혜수·전도연·김고은·정유미·이서진·박해일·강동원 같은 배우가 모여 파티를 여는 모습이 올라와 화제를 모았다. 윤여정에게 이 얘기를 꺼내자 그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네, 뭐 후배들이 고맙죠.”

―주위에 항상 톱 배우나 젊은 감독이 많죠.

“조사해봤어요(웃음)? 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냥 내가 젊은 사람들과 노는 걸 좋아해요. 같이 놀면서 배울 게 많은 젊은 사람들 있잖아요. 이재용 감독, 임상수 감독…, 그런 사람들. 내게 ‘예쁘십니다’ 같은 소리 안 하고 솔직하게 있는 대로 다 말하는 사람들요.”

―뭐라고들 솔직하게 말하나요.

“이재용 감독은 내게 ‘그 피부로 TV 나오는 게 용하다’고 해요. 내가 종종 ‘대학 중퇴했다’고 말하면 임상수 감독은 ‘중퇴가 어딨어요? 고졸이지! 그게 학력 위조예요.’ 라고 하고요(웃음).”

―‘계춘할망’ 찍게 된 것도 그래서라죠. ‘윤여정에겐 이제 도회적 이미지 같은 거 없다’는 제작진 말에 넘어가서요.

“사실 나는 해녀가 내게 안 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도회적인 이미지도 있고 해서 안 어울릴 것 같다’고 했더니 대뜸 ‘선생님, 이제 도회적 이미지는 다 소진되셨습니다’ 이러더라고요? ‘어머, 재미있는 젊은이네’ 싶어서 한 번 만났죠. 그러다가 계약한 거고요.”

―보통은 그런 말 들으면 싫어하지 않나요.

“나는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걸 좋아해요. 이만큼 나이 먹었으니 이제 나도 꼰대죠. 그래도 나는 내가 온전치 않은 사람인 걸 알거든요. 그러니 남의 말을 들어봐야죠. 결정은 내가 해도, 젊은 사람들 말 일단 들어보고 결론을 내려야죠.”

윤여정은 앞에 놓인 와인 마지막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러고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인터뷰를 내가 두 시간이나 했어요. 이건 기록이야, 기록! 내겐 이제 뭐가 남는 거죠?” “멋진 기사를 쓰겠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멋진 거 싫어요. 있는 그대로 써주세요. 있는 그대로.” 물론이었다. 포장할 필요가 없는 인터뷰 상대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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