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인(67)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 실세다. 문정인 특보의 의도대로 남북관계는 물론 한미관계까지 좌우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물론 그 방향은 문재인 정부의 기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북 유화·대미 강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정인 특보는 진보 성향의 세 대통령(김대중·노무현·문재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지만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국가정보론》이란 책을 집필했을 정도로 국내외 정보기관에 해박한 그는 이명박·박근혜 국정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그가 과거 중앙정보부에서 지원사병으로 군 복무를 하며 대북(對北) 공작과 대(對) 중동 프로젝트를 보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 분야를 오래 취재해 온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였다. 중앙정보부에 몸담으며 공작을 했던 문정인 특보와 최근의 문정인 특보에게선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다가온 게 사실이다.
혹자는 ‘군 생활을 포함해 그의 젊은 시절을 기사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기에 생애 전반기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기자는 정치적·이념적 기준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문정인 특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정인 특보의 여러 발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소문이나 설(說)이 아닌 문 특보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문정인 특보의 군 생활을 비롯한 그의 삶 전반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지원사병’이란 무엇인가
문정인 특보 개인 홈페이지(www.cimoon.net)에는 2006년 4월,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인터뷰에 실린 프로필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0년: 연세대 철학과에 진학,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 기자 및 편집국장
1972년: 학보사 편집국장의 자격으로 미 국무부에서 초청하는 아시아·태평양 10개국 학생지도자대회에 참석, 3개월 동안 미국의 주요한 몇 곳을 견학
1972년: 귀국 후 3학년 1학기 때 군 입대. 정보사령부 배치
국정원에서 40년 넘게 근무하며 고위직까지 지낸 A씨는 문정인씨의 중앙정보부 군 복무가 사실이라고 말했다. A씨는 “당시 정보사령부에서 중정에 파견 나왔던 지원사병으로 (문정인 특보가) 복무했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A씨의 이야기다.
“1970년대 초반에 사병 입대한 인원 중 영어 잘하고 실력 있는 대학생들을 중정이 뽑았었다. 내 기억에 해군이 15명, 육군이 30~40명 정도를 뽑았는데 그들을 지원사병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육군 정보사령부나 해군 첩보부대로 발령을 냈었다. 그 부대에서 중정으로 파견하는 형식으로 문정인씨가 중정에서 복무한 것이다.”
A씨는 “문정인씨는 영어도 잘했고 매우 우수했다”고 말했다. 우수해서 뽑은 지원사병들이지만 중정 근무 당시엔 주로 잡무를 도왔다고 한다. 청소 같은 각종 허드렛일도 지원사병들의 임무였다. A씨는 “그때 문정인씨처럼 지원사병으로 왔던 이들이 이수혁(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씨, 최병효(전 주 노르웨이 대사)씨였다. 문정인씨는 그들보다 아래 기수인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철희씨 당번병 했다”
A씨는 “문정인씨가 지원사병으로 있을 때 이철희씨의 당번병을 약 1년 정도 했다”고 기억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철희(1923~)씨는 198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 사건의 장본인이다. 이철희씨는 일본 나가노(中野) 정보학교, 육군사관학교(2기)를 졸업한 뒤 군에 투신했다. 예편 후 중앙정보부에 들어와 차장까지 지냈다. 문정인 특보는 이철희씨가 중정 차장으로 있을 때 당번병을 했다고 A씨는 주장했다.
국정원 대북 공작 부서에 오래 근무했던 B씨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B씨는 “이철희씨가 매우 깐깐하고 성정(性情)도 불같아 문정인씨가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안다”고 회고했다. 당번병을 마치고 중앙정보부 본부로 복귀한 문정인 특보는 대북 공작 부서에 몸담으며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선임자들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B씨는 “문정인씨는 뭘 해도 성실히 그리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문정인씨는 체력과 체격이 좋았다. 사무실 캐비닛을 혼자 옮기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문정인 특보는 제주 오현고 재학 시절 투포환 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다.
중정(中情)의 중동(中東) 프로젝트
중동, 특히 이슬람교는 문정인 특보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문정인 특보는 중동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에 대해 묻자 A씨는 우리나라에 이슬람이 전파된 배경부터 설명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 경제적으로 궁핍해 우리나라는 사우디 등 중동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진출해 외화를 벌어야겠다는 큰 꿈을 가진 것이다. 이때 중정이 앞장서 중동 진출을 꾀했다”고 설명했다.
A씨는 “당시 중정에는 대북 공작과 함께 중동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공작조정관이 있었다. 김모라는 현역 육군 준위였는데, 나중에 그는 이슬람에 심취해 이슬람 관련 단체 임원까지 지냈다”고 말했다. 그때 문정인씨는 김 준위가 하던 중동 프로젝트를 옆에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A씨의 이야기다.
“우리 정부는 중동 왕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예컨대 중동 왕실에 ‘마사지사’를 보내는 일도 당시 중정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대학 나오고 미모도 출중한 여대생을 물색해 보냈었다. 김 준위와 함께 문정인씨가 중동 관련 업무를 맡긴 했었지만, (문씨가) 사병 자격으로 도운 것이기에 이 같은 큰일을 직접 수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때 중동과 이슬람에 대해 눈을 떴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정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이슬람사원(1976년 완공)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 사업에도 중정의 입김이 있었다고 한다. B씨는 “이슬람사원은 당시 국내에 유입되던 중동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며 “한국 경제의 활로가 중동에 달려 있었기에 정부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주장했다. 이때도 중정의 김 준위가 건설 부지를 파악하는 실무를 담당했고, 문정인씨가 보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B씨는 추정했다. B씨도 “그때 (문정인씨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CIA 비토설(說)’의 실체
문정인 특보의 얘기는 다르다. 2016년 6월, 연세대 교수 정년 퇴임식에서 한 기자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정인 교수를 외교부 장관에 임명하려 했으나 이슬람교도라 걸림돌이 됐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문정인씨에게 한 적이 있다. 이에 문정인씨는 “사실과 다르다”며 “군 제대 후 이슬람교도인 인도네시아 친구를 보며 그 정신에 감복해 몇 년 동안 이슬람식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미국에서 일하면서 종교와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명했다. 종교는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비판의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이슬람 관련 기관에 근무하며 이슬람 관련 서적도 여러 권 번역했던 사실로 보아 이슬람은 그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문정인 특보의 중정 군 복무 이야기와 함께 일간지 기자로부터 들은 얘기 중 하나가 문 특보의 ‘국정원장 임명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초,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문정인 특보의 친(親) 중동·친 아랍 성향, 그리고 이슬람교와 밀접하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히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이야기였다. 9·11테러로 중동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터라 CIA가 비토를 놓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선 A씨와 B씨 모두 부인했다. CIA가 국정원장 임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일종의 내정간섭에 해당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문 특보의 종교적 성향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문정인 특보 아들(미국 프린스턴 대학 졸업)의 ‘미국 국적’ 때문에 국정원장에 임명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게 설득력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영어에 능통한 이유
문정인 특보의 영어 실력은 학계에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유창한 회화는 물론 작문 실력도 매우 뛰어나다고 한다. 문 특보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문정인 특보가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제주도에 왔던 미국인 ‘비올시’란 인물로부터 영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비올시는 2000년대 CIA 요원으로 서울 거점장을 지낸 인물이다. A씨는 두 사람(문정인과 비올시)의 인연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려주었다.
“비올시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한국어도 배우고, 나중에 한국인과 결혼도 했다. 그러고 나서 CIA에 들어간 것 같다. 나는 문정인씨와 비올시가 같이 있는 것도 봤다. 나중에 ‘비올시가 평화봉사단원으로 있을 때 나한테 영어를 가르쳐줬다’고 (문 특보가) 말하더라. 문정인씨는 비올시에게 ‘미스터 비올시’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말로 ‘형’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 다 한국어가 되니 사석에선 편하게 한국말로 형, 동생 하는 것 같더라.”
과거 CIA는 평화봉사단으로 파견된 학생들을 CIA 정보원으로 활용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정인씨 주변 인물들은 문 특보와 비올시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문정인씨가 ‘CIA와 선이 닿아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평화봉사단원을 정보원으로 활용한 게 문제가 돼 미국 당국은 성직자와 언론인, 평화봉사단원들은 CIA 요원으로 가장(假裝)해 활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A씨도 “그런 추정(CIA 관련설)은 사안의 선후 관계로 보아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비올시는 미국 당국으로부터 그 같은 지시가 떨어지고 난 뒤 한국에 온 게 확실하다고 A씨는 거듭 강조했다.
문정인 특보를 잘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문 특보의 장점은 친화력이었다. 거침없는 화술, 유창한 외국어, 시원시원한 외모도 장점이라고 호평했다. 특히 이들은 문 특보가 연세대 학보사인 《연세춘추》 편집국장을 지냈고, 오랜 미국 생활을 한 점, 다년간 국내외 교수를 역임해 폭 넓은 인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과 중동 전문가이기에 중동과 아랍권에도 그에 버금가는 인맥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프로필에 빠져 있는 ‘인하대 교수’ 경력
문정인 특보의 프로필을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연세대 교수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80년대 후반경 인하대 교수를 지낸 적이 있다. 그러나 문정인 특보 개인 홈페이지 프로필에는 1994년부터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고 나올 뿐이다. 그 이전에 재직한 인하대 교수 경력은 프로필뿐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1987~1989년경 과거 신문을 들춰 보면, 그가 인하대 교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기사들이 여럿 있다. 1988년 5월 3일자 《동아일보》에는 문정인 당시 인하대 교수와 ‘종속이론’ 전문가 피터 에반스 미국 UC 샌디에이고대 교수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같은 해 8월 23일자 《경향신문》에는 문정인 인하대 교수가 ‘교착의 모델 정립과 남북한의 통일협상’이란 제목의 논문을 가지고 ‘통일이론 재조명 세미나’에서 발표한다는 요지의 기사도 실려 있다. 1989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주한 미군 관련 기사에도 문정인 인하대 교수의 멘트가 실려 있다.
이와 관련해 D씨는 “문정인 교수가 인하대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다. ‘재미가 없어서’였다더라”고 말했다. B씨는 “(문정인 특보를) ‘정치학 교수로 잘 대우해 줬는데 연세대로 가 버려 서운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훗날 인하대 측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이회창 캠프 문 두드렸다?
D씨는 1997년 대선 당시 문정인씨가 이회창 캠프에 선을 대려 했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문정인씨는 당시 이회창 후보가 졸업한 경기고 라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후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을 통해 김 대통령 쪽으로 넘어갔다는 요지의 설명이었다.
D씨는 문정인 특보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았음에도 임명직에 중용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이유로 동북아시대위원장(노무현 정부), 통일외교안보특보(문재인 정부) 등 인사청문회가 필요 없는 직책만 맡을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자는 문정인 특보에게 질문지를 보내 그의 의견을 들어 보고자 했다. 질문은 중앙정보부 지원사병으로 복무한 게 자원(自願)인지 여부부터 이회창 캠프에 접촉했던 게 사실인지 등 총 8개 질문이었다. 문정인 교수는 짧은 편지와 함께 답변을 보내 왔다.
문 특보는 “아무런 권한 없는 무보수 자문직 특보에 대해 이렇게 신상정보 털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나를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 주는 것은 좋으나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고 밝혔다. 문 특보는 “지금도 공직에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는 나를 너무 흔든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요청했으니 답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요청을 해 주어 고맙다. 추정에 의한 왜곡 보도보다는 낫다”는 입장도 밝혔다. 문정인 특보가 기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원문 그대로 수록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문정인 특보는 진보 성향의 세 대통령(김대중·노무현·문재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지만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국가정보론》이란 책을 집필했을 정도로 국내외 정보기관에 해박한 그는 이명박·박근혜 국정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 그가 과거 중앙정보부에서 지원사병으로 군 복무를 하며 대북(對北) 공작과 대(對) 중동 프로젝트를 보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 분야를 오래 취재해 온 한 일간지 기자로부터였다. 중앙정보부에 몸담으며 공작을 했던 문정인 특보와 최근의 문정인 특보에게선 묘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 흥미롭게 다가온 게 사실이다.
혹자는 ‘군 생활을 포함해 그의 젊은 시절을 기사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인간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기에 생애 전반기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기자는 정치적·이념적 기준이 아닌 객관적인 시각으로 문정인 특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정인 특보의 여러 발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다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소문이나 설(說)이 아닌 문 특보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싶었다. 지금부터 문정인 특보의 군 생활을 비롯한 그의 삶 전반기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지원사병’이란 무엇인가
문정인 특보 개인 홈페이지(www.cimoon.net)에는 2006년 4월, 《서울신문》과 가진 인터뷰 전문이 게재되어 있다. 인터뷰에 실린 프로필 일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70년: 연세대 철학과에 진학,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 기자 및 편집국장
1972년: 학보사 편집국장의 자격으로 미 국무부에서 초청하는 아시아·태평양 10개국 학생지도자대회에 참석, 3개월 동안 미국의 주요한 몇 곳을 견학
1972년: 귀국 후 3학년 1학기 때 군 입대. 정보사령부 배치
국정원에서 40년 넘게 근무하며 고위직까지 지낸 A씨는 문정인씨의 중앙정보부 군 복무가 사실이라고 말했다. A씨는 “당시 정보사령부에서 중정에 파견 나왔던 지원사병으로 (문정인 특보가) 복무했었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A씨의 이야기다.
“1970년대 초반에 사병 입대한 인원 중 영어 잘하고 실력 있는 대학생들을 중정이 뽑았었다. 내 기억에 해군이 15명, 육군이 30~40명 정도를 뽑았는데 그들을 지원사병이라고 불렀다. 그들을 육군 정보사령부나 해군 첩보부대로 발령을 냈었다. 그 부대에서 중정으로 파견하는 형식으로 문정인씨가 중정에서 복무한 것이다.”
A씨는 “문정인씨는 영어도 잘했고 매우 우수했다”고 말했다. 우수해서 뽑은 지원사병들이지만 중정 근무 당시엔 주로 잡무를 도왔다고 한다. 청소 같은 각종 허드렛일도 지원사병들의 임무였다. A씨는 “그때 문정인씨처럼 지원사병으로 왔던 이들이 이수혁(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씨, 최병효(전 주 노르웨이 대사)씨였다. 문정인씨는 그들보다 아래 기수인 걸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철희씨 당번병 했다”
A씨는 “문정인씨가 지원사병으로 있을 때 이철희씨의 당번병을 약 1년 정도 했다”고 기억했다. 여기서 말하는 이철희(1923~)씨는 198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 사건의 장본인이다. 이철희씨는 일본 나가노(中野) 정보학교, 육군사관학교(2기)를 졸업한 뒤 군에 투신했다. 예편 후 중앙정보부에 들어와 차장까지 지냈다. 문정인 특보는 이철희씨가 중정 차장으로 있을 때 당번병을 했다고 A씨는 주장했다.
국정원 대북 공작 부서에 오래 근무했던 B씨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B씨는 “이철희씨가 매우 깐깐하고 성정(性情)도 불같아 문정인씨가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안다”고 회고했다. 당번병을 마치고 중앙정보부 본부로 복귀한 문정인 특보는 대북 공작 부서에 몸담으며 뛰어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선임자들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B씨는 “문정인씨는 뭘 해도 성실히 그리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문정인씨는 체력과 체격이 좋았다. 사무실 캐비닛을 혼자 옮기는 걸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문정인 특보는 제주 오현고 재학 시절 투포환 선수로 활약한 적이 있다.
중정(中情)의 중동(中東) 프로젝트
중동, 특히 이슬람교는 문정인 특보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문정인 특보는 중동 전문가로 알려져 있으며, 한때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에 대해 묻자 A씨는 우리나라에 이슬람이 전파된 배경부터 설명했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 경제적으로 궁핍해 우리나라는 사우디 등 중동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 진출해 외화를 벌어야겠다는 큰 꿈을 가진 것이다. 이때 중정이 앞장서 중동 진출을 꾀했다”고 설명했다.
A씨는 “당시 중정에는 대북 공작과 함께 중동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공작조정관이 있었다. 김모라는 현역 육군 준위였는데, 나중에 그는 이슬람에 심취해 이슬람 관련 단체 임원까지 지냈다”고 말했다. 그때 문정인씨는 김 준위가 하던 중동 프로젝트를 옆에서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A씨의 이야기다.
“우리 정부는 중동 왕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 예컨대 중동 왕실에 ‘마사지사’를 보내는 일도 당시 중정의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대학 나오고 미모도 출중한 여대생을 물색해 보냈었다. 김 준위와 함께 문정인씨가 중동 관련 업무를 맡긴 했었지만, (문씨가) 사병 자격으로 도운 것이기에 이 같은 큰일을 직접 수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때 중동과 이슬람에 대해 눈을 떴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중정의 또 다른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이슬람사원(1976년 완공)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 사업에도 중정의 입김이 있었다고 한다. B씨는 “이슬람사원은 당시 국내에 유입되던 중동인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며 “한국 경제의 활로가 중동에 달려 있었기에 정부 차원에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주장했다. 이때도 중정의 김 준위가 건설 부지를 파악하는 실무를 담당했고, 문정인씨가 보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B씨는 추정했다. B씨도 “그때 (문정인씨가) 이슬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CIA 비토설(說)’의 실체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방북한 문정인 연세대 교수(왼쪽에서 일곱번째)가 일행과 대동강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문정인 특보의 중정 군 복무 이야기와 함께 일간지 기자로부터 들은 얘기 중 하나가 문 특보의 ‘국정원장 임명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초,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문정인 특보의 친(親) 중동·친 아랍 성향, 그리고 이슬람교와 밀접하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히는 바람에 무산됐다는 이야기였다. 9·11테러로 중동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터라 CIA가 비토를 놓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선 A씨와 B씨 모두 부인했다. CIA가 국정원장 임명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일종의 내정간섭에 해당돼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문 특보의 종교적 성향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문정인 특보 아들(미국 프린스턴 대학 졸업)의 ‘미국 국적’ 때문에 국정원장에 임명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게 설득력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영어에 능통한 이유
2009년 6월 11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내외가 연세대 문정인 교수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비올시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와 한국어도 배우고, 나중에 한국인과 결혼도 했다. 그러고 나서 CIA에 들어간 것 같다. 나는 문정인씨와 비올시가 같이 있는 것도 봤다. 나중에 ‘비올시가 평화봉사단원으로 있을 때 나한테 영어를 가르쳐줬다’고 (문 특보가) 말하더라. 문정인씨는 비올시에게 ‘미스터 비올시’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말로 ‘형’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 다 한국어가 되니 사석에선 편하게 한국말로 형, 동생 하는 것 같더라.”
과거 CIA는 평화봉사단으로 파견된 학생들을 CIA 정보원으로 활용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정인씨 주변 인물들은 문 특보와 비올시의 관계에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문정인씨가 ‘CIA와 선이 닿아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었다. 실제로 미국 내에서도 평화봉사단원을 정보원으로 활용한 게 문제가 돼 미국 당국은 성직자와 언론인, 평화봉사단원들은 CIA 요원으로 가장(假裝)해 활용하지 못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A씨도 “그런 추정(CIA 관련설)은 사안의 선후 관계로 보아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비올시는 미국 당국으로부터 그 같은 지시가 떨어지고 난 뒤 한국에 온 게 확실하다고 A씨는 거듭 강조했다.
문정인 특보를 잘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문 특보의 장점은 친화력이었다. 거침없는 화술, 유창한 외국어, 시원시원한 외모도 장점이라고 호평했다. 특히 이들은 문 특보가 연세대 학보사인 《연세춘추》 편집국장을 지냈고, 오랜 미국 생활을 한 점, 다년간 국내외 교수를 역임해 폭 넓은 인맥을 갖추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과 중동 전문가이기에 중동과 아랍권에도 그에 버금가는 인맥이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프로필에 빠져 있는 ‘인하대 교수’ 경력
문정인 특보의 프로필을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연세대 교수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80년대 후반경 인하대 교수를 지낸 적이 있다. 그러나 문정인 특보 개인 홈페이지 프로필에는 1994년부터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했다고 나올 뿐이다. 그 이전에 재직한 인하대 교수 경력은 프로필뿐 아니라 인터넷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1987~1989년경 과거 신문을 들춰 보면, 그가 인하대 교수로서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기사들이 여럿 있다. 1988년 5월 3일자 《동아일보》에는 문정인 당시 인하대 교수와 ‘종속이론’ 전문가 피터 에반스 미국 UC 샌디에이고대 교수와의 대담이 실려 있다. 같은 해 8월 23일자 《경향신문》에는 문정인 인하대 교수가 ‘교착의 모델 정립과 남북한의 통일협상’이란 제목의 논문을 가지고 ‘통일이론 재조명 세미나’에서 발표한다는 요지의 기사도 실려 있다. 1989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주한 미군 관련 기사에도 문정인 인하대 교수의 멘트가 실려 있다.
이와 관련해 D씨는 “문정인 교수가 인하대를 그만둔 이유에 대해 말해 준 적이 있다. ‘재미가 없어서’였다더라”고 말했다. B씨는 “(문정인 특보를) ‘정치학 교수로 잘 대우해 줬는데 연세대로 가 버려 서운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훗날 인하대 측 관계자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기억했다.
이회창 캠프 문 두드렸다?
2007년 10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자문위원단 간담회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문정인 연세대 교수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D씨는 문정인 특보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신임을 받았음에도 임명직에 중용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이유로 동북아시대위원장(노무현 정부), 통일외교안보특보(문재인 정부) 등 인사청문회가 필요 없는 직책만 맡을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기자는 문정인 특보에게 질문지를 보내 그의 의견을 들어 보고자 했다. 질문은 중앙정보부 지원사병으로 복무한 게 자원(自願)인지 여부부터 이회창 캠프에 접촉했던 게 사실인지 등 총 8개 질문이었다. 문정인 교수는 짧은 편지와 함께 답변을 보내 왔다.
문 특보는 “아무런 권한 없는 무보수 자문직 특보에 대해 이렇게 신상정보 털이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나를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 주는 것은 좋으나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고 밝혔다. 문 특보는 “지금도 공직에 관심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는 나를 너무 흔든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요청했으니 답한다. 역설적으로 그런 요청을 해 주어 고맙다. 추정에 의한 왜곡 보도보다는 낫다”는 입장도 밝혔다. 문정인 특보가 기자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원문 그대로 수록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문정인 특보의 반론 - 중앙정보부 지원사병으로 군 복무를 하신 걸로 아는데 이는 본인 자원에 따른 것이었습니까. 정확하게는 육군정보사령부가 중앙정보부에 파견했던 지원요원이었습니다. 정보사 판단관실 소속이었습니다. - 지원사병으로서 이철희씨 당번병으로 1년가량 복무하신 게 사실입니까. 이철희 당시 정보차장보, 추후 차장의 숙소 당번병으로 10개월 근무한 적 있습니다. - 중정 대북 공작 부서에서도 지원사병으로 복무하셨다고 하는데 그때 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당번병 10개월 이후 당시 해외공작국 산하 대북공작단 지원요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대했습니다. 주로 영어 번역일을 지원했습니다. - 당시 중정의 김○○ 중위를 도와 중동과 이슬람 관련 업무 보조를 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중위가 아니라 현재 고인이 된 김○○(문정인 특보는 실명을 알려 왔으나 익명 처리-편집자 註) 준위입니다. 그분 밑에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분 일을 도와주었지요. 당시 그분은 이슬람 신도로 한국이슬람교 중앙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었는데 나는 그분을 위해 영문 서한 작성, 그리고 이슬람 문헌 번역 등을 도와주었지요. 그리고 제대 후 그분 권유로 한국이슬람교 중앙연합회 국제담당 사무차장을 맡았지요. 나는 1076년(1976년의 오기) 1월 제대했는데, 1976.5.21. 한남동 이슬람사원 준공식 준비 때문에 김 선생이 요청,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일했지요. 1978년 8월 미국 유학갈 때까지 거기서 일했지요. - CIA 서울 거점장을 지낸 비올시와 친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까.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 왔던 비올시로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친분이 있지요. 그분은 1969~71년 제 고향 제주 보건소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일한 적 있었는데 그때 만났지요. 따라서 그분에게서 공식적으로 영어를 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친구로 서로 알고 지냈지요. - 공식 프로필에서 인하대 교수 경력을 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하대에서 1987~1988년 1년 근무했는데 그 이후 경력이 너무 많아 내 경력에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긴 영문 이력서 (full vita) 에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캠프 측 인사와 접촉하신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장 물망에 오른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그랬다면 임명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당시 문희상 비서실장이 제 의견을 직접 타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내 자신과 아내가 미국 영주권 가지고 있었고 아들이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어서 스스로 부적격자라 판단, 문 실장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