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https://image.chosun.com/sitedata/image/202002/06/2020020604067_0.jpg)
인류의 적 천연두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청정 지대에 유입된 천연두는 끔찍한 치사율과 후유증으로 일본인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일본의 전통 의학으로는 천연두를 치료할 수 없었고, 천연두는 포창신(疱瘡神)이 들러붙은 것으로 여겨져 붉은 천을 내걸고 귀신이 물러가도록 비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유럽은 1798년 제너의 우두법 개발로 천연두를 퇴치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고, 이러한 서양 사정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1774년 서양 해부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 발간 이후 일본 의사들은 서양 의학 수준에 큰 충격을 받고 있던 터였다.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던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는 소식은 일본 의사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19세기 들어 일본 의사들 사이에서 종두법 도입이 모색된다. 1849년 네덜란드 의사 모니케와 사가(佐賀)번 의사들이 최초로 우두 접종에 성공하자 종두법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된다. 종두법 보급에 앞장선 사가 번의(藩醫) 이토 겐보쿠(伊東玄朴)가 1858년 쇼군 어의(御醫)로 스카우트되면서 서양 의학의 존재감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토가 설립을 주도한 에도(江戶) 종두소가 화재로 불탔을 때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실업가 하마구치 고료(濱口梧陵)는 거액을 쾌척하여 재건을 돕는다. 하마구치는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 방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서양 의학이 괴질(怪疾) 퇴치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믿었다. 이후 에도 종두소는 막부 직할 의학소로 승격되어 근대 의학 교육의 산실이 된다. 도쿄대 의학부도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두법의 보급은 일본에서 서양 의학이 주류로 자리 잡고 나아가 서양 문명이 새로이 인식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신이나 주술에서 벗어나 과학과 실증을 수용하여 치명적 역병(疫病)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경험이 일본 근대화의 시동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은 1798년 제너의 우두법 개발로 천연두를 퇴치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고, 이러한 서양 사정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을 통해 일본에도 전해지고 있었다. 1774년 서양 해부학서를 번역한 '해체신서(解體新書)' 발간 이후 일본 의사들은 서양 의학 수준에 큰 충격을 받고 있던 터였다. 천형(天刑)으로 여겨지던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는 소식은 일본 의사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19세기 들어 일본 의사들 사이에서 종두법 도입이 모색된다. 1849년 네덜란드 의사 모니케와 사가(佐賀)번 의사들이 최초로 우두 접종에 성공하자 종두법은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된다. 종두법 보급에 앞장선 사가 번의(藩醫) 이토 겐보쿠(伊東玄朴)가 1858년 쇼군 어의(御醫)로 스카우트되면서 서양 의학의 존재감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토가 설립을 주도한 에도(江戶) 종두소가 화재로 불탔을 때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실업가 하마구치 고료(濱口梧陵)는 거액을 쾌척하여 재건을 돕는다. 하마구치는 당시 유행하던 콜레라 방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서양 의학이 괴질(怪疾) 퇴치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믿었다. 이후 에도 종두소는 막부 직할 의학소로 승격되어 근대 의학 교육의 산실이 된다. 도쿄대 의학부도 이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종두법의 보급은 일본에서 서양 의학이 주류로 자리 잡고 나아가 서양 문명이 새로이 인식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신이나 주술에서 벗어나 과학과 실증을 수용하여 치명적 역병(疫病)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경험이 일본 근대화의 시동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