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원래 이 배를 청나라의 이홍장에게 팔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홍장의 주머니가 텅텅 비는 바람에 결국 일본이 사가고 말았다. 이홍장의 주머니가 비었을 뿐 중국에는 돈이 있었다. 그런데 1888년 서태후(西太后)는 해군 군비로 책정된 500만 냥의 백은(白銀)을 청의원 중건에 쓰고 말았다.
청의원은 의화단의 난 때 영불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린 정원이었다. 서태후는 이 청의원을 고친 뒤 이름도 ‘이화원’으로 바꾸고 자신의 60번째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토목공사에 다시 3000만 냥을 쏟아부었다. 이 역시 해군의 군비 확장을 위해 마련한 돈이었다. 청의 호부(戶部)도 맞장구를 쳤다.
“황태후의 만수무강을 위해 해군에서 군함을 도입하는 일을 2년 동안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明治) 천황이 앞장서서 30만 엔을 모금했다. 천황 스스로 씀씀이를 줄였고 해군이 전투함을 건조하는 것을 적극 지원하라고 궁내성(宮內省)에 명했다.
청일전쟁의 교훈
문무백관에게는 월급의 10분의 1을 내놓아 해군 발전기금으로 쓰도록 했다. 그 결과 영국 암스트롱 조선소가 만든 순양함이 일본 차지가 됐다. 1894년 중국에서 ‘갑오해전(甲午海戰)’이라 불리는 청일전쟁이 벌어졌을 때 청나라 북양함대를 박살 낸 일본의 기함(旗艦) 요시노호(吉野號)가 그 순양함이다. 한쪽은 무기를 갈고 말을 먹이며 적을 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마치 잘 벼른 한 자루의 날카로운 칼과 같았다. 다른 한쪽은 교만하고 건방진 데다 감각마저 흐려져 구멍이 마구 뚫린 품질 낮은 방패 같았으니 이 전쟁의 승패는 일찌감치 정해져 있었다고 책의 저자 가오훙레이는 쓰고 있다.
전쟁이 시작됐지만 서태후 이하 관리들은 경극(京劇)을 구경하느라 넋을 놓고 있었다. 전쟁에서 진 뒤 청은 일본에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대만과 펑후도(澎湖島)를 내주고 배상금만 2억3000만 냥의 백은이었다. 일본인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얻은 배상금은 청 조정의 3년 치 재정수입과 맞먹었다.
그것은 일본의 연간 국내 총생산의 네 배에 달하는 수치였으며 청이 보유한 북양함정 일곱 척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청의 배상금을 일본 엔화로 바꾸면 3억6450만 엔이었다. 일본은 갑오해전의 군비 2억47만 엔을 충당하고도 무려 1억6403엔을 전쟁 한번으로 벌어들인 셈이 됐다.
일본은 전비(戰費)를 제외한 이익금의 절반을 다시 군비 확충에 썼다. 일본은 단숨에 아시아 제일의 군사강국이 됐다. 또한 7260만 엔을 태환(兌換) 준비금으로 삼아 은본위에서 금본위로 화폐개혁을 완성해 세계 경제체제에 진입했다. 바야흐로 일본은 아시아 제일의 경제강국이 됐다.
중국인이 공부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고 말하던 시절에 일본은 배상금 가운데 1000만 엔을 교육기금으로 조성해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중국이 일본처럼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한 것은 백 년이 흐른 뒤였다. 더구나 일본은 1200만 엔을 대만 통치비용으로 썼다. 지금 김정은은 이 사례를 공부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은의 쾌재
북한 김정은이 마침내 대륙간탄도탄(ICBM)을 완성했다. 이로써 북한은 스커드(사거리 500km)-노동(사거리 1300km)-대포동 1호(사거리 3000km)-대포동 2호(사거리 1만km)라는 풀세트를 보유하게 됐다. 스커드는 한반도, 노동은 일본, 대포동은 미국 서부를 사정권으로 한다.
김정은 정권은 이미 원자폭탄을 보유하고 있다. 이 핵을 소형 탄두화(彈頭化)해 미사일에 장착하면 핵미사일이 되고 이것을 잠수함에 장착하면 SLBM, 즉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이 되는 것이다. 이제 북한은 마음만 먹으면 청와대나 일본 도쿄의 황궁(皇宮)에 불벼락을 내릴 수 있다.
그러는 사이 대한민국은 미사일 방어망을 확충하기는커녕 해제하고 있다. 국내에 도입된 사드(THAAD) 배치를 환경영향평가를 한다며 연기시키고 있고 사드 포대에는 주민들이 군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주민들을 해산시켜야 할 경찰은 정권의 눈치만 보며 머뭇거리고 있다.
사드 같은 군사력보다 더 빨리 무너져 내리는 것이 국민들의 안보의식이다. 정권은 핵미사일을 손아귀에 쥔 북을 향해 무작정 대화를 외치고 있다. 미국에 가서 막대한 대미 투자비용을 지출하고 얻은 것이라곤 북한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인정받은 것이었는데 그 주도권이라는 게 허망하다.
독일에 가서는 대통령의 부인이 1995년 죽은 작곡가 윤이상 묘소를 참배하고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 통영에서 가져간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윤 선생이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 원래 식물은 병충해가 같이 들어올 수 있어 통관이 굉장히 힘든데 다행히 검역에 통과해 ‘윤 선생님과 저와 뭔가 마음이 맞나’ 하면서 심었다. 선생의 마음도 풀리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뜬금없는 김정숙씨의 처신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은 뒤 풀려난 인물로 아내 이수자(90)와 함께 수십 차례 방북(訪北)하고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력사상 최대의 령도자’ ‘주석님의 뜻을 더욱 칭송’이라는 등의 표현을 쓰는 등 친북행위를 해온 인물이다.
윤이상은 1984년 평양에 북한의 해외문화공작조직인 ‘윤이상 음악연구소’를 설립했고 김일성의 75회 생일을 기념해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라는 곡을 바쳤으며 평양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음악당도 있다. 한마디로 조국 대한민국보다 북한 체제에 더 열광했던 인물인 것이다.
북한은 1992년 윤씨를 모델로 해외 망명, 친북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민족과 운명〉을 만들었다. 조선로동당 출판사가 2000년 간행한 김일성 교시집 《재(在) 서독교포 윤이상 일행과 한 담화》 등에는 김일성이 윤씨를 ‘애국지사’로 격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윤이상이 재독 간호사였던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 오길남씨에게 가족 월북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씨 가족은 1985년 월북했는데, 오씨 혼자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탈북했다. 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신씨와 두 딸은 함경남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
이후 북한 당국은 2012년 신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서한으로 유엔에 통보했다. 윤씨 아내 이수자는 독일 시민권자로 평양 교외의 집을 김일성에게 선물 받았다. 1999년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 방명록에 ‘수령님을 끝없이 흠모하며 수령님 영전에 큰절을 올립니다’라고 썼다.
이수자는 2011년엔 김정일이 사망하자 딸과 함께 평양에 조문을 하러 갔다. 이씨는 2006년 한 신문 인터뷰에서 “선생님(윤이상)이 한 번은 저한테 ‘수령님께서 꼭 형님처럼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는 말도 했다. 그런 그를 대통령의 아내가 조국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인물이라 평했다.
대한민국은 김정숙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게 아니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을 뿐 그의 아내 김정숙씨에게 헌법상 아무런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다. 그는 그냥 대통령의 아내로서 법 혹은 관례대로 예우를 받을 뿐이다. 그런 그가 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윤이상을 ‘조국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했다’고 단정 짓는가?
누가 대통령의 아내에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해석할 권한을 줬는가? 김정숙씨는 그렇게 현대사에 해박한가? 김정숙씨는 북한이 미국을 겨냥하는 미사일을 쏘아 올린 이 시점에 윤이상 묘를 방문해 그를 칭송해야 했는가? 그것이 본인의 독단적인 결정인가 주변에 있는 제3자의 권고에 의해서인가?
나는 김정숙씨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를 잘 마치도록 보살피는 임무 외에 특별한 ‘임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들도 그렇게 여길 것이다.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월권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의 아내가 본분을 저버리고 역사의 전선(戰線)에, 이데올로기의 첨병(尖兵)을 자처하는 순간 그 종착지는 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