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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서 기초한 춘원… 무슨 까닭에 친일의 길을 갔을까

이강기 2018. 5. 26. 09:28

[Why] 2·8 독립선언서 기초한 춘원… 무슨 까닭에 친일의 길을 갔을까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 입력 2018.04.07 03:02



    근대문학의 원조인 그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흙'을 읽고 농촌계몽 꿈꾸고 '사랑'에 감동했던가
    일본을 도와서라도 조선인이 편하게 살 길을 찾으려는 희망을 품었나

    춘원 이광수
    이철원 기자

    우리나라 근대문학계에 세 천재가 태어났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와 조선사 연구 권위자 육당 최남선, '사랑'의 저자 춘원 이광수가 그들이다. 충북 괴산 출신인 벽초는 일찍이 고향을 버리고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돕는 일에 한평생을 바치고 비교적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육당은 일제강점기에 만주국을 위해 일본이 세운 건국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는데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즐겁지 않은 말년을 보냈다.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는 강영훈은 육당이 교수일 때 건국대 학생이었는데 그 밑에서 역사를 배우다 학병으로 끌려갔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육당 밑에서 국사 공부를 했는데 그를 친일파로 모는 사람들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옵니다. 내가 아는 육당은 진정한 의미의 애국자였습니다." 나처럼 일제시대에 젊은 날을 보낸 사람치고 그 시절 춘원의 '무정' '흙' '사랑'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얼마나 많은 이 나라 젊은이가 '흙'을 읽고 농촌 운동을 꿈꾸고, '사랑'을 읽고 안빈과 석순옥의 순결한 사랑에 감동하지 않았겠는가.

    나의 아버지 친구 중에 손두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 혈기 왕성해 싸움도 잘하는 청년이었다. 그 사람 말을 내가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손씨는 이광수가 1922년에 발표한 '민족 개조론'을 읽고 격분해 춘원이 살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손씨는 그 글이 조선 민족을 깎아내리는 잘못된 글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분풀이할 마음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집을 찾아가 춘원 앞에 앉았더니 이 겨레의 어제와 오늘을 얘기하는 그의 애국심에 감동해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춘원의 애국심에 비하면 자신의 조국애는 비교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일제 때 창씨개명한 이광수의 성은 가야마였는데 이는 향기로운 산이라는 뜻이었다. 재주가 비상하던 춘원이 그런 멋있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해 진정 사람도 바뀌었던 것일까. 해방되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민족 반역자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이광수, 최남선도 구속됐다. 두 천재는 결국 불기소 처분으로 옥살이를 오래 하지 않았다.

    일제시대를 살아본 사람과 살아보지 않은 사람의 친일파 개념은 판이한 것 같다. 나는 20년 가까이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오늘 살아 있는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근년에 만든 친일파 명단에 무려 3000여 명의 성함이 게재돼 있다고 하는데,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그 많은 한국인이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로 전락한 사실이 못내 아쉽다.

    그 당시에는 김씨, 이씨, 박씨는 다 사라지고 가네카와, 미즈하라, 오카모토라는 성을 가진 한국인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조상이 물려준 성을 바꾸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자유 대한에 태어난 사람들 눈에는 창씨개명이 부당하게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그 시대를 살아본 나로서는 창씨개명이 반민족 행위로는 여겨지지 않는다고 덧붙이고 싶다. 성을 바꾸지 않으면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어려운 것은 뻔한데 일본식 성을 거부할 수 있는 한국인은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김구, 이승만은 창씨개명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박흥식이나 김대우도 성을 바꿀 필요가 없었겠지만, 우리 집을 포함해 서민 대중은 창씨개명하라는 총독부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춘원은 동경에서 유학생으로 있을 때 3·1 독립선언이 발표되기 전 이미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그리고 민족 개조론을 발표함과 동시에 그 나름대로 채찍을 들고 이 겨레를 훈계했다. 춘원이 무슨 까닭에 일본 편을 들게 됐을까. 그가 적극적으로 일본을 찬양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도다. 그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폐간됐고 우리말로 신문에 글을 쓸 기회도 사라졌다. 만일 그에게 역사를 보는 눈이 있었다면 적극적으로 '내선일체'를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5년쯤 뒤에는 일본이 망했으니까. 그러나 이광수는 일본을 도와서라도 장차 조선인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잘못된 그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닐까.

    춘원은 반민특위의 신문(訊問)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습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 길을 가서라도 민족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그의 그런 고백을 전적으로 받아들였을 리는 없다. 춘원 연구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니가타 대학의 하타노 세쓰코 교수는 '이광수'라는 책에서 한국의 나쓰메 소세키로 볼 수 있는 춘원이 민족 반역자, 매국노로 낙인 찍힌 사실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한국 근대문학의 원조라는 이광수는 결코 매국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많은 연구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고 춘원의 아들(이영근)과 딸(이정화)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많은 조사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6·25 때 몸에 열이 있어서 피란을 가지 못한 춘원은 납북돼 강계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쓰러졌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가 어디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는 우리 역사에서 어느 때라도 춘원 이광수에게 가장 타당한 자리매김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06/20180406015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