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최남선(1890~1957) -천재였던 그가 친일로… 역사의 방향을 착각한 건 아닐까

이강기 2018. 5. 26. 09:09

[Why] 천재였던 그가 친일로… 역사의 방향을 착각한 건 아닐까


조선일보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05.26 03:00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27> 최남선(1890~1957)


최남선
일러스트=이철원
최남선은 어쩌면 구한말에 태어난 가장 뛰어난 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쓰던 아호만도 8가지가 된다지만 그는 앞으로도 오직 '육당 최남선'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경성학당에서 수학한 육당은 천재라는 사실이 알려져 15세의 어린 나이에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으로 발탁되었다.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졸업하지 않고 중퇴하였다. 그 중학교에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하다. 2년 뒤에는 와세다대학 역사지리학과에 입학하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그를 '신동'이라고 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와세다대학에도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 학교의 정치학과 주최로 모의국회가 열렸는데 한국의 국왕을 모욕하는 내용이어서 육당은 한국인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주도했다. 결국 제적당했다. 귀국한 육당은 신문관을 설립하고 1907년 겨우 18세 때 잡지 '소년'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에서 육당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였다. 최남선과 이광수가 '소년'을 창간한 11월 1일이 '잡지의 날'로 지정되었다는 사실도 기억할 만하다.

그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조선의 귀중한 고서들을 간행하였으며 그런 취지로 조선광문회를 창설하고 고서를 한글로 번역, 발간하였다. 그는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했고 그 과정에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하여 20여 종의 고전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일합방이 강요된 뒤에는 일본의 자세가 강경해져서 '소년'은 폐간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인 1912년 이광수와 손잡고 만든 '붉은 저고리' '새별' 등 잡지가 조선총독부의 '신문지 법'을 위반했다 하여 모두 폐간 처분당했다. 최남선은 30세이던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죄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2년 8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뒤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계명구락부'를 조직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신춘순례'와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가 출간되었다. 그는 '단군론'에서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의 백두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육당이 조선사편찬 위원회의 촉탁일을 맡게 된 것은 총독부가 집과 연구비용을 지원하겠다고 회유했기 때문이 아니고, 다만 조선민족의 '얼'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한용운 같은 이가 최남선이 총독부가 시키는 일을 맡았다고 맹비난한 것이 사실이지만 최남선의 뜻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총독부가 식민사관 유포를 위하여 만든 어용단체가 '조선사 편수위원회'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남선이 그 위원직을 맡은 것도 그의 생각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독부가 중추원 참의가 될 것을 요청하였을 때 그가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사실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 시대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 결정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치고 들어간 일본은 동남아로까지 진출하여 싱가포르에서 퍼시벌 영국군 사령관을 붙잡았다. 일본군 야마시타 장군은 항복하라고 소리를 지르며 '예스(Yes)냐 노(No)냐'라며 책상을 쳤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최남선이 혹시 역사의 방향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젊은 시절부터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최남선,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할 만큼 우국충정에 가득했던 최남선, 조국의 문화와 전통을 살리기 위해 그 연구에 몰두했던 최남선, 그런 그가 변절하여 민족 반역자가 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한때 조선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그 특성을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조선은 동양 역사의 장터에 앉은 늠름한 여장부요, 서리 맞고도 웃는 국화요, 눈 속에서도 피는 매화요, 바람 부는 가운데 우뚝 선 대나무요, 진흙에서 피어나는 연꽃으로 계속 역경 가운데 지냈지만 한 번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절세의 현모양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육당의 강의를 한 번 들은 적이 있다. 매우 작은 모임이었는데 그의 강의를 들으면서 "이렇게 많은 사실을 그렇게 정확하게 알고 있는 학자가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라고 생각하였다. 노트도 없이 그의 머릿속에 정리된 사실만을 가지고 그는 정말 박학다식한 지식인이라고 느끼게 했다.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여러 가지 사실들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한 시대의 애국지사이며 동시에 민주화 투사였던 장준하는 최남선에 대하여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육당이 세상을 떠나자 장준하는 '사상계'에 그를 애도하는 글을 실었다. "한때 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의 본의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을 바로잡고 이 나라의 문화를 보존함에 있었음은 오늘날 사실로 밝혀진 바요"라고 못 박으면서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줄 모르는 이 겨레의 옹졸함을 비판한 바 있다. 이광수, 김성수, 김활란, 모윤숙 등의 공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들의 과오만을 들추어내는 것은 우리 민족성의 하나의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은 삼가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조선 상식'을 강의하던 육당의 의젓한 모습과 낭랑한 목소리가 오늘도 그리울 뿐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5/201805250215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