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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 죽으면 문상 올거지"… 조의금 미리 받아 쓴 천하의 걸물, 조병옥

이강기 2018. 6. 16. 09:15

[Why] "너, 나 죽으면 문상 올거지"… 조의금 미리 받아 쓴 천하의 걸물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 입력 2018.06.16 03:03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30) 조병옥(1894~1960)

    조병옥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해마다 12월 2일이 되면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경기여고 교장 박은혜의 자택에서 그의 남편 장덕수의 추모 예배가 있었고 그때마다 그 모임에 참석하는 조병옥을 가까이 대하게 되었다. 장덕수는 1947년 바로 그날 그 현관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박은혜는 그 집에 눌러 살면서 두 딸과 두 아들을 키우고 공부시켰다. 조병옥은 내 옆자리에 눈을 감고 침통한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얼굴이었는데 관상학에서는 그런 얼굴을 두고 '위맹지상(威猛之相)'이라고 한다. 한번 보면 평생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얼굴이다. 정치인으로 활약하던 때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국회에서 당시 의장이던 이기붕을 향해 '기붕 의장'이라고 부르니 분개한 자유당 의원들이 조병옥에게 항의하였다. 의장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대답하였다. "날보고 병옥 의장이라고 불러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조병옥은 영웅호걸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유석 조병옥은 충청도 천안에서 1894년에 태어나 1960년 2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67세까지는 살았다. 그의 일생은 파란만장하였다. 그는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이다. 그의 조상은 고려조에서 큰 벼슬을 하였고, 조선조 개국공신 조인옥도 그의 선조이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부친 조인원은 독립만세 운동의 주동 세력으로 일본군의 총격을 받아 관통상을 입어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하였고, 징역 4년형을 살게 되어 형무소에 끌려가기도 하였다. 그의 동생도 그때 3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고 전해진다. 살림이 넉넉하던 그의 아버지는 자기 집에 서당을 차리고 괴산에서 훈장을 모셔다 아들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맏아들 조병옥은 총명하여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 중에서 '주역' 하나만 빼고는 다 통달했다고 스스로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 케이블(Cable)을 만나면서 교육의 방법이 180도 바뀌어 공주에 있는 영명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전입하여 1912년 봄에 졸업하고 곧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이승만을 만나 조병옥도 미국 유학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는 배재학당 대학부에 입학하여 영어가 유창하던 김규식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지만, 해방이 되고 정치판에서는 김규식의 중도 노선을 마땅치 않게 여기고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이 사실이다. 배재학당 대학부를 마친 조병옥은 미국 와이오밍대학으로 가서 학사·석사 학위를 마치고,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땄다.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거기서 들은 조병옥은 서재필과 함께 그해 4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를 개최하였다. 그의 독립운동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안창호와 면담할 기회도 가졌고, 귀국한 후 윤치호를 찾아가 만나기로 했고, 1925년에는 신간회의 창립 멤버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는 5년 동안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는데 광주학생 사건이 터지니 한용운 등과 함께 배후 조종자로 몰려 체포되었고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만기 출소하였다. 그 후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에서도 맹활약하였다. 한때 조만식과 더불어 조선일보 살리기에 진력하였으며 그 신문사의 전무 겸 영업국장 일을 맡은 적도 있었지만 1937년 수양동지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39년 석방은 되었지만, 일자리는 없었고 그가 장차 대통령이 되어야 할 지도자로 지목했던 안창호도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승만밖에는 남은 민족적 지도자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일제 말기는 조병옥에게 있어서 문자 그대로 암흑시대였다. 3남2녀를 먹여 살리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런 일화가 하나 있다. 그는 어느 날 밥술이나 먹는 친구를 찾아가 다짜고짜 "너 나 죽으면 문상 오겠느냐"고 물었다. 그 친구가 "네가 죽으면 문상 가야지"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 빈손으로는 안 오겠지. 봉투 하나 들고 오겠지"라고 유석이 물으니 "네가 죽었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가느냐"고 답이 돌아왔다. 조병옥이 그 친구에게 부탁하였다. "나 정말 지금 살기 어렵다. 네가 문상 올 때 가져오겠다는 그 봉투 지금 다오." 조병옥은 그런 배짱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았다. 죽기 전에 미리 조의금 봉투를 받아서 쓸 수 있었던 천하의 걸물이 조병옥이었다. 그런 그는 자유당의 횡포를 목격하고 이승만의 적대 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던 그의 꿈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그는 술고래였기 때문에 골병이 들어 유명한 미국의 월터 리드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지만 살아나지 못했다. 꿈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낯선 하늘 밑에서 그는 외롭게 숨을 거두었다.

    만일 이승만이 3선 개헌을 포기하고 조병옥을 경무대로 불러 "내가 물러나면 자네가 맡아야 하네"라고 한마디 하고 그에게 정권을 이양할 준비를 하였더라면 아마도 4·19와 5·16은 안 터지지 않았을까. 대한민국이 넘어야 할 험산 준령을 앞에 놓고 유석 조병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어찌 이 노인 한 사람뿐이랴. 고려 말에 길재가 탄식하였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6/15/20180615018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