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 구본무 회장 누구]
“재벌 갑질과 거리 먼 소탈한 기업인”
대기업 첫 지주사 전환…지배구조 개선
“국가경제 위해 엘지반도체 포기”
1999년 반도체빅딜 통한의 눈물
세계 1위 디스플레이…‘끈기경영’ 소산
미르·K스포츠재단 거액출연 조사 받기도
2002년 불법정치자금 ‘차떼기사건’ 곤욕
스마트폰 부진·엘지카드 포기 아픔도
구본무 회장이 20일 별세하면서 1995년부터 23년간 이어진 엘지(LG)의 3세 경영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디. 엘지의 역사는 1947년 락희화학(현 엘지화학)의 설립으로 시작돼, 올해 71주년을 맞았다. 구인회 창업회장과 아들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엘지를 전자·화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기업으로 키웠다면, 손자인 구본무 회장은 전자·화학에 통신서비스를 더해 3대 사업축을 완성했다. 또 차세대 디스플레이·2차전지 등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미래 신성장사업으로 키웠다. 구 회장은 2003~2005년 지에스·엘에스 등과 대대적인 계열분리를 하고도 30조원에 그쳤던 매출을 160조원으로 5배 이상 성장시켰다. 특히 해외매출을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늘려, 명실상부한 글로벌기업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구 회장의 진면모는 이런 사업적 측면보다 다른 총수와 차별적인 모습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2006년 경기도 이천 LG인화원에서 열린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 참석한 구본무 LG회장. 연합뉴스
■ 재벌 갑질과 거리가 먼 총수 ‘이웃집 아저씨’ 구 회장을 가까이서 접한 재계와 엘지 인사들은 “구본무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소탈함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를 꼽는다. “외부행사가 끝난 뒤에는 수행원이 있는데도 운전기사에 직접 전화를 건다. 행사장 앞이 복잡하면 차를 멀찌감치 대라고 한 뒤 수백미터를 손수 걸어가 탄다.”(엘지 전직 임원) 구 회장은 직원들에게 격의 없는 농담을 잘한다. 상대방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다. 잘못한 직원을 나무랄 때도 있지만, 갑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주말에는 비서 없이 혼자 일을 보고, 해외출장을 갈 때도 수행원은 한명 뿐이다. 재벌 회장들에게는 당연시되는 요란한 공항 의전도 일절 금한다. 일반인들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하지만, 총수 중에는 명함을 내밀면 면박을 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구 회장은 자기가 먼저 명함을 내밀며 인사한다. “구 회장은 재벌의 ‘황제경영’이라는 말을 제일 질색한다. 재벌들이 잘난 척하는 것도 싫어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재벌 갑질’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엘지 임원) 엘지에서 분가한 지에스의 임원은 “옷도 평범하게 입고 다녀, 사람들이 못 알아볼 때가 많다. 정말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마곡 LG사이언스파크 건설 현장에서 구본무 LG 회장(가운데)이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구 회장의 깊은 배려심은 2003~2005년 동업자·형제와의 계열분리를 별다른 잡음 없이 마무리지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 회장은 계열분리를 하면서 정유·유통·건설 등 현금수입이 많은 사업을 양보했다. 구 회장은 평소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양보하면 타협이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엘지 전직 임원) 한국 재벌사에서 경영승계나 재산분리를 둘러싼 ‘골육상쟁’은 다반사였다. 10대그룹만 봐도 삼성·현대·롯데·한화·두산·한진 등 대부분이 분쟁을 겪었다.. 전경련 출신인 권오용 효성그룹 고문은 “엘지의 기업이념인 ‘인화’가 바탕이 되었겠지만, 구 회장의 ‘아름다운 이별’은 한국 재벌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고 구본무 LG회장(맨왼쪽)과 구자경 LG 명예회장(오른쪽 두번째)
■ 정도경영·지배구조 개선…대선자금 곤욕도 구 회장은 1995년 취임 뒤 ‘정도경영’을 선언했다. 윤리경영을 기반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기업이 되자는 취지였다. 내부에서는 “실적을 올리려면 정도경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하겠다.” 구 회장 재직 기간 중 엘지가 정경유착 사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2016~2017년 국정농단과 정경유착 특검 때는 미르·케이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출연한 것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2002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요청으로 다른 재벌과 함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상당수 재벌 총수가 사회적 비난을 사고 심지어 사법처벌까지 받았지만, 엘지는 큰 탈없이 넘겼다. 5대그룹의 현직 총수 중에서 사법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구 회장이 유일하다. “권력의 요구를 거부하면 보복이 우려되기 때문에 부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권을 챙기거나 현안을 해결하려는 생각은 안한다.”(엘지 유원 부사장) 엘지는 최근에 진행중인 검찰과 국세청의 총수일가 세금 탈루사건 수사에 당혹감을 보인다. 검찰은 지난 4월 국세청으로부터 엘지그룹 총수 일가가 엘지 계열사 주식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100억원대 양도소득세를 탈루했다는 고발을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국세청 고발인 중에 구본무 회장은 빠진 대신, 구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포함됐다. 엘지 홍보실은 “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일부 친족의 일로, 구 회장과는 무관하다. 고의적 탈세가 아니라 세무당국과 시각차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글로벌챌린저 깃발을 수여하고 있는 고 구본무 LG회장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경제개혁을 추진하자 대다수 재벌은 납작 엎드려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엘지는 2003년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선제적인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나섰다. 지주회사는 후진적인 순환출자를 없애는 대신 지주회사-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구조를 갖춰 단순 투명한 소유지배구조가 강점이다. 구 회장은 또 경영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승부수도 던졌다. 계열사는 전문경영인 중심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고, 대주주(회장)는 최고경영자 인사, 주요 투자결정 등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 등의 역할을 하는 새 시스템을 구축했다. “외환위기 이후 개혁 요구를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선제적인 변화에 나섰다.”(엘지 전직 임원) 구 회장의 선견지명은 엘지가 소유지배구조의 안정 속에서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또 갑작스런 4세 경영체제 전환에도 불안감이 크지 않은 비결이 되고 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사석에서 “엘지가 절대적은 아닐지라도 상대적으로는 재벌 중에서 윤리경영과 지배구조 측면에서 가장 모범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위기를 기회로 ‘끈기’…스마트폰 부진은 아쉬움 “국가경제를 위해 엘지반도체를 포기하겠습니다.” 구 회장은 1999년 1월6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반도체 포기 의사를 밝힌 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과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반도체 빅딜을 추진했는데, 전경련이 추천한 외부전문기관은 엘지 대신 현대의 손을 들어줬다. 엘지는 공정성이 없다며 반발했지만 정부는 강하게 압박했다. “전체 금융권이 대출규제에 나섰다. 빅딜에 계속 반대하다가는 자칫 그룹이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구 회장의 결단이 더 큰 불행을 막았다.”(엘지 전직 임원)
구 회장에게 반도체 빅딜이 포기의 결단이었다면, 디스플레이 사업 본격화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의 결단이었다. 구 회장은 빅딜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엘지전자와 엘지반도체가 각각 영위하던 엘시디(LCD)사업을 따로 분리해 전문기업을 설립했다. 네덜란드 필립스와의 합작법인으로 시작해 2008년 엘지디스플레이로 독립했다. 이듬해 처음으로 주력인 대형 엘시디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오른 뒤 9년째 정상을 지키고 있다. 엘지 유원 부사장은 “20년간 40조원 이상을 투자해서 임직원 1100명, 매출액 15억원 규모의 기업을 임직원 3만여명에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1위 기업으로 육성한 것은 구 회장의 결단과 끈기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엘지화학의 2차 전지사업이 오랜 어려움을 뚫고 중대형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만년 3위였던 통신서비스 사업을 과감한 4세대 엘티이(LTE) 투자를 통해 주력사업으로 키운 것도 구 회장 특유의 ‘끈기 경영’의 소산으로 꼽힌다. 반면 엘지전자 휴대폰 사업의 만성적인 부진, 2003년 카드 부실로 인한 카드와 증권사업 동시 포기는 구 회장에게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