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06.21 03:01
9층 규모 높이 27m 추정되지만 탑 구조 알 수 없어 6층까지 복원
1층 해체 당시 유물 1만점 나와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왕이 된 백제의 서동(무왕)이 고향인 익산을 행차하다 연못에서 나타난 미륵 삼존을 위해 지었다는 절. 그곳엔 '동아시아 최대 규모 석탑'이라는 미륵사지석탑이 있다. 거대한 규모의 위용을 자랑하는 이 탑의 지붕돌 처마 끝이 살포시 올라간 자태를 시인 신동엽은 '탑날개'라 노래했다. 한국 석탑의 원형(原型)과도 같은 미륵사지석탑(국보 11호)이, 몸의 절반을 짓눌렀던 콘크리트의 더께를 벗고 20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진정성' 살려 6층까지만 복원
20일 전북 익산 미륵사지. 6층 빌딩 규모의 가설덧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7세기 백제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시가 생겼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 듯한 거대한 탑. 자세히 보니 세월의 때가 묻은 옛 탑의 부재들이 곳곳에 보인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단장은 "옛 부재와 새 부재의 비율이 65대 35 정도 된다. 남아 있는 옛 부재 중 81%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진정성' 살려 6층까지만 복원
20일 전북 익산 미륵사지. 6층 빌딩 규모의 가설덧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7세기 백제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착시가 생겼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 듯한 거대한 탑. 자세히 보니 세월의 때가 묻은 옛 탑의 부재들이 곳곳에 보인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단장은 "옛 부재와 새 부재의 비율이 65대 35 정도 된다. 남아 있는 옛 부재 중 81%를 활용했다"고 말했다.
'국내 최장기 단일 문화재 수리'라는 기록을 세운 미륵사지석탑이 보수를 마친 뒤 첫 모습을 공개한 현장. 1998년 구조안전진단에서 '불안정' 판단을 받은 이 탑은 부재를 모두 들어내는 해체 조사와 구조 보강, 보존 처리를 거쳐 최종 정비된 모습을 선보였다. 사업비는 230억원으로 숭례문(250억원)에 이어 둘째다.
9층 규모에 높이 27m에 이르는 원래의 탑이 될 것이란 추측과 달리, 복원된 석탑은 해체 직전까지 남아 있던 6층 규모 그대로였다. 1층과 2층, 기단부와 계단만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 일부가 무너져 내린 3~6층은 훼손 부분에 돌을 쌓아 경사면으로 처리했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7층 이상의 탑 구조를 알 수 없는 데다, 만약 새로 탑을 쌓는다면 옛 부재가 하중을 견디지 못할 것을 고려한 결과"라고 했다. 당초 '6층 완전 복원안' '9층 복원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으나 유물의 진정성을 위해 '6층 부분 복원'을 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일제 콘크리트 걷어내는 데만 3년
미륵사지석탑은 서기 639년(백제 무왕 40년)에 건립됐다. 대형 목탑 양쪽에 동탑과 서탑이 있는 구조였으나, 20세기 초에 이르면 목탑과 동탑은 사라지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1915년 일제는 붕괴된 곳에 콘크리트를 바르는 응급 보수를 했고, 이 모습이 2001년까지 유지됐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을 거쳐 2002년 본격 해체에 들어간 뒤, 185t의 콘크리트를 정으로 하나하나 깨 걷어내는 데만 3년이 걸렸다. 1층을 해체하던 2009년 1월엔 탑을 만들 때 안치한 사리장엄구 등 1만 점에 가까운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 금제사리봉영기에는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리 과정은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었다. 목탑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석탑이었고, 적심(탑 내부 빈 공간에 흙이나 돌 등을 채워넣은 것)과 치장석이 이원화된 백제 특유의 기술이 확인됐다. 석조 부재를 접합할 때 절단면의 0.33%를 티타늄 봉으로 잇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터득했다. 배병선 단장은 "미륵사지석탑 수리 덕에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 배워 갈 정도로 석조문화재 수리 기술이 향상됐다"고 했다. 새 부재는 익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의 일종인 황등석을 썼는데, 훼손이 심한 옥개석(지붕돌) 받침돌에 많이 사용 됐다.
세척, 구조 보강, 색 맞춤 등의 작업을 거쳐 마침내 복원된 미륵사지석탑의 높이는 14.5m, 폭 12.5m, 무게는 1830t. 부재는 모두 1627개로, 경주 석가탑의 부재가 48개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다. 문화재청은 덧집을 철거한 뒤 12월부터 미륵사지석탑을 일반 공개할 예정이며, 건립 1380주년에 맞춰 내년 3월 12일 준공식을 연다
9층 규모에 높이 27m에 이르는 원래의 탑이 될 것이란 추측과 달리, 복원된 석탑은 해체 직전까지 남아 있던 6층 규모 그대로였다. 1층과 2층, 기단부와 계단만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고 일부가 무너져 내린 3~6층은 훼손 부분에 돌을 쌓아 경사면으로 처리했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7층 이상의 탑 구조를 알 수 없는 데다, 만약 새로 탑을 쌓는다면 옛 부재가 하중을 견디지 못할 것을 고려한 결과"라고 했다. 당초 '6층 완전 복원안' '9층 복원안'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으나 유물의 진정성을 위해 '6층 부분 복원'을 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일제 콘크리트 걷어내는 데만 3년
미륵사지석탑은 서기 639년(백제 무왕 40년)에 건립됐다. 대형 목탑 양쪽에 동탑과 서탑이 있는 구조였으나, 20세기 초에 이르면 목탑과 동탑은 사라지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일부분이 무너져 내린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1915년 일제는 붕괴된 곳에 콘크리트를 바르는 응급 보수를 했고, 이 모습이 2001년까지 유지됐다.
1998년 구조안전진단을 거쳐 2002년 본격 해체에 들어간 뒤, 185t의 콘크리트를 정으로 하나하나 깨 걷어내는 데만 3년이 걸렸다. 1층을 해체하던 2009년 1월엔 탑을 만들 때 안치한 사리장엄구 등 1만 점에 가까운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 금제사리봉영기에는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적혀 있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수리 과정은 새로운 발견의 연속이었다. 목탑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석탑이었고, 적심(탑 내부 빈 공간에 흙이나 돌 등을 채워넣은 것)과 치장석이 이원화된 백제 특유의 기술이 확인됐다. 석조 부재를 접합할 때 절단면의 0.33%를 티타늄 봉으로 잇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터득했다. 배병선 단장은 "미륵사지석탑 수리 덕에 태국이나 캄보디아에서 배워 갈 정도로 석조문화재 수리 기술이 향상됐다"고 했다. 새 부재는 익산에서 채취한 화강암의 일종인 황등석을 썼는데, 훼손이 심한 옥개석(지붕돌) 받침돌에 많이 사용 됐다.
세척, 구조 보강, 색 맞춤 등의 작업을 거쳐 마침내 복원된 미륵사지석탑의 높이는 14.5m, 폭 12.5m, 무게는 1830t. 부재는 모두 1627개로, 경주 석가탑의 부재가 48개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규모다. 문화재청은 덧집을 철거한 뒤 12월부터 미륵사지석탑을 일반 공개할 예정이며, 건립 1380주년에 맞춰 내년 3월 12일 준공식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