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6.23 03:01
50년 넘는 봉사활동… 호암상 사회봉사상 받은 강칼라 수녀
알프스 산맥 몽블랑 아래에 있는 이탈리아 북부 마을 쿠네오. 평화롭던 이 시골 마을도 1940년대 무솔리니 독재 정권의 칼바람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회사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1943년 태어난 탈로네 리디아도 그랬다. 아버지는 무솔리니 정권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졸지에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늘 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사랑해야 한다"고.
탈로네가 중학교 3학년 때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다.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 생활을 하던 오빠가 산에서 추락해 사망한 것. 탈로네는 결심했다. '오빠가 못 이룬 종교인의 길을 걷겠다'고.
지난 8일 전북 고창군 고창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니 '호암마을'에 도착했다. 1990년 무렵까지 '동혜원'이라 불리던 곳이다. 1940년대 생긴 한센인 정착촌 중 하나였다. 지금은 한센인 후손들과 호암마을에 이주한 주민 등 60여 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이 70~80대 노인이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이다. 이곳에서 50년 넘게 살며 한센병 환자들과 독거 노인들을 돌보는 강칼라(75) 수녀, 그녀가 탈로네다. 6·25전쟁 후 지어진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전북 고창 분원 소속이다. 2016년 외국인 수녀 중 처음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지난 1일에는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그녀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이렇게 반겼다.
"그 할머니 대단해요. 스타렉스 봉고차 운전하고 다니면서 이 동네 힘든 일은 다 해요. 할머니들 병원 데려다 주고, 주민등록등본 떼주고, 택배 부쳐주고. 이 동네 할머니들은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도 119 대신 강칼라한테 전화해요. 그 할머니 없으면 이 동네 안 돌아가요."
이날 오후 강 수녀를 만났다. 오전에 할머니 세 분을 광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온 길이라고 말했다.
탈로네가 중학교 3학년 때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다.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 생활을 하던 오빠가 산에서 추락해 사망한 것. 탈로네는 결심했다. '오빠가 못 이룬 종교인의 길을 걷겠다'고.
지난 8일 전북 고창군 고창버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정도 달리니 '호암마을'에 도착했다. 1990년 무렵까지 '동혜원'이라 불리던 곳이다. 1940년대 생긴 한센인 정착촌 중 하나였다. 지금은 한센인 후손들과 호암마을에 이주한 주민 등 60여 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이 70~80대 노인이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이다. 이곳에서 50년 넘게 살며 한센병 환자들과 독거 노인들을 돌보는 강칼라(75) 수녀, 그녀가 탈로네다. 6·25전쟁 후 지어진 '작은 자매 관상선교회' 전북 고창 분원 소속이다. 2016년 외국인 수녀 중 처음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지난 1일에는 호암상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그녀를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이렇게 반겼다.
"그 할머니 대단해요. 스타렉스 봉고차 운전하고 다니면서 이 동네 힘든 일은 다 해요. 할머니들 병원 데려다 주고, 주민등록등본 떼주고, 택배 부쳐주고. 이 동네 할머니들은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 상황에서도 119 대신 강칼라한테 전화해요. 그 할머니 없으면 이 동네 안 돌아가요."
이날 오후 강 수녀를 만났다. 오전에 할머니 세 분을 광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온 길이라고 말했다.
호암마을 '수퍼우먼 할머니'
―할머니들 병원은 자주 가시나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다 같이 모여서 가요. 나이가 들면 조금씩 아파요.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전 70대니 젊은 할머니죠. 다들 82세, 84세 그래요. 그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외로운 걸 더 힘들어해요.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멀리 살거든요.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게 큰 위로가 돼요. 같이 병원에 가고, 불안할 때 누가 옆에 있고. 나이가 들면 다 아기가 돼요. 이렇게 같이 생활하던 분이 아홉 분이었는데, 지금은 두 분 돌아가셔서 일곱 분이에요."
―저를 데려다 준 택시 기사는 수녀님 대신 할머니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뭐든 내세우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상대방을 몰라도 그들이 날 보고 '감사합니다'라고 미소를 지으면, 나도 똑같이 '감사합니다' 하게 되잖아요. 이런 게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저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대로 드리는 것뿐이에요. 어릴 땐 어머니께, 한국에 와서는 한국인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을 다시 돌려드리는 거죠."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아침 5시 30분 일어나서 기도하고, 8시에 일을 시작해요. 할머니들 병원도 모시고, 장날에는 시장도 가고. 성당 주변 꽃밭 등도 가꾸고, 성당과 피정(避靜)의 집 청소도 하고, 미사도 올리고. 그러다 보면 시간 금방 가죠. 잠은 늦게 자요. 밤 12시 30분쯤.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밤에 하는 편이에요. 그 외에도 손빨래하고, 할머니들 은행일 돕고, 같이 도자기 만들기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창문 만들기도 하고."
강 수녀가 한국에 온 건 1968년 10월 20일.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09년에는 영주권을 신청해 받기도 했다. 올해 지방선거에서는 처음으로 투표권을 받았다.
―한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전 이탈리아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한 수녀가 귀국하는데, 같이 한국에 갈 사람들을 찾았어요. 한국은 전쟁 직후라 고아도 많고 한센병 환자도 많아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자원해 오게 됐어요."
―첫인상은 어땠나요?
"제가 멀미를 엄청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땐 비행기로 나흘 걸렸거든요. 환승만 로마·방콕·홍콩에서 세 번을 했으니. 비행기에서 내리니 다들 너무 작았어요. 건물도 작고, 산도 작고. 그땐 거의 1층 건물이었으니깐요."
―한국이 많이 가난했을 때지요.
"전기가 없어서 호롱불 켜놓고 일했어요. 수도도 없어 우물물로 생활했고. 이탈리아에서 파견 오기 전에 '환자가 많은 곳에서 수도꼭지를 틀 때는 손을 사용하지 말고 팔꿈치를 사용하라' 같은 위생 교육을 받았어요. 그런데 오니깐 우물을 사용하더라고요(웃음)."
―한센병 환자는 한국서 처음 본 건가요?
"교육받을 때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어요."
―무섭지 않으셨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냥 저희와 똑같은 분인데 다만 외적으로 좀 다르다 정도였어요. 그래도 환자들 속에 있으면 공기가 좀 탁하긴 했어요. 상처가 많고 그러니깐. 당시엔 모기가 너무 많아서 창문도 닫아놨거든요. 그분들은 우리가 도와줘서 고마우니깐 음식 같은 것도 막 갖다 줘요. 잘 안 씻은 그릇에 음식 가득 담아서 '이거 먹어봐'하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면 못 먹겠지만 '설마 병에 걸리겠어'하며 먹었죠. 그런 거 거절하면 상처받으시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요?
"완전 병아리 수녀일 때예요. 한 환자 상태가 심각했어요. 맹장 수술까지 하셔야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야말로 죽을 날만 기다리시는 거였죠. 당시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을 때예요. 이 환자가 너무 덥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부채를 들고 부쳐 드렸어요. 그렇게 계속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저도 너무 덥고 힘들고 손이 잘 안 흔들어지더라고요. 그렇게 그날 밤 자정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그 환자가 저를 쳐다보면서 다른 말 없이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돌아가셨어요. 그 말투와 표정이 안 잊혀요. 혼자 죽지 않게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거였어요. 부채질하는 건 아주 작은 행동이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함께 있어줬다는 자체를 너무 고마워하셨어요. 지금도 안 잊혀요."
―가장 힘들었을 때는요.
"약이 없어서 한센인들 치료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더 안타까웠던 건 한센인과 닿기만 해도 전염되는 줄 아는 사람들의 편견이었어요. 당시 한센인 자녀들은 부모가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못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입학할 수 있는 초등학교 분교를 세우고 살레시오회 야학에 입학도 시켰어요. 그렇게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120여 명이에요."
몽당연필에도 신의 은총이
사는 곳은 성당 옆방 두 칸짜리 작은 집이다. 동료 수녀와 함께 산다. 강 수녀의 통장 잔고는 매년 연말이 되면 0원이 된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건 3㎝도 안 되는 '몽당연필'. 잡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것을 능숙하게 잡아 글을 썼다.
―그 연필은 버려도 되지 않나요?
"그냥 버리는 게 아까워서. 이렇게 쓰다 보면 잘 써지거든요. 다들 각자가 자기의 형태, 은총을 갖고 있으니깐요. 세상에 버려도 되는 것, 못 쓰는 것은 없어요. 꽃도, 인간도. 모든 건 다 사는 데 도움이 돼요."
―강칼라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게 됐나요?
"오빠 세례명이 카를로(Carlo)예요. 저는 여성이어서 '카를라'라고 했는데, 이곳 분들이 편하게 부르시다가 '칼라'가 됐어요. 강씨는 한 환자가 자기 성을 받아달라고 해서 받았어요. 그분이 그때 자녀가 없었거든요. 이전 다른 수녀 분들께도 부탁했는데 다들 안 들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이탈리아에서 '강'은 '개'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전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 성을 받고 나서 그분도 기적처럼 딸을 얻었죠. 그 아이의 이름은 제 이름을 따서 지었어요. 지금은 훌륭한 아기 엄마가 됐지요."
―사 남매 중 세 명이 종교인의 길을 걸었는데요.
"어머니가 '바르게 살아라. 나누는 삶을 살아라. 정성을 다해 살아라'라는 가르침을 많이 주셨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애들이 많으니깐 입은 옷은 빨래통에 내놔야 했는데, 아직 어리니깐 잘 안 지키잖아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랬어요. '옷을 내놓기 싫으면 차라리 그대로 놔둬라. 놔두는 것도 정성스럽게 놔둬라. 그러면 엄마가 치울 것이다. 만약 바깥에 내놓고 싶으면 정성스럽게 밖에 내놔라.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정성스럽게 해라.' 작은 일 하나를 하더라도 마음을 다하라는 가르침이셨죠."
―세속의 삶이 아쉽지는 않나요?
"여동생은 의사 선생님이에요. 그 삶이 부럽지는 않았어요. 다만 나이가 마흔이 넘었을 때 진짜 내 가족을 꾸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러나 제가 결혼을 했으면 한 가족을 위해 살았겠지만, 수녀가 됐으니 모든 가족을 위해 살 수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서 이탈리아에 갔는데 버스를 타다가 학창 시절 좋아했던 남자와 마주치게 됐어요. 어른이 돼 보니 예전만큼 그 마음이 생기진 않더라고요. '수녀 되길 잘했다' 했죠(웃음)."
―고향이 그리울 땐 없나요?
"솔직히 그렇게 그립지는 않아요. 음식 같은 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요. 살라미 같은 거. 그래서 이탈리아 가는 사람들 있으면 살라미나 커피를 부탁해요. 그 마음을 아니깐 이탈리아에 가는 수녀들에게는 한국 수녀들 주라고 김치랑 장류, 반찬 같은 거 챙겨 보내요. 한번은 친언니가 한국에 왔었는데, 언니 편으로 고추장이랑 김치랑 싸서 보냈어요."
―한국에 바라시는 건요.
"한국은 정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했어요. 너무 급속히 발전하다 보니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도 옛날 풍습 같은 걸 버리려고 할 때도 많고. 은 건 살리면서 조화를 이뤘으면 좋겠어요."
강 수녀는 지난 50년 동안 한센인과 도시 빈민, 노약자들을 돌봤다. 정작 자신의 건강은 살피지 못했다. 양쪽 무릎에는 인공관절 수술 자리가 남아 있고 발은 류머티즘으로 뒤틀렸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들 병원은 자주 가시나요.
"한 달에 한 번 정도 다 같이 모여서 가요. 나이가 들면 조금씩 아파요.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전 70대니 젊은 할머니죠. 다들 82세, 84세 그래요. 그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외로운 걸 더 힘들어해요.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멀리 살거든요.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게 큰 위로가 돼요. 같이 병원에 가고, 불안할 때 누가 옆에 있고. 나이가 들면 다 아기가 돼요. 이렇게 같이 생활하던 분이 아홉 분이었는데, 지금은 두 분 돌아가셔서 일곱 분이에요."
―저를 데려다 준 택시 기사는 수녀님 대신 할머니라고 부르시더라고요.
"뭐든 내세우지 않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상대방을 몰라도 그들이 날 보고 '감사합니다'라고 미소를 지으면, 나도 똑같이 '감사합니다' 하게 되잖아요. 이런 게 응답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저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대로 드리는 것뿐이에요. 어릴 땐 어머니께, 한국에 와서는 한국인들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 사랑을 다시 돌려드리는 거죠."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요?
"아침 5시 30분 일어나서 기도하고, 8시에 일을 시작해요. 할머니들 병원도 모시고, 장날에는 시장도 가고. 성당 주변 꽃밭 등도 가꾸고, 성당과 피정(避靜)의 집 청소도 하고, 미사도 올리고. 그러다 보면 시간 금방 가죠. 잠은 늦게 자요. 밤 12시 30분쯤.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밤에 하는 편이에요. 그 외에도 손빨래하고, 할머니들 은행일 돕고, 같이 도자기 만들기도 하고,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창문 만들기도 하고."
강 수녀가 한국에 온 건 1968년 10월 20일.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한국에서 살고 있다. 2009년에는 영주권을 신청해 받기도 했다. 올해 지방선거에서는 처음으로 투표권을 받았다.
―한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나요?
"전 이탈리아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 고아들을 돌보고 있었어요. 그러다 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한 수녀가 귀국하는데, 같이 한국에 갈 사람들을 찾았어요. 한국은 전쟁 직후라 고아도 많고 한센병 환자도 많아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자원해 오게 됐어요."
―첫인상은 어땠나요?
"제가 멀미를 엄청 했던 기억이 나요. 그땐 비행기로 나흘 걸렸거든요. 환승만 로마·방콕·홍콩에서 세 번을 했으니. 비행기에서 내리니 다들 너무 작았어요. 건물도 작고, 산도 작고. 그땐 거의 1층 건물이었으니깐요."
―한국이 많이 가난했을 때지요.
"전기가 없어서 호롱불 켜놓고 일했어요. 수도도 없어 우물물로 생활했고. 이탈리아에서 파견 오기 전에 '환자가 많은 곳에서 수도꼭지를 틀 때는 손을 사용하지 말고 팔꿈치를 사용하라' 같은 위생 교육을 받았어요. 그런데 오니깐 우물을 사용하더라고요(웃음)."
―한센병 환자는 한국서 처음 본 건가요?
"교육받을 때 사진으로는 많이 봤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어요."
―무섭지 않으셨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그냥 저희와 똑같은 분인데 다만 외적으로 좀 다르다 정도였어요. 그래도 환자들 속에 있으면 공기가 좀 탁하긴 했어요. 상처가 많고 그러니깐. 당시엔 모기가 너무 많아서 창문도 닫아놨거든요. 그분들은 우리가 도와줘서 고마우니깐 음식 같은 것도 막 갖다 줘요. 잘 안 씻은 그릇에 음식 가득 담아서 '이거 먹어봐'하고.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면 못 먹겠지만 '설마 병에 걸리겠어'하며 먹었죠. 그런 거 거절하면 상처받으시거든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요?
"완전 병아리 수녀일 때예요. 한 환자 상태가 심각했어요. 맹장 수술까지 하셔야 했는데, 잘 안 됐어요. 그야말로 죽을 날만 기다리시는 거였죠. 당시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을 때예요. 이 환자가 너무 덥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부채를 들고 부쳐 드렸어요. 그렇게 계속 부채질을 하고 있으니 팔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저도 너무 덥고 힘들고 손이 잘 안 흔들어지더라고요. 그렇게 그날 밤 자정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그 환자가 저를 쳐다보면서 다른 말 없이 '감사합니다'라고 했어요. 그리고 돌아가셨어요. 그 말투와 표정이 안 잊혀요. 혼자 죽지 않게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는 거였어요. 부채질하는 건 아주 작은 행동이거든요. 그런데 그분은 함께 있어줬다는 자체를 너무 고마워하셨어요. 지금도 안 잊혀요."
―가장 힘들었을 때는요.
"약이 없어서 한센인들 치료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더 안타까웠던 건 한센인과 닿기만 해도 전염되는 줄 아는 사람들의 편견이었어요. 당시 한센인 자녀들은 부모가 한센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 못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입학할 수 있는 초등학교 분교를 세우고 살레시오회 야학에 입학도 시켰어요. 그렇게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120여 명이에요."
몽당연필에도 신의 은총이
사는 곳은 성당 옆방 두 칸짜리 작은 집이다. 동료 수녀와 함께 산다. 강 수녀의 통장 잔고는 매년 연말이 되면 0원이 된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건 3㎝도 안 되는 '몽당연필'. 잡기도 힘들어 보이는 그것을 능숙하게 잡아 글을 썼다.
―그 연필은 버려도 되지 않나요?
"그냥 버리는 게 아까워서. 이렇게 쓰다 보면 잘 써지거든요. 다들 각자가 자기의 형태, 은총을 갖고 있으니깐요. 세상에 버려도 되는 것, 못 쓰는 것은 없어요. 꽃도, 인간도. 모든 건 다 사는 데 도움이 돼요."
―강칼라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게 됐나요?
"오빠 세례명이 카를로(Carlo)예요. 저는 여성이어서 '카를라'라고 했는데, 이곳 분들이 편하게 부르시다가 '칼라'가 됐어요. 강씨는 한 환자가 자기 성을 받아달라고 해서 받았어요. 그분이 그때 자녀가 없었거든요. 이전 다른 수녀 분들께도 부탁했는데 다들 안 들어주셨다고 하더라고요. 이탈리아에서 '강'은 '개'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전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 성을 받고 나서 그분도 기적처럼 딸을 얻었죠. 그 아이의 이름은 제 이름을 따서 지었어요. 지금은 훌륭한 아기 엄마가 됐지요."
―사 남매 중 세 명이 종교인의 길을 걸었는데요.
"어머니가 '바르게 살아라. 나누는 삶을 살아라. 정성을 다해 살아라'라는 가르침을 많이 주셨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애들이 많으니깐 입은 옷은 빨래통에 내놔야 했는데, 아직 어리니깐 잘 안 지키잖아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그랬어요. '옷을 내놓기 싫으면 차라리 그대로 놔둬라. 놔두는 것도 정성스럽게 놔둬라. 그러면 엄마가 치울 것이다. 만약 바깥에 내놓고 싶으면 정성스럽게 밖에 내놔라.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정성스럽게 해라.' 작은 일 하나를 하더라도 마음을 다하라는 가르침이셨죠."
―세속의 삶이 아쉽지는 않나요?
"여동생은 의사 선생님이에요. 그 삶이 부럽지는 않았어요. 다만 나이가 마흔이 넘었을 때 진짜 내 가족을 꾸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러나 제가 결혼을 했으면 한 가족을 위해 살았겠지만, 수녀가 됐으니 모든 가족을 위해 살 수 있잖아요. 나이가 들어서 이탈리아에 갔는데 버스를 타다가 학창 시절 좋아했던 남자와 마주치게 됐어요. 어른이 돼 보니 예전만큼 그 마음이 생기진 않더라고요. '수녀 되길 잘했다' 했죠(웃음)."
―고향이 그리울 땐 없나요?
"솔직히 그렇게 그립지는 않아요. 음식 같은 건 가끔 생각날 때가 있어요. 살라미 같은 거. 그래서 이탈리아 가는 사람들 있으면 살라미나 커피를 부탁해요. 그 마음을 아니깐 이탈리아에 가는 수녀들에게는 한국 수녀들 주라고 김치랑 장류, 반찬 같은 거 챙겨 보내요. 한번은 친언니가 한국에 왔었는데, 언니 편으로 고추장이랑 김치랑 싸서 보냈어요."
―한국에 바라시는 건요.
"한국은 정말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발전했어요. 너무 급속히 발전하다 보니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젊은 사람들도 옛날 풍습 같은 걸 버리려고 할 때도 많고. 은 건 살리면서 조화를 이뤘으면 좋겠어요."
강 수녀는 지난 50년 동안 한센인과 도시 빈민, 노약자들을 돌봤다. 정작 자신의 건강은 살피지 못했다. 양쪽 무릎에는 인공관절 수술 자리가 남아 있고 발은 류머티즘으로 뒤틀렸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