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物

구본무

이강기 2018. 5. 21. 09:40

[만물상]

인간 구본무

조선일보
  • 박정훈 논설위원          

  • 입력 2018.05.21 03:16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어린 시절 진주의 조부모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물 동냥 왔다가 소년 구본무와 마주쳤다. 스님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허, 저기 돈 보따리가 굴러다니네." 부자들로 넘쳐나는 재계에서도 그의 얼굴상은 으뜸으로 쳐줬다. 허영만의 만화 '꼴'에서도 돈이 따라붙는 만석꾼 관상으로 등장한다.

    ▶스님의 관상풀이대로 구 회장은 평생을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다. 하지만 일상은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소탈한 에피소드로 넘쳤다. 무조건 2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습관이 유명했다. 먼저 와 있는 구 회장을 보고 상대방이 황송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음식점 종업원에겐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골프장에 가면 직접 깃대를 잡고 공을 찾아다니며 캐디를 도와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은 일 한 의인(義人)이 나타나면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LG 의인상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만물상] 인간 구본무
    ▶그는 유교적 가풍(家風)을 이어받은 경영자였다. 온화한 가부장 같은 리더십으로 직원들 마음을 샀다. 10년 전 금융 위기 때 그가 내린 지시가 화제였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휴대폰 사업이 거액 적자 냈을 때도 LG전자는 감원 없이 버텼다. 덕분에 그의 회장 취임 후엔 노사 분규가 거의 사라졌다. 직원들 애사심도 유별나다. 투박하지만 끈끈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그는 평생 책을 딱 한 권 기획해 펴냈다.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이다. 그의 탐조(探鳥) 취미는 유명했다. 여의도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틈만 나면 한강변 철새들을 관찰했다. 새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일까. 그는 바람에 순응해 하늘을 날듯 순리를 좇는 삶의 방식으로 일관했다. 남과 다툴 일을 만들지 않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흔한 비리나 구설수 한번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 지 그랬다.

    ▶천하의 덕장(德將) 구 회장도 분노를 참지 못한 일이 있었다. IMF 때 강제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빼앗겼을 때다. 그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어섰다. 기업인이 존경받지 못 하는 오늘, 정말 옆집 아저씨 같던 재계 총수를 떠나보내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낄 사람이 무척 많을 것 같다.


    [횡설수설/주성원]‘새 박사’ 구본무

    동아일보
     2018-05-21 03:00수정 2018-05-21 03:32



    “제 호(號)가 화담(和談)입니다. 조선시대 학자 화담(花潭) 서경덕 선생과 한글로는 호가 같아요. 참 훌륭하신 분이고 몸가짐도 바르셨던 분이죠…. 그런데 같은 화담이라도 한자가 다르니까 저는 그렇게 할 자신은 없습니다. 허허.”

    20일 타계한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자신의 아호(雅號)를 딴 곤지암의 ‘화담숲’ 이야기가 나오면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이렇게 말하곤 했다.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서경덕처럼 행동할 자신은 없다는 유머였다.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이런 소탈한 면모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까지 쉽게 매료됐다.


    ▷구 회장은 소탈하고 유머를 즐기면서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절대 결례하는 법이 없었다. 유명 중식 셰프 유방녕 씨는 ‘매너가 좋고 존경할 만한 손님’으로 구 회장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흔히 골프장에서는 플레이어들끼리 소액의 내기를 하기도 하지만 LG그룹의 곤지암 골프장에서는 ‘현금이 오가는 내기 골프’는 금지한다. 구 회장은 “골프장에서 현금을 주고받는 것은 졸부들이나 하는 짓 같아 보기 나쁘다”며 정색을 했다.

    ▷구 회장은 ‘새 박사’로도 유명하다. 여의도 트윈타워 30층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해놓고 수시로 한강 밤섬의 야생 조류를 관찰했다. 1996년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가 물고기를 낚아채는 장면을 처음 발견할 만큼 고인의 탐조(探鳥)는 프로 수준이었다. 2000년엔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LG상록재단에서 조류도감 ‘한국의 새’를 출간했다. 천연기념물 323호 황조롱이가 트윈타워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자 사옥 전체에 특별 보호령을 내리기도 했다. 

    ▷구 회장의 장례는 “나 때문에 번거로운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비공개로 조용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일부 재벌가 총수, 자제들이 빗나간 행태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 와중이어서 예의 바르고 소탈했던, 그리고 자연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재벌 3세’에 대한 대중의 선입견을 깨뜨린 구 회장의 퇴장이 더더욱 아쉽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


    이웃집 아저씨 닮은 회장님…구본무 정도·뚝심 경영 23년

     
    20일 별세한 구본무 LG 회장은 야구와 새 사랑으로 유명했다. 1990년 LG트윈스 창단 당시 구단주였던 그는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 또 탐조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조류 도감도 만들었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20일 별세한 구본무 LG 회장은 야구와 새 사랑으로 유명했다. 1990년 LG트윈스 창단 당시 구단주였던 그는 야구장을 자주 찾았다. 또 탐조 활동에 적극적이었고 조류 도감도 만들었다.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20일 오전 9시52분 숙환으로 별세했다. 73세. 1945년 2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구 회장은 구자경 LG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고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손이다.  

    글로벌기업 일군 소신·소탈 LG맨
    95년 회장 된 뒤 디스플레이 집중
    30조 럭키금성을 160조 기업으로
    문 대통령 “재계 큰별 … 안타깝다”

    국회서 “정부에 돈 낼거냐” 질책에
    “국회가 입법해서 막아 달라” 받아쳐
    자녀 결혼 조촐 … 이번에도 가족장

    연세대 상대 재학 중 입대해 육군 병장으로 전역했다. 이후 미국 애슐랜드대(경영학 학사), 미국 클리블랜드주립대(경영학 석사)에서 유학했다.
     
    구 회장은 연 매출 30조원이던 내수기업 럭키금성을 연 매출 160조원의 글로벌 기업 LG로 키웠다. 구자경 회장에 이어 95년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사명을 LG로 바꿨고, 해외 매출 비중은 전체 중 30%에서 70%까지 확대됐다. 구 회장은 취임 3년 만인 98년 당시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운영하던 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사업을 모아 ‘LG LCD’를 설립하고 디스플레이에 과감히 투자했다. 99년 8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던 16억 달러(약 1조7300억원)의 외국 자본(필립스)을 유치했고 2008년 ‘LG디스플레이’를 세워 세계 1위 기업으로 키웠다. 구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잃은 것은 통한(痛恨)으로 남았다. 김대중 정부의 대기업 간 사업 교환 방침인 ‘빅딜’에 따라 반도체 사업을 현대전자(현대그룹)에 넘겼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의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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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 회장은 경영에서는 ‘정도’를 강조했다.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중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었다. 지주사 전환 후 구 회장은 최고경영자에게 “더 적극적인 책임경영으로 사업에만 매진하라”고 당부했다.
     
    구 회장의 소신 있는 성품은 2016년 12월 최순실 국정 농단 청문회에서도 드러났다. ‘미르 재단’에 출연금을 낸 일로 청문회에 출석한 구 회장은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의 “명분만 맞으면 앞으로도 돈 낼 것이냐”는 질책에 “연금이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일에는 앞으로도 지원하겠다”고 답했다. 이어 하 의원이 재차 묻자 “국회가 입법해서 막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구 회장의 당당한 답변은 ‘사이다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소탈했던 구 회장은 평소 공식적인 행사나 출장을 다닐 때 수행원 한 명만 대동했고 휴일 개인적인 용무를 볼 때는 아예 혼자 다녔다. 또 그를 알아본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해 ‘이웃집 아저씨 같다’는 평이 많았다. 지난해 그룹 창립 70주년도 조용히 넘겼다. 평소 경영진에 ‘작은 결혼식’을 장려했고 실제로도 자녀들의 결혼식을 친인척만 불러 간소하게 치렀다.
     
    사회공헌에도 관심이 많았다. 2015년 “국가와 사회 정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의인에게 보답하겠다”며 직접 지시를 내려 ‘LG 의인상’을 만들었다.
     
    재계는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0일 “구 회장은 미래를 위한 도전정신으로 전자·화학·통신 산업을 육성했고 정도 경영으로 신뢰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며 애도했다.  
         
    평소 조용하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기를 희망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장례는 가족장(3일)으로 진행된다. 조화와 직원 등의 조문도 받지 않기로 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다. 유족은 부인 김영식씨, 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 딸 구연경·구연수씨가 있다.
     
    LG 관계자는 “가족장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고인과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꽤 많은 인사가 조문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빈소를 찾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을 통해 “정말 존경받는 훌륭한 재계 큰 별이 가셨다. 안타깝다. 갑자기 이렇게 되셔서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계에선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재계에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언론계에선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과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최현주·하선영 기자 chj80@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이웃집 아저씨 닮은 회장님…구본무 정도·뚝심 경영 23년


      

    구본무 “편법써야 1등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 안 한다”

    한겨레

    2018-05-20 14:00수정 :2018-05-21 09:23

     

    [별세 구본무 회장 누구]
    “재벌 갑질과 거리 먼 소탈한 기업인”
    대기업 첫 지주사 전환…지배구조 개선

    “국가경제 위해 엘지반도체 포기”
    1999년 반도체빅딜 통한의 눈물
    세계 1위 디스플레이…‘끈기경영’ 소산

    미르·K스포츠재단 거액출연 조사 받기도
    2002년 불법정치자금 ‘차떼기사건’ 곤욕
    스마트폰 부진·엘지카드 포기 아픔도

    고 구본무 엘지그룹 회장
    고 구본무 엘지그룹 회장

    구본무 회장이 20일 별세하면서 1995년부터 23년간 이어진 엘지(LG)의 3세 경영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디. 엘지의 역사는 1947년 락희화학(현 엘지화학)의 설립으로 시작돼, 올해 71주년을 맞았다. 구인회 창업회장과 아들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엘지를 전자·화학을 중심으로 하는 대기업으로 키웠다면, 손자인 구본무 회장은 전자·화학에 통신서비스를 더해 3대 사업축을 완성했다. 또 차세대 디스플레이·2차전지 등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미래 신성장사업으로 키웠다. 구 회장은 2003~2005년 지에스·엘에스 등과 대대적인 계열분리를 하고도 30조원에 그쳤던 매출을 160조원으로 5배 이상 성장시켰다. 특히 해외매출을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늘려, 명실상부한 글로벌기업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구 회장의 진면모는 이런 사업적 측면보다 다른 총수와 차별적인 모습에서 더 두드러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2006년 경기도 이천 LG인화원에서 열린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 참석한 구본무 LG회장. 연합뉴스
    2006년 경기도 이천 LG인화원에서 열린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 참석한 구본무 LG회장. 연합뉴스

    ■ 재벌 갑질과 거리가 먼 총수 ‘이웃집 아저씨’ 구 회장을 가까이서 접한 재계와 엘지 인사들은 “구본무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에 공통적으로 소탈함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를 꼽는다. “외부행사가 끝난 뒤에는 수행원이 있는데도 운전기사에 직접 전화를 건다. 행사장 앞이 복잡하면 차를 멀찌감치 대라고 한 뒤 수백미터를 손수 걸어가 탄다.”(엘지 전직 임원) 구 회장은 직원들에게 격의 없는 농담을 잘한다. 상대방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배려다. 잘못한 직원을 나무랄 때도 있지만, 갑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주말에는 비서 없이 혼자 일을 보고, 해외출장을 갈 때도 수행원은 한명 뿐이다. 재벌 회장들에게는 당연시되는 요란한 공항 의전도 일절 금한다. 일반인들은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하지만, 총수 중에는 명함을 내밀면 면박을 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구 회장은 자기가 먼저 명함을 내밀며 인사한다. “구 회장은 재벌의 ‘황제경영’이라는 말을 제일 질색한다. 재벌들이 잘난 척하는 것도 싫어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재벌 갑질’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엘지 임원) 엘지에서 분가한 지에스의 임원은 “옷도 평범하게 입고 다녀, 사람들이 못 알아볼 때가 많다. 정말 ‘이웃집 아저씨’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마곡 LG사이언스파크 건설 현장에서 구본무 LG 회장(가운데)이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마곡 LG사이언스파크 건설 현장에서 구본무 LG 회장(가운데)이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구 회장의 깊은 배려심은 2003~2005년 동업자·형제와의 계열분리를 별다른 잡음 없이 마무리지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구 회장은 계열분리를 하면서 정유·유통·건설 등 현금수입이 많은 사업을 양보했다. 구 회장은 평소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양보하면 타협이 된다’는 말을 강조했다.”(엘지 전직 임원) 한국 재벌사에서 경영승계나 재산분리를 둘러싼 ‘골육상쟁’은 다반사였다. 10대그룹만 봐도 삼성·현대·롯데·한화·두산·한진 등 대부분이 분쟁을 겪었다.. 전경련 출신인 권오용 효성그룹 고문은 “엘지의 기업이념인 ‘인화’가 바탕이 되었겠지만, 구 회장의 ‘아름다운 이별’은 한국 재벌 역사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고 구본무 LG회장(맨왼쪽)과 구자경 LG 명예회장(오른쪽 두번째)
    고 구본무 LG회장(맨왼쪽)과 구자경 LG 명예회장(오른쪽 두번째)

    ■ 정도경영·지배구조 개선…대선자금 곤욕도 구 회장은 1995년 취임 뒤 ‘정도경영’을 선언했다. 윤리경영을 기반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기업이 되자는 취지였다. 내부에서는 “실적을 올리려면 정도경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단호했다. “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하겠다.” 구 회장 재직 기간 중 엘지가 정경유착 사건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2016~2017년 국정농단과 정경유착 특검 때는 미르·케이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출연한 것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2002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요청으로 다른 재벌과 함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이른바 ‘차떼기 사건’으로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상당수 재벌 총수가 사회적 비난을 사고 심지어 사법처벌까지 받았지만, 엘지는 큰 탈없이 넘겼다. 5대그룹의 현직 총수 중에서 사법처벌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구 회장이 유일하다. “권력의 요구를 거부하면 보복이 우려되기 때문에 부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권을 챙기거나 현안을 해결하려는 생각은 안한다.”(엘지 유원 부사장) 엘지는 최근에 진행중인 검찰과 국세청의 총수일가 세금 탈루사건 수사에 당혹감을 보인다. 검찰은 지난 4월 국세청으로부터 엘지그룹 총수 일가가 엘지 계열사 주식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100억원대 양도소득세를 탈루했다는 고발을 접수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국세청 고발인 중에 구본무 회장은 빠진 대신, 구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포함됐다. 엘지 홍보실은 “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일부 친족의 일로, 구 회장과는 무관하다. 고의적 탈세가 아니라 세무당국과 시각차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글로벌챌린저 깃발을 수여하고 있는 고 구본무 LG회장
    글로벌챌린저 깃발을 수여하고 있는 고 구본무 LG회장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경제개혁을 추진하자 대다수 재벌은 납작 엎드려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엘지는 2003년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로 전환하며 선제적인 소유지배구조 개선에 나섰다. 지주회사는 후진적인 순환출자를 없애는 대신 지주회사-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구조를 갖춰 단순 투명한 소유지배구조가 강점이다. 구 회장은 또 경영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승부수도 던졌다. 계열사는 전문경영인 중심의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하고, 대주주(회장)는 최고경영자 인사, 주요 투자결정 등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 등의 역할을 하는 새 시스템을 구축했다. “외환위기 이후 개혁 요구를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선제적인 변화에 나섰다.”(엘지 전직 임원) 구 회장의 선견지명은 엘지가 소유지배구조의 안정 속에서 경영에만 전념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또 갑작스런 4세 경영체제 전환에도 불안감이 크지 않은 비결이 되고 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사석에서 “엘지가 절대적은 아닐지라도 상대적으로는 재벌 중에서 윤리경영과 지배구조 측면에서 가장 모범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위기를 기회로 ‘끈기’…스마트폰 부진은 아쉬움 “국가경제를 위해 엘지반도체를 포기하겠습니다.” 구 회장은 1999년 1월6일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반도체 포기 의사를 밝힌 뒤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과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반도체 빅딜을 추진했는데, 전경련이 추천한 외부전문기관은 엘지 대신 현대의 손을 들어줬다. 엘지는 공정성이 없다며 반발했지만 정부는 강하게 압박했다. “전체 금융권이 대출규제에 나섰다. 빅딜에 계속 반대하다가는 자칫 그룹이 큰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구 회장의 결단이 더 큰 불행을 막았다.”(엘지 전직 임원)

    구 회장에게 반도체 빅딜이 포기의 결단이었다면, 디스플레이 사업 본격화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시작의 결단이었다. 구 회장은 빅딜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엘지전자와 엘지반도체가 각각 영위하던 엘시디(LCD)사업을 따로 분리해 전문기업을 설립했다. 네덜란드 필립스와의 합작법인으로 시작해 2008년 엘지디스플레이로 독립했다. 이듬해 처음으로 주력인 대형 엘시디시장에서 세계 1위에 오른 뒤 9년째 정상을 지키고 있다. 엘지 유원 부사장은 “20년간 40조원 이상을 투자해서 임직원 1100명, 매출액 15억원 규모의 기업을 임직원 3만여명에 20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세계 1위 기업으로 육성한 것은 구 회장의 결단과 끈기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엘지화학의 2차 전지사업이 오랜 어려움을 뚫고 중대형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추고, 만년 3위였던 통신서비스 사업을 과감한 4세대 엘티이(LTE) 투자를 통해 주력사업으로 키운 것도 구 회장 특유의 ‘끈기 경영’의 소산으로 꼽힌다. 반면 엘지전자 휴대폰 사업의 만성적인 부진, 2003년 카드 부실로 인한 카드와 증권사업 동시 포기는 구 회장에게는 아픔으로 남아있다.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845410.html?_fr=mt2#csidx99af043f7a0268ea659463d8c3c67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